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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기(진동리 전투)
한편 진동지구에 투입이 된 미 제25사단과 그 배속부대들은 8월 7일부터 진주를 탈환하기 위한 개전 이래 최초의 반격작전을 개시했는대, 마산지구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감행했던 그 반격 작전 기간중 8월 1일 새벽고사리 지구에서 북괴군 6사단의 기동정찰부대를 요격하여 거둔 혁혁한 전공으로 8월 6일 부로 전장병 1계급 특진의 영예를 누린 김성은부대 장병들은 야반과 수리봉 (557) 서북산(739) 등 진동리 서북방에 있는 중요한 고지를 사력을 다해 공격 점령했고, 8월 12일 에는 중암리(-함안군 군북면)로 기동하여 패퇴한 적이 집결해 있는 오봉산과 필봉을 북에서 남으로 공격하여 일부 목표를 점령하는 등 부여된 공격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 함으로써 해병대의 감투정신을 빛내었다. 그런데 12일까지 계속된 미육군 킨 특수부대의 반격작전에도 불구하고 장사동에서 한국군 제3사단이 적에게 포위를 당하고, 북괴군 4사단은 낙동강 돌출부의 박진에서, 북괴군 3사단은 대구 서북방에서 낙동강을 건너오는 등 낙동강전선에 절박한 위기가 조성되었다. 미8군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8월 13일을 기해 방어작전으로 전환이 되고 말았는데, 그와 같은 조처는 미8군의 기동예비대로 확보하고 있던 미해병 제5연대를 영산지구에 투입하고, 배속된 한국해병대를 포함한 한국군부대를 다른 지역으로 이동시키는 등 병력의 전용을 단행하기 위함이었다.
한국전쟁기(통영지구전투)
그리하여 이 작전계획을 끈질기게 요청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작명의 변경을 승인받게 된 김성은 부대장은 P.C-703호와 소해정 504,901,320,307호 등 해군함정의 지원하에 적으로 하여금 시가지 남쪽 해안으로 상륙하는 것처럼 가장하기 위해 그 일대에 포화를 집중시키는 가운데 기습적인 상륙전을 감행, 계획대로 그 이튼날 새벽 1개 중대를 원문고개로 진출시키는 한편 망일봉을 선제 점령하여 한발 뒤늣게 그 봉우리로 올라오는 100여명의 적을 요격하여 승기를 잡게 되었고, 그날 오후 해군통제부로부터 탄약과 1개 중대의 증원병력을 지원받고, 그 다음날 (19일) 미명을 기해 총공격을 감행한 끝에 그날 오전 10시경 드디어 적 수중에 들어가 있던 그 통영시가지를 완전 탈환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단독 상륙작전이었다.
"당신들은 정말 귀신도 잡을 만큼 놀라운 일을 해내었소." 이 말은 전광석화와도 같은 그 작전의 묘수에 경탄을 금치 못한 외신 기자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외신 기자들은 이 작전의 성공을 보도하는 기사에 "귀신잡는 해병대"라는 찬사를 썼다. 무적해병대의 이름을 온세계에 널리 전파한 "통영상륙작전" 한편 통영시가지를 탈환한 김성은 부대는 9월 10일경까지 적 후속 부대와 원문고개 공방전을 치르는 동안 일부 병력은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부산항으로 떠나고 본대는 해군방위부대에 진지를 인계하고 9월 22일 김성은 부대장의 지휘하에 수도탈환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인천으로 출항했다.
한국전쟁기(인천상륙작전)
한국전쟁기(서울탈환작전) '수도 서울 탈환작전 비화' 인천상륙작전 1주일째인 9월 21일 오후 맥아더는 안양 서쪽에서 작전 중인 미해병1사단을 방문, 사단장 스미스 소장의 노고를 치하한 다음, 가죽점퍼 속에서 은성훈장을 꺼내어 그의 가슴에 달아주면서 "빠른 시일 안에 서울에서 만나자"는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남기고는 일본 하네다 공항으로 날아갔다. 맥아더는 숙소인 주일 미대사관에서 오랜만에 부인과 1박하는 동안 부산으로 전화를 걸어 이승만 대통령에게 "가까운 장래에 각하를 서울로 모시도록 서둘러 준비하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하여 기쁨을 안겨 주었다. 9월 22일, 미8군은 총반격을 개시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고 파죽지세로 북상하기 시작했는데, 25일까지는 상륙군인 미10군단과 서울
남쪽 오산에서 합류할 계획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철상(slash)'과 망치(hammer)작전'으로서 한반도의 적을 인천 상륙작전으로 양단
격파함으로써 북진하는 유엔군이 이를 포위·섬멸한다는 것이다. 한편, 미해병대 제1연대는 영등포로부터 한강을 건너 서울 서남으로 진입하고,
미해병대 제15연대와 한국해병대 1대대는 일산,수색 쪽으로 접근하며 인천에 대기중인 미해병대 제7연대는 북한산 경유 미아리 쪽에서 남으로
압박함으로써 서울을 9월 25일까지 점령할 계획을 했다. 그러나 서측으로 접근한 미해병대는 당인리, 와우산, 인왕산을 연하는 험준한 고지일대에서
적의 완강한 저항을 받아 공격이 돈좌됨으로써 23일까지도 서울 서대문을 돌파하지 못한 채 고전하고 있었다. 익일 9시를 기해 미해병대 제1사단장이 서울 중심가 진격명령을 내리자, 작전구역별로 시가전이 개시되었다. 그러나 배속된 한국해병대
제2대대는 새벽부터 벌써 행동을 개시하였다. 서울 탈환은 누구보다도 한국군이 선두에서 성취해야한다는 열망을 미해병대 지휘관이 묵인해 준 것이다.
미해병대 복장을 한 한국해병대 장병이 서울역으로 진격하는 동안 공산치하에서 3개월간 신음하던 시민은 태극기를 흔들면서 환호하였다. 서울역 청사
안에는 북한군 일부가 남아 완강히 저항 하였으나, 해병대원이 화염방사기로 전원을 소사시켰다. 이날 오후 동경에서 맥아더 원수는 '서울이 다시
유엔군 수중에 들어왔다'는 성급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서울시내는 아직도 시가전이 산발적으로 전개되고 있어 완전탈환은 못한 상태였다.
"내 머리속에 떠오르는 것은 상금이 아니라, 태극기를 꽂을 사람은 결국 나밖에 없다는 집념이었다." 박소위는 곧바로 대대장에게 자기의 뜻을 전하고 중앙청 돌진허가를 상신하였다. 대대장은 신현준 연대장의 승인을 얻은 다음에 박소위를
격려하였다. 박소위는 9월 27일 새벽 3시경, 호텔 보이를 시켜 구해놓은 대형 태극기를 몸에 감고 소대를 진두지휘, 중앙정으로 접근하였다.
세종로 일대에는 군데군데 북한군이 구축해 놓은 사낭진지로부터 간헐적으로 총탄이 날아왔다. 그는 수류탄 공격으로 수개의 진지를 격파하고 2시간
만에 연기가 자욱한 중앙청에 도착하였다. 우선 청내의 잔적을 소탕, 제압한 다음, 2개 분대를 중앙 돔입구에 배치하고, 1개 분대를 근접호위케
하여 2m길이의 깃봉을 든 최국방 견습수병과 양병수 2등병조르 대동하고 돔 계단으로 올라갔다.
'好戰必亡 忘戰必危'(전쟁을 좋아하면 반드시 망하고,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로워진다)
한국전쟁기(도솔산지구작전 1951.6.4~19) 1) 제1대대는 6월 4일 오전 8시 이전에 680고지, 910고지 부근에서 목표1을 점령할 준비를 하고 이어서 목표2를 점령할 준비를
갖추라.
당시 우리 해병대 중간보급소는 광사동 부근에 있었고, 연대본부는 원동지곡, 그리고 의무대는 죽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6월 4일 새벽 총공격에 앞서 연대장 김대식대령은 [어떠한 난관이라도 능히 극복할 수 있는 자만이 최후의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훈시를 내렸다. 우리 해병대는 1951년 6월 4일 오전 8시에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고 일진일퇴하는 가운데 6월 12일에 이르러 Kansas Line 안의 16개 고지 전부를 점령하였다. Kansas Line 이남의 전략적인 요지를 상실한 적은 완전히 사기를 잃게 되어 나머지 17부터 24까지의 8개 고지는 비교적 용이하게 점령할 수 있었다. 당시 우리 해병대 정면에 포진되었던 적은 인민군 12 및 32사단이었으며 우리 해병대가 점령한 14목표와 그앞에 있는 17목표 사이의 대암산봉 능선일대에 집결되어 있었다. Kansas Line내의 1목표에서 16목표까지를 점령한 우리 해병대는 이어서 Badger Line의 17에서 24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제2단계 작전을 6월 13일부터 개시하게 되었다. 제1대대는 11고지를 근거지로 삼고, 제2대대는 9 및 10고지의 진지를 강화하면서, 제3대대는 13고지에서 도솔산에 이르는 능선을 따라가각 정찰을 실시하는 가운데 제2대대가 6월 15일 오전 8시에 공격 을 개시하여 17, 18 및 19고지를 점령하게 되어 있었다. 이같은 작전계획은 이후 제3대대가 목표 20, 21 및 22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공격할 때, 측면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같은 계획 밑에 제2대대는 17일 8시 31분에 임무를 완수하고 제3대대가 공격할때, 능률적으로 지원 하였다. 적은 고지 후면 암석에 잠복하여 저항해 왔기 때문에 육박전을 감행한 끝에 6월 17일 12시 30 분 20고지를 점령하고 다음 날에는 21고지, 그리고 19일에는 22고지를 차례로 탈환하여 드디어 도솔산을 완전히 점령 하였다. 이어서 제1대대는 11고지와 14고지로 이동하여 23 및 24고지를 점령할 준비를 갖추고, 19일 7시에 22고지부근까지 전진하여 8시부터 공격을 개시하여 9시 30분에 23고지를 점령하였다. 한편 미해병대 제7연대는 우리 해병대의 좌측에서 24고지를 공격하여 이를 점령하였고, 6월 20일 제3대대가 24고지를 인수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솔산 일대의 산악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우리 해병대의 찬란한 공훈에 대하여 당시의 국회의장(신익희)은 감사문을 신현준 사령관에게 보내왔고, 또한 미국 대통령은 참모장 김성은 대령과 제1연대장 김대식 대령에게 미국 은성훈장을 수여하였다. 도솔산 24개고지를 점령한 우리 해병대는 이 고지들을 위협하는 적 3개 대대 병력이 배치되어 있는 대우산을 7월 8일부터 2일간 걸쳐 공격하여 다대한 전과를 올린 다음, 7월11일부터 17일까지 방어전에 임하였다. 이와같이 6월 4일부터 7월17일까지 40여일동안 대규모의 산악전을 수행한 우리 해병대는 전선을 미육군 제2사단 제38연대에 인계하고 홍천지방으로 이동하여 차기작전을 수행할 준비에 임하였다.
한국전쟁기(김일성 고지전투) 도솔산 고지전을 수행 후 홍천지방의 철정리에서 부대를 재편성한 제1연대는 8월 27일에 다시 새로운 임무를 띠고 출동하게 되었다. 우리
해병 제1연대가 출동한 지역은 중동부전선에서 가장 험준한 산악지대인 펀치볼일대의 고지였다. 제 1연대는 8월 28일 평촌에 집결한 후 거기에서
Kansas Line의 방어를 위하여 전선으로 이동하여29일 Kansas Line에서 미해병대와 임무를 교대하고 즉시 공격태세를 갖추었다.
1951년 6월 10일 개성에서 열린 정전회담 이후 피아가 서로 소규모의 정찰행동을 반복하고 있었으나, 이번에 우리 해병대가 맡은 임무는 적의
주저항선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우리 해병대가 공격할 목표는 도솔산을 출발점을 삼고 만대리 분지를 둘러싼 지단의 능선일대에 있는 주봉들인데, 이
일대를 우리가 확보하게 되면 금강산을 가까이 바라보면서 북한땅 깊숙히 들어가게 되는 것이었다. 이 지점의 924고지와 1026고지를 점령하는
일이야말로 앞으로 중동부전선의 전세를 전반적으로 유리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큰 것이었다. 924고지와 1026고지에는 인민군의
최강부대인 제3군단 제1사단 제3연대가 배치되어 있었는데, 그 예하 제1대대(약 500명)가 924고지에, 제2대대(약500명)가 1026고지에
각각 포진하고 제3대대가 예비대로서 그 후방에 대기하고 있었다. 적은 소련제 중화기로 장비되어 있었으며, 각 대대는 82미 박격포 8문과
중기관총 6문을 장비하고 있어 화력면에서 우리 해병대보다 훨씬 우세한 상태였다. 또한 적은 휴전회담중의 소강 상태를 이용하여 방어진지를 견고하게
구축하였고, 진지전면에 막대한 수의 대인지뢰를 매설해 놓았다. 그러면서 도솔산에서 패배한 치욕을 여기에서 만회한다고 호언하면서 924고지를
'김일성고지' 그리고 1026고지를 '모택동고지'라고 명명하고 있었다.924고지를 공격할 부대는 제2대대였는데, 8월 31일 공격 대기지점인
월산령에 집결하여 공격을 감행하여 고지전방 100야드지점까지 이르렀으나, 날씨가 불순하여 관측착오로 말미암아 아군지원 사격포탄이 공격부대 주변에
낙하하고 또한 적의 지뢰에 의한 부상자가 속출함으로 부득이 공격을 중지하고 일단 철수하였다. 이날 연대장 김대식 대령은 제3대대의 최전방중대인
제11중대를 시찰 격려하고 돌아가다 지뢰를 밟아 부상당하자 부연대장인 김동하 중령이 임무를 대행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목표를 점령한 우리 해병대는 924고지, 1026고지및 1056고지 등 일대에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방어태세로 전환하였다. 이 작전의 성공적인 수행으로 우리 해병대의 이름이 또다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혹한과 싸우면서 방어임무를 수행하던 우리 해병대는 1952년 3월 17일 수도서울의 방어를 위하여 서부전선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한국전쟁기(양도작전) 양도는 3개의 작은 섬인 길주양도, 명천양도및 강후의도로 되어 있는데, 강후의도는 암석으로 된 무인도였다. 양도의 대안은 함경북도 명천군 상가면으로서, 양도와의 거리는 4,000야드에 불과하였다. 이 양도대안에는 약 1개중대의 인민군이 배치되어 있었으나, 그후 인민군 총사령부 직속의 독립 63보병연대가 배치되었다. 1952년 2월 20일 우리 해병대는 대안의 적으로부터 105미리 직사포 3문과 120미리 박격포 3문의 맹렬한 포격을 받았다. 그리고 이날 오전 1시 40분에는 길주양도에 적이 접근하여 아군의 보초를 사살한 후에 상륙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명주양도 전면에도 적의 발동선 2척이 접근해 왔다. 날씨는 몹시 흐려서 가까운 거리도 분별하기 곤란한 가운데서도 아군은 세심하게 적의 그림자를 찾아 포화를 퍼부어 적발동선 2척을 격침시켰으나, 적의 주력은 끝내 길주양도 70고지와 명천양도 47고지에 기어 올라 만세를 부르며 아군의 사기를 제압하려 하였다. 당시 아군이 생포한 적대장의 진술에 의하면 대안의 적은 연대지휘소를 청진에 두고 양도 2개 도서를 기습할 목적으로 전투경험이 많은 장병을 선발하여 1개대대를 편성후 함경북도 부령군에서 1개월간 상륙작전훈련을 실시하고 나서 다시 나진해안에서 모의연습을 마쳤다는 것이다. 적은 약 200명의 병력으로 기습을 감행하여 길주양도 70고지와 명주양도 47고지를 일단 점령하였다. 그러나 해병 독립 43중대는 열세한 전투력임에도 매복과 기습으로 상륙한 적주력을 하루만에 유인 격멸하고 일부 범선을 타고 도주하는 적을 해상에서 격침 소탕 하였다. 이 작전의 승리에 대하여 미 태평앙함대 사령관으로부터의 극진한 찬사가 있었고, 중대장 최청송 중위와 이영덕 병조장, 정진영 2조는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미국 은성훈장을 받았으며, 중대선임장교 황병호 소위는 미동성훈장을 받았다. 또한 우리 정부에서도 중대장에게 을지훈장을 수여하였고, 그 밖에도 10명에 대하여 충무훈장과 30명에 대하여 화랑훈장을 각각 수여하였다. (-을지훈장:최청송 중위, 이영덕 상사, 정진영 하사 -은성훈장:최청송 중위, 정진영 하사 -동성훈장:황병오 소위) 이 독립43중대는 그 후 철통같은 양도경비에 임하던 중, 1952년 10월 5일 양도부대로 재편되었다. 그리고 휴전후 동해부대 철수계획에 따라 1953년 7월 27일 철수를 개시하였고, 동년 8월 4일 진해에 도착하여 제2연대에 편입되었다.
한국전쟁기(장단지구전투)
그러나 10월 31일 밤에 감행된 중공군의 제2차 추기공세를 맞아 연대전투단은 패배를 설욕하고도 남음이 있는 빛나는 전공을 세웠다. 이때의
전투단장은 진동리지구 전투와 통영상륙작전 그리고 영월지구 전투를 지휘했던 지략이 뛰어나고 무운이 좋기로 소문난 김성은 대령이었다. 10월
16일부로 전투단장으로 취임했던 그는 제1차 공세 때의 패인을 면밀히 분석하는 한편, 추석 전야에 한번 재미를 본 중공군은 수중에 넣은 그
전초진지들을 기반으로 하여 다음 만월야에도 반드시 공세를 취하여 주저항선을 유린할지 모른다는 예상 하에 진지강화 작업을 서둘렀다. 그리고
전차부대를 전진 배치하고 우일선인 미해병 사단과 협조하여 적의 예상 접근로를 철저히 강타하기 위한 탄막 사격을 빈틈없이 계획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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