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쁘레아위히어 사원
Preah Vihear Temple

(크메르의 세계 추가사진) 쁘레아위히어 사원군의 항공사진. 좌측이 태국쪽 방향인 북쪽이고, 우측의 절벽 정상이 캄보디아 쪽으로 바로 그곳에 본당이 위치한다. [사진출처: www.cambodia.org] |
"쁘레아위히어 사원"(Preah Vihear Temple, 쁘레아 비히어/ 프레아 비히어) 혹은 "쁘라삿 쁘레아위히어"(Prasat Preah Vihear: 크메르어-ប្រាសាទព្រះវិហារ, Prasat Preah Vihear)는 캄보디아의 쁘레아 위히어 도에 있는 당렉산맥(Dângrêk Mountains) 자락의 해발 525 m 높이의 절벽 위에 위치한 크메르 제국 시대의 사원이다. 이 사원은 태국 시사껫(Sisaket, 시사켓) 도의 깐타랄락(Kantharalak) 군과 바로 경계를 맞댄 곳에 위치해 있다. 1962년 이 사원에 대해 태국과 캄보디아 사이에 심각한 영유권 논란이 일어났을 때, 헤이그에 위치한 "국제사법재판소"(ICJ)는 이곳이 캄보디아 영토라고 판결한 바 있다.
완만한 평원을 멀리까지 바라볼 수 있는 멋진 조망을 갖춘 이 사원은, 600년 이상 존속했던 크메르 제국 시대에 건설된 것이다. 제국의 영적 삶의 상징 건물로서, 이 사원은 지속적으로 왕들의 후원을 받으며 증, 개축되었고, 그러한 영향으로 몇 종류의 건축양식들이 혼재되어 있다. "쁘레아위히어 사원"은 주로 동쪽을 바라보는 다른 크메르 사원들과 달리 남-북을 축으로 건설되어 있다.
캄보디아의 "쁘레아위히어 도"는 이 사원에서 그 지명이 유래되었고, 마찬가지로 태국의 "카오 파 위한 국립공원"(Khao Phra Wihan National Park) 역시 그 명칭의 기원을 이 사원에 두고 있다. "카오 파 위한 국립공원"은 태국의 시사켓 도에 위치하는데, 실은 이 방향에서 접근하는 것이 쁘레이위히어 사원으로 가는 가장 편리한 루트이다. 2008년 7월 7일에는 유네스코(UNESCO)가 이 사원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주1)
쁘레아위히어 사원
Temple of Preah Vihea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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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원 명: |
쁘레아위히어 사원 |
창건자: |
수랴와르만 1세(Suryavarman I) 및 수랴와르만 2세 |
건립시기: |
11세기-12세기 |
본존 신격: |
시와(Shiva) 신 |
건축양식: |
번띠어이 스레이(Banteay Srei) 양식 및 여타 양식의 혼합 |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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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의 쁘레아 위히어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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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 1. 명칭에 관하여
- 2. 위 치
- 3. 고대의 역사
- 4. 영유권에 관한 국제적 논쟁
- 5. 캄보디아 내전
- 6. 세계문화유산 쁘레아위히어
- 7. 새로운 영유권 분쟁
- 8. 교통과 접근로
- 9. 구조물의 배치
- 참고문헌
- 외부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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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칭에 관하여

"쁘레아위히어"(Preah Vihear)는 태국어로 "쁘라삿 파 위한"(Prasat Phra Viharn, ปราสาทพระวิหาร) 혹은 "쁘라삿 카우 파 위한"(Prasat Khao Phra Viharn, ปราสาทเขาพระวิหาร)이라 번역된다(태국어 "pra"는 단순히 "파"로 발음됨). 크메르어 및 태국어에서 "쁘라삿"(Prasat, ប្រាសាទ)은 "궁궐" 혹은 "사원"이란 의미를 갖고 있고, 태국어 "카우"(Khao)는 "언덕"이나 "산"을 의미한다. "산"이란 의미의 크메르어는 "프놈"(phnom, ភ្នំ)이기 때문에 캄보디아인들도 가끔은 "프놈 쁘레이위히어"(Phnom Preah Vihear, ភ្មំព្រះវិហារ)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태국인들은 언제나 "카우 파 위한"이라 부르고 있다.
한편 크메르어 "쁘레아"(Preah, ព្រះ)와 태국어 "파"(Phra, พระ)는 "성스러운"이란 의미이고, 크메르어 "위히어"(Vihear, វិហារ)와 태국어 "위한"(Viharn, วิหาร)은 "신전", 특히 사원의 본당(중심건물)을 가리킨다.(역자 주) 태국에서도 최근에는(2008년 현재), 이 사원이 위치한 절벽 이름과 사원 자체를 구분하기 위해 "카우"(khao, เขา)란 말을 빼고 사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태국의 대중매체들이 이러한 관행 정착을 선도하고 있는데, 두 용어의 구분은 상당한 정치적, 민족주의적 함축을 내포하고 있다. [아래 "영유권에 관한 새로운 논쟁" 내용 참조]
(역자 주) 크메르어 "쁘레아"와 태국어 "파"는 공히 산스끄리뜨어와 빨리어 단어인 "와라"(vara)를 소리나는대로 음사한 용어들이다. 산스끄리뜨어에서 "와라"는 "최고의", "극도로 우월한"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고, 이를 한문권에서는 "수승"(殊勝) 혹은 "최상승"(最上承) 등으로 번역했다. 오늘날 불교도들이 사용하는 "수승한", "최상승의" 같은 형용사들이 바로 산스끄리뜨어 "vara"에서 유래한 것이다. 크메르 문화와 태국 문화에서는 사찰의 이름이나 국왕의 이름 앞에 관습적으로 붙이고 있고, 그 외의 종교적 사물에 대해서도 종종 붙이곤 한다. (예: 크메르어 쁘레아품[신탑]) 한편 크메르어 "위히어"와 태국어 "위한"에 해당하는 원래의 산스끄리뜨어 및 빨리어는 "위하라"(Vihara)이다. 한문권에서는 "정사"(精舍)라고 많이 번역되었다. 하지만 원래 "비하라"는 초기불교의 유행 중이던 승려들이 우기에 잠시 머물기 위한 간단한 시설을 일컫는 말로, 이에 따라 한문권에서는 "주처"나 "승방"으로 번역되기도 했다. 이후 이러한 비하라들이 보다 형식을 갖춘 큰 시설로 변해 후대의 불교 사원이나 수도원으로 진행된 것이다. 현재 사용되는 크메르어 "위히어"나 태국어 "위한"은 이러한 후대의 발전된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다. |
2. 위 치
이 사원은 당렉산맥(Dângrêk Mountains)에 있는 "뻬이 따디"(Pey Tadi) 언덕 위에 세워졌는데, 이곳은 태국과 캄보디아의 국경선을 이루는 곳이다. 역사적으로 이곳은 캄보디아와 태국 사이에서 여러 차례 영유권이 바뀌었던 곳이다. 캄보디아가 독립한 직후, 태국은 이곳을 북동부 시사켓 도 칸타랄락 군에 귀속시켰다. 보다 정확하게는 부엥 말루(Bueng Malu) 면 내의 "붐손"(Bhumsrol) 리에 포함시켰다. "붐손 리"는 소나무 마을이란 의미이고 "부엥 말루 군"은 현재 "사오 통 차이"(Sao Thong Chai) 면으로 통합되었다. 하지만 1962년 "국제사법재판소"(ICJ)가 이 사원을 캄보디아 소유로 판결하자, 이후 캄보디아 북부의 쁘레아위히어 도, 쪼암 크산(Choam Khsant) 군, 깐 또웃(Kan Tout) 면, 스와이 쯔롬(Svay Chrum) 리에 편성되었다. 이 사원은 앙코르와트(Angkor wat)에서 북쪽으로 140 km 떨어져 있고, 프놈펜(Phnom Penh)에서부터는 320 km 떨어져 있다.(주2)
(주2) Bunruam Tiemjarn, ไทยแพ้คดี เสียดินแดนให้เขมร (Thai Lost the Case - Lost territories to Khmer), Animate Group Publishing Limited, Thailand, 2007 ISBN 978-974-09-1683-3 (태국어) |
3. 고대의 역사
쁘레아위히어 사원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
아르주나와 싸우는 시와를 그린 상인돌
고뿌라 나무에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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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캄보디아 |
유산형태 |
문화유산 |
규준 |
i |
시기 |
1224 |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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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태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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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재연혁 |
등재 |
2008년 (제32차 회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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쁘레아위히어 사원군의 배치도. 본당(사진 상단)은 절벽 정상에 위치해 있는데, 그곳이 남쪽이고 이 사진 아래쪽 입구가 북쪽으므로 일반적인 지도와는 반대로 배치된 그림이다. 참조하기 바람. ☞ 확대사진 바로가기 |
쁘레아위히어 사원군의 첫번째 건물이 착공된 것은 9세기 초의 일이다. 이어지는 수세기 동안 이 사원은 힌두교의 신 시와(Shiva)에게 봉헌되었다. 특히 시와 신의 "산(山)의 신"이란 측면을 강조한 화신 "시카레슈와라"(Sikharesvara)와 "바드레슈와라"(Bhadresvara)에게 봉헌되었다. 이 사원의 초창기 건립 부분들은 10세기의 "꼬 께"(Koh Ker) 사원 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앙코르 제국의 수도를 "꼬 께"라고 불렀다. 현재는 10세기 후반의 "번띠어이 스레이"(Banteay Srei) 양식도 보이고 있는데, 사원군의 대부분 구조물들은 수랴와르만 1세(Suryavarman I : 1002 -1050) 및 수랴와르만 2세(1113 -1150) 때 조성된 것이다. 이 사원에서 발견된 한 비문에 따르면, 수랴와르만 2세가 자신의 영적 스승인 고령의 바라문 디와까라빤디따(Divakarapandita)에게 공양한 이야기가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수랴와르만 2세가 성스런 제의를 공부했고, 자신의 스승을 위해 축제를 베풀고 하얀 양산과 금 그릇들, 코끼리를 포함한 공양물을 바친 것으로 나와 있다. 이 비문에 따르면, 또한 디와까라빤디따 자신도 이 사원에 관심이 많아, 스스로도 황금으로 만든 춤추는 시와 상을 바쳤다고 한다.(인용각주 필요) 힌두교가 쇠퇴한 후에는 이 사원은 불교의 사원으로 사용되었다.
4. 영유권에 관한 국제적 논쟁
현대에 들어와 새로이 독립한 캄보디아와 태국이 이 사원을 놓고 감정적 논쟁을 벌이면서, 쁘레아위히어 사원은 새롭게 외부세계에 알려졌다.
1904년 시암(태국)과 캄보디아를 점령한 프랑스 식민당국 사이에 상호간 영토경계를 확정하기 위한 공동위원회가 출범했다. 이 사원에 관해서는 양국 대표들이 당렉산맥의 물길이 흘러가는 곳을 경계로 하자고 합의했고, 이에 따라 쁘레아위히어 사원 본당을 포함해 그 주변 대부분이 태국 영토로 귀속되게 되었다. 하지만 1907년 프랑스 관리들은 새롭게 조사작업을 해 국경선을 표시한 지도를 만들었다. 이 지도는 합의했던 물줄기 흐름을 벗어나 쁘레아위히어 사원 대부분이 캄보디아 쪽 영토 내에 위치토록 한 것이었다. 이 지도는 당시 시암 정부에도 전달이 되었고, 1962년 "국제사법재판소"(ICJ) 재판 시에도 증거로 사용되었다. 이 지도에는 사원이 표시되어 있었고, 국경선도 명확하게 사원의 북쪽으로 그려져 있었다.(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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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프랑스가 캄보디아에서 철수하자, 태국 군대가 이 사원을 장악했다. 캄보디아는 이에 대해 항의하면서, 1959년에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했다. 이 문제는 양국 내에서 상당히 폭력적인 이슈가 되었다. 외교관계가 악화됐고, 양국 정부는 서로 군사적인 위협 발언을 하기도 했다. 당시 "국제사법재판소"의 재판은 이 사원의 문화유산이란 측면이나 어느 국가가 크메르 제국의 역사적 계승자인가 하는 문제는 다루지 않았다. 다만 20세기 초에 이뤄진 국경선 확정과정에 관한 기술적 문제들을 검토했고, 태국 정부가 문제의 지도를 접수한 이후 어떠한 조치를 취했는가에 초점을 맞췄다.
헤이그(Hague) 재판에서 캄보디아측을 변론한 사람은 전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딘 에치슨(Dean Acheson)이었고, 태국측 법무팀에는 전 영국 법무부장관을 지낸 프랭크 소스키스(Frank Soskice) 경이 포함되어 있었다. 캄보디아측은 그 지도에는 쁘레아위히어 사원이 캄보디아 영토 안에 위치하며, 지도 또한 권위를 가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태국측은 이 지도는 당시 양측간 국경확정 위원회가 합의한 물줄기 흐름에 따른다는 원칙을 위반한 것으로 무효라고 주장했다. 태국측은 이 지도에 대해 일찍이 태국 정부가 항의하지 않았던 것은, 캄보디아측 영토의 가파른 절벽을 측량하기에 난점이 있었고, 또한 그 지도가 잘못된 것을 사전에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란 주장을 펼쳤다.
1962년 6월 15일, "국제사법재판소"는 재판관 9대3의 판결로 이 사원이 캄보디아 영토 내에 있다고 판결했고, 재판관 7대 5의 판결로 만일 태국이 조각 등 이 사원 내에서 분리해 유물들을 보유하고 있다면 그 또한 캄보디아측에 돌려주어야 한다고 판결했다. 판결문은 이 지도가 그려진지 50여년이 지났지만, 지도 상에 나타난 사원의 위치에 대하여 다양한 국제 포럼을 통해 태국측이 단 한번도 반론을 제기한 적이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1930년 프랑스 식민당국이 태국 정부인사였던 담롱 왕자(Prince Damrong: 현대 태국의 교육체제와 행정제도를 기초한 왕족 출신의 태국 역사학의 거두)와 여타 학자들을 이 사원에 초청했을 때도 반대하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했다. 또한 이 지도를 수용함으로써 태국은 국경문제의 다른 부분들에서 이익을 보았다는 점도 지적했다. 판결문은 이러저러한 근거를 통해, 태국측이 지도를 수용했고, 사원은 캄보디아 영토에 속한다고 판결했다.(주4)
태국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태국 정부는 이 논쟁에서 캄보디측에 편향된 입장을 보인 미국에 항의하기 위해 "동남아시아 조약기구"(Southeast Asia Treaty Organization)에 가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태국 관리들은 미국의 편향성 증거로 "국제사법재판소"의 미국인 재판관이 친-캄보디아적 투표를 했고, 딘 에치슨이 캄보디아를 변론한 것을 지적했다. 미국 정부는 에치슨이 개인적으로 캄보디아를 변론했다고 응답했다. 또한 태국에서는 이 판결에 항의하는 대규모 군중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태국은 결국 이 사원이 캄보디아에 귀속된다는 데 동의했다. 태국 병사들은 이 사원에 나부끼던 태국 국기를 하강시키지 않고, 여전히 깃발이 펄럭이는 게양된 상태로 깃봉을 파냈다.(주5) 이 깃발은 "모 이 다엥"(Mor I Daeng) 절벽으로 옮겨져, 지금도 그곳에 게양되어 있다.
1963년 1월 캄보디아는 약 1,000명의 인원이 참석한 가운데 공식적인 영토수복식을 거행했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캄보디아 쪽 절벽을 고되게 등벽해서 참석했다.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공도 1시간이 채 못되게 절벽에 매달려 있었고, 이후 무사히 도착해 스님들께 공양을 드렸다. 시하누크 공은 연설을 통해, 모든 태국인들이 별도의 경유를 거치지 않고 이 사원을 출입할 수 있으며, 만일 태국 측이 이미 소유하고 있는 유물들이 있다면 그것을 반환하지 않아도 좋다는 유화 제스터를 보였다.(주6)
5. 캄보디아 내전
"캄보디아 내전"은 1970년부터 시작됐다. 이 사원은 높은 절벽 위에 지어져 군사적으로 강력한 방어진지 역할을 했다. 론 놀(Lon Nol) 장군에 충성하던 병력이 이곳에 머물며 공산군대에 항전했다. 내전 기간 중에 태국쪽 영내를 통해 방문객들의 접근이 가능했다. 심지어는 1975년 4월 크메르루즈가 프놈펜을 함락시켜 "크메르공화국" 정부가 몰락한 후에도, 이들 "크메르국군"(FANK)은 이 사원에 남아 저항을 계속했다. "크메르루즈" 군대는 이 사원에 대한 공략에 고전하다가, 결국 1975년 5월 22일에야 이곳을 접수한다. 당시의 태국군 장교들의 보고에 따르면, 크메르루즈는 절벽에다 포격을 가하고 그것을 이용해 길을 놓았다고 한다.(주7) 이곳이 바로 크메르루즈가 마지막으로 접수한 캄보디아 영토였다고 전한다.
1978년 12월 베트남군이 침공해 크메르루즈 정권을 붕괴시키면서, 캄보디아는 다시금 전면적인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크메르루즈 군대는 국경 부근으로 후퇴했다. 1979년 1월에 베트남군이 이 사원에 있던 크메르루즈 군대를 공격해 사원을 접수했지만, 사원에 대한 피해상황은 알려지지 않았다.
베트남 침공 후 많은 캄보디아 난민들이 태국 영내로 몰려들었다. 1979년 1월 태국의 보안군은 이들 난민 수천 명을 쁘레아위히어 사원 인근의 캄보디아 영토 내로 강제로 송환했다. 이 중 많은 이들이 지뢰와 총격, 그리고 폭발로 사망했다. 베트남이 수립시킨 프놈펜 정부는 300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1980년대는 물론이고 1990년대에 들어와서도 캄보디아에서 게릴라전이 멈추지 않아, 쁘레아위히어 사원에의 접근을 막았다. 1992년에 공식적으로 잠깐 개방된 적이 있지만, 다음 해 크메르루즈 반군이 다시금 이곳을 접수하면서 중단됐다. 1998년에는 잔류한 크메르루즈 반군과 프놈펜의 정부 측 사이의 항복조건 협상이 이 사원에서 벌어지기도 했다.(주8)
1998년 말부터, 태국쪽을 통한 방문이 다시금 허용되었다. 캄보디아는 2003년에 절벽을 오를 수 있는 접근로 공사를 마쳤다.
(주7) United Press International, 1975-5-23.
(주8) The New York Times, 1998-12-6, p.18. |
6. 세계문화유산 쁘레아위히어
2008년 7월 8일, "세계유산위원회"(World Heritage Committee)는 태국정부의 몇 차례 항의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다른 26개 문화유산과 더불어 이 사원을 "세계문화유산"(World Heritage Site)으로 등재했다.
처음에 캄보디아가 이 사원을 유네스코(UNESCO)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신청할 것이라 발표했을 때, 태국은 이 문제는 공동으로 다룰 사안으로 유네스코가 2007년 회의에서 이 안건을 다루는 일을 연기해야만 한다고 항의했다. 이후 캄보디아와 태국은 이 사원이 "뛰어난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과 가능한 한 빨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야 한다는 데 완전한 합의를 했다. 양국은 2008년에 개최되는 "세계유산위원회" 제32차 총회에 캄보디아가 공식적 등재를 신청하는 데 합의했고, 태국의 적극적 지원에 힘입어 신청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러한 등재작업에 제출된 지도는 새롭게 그려져 있었다. 즉 여전히 태국측이 장악하고 있던 사원주변의 4.2 km²가 제외하고, 사원과 바로 그 주변 지역만 표시된 것이었다. 태국의 야당은 쁘레아위히어 사원의 등재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양국간 중첩된 지역을 "팔아먹은 것"이란 비난을 해대기 시작했다. 자국의 이러한 정치적 압력으로 태국 정부는 쁘레아위히어 사원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다는 합의를 청회했다. 하지만 캄보디아는 신청절차를 계속해서 진행했고, 태국측의 공식적 항의도 있었지만, 2008년 7월 7일(캄보디아 시간으로는 7월 8일) 쁘레아위히어 사원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크메르의 세계 추가사진) 쁘레아위히어 사원 주변의 위성사진. 위의 노란색 배치도와는 달리 일반적인 지도와 마찬가지로 상단이 북쪽이고 하단이 남쪽으로 구성된 지도이다. 따라서 절벽 정상에 위치한 사원의 중심 건축물 군(Temple Complex)은 아래쪽의 캄보디아 영토 깊숙히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있다. 중간의 길다란 급경사 계단(Stairway)을 통해 아래로 내려가면, 사원의 입구가 나온다(사진 상단). 그곳에도 일부 유적은 존재하지만, 주로 관광객을 맞이하기 위한 작은 시장(Market)이 자리잡고 있다. 여기에는 캄보디아와 태국인 주민들이 공동으로 영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국경선은 바로 이 사진 위쪽 부분에 보이는 황토길이다.
이 사진은 쁘레아위히어 뉴스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preahvihear news>에서 2008년 7월경 공개한 것이다. 원래는 <프놈펜포스트>에서 제작한 것으로, 기술적인 가공은 캄보디아의 "아루나테크놀로지"(Aruna Technology Ltd.)가 참여한 것이다.
☞ 쁘레아위히어 사원 구글맵 위성사진 바로가기
2008년의 새로운 국경논쟁은, "세계문화유산"이 모든 인류를 위해 보존된다는 이상에도 불구하고 지역 문화나 자연적 생물다양성과 불일치하는 국가적 권위가 종종 사용되어 운용된다는 점을 다시금 상기시켜 주었다. 캄보디아는 이 사원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에 앞서, "국제자연보전연맹"(IUCN)의 "범주5"에 해당하는 "경관보호"(Protected Landscape) 구역으로 지정하는 문제도 검토했었다. "범주5"(category V)는 "재창조 기회 제공을 위해 유지되야만 할 국가적으로 의미있는 자연 혹은 준-자연 경관"으로 정의되어 있다. 하지만 "범주5"는 일반적으로는 "적절한 해안이나 바다와 함게 하는 토지. 오랜 시간을 두고 사람과 자연 사이에 상호작용이 있으면서 상당한 미학적, 문화적 혹은 생태적 가치를 지니고 있을 것. 그리고 높은 생물다양성(biological diversity)을 보일 것. 이러한 전통적인 상호작용의 통합성이 그 지역의 보존과 유지, 진화에 결정적 역할을 할 것."이라고 정의된다.
1994년 무렵 태국은 시사켓 도에서 "세계문화유산" 신청회의를 개최했는데, 이 회의에서는 지역적 문화전통이 "쁘레아위히어" 같은 기념물들을 통해 민족주의적 감정을 자극한다는 논의를 한 바 있다. 당렉산맥에 이어진 라인은 지역적 문화공동체들 및 군사적인 [불완전하게 확정된] 현대 국경선과 함께 묶여져 있다. 몬-크메르 계통의 소수민족인 꾸이(Kuy) 족이나 수아이(Suay) 족은 현재 캄보디아의 "야생보호구역"인 꿀렌(Kulen) 지역을 포함하여 동락(Dongrak) 절벽 첨부를 통로로 이용하는데, 이 길을 통해 이들은 코끼리를 사냥하거나 포획한다. 캄보디아의 꾸이 족은 "프놈 덱"(Phnom Dek)에서 산출되는 광석을 이용한 대장기술에 숙련된 사람들이다.(주9) 쁘레아위히어 사원 주변에서의 코끼리 사냥은 "국제사법재판소" 판결과도 관련되며, "세계문화유산"은 관광에서 기인하는 문제를 보호하기 위한 국가적인 지역 문화 및 생물종 보호노력을 감시할 예정이다. 한 국제법 교수는 "국제평화공원"(international peace park)을 위한 배타적 주권을 초월하는 개념을 주창하기도 했다.(주10) 한 학술논문은 "태국과 캄보디아가 유혈과 고통만 유발시켰기 때문에, 이 지역을 양측 모두로부터 보존할만도 할 것 같다. 이 지역을 토착 주민들에게 돌려줄 수도 있을 것이며, 양국 정부와 지역 공동체가 대등하게 그 관리에 나서, 초-국경적인 "경관보호-인류학적보존 지역"(IUCN "범주5" 및 "범주7")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라 결론내리기도 했다.(주11)
2008년의 군사적 충돌을 생각하면, 그러한 초국경적 보존지구가 장래의 원만한 국경선 합의를 도출하기 위한 비무장지대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부수적으로 이 지역의 생태적, 문화적 측면들을 보존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지역은 다른 아세안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빠른 개발속도를 보이는 캄보디아와 태국 양측 모두로부터 아직까지는 그 개발의 충격을 덜 받고 있기도 하다.
(주9) Seidenfaden, Erik (1952) "The Kui People of Cambodia and Siam," Journal of the Siam Society 39(2): pp.144-180.
(주10) Roth, William, Bangkok Post, 2008-7-22.
(주11) Cuasay, Modern Asian Studies 32, 4 (1998), pp.849-890. |
7. 새로운 영유권 분쟁
2008년 6월부터 시작된 캄보디아와 태국 사이의 대치국면은 쁘레아위히어 사원을 둘러싼 한 세기에 걸친 분쟁의 마지막 국면이었다. 태국은 아직 이곳의 국경선이 확정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주12)
2008년에는 영유권 논란이 한층 확대되었다. 이 논란은 쁘레아위히어 사원에서 서쪽으로 153 km 떨어진 따 모안 톰(Ta Moan Thom) 사원군으로 확대되었다. 이 사원군은 태국의 수린(Surin) 도와 캄보디아의 웃더 미언쩌이(Oddar Meancheay) 도 사이에 위치해 있다. 일부 자료들은 태국 아란야프라텟(Aranyaprathet) 군에 위치한 스독 꼭 톰(Sdok Kok Thom) 사원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이곳은 태국 영토 안족으로 1.6 km나 들어가 있어 경계선이 잘 확정되어 있고, 쁘레아위히어 사원이나 따 모안 톰 사원군과 달리 인구밀집지역이기도 하다.(주13)

상단의 지도는 "쁘레아위히어 사원" 주변의 지형도이다. 1904년 프랑스 당국과 태국이 합의한 원칙인 물흐름에 따른다면, 아래쪽 파란색 경계선이 국경선이 되어 쁘레아 위히어 전체가 태국영토가 된다. 반면 1907년에 제작되어 양측이 공유한 지도에는 *****선으로 표시된 현재의 국경선에 따라 사원 입구를 제외한 거의 모든 부분이 캄보디아 영토로 되어 있다. 이 지도 사진은 "위키피디아 영문판"의 "Crazyhero" 회원이 제작하여 2008-7-4일에 "당렉산맥" 항목에 삽입한 것이다. |
8. 교통과 접근로
캄보디아 내에서 쁘레아위히어 사원으로 갈 때는 쁘레아 위히어 도의 뜨벵 미언쩌이(Tbeng Meanchey)를 경유하는 길과, 시엠립 시에서 출발해 안롱 웨잉(Anlong Veng)을 경유하는 방법이 있다. 시엠립에서 출발하면 비교적 아스팔트가 잘 닦여 있지만, 당렉산맥의 급경사지로 접근하면 종종 자갈길이 나타난다.
태국 내로 가려면 시사켓 도의 칸타랄랄 군을 통과해야만 한다. 캄보디아는 태국측에서 방문할 경우 무비자로 일일관광을 허용하고 있다. 2006년 현재 캄보디아는 외국인에 대해 미화 5 달러 혹은 태국돈 200바트를 입장료로 받고 있는데, 태국인에 대해서는 50바트를 할인해주고 있다. 여기에 여권을 복사하는 비용 5바트를 추가로 받고 있다. 또한 태국은 국립공원 입장료로 400바트를 별도로 받고 있다. 태국과 마찰이 있을 경우 캄보디아측이 때때로 태국 쪽에서 오는 방문객의 입장을 허락하지 않기도 한다.
9. 구조물의 배치
이 사원군은 남-북 축으로 800 m에 걸쳐 조성되어 있다. 구조물은 사원군의 남쪽 끝이자 절벽 정상에 위치한 본당을 향해 포장도로와 계단들로 이어진다. 본당은 북쪽 끝보다 120 m가 올라간 지점이고, 캄보디아 평원보다는 525 m, 그리고 해수면보다 626 m 높은 지점에 위치해 있다. "사원 산(山)" 개념으로 조성된 앙코르 지역의 사원들과는 구조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지만, 기능적으로는 동일하게 신들이 산다고 하는 "메루(Meru) 산"을 표현한 것이다.
구조물은 본당의 다섯 고뿌라(gopuras)에서 그 정점을 찍고 있다. 전통적으로 다섯 고뿌라는 성스런 본당의 외형으로 조성되었고, 이 부분이 방문객이 맨 먼저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뜰 앞의 각각의 고뿌라들은 단계적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높이에 따라 보이는 모습이 달라진다. 입구에서부터 사원으로 들어가면서 각 단계마다 고뿌라들이 그 다음 단계의 모습을 가리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이 사원군 전체를 한 눈에 볼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꼬 께(Kor Ker) 양식으로 세워진 다섯번째 고뿌라는 붉은 페인트의 흔적을 갖고 있어, 지금은 사라져버린 기와 지붕의 존재를 알려준다. 그 다음에 나타나는 네번째 고뿌라는 "클리엉/바푸온"(Khleang/ Baphuon) 양식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그 남쪽 완사면에는 "쁘레아위히어 사원에 있는 걸작 중 하나"(Freeman, p.162)인 <우유 바다에서 불생음료 찾기>(Churning of the Sea of Milk)가 묘사되어 있다. 가장 큰 세번째 고뿌라는 양 옆으로 2개의 방을 가지고 있다. 본당은 연속적인 뜰을 지나서 위치하는데, 뜰에는 2개의 회랑이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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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영상은 캄보디아 대중음악계에서 락 뮤직 전문 기획사인 "락 프로덕션"(Rock Production)이 최근 2009년에 제작한 CD(Vol.107)에 삽입된 곡이다. 제목은 "쁘라삿 쁘레아위히어 모러더 크마에"(쁘레아위히어 사원은 크메르의 문화유산)이다. 캄보디아의 방송에서 종종 방송되기도 하는데, 음악적으로 비교적 잘 만든 곡이다. |
참고문헌
- Coe, Michael D. (2003). Angkor and the Khmer Civilization. Thames & Hudson. ISBN 0-500-28442-3.
- Higham, Charles (2001). The Civilization of Angkor.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ISBN 0-520-23442-1.
외부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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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This Edition might not be neutral in terms of the Thailand's position.
may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