1954년 4월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의 아일랜드 출신 피.제.맥그린치 신부님은 제2의 고향이 된 제주도에 발을 딛게 되었다.당시 제주 도민들은 보리나 조 농사를 짓거나 해녀들이 바다에서 잡아들이는 해산물을 팔아 살아갔지만,
값이 얼마 나가지 않아 살림이 매우 어려웠다.
일본의 식민지, 또한 1948년 4.3 , 그리고 전쟁이 휩쓸고 간 그 당시의 제주는 절망의 땅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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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는 사람들을 보며 신부님은 생산적인 일을 벌여 제주 사람들에게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 해
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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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물질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길을
터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 시절에 신부님이 눈을 돌린 곳은 한라산 중산간의 넓은 평원이었다. 제주도는 한라산과 해안사이에 넓은 벌판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그 벌판은 돌보는
사람이 없어 말이나 소의 방목지 정도로 이용되고 있을 뿐 황무지로 내버려지고 있었다. |
신부님은 이따금씩 중산간 지역에 올라갔다가 보았던 사막처럼 넓은
황무지가 개간만 하면 훌륭한 목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목축을 통한 제주의 가난구제가 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신부님의 고향 아일랜드 도네골에서 수의사인 아버지와 형, 삼촌들이
깊은 땅속에서 흙을 파내어 자갈밭에 깔고 목초를 가꾸어 소와 양의
사료를 길러내는 것을 본 기억을 떠올리며, 신부님은 제주도의 자연환경이 도네골보다도 좋기 때문에 목축업이야 말로 한번 펼쳐볼 만한
사업이라는 생각을 굳혔다. 그러던 중 우여곡절 끝에 정물이라 불리던 곳에서 돼지를 기르기 시작했다. 그곳은 군인들이 주둔하던 막사가 있어, 우선 판자와 가마니로 지붕을 만들고 돼지를 들여놓았다.
그리고 1961년 11월 성이시돌 중앙 실습목장이라는 간판을 달았다. 이시돌은 중세 스페인의 농부로서 후에 가톨릭 교회 농민의 주보성인이 된 분이다. 신부님은 목장의 이름을 이시돌이라 붙이면서 하느님께서 함께 해 주시리라
믿었다. 당시에는 땅값이 아주 싸서 적은 돈으로 많은 땅을 살 수 있었고, 신부님은 또한, 고향 아일랜드 신자들에게 모금활동을 펴서 처음
사업자금이 마련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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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는 당시 제주 도민보다도 가난한 신자들이 선뜻 주머니 돈을
내놓았고, 조금씩 모인 돈이 이시돌의 발판을 이루었다. 신부님과 목장 초기의 개척자들은 열심히 돌밭을 일구어 밭을 만들고, 목초 씨를
뿌렸다. 성공적으로 목장을 만드는 것이 가난을 몰아내고 제주도를
잘 사는 섬으로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을 한
것이다. 그 결과 목장은 튼튼히 자리를 잡아 나갔다.
1962년 목장이 어느 정도 기틀을 잡자 신부님은 이시돌 농촌 산업 개발 협회를 설립하였다. 이시돌을 통해 가난을 몰아내고 제주도를 변화시키고, 번영하는 제주를 만드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야 겠다는 생각으로 비영리 사업인 이시돌 협회를 조직한 것이다. 양을 키우고, 양털을 이용해 털실을 자아서 각종 양모 제품을 생산하는 한림수직, 값싸고 질 좋은 사료를 낙농가에 보급하기 위해 사료공장을 운영하며, 다방면으로 실제적인 사업을 펼치었다. 또한 목장에 가축이
늘어나고 물이 많이 필요하게 되자 한라산 기슭 서북쪽의 어승생에서부터 18km나되는 먼 거리에 수도관을 묻었다. 맥그린치신부님은 늘
제주도의 낙농업을 발전시켜 유럽의 아일랜드나 덴마크처럼 잘사는
농촌을 만들어 사람들이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평화를 맛보며 살아가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신부님의 생각은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소들의 방목지로나
쓰였던 한라산 중턱의 너른 벌판에 하나씩 둘씩 목장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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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돈을 벌려고 제주도에 온 것이 아닙니다. 제주도 사람들이 잘 사는 모습을 보는 것이 내 소원입니다. 나는 제주도에 목축업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밑거름이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이시돌협회를 만들었습니다.......성 빈첸시오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며 일생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돈보스코는 어린이들이 가지고있는 재주를
교육을 통해 이끌어내는 일을 하셨습니다.
나는 목축을 통해 제주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스스로 잘사는 방법을 터득하도록 노력했습니다. |
주님은 우리들에게'네 이웃을 네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목축을 통해 제주사람들을 사랑하는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앞으로
나는 눈을 감을 때까지 이시돌 목장을 통해 제주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주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 나는 편히 지내기 위해서 신부가
된 것이 아니며, 한국에 온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한국에 거름이 되기
위해서 왔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까지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나는 비록 작은 힘이지만 거름이 되어서 제주도를 위해
몸을 바치려 합니다. 내가 제주도의 축산업을 위해 애를 써서 제주도의 살림살이가 나아진다면 더 큰 고생이라도 하겠습니다. 그것이 제주도를 위하는 일이고, 주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이시돌 협회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통해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한다면 그 이상
바랄게 있겠습니까?"
신부님이 전개하신 사업은 그 목적이 단순히 사업의 전개가 아니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방법으로 여러 가지 사업을 펼쳤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가난을 몰아내고 삶의 희망을 주는 것을 통해 영혼의 구원을 위해 노력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때 백만 마리까지 목표했던 면양, 동양 최대의 돼지목장, 치즈. 우유공장, 수천 마리나 되던 소
떼로 해질 무렵 행렬이 끝이 없이 이어지던 모습이 장관을 이루었다는 이시돌 목장의 세월을 뒤로한 채, 시대의 변천과 더불어 새로운 모습으로 적지 않은 탈바꿈을 하고 있는 목장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그
모든 사업의 궁극적 목적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이웃사랑에 대한 도구로서 오늘도 운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