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원(桑園) 박종옥(朴宗玉)- 時調詩人
상원(桑園)은 1912年 9月 1日生이다. 도초면 수다리에서 태어나 1953年 11月 23日 불귀의 혼이 될 때까지
시조시인(時調詩人)으로 오직 한길을 걸었다. 39세의 왕성한 나이에 입지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한 그는 바다가 좋아 대양을 예찬하고
고향이 좋아 다도해를 시로 읆겨 썼다. 소탈한 성격으로 늘 후배들에게 따뜻한 친구가 되어 주었던 시조시인 박종옥은 심덕이 좋아 뭇사람들의 벗이
되었다. 1948年 6月 20日, 해방의 기쁨과 함께 새롭게 빛나는 농어촌의 의식세계를 풍부한 시적 감성으로 표현해 「상원 시조집」을
발간했고, 곧이어 1년 뒤인 1949年 6月 10日에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일용어 사전」을 만들었다. 어둠이 풀리면 운무(雲霧)가 서려 있고,
돌아앉은 점점이 해돋이를 기다리는 그것들 중 하나가 도초도이고, 상원은 예서 은삭(恩索)했다. 그의 문학적혜안(慧眼)은 분명했고 묻어
흐르는 채취는 아직도 고당산과 함께 진정 살아 있을 것이다.
◇다 도 해◇
천도더 이섬저섬 그림아냐 상해로다 하힌섬 하나인양 이럭저럭 보이다가 세찬뉘 휘몰아치면 희디희고 마누나 앞뒤가 물이어늘
섬일세 분명한데 좌우가 뫼에 막혀 물에든양 방불하니 섬이라 뭍이라못해 어름어름 하노라
◇ 유달산 꼭대기에서 ◇
반기어 오른층계 하도층층 몇층인고 오르고 또오르고 천야만에 맨꼭대기 예와본 인간층계는 더더층층 하여라 반백년 매지구름
창때비를 퍼부슬제 노적봉 옛자랑이 더복바처 울었구나 유선각 나래를치니 새로산듯 하여라
◇ 여순항에서 ◇(안중근 의사를 회상하고)
이 자리 산천일월 만고열사 뵈왔구나 하늘땅 무너지고 피는뿌려 어쩧더냐 후손이 뜻두고 보니 그대로를 일러라 백옥산 놀랐소라
우뚝주춤 떠는구나 햇귀도 무서워라 그날그때 그정인지 물마루 저저너머로 피를 뿜고 잠기네
▣ 강헌(剛軒) 고응만(高應萬)-의병
고응만(高應萬)의 본관은 장흥이요, 자는 주빈(周彬), 호는 강헌(剛軒)이며, 1878년 도초면 외남리 세칭 빛터골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중형 고박(賈舶) 1척을 갖고 부안 줄포, 함평, 영산포 등지에서 포구를 상대로 소금을 싣고 가서 팔고, 옹기 등의 생활필수품을 사다 섬 지방에
팔아 생활을 꾸려 오는 상인이었다. 주빈(周彬)은 성장함에 따라 부친을 돕게되었고 이 때문에 자연히 각지의 포구를 돌아다니게 된
것이다. 그는 일제가 마수를 뻗히기 시작한 1907년 어느날 부친과 함께 배에 소금을 싣고 부안 줄포에 정박했다. 길가 담벼락에 붙어 있는
격문이 그의 눈길을 끌었다. 내용은 고창(高敞)에서 의병을 모집한다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그의 젊은 피가 끓기 시작했다. 들뜬 마음으로
잠 한숨 자보지 못하고 궁리한 끝에 의병에 자원키로 하고 날이 밝자 부친 몰래 옷 한 벌을 싸들고 고창으로 달렸다. 다음날 김준부대장을 마나
뵙고 그의 우국충정을 토로했다. 감동한 김부대장의 주선으로 곧장 장성(長城)에 본부를 둔 의병 기삼연대장 휘하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것이 나라
위한 험난한 의병생활의 시초가 된 것이다.
그가 최초로 싸운 것은 그해 10월 21일이었다. 왜병이 고창에 들어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의병은 고창에 숨어 들어갔다. 주빈도 의병이던
정,황포수와 함께 길목에서 은신했다. 수많은 왜병이 고창에 들어와 거드름을 피우자 때를 놓치지 않고 발포했고 은신해 있던 의병들은 일제히 협공,
거의 전멸시켜 버렸다. 이를 시점으로 장성 분파소, 광주 영광, 법성포,담양 등 왜놈 본거지를 습격해 일경을 사살하고,창고에 쌓아둔 양곡을 꺼내
주민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하였다.1908년에는 김준부대장 지휘오 함평주재소를 습격하여 순사 수명을 사살 하고 무기를 노획했으며, 담양 무등산
무등촌 전투에서는 왜병부대장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그 해 봄 함평 어등산 혈전에 참가했던 의병들은 김준부대장이 전사하는 비통을 겪기도 했다. 김준부대장이 전사한 후 이기손부대에
들어갔으나 왜병의 호남의병 토벌이 사작되자, 병력의 약세로 대접전을 벌이지 못하고 하는 수 없이 결사대로 지원, 지도읍과 칠발도 등 해안지대의
왜병을 급습, 섬멸했다.
그러나 1910년 유격전 때에 불행하게도 등에 총상을 입고 흑산도로 피신했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치료하면서 동지들의 유격전을 은밀히
지도했다. 그 후 상처가 계속 악화되어 고생하다가 조국광복도 보지 못한 채 1937년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 석암(石岩) 김권일(金權一)
김권일(金權一)은 가락국(駕洛國) 김수로왕(金首露王)의 70세손으로 이름은 석암(石岩)이며, 자는 권일, 호는 노악(露岳)이다.
경신년(庚申年)인 1836년 도초면(都草面) 만년리(萬年里) 태생으로 어렸을 때 부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 그는 어머니가 병으로 몸져
누어있게 되자 좋다는 약은 모두 구해다 병구환에 힘썼고 별다른 효험이 없자 허벅다리 살을 도려내어잡수도록 했으며, 그 뒤 어머니가 숨을 거두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입에다 넣어 회생시키기도 했다. 그의 둘째 아들 경재는 신유생(辛酉生 . 1861년)으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종 9품
장사랑(將仕郞)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등을 역임했고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 겸 자헌대장(資憲大長)에 칭했다. 그는 근면하고 온화했으며,
의지할 수 없는 노약자들에게는 양식을 나누어 주고 도초면 일대에 흉년이 들자 농민들이 납부할 조세를 한꺼번에 대납하는 봉사와 희생정신을
발휘하기까지 해서 유림으로 조직된 대동사문회(大同斯文會)로부터 포상을 받았고, 1913년(大正2년)에는 당시 조선총독 대라우찌의 표창을 받는가
하면 면민들은 공적비를 세우기도 했다.
셋째 아들인 경지는 계해년(癸亥年)인 1863년 출생으로 그 역시 지극한 효자였다. 부친인 권일이 병으로 몸져눕자 한적한 산으로 올라가
며칠을 산신께 기도했더니 산신마저 효성에 감동 했음인지 한 노인이 나타나 약초와 처방을 가르쳐주고 홀연이 사라졌다. 약초를 마련해 달인 물을
아버지께 드렸더니 과연 씻은 듯이 병이 나왔다. 경지의 처인 초계(草溪) 최씨(崔氏)도 소문난 열녀였다. 경지가 36세 되던 해에 병이 났는데
백약(百藥)을 구해와 치료에 정성을 쏟았고 효험이 없자. 산에 단(壇)을 쌓고 밤낮으로 가림 없이 기도했다 .마지막 숨을 거두자 손가락을 잘라
입에 넣기도 했으며, 운명 뒤에는 묘 옆에 초려를 짓고 3년간이나 살았다.
▣ 경산(鯨山) 박홍원(朴烘元)- 詩人(敎授)
고 경산 박홍원 교수님은 1933년 전남 신안군 도초면 발매리에서 출생하시어 목포사범학교를 거쳐 1952년에 졸업하였으며, 목포사범 재학
시절부터 문학에 뜻을 둔 박 교수님은 당시 조선대학교 문학과 교수로 계시던 김현승 시인을 만나면서부터 본격적인 문학 수업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의 문학적 재능을 눈여겨 본 김현승 교수님에 의해 당시 가장 권위 있는 문학 잡지인 "현대문학"에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하게 되며, 1959년
6월 시 '고행' 과 '밤'으로 초회 추천을. 1960년 8월 시 '수난 이후' 로 2회 추천을, 그리고
1962년 9월 시 '종언을 보며' 로 완료 추천을 받으신 것이다. 그는 이후에 '구두'(현대문학, 1963.3), '술과
나와 오늘'(현대문학, 1963.11), '선인장의 역설'(현대문학, 1965.1) 등의 수작을 꾸준히 발표하여 시단에서의 위치를 굳혀 갔다.
문단에 얼굴을 내민 지 10년만인 1969년 9월 그는 첫 시집 "설원"(예문관)을 내놓았다. 이 시집에는 10년간의 노작 33편이 수록되어
있다.
고 경산 박홍원 시인은 등단한 이래 시집 1969년 "설원", 1973년 "옥돌호랑이", 1979년
"나무용의 웅얼임", 1991년 "날개펴는 노거수", 1994년 "참대의 시" 등 5권의 시집과 1999년
"박홍원 시전집"을 상재하는 등 시. 수필. 평론 등을 꾸준히 발표하셨습니다. 박홍원 교수님의 활발한 문학활동은 한국 현대시의
위상을 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하셨고 이와 같은 공적이 인정되어 1973년에 제17회 '전라남도 문화상(문화부문)'을 받으셨고, 1998년에
"신안군민의 상(교육 문화 부문)"을 받으셨다.
전남문인협회 회장,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한국문인협회이사, 한국현대시협회 중앙위원 등을 지내면서 한국문학 발전에 기여하여
하셨다.'원탁시' 창립동인이며, '표현문학' 동인이다. 그리고 고 박홍원 교수님은 광주광역시의 "시민의 노래" "아!
무등"의 작사를 비롯하여 도초중·고교등 여러 학교의 교가 와 응원가 등을 작사하셨으며, 영광 원자력 발전소 준공
기념탑, 광주·전남 경우회 충혼탑, 여천 돌산의 현충탑 등에 새긴 시문 등을 지으셨다.
또한 무등산 자락 제2수원지의 청풍 쉼터에 "아! 무등"의 노래시비 와 지원동 화순터널의 시민공원에
"시민의 노래"시비가 있으며, 박 교수님은 전라남도 정책자문위원, 광주광역시 정책자문위원, 광주,전남 21세기 발전협의회 이사로
활동하시어 지역 문화 현장에도 이바지 하셨다. 한편, "전라남도지"와 "광주광역시사"의 편찬 및 집필위원, "전남문학변천사" 편찬고문으로서 지역
문화사를 정립하는데 에도 크게 기여하셨다.
고 경산 박홍원 시인은 조선대학교 문학과를 졸업한 1956년에 조선대학교 부속고등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교육계에 투신하셨으며, 중등학교
교사로 6년 동안 재직하면서 바른말 교육, 정서 교육에 역점을 둔 국어교육을 실현하여 수 많은 인재를 육성 배출하는데 이바지 하셨고, 1996년
조선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로 자리를 옮기신후 국어국문학과 와 국어교육과 교수로 33년간 봉직하시면서 교육과 연구에 헌신해 오시다,
1999년2월 영예로운 정년을 맞으시어 조선대학교 명예교수로 추대되셨다.
대학 교수로 근무하시는 동안 조대신문사 편집국장(1969. 5. 1∼1969.12. 31), 문리과대학 교학과장(1973. 10.
11∼1975. 3. 18.), 국어국문과 학과장(1975. 3. 6.∼1980. 6. 10), 국어교육과 학과장(1980. 6.
10∼1984. 4. 4),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주임교수(1980. 9. 1∼1989. 2. 28), 조대학보사 주간(1982. 1.
1∼1983. 1. 1), 사범대학 부학장(1980. 6. 28∼1980. 9. 2), 사범대학장(1980. 9. 3∼1988. 1. 18)
등의 보직을 두루 거치면서 모교인 조선대학교와 대학교육 발전에 헌신적으로 이바지 하셨다. 특히, 국어국문과와 국어교육과 교수로서 그 동안
대학교수, 중등학교 국어과 교사, 문인, 언론인 등 수 많은 국가 사회의 지도자를 양성, 배육 하시었다.
시인이시며 교수이신 고 박홍원 교수님은 문학 창작과 연구와 교육에 평생을 바치시다가 2000. 1. 5 서거하셨다. 고 경산 박홍원교수는
이제 우리의 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선생님의 공덕과 문화적 향기는 우리들의 가슴속에 살아 남아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것입니다.
박홍원의 등단과 초기의 시적경향은 "형식과 내용을 조화시킨 중용의 길을 지향하는 독자적인 시 세계"라는 평가
우주적 시/공간에 따른 존재의 변전 간파
그는 시집 "설원" 이후 4년만인 1973년 10월에 제2시집 "옥돌호랑이"(형설출판사)를 상재하였다. 이 시집에는 '부드러움' 등
30편의 작품을 싣고 있다. 이 두 시집에 실려 있는 작품들은 그가 추구한 초기의 시적 경향이 잘 드러나 있다. 김현승은 첫 시집의 '서문'에서
박홍원의 작품들이 "지니고 보여주는 가치에 상당한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면서 그의 시적 특질을 다음과 같이 적시하고 있다.
홍원의 시는 소재를 객관적인 사상(事象)이나 자연 가운데서 구하면서도, 그 표현 속에 반드시 어떤 삶의 의미를 담고야 마는 것으로 특징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그는 삶의 의미라는 사상적 깊이만에 전념하거나 과열하지는 않는다. 시의 무게를 적당히 이룰 만큼 텃치하고
있다. 아마도 그는 사상만을 디렵다 파지도 않고, 소재만을 가지고 가볍게 유희하지 않는 것 같다. 말하자면 형식과 내용이 조화된 중용의 길을
지향하는 것이 그의 독자적인 시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김현승의 지적은 그의 시가 '사물시'이면서도 단순한 시적 대상에 대한 묘사에 그치지 않고, 항상 인생 철학적 의미를 지님으로써
형식과 내용이 조화된 미적 질서를 갖추고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김현승이 파악한 박홍원의 시적 특질은 그의 전 시세계를 관류하고 있는 바탕일
뿐만 아니라, 그만이 가질 수 있는 시문법의 틀로 판단된다. 비평가들에 의해 그의 초기시 중에서 대표작으로 자주 거론된 작품은 첫 시집
"설원"에 맨 처음 실려 있는 '바람'이다.
태어나면서 빈 가슴을 채우고 있었다. 사랑과 미움이 너를 앞세우고 머리칼을 날렸다. 어느 아뜨리에에서 만났을 때 너는
비이너스의 주변을 서성이며 그 섬세하고 보드라운 선만큼의 공간에 비이너스를 앉혀 놓고 볼을 부비고 있었고.
어느 날의 황혼, 피아노의 건반에서 정염을 뽑아 내며 몸을 비꼬던 너는 비어가는 포도주병 속에 들앉으며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유혹하기도 했다.
내가 침묵을 지킬 때 사람들은 말을 잃고 아름다운, 꽃들은 몸짓을 잃고 세상은 얼어붙은 시간의 빈터에서 고요히 잠들 것을,
나뭇잎에 눈짓을 주어 보이지 않는 제 생명을 살피고, 식은 가슴에서 불씨를 찾아내고 쉬임 없이 거리를 헤매는 너는
태어나면서 사랑과 미움을 잉태하고 있었다.
-박홍원의 '바람' 전문
당시 "현대문학"에 월평을 쓰고 있던 문학평론가 천이두는 1970년 1월호에 숫제 그 제목부터 "박홍원의 '바람'"이라고 붙이고 이 작품을
극찬하였다. 즉 이 작품이 한국시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랜만에 좋은 한국시를 만났다는 기쁨을 주는 시라고 평한 것이
그것이다. 그는 이 시를 '어수선한 이미지의 바람'과 '잔잔한 리듬'을 내면화를 통해 조화시켜 통일된 질서 부여에 성공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그의 시가 이러한 평가를 받는 것은 서정주의에 기반을 둔 그의 시관에 기인한다. "시적 감동은 시의 효용성과 예술성의 상승작용 내지 그
유기적 조화에서 얻어진다."고 본 것이 그의 시관이다. 따라서 그는 "시가 언어예술임에는 틀림이 없지마는 인간의 현실이나 이상을 도외시해서는
아니되며, 반면에 시가 인류 문화와 사상을 토양으로 하고, 시대적, 사회적 열망을 표현한다할지라도 정서적 감동을 배제하고서는 시로서의 가치는
희박해 진다."고 하여 서정성의 배제를 경계하고 있다.
위에 예시한 '바람'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박홍원의 초기시에서 드러나는 전반적인 특징은 사물의 존재 가치를 투사적 기법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로 창출해 내고 있는 점이다. 특히 그의 이러한 사물에 대한 미학적 해석은 인간의 존재와 사물의 존재를 등가로 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는 우주적 시공간의 변화에 따른 존재의 변전을 불교적 세계관을 통해 간파하고 있는 것이다.
실어증 시대의 알레고리 언어 박홍원
사회현실에 관심, 유신시대 지식인 고뇌표출
잔잔한 목소리 속에 강한 메시지 담아
박홍원은 1979년 제3시집 "나무龍의 웅얼임"(시문학사)을 내놓았다. 제2시집 "옥돌호랑이"(형설출판사, 1973) 이후 6년만의
일이다. 이 시집은 6년간의 작품 31편을 1부에, 그의 기존 시집 두 권에서 각각 13편씩을 골라 2,3부에 싣고 있어 그 시점에서의 시적
발자취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꾸며졌다.
제3시집에서 그의 시적 관심은 초기와는 약간 다르게 변모되고 있음이 눈에 띈다. 그것은 바로 사회 상황에 대한 관심과 문명 비판적 경향이
드러나 있는 점이다. 문학평론가 박철희는 이 시집의 시들이 "쉽게 읽히면서 뇌리에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은 그것이 단순한 자기 탐닉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을 지닌 세계임을 증언"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조용한 변화는 유신 시대 초기에 나온 제2시집의 '옥돌 호랑이', '양심의
근대화' 등 일련의 작품에서 조짐이 이미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는 서정적 목소리를 변성시키지는 않는 범위에서 예술성의 수위를 조절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월출산 숲속의 방울새 소리가 아직도 새벽이면 귓속에서 구르고 초여름 산의 미소가 가슴에 서려 지금도 신새벽이면 내
눈을 띄우는데, 심각한 몸짓말의 바위들도 다 두고 이목구비 다 잘리고 개울물에 씻기고 썩을 대로 썩다 남은 동백나무 등걸,
그 지지리도 못난 등걸 하나 업어 온 게 용으로 태어나서 입을 열었다.
(중략)
어떤 기대 속에 요놈을 끌어다가 용호상박 되뇌며 맞붙여 놓았다. 청룡의 분노에서 백호의 용맹에서 오랜 동안
잃었던 시인의 말 찾아질까? 한 번 맞붙여 놓아 보았다. 천동 지동 치리····조마조마하며 문 꼭꼭 닫아 걸고 맞붙여
놓았다. 그러나 세상엔 아무 일도 없었다. 천왕봉의 영물스런 돌이나 가져올 걸 ....... 세상은 말이 없이 해가 뜨고
달이 떴다. 용맹의 긴 수염 거세된 호랑이 정의의 혀끝도 굳어버린 나무용. 요놈들을 아예 내 쫓아 버릴까 하는데, 문득
나무용이 웅얼이었다. "현대의 용호는 입다문 군자야." "현대의 군자는 이목구비가 없어야 해."
-박홍원의 '나무龍의 웅얼임' 중에서
이 시는 무생물인 '동백나무 등걸'을 '용'이라는 상상의 동물로 활유화하고, 이를 다시 의인화하는 과정을 거쳐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모습으로 알레고리화하고 있다. 이러한 작품은 역사주의적 시각에서 문학 외적 문맥을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극에
달하던 시대라는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감안하지 않고는 이 시의 진의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는 '방울새 소리'의 자유와 '심각한 몸짓말'을 하는 바위, 그리고 여기에 대비되는 '정의의 혀끝도 굳어버린 나무용'의 사회적
의미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문 꼭꼭 닫아 걸고 맞붙여' 놓은 '용호상박'으로나마 카타르시스하려는 화자의 심경과 나무용의 발화로 드러나는
패러독스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이토록 그는 여러 가지 시적 장치를 통해 그 시대를 살아 온 '지지리도 못난' 지식인으로서의 자아를 확인하고,
언론이 죽고 자유가 죽은 독재 시대에서의 지식인의 고뇌를 작품을 통해 토로하고 있다.
'나무용'은 유신 시대 언론의 알레고리라는 점에서 유신 초기에 쓴 '옥돌 호랑이'의 시적 발상, 시적 의도와 궤를 같이 한다. 어쩌면
옥돌호랑이의 속편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옥돌 호랑이'는 박정희의 유신 헌법이 공포된 후 국민이 정부를 선택할 권리를 빼앗아 버린 시대
상황에 대한 지식인으로서의 고뇌를 표출한 것이다. "내 옥돌 호랑이는 아가리만 벌린 채 / 혀가 굳고 소리가 거세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
어찌된 일인가고 눈 여겨 보니 / 이 놈은 또 선택의 자유를 빼앗겼는지 / 고개가 한 쪽에 고정된 채 하품만 하고 있는 것이었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옥돌 호랑이'와 이 작품은 크게 두 가지 면에서 유사하다. 하나는 무생물을 시적 대상으로 하여 시인의 시대적 고뇌를 알레고리화한 점이고,
둘은 화자의 '서재'라는 폐쇄 공간을 설정한 점이다. 그러나 시의 말미를 '옥돌호랑이'는 '연암'이라는 인유를 내세워 선비 정신에 대한 의지를
다지고 있고, '나무용의 웅얼임'은 패러독스로 마무리하고 있는 점에서 각각의 특성을 보여 준다. 시집의 표제를 "옥돌호랑이"와 "나무용의
웅얼임"으로 붙인 것은 시인 자신이 이러한 비판적 의도에 힘을 싣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시는 전반적으로 흥분하지 않는 잔잔한 목소리 속에 강하고 날카로운 메시지를 담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 그는 초기부터 견지해 온 개성적
특성인 서정주의를 바탕으로 한 미학적 장치의 다양화를 통해 시적 완성을 추구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극작가로 알려진 신봉승이 일찍이 문학평론
추천완료작인 '현대와 시와 인식'(현대문학, 1960.11)에서 박홍원의 시 '수난이후'를 들어 "현대를 바로 인식한 진정한 현대시의
갈길"이라고 평한 것은 바로 이러한 그의 시적 특성을 갈파한 것이다.
관용과 화해의 시세계 구현-박홍원
시/공간 넘나들며 새 이미지 창조
1960년 김현승 뒤 이어 교수 부임, 시론 강의
1979년 제3 시집 "나무용의 웅얼임" 이후, 80년대의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 90년대 벽두에 서서야 시인 박홍원은 한 권의 시집을
내놓을 수 있었다. 제4시집 "날개 펴는 노거수"(예원, 1991)가 그것이다. 이 시집은 제1부 '내 가슴 널빤지에', 제2부 '차마 못한 말
한마디', 제3부 '뿌리의 계단을 오르며', 제4부 '지산동의 아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74편의 시편들이 실려 있다. 이로부터 3년 후에
제5시집 "참대의 시"(예원, 1994)를 펴냈다. 이 시집은 제1부 '무등산 자귀나무', 제2부 '노거수의 언어', 제4부 '나랏말씀을
위한'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53편의 작품을 묶은 것이다.
이 시집들에 담겨 있는 그의 시정신을 한 마디로 말하면 '역사와 시대 인식의 서정적 표출'이다. 한편 그의 시에서 돋보이는 기법적 특징은
시간과 공간의 넘나들기이다. 다시 말하면 과거에서 현재로, 고향에서 도시로 넘나들며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해 내고 있는 것이 그의 시작법의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바닷가 긴 잔등 문바위로 가는 길 모진 목숨으로 뻗는 찔레가 파도 소릴 끌어안아 출렁인다. 금남로
긴 잔등 민주화로 가는 길 들찔레 푸른잎이 형형한 눈을 뜨고 맺힌 울부짖음 파도로 깨어난다. 응달과 양달이
한 뿌리인 찔레넝쿨 뙤약볕에 눈송이 핀 바닷가의 긴 잔등 마음이 한 뿌리인 찔레 같은 사람들 뜨거운
가슴으로 파도를 일으키는 성난 거리의 긴 잔등.
-박홍원의 '긴 잔등' 전문
이 시에서 보이는 것처럼 '긴 잔등'의 공간은 두 개의 이미지가 오버랩 되어 있다. 과거 체험의 공간인 '바닷가 긴 잔등'과 현실 인식의
공간인 '금남로 긴 잔등'이 그것이다. 80년 5월의 상징인 금남로의 이미지에 바닷가의 긴 잔등에 뻗어 있는 강인한 들찔레의 시각적 이미지와
파도 소리의 청각적 이미지를 가져 온 것은 공간과 시간의 넘나들기 기법이다. 이러한 기법은 '꿈과 신발' '꿈덤불에 들다' 등에서는 꿈과 현실을
넘나들기도 하고, '허·거·참' '쑥·마늘' '단상'에서처럼 하늘과 땅, 이승과 저승, 현실 사물과 역사의 시·공간을 넘나들기도 한다.
문학평론가 박철희의 말대로 그의 시가 "행복한 과거로 퇴행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90년대에 내놓은 두 권의 시집에 나타난 주제적 특질은 '광주정신'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역사의 산마루에 서서 80년대의 험준한
산골짜기를 바라보며 진정한 '광주 정신'을 노래한 것이다. 이것은 그가 체험한 "80년대의 국가적, 지역적, 학내적 소용돌이"와 "인생의 파국적
상황"이 가져다준 비틀거림과 곤혹스러움을 극복하고 난 후에 비로소 가능한 '광주'에 대한 역사적 해석이요, '광주'에 대한 사랑의 한 방식이다.
그는 광주 정신을 "더러는 넘어져 두 동강 나고 / 짓눌리고 밟혀도 버티는 뚝심 / 더러는 뒹굴다가도 무릎 세우는 슬기"와 "할 일 하고
안할 일 안하는 지조"('서석대')로 파악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그는 "멀리서 바라볼 땐 / 안풀리는 수수께끼이다가 / 세월인가 네월에게 할퀸
상처이다가 / 정작 가까이 가면 딴전을 부리는 너덜겅 / 석기시대의 생수를 흘려낸다."('너덜겅')고 하여 "무등산의 참모습" 중의 한 가지를
"방구데미"에서 흘려내는 끊임없는 사랑의 생산 행위에서 찾기도 한다. 따라서 그가 파악한 '광주정신'은 '뚝심', '슬기', 그리고 '지조'를
기저로 한 관용과 화해임을 알 수 있다.
그가 희구하고 있는 세계관은 조화의 세계다. 그는 많은 시편들에서 대립되는 관념의 변증법적 조화를 추구하고 있다. 즉, 화합과 갈등,
응달과 양달, 만남과 헤어짐, 사랑과 미움, 눈물과 웃음 등 무수한 대립 개념들이 그의 시 속에서는 탁월하게 융합된다. 이러한 조화의 세계가
창조되는 것은 이순을 넘긴 그가 갖고 있는 인생과 세계에 대한 관조적 태도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60년 스승인 김현승의 권유와 천거로 조선 대학교에 전임강사로 부임하여 '현대문학'과 '시론' 등을 강의하게 된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잠시 대학 강단에서 물러나 있다가, 1966년 3월 국어국문학과 조교수로 복직하여 후에 사범대학 학장 등을 역임했고,
국어교육과 교수로 '현대시론'을 강의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