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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만갑 선생님 생가 및 구례 동편제 전수관, 그 외 구례 명창들의 생가
전남 구례군 구례읍 백련리 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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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식당, 월매 주유소 …”. 남원을 들어서면 흔히 보이는 간판들이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동편소리의 탯자리이며 판소리 춘향가와 흥보가, 변강쇠가의 무대가 바로 남원인 것이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남원·구례·순창 등지에서 혈연을 통한 가계(家系)전승과 스승을 찾아 소리길을 열었던 피땀어린 학습의 자취를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정노식은『조선창극사』「대가닥」조에서 판소리를 동편제·서편제·중고제·호걸제로 나누고, 이러한 소리제는 “대체로 동서로 나누고 중고·호걸은 극소하다”라 언급하고 있다. 또한 “동서의 유래가 여하히 분류된 것이냐 하면, 송흥록의 법제를 표준하여 운봉·구례·순창·흥덕 등지 이쪽을 동편이라 하고, 서는 박유전의 법제를 표준하여 광주·나주·보성 등지 저쪽을 서편이라 하였다. 그 후에는 지역의 표준을 떠나서 소리의 법제만을 표준하여 분파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남원지역을 중심으로 전승된 소리는 “송흥록-송광록-송루룡-송만갑-송기덕”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송문일가(宋門一家)의 소리가 주를 이루고 있다. 유성준, 장판개, 이화중선, 김정문, 박봉래, 박봉술 등이 송만갑에서 소리를 배웠다. 예전에는 판소리를 동·서편로 나누기보다는 ‘산소리’와 ‘마당소리’로 구분했다 하니, 남원소리의 자취를 더듬는 일은 산소리의 흔적을 찾아가는 일인 셈이다.
▲동편제 탯자리
▶ 동편제 탯자리 송흥록 생가, 박초월 거주지 - 전북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
남원에서 24번 국도를 타고 인월 방향으로 19km쯤을 오르면 운봉읍을 지나 화수리 비전마을 표지석이 보인다. 마을 안으로 접어들어 멋스러운 솔길을 지나면 동편제 판소리의 탯자리로 알려진 송흥록 생가와 박초월 거주지가 있다. 3년 전 이곳을 찾았을 때는 폐가와 집터만이 있었는데, 지금은 예산을 들여 복원한 것으로 위쪽이 송흥록 생가이며 아래쪽이 박초월의 거주지다.
송흥록(1800?∼1863)은 진양조를 완성하고, 우조와 계면조를 비롯 모든 가조(歌調)를 집대성했다. 『조선창극사』에 “동편소리는 송흥록의 법제를 표준으로 한 것”이라 언급한 바대로, 그는 다듬어지지 않은 초기 판소리의 음악적 내용을 풍부하였고 예술적 완성도를 높여 가히 가왕(歌王)으로 불릴 만 하다. 송흥록의 소리는 동생 송광록과 박만순에게 전해졌다.
박초월(1916∼1983)은 전남 순천(낙안)에서 태어나 비전마을에 이주하였다한다. 김정문, 유성준, 송만갑 등에게 소리를 배웠고, 1930년 전주남녀명창대회에서 장원을 한 후, 왕성한 창극활동과 음반취입, 교육사업을 전개했다. 박귀희, 김소희 등과 함께 현 서울국악예고인 한국민속예술학원을 설립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1964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춘향가 보유자, 1973년에 수궁가 보유자로 지정된 바 있다.
2000년에 조성한 이곳은 그저 호젓하며 스피커를 통해 울리는 소리 한자락이 고즈넉하게 날린다. 대부분의 복원지에서 드는 아쉬움은 그 인물의 품성과 음악성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제시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소리광대를 천시하여 그 후손마저 확인하기 힘든 지금의 현실을 감안한다면 쉬운일은 아니다. 다만, ‘아! 그런 사람이 살았었나 보다’하는 이해를 넘어 가능한 그의 인격과 소리세계, 문화적 배경에 대한 진솔한 이해를 돕는 포장이 아닌 교감의 공간으로 자리잡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 국창 송만갑 생가 - 전남 구례군 구례읍 백련리
▲ 송만갑생가,동편제 판소리 전수관
구례읍에서 19번 국도 남원방향과 인접한 우회도로를 타고 남원방향으로 1km 정도를 오르면 왼편에 명지아파트가 보인다. 아파트 뒤쪽으로 돌아가면 2001년에 문을 연 동편제 판소리 전수관이 자리하고 있다. 동편제 판소리 전수관의 왼편에 조그마한 초가삼간이 근래에 복원한 송만갑 생가다. 본래는 명지아파트 오른쪽 아래에 위치한 윗땅고랑에 생가가 있으나, 택지로 개발되어서 지금의 자리에 복원한 것이라 한다.
송만갑(1865∼1939) 명창은 구례군 백련리에서 태어났다. 호적에는 봉북리 122번지 생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백련리에서 나고 자라서 후에 봉북리로 이사한 것이라 한다. 송흥록의 동생인 송광록의 손자이며, 송우룡의 아들로 동편소리 명가인 송씨문중의 법통을 이은 명창이다. 가문의 법제를 잇는 것을 중요시했던 당시의 관행을 거부하고, 변화하는 사회적 조건에 부응하여 끝없이 고민하였던 소리꾼이다.
◀ 송만갑 생가 터
“… 그는 공부가 일취월장하여 13세 시에 이미 가문의 전통적 법제를 밟지 아니하고 일종 특색의 제작으로 별립문호하였다. 그것이 시대적 요구에 순응하기 위하여 통속화한 경향이 많았다. 그러므로 그 부친은 송씨가문 법통을 부살하는 패려자손이라고 해서 독약을 먹여 죽이려고 한일도 있었다.
… 송씨 말하기를 극창가는 주단포목상과 같아서 비단을 달라는 이에게는 비단을 주고 무명을 달라는 이에게는 무명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정노식,『조선창극사』복간본 p.194, 1994, 동문선)
시대적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고자 했던 음악관만큼 그는 어전에서, 협률사의 전국 순회공연에서, 조선성악연구회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쳐 당시 판소리하는 사람 치고 그에게 소리를 배우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판소리의 역사가 300년이라면 그 기간은 우리 민족의 호흡 속에 녹아있었던 음악적 감수성을 기본으로 시대적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지금의 모습을 만들어낸 약동하는 생명의 쉼 없는 박동의 시간이었다. 고정된 사고와 틀을 무조건 고집하기보다는 판소리가 서 있어야할 위치를 정확히 알며 조국을 잃은 민초들의 가슴을 울렸던 이가 바로 송만갑 명창이다. 옛 명창의 정신은 지금도 많은 교훈이 될만하다. 남원에서 시작하여 구례로 이어지는 송씨 가문의 소리는 이제 동편제 판소리 전수관에서 다시 전해지고 있다.
▶ 박봉술생가 - 전남 구례군 용방면 중방리 감천마을
▲ 박봉술생가
구례읍에서 19번 국도를 타고 남원방향으로 6km쯤 지나면 용방면 소재지에 이른다. 면 소재지에서 왼쪽길로 조그만 다리(용천교)를 건너 소담한 개울 옆 농로를 거슬러 오르면 마을 초입에 양철지붕 집이 있다. 중방리 239번지 이곳이 박봉술 명창의 생가다.
박봉술 명창(1922∼1989)은 송만갑 명창과 교분이 있었던 부친 박만조로부터 송만갑제 소리를 배웠다. 큰형 박봉래는 김정문, 장판개 명창과 견주는 명창이었으나 일찍이 타계하였고, 둘째형 박봉채는 한약방을 하였으나 소리속을 알아서 박봉술 명창에게 소리를 지도하였다 한다. 1973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적벽가 보유자로 지정되었고 1989년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타계하였다.
박봉술 명창의 생가에는 김종석(63)씨가 현재 거주하고 있다. 김종석씨의 구술에 따르면 18세때에 30대 후반의 박봉술 명창에게 직접 이 집을 샀으며, 현재의 집은 28년전에 원래의 집터 그대로 신축한 것이라고 한다. 그가 회고하는 박봉술명창의 이야기는 당시 판소리 광대들의 사회적 위치를 여실히 담고 있다.
“그 양반이 말하기를 ‘내가 있을라고 했는디 처세(천시)를 받습니다. 젊은 사람들도 해라를 하고. 그래서 내가 남원으로 갈랍니다. 집터 좋아 복 받을 것이오’ 그랬어요. 그때 집을 내놓은지 5년이 되었는디 당골네 집이라 재수 없다고 사는 사람이 없던 것을 내가 쌀 7마니를 주고 샀어요. 그러고 그 양반 말대로 내가 복을 받아서 우리 자식들이 잘되고 그래서 늘 감사하고 있어요.”
옛 명창의 터에 자리잡고 사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집주인을 뒤로하고, 고개를 들어 주변을 담는다. 생전 명창의 얼굴만큼이나 소담한 돌축대를 경계로 싱그런 생명이 자라고, 앞산은 정겨움을 더한다. 그곳에서 물길을 따라 떠나갔을 명창의 뒷모습을 그린다.
▶ 유성준 거주지 - 전남 구례군 광의면 연파리
▲ 유성준 거주지
용방면 소재지에서 다시 남원방향을 조금 오르면 왼편으로 861번 지방도가 나온다. 이 길을 따라 다리(광용교)를 건너 좌회전 후, 천은사 방향으로 파출소와 보건소를 지나 500m 정도 거리에 공북마을 정류소가 있다. 유성준 명창이 거주했던 공북마을 254번지는 마을우물 옆에 자리하고 있다. 현재는 비어있고, 지금의 집주인은 서울과 이곳을 왕래한다고 한다.
이곳은 유성준 명창의 생가로 알려져 있으나, 남원의 향토민속학자 김용근에 따르면 본래 유성준의 생가는 남원시 수지면 당골터였고, 구례로 이사한 것은 1910년의 일이라 한다. 이후 남원 아영면 의지리(1928년)를 거쳐 경남 하동군 하동읍 읍내리(1929년)로 옮겨갔다고 한다.
유성준(1874∼1949) 명창은 송우룡의 제자로 정춘풍과 김세종, 장자백에게도 배웠다고 한다. 그는 제자들에게 매우 엄격한 스승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수궁가와 적벽가에 능했고 특히 수궁가는 당대제일이었다 한다.
부슬부슬 비내리는 날 찾은 그의 고택은 잡풀만 우거지고 폐가가 되어있었다. 심심할 때 한 자리 하는 노래에 밭매러 가던 부인들이 환장을 했다는 집 뒷길, 아낙들의 자취는 간데없고 간혹 쌩쌩 질주하는 자동차 소리만 도리어 허허롭다.
▶ 김정문 거주지 - 전북 남원시 주천면 주천리 상주마을
▲ 김정문생가 터
남원시에서 번 도로를 구례 방향으로 5km 쯤 지나면 60번 지방도와 만나는 삼거리가 있다. 이곳에서 왼편으로 2km 정도 들어서면 주천면 상주마을이 보인다. 상주마을 721번지는 김정문 명창이 1931년부터 거주했던 곳이다.
김정문 명창(1887∼1935)은 주천면 고기리에서 태어나, 진안군 백운면 평장리를 거쳐 임실군 성수면 도인리(1921년)에서 거주하다 1931년 남원시 주천면 상주마을에 이주하였다. 유성준에게 소리를 배웠고, 송만갑의 고수노릇을 하다 소리속을 알게되었고 명창이 되었다 한다.
1908년 송만갑 협률사에 참여하였고, 1910년 해산후 광주 김채만에게 사사하였고, 1912년 광주협률사에 참여한 후 8년간 활동하였다. 1920년 남원 권번의 소리선생으로 활동하였고, 1933년에는 조선성악연구회에 참가하였다. 김정문 명창의 거주지는 현재 722번지와 합쳐졌고, 소금수씨가 거주하고 있다.
상주마을의 폐교 뒷편에는 제자인 강도근 명창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김정문 명창의 묘소는 상주마을에서 수지면 방향으로 1km쯤 거슬러 오르는 언덕배기 산83번지 씨앗이골에 자리하고 있다.
▶ 이화중선 거주지 - 전북 남원시 수지면 홈실(호곡리)
▲ 수지면 홈실마을 전경
상주마을에서 60번 지방도를 타고 6km쯤을 오르면 수지면 소재지가 나온다. 현 행정구역은 수지면 호곡리이고, 옛이름은 홈실이다. 이곳 박씨 문중의 사람이 머리를 올려줘 17세 때 이화중선 명창이 잠시 거주했다는 곳이다.
이화중선 명창(1897∼1943)은 전남 목포시 남교동 11번지에서 태어나 6∼7세쯤 남원 천거동(지금의 광한루 자리)으로 왔고, 수지면 홈실, 남원 송동면 태동마을, 순창을 거쳐 임실 오수로 이주하였다. 남원 천거동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임실 오수 이재삼의 호적에 기입된 이화중선의 고향은 목포시 기록되어 있다(김용근씨가 확보한 호적 사본).
1918년 홈실에서 열린 협률사 공연을 보고 반해 가출하여 소리를 시작했다는 명창의 삶은 파란만장한 삶이었던 듯 싶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홈실의 이름난 가문을 등지고 넘었을 그 길을 해질녁에 걷는 기분은 묘하다. ‘저물어 붉게 물든 햇살이 그의 타는 가슴만 했으랴.’
▶ 김영운 고기리 - 전북 남원시 주천면 고기리 고촌마을
▲ 김영운 생가터
수지면에서 길을 되짚어 60번 국도를 따라 지리산으로 들어가, 가파른 길을 오르면 산중에 자리한 마을이 주천면 고기리다. 수지면에서 고기리까지 거리는 약 17km쯤 된다. 고촌마을 표지석 아랫길을 내려와 다리 건너 보이는 조립식 주택 한 켠이 김영운 명창의 거주지이다. 고촌마을 241번지는 242번지에 편입되어 현재 이맹우씨가 거주하고 있다. 고촌마을은 김정문이 태어난 마을이기도 하다.
김영운 명창(1917∼1972)의 본명은 김기순이고, 전북 임실군 성수면 양지리에서 출생하여 이곳으로 어릴적 이사하였다고 한다. 김영운은 김정문의 조카이며, 강도근의 처남이 되고, 유성준은 그의 외조부가 된다. 김정문에게서 소리를 배웠으며 1935년 김정문 사후 남원소리의 맥을 잇고 전수하였다고 한다.
김영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으나 남원과 운봉에서는 제법 알아주는 소리꾼이었다 한다. 1935년 이후 타계하기 전까지 남원권번과 국악원에서 소리선생을 했다면 무려 30여년이 넘는 기간동안 남원에서 소리의 맥을 이어온 셈이니 그의 공로는 크다고 하겠다. 고촌마을 그의 거주지는 지리산의 빨치산 토벌 당시 불탔다고 전한다. 지난 큰비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굽이치는 물살을 건너며 발걸음을 서두른다.
▶ 장판개·배설향 거주지 - 전북 순창군 금과면 연화리
▲ 장판개 거주지
순창읍에서 24번 국도를 타라 광주방향으로 7km정도 가면 금과면으로 들어가는 730번 지방도와 만난다. 730번 지방도를 따라 2km정도 들어가면 금과면소재지에 이른다. 초입에서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언덕을 넘어 1km쯤 들어가면 연화리가 보인다. 지금의 마을회관 자리와 회관 왼쪽길을 따라 난 언덕 끝 집이 장판개 명창이 살았던 곳이다.
장판개 명창(1885∼1937)은 송만갑에게 사사하였고, 처음에는 송만갑 명창의 고수역할을 하다 수년간의 독공으로 명창반열에 올랐다고 전해진다. 전남 곡성군 옥과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나, 장판개명창의 이력을 소상히 기억하고 있는 최기학옹(80)에 의하면 곡성군 겸면 출신이라한다. 아들인 장영찬 역시 판소리 명창으로 활약했으며, 부인 김씨는 4개로 구성된 금과면의 당골판 중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장판개 명창의 묘소는 연화리 마을 뒷산에 있다.
사진에 보이는 집은 현 거주자 이봉래(63)씨가 다시 지은 것이다. 이 집에서 제자들을 몇몇 데리고 와서 밤낮 소리를 가르쳤다 하니, 1920년 이후 서울에서의 활동을 접고 배설향을 비롯한 이들과 함께 소리를 연마했던 곳이 이 집인 듯 하다. 3년 전 이곳을 찾았을 때는 당시 명창이 거주했다는 방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한 5년간 방송국이고 뭐이고 뻔질나게 사람들 드나들드만, 일부러 고치지도 않고 기다리기만 하다 인자 지어부렀소. 속이 얼마나 탔는지…. 옥과인가 어딘가 거그가 되야부렀다 합디다.
인자 속 시원하요.” 이봉래씨의 이야기는 어쩌면 한낮 눈요기와 이야기 거리를 찾았을지 모를 속내를 질타하는 듯 하다.
▶ 강도근 거주지 - 전북 남원시 향교동
▲ 강도근 거주지
남원시내 향교동 오거리에서 남원경찰서를 지나 축천교를 건너 남원 KBS 방향으로 가다보면 왼편에 향교가 있다. 향교를 바라보고 왼편 아래 골목길을 따라 북쪽으로 250m 정도를 오르면 산중턱에 이층집이 보인다. 향교동 547번지, 이 집이 강도근 명창이 타계하기 전까지 거주했던 집이다.
강도근 명창(1918∼1996)은 남원시 향교동에서 태어났다. 박중근, 김정문, 이진영, 유성준, 송만갑, 임방울, 박봉채에게 사사하였다. 판소리 다섯바탕을 익힌 후 여수, 목포, 이리 등을 다니며 소리선생을 하였다. 김정문-김영운에 이어 김영운 사후 1975년부터 남원 국악원의 소리선생으로 지역의 소리전승에 크게 공헌한 바 있다.
강도근 명창은 고향을 고집하며 살아온 농민적 심성의 소유자라고 한다. 그래서 그의 소리에는 서민적 체취가 물씬 묻어 있으며 서민적 취향의 소리를 부른 서민적 소리꾼이었다 한다.
생전에 명창과 이웃하던 이웃들에 의하면, 그는 늘 편안한 동네 아제였으며 민초들의 틈바구니에서 함께 숨쉬는 소리꾼이었다. 언덕빼기를 내려오는 길 한마디가 꽂힌다. “지금도 그양반 소리를 들으믄 살아있는것만 같고 그러요. 우리랑은 ‘아제아제’하고 지냈는디….”
판소리 명창의 자취를 찾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몇 가지 기초자료와 단기간의 답사를 통해 당시의 정확한 행로를 찾기는 무척이나 어려웠다. 또한 이 글에서 언급한 내용이 사실과 다른 내용이 있을지 염려가 된다. 이런 어려움은 판소리 광대들이 받았던 사회적 천시와 무관하지 않다. 소리판을 휘어잡는 카리스마와 화려한 영예는 그 자리 뿐이요, 냉대와 천시가 있는 삶터를 떠나고 그의 후손들은 선뜻 그의 선친의 이름자 대기를 꺼려했던 것이다.
장자백 명창의 고향이자 묘소가 있는 남원시 주생면 내동리에서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찾지 못했다. 송동면 태동마을에서 이화중선 명창의 흔적을 찾지 못하고 돌아서는 길에 자꾸만 떠오르는 한마디가 있었다. “광대의 밥그릇의 반은 눈물”.
1)* 이 글은 다음의 자료를 답사를 위한 기초자료로 활용하였으며, 본문에서 인용처는 생략하였다.
1. 이석홍, 『남원의 문화유산』(남원:남원문화원, 2001)
2. 김기형, “동편제 명창과 남원 판소리의 전통” 민속음악자료집 제2집『음반으로 보는 남원동편소리의 전통과 세계』(남원:국립민속국악원, 2002)
3. 최덕원, 이경엽, 김혜정 공저, 『동편제 판소리의 연원과 현장』(구례:전라남도 구례군, 1994)
첫댓글 이글은 펌글이 아니네요~~~직접 다니시면서 찍은 사진을 정리하신건가요???
머지 않아 고향에 갈 기회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때 운봉 명창 유적은 새로이 정리 하겠습니다. 밤 새 관련 글을 찾으로 다녔더니 해롱해롱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