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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과 협동조합운동에 생애를 바친 복태봉(卜泰奉) 조합장 1부 |
글쓴이 : 우보
조회 : 17 |
(농업협동조합 성공사례) 2) 새마을과 협동조합운동에 생애를 바친 복태봉(卜泰奉) 조합장 전북 남원 대산 운교리. 남원군농업협동조합장 지금은 농촌에 살거나 도시에 살거나, 농업협동조합(농협)을 알거나 모르거나 직접 간접으로 상관없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농협의 역할이 크다. 알게는 전국에 산재해 있는 농협과 금융거래를 하거나 농협 하나로 클럽에서 생필품을 구입해 쓰는 일, 농협에서 운영하는 주말농장에서 청정채소를 가꾸어먹는 일, 명승지 농협공제 휴양소에서 여가를 즐기는 일, 조상 산소의 벌초를 부탁하는 일 등이 있고. 모르고는 있지만 매일 식탁에 오르는 먹거리의 60%는 농협을 통하여 유통되고 있다. 그러나 1958년 농협이라는 조직이 미약하게 태동 한 후. 오늘같이 성장해 오기까지는 수많은 사연들과 숨은 이야기들이 쌓여 있다. 한국의 근대화가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30-40년의 짧은 기간 동안에 농협이 이 정도로 발전했다는 것도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사례다. 서구의 민주주의 역사와 협동조합 역사는 비슷한 연륜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복 태봉 조합장의 사례는 농협의 발전사일 뿐만 아니라, 한국농촌사회 발전사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와 비슷한 사례는 고흥 금산, 합천 초계, 성주 초전, 의성 금성, 군위 효령, 영암 시종, 안성 미양, 양구 신우리, 이천 장호원 등 전국 도처에서 뜻있는 운동가들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었고, 이 운동들이 새마을운동의 큰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1) 남원장날 이야기는 열녀 춘향으로 이름난 남원 광한루에서 북쪽으로 8km 정도 떨어진 대산면 소재지인 운교리에서 시작된다. 대산면은 지리산 산자락에 가깝게 위치하여 해방 후 사상적 혼란기에 좌우익분열이 극심했던 곳으로, 운교리 인근 3개 마을에서 30여 명의 희생자가 생겼고, 6․25때는 100여 명이 빨치산으로 입산 도피했다. 이러한 어려움을 겪고 보니 가난한 마을형편은 더 할 수 없는 가난의 수렁으로 빠져들어 헤어나지 못했다. 농사는 조상대대로 내려오던 대로 양식도 되지 못할 정도였고, 부업은 찾아볼 수 없었으며, 농한기만 되면 술과 도박으로 소일하는 것은 다른 농촌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복 태봉 씨를 더 안타깝게 하는 것은 5일마다 돌아오는 남원장날이었다. 운교리 155호에서 120여 명이 줄을 이어 장을 간다. 쌀 한두 됫박이나 고추 한두 근, 계란 한두 줄 갖고 나가, 고등어자반이라도 사오는 사람은 볼 일이 있는 장이고, 볼일 없는 장에 할일 없이 가는 사람이 더 많았다. 장날은 생일날이라면서 돈 40-50원 갖고 장바닥을 한 바퀴 돌고는 술집에서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면 장볼 일은 끝나는 것이었다. 정말로 할일 없이 석양 때까지 서성대는 것이 장날만 되면 반복되는 일이었다. 지금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농산물이 상품용으로 생산되지만, 이때는 거의 물물교환에 가까울 정도로 꼭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하여 자기가 생산한 물건을 갖고 나갔던 것이다. 운교리에서 남원장날 나가는 물건들을 보면 한두 되씩 싸들고 나가는 쌀, 보리쌀, 잡곡, 말린 고추, 계란 한두 꾸러미, 돼지새끼, 강아지 네댓 마리, 닭 한두 마리, 삼베나 무명베 한두 필, 간혹 지리산에서 캔 약초말린 것 등 아주 보잘것없는 물품들이었고, 큰일을 치르거나 목돈이 필요한 경우는 소를 몰고 나가거나, 농사를 좀 많이 하는 집에서는 쌀을 가마니로 내는 수도 있었다. 시장에서 사들고 들어오는 물건들은 제사장, 잔치장을 보는 일 아니면 간 고등어, 간 갈치, 마른 멸치, 새우젓 정도의 반찬거리와 검은 세탁비누, 양잿물(가성소다), 염색용 물감, 등불을 켤 석유 한 되, 바늘, 실, 광목, 대장간에서 벼린 낫, 괭이, 무쇠 솥 등의 농기구. 간혹 돼지새끼나 송아지 등을 사오는 정도였다. 이를 지켜보는 복 태봉 씨는 한 달에 6번 있는 장날마다 별로 할일도 없이 80% 이상의 가구에서 볼일 없는 장보기로 소일을 하고, 갖고 나가는 물건들이나 사오는 물건들이 상인들의 농간에 휘말려 됫박에 속고, 저울에 속고, 값에 속는 것을 보면서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주리고 가난한 형편에 이런 습관으로 허비되는 돈을 1년간 계산해 보면 막걸리 한 사발 마시는 돈만 해도 적지 않았으며, 버려지는 노동력을 생각하면 더 큰 문제였다. 이러한 생태가 농민들을 더 깊은 가난의 수렁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때 상황으로는 대책 없는 고민일 뿐이었다. 하도 답답해서 이웃마을의 경우를 지켜보았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복 태봉 씨 자신은 농토도 다른 농가보다 적지 않았고, 면 소재지인 좋은 조건에서 연초(담배) 소매상과 유류(석유) 취급소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유한 편이었으나, 농촌사람들의 비참한 생활상이 남의 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2) 운교리 농업협동조합의 태동 이즈음 정부에서는 일제 금융조합을 폐지한 후에 농촌 금융업무를 대신할 농업은행을 설립하고, 별도로 1958년 5월에 전국 이․동 단위로 이동농협을 별도로 설립하도록 했다. 그 당시 이․동 농업협동조합은 이스라엘이나 덴마크 등 선진국의 농협을 본받아 설립은 했지만, 우리의 실정에는 맞지 않았다. 제도는 선진국 제도요, 선진국에서는 잘되고 있는 제도였지만. 우리는 협동조합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농협은 어디까지나 경제단체이기 때문에 경제적인 기반이 갖추어져야 되는데, 그때의 우리 농촌은 그렇지 못했다. 실정에 맞지 않는 제도부터 도입했기 때문에 이․동마다 농업협동조합 간판은 만들어 걸었지만, 하는 일은 조합장이 농민들의 도장을 거두어 갖고 다니면서 상호 연대보증을 세워 외상비료를 구입하거나, 조금씩 나오는 농사자금을 몇 사람의 이름으로 융자해서, 조합원 골고루 나누어주는 일이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농민 자신도 모르는 차주(借主)가 되는가 하면, 본인도 모르는 보증인이 되어 있기도 했다. 조합장이나 이장이 관리를 제대로 한 경우는 별문제가 없었지만, 누구의 돈을 받았는지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엉뚱한 채무만 남는 수가 있는가 하면, 일부 이장이나 조합장이 농민들로부터 회수한 돈을 유용하거나 횡령 도주하여 아무 것도 모르고 있던 농민조합원들의 가재(家財)에 차압이 붙고, 가산(家産)을 날리는 수가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처음으로 시도된 협동조합은 조합원의 이득보다 원성과 부작용을 낳게 되었다. 농협법 제1조를 보면 ‘농민의 자조적인 협동조직을 통하여 농민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향상을 도모 한다’는 요지다. 농민들의 경제적인 역량을 증대시켜 사회적인 지위를 높이고자 하는 것이 주목적이다. 이것은 복 태봉 씨의 고민과 일치했다. 그래서 복 태봉 씨는 155호의 주민을 상대로 다섯 번의 총회를 열고, 여섯 번의 호별방문 설득으로 49명의 조합원들로부터 1인당 400원의 출자금을 받아 운교리농협을 설립했다. 그 다음 뜻있는 임원들과 함께 설득 노력을 계속한 결과 2개월 만에 90호가 농협에 가입했다. 그러나 밤낮을 가리지 않는 끊임없는 설득에도 불구하고 65호는 끝내 참여하지 않았다.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은 운교리농협이 처음으로 내세운 사업이 남원장날 일어나는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농민들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구판장사업부터 해나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우선 농협이 자리를 잡으면 자신의 생업과 경쟁이 된다는 생각이요, 본인이 임원으로 선임되지 않았다는 이유, 복 조합장과 씨족적인 대립관계라든지, 400원의 출자금이 없는 경우, 반대하는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는 사람, 무조건 조합은 싫다는 등, 이유가 다양했다.
그렇다고 무작정 기다릴 수만 없는 형편이어서 90명의 조합원을 바탕으로 출범을 하고 보니 마을이 두 패로 갈라졌다. 조합원과 비조합원으로 나누어 반목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를 본 복 태봉 조합장은 몸으로만 뛰어서는 도저히 뜻을 이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체를 규합하고 이들의 의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자기희생으로 솔선수범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의 가정경제에 해마다 상당한 수익을 내주고 있는 연초소매점과 유류취급소를 협동조합사업으로 넘기기로 했다. 이에 대하여는 가족들의 반대가 적지 않았음은 충분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뿐만 아니라 복조합장의 진심도 모른 채 일부 조합원들과 비조합원들은 복 조합장이 그렇게 큰 개인이권을 포기하는 것은 어딘가 다른 뜻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소문이 나기도 했다. 이를 보다 못한 복 조합장은 또 주민회의를 열었다. 본인의 진심을 역설을 하면서 이것으로도 조합 사업이 정상적으로 될 수 없으니 마을공동답 600평을 매각하여 전 주민에게 고루 나누고 조합출자금이 없어 가입하지 못하는 분들은 이 돈으로 출자금을 내자는 제안을 하였다. 그리고 조합 사업을 통하여 벌어지는 수익금으로 다시 공동답을 구입하기로 하되, 2년 이내에 원상복구가 되지 않으면 복 조합장 사재로 600평의 마을공동답을 변상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렇게 해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어 다섯 차례의 주민총회와 끈질긴 설득으로 2/3 이상의 찬성을 얻어내 3년을 끌어온 구판장사업이 출발하게 된 것이다. 구판장 하나 여는 데 3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으니 그 동안에 복 태봉 조합장이 감내했어야 할 시련이 얼마일지는 충분히 짐작이 간다. 새로운 운동을 전개하는 데 걸림돌이 있으리라는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힘들 줄은 상상도 못했던 바다. 하기야 관습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생활방식을 심어주는 것이 쉽지는 않았고, 이에 관련된 기득권자들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저항은 필사적이기도 했다. (3) 운교리 농협구판장 운영 이런 과정을 겪은 구판장이 문을 열었다고 해서 순조로운 것이 아니었다. 반대하던 사람들의 방해가 집요했던 것이다. 야밤에 구판장 간판을 부셔버리는가 하면 벽을 뚫고 들어와 돈과 서류를 훔쳐갔고, 온갖 협박문을 작성하여 마을 이곳저곳에 붙여 놓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복 조합장은 이들을 찾아내기 위하여 뜻을 같이 해온 사람들과 밤샘을 하면서 지키기도 했지만, 벽을 뚫고 들어와 상품과 돈을 훔쳐간 일이 다시 발생했다. 어느 날 이른 아침 이 광경을 본 조합장은 망연자실(茫然自失)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대성통곡이라도 했으면 속이 풀리겠지만, 이를 악물고 참는 수밖에 없었다. 이때 경찰관과 마을사람들이 몰려왔다. 전 조합원들과 경찰이 나서 범인을 찾고자 했으나, 이 사건은 물욕보다 반(反) 농협행위임이 확실하고, 심증이 가는 사람이 있지만 영원한 적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이 정도에서 그냥 넘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구판장에는 시장과 똑같은 물건을 갖추어 놓고, 가격도 유리하게 판매를 하는데도 구판장을 이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장날이면 여전히 시장으로 발길을 돌리는 것이었다. 장날이 되면 임원들과 조를 짜서 장거리에 서서 장바구니를 들쳐보면, 대부분이 구판장에 있는 물건들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 잡고서서 구판장을 이용하면 이익금을 이용고 배당으로 돌려받을 수 있고, 장에 왔다 갔다 하는 시간도 벌 수 있다는 설명을 해 보지만 이제는 구판장에서 일하는 조합서기를 믿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이 사온 가격을 속이면 그 사람 배만 불려 주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일제에 속아온 습성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도처에 불신습관은 빠짐없이 있었다. 복 조합장은 또 임원들과 상의했다. 총회에서 선출한 조합원 대표 6명으로 구성된 물가조정위원회를 두기로 했다. 물품을 구입할 때마다 교대로 같이 참여하여 가격을 확인하고 판매가격을 결정했다. 구판장 운영에 대한 책임을 조합 상무와 같은 지위에 두고 임원회의에도 참석하도록 했다. 이로서 조합원들의 구판장에 대한 불신이 없어지자 조합원들도 구판장 이용이 눈에 보이게 늘어났다. 소나 돼지를 팔러가는 사람 이외는 남원 장을 가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고, 남원장날 다음날은 구판장이 북새통을 이루었다. 농협운동이라는 것이 이렇게 힘이 들었지만, 그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하자 그 동안의 어려움도 다 사라졌다. 복 조합장과 임원들은 이렇게 따라주는 조합원들의 이익과 조합발전을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혜택을 가능한 한 늘려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여러 가지 방안을 계속 찾았다.
협동조합 운영원칙에는 현금주의라는 것이 있다. 이러한 원칙이 있지만 초기 이용도를 늘리기 위해 외상거래도 허용했던 바 외상매출금이 운영에 지장을 가져올 정도로 늘어났다. 이것은 구판장 운영에도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조합원들에게도 과소비를 조장시키고, 외상대금 누적은 가계에 부담을 주고, 이로 인하여 조합과의 거리감을 새로 만들게 될 가능성이 있어, 임원회의에서 현금거래 원칙을 결정했다. 그러나 조합원들은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거부반응을 나타냈다. 속사정은 이해하지도 않은 채, 조합이 자리를 잡으니까 조합원 편의를 무시한다면서 구판장 판매원에게 폭언을 하고 행패를 부려 어린 판매원이 울음을 터뜨리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이대로 계속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임원들이 돌아가며 일일 판매원을 하면서 조합원들을 설득하고, 마을을 순회하면서 교육을 반복해야만 했다. 또 이에 대한 대안으로는 현물거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날이 아니더라도 곡식으로 가져오면 조합이 우선 매입한 다음 구판장 물품을 구입하도록 했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운교리 농협의 구판사업은 제몫을 충분히 해 나갔다. (4) 이동조합의 합병과 사업 확장 그러나 150여 명의 조합원으로 운영되는 운교리 마을단위 농협만으로는 농민들의 어려움을 풀어나갈 수 있는 경제활동 조직이 될 수 없었다. 1970년이 되자 종합적인 농협기능의 필요성이 절실해지면서 인근 15개 자연부락으로 구성된 8개 이동조합과 통합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모든 시설이 협소했다. 3평의 구판장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었고, 사무실도 협소했다. 네 차례의 증축을 거듭했으나 역시 제 기능을 하기는 부족했다. 이즈음 국가적으로도 이동조합으로는 협동조합 기능을 할 만한 단위가 되지 못함을 깨닫고 우리 실정으로는 최소한 읍면단위는 되어야 경제활동 능력을 갖출 것으로 판단되어 전국적으로 통합작업이 이루어졌다. 이 제도를 보다 빨리 정착시키기 위하여 원하는 조합에는 보조금과 융자금 지원을 했다. 대산면 단위농협이 된 운교리조합은 75만원의 보조금을 받아 총공사비 350만원의 120평 종합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15평은 조합원들의 농산물을 사주는 판매장, 60평은 생필품을 공급하는 연쇄점, 15평은 농협공제(보험) 의료원으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사무실로 쓰게 되었다. 이렇게 종합농협으로의 면모를 갖추고 보니 업무내용이나 운영도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신용사업인 상호금융업무가 확대되고, 군 농협에서 취급하던 영농자재 구매사업, 공제사업, 비료, 농약, 농기계구입 등 대부분의 업무를 면단위에서 취급하여 조합원의 편익을 늘리고, 초등학교 학군을 기준으로 농협분소도 설치해야 했다. 농민조합원들도 이제는 농협의 편리함을 충분히 인식했을 뿐만 아니라, 농협이용은 본인의 이익과 직결됨도 실제로 느끼게 되었다. 그 예로 대산면은 지형 상 두 구역의 생활권으로 나누어져 있어 2개의 초등학교가 있다. 조합이 면단위로 통합이 되면서 연쇄점에서 학생들이 쓰는 문방구를 취급했다. 그래서 소규모로 이동조합이나 개인 문방구점에서 판매하던 학생용품을 팔지 않게 되자 학생들이 불편을 느끼고, 분교가 있는 지역에도 생필품 판매가 필요하게 되어 분교 인근에 연쇄점 분점을 설치했다. 그러나 연쇄점은 이용실적에 따라 이용고 배당을 하는데 그 많은 학생들을 개인별로 연쇄점 이용실적을 관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이 문제해결을 위하여 여러 가지로 숙의한 결과 학교(학생전체)를 한 사람의 조합원으로 보고 연간 이용실적을 계산한 다음, 졸업식 때마다 전교생에게 학용품으로 이용고 배당을 해 주자, 어린 학생들이 협동조합의 이점을 이해하고, 많이 이용하면 할수록 자신들의 이익도 올라간다는 것을 실감하기도 하고, 부모들의 이해를 높이는 데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연쇄점 분소를 내기 시작하자 큰 마을에서는 마을마다 분소를 내달라는 요청이 있어 관내에 5개의 분소를 설치하여 조합원들이 보다 더 가깝게 조합을 이용하면서 시간과 경비를 절약할 수 있었다. 마을단위 분소의 운영은 분소개설을 요구하는 마을마다 개인적으로 하던 술집이나 담배소매를 농협분소로 넘겨주었기 때문에 농주(막걸리)판매와 담배판매만으로도 한 사람의 판매원을 둘 수 있었다. 이에 대한 부수적인 효과는 농주를 농협에서 취급하니까 그 전에 술집에서 하던 도박이나 잡담으로 소일하던 일이 자연스럽게 없어지자 부인들이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이렇게 농협의 역할이 자리를 잡고 연쇄점 이용이 늘어나자 면소재지에 있던 각종 개인상점들에 지장을 주게 되어 상인들의 원성도 높았지만, 이들의 생계를 방관할 수는 없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조합에서는 본인들의 희망에 따라 농경지를 확대하여 농업에 전업하도록 자금을 융자해 주거나, 축산부업을 할 수 있도록 해 주기도 하고, 농협의 각종 사업장에 취업을 시켜 전업을 하도록 했다. (5) 농가부업 장려와 공동이용시설 확보 구판장으로 시작한 농협사업이 연쇄점으로 효과를 보이자 조합원들은 더 많은 사업들을 필요로 하게 되어 대산농협의 사업은 소규모 상호금융이 신용사업으로 확대되어, 고질적이던 고리채를 일소하게 되었고, 조합직영 도정공장, 부업장려를 위한 비닐우산 제조사업, 농협이발소, 목욕탕 등과 농촌지붕개량을 위한 기와공장, 지붕개량으로 얻어지는 볏짚을 이용한 가마니치기 사업, 유실수단지 조성, 종자개량사업, 안정농가 조성사업으로 확대되었는가 하면, 앰프(유선방송)시설을 하여 조합원 교육사업과 공지사항 전달을 쉽게 하면서 조합원 정서함양에도 도움을 주게 되었다. 이러한 사업들을 농협이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사업마다 나름대로의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다. 지붕개량의 경우, 운교리 155호 전부가 초가집으로 호당평균 천 평 정도의 논에서 나오는 볏짚은 대부분이 해마다 지붕을 다시 이는 데 사용되어 소먹이도 부족한 형편이라 볏짚가공품은 생각도 못할 정도였으며, 이에 소요되는 노동력 또한 적지 않았다. 초가지붕은 개량은 해야 되겠지만 이때는 새마을사업이 시작되기 전이라 자력으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농가에서는 자금력이 없기 때문에 이를 조합 사업으로 5년에 걸쳐 지붕개량을 하기로 하고 농협 기와공장을 만들었다. 일반기와보다 품질도 좋게 하면서 가격은 저렴하게 할 수 있는 계획을 세워 기와를 생산했다. 지붕개량에 필요한 자금은 10%만 자기부담을 하고, 나머지 45%는 5년 분할 장기융자를 하고, 45%는 농협에서 지원을 하도록 하되, 그 지원재원은 농협이용고 배당분으로 충당하도록 했다. 융자금 45%는 지붕개량으로 남는 볏짚으로 가마니를 짜서 연차적으로 상환하도록 했다. 이 사업은 농한기 유휴노동력을 활용하고 볏짚을 가공할 수 있는 일거양득(一擧兩得)의 효과를 거두고 근면․절약하는 생활습성을 심어주게 되었다. 도정공장의 경우는 면단위 농협으로 합병이 되기 전에 이동조합이 소유한 것도 있고 개인소유의 도정공장도 있었다. 큰 마을의 경우는 도정공장이 2개나 있는 수도 있었다. 이동조합 도정공장의 경우 합병조합의 자산으로 통합하는 데는 별문제가 없었지만, 조합장 개인이 소유한 도정공장이나 일반 개인소유인 경우, 도정공장에서 생기는 소득이 연간으로 볼 때 적지 않은 수입이어서 농협도정공장 설립에 대한 반대는 적지 않았다. 농협 도정공장이 생기는 경우 도정료문제나 수입 감소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에 저항이 심했다. 겉으로는 농협사업이니까 협조한다고는 하지만 이면으로는 복 조합장 개인에 대한 모함이나 무고 등으로 경찰서를 수없이 드나들어야 했고, 내부적으로는 큰 사업을 시작하려고 할 때 자체자금 부족이 큰 부담을 주고 있었다. 수십 번의 임원회의와 총회, 임원들의 끈질긴 설득으로 개인 도정공장들까지 농협으로 넘기겠다는 약속은 받았지만 시가보다도 반이나 높은 가격을 고집하는 데는 난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조합원들의 간접적인 이익까지 감안할 때는 그 조건을 수락해야만 했다. 이러한 고난을 이기면서 관내 도정공장은 농협사업으로 모두 편입되었다. 그러나 일부 조합원들은 농협은 도정시설이 낙후되어 쌀 소출이 적다는 이유로 남원읍내 도정공장으로 가는 수가 있었다. 이를 본 복 조합장은 자금 부담이 누적되고 있으나 현미기를 포함한 최신시설로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농협이 도정공장을 인수하였으므로 농민들의 불만은 완전 해소해 줘야 한다는 방침이었다. 농민들은 예전부터 도정공장을 잘 믿지 않았다. 같은 양의 벼나 보리를 도정해도 공장마다, 갈 때 마다 쌀의 양이 조금이나마 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며, 도정료도 일정하지 못하고, 되나 말질도 일률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농협은 농민들이 마음 편하게 도정공장을 이용하도록 해 주어야 했던 것이다. 복 조합장으로서는 당초 생각하지 않았던 자금까지 마련해야 하기 때문에 자금조달을 위하여 동분서주했고, 급기야는 개인재산을 담보로 사채까지 써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그 뜻을 굽히지 않고 만난(萬難)을 극복하였다. 이제는 도정공장을 모두 인수하게 되었으므로 국수공장과 착유(窄油)공장까지 갖추어 농민들의 공동이용시설을 완비해야했다. (6) 창고사업과 비닐우산 제조사업 농협이 생기기는 했어도 근 10여 년간은 창고도 없는 농협이었다. 농협의 창고는 농민들이 필요로 하는 비료를 보관해야 하고, 농민들의 주(主)생산품인 벼와 보리를 보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작 농민 자신들의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료는 농민이 다 부담하고, 그 수익은 개인 창고업자가 가져가는 상황이었다. 그때까지의 창고는 일제 때 공출미를 보관 관리해 오던 창고가 대한통운으로 인계되었거나, 일부 개인에게 불하되어 있었다. 농협으로서는 절실하게 필요는 느끼고 있었지만 자체적인 능력을 갖지 못함을 안타까워만 하고 있었다. 복 조합장은 이러한 현상을 보다 못해 1960년에 자체창고를 건립해야겠다는 방침을 세우고 1961년 7월에 높이 5.4m, 목조 함석지붕 40평의 창고를 착공하여 3개월 만에 완공하였다. 이 정도면 벼 4천가마를 보관할 수 있는 시설이었다. 소요자재는 농협에서 부담했지만 인력 공임은 모두 노력출자로 처리했다. 조합원들은 자신들의 창고를 짓고, 참여한 만큼 출자로 적립되기 때문에 눈물겹도록 열심히 해 주었다. 창고를 완성하고 비료와 정부양곡을 보관하기까지 복 조합장이 겪은 어려움은 창고를 짓는 이상으로 힘겨운 일이었다. 창고업자들이 자기들의 보관물량이 줄어드는 데 대한 각종 저항과 유관기관의 비협조는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렇게 어렵게 비료와 정부양곡 보관허가를 얻기는 했지만 정부양곡을 전부 보관할 수 없어 일부는 야적(野積)을 하고 매일 밤잠을 설치며 야경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1964년 2월) 새벽 4~5시경에 야적(野積)더미 한구석이 찢어진 채 10가마의 정부미를 도난당하였다. 이 광경을 본 복 조합장은 아연실색(啞然失色)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없어진 양곡이야 변상을 하면 되겠지만. 혹시 조합원 중에서 이런 불상사를 저지르지는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새벽에 조합원들과 경찰의 도움을 받아 사방을 뒤졌다. 날이 다 밝을 즈음 산 위로 도망치는 범인을 발견하고 추적하여 잡을 수 있었다. 다행히 다른 면 사람이었다. 이 순간 복 조합장은 남몰래 눈물을 흘리며 천지신명께 감사하게 되었다. 관내 조합원이 아님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제2의 창고를 건립해야 한다는 결심으로 바뀌었다. 조합원 총회를 통하여 복 조합장의 의사를 확인받고, 전번과 같이 자체설계와 노력출자로 콘크리트 구조의 40평창고를 준공(1964년 6월 15일)했다. 그러나 2주 후 6월 30일 야밤에 집중호우가 쏟아졌다. 주변 환경정리가 다되지 않아서 걱정하고 있던 터라 밤중이지만 현장을 나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창고에 도착해 보니 도랑을 넘친 황토물이 창고로 밀려오고 있었다. 놀란 복 조합장은 어둠 속에 혼자서 큰 돌을 굴려 물길을 돌리려고 사투(死鬪)를 벌렸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물과 싸우던 복 조합장은 한 손을 돌에 치어 크게 다쳤다. 그래도 복 조합장은 어느 정도 물길을 돌린 다음에야 상처를 돌볼 수 있었다. 복 조합장의 노력으로 창고는 안전하였지만, 상처는 4개월이나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렇게 제1,제2 창고가 조합사무실 양편으로 우뚝 서고, 보관물량도 많아지면서 조합원들의 이용고 배당이 늘어나자 외관상이나 내용면에서도 조합은 더욱 조합원들로부터 가까워지게 되었다. 조합이용이 더 늘어나자 2개의 창고로도 모자라 1968년에는 제3의 창고를 건립해야만 했다, 이때도 전례와 같이 자체설계와 자체노력으로 공사를 진행했다. 골조공사가 끝나고 목제(木製) 트러스지붕 위에 기와를 이고 있었다. 지붕에는 20여명의 조합원들이 정신없이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벼락 치는 소리가 나면서 지붕이 내려앉았다. 작업지휘를 하고 있던 복 조합장도 정신을 잃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변을 당했을 것 같았다. 한참 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행히 다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지붕 위에 있던 사람들이 재빠르게 대피했기 때문이었다. 천우신조(天佑神助)였다. 슬레이트 정도 지탱할 수 있는 구조물에 무거운 기와를 얹은 것이 실수였다. 이 사건 이후 복 조합장은 자체설계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전문적인 일은 아무리 경비가 소요되어도 전문가에게 의뢰하기로 하는 교훈을 얻었다. 그래서 제3창고는 슬레이트 지붕으로 완공했다. ‘도시사람들은 잘사는데 농촌사람들은 왜 잘살지 못할까?’ 복 조합장은 고민을 했다. ‘도시사람들은 일 년 내내 일을 하는데 농촌사람들은 6개월 정도 일을 하고나면 6개월은 놀고 있다. 어떻게 하면 농촌에서도 놀지 않고 계속 일할 수 있을까? 농한기 부업을 개발해야지’ 부업을 개발해야 된다는 생각은 아무나 하고 있지만. 농촌에서 할 만한 일거리를 찾기란 쉽지 않다. 복 조합장은 관내에 대밭이 많은 것과 농협소유 죽림(竹林) 6천 평을 생각했다. 해마다 베어내는 대나무는 원목 그대로 헐값으로 외지로 팔려나간다. 대나무를 가공할 방법은 없을까? 다행히 관내 조합원 중에 대나무 비닐우산을 만들어 본 사람이 있었다. 그 조합원과 상의하고 연구하여 조합원들을 교육을 시키고, 비닐우산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제품도 깔끔하지 못하고 솜씨가 서툴었으나, 계속 노력한 결과 많이 좋아졌다. 제품생산이 궤도에 오르자 판로가 문제가 되었다. 계통농협을 통하여 공급해 보았지만 생산물량을 다 처분할 수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서울의 큰 상인과 공급계약을 했다. 서울 상인은 비닐자재를 공급하고, 조합에서는 대나무 자재를 대면서 가공임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우산은 날씨와 깊은 관계가 있어 해마다 일정한 수익을 올릴 수 없었다. 장마기간과 비오는 날수에 따라 재고가 적체되기도 하고 값도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진폭이 심했다. 개인들은 적자를 감수하고라도 재고처분을 하지만, 조합은 적자로는 처분하기가 어려워 재고부담을 안고 다음해로 이월하는 수도 있었다. 이러한 어려움은 있었지만 마냥 놀기만 하던 농한기에 일거리가 생겼다는 이점도 있어 10여년 계속하는 동안에 농가소득에도 큰 보탬이 되었다. 남자들은 농한기 가마니라도 짰지만, 거의 할일이 없던 부인들에게는 적지 않은 일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1회용 비닐우산이 쓸모가 없어지면서 이 사업은 사양사업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