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새부터인가 나는 "두 마음을 품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과 같은 자..." "그 두 마음 때문에 결코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 야고보는 의심하는 자를 가리켜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과 같은, 그래서 두 마음을 품게 되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은 주께로부터 얻을 것을 조금도 생각지 말라고 했다.
오랫동안, 거의 20여년 동안 말씀을 배워왔다. 내가 자란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데 거의 모든 전심전력을 다하는 교회였다. 모교회를 떠난 후, 나는 전문적으로 말씀을 배우는 곳에 내 흔적을 남겼다. 지금도 그 과정은 지루한 듯 모르게 계속되고 있고, 또한 나는 그 말씀을 가르치는 자로 벌써 수년을 열성을 바쳐왔다. 나는 지금 그 유산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또한 기뻐한다. 말씀은 모든 흔들림에도 궁극적으로는 굴하지 않는 반석과 기둥이 되는 것을 절감한다. 이건 그 누구와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내 기업이다. 나는 복을 받은 자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확신과는 상관없이 경험하는 내면의 혼돈이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다른 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는 조용한 공간에서 혼자만의 상념에 사로잡히는 때의 "나"와, 정해진 주일의 예배 시간에 졸린 눈을 비비면서 나와 앉은 젊은 눈망울의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의 "나"라는 전혀 다른 이중성의 내가 있다는 것을 때로 발견한다. 복음을 전할 때의 "나"는 말하자면 "설득을 하는 사람"이다. "믿으라"고 말한다. 한치의 틈도 허용되지 않을 만치 정제된, 최대한의 논리를 이용하여 복음을 변증(辨證)한다. 그리고 설득당하는 모습을 보기를 원하며, 아집과 독선을 포기하고 손을 들고 나아올 것을 요구한다. 성령께서 그 논리 위에 기름부으시기를 기도하면서 "불붙은 논리"가 그들을 압도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예배가 끝난 후, 무감각한 듯 돌아가는 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쉰다. 왜 저들은 믿지 못하는 걸까? 왜 바뀌지 않는 걸까?
조용한 나만의 공간,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나의 방에서 오직 현악기의 삐걱대는 현만이 그 정적을 타고 자신의 목소리를 발할 때, 나는 턱을 괴고 쉬이 상념에 빨려 들어간다. 나는 지금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정말로 믿고 있는가? 그가 내 삶에 지금도 개입하시고 세밀히 간섭하신다는 것을 믿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 가시적인 증거는 무엇인가? 나는 왜 이리 무기력한가?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제대로 믿지도 못하는 것을, 확신조차 하지 못하는 것을 아이들에게 믿으라고 떠들어대는가? 나는 언제부터 위선자가 되었나? 계속해서 이 자리에 있는 것이 합당한 일인가?
얀시는 자신이 선천적으로 회의론자 같은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자신은 그러한 상태로 계속 머물기보다는 노인들이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그런 신앙을 소유하게 되기를 갈망한다고 말한다. 지금껏 그가 써 온 많은 글들의 주제가 그러했거니와 그는 정말로 의심이 많은 사람이다. 그의 직업이 기자인 것을 증명하듯, 글을 쓰는 칼럼니스트인 것을 드러내듯 그는 교회의 신앙 뿐 아니라 자신의 신앙 또한 외부에서 들여다보는 객관적 시선을 유지하며 바라보는 방식을 택해왔다. 어떤 면에서 이러한 시선은 정말 위험하다. 신앙이라는 것은 겉으로 객관적으로 증거가 발견됨으로 검증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외부에서 하나님을 찾으려는 노력을 통해서 하나님이 무조건 발견되는 것도 아니다. 결코 단순하지 않은 신앙의 신비의 요소는 단순히 지켜보고 관찰한다고 발견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내부의 일원으로, 한 요소로 자신의 그 안에 함몰되어야 비로소 볼 수 있는 영역이라는 것이 훨씬 정답에 가깝다.
그럼에도, 나는 신앙을 바라보는 얀시의 3인칭 관찰자 시점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무엇보다도 그는 정직하기 때문이다. 최소한 그는 내가 갖고 있는 그 가식된 위선을 내다 버렸기 때문이다. 그의 모든 책에서 나타난 자연스러운 그의 회의적 성향을 그는 이 책에서는 더욱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그 의심은 신앙을 파괴하고 객관적 진리를 상대적인 허구로 교체하는 류의 것이 아니다. 그는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와 신앙인을 사랑하는 순수함을 가지고 참된 신앙을 세우기 위해 의심을 사용한다.
그의 고민의 여정을 그와 함께 걸으며 때로는 답답하고 어색하기도 했다. 나로선 그냥 덮어버린 질문들이 그에게는 열린 호흡이 되어 살아 있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덮어버리는 것이 덜 피곤하고, 편하고, 쉬운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얀시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덮어둔 상처가 언젠가 곪아 터져서 예상치도 못했던 심각한 병고의 연쇄반응을 일으킬 수 있음을 그는 미리 간파한 것 같다. 정직하고 건전한 상채기가 있을 때, 그것을 지금 당장 도려내는 것은 아픔이고 고통이다. 그러나 장기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때, 그 상처는 가능한 빠른 시간 내에 제거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물론 의심이 모든 해답을 낳는 것이 아님을 얀시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얀시의 이런 의심 또한 "하나님의 인격성" 앞에서 행해지는 것이라면 오히려 "해답의 명료함"보다 더 권장할 만한 "관계의 친밀함"을 유도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어쨌든 그는 하나님과 정직하고 솔직한 결혼 관계를 유지하기 원하니까...
"관계"에 대한 좋은 통찰을 얻는 것이야말로 최대의 수확이다. 우리의 신앙은 사실 무엇 무엇을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의 행위적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이차적인 것일 뿐이다. 문제는 그 행위를 낳는 인격과 관계의 문제이다. 얀시가 아이와 어른과 부모의 삼 단계 성장 단계를 가지고 신앙을 이야기하듯, 신앙은 우리의 삶이요 여정이다. 그리고 그 삶의 과정은 하나님과 결혼한 우리가 함께 배우자인 하나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어가는 인생의 여정이다.
그리고, 그 날은 토요일이다. 역설이 존재하는 날... 되기도 했고, 되지 않기도 한 그날. 완전한 승리가 있지만, 더 궁극적인 승리를 바라보며 걸어가는 날이다. 이 길은 노정(路頂)이다. 하나님은 단 한번도 우리의 신앙이 무균 상태의 인큐베이터 속에서 호흡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많이 나열될 수 있는 고통의 행렬들 속에서 살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토요일은 혼자 걷는 길이 아니다. 그 누구보다고 친밀하고 애정어린 관계에 있는 그분의 손을 잡고 예정된 일요일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노정이라고 말씀하셨다. 혼자서 완벽한 자유와 방종에 내어지는 것보다는, 힘이 드는 길이긴 하지만 둘이 같이 가는 길이 더 의미있지 않겠는가! 나라면 두 번째의 길을 택하고 싶다.
--- 2001/05/19 (cauv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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