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여전에 받은 징집통지서에 따라 11월29일 오전 10시까지 대구시민 운동장에 집결. 11월 27일 시골동네 친구들과 이별의 환송회를 밤새도록 했다.
난 어머님과 대구 아기(영미)업은 큰누나의 배웅을 받으며 대구시민운동장으로 갔다. 내이름이 호명되고, 운동장으로 들어갈때 어머님께서 내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고 울상이 된 어머니... 나도 눈물이 나올것 같아서 놓아주지 않는 내손을 억지로 뿌리치며 뒤도 안돌아보고 운동장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시간이되어 인솔병의 상냥한 안내로 대구역사안으로 들어갔다. 누님과 어머님께서는 돌아가셨는지 아직 거기에 있는지는 알길이 없었다.
기차를 타고 좌석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손수건과 손을 흔들고 불렀으나 창문이 꼭닫혀져있어서 소리는 들을수 없었다. 기차가 기적소리와 함께 천천히 움직이자, 환송객중 여러사람들이 기차를 따라오며 소리를 지르고 손을 흔들며 이별을 아쉬워 했다.
기차가 속도를 내어 대구역이 안보일정도로 멀어지자 상냥했던 인솔병이 대뜸 욕을하며 우리를 위협했다. 180도 달라진 모습에 우리는 바짝얼어 붙었다. 겁이나 죽을것 같다.
의자위에 수류탄 의자밑에 수류탄... 동작이 느린 몇몇이 본보기로 구타를 당했다.
아직까지 사제복을 입은 우리는 새파랗게 질려서 인솔병의 말한디도 놓칠세라 눈과 귀를 안내병을 향해 쫑긋 해졌다.
형님네들한테 얘기만 들었던 논산 훈련소가 왜그렇게 멀었는지 한참을 가서 논산역을 지나쳤다. 이거뭐여? 강경역 갔다가 다시 연무대역에서 해가 늬어늬엇 넘어가는 오후 3시쯤 하차했다.
인솔병들이 우리를 논산훈련소 요원들에게 넘겨주었다. 우리 장정들은 훈련소 정문앞에서 인원점검을 하였다. 그런데 끈질기게도 거기까지 환송객들이 따라왔었는데 훈련소로 바로왔는지 우리와 기차타고 같이 왔었는지는 모르겠다.
우리를 인수하였던 훈련소 요원들이 상냥하게 우리를 대해줬다. 다시 정신이 헤이해진 우리는 훈련소 요원을 따라 사제복을 입은채 오합지졸로 걸어들어갔다. 조그만 언덕을 넘어 정문이 보이지않자 갑자기 훈련소 요원이 제자리에섯! 개새끼들아!! 우리는 깜짝놀라 얼어붙었다.
욕이 난무하고 엎드렷. 죄로굴러 우로굴럿! 또다시 정신이 혼미하고 큰일났다 싶었다. 그때부터는 네줄로 줄을 잘맞추어 제법 군기든 자세로 걷다 뛰다해서 수용연대라는 곳에 도착했다.
내무반을 배치받고 입에 맞지않는 저녁을 먹었다. 논산에서의 첫날, 난 논산이 별천지인줄 알았지만 우리시골 경북 의성군 의성읍 철파동과 아무 차이가 없었다..ㅎ
다음날(1982년11월30일 )부터 신체검사를 다시했다. 의성국민학교에서 신검받을때는 2급을을 받았는데 여기서는 1급갑을 받았다.
논산훈련소 26연대 ?대대 ?중대 ?소대 교번 56번을 받았다. 55번인 안동와룡출신 손씨 성을 가진 친구와 훈련 끝날때까지 친하게 지냈다.
1982년 12월 한달을 군인으로서의 기본 교육을 받았다. 훈련이 끝나고 바늘과 실로 직접 이등병 짝대기 한개를 꿰메 달았다. 무거워 죽는줄 알았다. 전우들과 서로의 계급장을보고 입이 째지도록 웃었다...ㅎㅎ
밤에 대령계급장을 단 논산훈련소 수용연대장님의 배웅을 받으며 연무대역에서 기차를타고 전방으로 전선을 지키기 위해 북으로북으로 달렸다.
영등포역인가 어디에서 의정부가는 노선으로 망월사역에 도착했다. 1983년 1월 새해초 깜깜한 새벽 306보충대 연병장에서 인원점검을 하고 난로도 안피어진 길다란 내무반에 배정 받았다. 온기없는 내무반에 군용모포는 많았다. 이름도 모르는 옆전우와 모포를 여러겹 덮고 꼭붙어 잘잤다.
아침에 일어나 연병장 맞은편 산의 바위가 생전못보던 하얗고 우람한 바위가 하늘로 뻗어 있었다. 나중에 도봉산이라는걸 알았다.
우리는 여러사단으로 배치받아 흩어지고 약 40여명은 서울교외선을 타고 30사단이 있는 화전역에 도착하여 30사단 중사한분이 우리를 인수했다.
사단휴양소에서 따뜻하게 잘지내다가 92연대(연대장안병호대령)로 갔다가 3대대(대대장제정관중령) 12중대(중대장노태영대위)에 배치받아 1985년 4월중순까지 잘지내고 집에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