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바종에서 루아르 강까지 계속된 골짜기가 양쪽 언덕에
세워진 성곽 밑을 줄달음치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마치 그럴듯한 에메랄드 술잔 같으며, 밑에는 앵드르 강이
뱀처럼 구불구불 흐르고 있다.
'여자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그녀가 이 세상 어딘가에 살고
있다면 이곳이야말로 그녀가 살 만한 곳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호두나무에 기댔다......
내 마음은 나를 속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곳에서 살고 있었다!"
발자크는 <골짜기의 백합>에서 셰익스피어를 연상시킬 만큼
미려한 문장으로 미묘한 연애 심리를 구사해냈다.
이 책을 읽는 재미는 그뿐이 아니다.
그가 책장의 갈피마다 등장 인물에 못지 않은 정열을 바쳐
묘사하고 있는 투렌 지방의 가경(佳景)은 독자로 하여금 여행을
떠나온 것 같은 감회를 불러일으킨다.
호두나무 한 그루, 클로시구르드 성 앞의 돌 계단, 정원의
울타리들은 소설 속의 '나', 스물두 살의 귀족 청년 펠릭스
드 방드네스의 6살 연상의 연인 모르소프 백작 부인에 대한
연정을 뜨겁게 만들어주기도 하고 차분히 가라앉혀 주기도
하는 중요한 무대 장치이다.
발자크의 출생지이자 <고리오 영감> 등 여러 작품의 산실인
투르는 파리 몽파르나스 역에서 TGV로 1시간 거리에 있다.
1832년부터 그가 머무른 사셰 성에서 오래도록 머물면서 그의
대표적인 저작들을 생산해냈다.
생산했다 해도 틀리지 않는 것이 발자크 연구가들은 그가 새벽
2시에 일어나 오후 5시까지 쉬지 않고 일을 하고 10시에 취침
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일생동안 잠을 쫓기 위해 마신 커피가 5만 잔 이상이라는
이색적인 통계까지 나와 있다.
기자가 사셰 성을 찾은 것인 지난 1월. 수시로 비를 뿌리는 음침
한 날씨 덕에 프랑스 전체가 관광 사업에 관한 한 개점 휴업을
선언한 때였다.
루아르 강을 따라 투렌 지방 전체에 퍼져 있는 성들도 문을
닫아걸었다.
발자크의 기념관으로 보존돼 있는 사셰 성도 마찬가지.
투르 시내에서 사셰 성까지 가는 교통편은 택시 뿐이라고
알려준다.
펠릭스가 처음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그 희고 부드러운 어깨에
키스를 퍼부었던 이름도 모르는 여인을 찾아 무작정 헤매던
숲과 벌판, 그녀를 만난다는 기쁨만으로 지루한 줄 모르고 말을
몰았으며 기쁨과 고뇌의 눈물을 아로새긴 그 길을 택시로 짚어
보게 된 셈이다.
사셰 성은 그리 높지 않은 언덕배기에 빌로드 촉감의 진초록
이끼에 싸여 있다.
멀리 프랑스 최장의 강인 루아르 강과 투렌 지방을 가로질러
흐르는 셰르 강이 내다보이고 널따랗게 펼쳐진 평원, 마로니에,
보리수나무 등이 우거진 숲 그리고 오른편의 투렌 골짜기에
이르기까지 자연의 혜택을 흠뻑 입은 곳임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손님도 많지 않은 날, 더구나 머나먼 나라 '코레'에서 찾아온
손님을 맞이한 택시 기사 클로드 씨는 투렌 지역 곳곳을 안내
하며 "저기는 꼭 사진을 찍었으면 한다"는 등 시골사람다운
순박함과 열정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정작 발자크에 대해서는 시큰둥할 뿐이다.
"발자크는 외국 사람들이 오히려 좋아하나봐요.
우리는 별로 읽지 않아요"하는 식이다.
어쨌거나 사셰는 발자크가 대표작들을 쓸 수 있었던,
작가로서는 비교적 행복했던 시설을 증거해주는 곳이다.
그에 비하면 파리에는 발자크가 일생 동안 겪은 '간난'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다.
천재 작가 중에는 펜만 들면 주옥같은 구절들이 손끝에서 줄줄
흘러나오기나 하는 것처럼 단번에 성공을 거둔 부류도 물론
있다.
그러나 발자크의 생애와 창작 생활은 결코 편안하지 못했다.
그는 파리에서 사는 동안 센 강의 왼쪽, 즉 파리지앵들이
리브 고슈라고 칭하는 곳에서 3군데, 반대편인 리브 드루
아트에서 6군데의 집을 전전했다.
경제적인 어려움과 무엇보다 빚쟁이들 때문이었다.
비스콘티 거리 17번지에는 새로 칠을 한 평범한 2층 건물이
서 있다.
건물벽에는 '<인간 희극>의 작가 발자크가 이곳에 1826-8년에
인쇄기를 설치했다'는 기념판이 붙어 있다.
이 인쇄업은 이렇다할 작품 하나 쓰지 못하고 한껏 초조해 있던
발자크에게 결정타를 안겨줬다,
"나폴레옹이 칼로 정복하지 못한 것을 펜으로 정복하리라"하며
자신감에 넘쳤던 발자크는 벼랑에 몰란 신세나 다름없었다.
농부가 들일에 전념하듯이 오로지 생업인 저작에 열중했다.
파리의 대표적 부촌인 파시, 르누아르 거리 47번지에는 발자크
기념관이 남아 있다.
파리의 지하철인 메트로에서 내려서부터 상세한 표지가 안내해
주는 대로 따라가면 르누아르 거리에서는 단층 건물로 보이고
반대편 거리에서는 3층 건물로 보이는 묘한 주택이 나타난다.
이 건물을 그가 선택한 것은 빚쟁이가 찾아왔을 때 뒷문으로
빠져나가기 위함이었다.
라마르틴, 뒤마, 조르주 상드 등과 주고받은 편지, 육필 원고,
소장했던 책들, 페이퍼 나이프, 찻 주전자, 인장, 시계 등 그가
생전에 가까이했던 물건들을 꼼꼼이 모아뒀는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서재에 놓인 책상이다.
그것은 그가 한스카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참한 생활을
나와 함께했고 내 눈물을 닦아줬고 내 모든 생각을 들어줬으며
내 팔이 항상 그 위에 있었고 내가 글을 쓸 때 함께 명상했다"고
묘사한 바로 그 책상이다.
그리 크지도 않고 이렇다할 장식 없이 소박하기만 한 책상은
작가가 겪은 역경과 영광을 묵묵히 대변한다.
파리 시에서 운영하고 있는 이 기념관에는 하루 겨울에는
50-60명, 여름에는 90명 정도의 방문객들이 찾아온다고 한다.
그 중 60%는 외국인이라는 것이 도미니크 씨의 설명이다.
마침 3명의 여학생이 전시물을 둘러보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파리 9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하는 클라리스 크리텔양은
"우리는 물론 발자크의 작품들을 읽었고 학교에서도 배웠다
그에대한 관심은 그 이상도 그이하도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20C 말을 살고있는 젊은 세대에게 사실주의 소설의 아버지를
열광적으로 좋아하길 기대하는 것은 아닌게 아니라 무리한
일이다.
조정래도 알고 신경숙도 아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이인직이나
이광수는 왜 안읽느냐고 윽박지르는 것이나 다름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가 묻혀 있는 묘지 페르 라셰즈 공동 묘지에서도 그같은
사실은 증명된다.
1799년 투르에서 태어나 1850년 파리에서 죽었다는 간단한
비문이 적혀 있는 그의 묘비 앞에는 아이리스 두 송이가 놓여
있다.
옛 작가를 사모하는 누군가가 갖다놓았으리라.
그러나 이 묘지의 관리인의 말은 발자크를 위해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공동 묘지까지 찾은 방문객을 또 한번 실망시킨다.
"젊은 사람들은 짐 모리슨의 무덤이 어디냐고만 묻는답니다."
짐 모리슨은 전설적인 록그룹 '도어즈'를 이끌던 천재 가수다.
파리를 전전한 그였기에 파리 곳곳에는 그의 흔적이 많다.
라스파이유 거리 한복판, 몽파르나스 거리를 내다보는 자리에
위치한 발자크 동상도 그 중 하나이다.
로댕이 제작한 수많은 발자크 상 중에서 최고 걸작인 이 동상은
문인 협회의 반대로 폐기 처분당할 뻔했다.
하필이면 잠옷 차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같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잠옷 바람의 발자크는 최고
번화가에서 현대의 파리지앵들과 호흡하고 있다.
꼭 세월의 두께만큼 푸른 녹을 뒤집어쓰고, 두둑한 배를 문지르
면서. 그의 배짱 있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이 모든 것이 다 인간 희극 아니겠는가".
(프랑스 투르에서 한혜진 기자, 1994년 2월 18일, 경향 신문) |
첫댓글 발자크에 대하여 더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오래 전에 읽은 작품들이라 기억이 너무 아스라한 것들도 많지만 시간 내어서 좀 읽어보고 싶습니다
행복한 주말 되셨나요?화이팅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