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기여와 수난도 중국에 알려져야 한다
-두 운동(삼일⋅오사)과 중국선교-
삼일운동, 오사운동의 "촉진제"
104년 전인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한국의 삼일운동은 중국의 오사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삼일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준비행사의 하나로 학술심포지엄이 2017년 2월 23일에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주최로 삼일운동과 관계가 깊은 장소인 태화빌딩(옛 이름 태화관) 지하 대강당에서 열렸는데 기조강연을 맡은 이만열 박사는 삼일운동은 다른 약소민족 약소국가의 독립운동이나 국권회복운동에 자극제가 되었다고 하면서 “첫째 3⋅1운동은 중국 북경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5⋅4 운동에 일정하게 영향을 미쳤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의 각 신문들은 자주 이 소식을 전했다. 당시 북경대학 교수로서 신문화운동의 지도자였던 천두슈(陳獨秀)는 ’조선독립운동지감상‘에서 3⋅1운동을 격찬하면서 중국민족의 궐기를 호소했다. 또 당시 북경대학생들의 잡지 「신조(新潮)」의 편집인이었던 부사년(傅斯年)도 3⋅1운동이 ’혁며예의 신기원을 열었다.‘고 극찬하고 중국학생들과 국민들의 궐기를 호소했다. 한편 해외 5⋅4운동에서는 줄국인들의 국민대회에 한국학생들이 참여, 반일 문서를 돌리고 선두에서 반일투쟁을 선동했다. 때로는 임정 간부들이 중국 학생들에게 반일강연을 하기도 했다. 5⋅4운동이 일어난 데에는 중국의 특수한 내적인 조건이 성숙되어 이루어진 것이지만, 위에서 언급한 이같은 사례들은 한국의 3⋅1운동이 중국의 일정하게 영향을 미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만열 교수는 숙명여대 명예교수이며 국사편찬위원장을 역임한 사학계의 거두로서 이 학술 심포지엄을 주최한 한국기독교역사역구소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이 교수는 이 기조강연에서 삼일운동이 오사운동에 일정하게 영향을 미쳤다고 반복해서 말했는데 현대 중국교회사를 깊이 탐구하고 있는 문영걸 박사(美道중국선교연구소장)가 「기독교사상」 2017년 2월에 기고한 글에는 “5.4운동의 기폭제가 된 3.1운동”라는 소제목이 들어 있다.
필자는 그 두 말의 중간쯤이라고 할 수 있는 “촉진제(促進劑)라는 말이 적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만열 교수는 ”3⋅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의 각 신문들은 자주 이 소식을 전했다“고 했는데 중국의 신문들은 삼일운동에 관한 소식들을 자주 전했을 뿐만 아니라 빨리 전했다. 삼일운동 발발 나흘 뒤인 3월 5일부터 중국의 여러 신문에 삼일운동에 대한 기사가 실리기 시작했다.
백여 년 전의 통신사정 등을 생각할 때 어떻게 이렇게 빠르게 보도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다른 나라의 신문에는 삼일운동에 대한 기사가 언제부터 실리기 시작했는지도 궁금하다.
이를 알기 위해 당시 AP통신 기자로 서울에 주재하고 있던 앨버트 테일러가 남긴 기록들을 비롯하여 여러 자료를 검색해 보았으나 중국의 신문들보다 빨리 보도된 경우는 찾지 못했다.(테일러 특파원이 살던, 서울 종로구의 ’달쿠샤‘ 라는 이름을 가진 주택이 최근에 복원되어 공개되고 있다)
중국의 신문들은 삼일운동 소식을 빨리, 자주 전했을 뿐만 아니라 우호적인 논조로 전했다.
중국 신문들의 삼일운동 제목과 기사에는 ’혁명‘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신문들뿐만 아니라 잡지들도 마찬가지였다.
「매주평론(每週評論)」이라는 주간지가 3월 23일 자에서 삼일운동에 대한 글을 실었고 여러 월간지들이 4월호에서 이 문제를 다뤘다. 중국 언론의 삼일운동에 대한 이와 같은 보도가 오사운동 촉진에 젖지 않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두 운동의 공통점
1919년 5월 4일 오후 1시, 베이징 대학을 비롯한 13개 대학의 대학생들 약 3천여 명이 톈안먼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21개조 요구〉 취소, 칭다오 반환, 친일 관료 처단 등을 요구하는 구호가 적힌 기들 들고 외국 공사관들이 많이 자리잡고 있는 지역으로 향했다. 외교 사절들에게 이런 요구가 적인 청원서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1919년의 5월 4일은 일요일이어서 대부분의 외교공관이 문을 닫고 있었다. 뜻을 이루지 못한 시위대는 방향을 돌려 대표적 친일관료인 차오루린(曹汝霖)의 집으로 몰려가서 그 집에 와 있던 장쭝샹(章宗祥)이라는 친일관료에게 매타작을 가하고 주택에 불을 질렀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 일을 ’5⋅4 사건‘이라고 부른다.
오사운동은 넓게는 1915년부터 1920년대 초반에 걸친 전반적인 신문화운동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오사운동은 반제국주의 민족운동, 반봉건주의 운동으로 발전해서 중국현대사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있다.
오사운동은 그보다 두 달 앞서 일어난 한국의 삼일운동과 공통된 점을 여럿 가지고 있는데 일본을 대상으로 했다는 것이 대표적인 공통점이다.
5월 4일 시위에 앞장 선 대학생들은 <21개조 요구> 취소를 강하게 내세웠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은 연합국에 가담하여 참전했다.
영국과의 동맹을 명분으로 내세워 참전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동아시아의 지배권을 차지하고 국제사회에서 발언권을 강화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일본은 1914년 8월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독일이 조차하고 있던 산둥반도를 차지하였다.
이듬해인 1915년 1월 18일에는 독일이 산둥반도에서 누리고 있는 권익을 일본이 계승하고, 만주에 대한 일본의 이권을 반영구화하며 남만주와 내몽골 일부를 일본에 조차하고 일본인 고문을 초빙할 것 등 21가지를 요구했다.
이것이 <21개조 요구>이다.
중국이 이에 반발하였고 국제사회도 비난했으나 일본은 강압적으로 밀어부쳐 위안스키 정부는 이를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19년 1월 18일에 시작된 파리 강화회의에서 중국은 조약의 파기를 요구했으나 묵살당했다.
5월 4일에 시작된 시위에서 시위대가 든 깃발에는 이 <21개조요구> 취소를 주장하는 강력한 구호가 적린 것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시위대는 칭다오(靑島)도 반환하라고 외쳤다.
칭다오는 중국의 무역과 군사의 중요한 기지인 천연항인데 독일은 자국 선교사가 피살당한 사건을 구실로 1897년에 군대를 보내 이곳을 조차지로 만들고 서구품의 도시로 가꾸어 나갔는데 일차대전이 일어나자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일본이 이곳을 장악해버렸다. 시위대는 그런 내력을 가진 칭따오를 되찾고 싶어 했던 것이다..
기독교의 기여와 수난도 알려졌으면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삼일운동은 중국에 빠르게, 널리, 자주, 우호적으로 전해졌다.
그와 함께 중국에 알려졌으면 하는 것이 있다. 삼일운동에 기독교가 큰 기여를 하였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삼일운동에서는 기독교가 큰 역할을 하였다.
이것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때 일제의 철저한 탄압으로 다른 단체들은 힘을 잃어서 이와 같은 운동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은 종교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는 형편이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33인이 기독교인 16명, 천도교인 15명, 불교인 2명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이 때문이었다.
세 종교 가운데에서도 능동적인 성격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가 많은 역할을 하였다.
삼일운동을 주제로 한 한 학술발표회에서 한 발제자가 “삼일운동은 기독교가 중심이 된 민족운동이었다”고 하자 토론자 가운데 한 사람이 “거기에서 다섯 글자를 빼야 하지 않느냐?”고 하였다.
어떤 글자를 빼라는 말인가 하였더니 “∼가 중심이 된”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삼일은동은 기독교 민족운동이었다고 해야 맞는다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는 이 말에 대한 반론은 나오지 않았다.
삼일운동과 오사운동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이런 사실도, 중국에 알려졌으면 좋겠다.
다시 말해 기독교는 나라에 유익한 존재라는 인식을 공유하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삼일운동에서 교회의 역할이 이같이 컸기 때문에 교회는 일제로부터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같은 일은 중국 땅에서도 많이 일어났다.
간도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이 독립군에게 참패를 당하자 일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의 여러 마을들을 불지르고 다수의 주민을 학살하였다.
이것을 '경신참변(庚申慘變)'이라고 부르는데 이때 그 지역의 교회와 교인들이 많이 희생당했다.
국내에서 일어난 수난 사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제암리교회 사건인데 그와 비슷한 일이 중국에서도 있었다.
장암동교회(獐岩洞敎會)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1920년 10월 30일 10월 30일 스즈모토 대위가 인솔하는 일본군 토벌대 77명이 룽징 동북 25리 지점에 있는 장암동을 포위했다.
장암동은 우리 동포들로 이뤄진 기독교마을이었다.
주민들을 교회당에 집결 시킨 일본군은 남자 36명을 결박하여 꿇어앉힌 다음 아직 타작하지 않은 조짚단을 교회당 안에 채워 놓고 석유를 뿌려 불을 질렀다.
일본군이 돌아간 뒤 가족들은 시체를 찾아 장사지냈는데 5∼6일 후에 일본군이 다시 마을에 들어와서 유족들을 모아놓고 무덤을 파헤친 후 시체를 한데 모아놓게 한 뒤 다시 석유를 붓고 불을 질러 시체가 재가 될 때까지 태워버렸다.
이중학살을 감행한 것이다.
외국의 시찰단으로부터 만행을 은폐하기 위해 이런 참극을 연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 번 불에 탄 된 시체는 누구의 것인지 가릴 수 없게 되어 유족들은 재를 모아 합장묘를 만들었다
지금 그 자리의 그 무덤 앞에는 ‘장암동참안유지(獐岩洞慘案遺址)’라고 새긴 비와 일본군의만행을 새긴 비가 서 있다.
중국에서 교회의 유적지에 비석이 세워져 있는 경우는 매우 희귀한데 여기는 교회가 겪은 일과 관련 있는 장소에 비가 세워져 있다. 다만 교회 이름이 밝혀져 있는 점이 ‘중국스럽다’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교회는 이 비로부터 800m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한다.
중국도 일본군으로부터 ‘만행(蠻行)’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피해를 많이 입었다. 중국의 우리 교회들이 일본군에게 당한 일을 알려주면 ‘수난’이라는 것을 공통분모로 하여 친근감이 더해 질 것이라고 여겨진다.
특히 교회가 피해를 많이 입었다는 사실을 통해 교회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렇게 인식이 바뀌면 중국선교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오사운동과 중국교회와의 관계는 더 연구되어야 한다.
오사운동은 중국에서 종교에 대한 혐오를 불러왔다.
천두슈, 후스 등은 낡은 문화를 파괴해야 하며, 예수․불교․우상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 하였다.
이같은 주장의 연장선상에서 비기운동(非基運動)이 전개된 것이다.
중국의 기독교는 중화민국 성립 이후 일시적으로 호시절을 누렸는데 신문화운동으로 그 좋은 시절은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중국을 주께로> 2017년 5월호에 게재된 졸고 “오사운동과 기독교: 그 100년을 바라보며”에 대체적으로 소개되어 있다.
기독교에 대한 중국의 혐오는 반전되어야 마땅하다.
<중국을 주께로>는 2005년 여름호에서서도 이 문제를 다루고 이번에 다시 오사운동을 기획글의 제재로 삼았는데 혐오가 호감과 경의로 바뀌기를 바라서였을 것이다.
이 글에도 같은 마음이 담겨있음을 밝히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