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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기의 이정표를 세운 김준권의 판화
- 법고창신(法古創新)한 장인의 길-
1 ‘민족 전통’은 죽지 아니 한다
나는 김준권이 판화 작업을 한지 20여년 동안 수차례 전시회도 불구하고 단 한차례 - 그것도 80년대에 발표되었던 홍선웅, 유연복, 김준권의 3인판화집(‘92년)에서 쓴 발문 이외에- 개인적인 작가론을 몇 번의 약속을 어기며 미루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물론 글쓰기의 게으름 탓이기도 하다. 이 같은 게으름의 낭비는 여러 가지이지만, 내 스스로 정답을 찾지 못할 때 멈칫거리며 어떤 영감의 계기나 맥락이 보일 때까지 기다린다. 좋게 말하여 생각을 다듬는 시간이라고 할까?
그런 탓에 나는 지금껏 내생각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단1권의 책도 내놓은 적이 없다. 있다면 여기저기에 발표한 글들을 모은 평론집 한권 밖에- 내가 아는 능력은 이건 두고두고 음미할 좋은 책이며 저건 헛소리를 하는 불쏘시게감 이다는 정도는 판단한다. 대부분 생각의 뿌리나 핵심이 없는 글, 특히 포스트모던 이후 유행한 몇몇 서양학자들의 중심적 사상 개념 언어, 키워드를 빌려와서 마치 자기 것처럼 써먹고 현대를 대변하는 척하는 사이비 지식인을 나는 불신한다.
21세기 들어와서 우리가 사는 세상 판도에서 벌어지는 예술의 상황은 중심의 상실이라고 요약할 정도로 혼란과 방황의 연속이다. 이를 기존 예술의 위기로 귀착되는데, 이를 세계화 추세의 당연한 현실변화로 받아들이는 아방가르드 아티스트 및 이론가들은 새로운 창조를 위하여 ‘민족’이니 ‘전통’이니 하는 용어는 시효 소멸한 것이니 폐기하라고 말한다. 소위 ‘신자유주의’ 태풍이 이 땅의 예술 판도를 몰아치며 뿌리를 흔들고 있다. 한때 잘 나가던 한국화가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 있고 전통문화재를 지켰던 장인들은 끼니조차 힘든 것이 현실이다. 70년대 한국 모더니즘은 그 뿌리의 바탕이 없는 허위의식에도 불구하고 ‘새로움’의 기치를 들고 성황을 누린 것은 권위문화의 제도적 용인과 투자가치를 노린 수요층의 경기 호황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와 같은 수요층마저 사라진 모두 한배를 탄 운명이다.
어디 예술인만의 생계 위기인가? 세계화를 내세운 ‘신자유주의’의 더욱 천박해진 자본 바람은 ‘빈익빈 부익부’라는 양극화 현상을 심화시키는데, ‘자본이 커질수록 가난도 커진다’는 법칙을 현실 체감하고 산다. 민주주의라는 외형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7,80년대와 다름없는 구조적 모순이 내재화되어 있어 자본이 권력을 조정하며 도시화된 예술문화도 이런 틀의 올가미 메여 있다는, 이런 사실을 외면하고 표피적으로 세계화에 동참하는 예술인들은 또 다른 사이비에 불과하다.
한국의 모더니즘과 민족, 민중주의는 그 ‘새로움’의 목표 지향은 달라도 그 나름의 논리가 있어서 비평가들이 출현하여 왕성한 활동을 벌였었다. 제법 수입도 들어왔다. 그러나 지금은 눈을 씻고 봐도 비평가의 존재가 없다. 그 ‘세계화’를 정론화 할 수 있는 그 새로움의 논리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민중주의가 그 후반기에 사회주의 진영의 논리를 차용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진영의 몰락으로 ‘민중’은 용도 폐기되고 깃발을 내리었다.
나는 그 같은 외부적 원인보다 예술을 사회과학의 개념이나 원리로 해득하려는 원천적 인식의 오류, 우리 자신의 내부 원인에 있다는 것을 수차례 밝힌 바 있다. 예술의 현상은 사회과학으로 설명할 수는 있어도 예술 본연의 생명 활동, 창작 원리의 근거는 결코 아닌 것이다. 이 점을 민중예술 운동가들이 망각한 것이다.
직업이 없는 예술가들이 배고프기는 일반 실업자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예술창작이 배고픔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도 목적도 아니다. 따라서 실업의 구제사업 처럼 예술인을 보호 육성하는 것은 또 다른 국가제도라든가 사회적 공동체의 목표이다. 그것이 민족이나 전통의 가치 포기는 아니다.
한때 ‘민족’ ‘전통’은 주의, 주장을 내세울 만큼 거창한 이념 목표를 지니었다. 그러나 주의, 주장은 변할 수 있는 정치 경제의 상황논리이며 보편의 지평(세계성)을 획득하려는 과정, 길일 뿐이다는 점을 나의 가장 오래된 논문 ‘ 민족주의와 예술의 이념’에서 (‘75년 발표) 밝힌 적이 있다. 지금 다시 읽어 보아도 크게 변한 것이 없다. 지금 와서 ’주의‘를 버리더라도 최소한 내게 있어 ’민족‘은 내가 한국말을 하게 된 내 아이텐티티를 내세울 수 있는 유전인자이며 ’ 전통‘은 나의 예술 사상 그 원천을 찾아내는 근거이다. 따라서 우리말은 민족의 유대 감정을 전달하고 공동체 구성원임을 확인하고 소통시키는 울타리이다.
해외여행을 하다보면 우리말을 모르는 이민3,4세대를 만나게 되는데 결국 민족의 구성원으로써 사라지고 만다는 안타까움을 접할 때가 많다. 정부의 교육정책은 세계화의 일환으로 초등 교육부터 영어습득의 광풍을 격려하고 아예 조기 유학으로 빠져 나가는 추세가 늘고 있다. 날로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우리말의 퇴화 현상, 이를 부추기는 지식인들에게 민족은 폐기용도일지 모른다.
일제 말기에 조선인에게 조선말 사용을 금하고 일본어를 강제 사용하도록 하여 내선일체를 시도하였던 식민지 정책과 지금의 차이는 무엇인가? 강요된 타율성보다도 무서운 것은 자발적 동화이다. 개인적으로 살기위한 방법이고 국가적으로 선진대국에 들어서기 위한 세계화- 즉 다시 말해 제동 장치가 없는 현실자본주의 체재의 적응, 생존방식이자 국가 경쟁간의 조건반사적 용어가 세계화인 셈이다.
이 같은 자본 중심의 현실 앞에서 사상가라고 자처하는 지식인들은 이를 눈감고 미끄럼 타기를 할 것인가 아니면 ‘노’ 라고 말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할 것인가 따라서 그 사상의 길목, 넘어갈 분수령이 달라진다. 이름을 날린 세계의 현대 사상가, 석학들의 난해한 저서를 독파하면서 그가 어느 길목의 해답을 내리고 있는가 판별한다면 말장난으로 치장된 관념론자인지, 혹은 안티자본을 설파하는 개혁, 혁명주의자인지 알 수 있다. 물론 그 중간 노선으로서 생태주의 철학자들도 있다.
이런 점에서 노자에게 감명 받고 동양사상의 대중화에 앞장 선 김용옥이나, 동학의 생명사상으로부터 단군신화까지 뿌리를 캐는 민족사상가 김지하도 언어의 미혹에 빠진 관념론자이다. 모두가 핵심적인 자본주의 현실 문제를 비껴가기 때문이다.
근대 서양의 마르크스. 엥겔스 같은 사회주의 사상가들이 지평선을 열었으나 현실적으로 실패한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상식이다. 그러나 실패하였다고 문제가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다. 온갖 흥행하는 종교, 신학도 그 답을 정면 회피하는 한 모두 헛것일 수밖에 없다. 예술은 이에 대한 감성적으로 대응하는 표현 방식이다.
예술인은 자본의 현실 공간- 문명 도시 혹은 시골이라는 문명의 외곽지대에 사는 사람들을 그려나감으로써 긍정과 부정의 물음을 제기하고, 아니면 산수 같은 큰 자연의 경관, 혹은 세세한 자연의 사물을 묘사함으로써 인간사로부터 초연한 태도를 보여주려 한다. 우리는 후자의 예술 유형을 서정의 세계, 순수예술이라고 이름짓는데 나는 그것이 우리 예술의 특질이며 변할 수없는 전통이라고 본다.
다시 말하면 예술의 원천이 자연에 있으며 자연의 뿌리를 떠나 예술이 살 수 없음을 본능적으로 표출하는 것, 그 같은 감정, 사유가 한국 나아가 아시아 예술의 죽지 아니한 전통의 실체인 것이다. 서정(lyricicm)이라는 용어는 서사(epic)에 대응한 협소한 개념이기는 하지만, 우리 인간과 자연 사물 간에는 정감의 교류, 상호 소통하는 유정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믿음은 동양식으로 말하면 하늘 땅 사람은 본래 하나이다 (천지인 일체사상)는 것을 함축하는 것이다. 그것은 원시예술 -최초의 인간신화와 더불어 시작하였던 불변의 진리인 것이다. 자연의 존재가 불변하는 것처럼-
문명사라는 것은 인간들이 지구공간 안에서 자신의 생존 투쟁을 기록하고 있는 반영물이며 오늘의 자본, 기술문명에 오기까지 역사적으로 진화, 진보라고 생각한다.
이 같은 진보의 변화는 미래의 어디까지 지속할지 아무도 모른다. 때로는 진보가 막히면 ‘ 새로움’에 해당하는 개념의 언어들을 창안하여 시대의 변화에 맞는 사고나 행동 양식을 제공한다. 그것이 지금까지 본 서양사상가들의 출현이다. 그러나 그것은 서양식 틀거리, 패러다임이며 노자의 어법을 빌리자면, 반자연적 인위적 것에 불과하다. 서양에서 자연의 의미는 기독교 성서가 말하듯이 인간이 지배해야할 정복의 대상이자, 투자가치가 있는 개발의 대상이다. 이들은 인간이 자연 안에 있으며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동양적 자연관을 가저본 적이 없다. 자연의 실체 개념이 없다.
인간의 이야기들 - 그리스 신화의 영웅담이나 성서 속의 인간들만 그려온 서양예술이 르네상스시대에 처음 ‘풍경화’라는 것을 선보이는데 인간의 시야 속에만 보이는 자연일 뿐이다. 함축하여 원근법적 투시 그림인데 이들은 ‘ 과학적 승리’라고 자찬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근대 미술교육 속에 깊숙이 박혀 있다
이 같은 과학적 승리는 자본의 축적과 기술발달이 맞물리면서 지구 자연의 땅과 땅속까지 파먹어 가면서 무한자본=무한개발로 확장되고 있는 인간 탐욕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지구환경의 오염, 심각한 생태계 파괴가 인류의 자멸을 초래할지 모른다는 종말론적 경종을 생태론자들이 제기하고 있다는 사실은 다 아는 상식이다. 그럼에도 자연과의 공존의 지혜를 이미 동양이 말해왔음에도 새삼스럽게 들리는 것은 과학으로 입증하고 현실적으로 위험신호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으로 탐욕의 화신인 인류의 종은 인간이 태어나기 이전 수십억 년 전에 출현하였다가 무슨 이유인지 알 수없이 전멸한 공룡-공포의 이미지로 남아 있는 존재와 닮아 있다. 인류는 지구상에 현존하는 또 다른 공룡일지 모른다. 다만 희망과 공포라는 양면성을 지닌 자기반성적 공룡이라는 점이다.
만물 위에 군림하는 인간중심적 사고가 아니라 자연의 만물 속에 인간이 있다는 사고 즉 천.지.인 일체사상, 그 같은 예술적 감성이 바로 우리의 전통인 것이다.
이것을 어찌 시효 소멸한 폐기된 용어라고 가볍게 말할 수 있는가?
내가 장황스럽게 새삼 ‘전통’ 논리를 펼친 것은 확고한 이론적 사상 토대를 다지기 위한 것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시적이든 모든 작가들은 창작의식의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 뿌리가 전통의 맥락을 가진 것인가, 아니면 수입되고 해외 유학에서 배운 흉내인가에 따라 가치세계가 달라진다. 한때는 파리나 뉴욕화단에서 배우고 평가 받으면 한국화단에서 우위를 점한 것처럼 착각하는 모더니즘시대의 풍토가 있었다. 나는 파리나 뉴욕이 세계예술의 중심이라고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것은우리에게 필요하거나 무용한 지식 정보에 지나지 않으며 결코 그것이 우리의 예술은 아니다. 중심은 도처에 있다. 뉴욕이나 파리를 모르는 척박한 아프리카 원주민 예술도 중심이 있다. 문명의 선, 후진이 있을지 모르나 예술에서는 선, 후진이 없다.
예술은 살아가는 삶의 정신 자세, 그 중심을 붙잡으려는 영혼의 태도이다 . 그 중심의 맥락을 유지하는 것이 내가 강조하려고 하는 ‘전통’이다
이 같은 전통 위에 김준권 판화 세계가 서있으며 한걸음 나아가 열러있고 그 열러있음은 기존 판화에 없었던, 내가 미처 알지 못하였던 표현방식의 진일보이며 그것이 오랜 각고 끝에 성취한 장인정신의 발로이다.
2 민중판화의 한계와 다색목판화 찾기
김준권 목판화의 출발은 ‘80년대 역사의식과 함께 하는 점에서 기존 화단의 판화가 출발과 다르다. 기존 판화계는 모더니즘 유행과 더불어 동판, 석판, 실크 스크린 등
서양 판화기법이 상당히 소개되어 있었고 극히 소수의 목판화가는 대세에 밀려 있었다. 우선 목판은 재료나 기법면에서 근대적 기술이 아닌, 초등생도 할 줄 아는, 한물간 소박한 전통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80년대 민족 민중작가들은 이 버려진 전통의 소박함으로부터 엄청난 창작의 에너르기를 발산하였다. 작가들은 당시 군부에 맞서서 민주개혁, 혁명의 운동을 선동화하고 대중의식으로 소통, 확산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일회적 창작물인 일반그림의 전시로는 역부족이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대량생산과 대량보급,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 누구나 할 수 있고 어느 집회 장소에서나 노래와 굿판처럼 기동성을 발휘하는 매체가 바로 판화라는 점을 찾아내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노신의 판화운동이나 ,멕시코 판화 등을 상기시키는 영향 이론이 있었지만, 자유롭지 못한 출판물에 대한 대안적 선택이고 판그림이라는 사실이 어느 영향도 아닌, 저절로 형성된 산물이었다고 본다.
무엇보다 그 같은 판화는 누구에게나 나누어 줄 수 있는 작은 재화적 선물일 수 있다는 매력이 운동매체의 총아로 등장하였다. 특히 민중판화가들은 누구나 손쉽게 표현의 자유, 그 즐거움을 보여줄 수 있다는 시민의식을 자극함으로써 시민판화운동은 광주를 시발로 하여 전국의 대학가로 삽시간에 번지는 들불이 되었고 나는 그 덕분에 판화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강연자로서 부지런히 발품을 팔았다.
더욱 대학을 갓 졸업하고 운동에 뛰어든 젊은 민중작가들은 부담 없이 한번쯤은 자신들의 생기발랄한 재치, 익살, 풍자가 넘치는 판화창작에 참여하였다고 본다. 이점에서 선두주자이었던 오윤 판화의 매력은 후배들에게 자극적 계기가 되었으며 그 분야에 재능 발휘와 대중지지의 선호도가 높은 전문 판화 작가군이 나왔다.
홍성담, 이철수, 홍선웅, 유연복, 김준권, 김봉준, 이인철, 정비파, 남궁산, 정원철 등등은 판화가로서 각기의 개성과 입지를 굳히었으며 그중의 몇몇은 지금도 자기 전문성에 정진중인 줄 안다. 우선 이들의 판화 작품은 단체 운영의 자금 확보나 다른 사회단체의 후원금 조성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알고 있으며 나 역시 빈 몸으로 ‘87년 해외 운동권을 순방하면서 이들이 기증한 판화작품들을 선물도 하고 팔기도 하면서 여행의 궁기를 면하였던 사실을 고맙게 생각한다. 다시 이 지면을 통해 감사 드린다.
윤이상 선생의 칠순잔치가 로스앤젤로스에서 해외운동인사들의 조촐한 모임으로 치뤄 졌을 때 나는 김준권의 <통일염원도>-남과 북의 사내가 얼싸안고 한반도 지형을 그린 그림을 기증하였더니 무척 기뻐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찌보면 ‘80년대 예술운동은 대중홍보나 인지도에서 이 같은 판화 매체를 활용한 미술패들이 문학이나 여타 장르 패보다도 중심에 서있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80년대 판화는 표현기법, 완성도면에서 선각 위주의 목판이지 전통적 다색 목판이 아니었다. 오 윤의 채색판화를 비롯하여 거의가 후칠한 것이지 다색의 판목을 거듭하여 찍어내는 판화기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었다. 작가들에게는 숨가쁘게 돌아가는 현실 상황에서 다색 기술에 매달릴 시간의 여유도 없었고 날카로운 칼맛과 선명한 흑백의 대비로 시대의 명암을 들이대는 흑백판화만으로도 충족될 수 있었다. ’90년대에 시대가 진정되면서 흑백의 한계를 느끼고 다색으로의 전환을 절감하지만 이를 참고할 수 있는 자료며 기술보유자도 전혀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회화사의 미급한 대목을 중국, 일본의 그것과 비교하여 되짚어 보지 않을 수 없다. 동양화는 진채화로부터 출발하여 수묵화와 병행 발전한 사실을 청자와 더불어 투명하고 섬려한 채색미를 송대 화록에서 조차 극찬한 고려 불화를 실물 확인할 수 있고, 그 전통이 조선 중기 탱화까지 이어짐을 엿볼 수 있다. 후기로 넘어가면 수묵화의 전성기로 이른바 진경, 사경산수화 등도 모두 수묵채색화이다. 엄밀히 진채기법과 수묵채색 기법은 다른 것으로 종이와 비단의 차이 및 안료의 재료 성질부터가 달리한다. 조선 후기 탱화의 칙칙하고 불투명한 채색은 수묵 물감, 단청물감의 덧칠이며 투명하게 발광하는 석채로서 진채가 아니다. 다시 말해 진채의 안료 개발이 단절된 것이다. 그것은 흑백의 나전칠기 이외에 다색칠화가 발전하지 못한 맥락과 같다.
한국적 멋과 흥이 어우러진 민화의 다색화는 우리만의 색채 특성을 엿보게 하며 조선조 대중 수요의 요구에서 출현하지만 그것이 정작 다색판화로 발전하지 못한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중세기 중국의 명대 판화는 10도 이상 색판을 사용한 다색 판화가 유행하였고 청대에는 무려 17도까지 색판 기술을 발전시키어 우리에게 널리 교과서로 알려진 흑백 영인본 중국‘ 개자원 화보’의 경우 원래는 화려한 다색출판의 화집이었다. 일본 에도시대에 일본적 민속화라 할 수 있는 ‘ 우키요에(浮世繪)는 처음부터 다색판화였으며, 청대 판화기술과 맞 닿아있다. 이 같은 다색판화는 일본 상품의 포장지로 유럽에 소개되어 인상파의 색채 변화에 영향을 끼친 것이 다 아는 상식일 터이다.
같은 시기에 우리 민화는 3,4도 정도의 다색판화가 있었다는 연구보고가 있으나 그다지 활발하게 발전하지 못한, 즉 다색판화가 싹트지 못한 원인을 냉정하게 고찰해보아야 한다. 다색 판화가 상업적 수요에 따른 창출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에게는 기술축적과 자본을 가진 장인집단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외에 다른 설명할 길이 없다.
중국은 전국적 네트워크 조직망을 가지고 각지의 판화공방에서 수요공급을 이루어냈고, 일본의 ‘우키요에’ 작가들은 유파들끼리 사제관계를 형성하여 시장 독점을 다투었다. 그래서 중국이나 일본은 저마다 노하우를 간직한 진채물감, 판화물감을 개발하고 오늘날 시장 판도를 양분하는 전통을 지속하고 있다. 지금도 우리는 이들 값 비싼 제품의 수입 산에 의존하고 있으며 대학의 미술교육에서 진채화나 다색목판 실기는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를 가르칠 교수가 없기 때문이다. 중국은 비직업적인 농민화에서도 다색목판을 내놓고 있을 정도이었다.
우리의 물감마저 부재한 현실에서 목판화의 한계를 느낀 작가들이 대부분 중도하차 하게 되었고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에 겨우 몇 작가들만이 각자의 방식대로 전통의 유지에 고심하고 있다.
김준권도 그 중의 한사람이다. 심사숙고하던 그는 일본의 판화 공방도 찾아보고 중국도 여행하더니 때마침 민예총과 심양의 루쉰미술학원이 문화교류의 결연을 하게된 계기로 ‘94년 홀연히 유학길을 떠났다. 내가 민미협 식구들과 백두산 여행길에 루쉰미술학원에서 김준권을 만난 것은 이 때였다. 루쉰미술학원은 미술전문의 단과대학이었다. 교수와 직원수가 엇비슷하고 50명이 넘는다는 누드모델도 직장이 보장되는 직원 신분이었다. 한 점의 누두화도 볼 수없는 북한 그림에 비하여 누드의 포즈를 대담하게 표현하고 있는 학생들의 작품을 둘러 볼 때 변화하고 있는 중국 사회주의 예술을 실감하였다.
외국인에게 특별히 비싼 기숙사비가 서울과 맞먹는다는 그의 설명을 들으며 홀로 언어소통도 힘든 곳에서 버티고 있는 인내심은 좀처럼 개방하지 않는 중국 색판화의 노하우를 캐겠다는 집념이었을 것이다. 중학교사이었던 그는 전교조 결성 참가 파동으로 해직되어 무척 어려운 형편이었다. 80년말 대학에 복직한 나는 전국 대학교수 전교조에 참가하여 목소리를 냈지만, 힘없는 교사들에게만 철퇴를 내리었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해직교사를 돕는 후원회비를 매달 내는 일이었고 소장했던 판화들을 기증하는 일이었다.
이 무렵부터 김준권 판화세계는 내용도 기법도 완전히 80년대와 달라지고 있었다. 여기저기 남도와 강원도 지방을 여행하면서 찾아낸 실경산수들이 많아 진 것이다. 판의 선각은 날카롭고 거치른 칼맛의 힘 대신에 가늘고 부드럽고 곡선이 많은 붓맛을 내고 있으며 투명하고 맑게 빛나는 색채를 선보이었다. 그토록 원하던 다색판화를 실현한 것이다.
치켜 올려보는 고원시법으로 처리한, 눈이 푹 쌓인 태백 탄광지대의 판자집과 힘든 짐을 지고 가는 노동자의 인물 점경, 그 설경산수에는 치열했던 의식의 잔영이 엿보이기는 했으나, 그 같은 주제의식보다 하얗게 눈부신 차가운 설색의 미에 눈길을 끌게 한다. 하늘로 솟는 검푸른 소나무들이 늘어진 전경 사이로 녹색의 들판이 보이고 원경에는 노을빛 같은 둥그런 황토산이 그려진, 남도산야를 연상시키는 평원시법의 산수판화는 ‘향수’의 노랫말 같은 고향을 감싸는 부드럽고 넉넉한 마음이 다색판 맛으로 찍혀 있다. 붓으로 칠한 채색이 아니라 판이 찍어낸 채색의 실물 감상을 처음 한 것이기에 내게는 적잖은 충격과 감흥이었다.
작가는 관객이 작업과정의 수고로움을 알아주기를 더 원한다. 특히 겹쳐 찍는 판화의 공정과정을 잘 알 턱이 없다. 나 역시 식별이 힘들다.
‘ 판수를 몇 번 올렸는지 맞춰 보세요?’ ‘ 글쎄, 4, 5도 쯤 되는가 ’
‘ 이제 시작 단계이에요. 앞으로 더욱 올려 볼 생각이고 - 쉬운 것 같아도 1미리라도 어긋나면 실패에요.’
김준권은 진천의 어느 시골구석, 폐교가 된 학교 건물을 빌려 판화공방을 차리었다. 우리는 한동안 만나지 못하였다. 나는 시골에 정착하기 위하여 물색을 하다가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해남의 ‘북쪽 땅 끝’이라 하는 화원면의, 작은 마을을 선택하였다. 농가를 사서 허물고 내가 설계한 목조 이층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짓고 나서 그를 초대하였다. 그는 원래 해남에 인접한 영암에서 유년시절은 보냈다고 한다. 나중에 그의 작품 목록을 보니 뒷산에서 내려다보이는 시선으로 포착한, 우뚝 선 내 집과 바다 풍경이 눈부신 설경으로 그려져 있지 않은가? 내게는 추사의 ‘세한도’를 방불케 하는 정겨움을 보여 준다. 제명이 <화원반도에서...>이었던가?
한 2년 지나서인가, 진천군 백곡 호숫가에 새로 터잡은 곳에 판화공방을 지었다고 알려왔다. 마침 영동에 내 친구 최하림 시인이 살고 있어, 부부 동반하여 찾아가 보았다. 마을과 떨어진 으슥한 산기슭을 등지고 크고 튼튼한 나무집이 버티고 있다.
외양은 소박하고 거칠지만 살림공간에 비해 작업공간을 위주로 지은 내부의 모습은
판화작업대 하며 판목, 프레스기, 물감재료, 판화보관함 등 그의 깔끔한 성품대로 질서정연하게 구획되어 있어 완벽하게 갖춘 전문가다운 공방 그대로였다. 집을 짓는 것이나, 이 같은 내부시설의 목수 작업도 스스로 해내는 손재주와 부지런함을 그는 지니고 있다. 바깥 정원에는 골짜기에 흐르는 물을 끌어들여 작은 연못을 만들었고, 두어 마리 오리가 헤엄치며 노니는데 개가 자주 공격하여 같이 키우기 힘들다고 걱정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유쾌한 하룻밤을 보내었다.
3, 자연으로 파고든 이철수의 선시(禪詩) 판화
작가들에게 가장 부러운 것이 이 같은 작업공간을 갖는 것일 것이다. 또한 이들의 작업공간을 보면 작가들의 성격도 엿 보인다 내가 좋아하는 후배 작가들 중에는 특히 황재형과 이철수를 빼놓을 수 없다. 내가 실천하기 힘든 용기를 보여준 점이 존경스럽기 조차하였다. 민중운동의 열기가 서울 인사동 중심으로 복작거리며 맴돌 때 황재형은 밑바닥 삶을 체험하는 광부가 되겠다고 태백의 탄광지대로 숨어들어가 소외된 삶의 현장을 생생하게 담아내어 우리에게 충격을 주었으며, 이철수는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그림을 그리겠다고 시골을 찾아 떠났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태백과 제천에 식구들을 데리고 정착한 이들의 고생은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이들이 살고 있어서 나는 강원도 여행길이 즐거웠다. 풍광을 즐기기 보다도 이들이 사는 모습과 작품 구경이 여행의 우선 목적이었다. 90년도 중반인가 살림이 조금 폈는지 황재형이 화실을 직접 지었다고 자랑스러워하였다. 벽돌과 시멘트 블록을 조합한, 80평이 넘는 3층 높이의 대형화실의 단독 집. 시원하게 터진 공간 한 켠으로 부엌과 침실이 모여 있고 나선형 계단을 따라 오르내리는 천정 가까운 다락방은 작은 서재로 꾸미었는데 내외부 공간의 전망대 같았다. 벽면에는 그의 힘찬 필치가 생동하는, 2천호쯤 되는 태백산맥의 웅장한 자태가 그러져 있다. 아래서는 올려다 보이고 위에서는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또 다른 태백의 자연을 끌어들인 것이다. 그렇게 큰 그림과 큰 화실을 나는 그때까지 본적이 없었다. 태백산간의 매서운 겨울 추위에 난방비도 많이 들어가는 덩치 큰 화실과 큰 부자 저택에도 걸 수 없는 큰 그림을 스스로 즐기고 구경시키기 좋아하는, 그의 큰 체구만큼이나 닮은 황재형의 성격, 비현실적 감각의 단면을 보여주는 화실탐방의 인상이었다고 할까?
제천의 이철수는 천정이 낮은 일반 농가에 살았는데 마당 가운데 아담한 크기의 판화실을 꾸미었다. 별로 돈들이지 않는 농가 창고식 바닥에 나무판자를 깐 공방이었다. 자기가 지은 쌀농사로 식량 확보를 든든히 한 다음, 틈을 내어 판화 작업을 하는, 중국 농민화가와 같은 생활 자세였다. 낮에 밭을 갈고 밤에는 그림 그리는, 주경야화라 할까? 우리에게 없는 농민화가의 모습을 첫 실천해 보인 것이다.
제천에 사는 동안 이철수는 80년대 운동 판화 성격을 깔끔이 버리었다. 선각은 장식이 사라진 절제된 형태이었고, 불가의 화두선 같은 발문을 대담하게 도입하였다.판각을 통하여 시와 그림을 결합하는 전통방식을 선호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중에 하나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마르크스를 만나면 마르크스를 죽이고> 그
유괘한 풍자 판화는 항간의 화제로 떠올라 작가의 오만, 건방진 태도로 오해하는 선후배 동료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것은 서양식 변증법도 아니고 이미 선종의 화두로서 나온 말을 다시 인용한 것에 불과하며 ‘죽이고 죽이고’ 를 거듭해야 예술이 새로 살아난다는 신화를 이철수는 체득하였을 따름이다.
그는 지식으로 알고 있는 노장사상이나 불교의 교리를 일상의 농촌생활에서 몸으로 체득한다. 스쳐가는 바람소리, 빗소리 떨어지는 꽃잎, 새의 날개 짓 등 흔하게 마주하는 자연의 하나하나에도 보고 듣고 느끼며 말을 주고받는 교감의 소통을 통하여 마침내 자연과 나는 하나이고 인간사의 모든 것이 하찮은 것, 색즉시공일 수 있다는 전통으로 회귀한 것이다. 내가 시골에서 땅을 파고 나무를 심으며 채소와 화초를 가꾸며 개똥과 인분으로 거름도 주면서 땀흘리고, 모기에 뜯기면서 알게 된 자연의 의미, 우리 예술의 뿌리에 대한 원천적 사고를 음미하고 있을 때 이철수는 경쾌하게 자연과 만나는 일상적 의미를 판화의 흥취로 풀어내었다.
그의 판각의 선은 더욱 간결해지고 응축되며 소박한 자연에서의 깨우침, 그 서정을 담은 새로운 단구, 짧은 말이 그림과 북장구를 치는, 쉽게 읽어내면서 새김질하게 하는 현대판 선시화(禪詩畵)라 할까? 기다린 듯이 대중들의 반응 지지도는 대단하였다. 전시장에는 북적거리는 인파로 늘 넘쳐났고 매번 전시판화는 동이 나게 팔리었다. 민중작가들 가운데 가장 인기 있고 잘 팔려서 시샘과 부러움도 샀다.
시세말로 가장 성공한 판화작가이었고, 신문에 알려지니 제천의 유명인사로 부상하였다.
나는 그의 판화가 2,30호 소품이어야 제격이고 제 맛이 나는데, 동일주제의 작품을 100호 크기로 뻥튀기한 것이 눈에 거슬리었다. ‘ 너무 욕심 부리는 게 아닌가? 너답지 않게’라고, 찔렀더니 ‘ 죄송해요. 주문자가 크게 그린 것을 하도 요구해서-’
대부분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최고의 값을 받기를 원하고 최고의 값만큼 자기 그림 가치도 올라가는 것으로 혼동한다. 그런 언쟁이 붙을 때마다 나는 프랑스 색채화가 B. 베르나르 작가의 유명한 일화를 소개한다. 주문자가 최고의 가격을 부름에도 사양하고 자기분수에 맞는 낮은 가격을 고집했던 일화- 돈에 현혹되어 자기 삶의 절제를 잃어버릴까 염려했던 태도. 우리의 작가는 얼마나 지켜낼 수 있을까?
언제인가 이철수의 홈페이지를 찾아보니 자신이 제작한 판화를 누구나 복제할 수 있도록 전부 공개하고 있었다. 저작권의 포기 선언 같은, 무소유의 경지로 들어섬인가?
그러나 한편 판화로서 회화적 접근, 그림의 쟁이적 수련은 정지되어 있는 셈이었다.
생활과 자연을 일치시키려는 태도에서 소박성을 일깨우는 자신의 판화는 여기까지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반면에 언어의 재기, 수다가 늘고 있어 삽화가 들어간 수필집을 내놓은 문인으로 변신할지 알 수 없게 한다. 한때 유명한 고승의 달마도나 김지하의 난그림이 그 이름값 때문에 인기를 끌었으나 아마추어 수준에 불과하다. 고상한 사상이 예술의 표현력을 답보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석가나 예수가 최고의 예술가이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이다.
4 왜? 수묵판화인가?
이 점에서 장인 근성을 가진 김준권과 다르다. 다색목판의 길을 연 그는 더욱 다색의 표현 기술 찾기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수직으로 서있는 나무들과 멀리 수평으로 뻗은 들과 산들은 , 혹은 넓은 늪지와 호수로 대신하는 평원시법의 구도는 되풀이 되고 있어 변화가 없는 단조로움, 정형화의 추구로 보이었다. 이의 불만을 지적했더니 ‘ 아니에요 구도나 형태의 변화를 시도하면 색채의 변화를 놓치기 때문에
일부러 구도의 단순화를 시도 했어요‘ ’ 아, 그랬었나‘
년도별로 발표된 판화를 놓고 유심히 비교하여 살펴보니 작가의 말이 이해되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내가 미처 모르는 판의 색채기법이 숨어 있었다. 처음에 굵었던 각선들은 점차 가늘어 지고 희미해지고 어느덧 사라지고 없는 것이 형태에 집착하지 않음을 보여준다는 의미일 것이다. 동양화에서는 이 같은 선의 무형태를 몰골화 북한식으로 단붓질이라 한다. 여기서 색채를 위에서 내려찍는(down) 방식과 밑에서 올라와 묻는(up) 방식의 2종류 형식으로 나누는데, 우리에게는 전자의 방식만 알려져 있지 후자의 방식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 작가들이 없기 때문이다.
중국은 서양에도 없는 후자의 방식을 수인(水印)판화-일명 물도장 판화라 하며, 판화기법의 정수로 치부한다. 유성잉크를 쓰는 서양판화는 프레스기로 위에서 내려찍는 방식뿐으로 , 수인은 색판을 밑에 놓고 그 물감이 한지 위로 부착하는 방식- 몇 번이고 반복하여 색감의 농도를 자연스럽게 일반 색채화 그것과 일치시키는 기술이 서양에는 없었다는 것이다.
북경의 류리창이라는 고서화를 파는 거리에는 수인판화를 판매하는 가게와 공방이 있어 외국인관광객들로 북적거린다. 나는 어느 외국인이 수집 소장한 수인판화를 ‘ 그림마당 민’에서 전시할 때 감상한 적이 있었다. 중국 대가의 작품을 모방한 것들인데 어느 것이 생그림이고 판화인지 식별하기 힘든 기법에 놀라면서 겨우 낙관을 보고 알았는데, 제백석도 자기 그림을 모작한 수인판화를 식별하기 어려웠다는 일화가 전할 정도이다.
각판과 인판 개념의 차이는 무엇을 말함인가? 선각에도 양각과 음각이 있고 필법과 묵법을 음양 대비로 나누듯이 판의 음양원리를 크게 구분지어, 각판은 새김이 있는 양판이라면 인판은 새김의 각이 없는 음판의 개념이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김준권은 수인판화라는 개념이 잘 이해되지 않음을 고려하여 다색판화, 목판채색, 채묵판화, 수묵판화로 구분지어 분류하고 있다. 인판은 그에게 있어 채묵/수묵판화를 의미한다.
그의 판화작품에서 판을 사용하는 도수는 동일하지만 어느 것이 다색판이고, 채묵판인지 얼핏 보아 구별을 어렵게 하는 것은 각선의 경계를 최소화하고 다같이 미묘한 채색의 뉘앙스를 표출하려는 작가 특유의 표현감 때문이다. 작품 ‘오름-나라말싸미’ ‘오름-0421’(2004년작)은 다색판화인데, 그 선각의 흔적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채묵판에 가까우며, 1999년작 ‘동강-바새마을’ 그림의 위쪽의 원경을 제외한 아래 부분에 묘사된 마을 집들은 분명히 선각 같은 데 채묵목판이다.
원본을 보아야 그 맛의 차이를 알 수 있는 것은 원판목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찍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점을 강조한다. 찍는 방법에 있어서도 각별한 장인의 비법이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김준권의 판화기법이다.
동양화 묵법에는 선염법이라는 묵의 번지기와, 적묵법이라는 묵의 겹치기, 내리 바르기가 있다. 그는 이를 수묵판화에도 활용하여 판수를 거듭하면서 번지기와 겹쳐바르기 같은 기법을 시도하는데, 많은 것은 한 판에서도 무려 4~5차례를 시도한다고 말한다. 그림은 일회적 창작품에 끝나지만, 판화는 동일 작품을 반복 생산하기 때문에 그만큼 오차가 없는 세심한 주의, 기술이 필요하다. 작품의 크기도 일반그림에 육박한다.
대체로 각판화는 새겨야하는 평면의 넓이 때문에 일정한 크기를 넘어서면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그래서 큰 작품의 제판은 매우 어렵다. 최근에 제작한 ‘ 산에서-0703’ 라는 제목의 수묵판화를 보면, 사람 키를 넘는 3폭의 산수 부분도로 한 폭마다 100호씩 합치면 300호가 되는 수묵판화인데, 지금껏 나는 그 같은 크기의 먹판화를 본적이 없었다.
판그림 자체도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큼 걸작이다. 짙은 적묵색으로 출발하여 연이어 산너머 산들이 파도치듯 너울대며 희미한 담묵으로 사라질 때까지 뻗어 있다.
구도는 근경의 양옆이 치솟아 U 자형인데 골짜기에서 내다보는 시선 같기도 하며 두 손으로 떠받들고 있는 자세 같기도 하다. 마치 그것은 신화적으로 인간의 어미인 산의 자궁에서 태어나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무한에의 동경을 담고 있다.
노자가 말한, ‘ 골짜기신은 죽지 아니 한다. 암컷의 자궁 문은 도의 뿌리이다. 만물은 그 뿌리에서 태어나고 다시 돌아간다’를 음미하게 한다함은 나의 지나친 해석인가? 물론 작가가 노자의 책을 읽고서 그 같은 시도를 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작가는 자신의 감성을 가지고 자연에 접근하고 그렇게 산과 물을 반복하여 그리다가 보면 어느덧 감성의 의미, 사상을 체득한다.
이 먹판그림은 군더더기를 모두 떨어낸 추상적인 관념의 산이며, 오직 먹물의 농담이 산들 따라 빚어내는 해조미, 조용히 숨 쉬는 듯한 산의 정태적인 모습을 통하여 명상으로 잠기게 하는 것이다.
초기의 김준권 판화는 인간 삶을 주제로 한 민중판화의 전형이다가 다색판의 실경산수로 들어서면 점경으로서 농가, 논밭의 들판, 앞뒤 동산의 솔밭 등 인간형태가 사라진 자취만 남기며 자연이 내뿜는 빛깔 표현에 심취한다. 호수의 물빛, 강의 물안개, 아지랑이, 노을빛, 밤하늘 등 변하기 쉬운 빛깔의 표현까지 끌어들이며, 일반 산수화와 다름없는 경지를 보여 준다. 판화의 채색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담묵이든 적묵산수이든 수묵산수의 맛이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채색의 자연은 생기발랄한 자연의 약동과 즐거움을 맛보게 한다면, 수묵의 자연은 침잠하는 내면적 명상으로 이끌어 들인다. 과거의 문인화가들이 수묵법을 즐기고, 전통 진채의 북종화에 비하여 남종화 우위논리를 전개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남종의 우위논리는 한국화 발전에 또 다른 폐단, 편시현상을 초래하였다. 근대화단을 왜곡시킨 이 같은 교조주의 맹신은 사실근거의 착오이자 이론적 공부의 미천함에서 온 것인데 그 자세한 논구는 여기서 생략한다.
아무튼 김준권은 북종과 남종의 경계를 오고 가고한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수인-수묵판화까지 개발하고 통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준권 판화세계에 대한 가치 평가는 차치하고라도 그가 우리 전통판화에 부실하였던 다색판화를 소생시키었고, 나아가 우리에게 부재하였던 수묵판화를 부상시킨 장인적 노력에 대하여, 우리 판화사의 전환기를 만든, 그 이정표를 세운 공로에 대하여 편견 없는 박수를 보내야 할 것이다. 오래 망설이며 그에게 답하지 못한 짐을 나는 벗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