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동남쪽으로 26킬로미터, 성남시에서 북동쪽으로 6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남한산 위에 자리 잡고 있는 남한산성은 편리한 교통과 수려한 경관으로 주말 등산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산성 내 중턱에 있는 로터리까지 널찍한 도로가 열리고 자가용은 물론 좌석 직행버스가 통행하면서부터는 평일 아침에도 가벼운 차림으로 남한산을 찾는 사람들이 자주 눈에 띈다. 더욱이 도로 양편으로는 깨끗하게 지어 놓은 기념관이나 전시장들이 들어서 있고 산채, 자라탕, 메기탕 등 특산물을 파는 식당이나 숙소들도 충분해 찾는 이들은 조금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울긋불긋한 옷차림을 하고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오가는 사람들 중에, 오직 천주를 섬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수많은 신앙 선조들이 바로 여기서 처참하게 처형됐다는 역사적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서늘한 산공기를 마시며 오르는 즐거운 산행길 곳곳에는 순교자들의 굳센 믿음과 꿋꿋한 결의가 서려 있다. 남한산성은 병자 호란(1839년) 이후 처형터가 있어 기해박해(1839년)와 병인박해(1866년) 당시 광주(廣州) 일원, 양주(楊洲), 용인(龍仁), 이천(利川)에서 잡혀 온 교우들이 치명, 순교한 곳이다.
원래 남한산성이 위치한 자리는 신라 문무왕(661-681년)이 쌓은 주장성(일명 일장산성)의 옛터로 그 후 몇 차례 축조가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남한산성은 조선 인조 2년(1624년) 때 크게 고쳐 지은 것으로 후금국의 위협과 이괄의 난을 계기로 2년간에 걸쳐 축성됐다고 한다.
성의 둘레는 약 8킬로미터에 달하고 높이는 7.3미터가량이다. 동서남북 4군데에 문루가 있고 역시 4방위에 각각 장대(將臺: 옛날에 장수가 올라서서 명령, 지휘하던 대)가 있었는데 현재는 수어 장대(守禦將臺)만이 남아 있다. 또 원래 9개의 절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지금은 장경사만 남아 있다.
남한산성으로 들어서는 길은 두 군데로, 서쪽으로는 성남 방면, 동쪽으로는 경기도 광주 방면으로 연결된다. 치명 터가 동문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순례객들은 동문으로 들어서야 한다. 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을 경우 서문으로 와서 로터리를 거쳐 동문으로 빠져 나오는 길도 가능하다. 사실 대중 교통 편은 성남 방면이 더 노선이 많다.
새로 복원돼 깔끔하고 세련된 모습을 자랑하는 남한산성 입구 정문을 지나면 동문이 나온다. 동문 오른쪽으로는 산비탈을 거슬러 올라가며 육중한 성벽이 위용을 자랑한다. 동문을 지나 몇 걸음을 옮기면 오른쪽으로 도랑 건너편에 '천주교 순교 성지'라는 철제 푯말이 서 있다. 여기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곳은 서기 1791년 신해(辛亥), 1801년 신유(辛酉), 1839년 기해(己亥), 1866년 병인(丙寅) 네 차례에 걸쳐 한덕운, 김덕심, 정은 등을 위시하여 70명 이상(실순교자 2-3백 명으로 추산)순교한 곳임."
순교 성지의 이정표를 본 순례객들은 바로 이곳이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막 지나온 동문을 통해 신앙 선조들은 오랏줄에 묶여서 살아서 들어왔지만 혹독한 고문 끝에 결국은 시체가 되어 성 밖으로 던져졌다.
더욱이 살아서 동문을 들어온 이들은 죽어서는 물이 빠지는 구멍으로 성 밑에 파놓은 수구문을 통해 내팽개쳐졌다. 그래서 수구문(水口門)은 시구문(屍口門)이 됐고 이곳으로 흘러내리던 물도 핏물이 됐으며 동문 밖 계곡에는 시신이 쌓였다.
시구문은 동문을 바라보며 왼쪽 길 바로 밑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얼핏 보면 잘 알 수 없고 얼기설기 철조망으로 가려 놓은 밑으로 잘 들여다보면 어른 두어 명이 허리를 굽히고 다닐 만한 크기의 사각진 구멍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옆길로 돌아 비탈길을 내려서 시구문 바깥쪽으로 내려서면 마치 당시의 처참한 광경이 눈에 보이는 듯 선하고 그 험한 고통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 내고야 말았던 선조들의 굳은 신앙이 메아리 치는 듯하다.
동문의 애달픈 이야기를 뒤로 하고 비탈을 따라 1킬로미터 정도 걸어 올라가면 남한산성 로터리가 나온다. 로터리는 북문과 서문, 남문으로 가는 길이 교차하는 지점으로 계절이나 날씨에 따라 적절한 코스를 선택할 수 있다. 좌석 직행 버스가 성남이나 광주 쪽에서 로터리까지 올라오기 때문에 승용차를 이용하지 않더라도 쉽게 성을 둘러볼 수 있다.
이 로터리에 천주교도들을 수감했던 옥 터와 처형 터가 있다. 동문 쪽에서 올라오면서 로터리에 도착하면 오른쪽에 있는 주차장이 옥 터로 추정된다. 정면에는 섭정 10년간 2만여 명의 천주교인을 학살한 것으로 전해지는 대원군의 영세 불망비(永世不忘碑)가 세워져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일러 주는 듯하다. 어느 사찰 승려들이 세워 준 것으로 전해지는 불망비와 마주한 곳이 바로 처형지였다고 교회사가들은 전한다. 여기서 처형된 교우들이 시체가 되어 산비탈로 질질 끌려 내려가 동문 밖 개울로 던져졌다.
당시의 슬픈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터리에는 산행 나온 사람들의 즐거운 목소리가 가득하고 처형 터에 연이어 늘어서 있는 식당에서는 오랜만에 특미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한가롭다.
경기 도립 공원인 남한산성은 수림과 유적 기념관 등이 잘 정리돼 있다. 수어 장대, 숭열전, 청량당, 현절사, 침괘정, 연무관 등은 경기도 유형 문화재 1호부터 6호까지로 지정돼 있으며 본성 축성 당시 창건한 성내 9개 절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장경사와 병자호란 기록화 전시장 등도 한번 둘러볼 만한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구산, 단내에서 남한산성으로 이어진 순교
호국(護國)과 호교(護敎)를 위한 몸부림이 배어 있는 남한산성(광주군 중부면 산성리)은 하남시 서부 성당에서 사적지 조성을 위해 힘을 쓰고 있는 곳이다.
이곳의 첫 번째 애환은 1636년 12월 14일, 청나라의 침입을 받아 한양이 위태롭게 되자 인조가 세자와 백관들을 대동하고 피난해 오면서 시작되었다. 인조는 이곳에서 40여 일을 수성하였지만, 모든 사정이 악화되자 결국 이듬해 1월 30일 백관과 군사들의 호곡 소리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성문을 열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후 조선에서는 청나라와 굴욕의 맹약을 맺은 삼전도에 세워진 청나라 태종의 송덕비를 가리켜 '치욕의 비' 또는 '한(汗)의 비'라 불렀으니, 이것은 곧 '호국의 몸부림'이었다.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1839년의 박해 때 남한산성에서는 두 번째 애환이 있게 되었으니, 이것은 바로 '호교를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이 몸부림은 천상의 승리로 결실을 맺게 되었고, 신앙인들의 노래는 훗날까지도 이어져 남한산성 한 모퉁이를 치명터로 만들었다. 당시 이곳이 치명터가 된 이유는, 1626년에 산성리가 형성되고 1795년부터 광주 유수가 성안에 거처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 광주 일대에서 체포된 수많은 신자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모진 형벌을 받으면서 배교를 강요당했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세속의 모든 부귀와 육신의 고통을 버려야만 했다.
남한산성에서 맨 먼저 호교의 노래를 부른 이는 광주 의일리(현 의왕시 학의동)에 살다가 1801년에 체포되어 동문 밖에서 참수된 한덕운(韓德運, 토마스)이다. 그 뒤를 이어 광주의 거북뫼 곧 구산(현 하남시 망월동) 출신인 김만집(金萬集, 아우구스티노)이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1842년 초에 남한산성 옥중에서 "진실한 통회와 애덕의 정을 지닌 채" 순교하였다.
한편 김만집의 형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 성인은 이때 포도청과 형조에서 수많은 형벌을 받은 뒤 1841년에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며, 셋째인 김문집(金文集, 베드로)은 김만집과 함께 체포되어 남한산성으로 끌려가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하다가 1858년경에 석방되었다. 이곳 남한산성에서 다시 순교자가 탄생한 것은 1866년의 병인박해 때였다.
바로 그 해 겨울 이천 단내(이천시 호법면 단천리)에 거주하던 정은(바오로)도 63세의 나이로 체포되어 재종손 정 베드로와 함께 1866년 12월 8일 남한산성에서 순교하였다. 당시 남한산성의 광주 유수가 그들에게 내린 사형은 일명 도배형 또는 도모지(塗貌紙)라고 부르던 백지사(白紙死)였다. 이 형벌은 먼저 팔과 양다리를 뒤로 하여 나무에 결박하고, 여기에 풀어헤친 상투를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한 다음 얼굴에 물을 뿌리고 창호지를 한 장씩 겹쳐 나감으로써 숨이 막혀 죽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이렇게 순교한 정은의 시신은 동문 밖에 짐승의 먹이로 버려졌다가 가족들에 의해 어렵게 거두어져 단내에 안장되었다.
박해자의 손길은 얼마 되지 않아 이미 교우촌으로 알려져 있던 구산에 뻗혔다. 이내 김문집(베드로)을 비롯하여 집안의 어른 남자들이 모두 체포되었고, 남한산성으로 끌려가 문초를 받게 되었다. 당시 김문집의 나이는 66세의 고령이었다. 그와 함께 체포된 김씨 집안의 신자들은 김성우 성인의 외아들인 성희(암브로시오), 순교자 김만집의 차남 차희, 김문집의 외아들 경희, 경희의 5남이자 성희의 양자인 교익(토마스), 경희의 6촌 윤희 등 모두 6명이었는데, 이중에서 김교익만이 안면 있는 포교의 도움으로 생환하였을 뿐 모두 순교하였다. 결국 구산의 순교자는 김성우 성인을 비롯하여 모두 7명이 된 셈이다.
한편 가까스로 생환한 김교익은 사형이 집행된 뒤에 매일같이 형장으로 찾아가 김문집과 김성희·경희 등 3명의 시신을 찾아다 구산의 가족 묘역에 보존되어 오던 성 김성우와 김만집 형제의 무덤 옆에 안장하였다. 그러나 김차희의 시신은 아들 김교문에 의해 거두어져 안양 수리산에 안장되었다가 실묘되었으며, 후손이 없던 김윤희의 시신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이처럼 구산과 단내에서 시작된 신앙을 천상의 영복으로 영글게 한 남한산성에는 이 밖에도 수많은 순교자들의 애환과 몸부림이 어려 있다. 그러나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순교 터 매입과 사적지 작업은 어렵기만 한 상황이다. '순교자들이 살아서 들어갔던 동문과 배교하지 않고 시체가 되어 나온 시구문' 모두가 우리에게 한 시대의, 그러나 잊어서는 안될 역사를 증언해 주고 있다. 오늘도 성지에는 순교자들의 전구가 깃들어 있다. [출처 : 차기진, 사목 244호(1999년 5월), pp.107-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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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외 미사터
현재 야외미사터는 성지 소성당이나 기념관터로는 부적당하지만 주변의 토지와 건물들을 매입하면 가능하다. 성지 개발 기금 마련이 시급하다.
- 소성당
성체가 현시되어 있으며 두 분의 성인 유해가(김성우-안토니오, 최경환-프란치스코) 모셔져 있고 성 지순례 미사 전례시 양형 영성체를 하고 있다.
- 포도청과 군뢰청의 순교터
현 중부파출소 부근에 옛 포도청이 있었고, 그 뒤로 군사들이 신자들을 고문하던 군뢰청(軍牢廳)이 있었다. 조선 후기에 남한산성 안의 가옥수가 1,700여 세대나 되었고, 광주 유수가 아주 넓은 지역을 다스렸던 만큼 포졸과 군사들의 수도 많았을 것이다. 신자들은 옥에서 끌려나와 이곳에서 갖가지 형벌과 문초를 받거나 장형, 백지사 등으로 순교하였다.
- 연무관
남한산성은 군사적 요충지로 병자호란 때는 인조 임금이 피신했던 곳이다. 따라서 이곳 연무관 앞에서는 언제나 군사들이 훈련을 하였고, 그 때마다 그들은 천주교 신자들을 무술 연마 대상으로 삼아 목검으로 찌르고, 매로 때리곤 하였다. 그러다가 실신하면 옥으로 데려가고 죽으면 그대로 동문 옆의 수구문 골짜기에 내다 버렸다.
- 옥터
로터리 주차장 옆 천일식당 앞이 옛 옥터이다. 그 당시 옥은 네모진 가장자리에 허리춤 정도로 고랑 을 판 다음에 짚이나 숫대 등으로 대충 지붕을 해얹고, 소나무 기둥과 거적으로 벽을 만들었다. 비가 오면 물이 새고 겨울이면 찬바람이 그대로 몰아치는 이러한 옥안에서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모진 고 문과 매질로 찢기거나 피멍이든 몸으로 마지막 기도를 드리면서 순교할 그날을 기다리곤 하였다.
- 수구문과 골짜기(동문 오른쪽)
남한산성의 물이 나가던 수구문은 성안에서 처형된 천주교 신자들의 시신이 이곳 골짜기에 버려지면서 시구문(屍軀門)이 되어 버렸다. 이제 그 흔적은 골짜기의 물과 함께 흘러가 버렸지만, 박해 시대 때는 순교자들의 시신이 수십일씩 방치되면서 사람들이 꺼려했던 곳이다. 당시 군교자들의 시신은 짐승들도 건드리지 않았으며, 때로는 그 시신이 잠자는 듯 평화스러운 모습이었다고 한다.
- 동문 밖 (현 주차장)
남한산성의 형장으로, 1801년 신유박해 때 한덕운(토마스)이 참수 당한 순교터이다. 이후 박해가 거 듭되면서 체포되어 오는 신자 수가 많아지게 되자, 동문(좌익문) 밖 형장 대신에 주로 성내에서 신자들을 처형하였다.
- 수어장대
남한산성의 유수가 군사를 다스리던 수어영의 높은 장대로, 천주교 신자들 가운데서도 지도층으로 이 름이 있거나 양반인 경우에는 이곳에서 문초를 당한 후 순교자하거나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 서문
서문은 한양이 잘 내려다 보이는 곳으로 수어장대에서 순교한 신자들의 시신은 주로 이곳에 버려졌다.
- 저자거리
남한산성의 옛 장터가 있던 곳, 포졸들은 이곳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끌고 다니며 시위하거나 사람들을 모아놓고 처형함으로써 누구도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엄포를 놓았다.
- 북문(전승문)과 남문(지화문)
죄인 아닌 죄인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끌려온 문이요, 한 번 들어오면 죽어 나가야하는 문이였다. 순교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던 모습으로 포졸들에게 포박되어 이 문을 통과하면서 기쁨에 겨워했고, 죽어 나가면서도 하늘의 문으로 들어가는 영광에 또 기뻐했을 것이다. |
주님을 증거한 거룩한 순교지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
수원 성지가 위치한 수원 화성은 조선 제 22대 정조의 명을 받아 설계, 시공한 성으로 1794년(정조 18년) 1월부터 착공하여 2년 9개월 뒤인 1796년(정조 20년) 9월에 완성된 둘레 총길이 5.743km, 직경 평균 1.8km의 성곽이다. 그런데 수원 화성은 정조가 승하하고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면서 천주교 신자들이 끌려와 취조와 고문을 당하고, 피를 흘려 주님을 증거한 거룩한 순교지가 되었다. 그리고 2000년 대희년에 수원교구장 최덕기 바오로 주교는 북수동 성당을 중심 성지로 하는 천주교 수원 성지를 선포하였다.
수원 화성은 기록에 전해지는 수원의 순교자 최대 78명 중 1817년 샘골에서 친척들에게 살해된 이용빈을 제외하고, 병인박해 당시 77명의 순교자와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이 박해를 당하고 처형된 곳이다. 신앙의 증거지로는 화성 행궁, 이아(화청관), 중영(총리영), 동남각루, 남암문, 형옥, 팔달문 밖 장터, 장안문 밖 장터 등 인데 이밖에도 종로사거리, 화령전과 화서문 사이 사형터, 동장대 등인데, 이곳들은 순교와 일정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수원 유수부 내에서 이루어진 공적 박해의 현장은 현존하는 문서 기록과 구전을 종합해 볼 때 대략 6~7곳으로 압축된다. 우선 천주교 신자들이 수원 중영에서 파견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수원성 안으로 끌려올 때 대개는 먼저 들르는 곳이 판관이 주재하는 1차 신문 장소인 이아(貳衙, 화청관)이다. 1차 심문을 마친 신자들은 필요에 따라 형옥에 수감되기도 했고, 2차 심문 기관인 중영(中營, 총리영)으로 끌려가서 좀 더 혹독하고 본격적인 매를 맞거나 주뢰를 틀리는 등 육체적 고통을 당하면서 신문을 당하였을 것이다. 그런 다음 중영 울타리 내에서나 또는 형옥 담장 안에서 또는 기타 다른 장소로 이동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신자들을 처형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중 개방된 장소로는 대개 남문(남암문) 가까이에 위치한 남수문 옆 동남각루나, 남문 밖 장터 또는 북문 밖 거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도 중영 울타리 밖 종로 사거리, 화령전에서 서문 사이에 위치한 길가의 공터, 군사들이 크게 열을 지어훈련을 할 수 있는 동장대나 동장대보다 다소 협소하기는 하지만 국왕이나 총리사인 유수가 위엄을 베풀고 군사 훈련을 사열하는 서장대 등도 순교와 일정하게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장소로 보인다.
▒ 수원 화성 수원 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 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 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 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 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원 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 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 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 데에 이용하였다.
▒ 채제공(蔡濟恭) 채제공(1782∼1799)은 문신으로 1777년 수궁대장(守宮大將)으로 벽파(僻派)의 모반 음모를 여러 차례 적발, 1780년 홍국영의 세도를 붕괴시킨 뒤, 정조를 보필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분야에 걸쳐 새로운 국정을 시행케 하였다. 1788년 우의정, 1789년 좌의정에 올랐다가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신서파(信西派)의 영수로서 공서파(攻西派)에 맞서 천주교인을 옹호하여 그 결과로 파직되었으나 이듬해 좌의정에 복직되었고, 1793년 영의정에 올랐다. 그 뒤 천주교의 신봉을 어느 정도 묵인하는 온건적 정책으로 공서파의 탄핵을 받아 여러 번 사직, 또는 유배형을 받았으나 그때마다 정조의 신임으로 복직되었다. 사후(死後) 이러한 천주교에 대한 관용적 태도로 말미암아 1801년 신유박해 때 관직을 추탈 당했으나 1823년 신원(伸寃)되었다.
▒ 화성과 정약용 그리고 천주교 화성은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해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채제공의 총괄아래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되었다. 정약용은 특히 거중기를 고안, 화성 축조에 큰 도움을 주었는데 이는 예수회 선교사 테렌츠(Terrenz, J, 鄧玉函)의 ‘기기도설(奇器圖說, 1627)’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정약용은 화성 축조 이후 경기도 암행어사를 거쳐 동부승지 ·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주문모 신부의 변복 잠입 사건이 터지자 형 정약전과 함께 충청도 금정찰방으로 좌천됐다. 이후 1801년 신유박해 때 경상북도 포항 장기로 유배됐는데, 황사영 백서 사건이 일어나자 또 다시 그 해 10월 전라남도 강진으로 유배됐다. 정약용은 이후 1818년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후 고향집(마현)에서 남은 생을 보냈으며 1836년 75세로 생을 마쳤다.
■ 수원 화성내의 신앙 증거터
◆ 화성 행궁과 봉수당 화성 행궁은 정조가 현륭원에 전배(展拜)하기 위하여 행행(幸行) 때에 머물던 임시 처소로서, 평상시에는 유수(留守, 정2품, 摠理使를 겸함)가 집무하는 부아(府衙)로도 활용하였다. 이곳은 수원에서 무수한 순교자가 처형된 병인박해 때 이곳으로 끌려온 지체 높은 양반 천주교인을 심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행궁 내 유수의 집무실인 봉수당(奉壽堂)은 드물기는 했을 것이나 중요한 인물에 대해서 유수가 직접 신문을 했을 가능성이 있는 장소이다.
◆ 이아(貳衙)(화청관) ‘이아’는 행궁의 북쪽에서 동편으로 가까이 있으며,1793년(정조 17년) 12월 수원이 도호부(都護府, 종3품 관아)로부터 유수부(留守府, 정2품 관아로 유수는 外官이 아닌 京官에 속함)로 승격하던 해에 설립되었는데, 유수의 행정사무 대리자였던 종5품 판관(判官)의 관아이다. 대체로 향반(鄕班)이나 중인 이하 천주교 신자들이 끌려와서 판관 앞에서 1차 심문을 받던 곳은 ‘이아’에서도 그 동헌에 해당되는 ‘화청관’이었을 것이다. 이아 일대는 현재 말일성도 그리스도교회가 들어서 있다.
◆ 중영(中營, 摠理營, 토포청) 수원 지역은 특히 서해안 일대에 침입하는 왜구를 방비하는 것이 주목적이었기에 다른 지역 군사들보다 역량이 뛰어난 군사들을 배치하였다. 따라서 수원 지역은 중앙 오군영의 하나인 총융청(摠戎廳 : 좌영, 우영, 중영의 3영 체제)의 중영이 설치돼 그 관장인 수원 도호부사(종3품)가 이 지역을 방어하도록 했다. 이 중영은 유수부의 토포청을 겸하던 곳이므로 박해 시기 천주교인들에 대한 공개적, 비공개적 사형을 집행하던 곳이었다. 중영은 성안 종로 네거리에 접한 동북쪽에 위치하며, 그 한 모퉁이가 현재의 북수동 성당터에 겹쳐진다.
◆ 동남각루 (東南閣樓) 화성의 군사적 방어 체제를 나타내주는 건물로 화성 성벽의 동남쪽 부분에 해당된다. 수원 지역은 중앙 오군영의 하나인 총융청(摠戎廳 : 좌영, 우영, 중영의 3영 체제)의 중영이 설치돼 그 관장인 수원 도호부사(종3품)가 이 지역을 방어하도록 했다. 이것이 순조 이후 총리영(총리중영)으로 변경되고 그 군사적 실무 책임자인 중군(中軍, 정3품, 토포사를 겸함)에 의해서 천주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자행되던 때, 동남각루는 천주교인을 참수하여 그 시신을 성 밖으로 내던진 장소로 알려진다.
◆ 형옥(刑獄, 형초옥) 6칸의 감옥으로 이곳에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투옥되었고 믿음을 시험하면서 그 신앙을 증거하게 하던 처참했던 비극의 장소이다. 이곳에 갇힌 천주교인들은 처형될 날을 기다리면서, 때로 아사형(餓死刑) 또는 장독사를 포함한 병사(病死)로 죽게 방치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이곳은 수원성 내 순교지 중의 하나로 지목된다. 현재 이 옥터에는 학원 건물 등이 들어서 있는데 그 위치는 팔달문 동쪽 50m쯤에 있는 시장통에서 아직도 ‘옥거리’로 불리고 있는 좁은 골목길의 끝자락 왼편이다. 현재 삼영약국이 있는 주변이다.
◆ 남암문<(南暗門, 시구문) 형옥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건물이 바로 성안의 시신이 나가는 문이라는 뜻에서 시구문(屍口門, 屍軀門)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또는 사형수의 머리를 그 문루에 매달아 내걸었던 문이라는 뜻에서 수구문(首口門) 등으로 불렀다는 남암문이다. 현재 그 위치는 팔달문 동쪽 시장통이 옥거리와 교차하는 지점에 해당하는 곳으로 형옥터 맞은 편 ‘M명동의류’라는 간판을 내건 상점 자리 앞에 해당한다고 한다. 신유박해 때 참수시킨 천주교인의 머리를 매달았던 곳으로 지금은 형옥과 함께 시장 상가로 되어있다. 남암문은 동남각루에서 처형한 천주교인들의 목을 걸어 놓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동암문과 북암문도 같은 기능을 수행했는지는 미상이다. 암문이란 성의 정문이 아닌 사잇문으로 전시에 군수품을 조달할 수 있게 은밀하게 만들어 놓은 비밀문이다. 성에는 서남암문, 서암문, 남암문, 북암문, 동암문 등 5개소가 있었으나 남암문은 현재 시가지화 되었다. 이중 서남암문만이 누각이 있고 용도와 이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며 서암문은 문 자체가 옆으로 들어앉아 외부에서 잘 보이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남암문은 동남 각루에서 처형한 천주교인들의 목을 걸어 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동암문은 동장대에서 처형한 천주교인들의 목을 걸어 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북암문은 서민, 천민, 군인들이 사용하던 비상문으로 천주교인들의 목을 걸어 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 팔달문(남문) 밖 장터 팔달문은 화성의 사대문중 남쪽에 위치한 정문으로 화성 축성과 함께 건립되었다. 문은 화강암으로 홍예를 만들고 위에 2층의 육중한 목조 문루를 세웠다. 이름은 서쪽에 있는 팔달산에서 따 왔다. 문의 바깥쪽에는 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해 반원 모양으로 옹성을 쌓았다. 이 옹성은 1975년 복원 공사 때 고증하여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이 팔달문 밖 장터는 천주교인들을 공개적으로 때려죽이는 장살형(杖殺刑)을 집행하던 곳이다.
◆ 장안문(북문) 밖 장터 하나의 홍예문 위에 2층 누각을 올리고, 바깥쪽으로 원형 옹성을 갖추었다. 홍예 위에는 오성지(五星池)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5개의 구멍을 갖춘 큰 물통으로, 적이 성문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규모나 구조는 조선 초기에 세워진 서울 남대문과 매우 비슷한, 당당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남대문에 비해 좀 더 새로운 것은 옹성, 적대와 같은 방어 시설을 갖춘 것이 특색이다. 장안문 밖 장터는 팔달문 밖 장터와 마찬가지로 천주교인의 공개적인 장살형 집행 장소였다.
◆ 사형터 화령전과 화서문 사이의 사형터이다. 구전에 의하면 천주교 신자들도 일반 죄수들과 함께 처형된 곳으로 추정된다.
◆ 종로 사거리 행궁 앞(300미터 전방) 광장 사거리로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으로 중영의 군사들에 의해서 천주교인들이 공개적으로 처형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종로 사거리 동북쪽에 중영 자리와 북수동 성당이 있다.
◆ 동장대(연무대) 장대란 성곽 일대를 한눈에 바라보며 화성에 주둔했던 장용외영 군사들을 지휘하던 지휘소를 말하며서장대와 동장대 두 곳이 있다. 동장대는 무예를 수련하였기에 연무대라는 별칭이 붙었다. 이곳은 지형이 높지는 않지만 사방이 트여 있고 등성이가 솟아 있어서 화성의 동쪽에서 성안을 살펴보기에 좋은 군사 요충지다. 군사 제식 훈련 중에 천주교인들이 공개적으로 처형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곳이다.
◆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방화수류정(동북각루)은 화성의 4개 각루 중 하나로 주위의 아름다운 경관과 어우러진 곳으로 전체 시설물 중에서 가장 빼어난 곳이다. 뛰어난 건축미와 경관의 아름다움으로 용연, 화홍문과 더불어 화성의 백미라 일컬어진다.
방화수류정(=동북각루)은 화성의 4개 각루 중 하나로 주위의 아름다운 경관과 어우러진 곳으로 전체 시설물 중에서 가장 빼어난 곳이다. 방화수류정이란 꽃을 쫓고 버드나무를 따라가는 아름다운 정자라는 뜻이다. 뛰어난 건축미와 경관의 아름다움으로 용연, 화홍문과 더불러 화성의 백미라 일컬어진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유산인 수원 화성 4개 누각중 하나인 방화수류정의 서쪽벽에 십자가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최근 확인돼 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방화수류정 자체도 8각 지붕을 기본으로 남북에 합각을 하나 더 세워 십자(十)형으로 되어 있다. 팔각정의 기본틀을 변형시켜 서쪽에 벽을 만들어서 서벽 안에 86개의 십자가 문양을 새겨 넣은 정자인데 이는 당시 천주학이 서양의 학문인 서학이라 한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서녘 석양이 질 무렵에는 세상 어둠을 쫓는 광명의 상징으로 서벽에 새겨진 십자가들이 빛이 나도록 설계되어 놀라움을 자아낸다. 화성 축조에 큰 영향을 준 정약용이 천주교 신앙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십자가 문양을 넣은 것이라고도 하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높은 지형인지라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천주교인들을 참수한 곳으로 추정된다. 시신은 성벽밖으로 던졌고 목은 북암문에 걸어 놓았을 것이다.
◆ 창룡문(蒼龍門, 수원성의 동문)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어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는 동쪽 대문이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들의 시신은 다른 죄수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궁성의 대문으로 나갈 수 없었으며 소문이나 암문 등지로 내보냈던 당시의 관례로 보아 이곳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돌로 쌓은 홍예문 위에 단층 문루를 세웠다.
■ 찾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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