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 문학인물의 연보] 변영만,영태, 영로 삼형제 및 목일신의 著書와 발표된 글을 중심으로 알아보았다. 특히 변명로 및 목일신은 우리 文學史的으로도 기념비적인 인물이기에 작품 중심으로 年譜를 실었다. 卞榮魯, 1889년 6월 23일 부천에서 출생. 1954년 12얼 19일 사망. 호는 穀(曲)명 自 民居士, 三淸, 山康齊 等을 사용. 著書로는 변명만 번역본인 [世界 三怪物] "斯密哥德 文" 著를 1908년 3월 5일 廣學書鋪에서 발행하였으나 1910년 11월 16일 韓日合邦後 조선총독부에 의해 治安法으로 販禁되어 오늘날 희귀본으로 남아 문헌으로나 볼 수 있 다. [二十世紀 大慘劇 帝國主義]를 1908. 9.20 廣學書鋪에서 발행하였으나 첫 번째 저서와 똑같은 전철을 밟아 총독부에 의해 1910.11.16 판금되어 [世界 三怪物]과 함께 희귀본으로 전한다. *출처:日政下의 금서 33권 1977.1 新東亞 별책부록 [山康齊文抄〕1957.11.1 경남 창원에 있는 용계서당에서 순한문 漢籍本으로 死後 3년만에 후학 金鍾河 편집으로 발행하였으나 순 한문본이기에 쉽게 읽을 수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변영만은 살아서 [世界三怪物]과 [二十世紀 大慘劇 帝國主義] 2권의 著書와 사후〔山康齊文抄〕를 발행했으나 2권은 조선총독부에 의해 판금되어 다시 발행치 못하고 1권은 순 한문본이기에 쉽게 접할 수 없어 후학들에 의해 시대에 맞게 번역 발행하는 날을 기대해 본다. 변영만을 잡지에 발표된 글을 年代順으로 나열하여 보면 [機湖與學會月報] 1980.8.25에는 "大呼敎育" 이라는 글을 변영만으로 발표. [開闢〕39號. 1923.9.1. 임시호에는 或問(壬子李冬)을 [開闢〕40호. 1924.10.1. 東章炳麟(癸丑李冬再入中國時)를 穀明으로 발표 [明]1호 1925.7."文學五講"을 문학연구의 취지, 문학의 본질, 고급문학이 상이점, 문학의 기조적 배경, 개성의 표현 등 다섯 가지로 쉽게 풀이해서 문학도들과 독자들의 이해를 도운 글을 "계황"이라는 새로 운 筆名을 사용해 발표하였다. *문예사전, 인명사전 등에도 나와있지 않으므로 연구가들의 참고를 요한다.(본문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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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藝月刊]1호 1931.11에는 "文藝拉雜談"이라는 짧은 글을 卞光昊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발표하였다. 주목할 점은 새로운 이름을 사용하는 이유를 첨부하였다.(본문참조) [東光] 1932년 9월호에는 '施賽傳'을 한문 단편소설로 발표. 내용을 요약하면 '시시덕 은 등을 타고 새침덕은 골로 빠진다'란 말에서 시시덕, 새침덕을 소재로 두 인간형 을 규명함으로써 한 시대를 풍자한 소설인데 이 글은 [山康齊文抄]에 다시 실려있다. |
[朝光]1936.6 단편실화 "쥐 무서워하는 사람"을 卞自旻으로 발표. 1936.8 수필 "어비턱띠타 偶草八種"을 변자민으로 발표. 1937.7 詩 "孫乭의 昇天"을 변영만으로 발표. 1937.10 詩 "동키호테"를 변영만으로 발표. 1938.4 "法醫學大家 롬부로소의 天才論"을 自旻生으로 발표. 전쟁후 최고의 지성파 잡지인 [思想界]70호 1959.5월호에는 변영만 死後 "丹齎傳"이 번역되어 실려있는데 "이 글은 고 변 선생이 23세때 집필한 유고이며 필자는 변영태씨의 백씨로 법률가이나 한문학, 영문학 등에도 특출 1955.12.22 별세하기까지 70 평생을 布衣. 寒士로 고절을 지키면서 동서고금의 명저를 섭렵했다."는 필자에 대한 찬사를 실어 후학들의 아쉬움과 사모의 정을 표현하고 있다. 一石 卞榮泰 (1982-1969) 변영태의 著書들[song's from Korea] 1936.6.10 조선 시조집을 英文으로 번역 自家本으로 발행하였고 1948.12.30 국제문화사에서 [song's from Korea]가 다시 발행되었다. [tales from Korea]를 해방직후 1946.10.25 국제문화사에서 우리외 전래 동화를 영문으로 발행하였다. [나의 祖國] 1956.2.15 자유출판사 발행. 공직시절 논문 및 연설집으로 원래는 英文 으로 발표한 글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출간하였다. [外交餘錄] 片想抄 1959.2.25 한국일보사 발행. 해방후 우리나라 판시설의 활동-을 담담한 필체로 고쳐 회포 형식의 글로 때운후 우리나라 外交史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중요한 저서이며, 부록 편상초는 해방후 우리나라의 여러 문제점들을 예리한 시각으로 지적한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雜誌에 발표된 글 [晋中親睦會報] 1호 이 회보는 현 보성중고등학교 전신인 보성학교에서 1910.6.10 발행한 회보 創刊號로서 '警世寄談'old and his son. '老人與其子' 등 3편의 글이 실려있다. [新東亞] 1935. 5. "論語註譯의 誤謬를 指摘함" 발표 [펜〕1호 1955.2.20 아우인 수주 변영로가 초대 펜클럽 회장을 하면서 간행한 펜클럽 기관지에 수주의 글과 함께 英文詩 'open', 'to the candle' 두편의 시를 발표하여 펜클럽 기관지 創刊을 축하했다. [國際評論] 1호 1959.3.1 '제네바회의 통일안의 정체' 발표. [思想界] 1963.4월 '3.16 성명을 무조건 철회하라' 5.16 혁명후 4년간 군정 연장의 성명을 발표하자 군정연장을 강력히 비판하는 글을 발표해 정치 원로로서의 면모를 발휘하는 모습을 보였다. [思想界] 1963.4. '政治性 낭비가 심하다'를 양호민씨와 대담한 글이 실려 있다. [新東亞] 1965.4. 韓日會談에 앞서 일본은 먼저 반성해야 한다는 '반성할 자는 누구냐'라는 글이 약 1면에 실려있다. [新東亞] 1965.8. '제네바 정치 회담을 회고한다' [新東亞] 1968.10 '民族'이라는 서문을 발표.*청백리 일대기라는 저서가 있으나 찾지 못했음을 밝혀둔다. *문예 사전 등에는 변영태 저서로 [한국시조선] [한국이야기〕가 있다 하는데 1936년 [영문시조집]과 1946년 [영문전래동화집]의 착오인 듯 하다. 樹州 卞榮魯(1989-1961) 변영로의 著書들 [朝鮮의 마음] 1924.8.22. 평문관에서 발행한 문고본으로 위당 정인보의 서문이 실려 있고 저자의 '序 대신에'를 비롯 詩 28편 부록으로 감상잡기 8편으로 구성된 시집이다. [序 대신에]를 실어 그의 나라잃은 슬름의 노래를 다시 한번 감상해본다. <朝鮮의 마음> 을 어대가 찾을까?/<朝鮮의 마음>을 어대가 찾을까?/바다밑을 뒤져볼까?/ 빽빽한 버들가지 틈을 엿볼까?/아득한 하늘가나 바라다볼까?/아, <朝鮮마음> 을 어대가서 찾어볼까?/ <朝鮮마음>은 지향할수 없는 마음, 설흔 마음!/ 詩集 [朝鮮의 마음]은 우리나라 최초의 시집인 김억의 "해파리의 노래"로 시작해서 개인 창작시집 여섯 번째에 해당되는 기념비적인 시집이며 文學史에 영원히 기억될 애 송시 '논개'가 실려 전한다. [gave of azalea]1947.8.5. 국제출판사에서 발행한 변영로의 번역시집. [樹州詩選] 1959.10.30. 경문사 발행 한글시 13편. 영문시 9편. 산문(우리글, 영문)으로 구분되어 대부분의 시와 산문은 첫 시집인 [朝鮮의 마음]에 실린 것을 재수록하였으며 영문으로 된 시와 수록하였다. 산문은 새로운 것을 수록하였다. 표지장정은 畵家 朴栖甫가 아름다운 그림으로 장식하였고 同鄕 후배인素鄕 이상로가 편집을 하였고 題字는 수주 자신이 직접 써 의미를 더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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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樹州 隨想錄] 1954.11.30. 서울신문사 발행. 동향인 후배 소향 이상로가 편집을 맡고 내용은 저자 자신의 서문 대신에라는 자서 일언 등, 자화상, 고인신정, 夢 김포기행 등으로 엮어져 있다. [酩酊四十年(無類失態記)] 6.25 전쟁이 휴전되기 전 1953.3.30. 서울신문사 발행. 월탄 박종화의 서문으로 시작되는 이 저서는 40여년간 술을 마시면서 웃지못할 실수담을 사실 그대로 재미있게 그려낸 회고형식의 저서로 그의 기인다운 풍모가 유감없이 드러난 작품으로 앞으로도 이런 소재와 이런 名著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싶다. |
[樹州 卞榮魯選集] 이책은 수주가 작고한지 20년만인 1981.3.10. 그의 유족이 20주기 를 追慕하면서 시인 이용상, 이진섭 양씨가 편집한 것으로 수주 死後 처음으로 작품이 모아진 결정체다. 특이한 것은 수주의 후손인 4남 2녀의 사뢰는 말씀이라는 짧은 글이 실려 눈길을 끈다. 작품 선정은 대표적인 시, 수필 등으로 367면으로 꾸며 한진 출판사에서 비매품으로 발간하였다. [변영로全作詩集] '차라리 달없는 밤이드면'의 부재를 달고 1983.4.30. 김영민에 의해서 엮어지고 정음사에서 출판했다. 이 전작시집은 [조선의 마음] [수주시문선] [수주 변영로 문선집] 등 3권의 저서중 詩 부분만 골라 싣고 3권의 시집에 없는 시들을 편자가 추가로 넣어 엮은 詩全集이다. 특이한 점은 수주 사후 처음으로 作品年譜를 실어 연구가들의 작품연구를 쉽게 하였다. 수주 변영로 연보 1989 (1세) 서울 맹현(지금의 종로구 가회동)에서 父 변정상과 母 진주강씨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남. 1904 (7세) 서울 제동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그 뒤 계동보통학교로 전학 1907 (10세) 사립중학교(중앙학교-중앙고보의 전신)에 입학하여 체육교사와 마찰로 자퇴하고 안주로 떠나 안동현을 유랑 1910 (13세) 사립 계산학교 졸업 1912 (15세) 중앙기독교 청년회 학교 영어반의 3년과정을 6개월만에 마침. 평창 이씨 흥순과 결혼 1916 (19세) 중앙기독교 청년회 학교 영어반 교사로 부임. 1918 (21세) 중앙고보의 영어교사 부임 [靑春]에 英詩 cosmos를 발표 1912 (22세) YMCA에서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 장남 철수 출생 1920 (23세)〔廢虛] 동인으로 참가 〔학지광) 20호에 '主我的 生活'을 발표 1921 (24세)〔廢虛] 2호에 論評 '메텔링크와 예이츠의 신비사상'을 발표. [新天地] 1호에 '꿈많은 나에게', '나의 꿈은', '횃불', '영의 비애', '도취', '꿈종교의 총의' 발표 1921 (24세) [장미촌]1호에 '장미촌'이라는 서문을 발표 1922 (25세) 차남 성수 출생 [新生活] 3월호에 '추억만이', '봄비' 4월호에 대표작 '논개', '달밤' 9월호에 '날이 샙니다' 10월호에 '님이시여', '기분전환', '가을 하늘밑에서', '하늘만 보아라' 11월호 '방랑의 노래' [개벽]25호에 '결혼행진곡'을 번역 발표 [개벽] 26,27호 '사막안에 정열' 번역. 연재발표. [개벽] 29호 '토막생각' [개벽] 30호 '상징적으로 살자', '고 남궁벽형에게' [동명] 5호에 '정신적 혁명 투사 쉘리'를 동지 11호에 '로동로국의 예술' 18호에 소설 '어떤 중학교사의 사기'를 37호 여시관하편 번역소설 '정처'를 발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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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 (26세) [개벽]31호에 '설상소요'를 발표 1924 (27세) [廢虛以後]1호에 '子 몇 알', '생시에 못뵈올 님', '눈' [개벽]44호에 주는것보다 받는 편이 많은 영국 문단 발표. 시집 [朝鮮의 마음] 평문관에서 발행 1935(28세) 장녀 진수 출생 [新知識]1호에 '버러지도 실타하올 이 몸이' [개벽] 62호에 '국수주의 항성', '단재 신채호 선생' [明]1 호에 '가련한 두 로국 소녀' 발표 1926 (29세) [朝鮮詩人全集]에 '하일정취' "어느날" 수록. 12.18. 동아일보에 최남선 시집 "백팔번뇌"를 읽고나서 [文藝時代]1호에 '베른의 고대에서'를 번역. [靑年]10월호에 'to'를 발표 |
1927 (30세) [現代評論]1호에 '오마카이양의 류비앗'을 번역. 4호에 '셰익스피어의 생애' 발표 1928 (31세) [朝鮮之光]75호 '지고지순한 정신적 문예' [청년] 11월호에 '긴 강물이 부러워' 발표 1929 (32세) [朝鮮日報] '저녁 놀빛' 발표 1930 (33세) [詩文學]2호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위에' [新生] 5월호 '무제' 발표 1931 (34세) 3남 공수 출생 중등학교 조선어 교재에 '백두산 갔던 길에' 외 12편 수록. [선생]1월호 하석소옹 회갑생조 발표 1933 (36세) "영문시집을 읽고"(모윤숙 시집) 동아일보 11.8[新東 亞]8월 '별가튼 생각', '방울가튼 소리', '하이네 산문 집', '군데군데서' [신동아]12월호 '육화율릉' 발표 1934 (37세) 부인과 死別 1935 (38세) 양창희와 재혼. [신동아]1월호 '새해를 맞이하여', '정지용군의 시' [三千里]11월호 '이성만가' 발표 1937 (40세) 5남 문수 출생[조광]5월호 '백두산 가는길', '천지가에 누워' 발표 1938 (41세) 6남 천수 출생 1939 (42세) [文章]2월 '휘상' 9월 '땅거미 질 때' 10월 '실제' 발표 1941 (44세) [文章]4월 '곤충 9제' [春秋]4월 '프란체스카' [조 광] 12월 '박모' 발표 1943 (46세) [춘추] 7월 '사벽송' 발표 1946 (49세) 차녀 인숙 출생. [新文學]8월 '어둠에서 어둠으로' 발표 1947 (50세) 英詩集 [진달래] 간행 [新天地] '유선과 의의선' 발표 1948 (51세) [명정사십년] 서울신문사 발행. [신천지]6월 '삼일이야기' 11월 '나의 자평' 발표 1948 (51세) 영문시집 [GROVE OF AZALEA]간행. 서울시 문화상 수상 1949 (52세) [民聲]3월 '자탄' [民族文化]1호 '나의 교우록' 발표 1550 (53세) [白衣]21호 '잠 놓인 밤' 발표 1953 (56세) [명정사십년] 서을신문사 발행 [신천지]6월 '삼일 이야기' 11월 '나의 자평' 발표 1954 (57세) [수주수상록] 서울신문사 발행. [신천지] 6월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 신채호' 8월 '유리', '몽미인' 발표 1955 (58세) 펜클럽 회장 취임.〔펜]1호 영문시 'a night in taching', 'one vocie' [高校英語]1호 '어학도에게 한 마디' 발표 1956 (59세) [自由文學]1호 '효도' [새벽]9월 '鋪道를 걸으며' [思想界〕34호 'w의 생활 태도' 〔펜〕3호 영문시 'AZALEA', 'HEARING INTO RAIN' 발표 1957 (60세) [새벽] 3월 '단상' [사상계] 8월 '중얼거림' 11월 '조그마한 제의' 1959 (62세) [수주시문선] 경문사 발행 (사상계) 8월 '아이티어래시' [자유문학]1월 '장미촌(40년간의 문예지)' 발표 1960 (63세) [사상계]1월 '장미촌(40년간의 문예지)' 발표 1961 (64세) 3월 14일 別世 부천시 오정구 고강동 선영에 변영만, 변영태와 함께 안장. 대한민국 文人葬으로 거행 1565 [사상계〕3월 '암흑속에 못다 부른 노래(조지훈)'와 함께 '논개' 재수록 1969 [樹州回想記]간행 1981 [樹州 卞榮魯 文選集] 遺族들에 의해 한진출판사에서 간행 1983 [변영로全作詩集] 김영민 편저 정음사 발행 *이 年譜 작성하는데 김영민씨의 수고함에 감사를 드린다. 부천시 오정구 고강동 선영에는 변영로의 문단 후배들이 그의 뜻을 기린 詩碑가 세워져 있고 주논개의 출생지인 전북 장수읍 논개 사당에는 그의 작품인 '논개'의 시비가 있으며, 1996년 12월 30일 부천시 중앙공원에 시비를 건립해 문화도시로서의 자긍심을 심어주고 있다. *1927년 4월[現代評論]에는 '베토벤소전 몰후 백년기를 당하여'를 樹生抄라는 필명의 글이 발표되었는데 변영로의 글이 아닌가 추측된다. 위에 기록한 변씨 삼형제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면 그들의 존재와 그들이 이루어 놓은 학문적인 위업에 새삼 존경과 감탄과 감사의 념을 금할 수 없다. 그들 자신의 개안과 높은 이상의 실천이 개인적으로는 그들 자신의 영혼을 구원했음은 물론이요, 거친 왜압과 시대적인 무지의 광포한 바람에 이 나라 어디에서도 국민의 영혼을 밝혀줄 촛불하나 보기 어려웠던 그 암흑의 시대에 스스로 민족의 등불이 되고자 했다. 이제 이들은 우리나라의 정신적, 문화적인 교각의 산 인물들이 되어 역사의 장에 빛나는 이름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거니와 부천의 이름 속에 영원히 흐르는 정신의 수액이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