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장효영선배님은,
동란회 전 회장님이시며, 현재 총동문회 장학위원회 위원장님이시며,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 앞에서 광제한의원을 개업 중인,
동문회와 후배사랑이 누구보다도 각별하신 장효영선배님의 검정고시 수기를 읽어봅니다.
혹시, 허리가 아프거나, 팔 다리가 쑤시거나, 몸이 불편한 친구들은 이 곳에 가면
치유의 자유를 누릴수 있습니다. 실력있는 한의사를 찿는 분만 가보기 바랍니다.
안 되면 되게 하라 장효영 한의원가문에서 태어난 나는 별 어려움 없이 유년시절을 보냈다. 학업에만 전념하면서 장차 과학자가 되어 발명왕이 되겠다는 청운의 뜻을 키우던 어린 시절이었다. 그러나 중학교1학년을 마칠 무렵, 나는 신경쇠약이란 병을 앓게 되어 심한 두통과 불안, 초조, 불면증으로 시달리게 되었다. 백방으로 치료하였으나 증세는 더욱 악화되어갔고 그런 와중에서 학업을 계속하고자 하는 나의 의지와는 달리 부모님과 형님들의 강력한 만류로 결국 학교를 휴학하기에 이르렀다. 학교를 쉬면서 계속 치료를 하였으나 병세가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점점 악화되어 가는 듯 하였다. 결국 나는 중학교를 중퇴할 수밖에 없었고 그 후 수년간 병마와 싸워야 하는 투병생활에 들어갔다.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심신으로 투병생활을 계속하자니 나는 그러한 상황을 마치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새에 대한 의욕을 완전히 상실한 체 막다른 골목에서 신음과 절규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그 시기에 할아버님께서 노쇠하신 몸으로 중풍을 오랫동안 앓고 계시다가 별세하셨다. 할아버님의 죽음에서 나는 인간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성, 즉 늙음과 병과 죽음을 매우 가까이서 지켜보게 되었다. 나는 병상에서 이 모든 것들을 지켜보면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진정 해야만 할 일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병고로 신음하는 저 수많은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병마를 퇴치하는 의사가 되는 것, 그것이 진정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바로 이것이다!’라는 생각이 탁 떠올랐을 때 내 안에서는 무엇인가 형용할 수 없는 뜨거운 기운이 용솟음쳐 오름을 느꼈다. 그리고는 새로운 생명의 밝은 서광이 내 심신에 충만해오면서 나는 그토록 오랫동안 싸워오던 병마를 용감하게 떨치고 일어날 수 있었다. 나의 운명의 지침이 되돌려지던 순간이다. 그 후 나는 심리적인 요법으로 정신력을 강화하면서 체력을 키우기 위해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했다. 다행히 오래지 않아 나의 심신을 강철같이 단련되어갔고 체육관에서의 나의 기합소리는 날로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체력이 회복되자 나는 아버님 밑에서 한의학을 공부하면서 의술을 하나하나 전수 받았다. 그렇게 해서 병약하기만 했던 나는 군 입대 징병감사에서 당당하게 갑종 판정을 받을 정도로 강인한 체력의 소유자가 되어 있었고 1972년 최고의 전투력을 과시하는 특전사의 특정용사로서 군복무를 시작했다. 나는 남들이 다 가기를 두려워하는 특전사에서 군 생활을 보낸 것이 더없이 자랑스럽다. 그때 그 시절 피눈물 나게 악전고투하며 훈련받던 때를 생각하면 나는 무슨 일이라도 해낼 수 있는 힘이 용솟음치고 어떤 어려운 난관이라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용기가 솟아오른다. 군대에서 배운 ‘안 되면 되게 하라’는 구호는 내 인생의 좌우명이 되었고 군복무를 마치고 나서 온갖 어려운 일에 부딪칠 때마다 난관을 극복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군복무시절, 나를 그렇게 아끼고 사랑해주시던 아버님께서 병환으로 돌아가셨다. 그러자 우리 집안의 가세는 내리막길로 곤두박질쳤고 집안형편은 날이 갈수록 궁핍해져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보니 한의사가 되어야겠다는 나의 꿈은 실현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렇지만 나는 그 꿈을 포기하지 못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중단했던 학업을 계속하여 내 꿈을 이루고 말리라고 굳은 결심을 한 후 제대복을 입은 채 바로 상경했다 서울로 오자 나는 직장을 다니면서 학업을 계속해보자는 생각으로 종로 한의원 가를 헤매면서 직장을 찾았다. 마침 어느 한의원에서 약제사를 구하고 있어 쉽게 취직이 되었다. 인연이 되려고 했는지 낯선 사람을 쉽게 쓰지 않는 한의원가에서 그 주인댁은 나를 선선히 받아들여준 것이다. 취직이 되자 나는 시골집으로 내려가 우선 입을 옷 몇 벌과 책 몇 권을 챙겨 올라왔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낮선 서울 생활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그 한의원에서 숙식을 하면서 낮에는 일하고 퇴근 후에는 침술학원에 다니며 한방의학에 대한 공부를 계속하였다. 또한 70여세가 되신 원장님으로부터 새로운 의술을 틈틈이 배우고 익히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배에 가스가 가득 차서 북처럼 부풀어 오른 환자가 있어 내가 배운 침술로 치료를 해주었더니 금세 스르르 가라앉는 것을 보았고, 허리를 다쳐 통증으로 쩔쩔매며 들어온 환자가 침 몇 대 맞고 즉석에서 걸어 나가는 것을 보고 나 자신도 놀라워하며 신비로운 동양의학에 날이 갈수록 매료되어갔다. 이렇게 3년여를 이곳에서 있었는데 한약업사 시험에 합격하여 한약방을 경영해보자는 나의 꿈은 시험이 폐지됨에 따라 다시 좌절을 겪게 되었다. 나는 또 다른 길을 모색해보고자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대학의 한의학과에 진학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대학엘 가자면 그에 합당한 자격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중학교1년 중퇴생이라 어쩔 수 없이 검정고시를 거쳐야만 했다. 우선 고입자격 검정고시부터 시작하기로 굳게 마음을 다져먹고 그동안 다녔던 한의원을 그만두고 저축했던 돈으로 길음동에 겨우 잠만 잘 수 있는 조그만 방을 한 칸 얻었다. 그리고는 검정고시 학원에 가소 중학교 과정 반에 등록을 했다. 그때가 내 나이 27살, 같은 반에 12살의 어린학생이 있어 최연소, 최고령자로서 좋은 대조가 되었다. 그 후 나는 오전에는 학원에서 공부하고 오후에는 학원비와 생계유지를 위해 월부책 판매를 시작하였다. 수없이 문전박애를 당하고 빨리 나가라는 호통을 들어야 하는 월부책 판매는 정말 고달픈 직업이었다. 어쩌다가 책을 한번 팔게 되면 어찌나 감사한지 절이라도 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학원에서 공부를 시작한 지 한 달 후에는 반에서 1등을 하여 장학금을 받아 등록금 전액을 면제받을 수 있어서 한결 보탬이 되었다. 그렇게 4개월이 지나 그해 8월에 고입검정고시에 합격했다. 나는 이제야 1차 관문을 통과했구나 하면서 앞길에 대한 급한 마음으로 그다지 기쁘거나 흐뭇하지도 않았다. 다시 고등학교 과정 반에 등록했는데 3년 과정을 7개월에 마치는 특수반이었다. 그때는 학원에서 청소나 잡일을 해주는 근로 장학생으로 공부는 계속 할 수가 있었지만 아르바이트를 하지 못하니 생계유지가 어려워 내 생애 최악의 궁핍한 생활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해 겨울은 어찌나 추웠던지 .....연탄 한 장 못 지핀 방에서 얇은 누비이불 하나 덮고 옷을 껴입은 채로 덜덜 떨면서 웅크리고 새우잠을 잤다. 아무도 맞이해주는 사람 없는 춥고 썰렁한 냉방에서 밤을 지내고 새벽이면 도시락 하나 싸들고 다시 학원에 나가서는 밤늦게야 공부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게 그 당시 하루 일과였다. 아침밥은 당연히 거르고 점심은 꽁보리밥에 깍두기 몇 조각뿐인 도시락을 먹었다. 급우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할 때면 나는 꽁보리밥이 건강에 좋아 건강식으로 먹는다고 둘러대곤 하였다. 그러나 급우들은 아무도 나의 이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비쩍 마른 몸에 누렇게 뜬 얼굴의 내가 건강식을 한다니……. 평소보다 몸무게가 15kg이나 줄어든 내 몸은 영양부족과 아울러 형편없이 말랐지만 다시 건강을 잃고 쓰러진다면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적당한 운동과 요가, 단전호흡 등으로 건강을 유지해나갔다. 그 덕분에 나는 감기 한번 걸리지 않고 학업에 전념할 수 있었다. ‘안되면 되게 하라’는 나의 좌우명과 결단코 승리하고야 말겠다는 굳은 신념이 나를 그토록 무장시켜줄 수 있었던 것이다.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만 같았던 그 춥고 매섭던 겨울이 어느덧 따스한 봄빛의 속삭임에 그 스산한 모습을 서서히 감추어가던 시기에 나는 뜻밖의 예기치 않던 방문객을 맞이하게 되었다. 일요일이었다. 나는 손바닥만한 자취방에서 장난감 같은 미니 석유곤로를 창틀 위에 올려놓고 꽁보리밥을 짓느라고 막 뜸을 들이고 있었다. 그때 어떻게 집을 찾아오셨는지 어머님께서 방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것이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곤로불을 끄고 밥냄비를 얼른 손으로 집어 들고 선반 위로 안보이게 올려놓았다. 꽁보리밥을 짓고 있는 모습을 어머니께 차마 보일 수가 없어서였다. 어머님께서는 내가 서울로 올라간 뒤 수년이 지나도록 집에 한번도 내려오질 않자 궁금하여 물어물어 찾아오신 것이다. 나는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결코 고향집에 내려가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 터이므로 어머님을 뵈온 지가 오랜데도 서신이나 방문을 가급적 자제하고 있었던 터였다. 그때 뜨겁게 달구어진 냄비를 황급히 맨손으로 잡은 탓에 댄 상처가 아직까지 손가락에 흉터로 남아 있다. 내 방 건너편 단칸방에는 막노동을 하는 부부가 세 들어 살고 있었는데 아기 하나 키우며 가난하지만 단란하게 오손도손 사는 모습이 무척이나 행복하게 보였다. 애기 엄마는 내게 가끔 김치도 한 사발씩 갖다 주고 공부하느라 고생이 많다면서 따뜻하게 위로도 해주곤 하였다. 주인집의 차디찬 무관심과는 반대로 훈훈하게 느껴지던 인정이었다. 지금도 눈감으면 선연히 떠오르는 길음동 그 집, 손바닥 만하던 그 골방이 내겐 평생 잊을 수 없는 값진 인고의 결실을 맺은 추억의 장소이다. 드디어 7개월이 지나고 76년 4월이 되자 고등학교 졸업자격 검정고시가 다가 왔다. 난 조금은 우려하며 시험을 치렀지만 뜻밖에 두 손에 합격증을 받아쥘 수가 있었다. 7개월 만에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게 된 것이다. 나는 야릇한 기쁨과 감동에 젖었다. 그러니까 일년 만에 중학과정과 고등학교 과정을 당당히 끝낸 것이다. 2차 관문을 통과한 그때 내 나이 28살 되던 봄이었다. 그러나 합격의 기쁨도 잠시, 나의 마음은 다시 어두워졌다. 비록 고등학교 졸업자격은 얻었지만 대학 등록금은 어떻게 마련한단 말인가? 여기서 나의 꿈이 다시 좌절되지나 않을 것인가? 나는 길음동 뒷동산에 올라 이리저리 거닐면서 곰곰 생각해보았다. 별다른 묘책을 찾지 못하고 산을 내려와 우연히 신문 한 장을 집어보게 되었는데 서울시 공무원시험 공고가 게재되어 있었다. 나는‘ 바로 이거다!’하면서 무릎을 내리쳤다. 곧바로 응시원서를 써서 접수하고 얼마 후 서울시 9급 공무원시험에 합격하여 교남동 사무소 직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3년간’이라는 기간을 유예기간으로 하여 그동안 저축을 하면 대학학자금이 모아지겠다는 생각이었다. 교남동 사무소에서 근무하게 되면서 길음동 자취방에서 책이랑 옷가방을 챙겨 숙직실로 옮겼다. 그때부터 나는 단골 숙직담당이 되어 숙식을 그곳에서 해결하게 되었다. 동사무소가 나의 집이 된 셈이다. 비록 남들처럼 근무를 끝낸 후 즐거운 귀가시간은 없지만 이제는 한겨울 혹독한 추위가 닥쳐와도 두렵지가 않으니 이보다 더 안락한 거처가 어디 있겠는가 싶었다. 또한 내가 대신 숙직을 해주므로 편히 귀가하여 쉴 수 있다고 동료직원들이 고마워할 때마다 나도 역시 기분이 흐뭇하였다. 봉급은 한 푼도 안 쓰고 마을금고에 저축을 하였다. 다달이 불어나는 나의 저금통장을 보고 동료 직원들은 내게 백만장자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그때 봉급이 월7만원 정도 되었는데 일년하고도 몇 달이 지나니 통장의 저축액수가 백만 원이 훨씬 넘었다. 그러니 고생스러웠던 길음동생활에 비하면 가히 백만장자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때 함께 근무했던 직원들이 지금은 모두 승진하여 동사무장이 되었거나 구청, 시청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나도 그대로 근무했으면 그들만큼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당시 근무할 때 동사무장님의 아들이 어릴 때부터 중학생이 될 때까지 밤마다 오줌을 싸는 야뇨증이 있었다. 나는 배워두었던 한방처방으로 그 아들의 야뇨증을 깨끗이 완치시켰다. 또 동네 주민 할머니가 만원도중 갑자기 혼절하여 쓰러졌는데 반신마비와 중풍증세를 보였다. 내가 침을 좋아주고 처방을 해주니 즉석에서 정신이 돌아오고 불편 없이 보행까지 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들이 동네 주민들에게 소문으로 돌아 내게 처방을 받고자 하는 주민들이 동사무소로 나를 찾아오는 일이 많아졌다. 이러한 일들을 겪으면서 3년여를 근무한 뒤 나는 계획대로 사직서를 냈다. 그리고는 입시학원에 등록을 하고, 천연동 마을언덕 위에 허름한 집 뒷방 하나를 전세로 얻었다. 길음동 방에ㅐ 비하면 훨씬 크고 따뜻한 방이었다. 방을 얻고 나자 막내 동생이 서울에 올라와서 나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 동생은 해군사관학교 시험을 치렀는데 신체검사에서 폐결핵이 발견되어 불합격된 후 서울에 오게 된 것이다. 동생은 다행스럽게도 내가 처방한 약으로 결핵이 깨끗이 낫게 되었다. 그 이후 동생은 행정고시 준미를 위해 학원을 다녔는데 형이 된 입장으로 넉넉한 처지가 못 되어서 학원비 외에는 용돈도 제대로 주지못해 가슴이 아팠다. 천연동 그 방은 연탄불을 넣어놓으면 아주 따뜻하여 추운 겨울밤도 따뜻이 지낼 수가 있었다. 하지만 연탄을 이틀이나 땔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기온이 급강하여 혹한이 며칠간 지속되더니 갑자기 방이 싸늘해지면서 연탄가스 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이었다. 공기구멍을 너무 꽉 막아놓으니까 연탄에서 생긴 김이 찬 바깥 공기 때문에 얼어붙은 것이었다. 뜨거운 물을 연통에 부어 얼음기둥을 빼내고 나서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연탄 몇 장 절약하려다가 하마터면 큰 사고를 당할 뻔했던 것이다. 입시학원에 다닌 지 일년 후 나는 목표했던 대로 경희대 한의학과에 응시했다. 그러나 합격자 발표게시판에서 아무리 눈을 비비고 찾아보아도 내 이름 석자는 보이지 않았다. 보기 좋게 낙방의 고배를 마신 것이었다. 나이 서른두 살에 겪는 낙방의 고배......나는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듯한 허탈감에 빠겼다. 고개를 떨어뜨린 채 천근만근이나 되는 듯한 발걸음으로 게시판을 떠났다. 그리고는 터벅터벅 청량리와 동대문을 지나고 종로까지 마냥 걸었다. 주위의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세상천지에 나 혼자만이 떨어져 남은 듯한 절망감뿐이었다. 마냥 거리를 헤매다가 퉁퉁 부은 발로 천연동 달동네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지옥에 가도 떨어진 듯한 얼굴로 방에 들어서니 벽에 결어놓은 사진틀 속에서 부처님이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계셨다. 나는 우러러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두 손 모아 합장을 하였다. 부처님은 가는 실눈을 하고 입가에는 자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내려다보셨다. 그 순간 나는 천길 낭떠러지 지옥에서 두둥실 솟아오르는 자신을 발견하고 부처님 앞에 굻어 엎드려 끊임없이 절을 올렸다. 대우주 속에 한 점으로 떠 있는 나,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나아갈 길이 있고 해야 할 일이 반드시 있는데 어찌 한번의 시험에 낙방했다고 해서 그토록 주저앉아버린단 말인가. 나는 내 자신이 우스워졌다. 그러면서 한없이 넓고 자비로운 부처님의 미소에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무수히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새로이 시작하자! 먼 훗날 나의 인생행로를 뒤돌아보았을 때 이제 일년의 기간 동안 더 재수를 한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결점이 될 것인가. 오히려 내 인생의 값진 거름이 되지 않을까. 나는 거시서 새롭게 결심을 다지고 다시 한번 재도전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반드시 이루어 내리라! 나는 나의 결심을 부처님 전에 보이고자 그 증명으로 손가락 끝을 잘라 혈서를 써내려갔다. ‘웅지필성(雄志畢星)’-나는 반드시 사나이의 큰 뜻을 이루어 내고야 말리라. 나는 그간의 내가 겪은 고초를 결코 헛되이 하지 않으리라고 이를 악물면서 새로운 각오로 다시 입시학원에 나가 불철주야 공부에 몰두하였다. 하루에 4시간만 잠을 자고 오로지 책과 씨름 했다. 한편으로는 공부하는 틈틈이 몸을 풀어주는 운동을 해서 체력을 잃지 않도록 하였다. 그동안 저축해두었던 통장의 금액도 차츰 바닥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나는 성실하게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갔다. 그해도 저물어가고 학력고사를 다시 되었다. 다행히 작년보다는 한층 우수한 성적이 나왔다. 불안한 마음이 않았지만 다시 소신껏 경희대학교에 원서를 넣었다. 그 결과, 내 나이 서른셋이 되던 1982년, 드디어 경희대 한의학과에 당당히 합격했다. 합격자 명단에 뚜렷이 적혀있는 ‘장무호’란 이름 석자를 읽는 순간, 나는 가슴이 벅차올라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작년에 낙방했을 때의 심정이 지옥에 빠진 듯한 것이라면 이번의 합격한 심정은 지상극락에 피어나는 꽃구름을 타는 듯한 기분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부처님사진을 우러러보니 부처님은 작년과 다름없이 잔잔한 미소를 띠고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나는 한없이 부처님께 감사의 절을 올렸고 나를 가르쳐주신 은사님들과 주위에서 여러모로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에게도 감사드렸다. 그러고 나서 서울에 올라와 8년이 넘도록 한번도 내려가지 않았던 고향으로 열차에 몸을 싣고 어머님께 달려갔다. 어머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시며 “무호야, 정말 수고 많이 했다” 하시면서 내 손을 어루만져주셨다. 그동안 어려운 가운데서도 오로지 이 자식을 위해 불공을 올리고 빌려 오신 어머님이셨다. 나는 또 아버님 산소를 찾아뵙고 지하에서도 자식을 위해 걱정을 하고 계실 아버님께 술잔을 올리고 절을 하였다. 그리고는 아버님께서 못다 이루신 인술의 길을 기필코 이루겠다고 서약을 하였다. 그 무렵 말단 공직에 계시며 가족들과 함께 단칸 월세방에서 어렵게 사시던 형님이 집을 늘려가려고 저축해놓은 백만 원을 등록금에 쓰라며 선뜻 내주셨다. 그 돈을 받으며 나는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 당시 대학교 등록금이 92만원이었는데 내 저금통장의 숫자가 바닥을 헤매던 때라 형님에 주신 그 돈이 나에게는 여간 요긴한 돈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형님께서 지금까지도 내 집 마련을 못하고 계시니 내가 하루빨리 보탬이 되어드려야 할 텐데 걱정이다. 이렇게 형님의 도움으로 무난히 입학하여 이제 나에게도 서른셋이라는 나이에 대학 학창시절이 시작되었다. 나는 아버님께서 쓰시던 시골 한약방의 약장을 천연동 자취방으로 옮겨왔다. 그 당시 주인댁 할머니께서 무릎이 퉁퉁 부어오르는 관절염 신경통으로 출입도 못할 정도로 고생하고 계셨다. 그런데 내가 한약을 처방해드렸더니 말끔히 치료가 되었다. 그러자 그 할머니께서는 온 동네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를 하셔서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나는 학생의사로 통하게 되어 비교적 여유 있게 대학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시골에서도 간경화증으로 철판같이 간이 굳어진 환자를 깨끗하게 치료를 지방에서까지 내게 약을 지으러 찾아오게 되었다. 그렇게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 예과 2년이 지나고 본과 1년에 들어선 35살 되던 해 봄, 나는 교수님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결혼하여 서대문의 2층집에 신혼살림을 차리고 꿈같은 신혼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착하고 헌신적인 아내 덕분에 나는 학업에 더욱 매진할 수 있었고 어느덧 대학 6년을 순조롭게 마치게 되었다. 졸업 후 치른 한의사 국가고시에서도 당당히 합격을 하여 그토록 고대하던 나의 소망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물론 기업을 이어 인술을 마음껏 펼쳐 보리라던 아버지의 약속도 지키게 된 것이고 그 후 어엿한 한의사로서 한의원을 개설하여 진료에 임하게 되었다. 다년간의 임상에서 환자를 치료하면서 보니 한방으로나 양방으로나 어느 쪽의 의술로도 한계점을 벗어나지 못하고 환자들이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한 분야가 척추신경계 질환이었다. 그래서 척추 뼈나 관절을 교정하는 한방추나요법을 연구한 결과, 자세불량이나 외적인 충격이나 자극으로 인해 척추가 비뚤어지거나 이탈해서 생기는 목. 허리 디스크나 요통, 오십견, 신경통, 관절염 등 각종 척추관절 질환을 우수하게 치료 할 수 있게 되었다. 척추를 다쳐서 꼼짝할 수 없는 환자가 나아가고, 질병 때문에 인생의 낙오자가 되었던 환자들이 다시 자신의 자리에 복귀하는 모습들을 지켜보며 나는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으며 푸근한 미소를 머금는다. 한의원 원훈(元勳)을 ‘친절봉사, 청결위생, 근면성실’로 정해놓고 진료에 임하는 직원모두가 환자를 내 가족처럼 따뜻한 마음으로 보살펴주도록 하고, 약재나 진료기구를 청결하고 위생적으로 철저히 관리해나가도록 하고 있다. 한의원 이름을 광제(廣濟)라 한 것은 질병으로 고통 받는 많은 환자들을 널리 구제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장무호였던 나의 이름을 장효영(張效榮)이라고 개명한 것도 질병을 치료하는 의사로서, 치료의 효과를 환자들이 영광스러워지도록 베풀자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고, 호를 요석(遙昔)이라 한 것은 풍요하게 많이 베풀자는 내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가 담겨 있다. ‘廣濟한의원遙昔 張效榮’ 내 몸이 병고로 인해 학업을 중단해야 했던 지난날, 의사가 되는 것이 내 생애의 사명이라고 자각했던 그때 그 시절의 그 심정이 현재로 이어져 환자들이 진실로 위하는 나의 진료행위, 이 모든 나의 몸과 마음이 오직 질병으로 괴로워하는 환자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또다시 가슴에 새겨본다. 이 세상에는 병마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돈이 많은 부유한 사람도, 권력도 명예가 높아 고귀해 보이는 사람도 일단 불치의 병에 걸리면 어쩔 수 없이 생명을 잃어야 하는가 하면, 쉽게 치료할 수 있는 병이라도 단지 가난 때문에 치료받지 못하고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도 많다. 재물을 잃어버리는 것은 조금 잃은 것이요, 명예를 잃어버리는 것은 많은 것을 잃는 것이요, 건강을 잃어버리는 것은 모든 것을 잃은 것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건강을 잃어버리면 공부나 연구도 할 수 없고 아무 일도 못하게 되니 건강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나는 우리 국민들의 질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치료하고 건강을 증진시켜주는 의사의 한사람으로서 크나큰 책임과 의무를 느끼며 첫째, 불치병의 퇴치를 위한 끊임없는 의술 연구와 둘째, 가난으로 인해 치료를 제대로 못 받는 이들도 충분한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여건 조성,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내 전 생애를 걸고 노력하리라. 나는 내 인생에 있어서 궁극적인 목표가 될 이 마지막 관문을 향하여 나의 심신을 다 바쳐서 힘차게 나아갈 것이다. 나는 후배들에게 ‘안 되면 되게 하라’라는 이 한마디를 꼭 들려주고 싶다. 나의 좌우명이기도 한 이 말은 언제나 인생을 적극적, 능동적, 창조적으로 살아가게 하는 힘찬 원동력이 되어준다. 적극적,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모든 일에서 추진력이 있고 성취감을 맛볼 수 있지만, 부정적. 소극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은 어떠한 일도 이루어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운명은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적극적, 진취적인 자세로 스스로 개척해나가야 하는 길인 것이다. 절실한 마음 자세로 노력하는 자만이 그 어떠한 일도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다. 누구의 가슴속에나 무한한 가능성이 잠자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일깨워주는 것은 자신의 노력에 달려 있다. 이 사회에는 각계 각 분야의 모든 사람들이 제 나름대로 능력과 기술을 가지고 자기가 해야 할 일들이 있다. 자신이 하는 일에 사명감을 가지고 충실하게 순간순간을 살아갈 때 우리 사회는 모두가 더불어 잘 사는 밝은 사회가 될 것이며 개인적으로도 성공인의 지름길이 되는 것이다. 내가 온갖 고난의 길을 걸었던 지난날의 순간순간들, 또한 대학 입시에 낙방을 했을 때나 그 이듬해 합격을 했을 때의 순간, 내가 한의사로서 진료에 임해나가는 이 모든 순간에 재생의 용기를 주고 사명감을 자각시켜주며 나의 무한한 가능성과 능력을 일깨워주시는 부처님은 오늘도 나와 함께 계신다. 나는 부처님의 자비로운 마음, 남을 위해 베풀어주는 보시의 실천을 위해 오늘도 내일도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다. 먼 훗날 내 인생을 회고할 때 후회 없는 삶을 위해 열정과 정성을 다 기울여서 정진해 나갈 것이다. 끝으로 그 어렵던 시절 믿음과 사랑으로 격려해주신 어머님, 형제들, 친구들, 그리고 주위의 모든 분 들게 감사드리며, 더욱이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지도 편달해주신 학원의 여러 선생님들과 대학교의 교수님들께 진심으로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