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도사를 하는 김종하 전 국회부의장
신아일보 초대편집국장, 부산일보사장을 역임한 원로언론인 고 윤임술 선생의 추도식이 4월 3일 오후 3시 고인의 빈소인 삼성서울병원 장레식장에서 많은 조문객들이 참석한가운데 엄수됐다. 대한언론인회와 신아일보사우회가 공동으로 주관한 이날 추도식은 대한언론인회 박종서 사무총장의 집전으로 장석영 대한언론인회 회장 김용발 신아일보 사우회장의 분향 헌화, 정운종회우의 약력보고(별항참조),김종하 전 국회부의장의 추도사, 참석자 전원의 합동 묵념순으로 엄숙히 거행됐다.
김종하 전국회부의장은 추도사에서 1965년 신아일보를 창간하면서 고인과 함께 열정적으로 신문을 만들었던 당시를 회고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추도식 참석자)
김용발 박기병 박종서 서옥식 유무정 윤시관 이긍규 이종세 장영숙 장옥
장학만 정운종
(이상 가나다순)
<윤임술 사장님 약력보고>
먼저 삼가 사장님의 명복을 빌며 졸지에 상을 당하신 유가족 분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리면서 사장님의 약력을 보고해 올리겠습니다.
저는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1965년 신아일보 창간 때 부터 사장님의 지도를 받았으며 사장님이 상무 겸 논설주간 시절엔 논설을 지도받는 등 그 누구보다도 사랑을 듬뿍 받은 후학중의 한사람으로서 감히 사장님의 영전에서 약력을 보고 해 올리게 되니 황망하고 애통한 마음 이로 다 표현할 길이 없사옵니다.
사장님께서는 1923년 임술년 2월 20일 경상남도 義昌郡 大山面 加述里에서 출생하신 뒤 8.15 해방 전 일본 立正대학교 불교학과를 중퇴하셨는데 일본에서 유학하실 때부터 신문 배달을 하며 언론인의 꿈을 키우셨다고 술회하신 일이 생각납니다.
1945년 국제신문 기자를 시작으로 언론계에 진출하신 사장님은 국제신보 편집부국장을 거쳐 연합신문 편집부장, 세계통신 편집부국장, 한국일보 편집위원, 조선일보 편집부국장을 역임하시고
1965년 컬러신문의 효시였던 신아일보 창간 때는 편집국장으로 독특한 편집기획과 가장 빠른 가판으로 독자의 기호를 매료시킴으로서 한국신문계에 선풍적인 바람을 불러일으키신 일은 두고 두고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1972년 신아일보 상무이사 겸 논설주간으로 계시다가 뜻하신바 있어 한국신문연구소장으로 자리를 옮기셔서는 한국신문연구소를 한국언론연구원으로 확대개편하시고 초대 원장으로 취임하셨습니다.
그후 신문회관 부이사장, 언론중재위원회 부위원장, 부산일보 사장, 조선일보 사료연구실 고문, 대한언론인회 자문위원으로 활동하시는
등 어느 누구도 추종하기 어려운 역동적인 언론인의 삶을 사셨습니다.
1883년 한성순보부터 20세기 말까지 한국 신문사 사설을 묶은 ‘한국신문사설선집’ 편찬을 주도하신 일과 ‘한국언론인물지’, ‘한국신문백년지’, ‘한국신문통감’ 등을 편찬하신 것은 사장님이 아니고서는 감히 엄두조차 낼 수 없는 크나큰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처럼 눈부신 언론계 경력으로 하여 영예의 서울시 언론부문 문화상과 한국신문상을 수상하신 것은 후진들에게 크나큰 귀감으로 받아들여지기에 부족함이 없다 하겠습니다.
사장님께서는 학구열도 남다르셔서 1969년 서울대학교 신문대학원 연구과정을 수료하셨는데 82년 12월 신문활자의 가독성연구조사보고서에 따라 활자 확대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신 일이라든지 100세가 넘으신 연세에도 일경언론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최근까지 지방언론의 육성발전을 위해 노심초사 하시고 인터넷으로 국내외 일간신문의 주요기사를 검색, 탐독 하실 정도로 건강하셨는데 이렇게 가시다니 믿어지지가 않사옵니다.
2011년으로 기억됩니다마는 65년을 해로하신 사모님과 사별하신 후 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이 타는 그리움을 참을 수가 없어 매일 쓰신 일기를 모아 ‘나팔꽃 일기 10년’ 이라는 책을 펴내셨다며 눈시울을 적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옵니다.
돌이켜 보오니 사장님은 우리나라 언론계에 우뚝 솟은 큰 거목이셨습니다.
언제 뵈어도 온화한 성품으로 후배들을 대해 주셨던 사장님!
이제 그 나팔꽃 곱게 핀 저승에서 사모님과 해후하시면서 아무쪼록 후고의 염려 일랑 훌훌 떨쳐 버리시고 부디 영생극락 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하오며 이만 약력보고를 마치겠습니다
.<정운종 전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겸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