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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6. 02. 07(화)
■ 유씨(劉氏)의 연원
劉氏 大觀(유씨 대관)
劉字를 "卯金刀" 통상(通常) 묘금도유 라고 새김한다.
그러나 사전(辭典)에서는 예외적으로 성유(姓也), 이길유(剋也), 쇠잔할유(衰也), 죽일유(殺也) 등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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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劉)자로 성(姓)을 쓰이게 된 유래(由來)
통지 씨 족 약(通志氏族略)에 의하면 유(劉)자로 성을 쓰게 된것은 중국고대(中國古代)의 제요도 당대(帝堯陶唐代)의 다음으로 유(劉)자를 성으로 쓰게 되었다.
원래는 지명(地名)을 나타내는 글자로서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정(鄭)나라 읍명(邑名)을 지칭하였다가 그후에도 주(周)나라에서는 대부채지(大夫采地) 또는 하남 성 언사(河南省偃師)의 읍명(邑名)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고 춘추지리고(春秋地理考)는 밝히고 있다.
그후 하(夏)나라 14세 공갑왕(孔甲王)으로부터 유루(劉累)라는 분에게 "어룡"氏로 사성(賜姓)하였고 상(商)나라 때에는 시위(豕韋)氏로 주나라 때에는 당두(唐杜)氏로 각 각성(姓)을 고쳐 부르다가, 한고(漢高)께서 한 제국(漢帝國)을 창건(創建)하고 황제(皇帝)에 등극(登極)하시면서 유(劉)자를 우리 성(姓)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劉氏는 한 제국(漢帝國)의 태조(太祖) 고 황제(高皇帝) 劉邦 선조의 위대한 혈통(血統)을 이어받은 훌륭한 후손(後孫)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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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씨(劉氏) 본원(本源)의 시조(始祖)는 한태상황(漢太上皇)이다.
문헌상(文獻上)으로 보면 반만년 전(半萬年前) 중국고대 하 왕조 말엽(夏王朝末葉)에 루(累)라는 분이 있었는데 이분이 바로 유 씨 본원(劉氏本源)의 시조이다.
이 분 루(累)의 아들이 明(명)이고 손자에 원(遠), 증손에 양(陽), 고손에 획(獲), 6세손에 청(淸), 7세손에 인(仁), 8세손에 휘(諱)가 (단)인데 자(字)는 집가(執嘉), 배위의 휘(諱)는 함시(含始)로 소령부인(昭靈夫人)이다.
이분이 곧 한태상황(漢太上皇)이며 유씨(劉氏)의 1세손이다. 이분의 슬하에 장자(長子)에 백(伯), 차자(次子)에 중(仲), 삼자(三子)에 계(季), 사자(四子)에 교(交)인데 삼자(三子) 계(季)가 바로 한고조(漢高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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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고조(漢高祖) 휘(諱) 유방(劉邦)의 약사(略史).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은 기원전 256년에 주(奏)나라 페풍읍 중량리 지금의 강소성에서 휘 (단) 태공(太公)의 三男으로 태어나 자(字)는 계(季)라 하였다.
계(季)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 공의모친 소령부인(昭靈夫人)은 우연히 집 주원(周園)에 있는 큰 연못가에 나왔다가 자신도 모르게 혼곤히 잠이 들었는데. 꿈에 선인(仙人)이 내려와서 모친의 품속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눈을 뜨자 갑자기 온천지가 캄캄하게 변하고 천둥소리가 요란하더니 돌연 눈앞에 이무기(용이 되려다 못되고 물속에 산다는 큰 구렁이) 한 마리가 몸둥이를 사리고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로 公의 모친은 태기가 있어 유방(劉邦) 즉 한고조(漢高祖)를 낳았다. 公은 용봉(龍鳳)과 같은 기상을 지니고 있었으며 기골이 장대하고 특히 수염이 아름다운 비범한 인물이였다. 성품은 활달하고 정확한 판단력과 주저하지 않는 결단력 그리고 도량이 넓으서 남을 도와 주기를 좋아했다.
[우인희시(優人喜施), 인이관(仁而寬), 의활여야(意豁如也)]또 하나 기이한 것은 公의 왼쪽 장단지에 까만점이 77개나 있었다. 公은 일찍이 지방시험에 합격하여 사상(泗上)의 정장(亭長)이 되었는데 公의 주위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들고 또 따랐다.
특히 당대의 유명한 관상가단부(觀相家單父)현 사람인 여문(呂文)은 공의 비상한 용모에 감탄하여 늘 입버릇처럼 "公은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이다. 앞으로 무상(無上)한 영광을 누릴 큰 인물이다." 라고 말하였다.
여문(呂文)은 公을 사위로 삼고자 公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주연을 베푼 자리에서 "劉公은 장차 크게 또 귀히 될 사람이니 부디 몸 조 심하기 바라오. 장성한 딸을 맡기겠으니 사양하지 말라" 고 하자 공은 정중하게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여문의 간절한 청을 더 거역할 수 없어 마침내 승낙하고 말았다.
다음날 公은 패 현령(沛縣令)의 명을 받고 복역수를 압송하여 여 산릉(驪山陵) 공사장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압송 도중에 도주하는 자들이 많아 해질 무렵에 풍서에 도착한 公은 죄수들에게 "당신들은 한 번 여산으로 가면 그 중역을 벗어날 길이 막연할 것이니 제각기 자기의 살길을 찾도록 하라" 고 선언하였다.
그중 십여 명이 公을 따라 가겠다고 하여 그들과 함께 公의 일행이 망 탄산 어느 오솔길로 접어들었을 때 갑자기 길이 희미해 졌다. 이상히 여긴 公은 영리한 사람 하나를 보내 길을 알아 오도록 하였더니 잠시 후 그 사람이 허둥지둥 달려와서 "지금 열자가 넘는 큰 백사(白蛇)가 앞길을 가로막고 있으니 딴 길을 택해야겠습니다." 라고 고하는 것이었다.
이에 公은 "장사가 가는길에 감히 무엇이 무서울 게 있단 말인가" 라고 외치면서 큰칼을 뽑아들고 옷자락을 휘날리며 달려가서 열자가 넘는 백사를 내리쳐 단칼에 두 동강 이를 내고 앞장서서 걸어갔다. 뒤에 따라온 일행은 두 동강 난 큰 뱀을 쳐다보며 저마다 "참으로 용감한 대장부이시다" 라고 감탄하면서 저분을 끝까지 따르리라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 생겼다. 큰 뱀을 베인 곳에 밤마다 백발이 성한 노파가 나타나서 두 동강이가 된 큰 뱀의 시체를 안고 구슬프게 울부짖는 것이다. 이 광경을 보며 그곳을 지나던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그 노파에게 "그 징그러운 동물을 제거했는데 무엇 때문에 그처럼 슬퍼하시오." 라고 하자 그 노파는 여전히 울먹이면서"모르는 소리 말아라.
나의 아들은 白帝子(이다음 진나라를 말함)인데 마침 백사로 화신하여 길에 나왔다가 赤帝子(이다음 한나라를 말함)의 칼에 맞아 죽었으니 억울하고 또 의지할 곳이 없어 이처럼 통곡하는 거다"라고 대답하였다. 이말을 들은 일행은 미친 노파라고 단정하고 지팡이를 들어 떠밀려는 순간 그 노파는 온데 간 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한편 거대한 백사를 단칼에 죽였다는 소문이 퍼지자 비범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여 公의 곁으로 모여드는 장정들이 수백 명에 이르러 점차 그 세력이 확충되어 갔다. 이 무렵 패 현의 관리로 簫何(소하)와 曺參(조참)이라는 두 장수가 진(秦)나라를 쳐부수기로 협의하고 또 한편으로는 망탄 산에 망명중인 公을 불러 들여 함께 의거하기로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公은 즉시 수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패 현으로 달려갔다. 이때 公의 세력은 구름같이 모여드는 장정들로 더욱 강대해져 갔다. 그러나 현령은 公의 세력이 강대해지는 것을 보고 자기의 큰 실수로 후회한 나머지 소하와 조참을 불러들여 문책하기를 "너희들이 허울 좋은 구실로 나를 속여 劉邦을 끌어들여 패 현을 빼앗으려 하고 있으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다" 하면서 그들의 목을 베라고 명령한 다음 劉邦의 일행은 한놈도 성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엄명하였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의 청에 의하여 다행히 소하와 조참에 대한 참수령은 취소되었으나 공의 일행은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을 때 소하와 조참 두 장수가 수십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公을 찾아와서 "劉公은 지금 세력이 강성하니 기회에 무능한 현령을 처단하고 패 현을 취한 다음 이를 근거로 하여 흩어져 있는 지사(志士)들을 규합 의거를 일으킨다면 향후천하(向後天下)를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간절히 청하였다.
이말을 들은 公은 침착한 어조로 "두 사람이 과연대의(果然大義)를 주장할 뜻이 있다면 당장 일어나서 무능한 현령을 처단하고 새로이 현명한 인물을 뽑아 현령의 자리에 앉히면 자연히 민심이 수습되어 대사를 이룰 수 있을 것이요" 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소하와 조참은 다시 公에게 "지금 패현의 백성들이 모두 불안감에 사로잡혔으니 화살 끝에 효유문(曉諭文)을 매어 성안에 쏘아 보내면 저절로 내란이 일어나 사흘 안에 패 현을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재차 간청하여 공은 그들의 말을 따르기로 하고 수십 통의 효유문을 써서 성안으로 쏘아 보냈다.
그 효유문에는 "우리는 진(秦)나라의 학정에 시달려 온지 벌써 오래이다. 그러므로 나 劉邦은 삼가 공의(公義)에 따라 우선 현명한 현령부터 다시 선출하여 이 현의 백성들의 살길을 되찾게 한다음 점차 의병을 모집하여 각처의 호걸들과 함께 잔학무도한 진나라를 쳐부수고자 한다.
지금 너희들이 이 점을 감안하여 천명에 순응한다면 안전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아니할 경우에는 성이 함락되는 날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라고 쓰 있었다. 이 효유문을 본 패 현의 백성들은 서로 모여 의논하기를 "지금 劉邦의 세력은 강성하고 소하와 조참까지 劉邦을 따르기로 하였으니 패 현이 함락되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한시바삐 궐기하여 劉邦을 따르는 것이 우리의 살길이다." 라고 하면서 수많은 군중들이 관아로 달려가서 무능한 현령을 처단한 다음 성문을 활짝 열고 환성을 지르며 公을 맞아 들였다.
구름같이 모여든 백성들은 정중히 현령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公은 이를 완강히 거절하고 받아 들이지 아니 하였다가 열화 같은 온 백성들의 간절한 성화에 견디지 못한 公은 이를 수락하고 패 현(沛縣)의 현령이 되었다. 수많은 군중들의 환호와 축하 속에 성위에는 붉은 색의 깃발이 수없이 꽂아 그 위세를 과시하였다.
과연 赤帝子(적제자)의 아들이라고 한 그 노파의 말이 꼭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패 현의 현령이 되신 공은 삼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함양을 쳐들어가 진(秦)의 왕자 영을 폐위시키고 기원전 206년에 漢나라의 왕이 되었다.
漢王이 되신 公은 漢나라 사람으로 마치 孫武子(손무자)처럼 적을 요리하여 승리를 거두는 병법과 법려처럼 큰 공을 세운 뒤에도 선뜻 물어서는 묘법을 구사하는 지략을 지닌 사람으로 이름은 張良(장량)이며 字는 子房(자방)을 사부로 삼고 신출귀몰한 병법을 구사하는 한신장군(韓信將軍)을 대원수(大元帥)로 하여 장주(丈洲)를 평정시켜 30만의 대군을 얻는 큰 성과를 거두 머로서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르듯 당당하였다.
이어 여세를 몰아 조(趙)나라 20만 대군을 격파하고 조왕(趙王)을 사로잡는 등 대전공을 세웠으며 이와 같은 승승장구의 대세로 물밀 듯이 연(燕)나라와 제(齊)나라 그리고 오(吳)나라 등을 피하방울 흘리지 않고 항복(降伏)을 받았던 것이다.
한편 진(秦)나라를 폐망시키고 초(楚)를 세운 다음 진(秦)의 구세력을 대표해 오던 項羽(항우)와 진(秦)의 학정에 시달린 반감으로 인하여 규합된 신흥세력을 대표하는 한(漢)나라 왕이신 劉邦과의 처절했던 5년안에 걸친 이른바 한초 전(漢楚戰)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바이며 이 유명한 초한전사(楚漢戰史)는 지금도 청사(靑史)에 길이 빛나고 있는 것이다.
천하무적의 역발산(力拔山) 항우도 결국에는 漢王이신 劉邦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던 것은 항우의 힘이 역발산이기는 하나 성질이 과격하고도 교활하여 백성들의 생활이나 고충 따위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잔인무도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항복한 군사들까지 모조리 생매장한 일이 있을 뿐 아니라 공격하는 곳마다 이와 같은 잔악한 행동을 하여 백성들의 원성과 반감이 대단하여 인심이 이미 항우(項羽)곁을 떠나 한왕(漢王)이신 劉邦에게 기운지가 오래였던 것이다.
이것은 바로 올바른 주인으로 劉邦을 하늘에서 내리신 까닭이다. 그리하여 기원전 202년에 천하를 통일하시고 한제국(漢帝國)을 창건하시어 2월 갑오(甲午)에 남쪽〔사수()갱도서북쪽〕에서 고황제(高皇帝)의 재위(在位)에 등극(登極)하셨으며 장안(長安)에 도읍(都邑)하셨다.
한고조께서는 한제국의 통치방향을 우선 진(秦)의 학정과 오랜 전란(戰亂)에 백성들의 민심을 수습하고 그들의 살길을 도모하는데 최우선을 두고 선정(善政)을 베푸시는 한편 진(秦)과 초(楚)가 패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원인을 가려 이를 점진적으로 국사에 반영시킴으로서 한제국의 초기 기반을 튼튼히 구축하였다.
즉 진(秦)나라가 중앙집권적인 관료제도아래 군현정치(郡縣政治)를 무리하게 급진적으로 강행하여 백성들에게 큰 고통을 주었고 또 가혹한 징발(徵發)과 중세(重稅) 및 과중한 노역 등에 시달려 원성이 컸으며 이를 견디지 못하고 유민(流民)이 되어 살던 곳을 떠나거나 강제로 노예가 된 자가 많아 강권(强權)과 강압(强壓)에 의한 진(秦)의 통일정책의 여파는 온 백성들의 반감을 가져오게 되어 패망하게 되었다,
이어 항우 역시 진(秦)의 무리하고 강요된 악정(惡政)을 또다시 부활시키려고 하다가 민심이 이탈되어 실패한 점을 거울삼아 이 양자(兩者)를 절충한 이른바 군국정치(郡國政治)를 잘 펴나가면서 효제(孝悌)를 중심으로 한 가족도덕을 중시하는 유교(儒敎)가, 중국의 가부장적 가족사회(家父長的家族社會)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가장 적합한 사상과 제도라고 판단하시고 유교(儒敎)를 국교(國敎)로 삼아 인의(仁義)로서 백성을 교화시켜 부모에게 효도하게 하고 어른을 공경하여 신의(信義)로서 도리를 지켜 중(中)을 세우고 화(和)를 주도케 하는 중화사상(中和思想)으로 인륜을 밝게 하셨다. ...中華가 실질적으로 시작(왜곡의 역사 : 대한민국 사대모화)
억울한 죄인을 없애기 위해 형벌을 공정히 다스렸으며 바른 충신(충신)을 목마르듯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재를 등용하는 법이 공정하고 분명하여 어진 사람에게 중직을 맡기고 적재적소에 활용함으로서 요행(僥倖)이 사라졌다.
평온할 때 위태로움을 잊지 않는 위정이 덕(爲政以德)으로 그 덕과 위엄이 천하에 미쳐 온 백성들이 요순시대(堯舜時代)를 다시 구가하게된 것이다. 따라서 높고 높으신 한고조의 위대하신 업적과 크나큰 공덕은 아무리 빛나는 훌륭한 문체로서도 표현할 길이 없다 할 것이다.
그리고 한고조께서 한 제국을 창건한 이래 후손이 연면(連綿)이 번성(繁盛)하여 五百年 동안 삼십여(三十餘) 군(君)의 황제가 누대(累代)로 제위(帝位)를 계승하신 것 또한 모두 한고조의 은덕(恩德)이며 영광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한고조의 칭호를 높여 태조(太祖)를 붙여 태조고 황제(太祖高皇帝)라 하시었으며 12년간 재위하시다가 서기전 195년에 향년(享年) 53세에 서거(逝去)하셨다.
중원천하(中原天下)를 통일하시고 한제국을 창건하신 한고조의 다음(二 代) 황제는 효혜황제(孝惠皇帝)로서 휘 盈(영)이시며 字는 滿(만)이시고 재위7년에 정년 24세로 서거하시었다. 三代 효문 황제(孝文皇帝)이시며 휘는 恒(항)이시고 字는 常(상)이시다.
23년간 재위하시다가 서거하시니 향년 46세이셨다. 이어 四代 효경황제(孝景皇帝)의 휘는 啓(계)이시고 字는 開(개)로서 16년간 재위하시다가 향년 48세에 서거하셨으며, 五代 황제는 효무황제(孝武皇帝)로서 휘는 撤(철)이시며 54년간 재위하시다가 서거하시니 수(壽) 70세요. 六代 광무황제(光武皇帝)의 휘는 秀(수)이시고 字는 文淑(문숙)이시며 33년 재위하시고 63세에 서거하셨다.
그다음 七代 효명황제(孝明皇帝)께서는 휘 莊(장)이시며 초휘 陽(양)이신데 18년간 재위하시다가 48세에 서거하셨으며 八代황제이신 효장황제(孝章皇帝)의 휘는 (훤)이시고 13년간 재위하시다가 향년 31세에 서거하셨고 이어 九代황제는 효화황제(孝和皇帝)로서 휘는 肇(조)이시고 17년간 재위하시고 향년 27세에 서거하셨다.
그 후 소열황제(昭烈皇帝)의 휘는 備(비)이시며 자는 玄德(현덕)이시고 2년간 재위하시다가 향년 63세에 서거하셨으며 이어 소열황제(昭烈皇帝)의 아들 後황제의 휘는 禪(선)이시고 자는 公嗣(공사)이신데 41년간 재위하시다가 65세에 서거하셨다.(史記八卷前漢書:사기팔권전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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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烈皇帝(소열황제) 諱(휘) 備(비)의 약사(略史)..유비
서기 184년 중국후한(中國後漢) 광화6년(光和六年)에 장각(張角)을 수령으로 하여 일어났던 도독을 황건적(黃巾賊)의 난(亂)이라고 하는데, 이때 중원각지(中原各地)에서 군웅(群雄)이 활거 하던 시대에 난립되어 있던 대소제국(大小諸國)을 평정시키고 촉한(蜀漢)의 초대황제의 제위(帝位)에 오른 유비황제는 한고조 劉邦의 22세손으로 정통 황손(皇孫)이시다.
소열황제 유비께서는 서기 161년 탁현의 누상촌(樓上村)에서 태어나시어 字를 玄德(현덕)이라 하시었으며 한나라 중산정왕(中山靖王) 劉勝(유승)의 후손이시다. 부친 劉弘(유홍)은 일찍이 별세하시어 생활은 빈곤하였으나 효성이 지극하고 타고난 기품과 골상(骨相)은 천자(天子)의 혈통을 이어받은 후예임이 역력하여, 키는 팔 척이요.
귀는 유난히 커서 어깨위에 닿았으며 성품 또한 온화하고 후덕하여 너그러운 포용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강인한 의지력과 임기응변하는 지혜와 넓은 식견까지 겸비하고 있었으니 실로 인(仁)과 의(義)와 덕(德)으로 뭉쳐진 영걸(英傑)이시었다.
황건적(黃巾賊)의 난(亂)이 일어나 온 천하가 혼란에 빠지자 공은 관우, 장비등과 도원(桃園)에 제단을 마련하고 천지 신(天地神)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의형제의 결의를 맺은 것이다. 비록 같은 날 태어나지는 못했으나 생사를 같이 하기로 굳게 다짐하였다. 그러나 의(義)와 예(禮)에 있어서는 군신의 관계를 지키자고 맹세한 것이니 난세(亂世)를 바로 세워 천하를 도모할 영도자를 정하는 의식이었던 것이다.
●유비 현덕
"장비야 이것 보아라, 이처럼 술과 여자도 이해하기 쉬운 남자에게 모인다. 사람역시 이해하기 쉬운 남자에게 사람이 모인단다."
'난 세상을 지배할 그릇이 못 될 지도 모른다. 허나 난 세상을 담아 낼 수 있는 거대한 그릇이다.'
'지금 이 현세의 영웅은 그대와 나 단 둘이요.' -> 조조의 말.
(이 말에 깜짝 놀란 유비는 처세술을 발휘하여 번개를 보거 겁을 낸다.)
'난 천하의 의나 도를 구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실 난 내 마음속의 소명을 다 할 뿐이다.'
●관운장(關雲長,?∼219) :
관우(關羽). 촉의 장수로 자는 운장(雲長). 송 대 이후 관제묘(關帝廟)가 세워져 무신(武神), 군신(軍神), 복록 장수신(福祿 長壽神)으로 모셔지는 등 민중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만력 42년(1614) 제호(帝號)를 받으며 삼계 복마대제신위원진천존관성제군(三界伏魔大帝神威遠鎭天尊關聖帝君)에 봉해졌다. 세속에서는 ‘관성제군’, ‘관제(關帝)’라 불린다. 자 익덕(益德:翼德). 탁군(褶郡:河北) 출생. 유비(劉備)·관우(關羽)와 함께 의형제를 맺어 평생 그 의(義)를 저버리지 않았으며, 후한(後漢) 말 동란기의 많은 전쟁에서 용맹을 떨쳤다.
유비의 익주(益州) 공략 때는 주력을 이끌고 큰 공을 세워 파서태수(巴西太守)가 되었다. 위(魏)나라의 명장 장합(張姸)이 장로(張魯)를 무찌르고 파서로 밀고 들어오자 역전 끝에 이를 격퇴하였다.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거기장군(車騎將軍)·사례교위(司隷校尉)에 임명되었다.
그후 유비가 패사한 관우의 복수를 위하여 오(吳)나라를 치려는 동정(東征)에 종군할 준비를 하던 중, 부하에게 암살되었다. 관우와 더불어 당대 최고의 용장으로 일컬어지며, 특히 형주(荊州)에 있던 유비가 조조(曹操)의 대군에 쫓겨 형세가 급박해졌을 때, 장판교(長坂橋) 위에서 "내가 장익덕이다" 하고 일갈하여 위군을 물리쳤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장비 익 덕에 관한 오해
수많은 사람들의 의해 읽혀진 동양최대의 베스트셀러 삼국지, 삼국지에는 수많은 영웅 호걸들이 등장하는데. 그중에서 장비 익덕에 대해서 서술해 보고자한다. '장비'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대추같이 둥근 눈에 삐쭉삐쭉 나있는 수염, 우람한 체격 또한 성격은 어떠한가? 단순, 무식, 과격 술 좋아하고, 하지만 실제로 장비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정사에 기록을 의존하자면 장비는 소인배를 멀리하고 군자를 경애한 다라고 기술되어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단순, 무식, 과격과는 달리 시문에 능할 뿐 아니라 서화에도 일가견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삼국지 최고의 무장이라 칭송받는 관우 관우사후에 그의 자식들은 촉에서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장비의 경우 장비의 두 딸이 황제 유선에게 시집을 가며 그의 아들인 장소도 촉에서 상당히 높은 벼슬자리까지 한다. 연의로만 보면 두 인물들과 상당히 대조되는 모습니다. 당시 사회는 아버지의 지위를 그대로 물려받거나 아버지의 후광으로 정치권에 입문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이 경우가 성립이 될 수도 있지만 관우의 자식들에 비해서는 상당한 역할을 하게된다. (참고로 관흥, 관평등은 제갈량보다도 더 일찍 죽은 장수들이다. 연의 내용만 보면 죽은 귀신들이 활약한 꼴이다. ) /연의를 살펴보자. 장비가 일생일대의 최대 과오를 남기게 되는 서주성. 여포에게 성을 빼앗기고 만다.
그것도 아무런 저항없이 말이다. 이 일 이후에 장비는 여느 군사작전에서 실수 없이. 자기 임무를 충실히 완수한다. 아니 오히려 무식한성격과는 달리 엄안을 설득시키며 명장으로 칭송받는 위의 명장 장 합을 지략으로서 굴복시켜 한중쟁탈전에 우위를 점하게 되는 발판을 마련하기도 한다.
하지만 관우는 어떤가? 장비는 연의에서 서주 성 하나를 잃었지만. 관우는 형주전체를 송두리째 빼앗기고 만다. 연의에서조차 지장과는 거리가 멀게 그려진 장비였으나, 그 이후 전투를 봤을때 도저히 단순, 무식, 과격 이라는 성격에서 상당히 고단수의 지략이 쏟아져 나온다. 그러면서도 장비의 성격은 연의 끝까지 지속된다. 상당히 모순점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익주 입성이후 최전방에 장비를 배치했다. 장비가 단순한 그져 싸움만 할줄아는 무인이라면 최전방에 장비를 보낼 리가 만무하다. 최전방이라는 곳은 일촉즉발의 상황이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임기웅변이 띄어나고 사리분별을 분명히 할 줄 아는 장군이 지키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렇게 사람 잘 부린다는 유비가 최전방에 장비를 배치시켰다는 점 역시 우리가 모르는 장비의 재능을 유비가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장비는 적의 공격을 받고 기대이상의 성과로 적의 예봉을 크게꺽는 기염을 연의에서 토해낸다. 장비는 여느 장수와는 달리 상당히 뛰어난 군인 이였음에는 틀림이 없다. 다만 연의에서 그려진 장비는 약간 극단적인 모습을 띈다.
비분강개와 우국충정이 넘쳐흐르는 의거(義擧)의 격문을 읽고 구름처럼 모여드는 수많은 의군(義軍)의 의병대장이 된 公은 청주대흥산(靑州大興山)에 웅거하여 양민을 학살하고 재물을 노략질 하는 오만여명의 황건적을 일격에 무찌르는 대승(大勝)첩을 효시로 세상을 크게 어지럽혔던, 황건적의 무리를 완전히 토벌하여 그 전공이 하늘에 닿았었다,
그러나 부패한 간신배들의 농간으로 인하여 의기(義氣)와 용맹의 합당한 관작은 물론 관기(官旗)도 갖지 못한 채 유전(流轉)하며 각지의 군웅(群雄)들과 자웅을 겨루다가, 서기 194년에 서주목(徐州牧)이 되고 후일을 도모하고자 병마를 조련하던 중 고사(高士) 사마휘(司馬徽 : 水鏡先生)와 서서(徐庶) 단복으로부터 륭 중(隆中) 고을에 와룡선생 대현인 제갈량(臥龍先生 大賢人 諸葛亮)字 공명(孔明)은 주(周)나라 800년을 일으킨 태공(太公) 여망(呂望), 또는 한나라 창업 500년의 기초를 닦은 장자방(張子房)에 비길만한 당대의 대재(大材)라는 말을 듣고 감탄한 공은 제갈량을 군사(軍師)로 삼고자 관우 장비와 함께 삭풍(朔風)이 몰아치는 겨울, 제갈량의 초로(草蘆)를 찾아 갔으나, "행운종적(行雲踪蹟)이 일정치 않아 어디에 갔으며 언제 올지 모른다."는 동자(童子)의 말을 듣고 돌아온 공은 섣달 그믐날 살을 예일 듯이 휘 몰아 치는 차가운 눈보라 길을 헤치며 제갈량의 초로(草蘆)를 또 다시 찾아간 공에게 "제갈공명(諸葛孔明)은 아침 일찍 어디론가 떠나고 없다"라는 제갈공명의 아우 말을 듣고 다시 찾아오겠다는 간절한 뜻을 글로 남기시니 "備(비)가 높으신 이름을 사모한지 오래매 두번 뵙고자 찾아 왔다가 두 번다 허행을 하게 되오니 섭섭한 마음 측량할 길 없습니다.
備(비)는 한조모예(漢朝苗裔)로서 외람되게 분수에 넘친 명작을 받자 왔으나 엎드려 현하정세를 관망하건대 조정이 능체(陵替)하고 강기(綱紀)가 무너지고 군웅(群雄)이 나라를 어지럽게 하고 악당이 천자를 속이니 참으로 備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備는 비록 광제(匡濟)하려는 성심은 있다 하오나 실로 아무런 경륜 지 책(經綸之策)이 없습니다. 오직 바라 옵 기는 선생의 인자와 충의이오니 선생은 개연히 여망(呂望)의 대개를 펴시고 자방(子房)의 홍략(鴻略)을 베푸시옵소서, 오늘은 우선 글로 아뢰옵고 다음날 다시 목욕 재개하고 특히 존안을 뵈옵겠습니다." 라고 글을 공명선생의 동생에게 부탁(付託)하고 물러 나왔다.
다시 길일을 택하여 목욕재개하고 세 번째 제갈공명을 찾자 장비는 물론 평소 온후했던 관우까지도 못 마땅히 하며 만류하자, 공은 "옛날 주나라의 문왕이 연수(涓水)에 가서 태공망을 찾았을 때 태공망은 낚시를 드리운 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문왕은 그뒤에서 낚시질을 방해하지 않고 해가 질 때 까지 기다렸던 것이다. 태공망은 그 성의에 감동하여 문왕(文王)을 보좌하게 되었고 마침내 800년의 주(周)나라 기틀을 잡게 된 것이다.
옛날 사람이 이러했거늘 이정도의 고생쯤은 이 玄德(현덕)은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관우와 장비를 꾸짖고, 세 번째 제갈공명의 초려문전(草蘆門前)에 이른 공은 제갈공명을 찾자 제갈공명은 그때 초당(草堂)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공은 선생께서 깨기를 기다렸다가 잠에서 깨어난 제갈공명에게 한실(漢室)은 기울고 있으며 간신들은 천자의 총명을 가리 우고 역적이 득세하는 이 난세를 구할 방책을 묻고 사부(師父)가 되어 줄 것을 간청하자 청경우독(晴耕雨讀)하고 싶다고 거절하는 제갈공명에게 재차 "지금 공명이 나서지 않는다면 한실의 천하는 망하고 말 것이니 슲은 일이다." 라고 탄식하며 다시 간청하자 그때야 제갈량은 "장군은 저를 만나기 위해 제주(諸州)를 헤 메셨고 저는 장군의 부름을 받기 위해 오늘까지 초야(草野)에 묻혀 때를 기다렸는지 모르겠다.
별재주도 없는 이에 대하여 삼고(三顧)의 예를 다하고 과분한 지촉(至囑)으로 부르셨으니 견마(犬馬)의 힘을 아끼지 아니하고 국사에 미력을 다하겠다." 라고 응낙하면서 공에게 말하되, "북은 조조에게 맡겨 천시(天時)를 차지하고 장군(將軍)은 인화(人和)를 차지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먼저 형주(荊州)를 취하시어 자기 집을 삼으시고 그다음으로 서천에 기업을 세워 정족지세(鼎足之勢)를 이루신 연후에 중원(中原)을 도모하게 될 것입니다." 라고 공명은 이미 천하가 삼분(三分)할줄 미리 알고 있었으니 참으로 만고에 드문 천하대재(天下大材) 예언가를 얻으셨으니 마치 구름을 헤치고 청천(靑天)을 보는 듯 공께서 몹시 기뻐하셨다.
그때 공의 나이 47세요 제갈공명은 27세였다. 서기 207년 이른바 삼고초려(三顧草蘆) 끝에 제갈공명을 군사(軍師)로 삼은 유비장군은 제갈공명을 오(吳)나라의 손권(孫權)에게 보내어 오(吳)와 군사동맹을 맺게 하여 조조와 대결한 것이니 이를 두고 그 유명한 적벽대전(赤壁大戰)이라 하며 이 전투에서 오나라 손권과 유비장군의 동맹군은 불과 5만의 군사로 조조의 80만 대군과 격전 끝에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 청사에 남은 적벽대전의 지역은 지금의 양자강 유역 호 북 성(湖北省)의 가어 현(嘉魚縣)으로서 당시 손권과 유비장군의 동맹군에게 대패한 조조가 혼비백산 폐주하다가 관우에게 포로가 되어 죽게 된 것을 의리에 강한 조조와의 옛정을 못 잊어 그를 살려 보냈던 것이다.
이에 군사인 제갈공명은 군령(軍令)을 저버린 관우를 군율(軍律)에 따라 처단하려하자 공은 군왕의 신분이면서도 신하인 관우를 살리기 위하여 또 다른 신하에게 사죄하는 것도 불사했던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적벽대전에서 대승을 거둔 공은 서기 209년 그 여세를 몰아 형주를 점령하여 국가의 기반을 구축하고 병마를 조련하여 무릉(武陵)에는 장비, 장사(長沙)에는 관우 등을 보내어 차례대로 평정하고 그 싸움에서 오호대장(五虎大將)의 한사람인 황 충 장군(黃忠將軍)을 얻었으며, 조운 자룡은.. 상산사람으로 16세 소년의 나이에 세상에 난 다.
관우. 장비. 황 충, 어 촉의 5호 장군의 한 사람이었으며,용맹과 지혜를 두루 갖춘 삼국시대 최고의 장수 펌....많은 삼국지 독자들에게서도 이미지가 아주 좋게 남는 인물이 아닐까 싶다.
출중한 외모에 훌륭한 무예 능력을 가진 의리의 사나이의 이미지로.. 하지만 실제로 그의 마스크는 평범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무예 능력에 대한 논란도 많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담력과 용맹함은 그 누구에게도 절대 뒤지지 않았다는 사실!
(개인적 생각으론 무력이 매우 뛰어났기에 저러한 기상을 보였을 것이라고 본다.
괜히 오호대장에 속하진 않았을 것이고..)
그리고 그는 매우 우수한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
백성들을 위한 대의를 품고 있었고, 언제나 충직하였다.
자신의 공로를 과시하지 않고, 명리를 추구하지 않았다.
훌륭한 장수였음에도 그는 촉나라 유비의 경호를 담당하는 지위에만 머물러 있었다.
조운보다 늦게 촉나라에 합류한 장수들보다도 낮은 지위였다.
유비는 그를 가까이 두고 싶어 했으리라 본다.
아들을 구해준 사람이니만큼 특별한 대우를 해주고 싶었을 수도 있고..
하지만 조운의 훌륭한 성품과 늠름한 기상을 맘에 들어 해서가 아닐까..
언제나 곁에 두고 싶은 친구를 생각하듯이..그는 단지 칼만 잘 쓰는 무장으로서의 차원을 뛰어 넘어서 참된 의리로서 매사를 신중하게 판단한 진정한 사나이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계양(桂陽)에는 조운을 보내 항복받고 영양(零陽)등 사군(四郡)을 모두 평정하였으며 주변의 대 소국을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평정하여 촉한(蜀漢)을 세워 황제의 제위에 오르셨으나, 후주(後主)의 모친은 당 양 싸움에서 아들을 살리기 위하여 조운에게 맡기고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하고 감부인은 당 양 싸움에서 형주를 차지하고 있을 때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손부인(孫夫人)은 공이 육손(陸遜)에게 패하자 죽은 줄 알고 양자강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등 가정에 헤아릴 수 없는 아픔을 당하였으며, 도원의 의형제인 관우는 형주에서 오나라 여몽대장에게 사로잡혀 죽었고 이를 안 장비는 그 원수를 갑 고 자 오나라에 진격하다가 부하에게 죽음을 당하는 등의 애석함을 안고 재위 2년 동안에 인 의덕(仁義德)을 겸비한 황제께서 공명선생과 같은 천하 대재(大材)의 도움을 얻어 정사를 베푸시다가 천수를 다하지 못하시고 서거하시니 향년 63세이시었다.
태자유선(太子劉禪)이 후 황제(後皇帝)에 즉위하셨으니 한고조의 23세손이시고 재위 41년에 향년 65세에 서거하셨다.
아버지 소열황제께서는 임종 때 차남노왕(次男魯王)을 불러 "내가 죽은 뒤에 너희들 형제는 승상 제갈공명을 아버지로 생각하고 섬기도록 하라. 무슨 일이든지 승상의 가르침을 따라야만 한다." 라고 하셨다. 또 소열황제는 유언으로 부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물이선소 이불위(勿以善小而不爲 : 선한일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아니하지 말 것이며) 물이악소 이위지(勿以惡小而爲之 : 악한일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결코 하지 말아야 한다)" 라고 하셨으며 "현(玄)과 덕(德)은 사람을 움직이는 길이다." 라고 하셨던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