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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부르는 눈먼 사랑의 노래
-임형기 시인의 『거미줄에 걸린 情』
김우연(시인·문학평론가)
1. 사랑은 생명
코로나19의 펜데믹으로 세상은 큰 변화를 겪고 있다. 그중에서도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어려워졌다. 그 결과 고독과 외로움과 소외감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러한 때에 문학은 그 중요성은 더욱 크다. 문학은 잃어버린 꿈과 기억력을 되찾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경제적인 양극화가 가중되고 있어 아귀다툼으로 변한 세상에서 문학은 황폐한 마음에 용기를 주고, 마음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해 주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해방 후 급속하게 도시화가 이루어졌다. 특히 1960년대 이후 근대화는 산업화요 그것은 도시화였다. 그 결과 지금은 풍요로운 물질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한편에서는 그늘에서 신음하며, 환경 오염, 인간 소외, 고독감 등의 심각한 사회문제가 만연하다. 특히 농업 경제가 줄어들면서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변화하고 전통적 공동체가 붕괴하였다. 지금 노년 세대들은 6·25 남침으로 가족을 잃거나 월남하여 이산가족이 된 분들도 많다. 또 세계적으로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가족 구성원들은 모두 헌신적으로 일했다. 그래서 이룩한 물질적 풍요 속에서 양극화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지난날의 땀 흘린 노인들의 역사는 망각하고 오히려 노인들을 적대시하면서 세대 간의 갈등을 부추기는 정치인들도 있다. 프랑스의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쓴 단편소설 「황혼의 반란」은 세계적으로 심각해지고 있는 노인 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주인공 프레드는 자신에게 죽음의 주사를 놓으려는 젊은이를 향해, “너도 언젠가는 늙은이가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시대에 현송(玄松) 임형기 시인의 제2시집 『거미줄에 걸린 情』은 이 시대의 갈증의 해소하는 맑은 샘물처럼 솟아오르고 있다. 시인은 “마음에 품어본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情感들”을 묶었다고 말하고 있다. ‘사랑’과 ‘그리움’은 인간의 가장 본원적인 감정이 아닌가.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사랑은 생명이다. 모든 것은 한결같이 이 사랑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임형기 시인은 사랑과 그리움에는 부모와 가족 등에 대한 것과 자연에 대한 것, 과거 인정이 있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 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시인이 살아가는 원동력이 사랑인 셈이다.
2. 시인의 열정
묵은 가지에 새순 돋고
예쁜 꽃 가꾸는 게
시인의 열정이지만
그 가슴에 열정만
가득할 줄 알았는데
애끓은 가슴앓이가
더 많은 것을
누가 알리요!
가지에 꽃잎 지면
광낼 수 없는 짚신이라도
곱게 다듬어 놓고
서정의 이삭까지 줍는 게
시인의 열정이라오.
-「시인의 열정」 전문
시인의 첫 시집 『헐렁한 오후』에서는 “가라앉지 않는 열병/ 이리저리 헤매다(중략)/ 열병아/ 잠 좀 자자꾸나.”(「어찌 할거나」부문)라고 하며 잠 못 이루며, 사색하는 시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열병’과 ‘열정’은 같은 말임을 알 수 있다. 바람 소리, 물소리, 이슬방울 등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관심을 가진 사람은 잠을 못 이루는 것이다. 이 시에서는 “묵은 가지에 새순 돋고/ 예쁜 꽃 가꾸는 게” 시인이라고 정의를 하고 있다. 그런데 생기발랄하고 예쁜 꽃처럼 마음에 환한 것, 즉 자연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가득 채우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현실은 가슴앓이가 더욱 크다는 것이다. “가지에 꽃잎 지면/ 광낼 수 없는 짚신이라도/곱게 다듬어 놓고”라는 것은 생명은 유한하기 때문에 예쁜 꽃을 가꾸고 싶던 소망은 영원할 수가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꽃잎이 지더라도 새롭게 “광낼 수 없는 짚신이라도/ 곱게 다듬어 놓고”라며 변함없는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서정의 이삭까지 줍는 게/ 시인의 열정이라오.”라는 것에 이르면 시인의 열정은 최고조에 이르고 있다. “서정의 이삭까지 줍는 제 /시인”이라는 것에는 시인의 겸손이 느껴진다. 아주 작은 것까지도 사랑하겠다는 사랑의 맹세로 읽힌다.
이 작품은 “묵은 가지에 새순 돋고/ 예쁜 꽃 가꾸는 게” ↔ “애끓은 가슴앓이”를 대조로 전개하면서 “서정의 이삭까지 줍는 게”라며 전체적으로 변증법적으로 전개하여 ‘시인의 열정’을 강조하고 있다. ‘가슴앓이’로 가득한 시인은 그리움과 사랑을 끝없이 노래하는 원동력임을 알 수 있다. 시집 마지막 작품으로 「가슴앓이」를 배치한 것만 봐도 ‘가슴앓이’가 얼마나 큰 시인인가를 느낄 수 있다.
3. 거미줄에 걸린 정(情)
안개 젖은 거미줄에
등 기대고 쉬었다 갈거나
솔바람 부는
물 맑은 계곡에
쉬었다 가려는데
청아한
물소리, 새소리에
발길 옮기지 못하네!
고사리 꺾어 자루에 넣고
안갯속 먼 하늘 바라봐도
내 동공 속 잔상은
너뿐인 것을
싱그러운 이 아침에 너 만남
우연이 아닌 숙명이라니
거미줄에 걸린 끈끈한 정
다독거려 본다.
-「거미줄에 걸린 情」 전문
아침 일찍 “고사리 꺾어 자루에 넣고”라는 세속적인 일상과 “청아한 물소리, 새소리에/ 발길 옮기지 못하네!”라는 세속을 초월한 자연물과 대조시켜 시적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 화자가 물소리, 새소리에 발길 옮기지 못하는 것은 시인이 얼마나 순수한 심성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오늘 아침에 만난 물소리, 새소리는 숙명적인 만남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거미줄에 걸린 끈끈한 정”이라고 한 것이다. 나비나 작은 곤충이 거미줄에 걸리면 꼼짝하지 못한다. 자신이 그와 같다고 표현한 것은 ‘가슴앓이’가 심각한 수준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대상이 자연이고 보면 반어적으로 자연 사랑의 심정을 극대화하고 있는 표현인 것이다. 이 시집의 표제시로 쓴 작품이다. 이기철 교수는 “문학 작품은 인간 의식의 지향의 흔적이며 궤도라”라고 하였다. 임형기 시인은 ‘농업연구관’으로 재직하다가 퇴직하였으니 누구보다 자연과 친숙한 삶을 살아온 것이 시에 자연스럽게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시의 언어는 묘사나 서술의 언어가 아니라 연상의 언어, 울림의 언어이다.”라고 이기철 교수가 말처럼, 이 작품은 “거미줄에 걸린 끈끈한 정”이라며 자신의 생각을 이미지로 형상화함으로써 연상과 울림이 큰 시를 만들고 있다.
이 작품 외에도 정(情)을 노래한 작품이 눈에 많이 뜨인다. “수많은 상념 저울에 올려봐도/ 무거운 게 情인 것을”(「헐렁한 오후(2)」)라고 정(情)이란 무거운 것이라고 노래하고 있으며, “배꽃 같은 순결한 情 놓고/ 허공을 맴돌겠는가?// 당산나무 뿌리처럼/ 넓고 깊게 박힌 情 하나 있느니// 천 년 바위처럼/ 지내야 하지 않겠나!”(「뿌리 깊은 정(情)」)이라며 순결하면서 깊고 변함없는 것이라며 시인의 깊은 인품을 느끼게 된다. “내 안에 그 情 가득하니/ 속 깊은 망태에/ 간직하고 싶은 맘뿐”(「인연(因緣)」)이라며 마음에 정이 가득함을 노래하고 있다. 심지어 “감싸 줄 수 있으려나/ 바보의 사랑/ 오붓한 情으로!”(「바보의 사랑」)라며, 정(情)은 곧 사랑이며 사랑을 품고 있는 마음임을 알 수 있다. 「동백꽃 연정」, 「제비꽃 연정」 등의 제목만 봐도 자연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인은 사람과 자연 등 모든 삼라만상이 인연이 되면 사랑하고, 깊은 정을 품는 바보이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의 처지와 지향점을 ‘거미줄에 걸린 정(情)’이라는 말로 상징하고 있다.
4. 그리움과 사랑의 노래
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이라 여겨 왔는데
긴 세월 흘렀어도
콩깍지가 씌었다고 하던
그 말이 자꾸만 생각나
참사랑 같은 몹쓸 情
알아차리지 못한 게
눈먼 사랑이런가
미움도 망각한 채
냉가슴 추스르지 못하고
예쁘게만 보이는 게
콩깍지 사랑이라던가
꿈속에 사랑의 꽃길 만들어
향기 훔쳐 뿌려놓고
늘~ 그 곁에 있을 양,
그 향에 젖으려 하네.
-「눈먼 사랑」 전문
눈먼 사랑은 바로 흔히 말하는 것처럼 ‘눈에 콩깍지가 씌이다’라는 말을 시적 운율을 살려 표현하고 있다. 특별한 시적 기교 없이 표현하면서도 울림을 크게 주고 있다. “미움도 망각한 채/ 냉가슴 추스르지 못하고/ 예쁘게만 보이는 게/ 콩깍지 사랑이라던가”라며 무조건적인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꿈속에 사랑의 꽃길 만들어/ 향기 훔쳐 뿌려놓고”는 화자가 사랑하는 임에 대한 ‘콩깍지 사랑’의 절정을 보이고 있다.
“코울리지(S.T. Coleridge)는, 예술적 상상력은 하나의 새로운 세계-일상적 인식의 세계와 같은 것이기는 하나 재구성하기보다 고도한 보편의 차원으로 승화된 세계를 창조해 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박명용, 『현대시창작법』)고 한 것처럼, 사랑이라는 평범한 소재를 가지고 꿈속에서도 사랑의 꽃길을 만들어 꽃향기에 젖는 꽃길에 잠기겠다는 상상력을 극대화하고 있다. 꽃향기에 젖는 것은 사랑하는 임의 품에 안기는 것이요, 그 추억에 잠긴 것을 상상하게 하는 것이다. ‘인간주의 비평’으로 유명한 이기철 교수는 “시는 특수한 감정의 무늬를 가질 때도 간혹 있기는 하나 그보다는 보편적 감정과 정서를 노래할 때 오히려 좋은 시 혹은 감동적인 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언제나 참인 것이다.”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눈먼 사랑’은 임형기 시인이 사랑의 시인임을 세상에 알린 것이다. 이것은 눈처럼 순수한 마음, 동백꽃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 동백꽃처럼 붉게 타오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산대사의 오도송의 첫 구처럼 “머리는 희나 마음은 희지 않는다(늙지 않는다)”라고 하였듯이, 임형기 시인의 마음은 언제나 순수 그 자체로 출렁거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첫사랑의 꿈」, 「가난한 사랑」, 「잠들지 않는 사랑」, 「내 하나의 사랑」, 「바보의 사랑」, 「고슴도치의 사랑」 등 여러 편이 있다. ‘눈먼 사랑’의 노래를 끝없이 부르고 있는 시인임을 알 수 있다. 다음은 그리움을 노래한 작품을 살펴보았다.
화창한 가을 햇살
저만큼 비켜선 자리에
반갑게 다가선 너
가냘픈 초승달인가 싶더니
어깨 디밀고 등 기대어
비비고 나니 어느새 보름달
어느 구석 부족함 없는 널
마냥 곁에 두고 싶어
여민 옷깃 매 만져보건만
구름 끼고 비바람 쳐
구겨진 세월 그믐이라고
그믐달 보이지 않네
보내기 싫은 추억들
가지런히 접어두려니
가슴만 왠지 푸석거린다.
-「가을의 서정」 전문
첫 연에서 “화창한 가을 햇살/ 저만큼 비켜선 자리에/ 반갑게 다가선 너”라며 임(너)의 객관적 상관물인 ‘달’이 화창한 가을 햇살과는 대조적으로 화자와 ‘저만큼 비켜선 자리에’ 떠 있다. 그러나 임을 간절하게 기다린 화자는 자신에게 반갑게 다가오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임은 ‘가냘픈 초승달’→‘보름달’→‘그믐달’로 변해간다. 보름달도 결국 그믐달로 변하듯이 임과는 영원히 함께 할 수 없기에 그리움은 더욱 간절한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연에서 “보내기 싫은 추억들/ 가지런히 접어두려니/ 가슴만 왠지 푸석거린다.”고 부재한 임에 대한 서글픔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다시 초승달이 떠오르기에 임을 기다리고 그리워하게 된다. 추억이란 영원히 우리의 마음에서 떠오르는 달과 같음을 노래한 것이다. 시적 형상화를 잘 살린 아름다운 서정시이다.
바람에 떠도는 흙먼지
한 방울 이슬 만나면
한 줌에 흙이 되련만
으스러지는 그리움은
그 무엇을 만나야
환한 미소 머금을 수 있을까?
메마른 대지가 촉촉하고
찬란한 태양 이글거려
꽃 지고, 향기 잦아들면
탐스럽게 맺은 열매
또 다른 기쁨 안겨줄 건데
애달픈 그리움도
인고(忍苦)의 기다림 있어
환희의 만남이었나?
-「아름다운 기다림」
서정시의 진수를 보여주는 절창이다. 화자는 먼지가 이슬을 만나서 흙이 되듯이, ‘으스러지는 그리움’은 무엇을 만나야 ‘환한 미소’를 머금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그래서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온갖 가을의 곡식과 과일들이 여름의 뜨거운 태양의 고통을 견디고 탐스러운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애달픈 그리움도/ 인고(忍苦)의 기다림 있어/ 환희의 만남이었나?”라고 하였다. 그리움이란 현재에 이룰 수 없어 고통스럽지만, 결국 언젠가 만남을 기다린다면, 마음으로는 영원히 연결되어 있기에 ‘환희의 만남’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자연이나 인간이나 고통을 겪고 나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시적으로 형상화하여 크게 감동을 주고 있다. 「아름다운 기다림」은 이 한 편만으로도 임형기 시인은 시인으로 이름이 영원히 남을 것이라 본다. 진주처럼 빛나는 이 작품은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서 공감을 줄 것이다. 보편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서정시의 매력이고 장점이 아닌가. 이념이나 투쟁은 문학의 본질이 아닌 것이라서, 잠깐 스쳐지나가는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 스위스의 성자 카를 힐티(Carl Hilty)는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에서 “사랑은 그 무엇보다 사람을 현명하게 해준다. 오직 사랑만이 사람들의 본질과 사물의 실상, 또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가장 올바른 길과 방법에 대한 진정한 통찰을 준다.”라고 하였다. 그리움과 사랑은 상사화의 잎과 꽃과 같이 애절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적인 사랑도 종교적인 사랑으로 승화할 수 있는 것이라서, 그것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것이다. 그래서 「속절없는 기다림」에서는 “속절없는 기다림은/ 어느새 달콤한/ 기다림이 될거나.”라고 하고 있다.
5. 대상과 주체가 하나의 사물
초록 옷 입고
시집온 님
낯 설은 시댁에서
하얀 속살 드러내고
목욕을 한다
푸르른 젊은 날
온몸은 갈기갈기 찢겨도
소금에 절인
시름 삭혀내며
붉은 옷 갈아입고
화사하게 변신을 한다
고소한 깨소금으로
연지 찍고
감칠맛 나는 속삭임으로
정든 님과 입맞춤 할
첫날 밤을 기다리고 있구나.
-「김장 배추」 전문
흄(Hulme)은 “새로운 제재를 노래한 시가 반드시 새로운 시는 아니다. 그 제재를 보는 눈이 새로워야 한다.”라고 했다. 현송(玄松) 임형기 시인은 ‘김장 배추’라는 일상의 제재를 가지고 새롭게 표현하고 있다.
‘김장 배추’가 겉은 푸르고 속은 흰 색깔에서 소금에 절여지고 마침내 양념을 입혀서 붉은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전통에서 시집온 새댁에서 고된 시집살이를 겪으면서도 모든 고통을 감내하고 성스럽게 변한 우리 전통적인 여인상을 연상시키고 있다. 카를 힐티(Carl Hilty)는 “위대한 사상은 오직 크나큰 고통으로 깊이 정화된 마음의 토양에서만 성장한다.”고 하였다. 가장 평범한 것이 가장 위대한 것이라는 것처럼 가족들을 위해 희생했던 그 사랑은 바로 ‘위대한 사랑’이 아니겠는가? 페미니즘에서는 그것을 노예적인 사랑이라고 폄하하고 있으나 이문열의 소설 『선택』에서는 모성애는 가장 위대한 것 말하고 있다.
유성호 교수는 “세계(대상)와 자아(주체)가 자기 표현적 정조의 고조 속에서 융합하고 상호 침투하는 것, 혹은 정조의 순간적 고조에 따른 대상성의 내면화가 ‘서정’의 본질이라는 미학자들의 오래된 서정시 규정은 이제 그 효용성의 종언에 다다라 있다. 오히려 우리 시에 나타나고 있는 ‘서정’의 초점은, 대상과 주체의 합일이라는 동일성의 원리는 넘어서 대상과 주체가 하나의 사물을 통해 동시에 묘사되는 접점을 향하고 있다.”라고 하였는데, 「김장 배추」는 ‘대상과 주체가 하나의 사물을 동시에 묘사되는 접점’을 형상화하여 높은 시적 성취를 구현하였다. 이처럼 임형기 시인은 끝없이 시를 갈고 닦아 그 표현법에서 자신의 독특한 꽃 색깔을 보이고 꽃향기를 풍기게 된 것이다.
“풋내 가신 초록 잎/ 어느새 합환주 한두 잔에/ 연지 찍고 시집을 간다”로 시작하는 「겨울로 가는 길목」에서도 대상과 주체를 하나의 사물로 나타내고 있다. ‘갈잎 누이’와 ‘잔정 없는 오라비 나목(裸木)’로 감정이입 시키면서 자신의 삶을 상징하고 있다.
6. 무등의 겨울
무등에는
변치 않는 바위가 있고
산호초 같은 雪花가 있어
황홀한 설경
눈앞에 펼쳐 있는데
감미로운 목소리는
목도리 속으로 파고들고
내 손에 안겨있는
따뜻한 커피잔은 그대 같은데
왜 자꾸 인적 드문
비탈길에 홀로 앉아
외로움 떨구지 못하는가?
변함없는 바위 내 곁에 있고
어깨 디밀고 쳐다보니
마냥 좋기만 한데.
-「무등의 겨울」 전문
이 작품은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는 아름다우면서도 애절한 서정시이다. ‘무등산’, ‘바위’, ‘설화(雪花)’, ‘설경’, ‘목도리’, ‘커피잔’, ‘비탈길’ 등의 시각적 이미지, ‘감미로운 목소리’의 청각적 이미지, ‘따뜻한’의 촉각적 이미지가 ‘외로움’이라는 감정과 잘 조화된 한 폭의 동양화와 같은 서정시이다.
첫 연에서는 무등산의 설경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였다. 둘째 연에서는 들고 있는 따뜻한 커피잔은 임을 연상시키며 대조가 되고 있다. 셋째 연에서는 임을 그리워하며 외로움에 잠겨 있다. 넷째 연에서는 무등산 바위는 변함없이 제 자리에 있듯이, 내 마음도 저 바위처럼 변함없이 임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은 임에 대한 지극한 그리움을 담담하게 표현한 것이다. 무등산 설경과 주상절리는 널리 알려져 있다. 임형기 시인에게는 언제나 바라볼 수 있는 무등산이야말로 그리움과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공간이자 그리움과 외로움이 피어나는 공간이기도 한 것 같다.
7. 그리운 모정
믿음으로 다가선
옹이 박힌 그리움은
솔밭 사이로 흐르는
바람이런가?
산벚나무 가지에 꽃 피고
지저귀는 산새 소리
알아듣지 못해도
흥건히 젖은 눈망울
터질 것 같은
못 잊을 님 생각에
나풀거린 봄나들이
고향 산천 하염없이
바라만 본다.
-「그리운 모정」 전문
어머니는 동서양 모든 사람들의 고향이다. 어머니는 내 생명의 탯줄이며 그리움의 원천이다. 그런데 임형기 시인에게 어머니는 특히 남다른 바 있다. 첫 시집 「추모 」에서 “뜨겁게 산화하신 아버님이시여!”라고 시인이 어릴 때 6.25때 전사하신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있다. 어려움 속에서 자식들을 길러내신 어머님은 시인에게는 영원한 임일 것이다. 그래서 그리움의 원천은 어머니와 아버지일 것이다. 임형기 시인은 비극적 현실을 그리움과 사랑으로 승화시키고 나아가 자연을 사랑함으로써 진정한 서정시인이 된 것이다. 토마스 만(Thomas Mann)은 중편 소설 「토리오 크뢰거」에서 “문학 애호가를 진정한 시인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적인 것, 생명이 있는 것, 그리고 평범한 것에 대한 저의 시민적 애정, 바로 그것이니까요.”라고 하였다. 임형기 시인이 진정한 시인이 된 것에도 이 말이 통하는 것 같다.
8. 나오며
임형기 시인의 제2시집 『거미줄에 걸린 情』은 ‘임’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절절하게 노래하고 있다. ‘임’은 그 모습을 구체적으로 드러난 경우도 있으나, 구름에 가린 달처럼 어렴풋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것은 어릴 때부터 6.25 때 전사하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마음이 바탕이 되어,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으로 발전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리고 자연에 대한 그리움들도 가득하다. 특히 식물에 대한 작품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전문적인 농업연구관으로 근무하다가 퇴근한 그의 삶 자체라고 보인다. 그래서 임형시 시인의 심성은 누구보다도 순수하고 곱다. 이런 바탕에서 나온 그의 노래는 독자들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올 것이다. 한때 우리 시단에는 이념으로 뭉쳐진 투쟁의 시들이 휩쓸기도 했으나 지나가는 바람이었다. 또 지금은 생태적인 시들을 노래하나 인간을 부정적으로 보는 생태시는 오히려 반생태적인 시가 된 것이다. 시는 어떤 제재를 가지고 표현하더라도 서정이라는 본령에 바탕을 둘 때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게 된다. 그래서 임형기 시인의 이번 시집은 서정시에 충실한 인간의 보편성 정서를 노래한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인간은 누구나 역사의 존재이면서 개인이 또한 이 우주인 것이다. 그래서 어떤 개인의 삶도 그 시대를 반영하는 역사적인 존재이다.
코로나로 인하여 사람들 사이에 만남과 대화가 줄어들고, 전통적인 공동체 사회가 붕괴 되어 고독감, 소외감, 외로움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또한 환경 파괴로 인한 문제도 심각하다. 이렇게 각박해진 세상일수록 문학은 윤활유와 같은 것이며, 상처받은 우리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힘이 있다. 임형기 시인의 『거미줄에 걸린 情』은 우리에게 큰 힘이 될 것이라 본다. 제2 시집의 발간을 축하드리며, “청아(淸雅)한 관음 계곡/ 시들지 않는 동백의 혼/ 내 안에 잠들어 있으니”(「산사의 오후」)라고 하였듯이, 시인은 앞으로도 끝없이 ‘눈먼 사랑’의 노래를 부르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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