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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조원에 이르는 엄청난 재산피해와 수많은 인명피해를 입힌 15호 태풍 루사가 관통한 무주는 그야말로 쑥대밭이었다. 아직도 남대천으로는 시뻘건 황톳물이 소용돌이치며 흐르고 있고, 끊어진 길을 잇기 위해 곳곳에서는 복구작업이 한창이었다. 강가의 바위 위에는 사람들이 흙탕물에 젖은 옷가지와 이불을 널어 말리고, 농부들은 쓰러지고 파묻힌 벼를 세우느라 뙤약볕에 허리 한번 펴지 못한다. 어허! 이런 난리가 없구나! 나제통문 앞에 걸린 설천교의 교각에는 물살에 떠밀려 흐르다 교각에 걸린 나무들의 잔해가 그득하다. 다리난간도 부서지고 휘어져 그 엄청난 물의 기세를 짐작케 한다. 무주읍에서부터 남대천을 따라 이어지는 30번 국도의 곳곳이 물살에 떠내려갔고, 남대천 주변의 밭과 논과 과수원은 밀려온 토사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십승지 무풍도 속수무책 나제통문을 지나면 더 이상 갈 수조차 없다. 그곳이 제아무리 십승지(十勝地)중의 여덟 번째 땅이라는 무풍(茂豊)이라 하더라도. “9년 흉년 뒤에도 삼풍(三豊)에는 종자가 있고, 12년 전쟁 끝에도 양백지간(兩白之間) 사람은 무사하리라” 했다는 삼풍의 하나라는 무풍이 이제는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못하는 고립무원의 땅이 되고 말았으니 어허! 이것 참! 지금 무풍은 김천으로도, 거창으로도, 무주로부터도 모조리 고립된 섬이 되고 말았다. 승지도 세월에 따라 변하고 마는가? 400여 년 전 왜란을 피해 숨어든 사람들을 고스란히 지켜주었던 그 땅이 이제와 물난리에 이토록 속수무책 휘말렸으니 승지도 모두 허언이란 말인가? 어허! 어쩌면 좋단 말인가! 창졸간에 살던 집과 가족을 잃은 비통함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5조원에 이르는 엄청난 재산피해와 수많은 인명피해를 입힌 15호 태풍 루사가 관통한 무주는 그야말로 쑥대밭이었다. 아직도 남대천으로는 시뻘건 황톳물이 소용돌이치며 흐르고 있고, 끊어진 길을 잇기 위해 곳곳에서는 복구작업이 한창이었다. 강가의 바위 위에는 사람들이 흙탕물에 젖은 옷가지와 이불을 널어 말리고, 농부들은 쓰러지고 파묻힌 벼를 세우느라 뙤약볕에 허리 한번 펴지 못한다. 이 와중에도 산을 오르려 배낭을 매고 덕유산을 찾은 취재팀은 큰 죄라도 지은 양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려 고개를 돌리면 시야에는 온통 루사가 할퀴어 논 생채기들만 보인다. 인적 없는 곳을 찾아야했다.
사람들 눈을 피해 숨듯 산으로 들어서야 했다. 임진왜란을 피해 사람들이 덕유산 자락 무풍으로 숨어들 듯 우리는 안성면 덕곡리 골짜기로 숨듯 산으로 접어들었다.(물론 무주리조트 내의 관광곤돌라가 루사로 인해 파손돼 운행을 하지 못하는 탓도 조금 있긴 했다.) 그러나 무풍으로 숨어들었던 사람들이 400년 후 물난리를 겪듯 우리는 덕곡리 계곡에서 4시간 후 심각한 고초를 겪게 된다. 덕곡리 역시 덕곡저수지를 범람한 물이 이제 나락모가지가 무성해진 다랑논을 휩쓸고 지나갔다. 저수지를 끼고 계속 이어지는 임도를 따라 오르다 새로 가설한 듯한 통나무 다리 앞에서 왼쪽 계곡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로 접어들었다. 등산로는 뚜렷했고, 주변의 숲은 울창한 원시림이었다. 산길로 접어든 지 10분만에 나란히 자리한 묘 2기가 나타난다. 겨우 10분을 걸었는데도 눅눅하고 무거운 대기는 사방을 온통 한증막처럼 달궈 땀을 쏟게 한다. 위아래로 나란히 자리한 묘 2기 중 아래쪽 묘는 깨끗하게 벌초가 되어 있는데 윗쪽 묘와는 선을 그은 듯 벌초의 경계가 그려졌다. 필시 아래쪽 묘의 후손이 그만큼만 벌초를 하고 만 까닭이다. 그러나 그 규모라는 것이 하도 알량해서 그렇듯 선을 긋듯 잘라낸 그 후손의 심보가 신규나씨(39세·개척산악회)는 못내 못마땅한가 보다. “퍽이나 속 좁은 사람이네. 10분만 더 하면 될 텐데…” 이승에서는 아무 인연이 없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나란히 누워 저승에서는 유일한 이웃이 되었는지도 모를 사이를 어느 무정한 후손으로 인해 혹 벌어지지나 않을까 걱정을 해본다. 원시 그대로 모든 것이 꿈틀대고 있다 길은 계곡을 오른쪽에 끼고 이어진다. 숲은 점점 더 울창해지고 불어난 계곡은 맑고 깨끗한 물을 끝없이 아래로 흘려보낸다. 저 물은 구량천과 대량천을 지나 금강으로 흘러들 것이다. 이리저리 쓰러진 나무와 우거진 산죽 사이를 헤치고 이어지던 길이 두 갈래로 나뉘어 진다.
왼쪽 뚜렷한 길을 따라가면 두문산(斗文山·1051.2m)에서 검령을 지나 향적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으로 오르는 길이다. 취재팀은 오른쪽 계곡을 따라 향적봉을 바로 오르기로 했다. 계곡이 깊어지고 숲이 울창해질수록 취재팀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던 죄책감은 서서히 사라져갔다. 덕곡리 계곡은 거의 사람 손을 타지 않은 원시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바위에는 진한 초록의 이끼가 가득 뒤덮였고, 계곡 주변으로는 도저히 지날 수 없는 울창한 숲이 우거졌다. 작은 폭포와 작은 소가 이어지고, 미끄러운 돌과 두터운 이끼, 며칠전의 성냄을 잊고 이제는 기껍게만 흐르는 맑은 물소리는 상쾌한 산행의 즐거움을 더해만 준다. 즐거움은 자꾸만 더해간다. 앞장서 계곡을 오르던 염봉섭씨(37세·지리산 북부산악구조대)가 바위 위에서 햇볕을 쬐고 있던 두꺼비 한 마리를 발견했다. “요놈이 저보다 서너 배는 더 큰 황소개구리를 안다리후리기 하는 두꺼비여. 힘이 겁나게 세다니까” 염봉섭씨는 마술사처럼 물 속의 돌멩이 하나를 집어들더니 놀랍게도 가재를 한 마리 잡아든다. 또 하나의 돌멩이를 집어드니 그곳에는 도롱뇽 한 마리가 까만 눈을 뒤룩거리며 자리를 틀고 앉았다. 나뭇가지 하나를 치우니 그곳에는 민달팽이 한 마리가 꿈틀댄다. 사방 모든 것이 살아있는 원시 그대로의 모습으로 꿈틀대고 있었다. 계곡 널따란 바위 위에 앉아 점심을 먹고 점점 더 좁아지고 험해지는 계곡을 따라 오르면서도 염씨의 마술은 계속된다. 물줄기가 끝나고 가파르고 험한 잡목 숲을 헤치며 능선을 향해 오르던 중 죽은 느티나무 둥치에서 솥뚜껑 만한 운지버섯을 발견했다. 윗쪽에 매달린 버섯들은 이미 시커멓게 썩어 있었지만 맨 아래쪽의 것은 멀쩡했다. 누구의 간섭도 없이 오랜 세월 이렇게 나서 자라고 또 죽어 썩어가고는 했을 순결한 그 시간 속으로 취재팀이 불청객처럼 뛰어든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를 무렵 그 생각이 사실임을 일깨우는 사건이 벌어졌다. 15호 태풍 루사가 퍼부은 폭우로 잔뜩 물을 머금은 흙 위에 살짝 걸쳐 있던 바위가 미끄러져 구르기 시작했다. 맨 뒤에서 산행을 하던 신규나씨가 놀라 피하려다 그만 중심을 잃고 넘어지며 미끄러지고 말았다. 제법 급한 경사의 비탈이었던 지라 두세 바퀴를 구르다가 바위틈에 거꾸로 쳐박히며 겨우 멈췄다.
놀란 일행이 황급히 달려갔지만 이미 신규나씨의 행색은 말이 아니었다. 옷은 흙투성이가 되었고, 팔뚝은 여기저기 긁혀 피가 맺혔고 다리 여기저기에는 벌써 푸르스름하게 멍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마에 생긴 주먹만한 혹과 상처에 비하면 걱정할만한 것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녀가 아직 시집도 안간 처녀임에야. 우리는 이곳 태초의 시간에 뛰어든 불청객임에 틀림없다. 산행을 시작한지 4시간이 조금 지나고 있었다. 1232봉 아래 능선 안부에 올라섰을 때 무주리조트의 골프장은 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중장비가 두문산 산정까지 올라와 굉음을 울리고 취재팀은 이제 제대로 된 등산로를 따라 향적봉을 향한다. 북쪽으로 보이는 적상산(1029.2m)이 구름에 가려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산꼭대기의 저수지 적상호의 물빛이 황톳빛으로 구름 사이 언뜻 보인다. 적상산 아래 무주호의 물빛 역시 벌건 황토물로 가득 찼고, 여기저기 토사가 밀려와 쌓인 무주리조트 안에서는 복구공사가 한창이다. 죽어서도 의연한 천년 주목, 백년도 못사는 오만한 인간 무주리조트 스키장의 슬로프가 시작되는 설천봉 아래를 지난다. 진초록 풀들이 가득 자라난 스키장 슬로프 위에서 각양의 건물들이 가득 들어 찬 무주리조트를 내려다본다. 그러다가 문득 가슴을 치고 만다. 그렇다. 세월은 결코 승지(勝地)를 바꾸지 않는다. 인간의 탐욕과 무지가 그것을 바꾸고야 만 것이다. 산정까지 파헤쳐 골프장을 짓고, 산자락을 헐어 길을 내고, 원래 흐르던 물길마저 인간의 의지대로 고쳐 흐르라고 강요했다.
처음부터 그곳에 살고있던 나무와 풀과 짐승들을 내쫓고 사람들이 몰려와 먹고 마시고 소리친다. 이제 사람을 감싸고 보호하던 승지는 사람들에 의해 사라졌다. 승지는 이제 더 이상 승지가 아니다. 개발이란 미명아래 인간의 작은 편리를 위해 독단으로 자행된 파괴의 행위가 무심한 세월을 함께 살아왔던 자연으로부터 외면 당하게 한 것이다. 오늘따라 유달리 처연하게만 보이는 칠봉능선을 바라보며 상제루를 향해 걷던 중 목책에 둘러싸여 말라 죽어버린 몇 그루 주목의 시신을 바라보며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을 보낸다는 주목이 지금 ‘죽어 천년’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니 채 백년도 못사는 인간이 저지른 오만이 가소롭기 만하다. 무주리조트의 관광곤돌라가 도착하는 상제루에는 구름만 넘나들고 있었다. 구상나무 사이로 이어지는 나무계단을 따라 천천히 향적봉에 올랐다. 동쪽 하늘은 망망한 구름바다를 이루었다. 문득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 분다. 중봉 아래쪽으로는 어느새 울긋불긋한 단풍이 지기 시작했다. 산은 그렇게 아랑곳없이 제 할 일 만 묵묵히 하고 있을 뿐이다. 향적봉까지 오르던 중 마술사 염봉섭씨는 또 한번의 마술처럼 저녁 찌개거리라며 싸리버섯 세 뭉치를 땄고, 향적봉에서 대피소로 내려서는 동안에는 지리산에서 쫓겨 이곳까지 퇴각하던 빨치산들의 이야기를 꺼내다가 또 마술처럼 발아래 땅바닥에서 녹슨 탄피하나를 주워 들었다. 퇴각하던 사람들이나 쫓던 사람들 둘 중 하나가 사용했었을 것임에 틀림없는. “삐이이∼ 익” 세월의 더께처럼 두꺼운 녹이 슬었지만 아랫입술에 대고 세차게 숨을 불어넣자 탄피는 날카로운 비명을 토해낸다. 향적봉대피소 앞마당의 식탁에 둘러앉아 싸리버섯을 넣은 된장찌개를 끓이는 도중 이 녹슨 탄피의 휘파람은 먼저 와서 자리잡은 사람들을 하나둘씩 불러냈다. 가장 먼저 합류한 사람은 혼자서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있는 염문섭씨(45세·서강대학교 교무처). 현재 한계령까지 종주를 마쳤지만 지난 봄 산불경방으로 인해 빠진 구간을 때우는 산행 중이었다. 염봉섭씨와는 같은 파주염씨 문중으로 항렬까지 같아 금새 형님, 아우님하며 갑자기 종친회를 시작했고, 탄피의 휘파람이 불러낸 또 다른 인물은 여봉수씨(32세·서울 동작구 흑석동) 그리고 대피소관리인 박봉진씨(45세). 우리는 식탁에 둘러앉아 석양에 물들어 가는 산과 운해를 바라보았다. 동쪽 하늘 망망한 운해 끄트머리에는 가야산의 삐죽한 정상이 섬처럼 도드라져 있다. “징검다리 두어개 만 있으면 저기까지 건너갈 것 같은데”염봉섭씨의 마술사다운 한마디. “난 이제 꼬리 잘린 여우가 됐나 봐” 신규나씨는 아까 다친 꼬리뼈가 점점 더 아픈 것 같다며 내일 운행에 대한 걱정 한마디. 싸리버섯을 넣고 끓인 된장찌개를 안주로 우리는 술잔을 기울였다. 붉게 물들었다가 서서히 어둠의 바다로 변해버린 운해를 바라보며 녹슨 탄피와 두사람의 염씨가 불러 낸 염상진(조정래 소설 「태백산맥」의 등장인물)을 떠올렸고, 아까 낮에 보았던 ‘안다리후리기하는 ’두꺼비까지 떠올려 「표본실의 청개구리」까지 안주로 삼았다. 물론 두 염씨와 함께 할아버지뻘쯤 되었을 횡보(橫步) 염상섭이 이 종친회에 참석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박봉진씨가 내온 당귀주 한 주전자를 더 비우고서야 이 낭자했던 산상주연과 종친회는 겨우 막을 내렸다. 죄책감 혹은 민망함에 축축이 젖다 자욱한 안개가 산등성이를 이리저리 넘나든다. 덕유평전 부근의 낮은 관목들의 잎은 어느새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해가 뜨지도 않았는데 땀은 비오듯 쏟아진다. 오수자골로 잘못 들어섰음을 깨닫고 다시 되돌아 중봉까지 갔지만 이미 한시간을 허비했다. 한시간의 헛다리 품은 몇 배의 기력을 앗아간다. 덕유산은 사방 막힘 없는 장쾌한 조망이 일품인 산이다.
특히 주릉을 걷는다면 시종 지루할 새 없이 눈썹 위로 손바닥을 들어 해를 가리며 아는 산이름을 들기에 바쁘다. 동으로는 첩첩한 산등너머로 손에 잡힐 듯 가야산이 연꽃처럼 솟았고, 북으로는 붉은 치마 두른 적상산 너머로 서대산이 지척이며, 서쪽으로는 듬직하게 펼쳐진 안성벌과 금강에서 피워 올리는 물안개가 지천이고 그 너머로 운장산이 아스라하게 펼쳐진다. 향적봉에서 남덕유를 향해 걷다보면 일부러 바라볼 필요도 없이 가슴 벅찬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무룡산과 삿갓봉을 지나 덕유산의 용트림이 마지막 힘을 모으는 남덕유와 장수덕유(서봉)를 넘어서면 그리움처럼 늘 그렇게 펼쳐진 지리산의 연릉이 다가선다. 그러나 오늘은 사방으로 자욱한 운무에 휩싸여 도무지 답답하기만 하다. 마치 눈을 감고 산행을 하는 듯 걸음은 휘청대고 속절없는 비지땀만 하염없이 흐른다. 거기다가 한시간이나 헛다리품을 팔았으니…. 백두대간이 꿈틀 몸을 비낀 백암봉 송계삼거리를 지나 동엽령을 지날 때까지도 운무는 전혀 걷히지를 않았다. 악전고투 끝에 무룡산에 올라섰을 때야 겨우 남덕유의 북사면이 희끗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장수 쪽에서 몰려드는 운무는 여전히 장수덕유를 가리고 있었다. 무룡산 정상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날개미 떼 뿐. 아무래도 날을 잘못 잡았다. 이런 물난리에는 수해복구지역 자원봉사에 나서는 것이 도리였을 것이다. 몇몇 육십령이나 삿갓골재대피소에서 출발했을 백두대간 종주팀만 만났을 뿐 오늘 우리가 만난 산행 팀은 다섯을 넘질 않았다. 그들의 심정 역시 비탄에 젖은 수재민처럼 죄책감 혹은 민망함에 축축이 젖어 있을 것이다. 삿갓골재대피소에서 황점마을로 하산을 시작했다. 물이 불어난 삿갓골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풍광을 보여주었다. 이 물은 깨밭골과 감초골, 바른골 등의 물을 모두 모아 월성계곡으로 이어져 위천으로 흘러간다. 하산을 시작한 지 약 40분만에 깨밭골과 합류하는 지점의 너른 마당바위에 모여 앉았다. 처음으로 세수를 해본다. 산정부근에는 아직도 자욱한 운무에 가려있고, 황점마을이 가까워질수록 햇빛은 뜨거워진다. 감초골이 합수되는 지점 바로 못미처 잡목 숲에서 따온 염봉섭씨가 준비한 마지막 마술 오미자 열매의 붉은 빛깔이 자꾸만 남대천을 흘러가던 붉은 흙탕물을 떠올리게 한다. |
출처 사람과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