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에 사천에 와서 지은 집은 하늘색 드라이비트집이었습니다. 작은도서관을 2층에 올리면서 하얀집이 되어버렸습니다. 1998년에 사천에 이사와서 2000년도 2월에 당선작 발표가 있었습니다
전원생활 수기 당선작
당선 소감 - 전원생활 만끽하며 갖는 꿈 하나
처음 시골에 터잡고 첫 출근하던 날을 잊지 못합니다. 시내버스가 아닌 완행버스에 올라타 자리를 잡고 앉았더니 어제와 너무도 다른 풍경 때문에 움찔 놀랐습니다. 이제껏 매캐한 도시의 한가운데서 보아온 풍경과는 확연히 다른 산, 들판, 하늘이 가득 펼쳐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 생경스러웠던 풍경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가슴 확 트이는 통쾌함을 느꼈습니다. 그 통쾌함을 은밀히 즐기느라 미소가 입가에 절로 배었습니다.
그렇게 전원생활은 시작되었습니다. 요즘은, ‘아, 너무 좋다. 행복하다’라는 말이 입에서 절로 튀어나옵니다. 그 말은 어제도 했고, 그저께도 했습니다. 이렇게 전원생활을 몸과 마음으로 만끽하고 있습니다. 가슴이 벙벙하도록 아름다운 하늘과 우리의 마당을 감상할 수 있는 이곳이 참 좋습니다. 조촐한 우리 마당에서, 참 아름다운 나로 빚어 가는 과정이 나의 생이기를 꿈꿉니다.
촌과 하나 됨을 꿈꾸며
우리 부부는 마침내 의기투합해 촌으로 삶의 터전을 옳겼습니다. 우리는 이제 도시로 다시 나가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요즘 들어 더러 받는 인사가 ‘촌에 가서 살더니만 한결 얼굴이 맑아졌다’는 것입니다. 빈말인 줄은 알면서도 겸손해하지도 않고 그저 흐뭇해하며 넙죽넙죽 인사를 잘도 받아 챙깁니다. 촌스럽지만 언제까지고 어여쁜 한 여자로서의 자연이고 싶습니다.
연한 하늘색 드라이비트 집에서 인사 올립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으로 집을 짓는다는 것이 엄청 힘든 일이더군요. 이제 드디어, 정말 드디어 저희 집이 거의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모든 마을 분들과 허심탄회하고 화기애애하게 잘 지냈으면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저희들이 먼저 잘해야 될 줄 압니다. 흑 저희들이 본의 아니게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꾸짖어서 이끌어 주시면 달게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저희 식구는 셋입니다. 남편은 사천소방서에 다니구요, 아들 녀석은 경남예술고 1학년입니다. 그리고 저는 진주시 여성회관 강사입니다.
이제는 촌을 사랑하고 흙을 사랑해 보리라 마음먹고 이렇게 촌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아시다시피 흙과 함께 마음껏 한 번 살아보리라 마음먹고 마당 가득 흙을 들여다 놓았습니다. 흙들을 골고루 잘 펼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무쪼록 많은 조언을 고개 숙여 부탁드리겠습니다. 하늘색 집 새댁 올림
1998년 6월, 촌으로 이사를 온 날 이사 떡을 돌리는 쟁반 옆에다 위의 쪽지를 접어 살짝 놓았습니다. 쑥스러운 짓인 줄 알면서도 우리의 속내를 드러내고 마을 분들과 친숙하게 지내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그랬습니다. 제가 수박을 가지런히 담아내는 대로 남편 동료 분들과 아들 녀석이 한 집도 거르지 않고 차근차근 이웃에다 날랐습니다. “급한 일 있으면 언제든지 119로 연락 주십시오. 사남문화마을이라 하면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오겠습니다!” 씩씩한 우스개 인사와 함께 밝고 재미나게 동네 한 바퀴를 다 돌았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에는 집들이 겸 반상회를 한다고 초대장을 조촐하게 만들어 돌리기도 했습니다. 그날 집들이는 많이들 오셔서 맛있게 음식을 먹으며 분위기 좋게 치러져서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그날 이후로 마을 분들과 훨씬 더 가까워졌고 반갑게 인사를 건네기도 수월해졌습니다.
무엇보다도 촌에 살려면 이웃들과 허물없이 지내는 것을 우선으로 해서 새로 이사 온 이 동네에 살아갈수록 정이 새록새록 깊어지게 하자고 남편과 다짐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이웃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저희 집 주소는 경남 사천시 사남면 죽천리 43의 5 사남문화마을입니다. 사천시가 시로 승격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 전에는 사천읍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사천소방서에 근무한 지가 햇수로 9년이나 되었지만 촌이라는 이유로 이사를 오지 않고 우리는 여전히 진주시에다 터전을 잡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IMF 시대가 닥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에 진주시에서의 13층 32평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고, 이해타산을 따지자면 힘든 상황에서 집을 짓고 이사를 왔습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무조건 마당 있는 집을 소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빈터에 집 한 채가 버젓이 자리 잡기까지 그야말로 우리 식구는 몸과 마음의 온 노고를 다 바쳤습니다. 태어나 그렇게 일을 많이 해 본 적 없었을 겁니다.
조경회사에 맡기면 알아서 멋지게 잘해준다고들 했지만 우리들은 조경회사가 만든, 일률적인 세련된 정원보다 그저 우리를 닮은 촌스런 마당을 원했습니다. 집에다 우리의 애정을 쏟아부어 우리의 향기가 나야 살아갈수록 '정'이 드는 집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지칠 줄 모르고 끊임없이 일을 했습니다. 아침이면 신발에 흙을 가득 묻힌 채 떨어낼 시간도 없이 출근하는 날이 거의 대부분이었고, 퇴근해 돌아오자마자부터 밤새 모기한테 물어 뜯겨가면서 마당을 고르고 텃밭을 만들고 나무를 심고 잔디를 심었습니다. 일에 몰두하다보면 새벽 4시가 넘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 놈의 '정' 때문에 사서 고생을 합니다.
그런데 그 사서 하는 고생이 왜 그리 달콤하던지요. ‘고생 뒤에 낙’이라는 말은 진담이었습니다. 남편과 아들 녀석과 함께 밤 깊도록 일을 하고는 옷을 털면서 우리끼리 서로 대견해 하며 덕담을 주고받았습니다. “야, 너 힘 많이 쌔졌구나. 진짜 일 잘한다. 촌에 와서 일 많이 배우네.” “고맙다. 정말 애썼다. 너 없으면 해내지 못했을 거야. 이 세상에서 너 같은 아들은 아무 데도 없을 거야. 우리 아들, 장한 아들이야.” 남편이 한마디하고 제가 한마디 거들어 아들 녀석을 추켜세우면 녀석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빙긋이 웃습니다.
“엄마는 쉬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어떻게 계속 일만 할 수가 있어요?” “당신은 진짜 대단한 사람이야. 당신 없이 우리끼리는 어림도 없었을 거야.“ 녀석이 손을 먼저 씻고 와 엄마에게 물을 먹여주면서 한마디 하고 남편은 건강을 염려해주는 한편으로 진심어린 치사(致詞)를 해줍니다.
“힘쓰는 일은 당신이 다했잖아요. 당신이야말로 최고 힘들었어요.” “아버지는 어떻게 그렇게 일을 잘하십니까?. 언제 배우기라고 했습니까?” 녀석과 함께 저는 이구동성으로 남편이 든든하고 믿음직해서 저절로 한마디씩 건너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들은 셋이 다 일이 서툴면서도 셋이 함께 대단한 일꾼인 것처럼 되고 맙니다. 행복합니다. 무한정 행복합니다. 촌으로 와 함께 정성을 모아 일을 하면서 우리는 더욱 가족 간의 의리가 깊어지고 정도 깊어갑니다.
남편은 초등학교 다니기 전 아주 어렸을 적에 촌에 잠시 살아보았고 저는 한 번도 촌에 살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촌에 대해 무지했는데도 우리는 막연히 늘 촌을 동경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고향을 떠난 지가 오래되어 그 곳에는 반갑게 맞으며 등이라도 치고지고 할 사이가 전혀 없는데도 시제나 성묘 등 기회만 닿으면 언제나 고향에 가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고향에서 보는 그는 마흔이 넘은 어른이 아닙니다. 산등성이를 마음껏 누비고, 시냇가에서 물장구치는 모습이 영락없는 개구쟁이 같은 느낌을 갖게 합니다. 남들은 그저 진급, 출세, 성공을 되뇌어도 남편의 심성은 촌하고 궁합이 맞는 듯 했습니다.
진주에서 남편은 아파트에 살면서부터 마음 맞는 동료들과 함께 자연 속으로 떠나는 날이 많았습니다. 섬진강변에서, 지리산 계곡에서, 바다로 둘러싸인 어느 섬에서 편히 주저앉아 술잔 기울이며 인생과 청춘을, 역사를, 그리고 말단 공무원으로서의 비애를 이야기했습니다. 또 소방인으로서의 자존심과 인간의 됨됨이를 이야기하고, 그러다가 자연을, 그리고 그 계절에 어울리는 노래를 읊조렸습니다.
달빛과 별빛이라는 자연 조명 아래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호탕하게 웃다 보면 시간 개념이 없어지나 봅니다. 자연을 마시는지, 대화를 마시는지, 술을 마시는지, 우정을 마시는지, 퇴근 후 곧바로 사라졌던 사람이 새벽녘이 되어야 아파트의 초인종을 누릅니다. 그 시간, 아파트의 ‘딩동’소리는 왜 그리 컸던지요.
현관문을 열면 만면에 웃음을 함박 머금은 행복에 겨운 얼굴 하나가 나타납니다. 그 행복해 하는 표정 앞에 건강을 들먹이는 잔소리나 살림형편을 들먹이는 바가지는 어불성설이라는 것을 곧바로 알게 됩니다.
“미안하네, 그래도 웃으면서 환영해주면 들어갈 거고, 안 그러면 안 들어갈 거다.” 술을 마시고는 동심으로 돌아가버린 양 아이처럼 억지를 부리고 서 있는 모습이 하도 우스워 두 팔 벌려 환영을 안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사실 저도 남편이 없는 시간에 저 나름대로 행복해하며 보냈기 때문에 별로 바가지 긁고 싶은 생각이 없기도 합니다. 남편이 자연이 못내 그리워서 자연과 더불어 지낼 때 (남편은 사방이 벽으로 막혀 있는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것은 술맛도 나지 않을뿐더러 그런 사람을 이해할 수도 없다고 할 정도입니다.) 저는 책 속에서 자연을 접하고 촌사람을 만나고 촌 아낙의 삶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많은 책들을 읽지만 언제나 저를 감동시키고 끌어당기는 책들은 촌과 관련된 책들입니다. 저는 특히 박경리의 ‘토지’ 열여섯 권과 조정래의 ‘태백산맥’ 열권의 소설 속에서 많은 촌사람들을 만났고, 촌 생활의 진미를 맛보았습니다.
촌 아낙의 밭을 일구는 장면이나 살림을 하는 장면이 등장하면 천천히 곱씹으면서 상상으로 그림을 그려보려고 애를 써봅니다. 왜 그리 그 생활을 따라 하고 싶은 마음이 진하게 와 닿던지요. 그러면서 촌 동네와 촌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키웠습니다. 촌에서 사람답게, 삶다운 삶을 살아보고픈 염원이 남편 이상으로 간절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 부부는 의기투합해서 촌으로 삶의 터전을 옳기는 일을 추진한 것입니다. 주위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더 큰 도시로 못나가서 안달인데 어찌해서 촌으로 가 살기로 작정할 수 있는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해 했습니다.
우리는 촌으로의 이사를 꿈꾸며 서서히 준비를 했습니다. 조만간 촌으로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예감으로 97년도 말부터 인터넷을 하게 되었습니다. 촌에 살지만 세상 돌아가는 정보에는 눈이 어둡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 인터넷 정보 검색을 통해 전원주택 짓기에 관한 정보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림 같은 특별나 보이는 전원주택을 원하지 않고(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이유도 있겠지만)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우리의 성향에 맞는 소박한 농가주택을 짓고 싶었습니다. 그 집에서 몸도 마음도 편안한 삶을 염두에 두고 짓기로 마음을 모았습니다.
그 중에 우리가 선택한 것은 심야전력으로 난방과 온수를 하는 것과 주택 외장재로 방음, 방수, 단열 등이 유리한 드라이비트를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선택을 아직까지는 후회하지 않고 너무나 흡족하면서 쾌적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사계절 모두 샤워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이불만 깔아두면 그 곳은 따끈따끈한 아랫목이 되어 언제든 일하다 들어와 허리를 펴고 드러누울 수 있어서 좋습니다. 손님들도 따끈따끈한 아랫목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참 많이 부러워합니다.
한편 여름에 시원한 이유는 집 둘레에 시멘트로 베란다를 만들지 않아 반사열이 없기 때문입니다. 집 바깥의 아스팔트 길에서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기만 하면 다른 집보다 한결 시원함을 느낍니다.
우리는 집 둘레에 잔디를 최소한으로 깔고 그 외에는 모두 텃밭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땅에서 마음껏 놀고 싶어 촌으로 왔기 때문에 땅을 전시용으로가 아니라 실용적으로 활용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느긋하게 전원생활을 향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몸으로 땅과 부대끼며 촌 생활에 맛을 들이고 싶었습니다. 100평가량의 마당의 곳곳에 나무를 심고 채소를 가꿉니다. 그것도 농사냐고 한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정말 열심히 배워가면서 텃밭을 일굽니다.
우리 마당 식구들을 기억나는 대로 소개하자면 앵두, 석류, 무화과, 대추, 감, 매실, 배, 아기사과, 자두, 유자, 머루, 포도, 참다래, 복숭아, 산수유, 치자, 모과, 구기자, 두릅, 가죽, 백일홍, 영산홍, 동백, 분꽃, 국화, 소나무, 단풍, 장미, 고추, 배추, 무, 시금치, 상추, 케일, 쑥갓, 옥수수, 토마토, 오이, 가지, 감자, 토란, 생강, 완두콩, 땅콩, 마늘 등등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습니다. 이름 모를 들꽃이며 잡초도 여러 종류 살고 있습니다.
아파트에 살 때 화분에 가둬두었던 나무들을 마당에 옮겨 심어 제멋대로 자라도록 해주고 나니 고 녀석들이 살맛났다고 하는 것 같아 제 속이 다 후련해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예쁘장하게 단장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자유롭게 살고 싶듯이 저희들도 그러고 싶을 거라는 짐작에 제 나름대로 활개를 펴고 어울리도록 내버려둡니다.
그러다 보니 한 여름 우리 집 마당에 녹음이 한창일 때, 이웃들이 들여다보고 그랬습니다. 다른 집 마당은 너무 깔끔해서 시시한데 우리 집 마당은 뭔가 복잡하고 생동감이 있어 보인다고, 그러면서 구경거리가 제법 쏠쏠하다고도 했습니다. 깔끔하게 정리정돈하지 않고 흐트러지게 산다는 핀잔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시도 때도 없이 마당에 나가 살다보니 우리 집 현관이나 거실은 늘 흙으로 지저분합니다. 처음 이사 와서는 부지런히 쓸고 닦고 했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습니다. 그 흙도 한 식구이거니 생각하면서 함께 뒹굴고 삽니다.
남편은 출근하기 전 마당에서 서성대다 아쉬운 이별을 하고, 퇴근해서는 곧바로 들어오지 않고 꼭 마당식구들을 한참 챙겨보고 들어옵니다. 또한 시도 때도 없이 마당에서 마당식구들을 바라보며 바람 속에서, 햇살 아래서, 노을을 바라보면서 밥을 먹자고 합니다. 된장찌개에 김치만 달랑 있어도 좋으니 마당에서 먹자하고, 수제비도 마당에서 끊여먹자 하고, 안주 별것 아니어도 좋으니 마당에서 달 보고 별 보면서 한잔하자 그러고…. 이렇게 그저 마당, 마당타령입니다.
자기가 땀흘린 흔적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것을 보면 신통한가 봅니다. 작년에 처음 이사를 와서 흙을 들여놓자마자 이웃에서 나눠준 씨앗과 시장에서 사기도 한 씨앗을 시기도 모르고 방법도 모르면서 우리 마음 가는 대로 텃밭에다 뿌렸습니다. 순 엉터리라면서 농법의 기본도 안 되어 있는 우리에게 이웃들이 들어와서 한 수씩 가르쳐주고 갑니다. 열심히 배웠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땀 흘렸습니다. 닭똥과 액비를 준 뒤 마당을 갈아엎어 고랑을 만들고, 씨앗을 뿌렸습니다.
싹이 돋는 날은 감탄사를 연발하고, 열매가 맺은 날은 더 큰 감탄사를 내지르며 대견해하고, 벌레들은 잡아주고, 병든 잎은 부지런히 따주고, 수확한 날은 맛있게 먹고, 그렇게 처음으로 맞이한 한 여름을 보냈습니다.
98년도 여름의 일기를 옮겨봅니다.
1998. 08. 10 요즘 우리는 한창 수확의 재미에 빠져 있다. 힘들었던 봄이 지나고 나니 여름 내내 맛있는 푸성귀가 지천이다. 토마토, 방울토마토, 가지, 호박, 고추, 상추, 쑥갓, 깻잎, 대파, 고구마줄기, 열무, 케일, 오이, 참외…. 언제 손님이 찾아와도 걱정이 없다. 우리 텃밭이 다 해결해 줄 테니까. 갖가지 쌈과 나물과 겉절이로 밥 한 그릇은 맛나게들 뚝딱 해치운다.
분꽃, 나팔꽃, 봉선화, 채송화, 호박꽃, 땅콩꽃, 쑥갓꽃, 오이꽃, 가지꽃…. 아, 나는 순하디 순해 보이는, 아주 연한 분홍빛 봉선화가 왜 그리 이쁜지, 봉선화 꽃잎의 감촉은 어찌 그리 보드라운지, 보드라운 꽃잎들이 한 잎 두 잎 지는 것이 마음 아파 주워 모아 바구니에 담아 현관 거울 앞에 두었다.
1998. 08. 11 남편은 언제 어디서나 마당이 그립단다. 언제까지 이 애정이 갈는지. 나이가 이만큼 들어서 이만한 마당을 가지게 된 것이 한편 생각하면 다행이다 싶다. 이 보다 젊어서 마당을 갖게 되었다면 마음의 여유도, 시간적 여유도 없이 동동거리고 사느라 이만큼 관심과 애정을 가지진 못했을 것이다.
토마토를 다섯 개 따서 주스를 만들었더니 부자간 서로 많이 마시고 싶어 은근히 경쟁이다. 그 모습이 행복, 그 자체로 보인다. 저녁에는 마당에서 닭을 삶아 찢어서 소금에 담백하게 찍어 먹었다. 삶은 국물에는 찹쌀을 넣어 닭죽을 끊여 배부르게 먹었다. 마당식구를 바라보며 바람이 설렁설렁 부는 속에서 밥을 먹는 맛이 일품이다. 이렇게 마냥 행복해도 괜찮을까.
1998. 08. 12 오전 내내 비가 흠씬 내렸다. 촌에 오고 나서 비가 오면 괜히 더 기분이 좋아진다. 우리 마당의 식구들이 단비를 맛나게 실컷 마실 것 같아서이다. 비만 좋은 게 아니다. 햇빛도 좋다. 마찬가지로 우리 마당 식구들이 햇빛을 흠씬 들이킬 것 같아서이다. 촌에 오니 안 좋은 게 하나도 없다.
남편은 비를 맞아가면서 부추를 옮겨 심었다. 비오는 날 뭔가를 심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뿌리가 잘 내릴 것 같고 생명에 지장이 없을 것 같아서이다. 촌이 내 적성에 자꾸만 맞아가는 것 같다. 너무 촌을, 자연을 좋아하다 자꾸만 인간이 싫어지면 어떡하지. 자연을 보고 즐길 것만이 아니라 자연의 섭리나 순리를 보고 깨달아 본받을 일이다.
우리는 그렇게 작년 한 여름을 마당에 취해서 보내다가 가을을 맞이하고 겨울을 맞이했습니다. 그 많은 식구들이 하나둘 스러지고 마당이 텅 비어 가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지긋한 슬픔이었습니다.
빈 마당이 쓸쓸해서 이 일을 어쩌나 싶었지만, 막상 겨울이 되니 여름처럼 풍요롭지는 않아도 흙빛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광경이 그런 대로 괜찮습니다. 채워졌으면 비워지기도 하는구나 하며 자연의 섭리를 받아들이니 마음이 차분해졌습니다.
남편은 빈 마당에 나가서 한 겨울 내내 서성댔습니다. 봄은 언제 오려나, 언제 오려나 하면서 자기 생애에 이렇게 애타게 봄을 기다렸던 적은 없다고 중얼거렸습니다.
저 추운 마당에서 인고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저들과 함께 하면서, 이 한겨울을 함께 견뎌내 보자고 마음으로 격려하고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남편의 뒷모습에서 따뜻함이 묻어 나왔습니다. 봄이 저만큼에서 꿈틀대고 있을 때 남편도 덩달아 싱숭생숭 설레는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남편은 나무의 새 눈 하나하나를 헤아리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북풍한설을 견디고 돋아난 눈을 발견할 때마다 아주 흐뭇해하면서 저를 소리쳐 불렀습니다. 남편이 감탄해 부를 때는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가 주어야 도리일 것 같은 느낌이 저절로 듭니다. 가서 보면 그 작은 눈을 어떻게 발견했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눈은 생명력이 터질 듯 충만해 보입니다. 그래서 남편의 감탄사가 절로 터지나 봅니다.
이사 와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봄이 완연해지자 우리들은 바빠졌습니다. 부지런히 작년의 경험을 거울삼아 텃밭식구들을 챙기기 시작했습니다. 이젠 제법 기본 농법을 익혔다고 서로 주장하는 바가 틀려 티격태격하기도 하면서 텃밭을 일구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봄에 땀을 흘린 만큼 우리의 마당식구들은 어김없이 신통하게 그 보답을 우리에게 해왔습니다. 작년보다 훨씬 풍요로운 여름은 그렇게 우리들 곁에 또다시 다가왔습니다.
1주년을 맞이한 1999년도 여름 일기를 옮겨봅니다. 1999. 07. 01 칠팔월에는 우리 마당이 무성해질 대로 무성해질 것이라는 것을 미리 지난 여름을 겪어봐서 안다. 우리 마당의 전성기가 될 것이다. 그 전성기에 나도 동참할 것이다. 동참이란 바로 실컷 맛나게 먹어주는 것이다. 촌으로 이사를 와 내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아 맛있다. 아, 맛있다’이다. 우리 마당에서 우리가 농사 지은 것을 먹을 때마다 저절로 터져 나오는 감탄사이다. 찰옥수수로 쪄서 먹고, 풋고추를 끼니때마다 된장에 찍어먹고, 갓 딴 오이로 냉채도 해먹고 참기름 넣어 무쳐도 먹고, 깻잎전도 부쳐먹고, 호박으로 짜장도 만들고 카레도 만들어 동네아이들 불러다 먹인다. 아, 그리고 맛있는 토마토! 갓 딴 방울토마토는 바로 생명의 그 맛이다. 이 여름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실컷 자연이 준 고귀한 생명을 먹고 우리 또한 싱싱한 생명답게 살 것을 다짐해 본다.
1999. 07. 02 비가 온다. 마당의 나무들과 꽃잎, 푸성귀들이 후두록 비를 맞고 있다. 싫다지도 않고 그냥 그대로 맞고 있다. 처연하다. 비 소리 외에는 들리는 소리가 없다. 사람들은 어디로들 숨었는지 아무 곳에도 보이지 않는다. 고요하다. 비와 잎들만 있다. 저들만의 세상이다. 아, 그러고 보니 생물에게 있어 저 비는 엄마의 젖 같은 것이겠다. 젖이 상하면 아기가 클 수 없듯이, 저 비도 상하면 안 되겠다 싶다. 산성비라니,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촌으로 오니 내가 자연이고 자연이 나다. 날마다 우주에서 뜨락으로 교감이 내린다.
1999. 07. 03 오늘은 호박잎, 깻잎, 고추, 가지와 오이, 방아 잎, 대파 등 아무튼 수확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수확해 남편 직장 동료에게 주었다. 마당에서 나는 것들은 우리 먹기도 바쁘고 다른 이웃들과 나눠먹기도 바쁘다. 농사는 퇴비만 조금 쓰고 화학비료를 안 쓰니 수확량이 많을 리는 없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맛있는 것을 나눠 먹이고 싶어 안타까워진다. 특히 남편은 그저 남 챙겨주고 싶은 후한 마음이 크다. 누구누구와 나눠먹어야지, 생각하면 마당식구들이 더 사랑스럽다. 저들로 인하여 사랑을 전할 수 있고, 행복을 나눌 수 있으니까.
1999. 07. 10 조카며느리와 조카사위가 식구들을 거느리고 부산에서 휴가를 우리 집으로 왔다. 열세 명의 손님이다. 오리고기와 돼지삼겹살을 마당에서 구워먹었다. 농가주택을 별장 같다고 한다. 동네 냇가에서 잡은 물고기로 어탕을 끓이고 마당에서 갓 딴 상추와 파로 무침을 했더니 맛있다며 더 만들어 달라고 성화다. 맛있게들 먹어주니 신난다.
1999. 07. 12 이제는 제법 토마토가 주스를 해 먹을 정도로 열린다. 어떻게 내가 이것을 만들었을까. 사실은 해님, 비님, 바람, 땅님의 은혜인 줄 알면서도 아주 작은 노고만 바친 자신을 퍽 대견해 한다. 대견하긴 하다. 촌으로 이사를 와 이렇게 자연과 가까이 하기로 결정한 우리가. 우리는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고 마당 있는 집으로 이사를 온 결정에 대해 쾌재를 부르고 있다. 다시 아파트로 돌아가라면 절대 갈 수 없을 것 같다. 남편은 병에다가 토마토 주스를 넣어달라고 한다. 직장에 가서 마실 거라나, 어쩔 거라나, 남들은 보약을 폼잡고 먹기도 하는데 자기도 무공해 토마토 주스를 폼잡고 한번 마셔볼 거라나, 어쩔 거라나. 후후.
1999년은 전년에 비하면 우리의 텃밭농사가 대풍인 셈이었습니다. 고추도 따서 말려 고추장을 담그고, 참깨도 몇 번은 볶아 먹을 만큼 건졌습니다. 사실 참깨는 수확량은 그런 대로 괜찮았지만 추수하는 방법을 몰라 마당에다 다 흘리면서 추수하는 바람에 동네에 사는 온갖 새들한테 적선하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 그리고 그 맛있던 땅콩! 나눠먹은 이웃마다 이구동성으로 땅콩 더 없느냐며 맛이 기막히더라고 인사를 건네주었을 때의 그 으쓱함이라니! 어쩌다 소 뒷걸음을 치다가 쥐 잡는 꼴로 그렇게 되었겠지만 그런 인사를 받고 보니 자꾸만 조촐한 텃밭농사가 더 재미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제 도시로 다시 나가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퇴직 후에는 더 깊은 촌으로 들어가서 논농사와 밭농사를 함께 지으면서 노후를 보내고 싶은 것이 우리의 꿈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차근차근 농사일을 자연스럽게 배우고 익힐 것입니다. 퇴직 후 노후를 고대하면서 하루하루를 사니까 나이 든다는 것이 그다지 싫지만도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또 다시 봄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빈 마당이 허전할 것 같아 마늘을 두 줄 심어봤더니 그 뾰족한 싹들이 온 몸으로 마당을 지키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배추, 파, 상추, 시금치들이 텃밭에서 저와 친구를 해주고 있습니다. 배추 속살로 우적우적 쌈을 싸먹고, 들깨 · 시금치 넣어 토란국 끊여 먹고, 생고구마를 간식삼아 깎아 먹으면서 이 한겨울을 보내고 있자니 이 시린 겨울이 왜 이리 따뜻하고 풍요로운지요.
요즘 들어 더러 받는 인사가 ‘촌에 가서 살더니만 한결 얼굴빛이 맑아졌다’는 것입니다. 빈말인 줄은 알면서도 겸손해하지도 않고 그저 흐뭇해하며 넙죽넙죽 인사를 잘도 받아 챙깁니다.
촌스럽지만 언제까지고 어여쁜 한 여자로서의 자연이고 싶습니다.
글 황진옥(경남 사천시 사남면 죽천리 사남문화마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