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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02월 17일 (목요일) 20 : 31 국민일보 | ||
[日製 거북선 충격] 나무 전문가 ″임란때 거북선은 춘양목″ | ||
그는 17일 “누가 보더라도 일본산 삼나무로 만든 게 틀림없다”며 “해군이 우리나라 소나무를 사용하지 않은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의 재질은 무엇이었나. △각종 문헌에 따르면 거북선은 단단한 소나무인 춘양목으로 선체를 만들었다. 다른 주요 부위는 참나무와 박달나무,녹나무 등을 덧대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임란 당시 우수한 재료로 만든 ‘천하무적’ 거북선은 재질이 약한 삼나무와 편백나무로 만든 일본 배를 ‘박치기’로 물리칠 수 있었다고 본다. 일본산 삼나무는 침엽수로,가벼우며 물이 잘 흡수되지 않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재질이 연해 충격에 약한 편이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 춘양목은 침엽수로 강도가 높고 송진이 생겨 수명이 길다. 반면 삼나무보다 조금 무겁다. -해군이 거북선을 복원하는데 일본산 삼나무를 사용한 이유가 뭐라고 보나. △1998∼1999년 당시 국내에서는 대형 선체에 사용할 만한 큰 소나무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본다. 대용으로 쓸 만한 참나무도 많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일본산 삼나무는 그때나 지금이나 수입하기가 쉽다. -일본산 삼나무는 현재 국내에서 어떤 용도로 사용되고 있나. △주로 부산과 전남 두 곳에서 삼나무를 수입,어선 제작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지금도 국내에서 거북선을 만들 수 있는 소나무를 구하기가 힘든가. △그동안 무분별한 벌목으로 큰 소나무들이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강원도와 경북북부 등지에는 많지는 않지만 질좋은 춘양목이 자라고 있다. -나무 전문가로서 해군에 바라는 것은. △근시안적인 행정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나무 전문가들의 자문을 구해 다시 제작해야 하지 않을까. 춘양목 구하기가 쉽지 않다면 참나무나 박달나무도 있지 않은가.부산=윤봉학기자 bhyoon@kmib.co.kr |
사진을 찍을때 WB를 안마춰찍어서 사진이 저렇게 나왔네요.
춘양(여기서 춘양은 경북 봉화군 춘양면을 말함-졸라맨^^-)에는 저런 나무가 많이 있다고 함니다.
저도 첨 가보는 곳이라 멋있다고만 생각만드는게...
(넘 농촌을 몰라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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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 28일 (화) 17:30 인빌뉴스
봉화군 춘양양묘사업소 춘양목 재배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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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예전부터 억지춘향이 맞는거라고 알고 있었거든요;; 춘향이가 억지로 수청드는데서 유래한줄 알구요 근데 학원선생님이 억지춘향이는 틀리다고 억지춘양이 맞다고 하셨어요 춘양목에서 유래된말이라면서 |
먼저 알아두셔야 할 것은 어원이나 유래는 여러가지 설들이 있게 마련인데 그것들이 100% 맞는다는 보장도 없을 뿐더러, 설령 맞다 하더라도 현재 널리 쓰이고 있는 말을 무조건 바꿀 수는 없습니다. 즉, 억지춘향의 유래에 관해서 몇 가지 이야기들이 있지만, 분명한 건 현재 일반적으로 널리 "억지춘향"으로 쓰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는 점입니다. 아래에 국립국어연구원 질의응답 게시판에서 연구원의 답변을 읽어보세요. "억지로 어떤 일을 이루게 하거나 어떤 일이 억지로 겨우 이루어지는 경우"를 가리키는 말에 대해 <표준국어대사전>은 "억지 춘향"만 실었습니다. 그런데 관용 어구의 경우에는 형태가 조금씩 차이가 나는 말이 두루 쓰이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억지 춘향"의 경우도 그러한 예 가운데 하나인데, 일부에서는 "억지 춘양"도 많이 쓰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우선 "억지 춘향"은 일단 맞는 표기로 보고, "억지 춘양"은 앞으로 민간에서 쓰이는 추이를 살펴보아 사전에 실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억지춘향/춘양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를 지식인에서 검색해 봤습니다. * 춘향이의 수청에서 유래했다는 설 (어원)억지춘향 : 일을 순리로 풀어가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우겨 겨우 이루어진 것을 이르는 말. 고소설 [춘향전]에 나오는 것처럼 변사또가 춘향으로 하여금 억지로 수청을 들게 하려고 핍박한데서 나온 말이다. 출처: http://opendic.naver.com/krdic/ok_body.php?i=22285 * 춘양역에서 유래했다는 설 억지 춘향이라는 말은 잘못된 말입니다. 정확히는 "억지 춘양" 이라는 말이 옳지요.춘양은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을 말하는 것으로서 영주와 강릉을 잇는 영동선 철도가 만들어질 때 자유당 국회의원 한 명이 본래는 철도가 건설되지 않을 계획이었던 춘양면으로 철도를 휘어져 들어오게 만든 것에서 유례했습니다. 영동선이 유독이 춘양면 근처에서 불쑥 튀어나온 것처럼 움직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출처: http://kin.naver.com/browse/db_detail.php?dir_id=110104&docid=187633 * 춘향목에서 유래했다는 설 억지춘향에서 춘향은 성춘향이라는 인물이 아니고요, 좋은 소나무종인 춘향목을 말한다고 합니다.춘양목인데 향기가 나서 춘향목이라고도 한답니다. 워낙 귀하고 비싼 나무라 장사하시는 분이 일반소나무를 춘향목으로 속여서 판다고 해요. 억지로 춘향이다라는 말이지요. 출처: http://kin.naver.com/browse/db_detail.php?dir_id=612&docid=77117 |
<대구신문> 특별기고 - 억지춘양의 유래를 찾아
이 문 학 / 자유기고가
이 가사는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일대에 전래되는 ‘억지춘양’이라는 속요이다. 옛날에는 교통여건이 좋지 않아 춘양이란 곳은 상당히 외진 곳이었다. 하도 외진 곳이라 외지에서 시집을 온 부녀자들이 이 춘양에 한 번 들어오면 다시 가는 친정 길은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가기 힘든 발걸음을 ‘억지춘양’이라 표현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어려운 여건을 헤집고 막상 춘양에 들어와 살다보니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고 춘양이 비교적 경제적으로 여유(금정광산, 춘양목 등으로) 있는 고장이어서 이제는 춘양을 떠나려니 되레 섭섭하다는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 ‘춘양속요’라는 가사에도 처음에는 오지라서 억지로 찾아 들었는데 춘양에서 잘 먹고 잘 지내다 돌아가려니 마음 한 구석에 아련히 미어오는 아쉬움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토해낸 것이다.
또 하나의 설로는 예로부터 ‘백목(百木)의 왕(王)’이라고 까지 불리고 춘양을 대표하는 소나무인 춘양목이 너무도 유명하여 춘양.장동(춘양 소로리).내성(봉화)장날 상인들이 너도 나도 내다 팔려 가져온 자기 나무가 춘양목이라고 우긴다 해서 ‘억지춘양’이라고 하였다 하는 설도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억지춘양에 관한 설이 또 하나가 있다. 이는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설이며 가장 유력한 설이다. 우리말 어원사전(김민수 편)에도 ‘억지춘양은 영동선을 개설할 당시 직선으로 뻗어 달리게 설계된 노선을 춘양면 소재지를 감아 돌아 지나가도록 억지로 끌어들인 데서 나온 말’이라 되어 있다.
이 춘양 지역은 생김새로부터 철로 영동선의 역사가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태평양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전쟁물자 확보에 다급해진 일본이 춘양지역의 풍부한 임산물 및 광산물 수송을 위하여 영주~춘양간 영춘 철로 부설에 착수한 것이 1944년의 일. 일본은 ‘보국대(報國隊)’라는 낯선 이름으로 경북 북부지방 주민들을 동원하여 철로 부설공사에 투입하였다.
전략물자 수송이 다급하여 옴에 따라 1945년 초에는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그들의 관동군 1개 대대를 이 지역으로 옮겨 철도 부설과 봉화군 소천면 일대의 중석.망간.형석 채광에 투입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영춘 철도는 영주~내성(지금의 봉화)간이 완공돼 시운전을 개시할 무렵 8.15해방을 맞으면서 공사 중단과 함께 그 해 보기 드문 폭우로 인해 시운전도 못하고 선로가 유실되는 비운을 맞는다. 그 후 삼척지역 탄전 개발에 따른 무연탄 물동량의 급증에 더욱 필요성을 느끼게 된 정부는 영주~철암간 영암선 부설공사를 1949년 재개하게 된다. 이어 1950년 3월 영주~내성간 14.1㎞를 우리 손으로 착공하여 개통했으나 6.25동란으로 다시 중단되는 두 번째 시련을 맞게 된다.
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1953년부터 산업선 부설은 다시 계속되어 1954년 2월1일 내성~거촌간 5.5㎞, 1955년 2월 1일에는 거촌~봉성간 5.5㎞, 7월1일에는 봉성~춘양간 12.1㎞가 개통됨으로써 철암의 무연탄을 실은 첫 열차가 우리의 손으로 부설된 철길을 타고 서울로 운송되는 첫 길이 열리게 되는 역사적인 날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지역의 주민들은 변화를 거부하고 고집스레 황토색으로, 철로를 놓으려고 기초공사를 시작할 때 지방 원로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친다. 산을 파헤치면 명산(兩白)의 정기(精氣)를 다 잃는다는 풍수지리설의 신봉사상과 침략야욕에 광분하는 일본의 손으로 진행된 공사인지라 민족적 항의와 거부반응에서 오는 필연적인 현상이었으리라.
하지만 이런 거부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철도공사는 강행되었다. 공교롭게도 일본 패전, 6.25동란 등으로 철도공사가 여러 차례 중단되는 시련을 겪게 된다. 그러면서 자유당 시절 지역출신 J모 원내총무에 의해 춘양면 소재지를 감싸돌아 현재의 춘양면 의양4리 운곡에 역사(驛舍)가 들어앉게 되었으니 이로 인해 ‘억지춘양’이라는 말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원래 억지춘양이란, 사전적 의미로 ‘억지로 어떤 일을 이루게 하거나 어떤 일을 억지로 겨우 이루어 내는 비유 격에 이르는 말’로 풀이되고 있으며, ‘억지춘향’으로 표기한 사전도 없지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