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삼가 3.1만세운동 89년만에 햇빛>
3만여명이 참가한 전국 최대규모 합천 삼가장터 3·1운동이 최근 잇따라 공적이 인정되는 등 뒤늦게 경남 항일사가 빛을 발하고 있다.
권영규 선생(합천군 가회면 둔내리 두심마을 출생)은 1919년 3월 23일(음력 2월 22일 삼가장날) 삼가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대표적 인물로 이번 3월 1일에 ‘건국 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앞서 지난해에는 삼가 두모리 출생인 이상현(李相賢·손자 이근홍씨 미국 버지니아 거주) 선생이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특히 1908년 의병전쟁 때 순국한 가회면 외사리 내사마을의 김화숙·찬숙(건국훈장 애국장 추서)의 후손을 조찬용(경남도의회 특별전문위원)씨가 수소문끝에 어렵게 찾아 훈장과 연금 등 혜택이 돌아가게 해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이번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은 권영규 선생은 3월 23일 쌍백면(현재의 평구, 평지, 육리 등)에서 아버지의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상복을 입은 채 조국독립을 외치며 격렬한 만세시위를 벌였다.
1차로 일어난 3월 18일의 삼가 장날을 이용하여 상백의 정연표, 가회의 한필동 선생 등과 함께 500여명의 시위군중을 지휘하여 오전 11시부터 오후 8시까지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도 했으나 일제의 무력행사로 강제 해산돼 이날 거사일을 정한 것이다.
쌍백, 백산(현재의 하신, 운곡, 백여, 삼리 등) 주민들이 시위도중에 일제(日帝)의 연락망을 두절하기 위하여 전주 2개를 쓰러뜨리고 삼가 장터에 도착하기도 했는데, 이날 삼가 장터에는 가회·삼가·쌍백·백산·대양·용주·대의·생비량·신등면으로부터 시위군중이 모여들어 그 수가 3만명이나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만세의거였다.
오후 3시경, 정금당(正衿堂, 현 삼가면사무소) 앞에서 조국독립의 필연성과 일제의 침략상을 규탄하는 강연회가 열렸다.
마지막 연사인 임종봉 선생이 등단하여 연설 할 무렵, 강연장을 포위하고 있던 일본 헌병이 임 선생에게 총격을 가했다. 이에 격분한 시위군중이 그들에게 달려들자, 일본 헌병은 경찰주재소로 도망쳤다. 오후 5시 30분경, 시위군중은 몽둥이와 낫을 들고 경찰주재소로 달려갔다. 선두에 서서 상복을 입고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던 권영규 선생(만54세)은 사태의 위급함을 느낀 일본 군경의 무차별 사격으로 현장에서 총상을 입고, 다음날 음력 2월 23일(양 3월 24일) 순국했다. 순국자는 40여명, 부상자는 150여명, 체포 50여명이나 되었다.
이번 서훈신청은 삼가 장터 3·1운동 기념사업회 부회장인 조찬용(53)씨가 증빙자료 등을 첨부한 공적조서를 작성하여, 가회 두심마을에 살고 있는 방손인 권창호씨를 신청인으로 하여 국가보훈처에 신청서를 제출하여 3·1절에 결실을 보게 됐다.
지난해에도 조찬용씨가 국가보훈처에 재심요청을 하여 삼가 두모리 출생으로 순국한 이상현선생이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게 하는 등 꾸준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조찬용씨는 “1919년 4월 1일 유관순 열사의 천안 병천면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보다 더 크고 격렬했던 삼가 장터 만세운동에 대해 89년이 지난 시점에 역사적인 재평가와 재조명이 이루어지게 된 것은 늦은 감이 없지는 않지만 의미 있는 일이다”고 밝혔다.
이어 “권영규 선생은 슬하에 딸이 하나 있었는데, 사위가 초계정씨인 정진호(鄭進浩)이고, 외손자는 정상태(鄭相泰) 현석(賢碩)·흥수(興洙) 인데, 안타깝게도 후손을 못 찾아 연금 등 국가유공자로서의 혜택을 못 받고 있어 안타깝다”며 하루 빨리 후손들을 찾을 수 있도록 언론 등의 관심을 당부했다.
이번에 삼가 용흥리의 박병규 선생도 삼가 3·1운동 순국자로 인정해 달라는 신청서를 작성, 국가보훈처에 제출했으나, 이번 3·1절 포상에는 일단 보류가 됐다.
한편 23일 오전 11시 삼가 장터 3·1기념탑 광장에서 훈장추서 고유제와 함께 개최되는 기념 추모제에, 권영규, 김화숙,찬숙, 이계엽(쌍백 하신리 출생, 4년 형,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2003년 후손이 만주에서 영구 귀국, 유관순은 3년 형) 선생의 후손들이 참석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