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사회에서 전승되어 조선말기에서 20세기초에 특히 성행하였던 노래의 하나로서 전문예능인들의 노래, 곧 기생ㆍ사당패ㆍ소리꾼과 같은 전문가들이 김 사설을 기교적 음악어법으로 부르는 노래를 잡가라고 하며 이보다 단순한 비전문가들의 노래인 민요와 부별 되는 개념으로 쓰인다. 따라서 민요는 별도의 전승 과정이 없이도 구전되지만 잡가는 반드시 스승으로부터 배우는 과정을 거쳐서 이어져 오고 있다.
2. 잡가의 유래
19세기 이전에는 잡가란 말은 정가(正歌)가 아닌 모든 종류의 노래를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따라서 애초에는 선소리(立唱)도, 민요도 판소리도 모두 잡가에 속했다. 때문에 잡가라는 말은 특정한 음악의 장르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렇게 잡가로 취급 외었던 것 중에서 서서 부르는 노래는 서서 부른다 하여 선소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고, 극적(劇的)인 내용을 소리로 엮어 나가는 노래를 판소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한 민중들의 생활현장 속에서 불려지던 노래들이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음악적, 연 행적 특성에 따라 선소리, 판소리, 민요 등의 이름으로 불려짐에 따라 이러한 것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 노래가 잡가라는 이름을 그대로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은 잡가가 토속민요와 선소리, 그리고 판소리와 구별되는 음악적, 연행적 특징을 가진 장르의 노래를 지칭하는 말이 되어 버렸다. 잡가는 흔히 앉아서 부른다하여 좌창(坐唱) 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잡가라는 이름보다 구체적으로 장르에 특성을 설명해 주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판소리를 잡가라고 지칭한 기록도 보이고 (윤달선의 - 광한루악부)춘면곡, 황계사와 같은 가사를 잡가라 부른 기록도 있으며 (유만 공의 - 세시풍요), 20세기초에는 민요와 잡가의 구별 없이 민 묘도 잡가라 하고, 잡가를 민요에 표합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 음악적 구조와 연주양태가 민요와 다름을 부별하기 위하여 별도의 장르로 나눈다. 대개 민요는 후렴이 붙는 짧은 사설을 정해진 선율에 반복하는 유절형태가 많은데 비하여 잡가는 긴사설을 통절형태로 노래하는 것이 보통이고 앉아서 노래할 때 에 격식을 달리한다.
3. 잡가의 종류
현존하는 잡가는 지역적 특성에 따라 경기잡가ㆍ서도잡가ㆍ남도잡가로 나누는 것이 보통이다. 각 잡가의 특징 및 세분화는 밑에서 밝힌다.
1) 경기잡가(京畿雜歌)
연주형태에 따라 서서 부르는 입창과 앉아서 부르는 좌창으로 나누며 입창은 선소리라는 별칭이 있으나 좌창을 앉은소리라고 하지는 않는다.
① 산타령(선소리)
흔히 선소리 산타령이라고 하듯이 서서 신나게 부르는 노래이다. 장고를 맨 '모갑이'와 소고를 든 여러 소리꾼이 메기고 받는 형태로 노래한다. 놀양 - 앞산타령 - 뒷산타령 - 자진산타령(도라지타령)의 순서로 부르면 선소리 패라 불리는 뚝섬패, 왕십리패, 성북동패, 과천패, 등이 특히 유명하였다. 사설내용은 산, 강, 절 등 자연을 읊은 노래이며 이 경기입창이 다른 지역으로 퍼져 나가면서 서도 입창과 남도입창이 발전하게 되었다.
② 12잡가
서울을 중심으로 경기지역에서 부려졌던 잡가로 앉아서 부르며, 좌창또는 긴 잡가라고도 한다. <경기민요>라는 이름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제 57호로 지정되어 있다. <21잡가>에는 <유산가>, <소춘향가>, <형장가>, <집장가>, <십장가>, <평양가>, <달거리>, <방물가>, <출인가>, <제비가>, 적벽가>, <선유가>등의 12곡이 있다.
이중에 <달거리>, <십장가>, <방물가>, <출인가>를 따로 떼어서 잡잡가와 8잡가로 분류하기도 한다. 대체로 잡잡가는 8잡가 보다 시기적으로 나중에 생긴 것이며, 음악적으로도 비교적 민요에 가까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원래 잡가는 12곡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12잡가'를 선정한 이유는 아마도 '12가사'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 것 같다. '12잡가'는 '12가사'와 비슷한 면이 많은데, 이 중에서 <집장가>와 <수양신가>, <매화타령>은 음악적으로 구별이 곤란할 정도로 비슷하다. 가사의 음계는 서도민요의 선법을 위한 것이 많은데 12잡가도 <선유가>, <평양가>, <달거리>, <출인가>등 만이 경기민요의 선법을 가지고있고, 나머지는 서도민요의 선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심 음의 5도 위음을 떠는 접도 서도민요와 같다. 그러나 잡가와 가사를 구별짓는 차이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이 두 가지는 창법(唱法)이 다르다. 가사는 가성(假聲)을 많이 쓰고, 목소리를 떨 때도 가늘게 떠는 반면 잡가는 <집장가>외에는 대부분 육성(肉聲)을 쓰고 떨 때에도 굵고, 힘차게 떤다. 또한 사설의 내용도 가사는 지식층의 기호에 맞는 유식한 한시(漢詩)를 많이 채용하는 반면 잡가는 이보다 더 직접적인 표현법을 사용한다. 가사내용은 판소리처럼 서사적 이야기이고, 장단은 대개 6박자의 도드리 장단으로 되어 있으나 집장가만은 세마치 장단으로 부른다. 도드리장단을 사용하는 접에서 18세기 말엽이후에 생성되었음을 알 수 있고 선율은 서도소리에 보이는 수심가 토리에 가까우나 시기 새가 서도소리보다 짙지 않고, 경기민요에 보이는 경토리(京調)가 섞여서 특이한 음조(音調)를 같는다. 자세한 곡의 설명 및 음악적 특성은 아래와 같다.
②-1. 유산가
"화란춘성하고 만화방 창이라 때 좋다 벗님네야 산천경개를 구경을 가세. 죽장망혜 단표자로 천리강산을 들어를 가니 만산홍록들은 일년일도 다시 피어 춘색을 자랑 노라 색색이 붉었는데 창송취죽은 창창울울하데 기화요초 난망 중에 꽃속에 잠든 나비 자취 없이 날아난다."
가사에 한문 투가 많긴 하지만 그 뜻은 다 봄날과 관련해서 멋진 내용들을 나타내고 있다. 철따라 자연의 변화를 느끼고 자연경개를 즐기며 풍류스럽게 살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는 노래이다. 곡조는 밋밋한 듯 하지만 6박자의 도드리장단에 맞추어 평온하게 부르는 창법이 아무리 오래 들어도 질리지 않는 그런 노래이다. 이런 노래도 원래는 남자 소리꾼들이 잘 부르던 노래인데 20세기 들어오면서 이런 노래가 요정이나 일반 놀이판에서 자주 불리어 지게되고 대중의 인기를 얻게 되니까 기생들이 많이 배우게 되어 지금은 여자들이 많이 부르는 노래가 되어버렸다.
②-2. 적벽가(赤壁歌)
노래의 처음이 "삼강은 수전이요 적벽은 오병이라. 난데없는 화광이 충천하니 조조(曹操)가 대패하여 화룡도로 행할 즈음에. 응포일성에 일원대장이 엄심갑옷에 봉투구 저켜쓰고 적토마 비껴 타고 삼각수를 거스릅시고 봉안을 크게 뜹시고 팔십근 청룡도 눈 위에 선뜻 들어 엡다 이놈 조조야 ... " 하고 계속되는데 내용인즉 삼국지에 나오는 적벽대전 후의 상황이다. 조조가 크게 패해서 화룡도로 도망을 가는데 관운장이 청룡도를 들고 앞에 나타나 "이 놈 조조야 " 한다는 것이 아닌가?
한때는 관운장이 조조의 포로가 된 적이 있지만 이번에는 조조가 관운장에게 붙들리어 꼼짝없이 죽게 되었다. 삼국지의 내용을 아는 사람들은 이 노래만 들어도 적벽대전의 전황이 저절로 짐작될 정도이기 때문에 이 노래가 인기가 있었을 것 같다. 과거의 애호가들은 이런 노래를 통하여 이야기도 감상하고 부담 없는 노래도 감상하는 이중의 재미를 즐겼던 것으로 생각된다.
②-3. 제비가
요즘 가장 자주 불리는 잡가는 제비가 이다. 곡조와 리듬이 변화가 있어서인 것 같은데 중간에 장단이 세마치장단으로 바뀌면서 노래가 한결 경쾌하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처음은 "만첩산중 늙은 범 살찐 암캐를 물어다 놓고 에어르고 노닌다." 하면서 도드리장단으로 천천히 부른다. 그렇게 한 4프레이즈쯤 하고는 "제비를 후리러 나간다. 제비를 후리러 나간다." 하면서 장단을 세마치 장단으로 치고 노래도 고음으로 높이 질러 아주 시원시원한 느낌이 나도록 부르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점 때문인지 이 노래가 자주 불리어 지고 또 인기도 대단하다. 경기창을 배우는 어린이들도 이 제비가 만은 흥미를 가지고 열심히 배우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대부분의 잡가는 느리기 때문에 어린이들이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제비가 만은 그런 지루한 느낌이 별로 나지 않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②-4. 소춘향가
12잡가에는 판소리 춘향가에서 따온 듯한 곡명이 네 가지나 있다. <소춘향가>, <집장가>, <십장가>, <형장가>가 그것인데 내용상으로 보면 출인가 역시 춘향가의 내용으로 시작하고 있기 때문에 5곡이 판소리 춘향가와 관계를 가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은 판소리가 먼저 발달하고 그 세력이 서울까지 미치게 되니까 서울지역의 소리꾼들이 그 내용을 빌려서 경기 스타일의 잡가를 만들어 부르게 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소춘향가는 노래의 처음이 "춘향의 거동봐라"로 시작한다. 그러나 전체가 춘향의 일을 내용으로 하는 것은 아니고 후반에 가면 "너는 어연 계집아히관대 나를 종종 속이느냐" 라든지 "장부 간장을 다 녹이느냐"와 같은 가사가 나와서 온통 여자를 생각하는 내용으로 되어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②-5. 집장가
잡장가는 춘향가에서 춘향을 매질할 때 집장사령이 하는 거동을 묘사한 내용이다. "집장군노 거동을 봐라 춘향을 동틀 에다 쫑그라니 올려 매고 형장을 한아름을 디립다 덤석 안어다가 춘향의 앞에다가 좌르르 펼뜨리고 좌우 나졸들이 집장배립하여 분부 듣주어라 여쭈어라 바로 아뢸 말씀 없소 사또 안전에 죽여만 주오." 이 한 부분만 봐도 준향이가 어떻게 매를 맞게 되는지 집작할 수 있을 만큼 극적인 내용이 잘 묘사 되어있다.
②-6. 형장가
형장가는 춘향이가 매맞은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을 노래로 부르는 것이어서 가사만 봐도 내용을 집작할 수 있을 것이다. "형장 태장 삼모진 도리매로 하나를 치고 집작할까 둘을 치고 그만둘까 삼십도에 맹장 하니 일촌 간장 다녹는다. 걸렸구나 걸렸구나 일등춘향이 걸렸구나 사또 분부 지엄하니 인정을랑 두지마라. 국곡투식 하였느냐 엄형중치는 무삼일고. 살인도모 하였느냐 향쇄족쇄는 무삼일고. 관정발악 하였느냐 옥골최심은 무삼일고. 불쌍하고 가련하다 춘향어미가 불쌍하다."
②-7. 평양가
평양가는 평양에 있는 월선이 집에 놀러가자는 내용으로 가사의 앞부분은 이렇다. "갈까보다 갈까보다 님을 따라 님과 둘이 갈까보다. 잦은 밥을 다못먹고 님을 따라 님과 둘이 갈까보다. 불붙는다 불이 불붙는다 평양성내 불이 불붙는다. 평양성내 불이 불붙으면 월선이 집에 행여 불갈세라. 월선이 집에 불이 불붙으면 육방관속이 제가 제알리라. 가세 가세 노리 놀러 가세 월선이 집에 노리 놀러를 가세. 월선이 나와 소매를 잡고 가세 가세 어서 들어를 가세. 놓소 놓소 누리 놓소 그려 직령 소매 노리 놓소 그려." 평양가의 가사는 이와 같이 평양에 사는 월선이가 주 대상이 되어 그려지고 있는 노래이다.
②-8. 선유가
유산가가 산으로 놀러가자는 노래라면 선유가는 물이 있는데로 뱃놀이 가자는 내용이다. 그래서 노래의 처음도 "가세 가세 노러가세 배를 타고 놀러를 가세. 지두덩기여라 둥게 둥덩 덩실로 놀러가세" 하며 뱃놀이를 권유하는 말로 시작하는데 이 부분이 후렴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그래서 먼저 후렴을 하고 한 마루하고 또 후렴을 하고 한 마루 하고하는식으로 세마루를 하고 후렴으로 끝난다. 그러니까 후렴은 처음에도 하고 맨 나중에도 하는 셈이다.
②-9. 출인가
출인가도 춘향전과 관계가 있다고 한 적이 있다. 노래의 처음이 "풋고추 절이김치 문어전복 곁들여 황소주 꿀타 향단이 들려 오리정으로 나간다." 로 시작한다. 향단이에게 술상차려 오리정으로 나가자고 하는 것은 춘향이 이고 그것은 이몽룡이 남원을 떠나 서울로 갈 때 이 별차로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 다음의 가사는 "어느년 어느 때 어느 시절에 다시 만나 그리던 사랑을 품안에 품고 사랑사랑 내 사랑아 에-어화둥게 내건곤. 인제가면 언제 오리요 오만한을 일러주오." 하고 노래하는데 이별과 관계 있는 대목이 분명하다. 춘향가가 서울의 잡가로 수용될 때에는 이와 같이 한 부분이 원본 그대로 수용되는 것이 아니라 이것저것 적당히 인용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사랑타령을 하면서 여미게 된다. 그래서 출인가도 뒷부분은 "놀고가세 놀고가세 너고 나고 나고너고만 놀고가세. 오날놀고 내일노니 주야장천에 놀아볼가." 라는 가사로 노래하게 된다.
②-10. 십장가
십장가는 판소리 춘향가에서 춘향이가 집장사령에게 매를 맞을 때에 한 대 맞고 하는 말이 "일편단심 춘향이가 일종지심 먹은 마음 일부종사 하쟀더니 일시일각 낙미지액에 일일칠형 무삼일고." 하는 식으로 일자를 넣어 가사를 짓고, 두 대를 맞고 하는 말은 "이부불경 이내몸이 이군불사 본을 받아 이수중분 백로주같소 이부지자 아니어든 일구이언은 못하겠소."와 같이 이자를 넣어서 노래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열대를 맞기까지 수자를 넣어 가사를 지어 부르게 되어있는데 고급 코미디 글짓기 같은 것이어서 재미있다.
②-11. 방물가
방물이란 방안생환에 쓰이는 여러 가지 물건을 말하는 것으로 화장대, 거울, 연지, 분, 노리개 같은 것에서부터 장롱, 원앙금침, 각종 의복등 거의 모든 세간들까지도 포함된다. 옜날에는 그러한 물건들을 파는 방물장수가 있었다고 하는데 방물장수가 파는 물건은 주로 부녀자들이 방안생활에서 사용하는 각종 화장품이나 노리개, 옷감 등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방물가의 가사에도 "연지분주랴 면경석경주랴 옥지환 금봉차 화관주 딴머리 칠보족두리 하여나주랴" 라는 구절도 있고 "세간치례를 하여나주랴 용장봉장 귓도리 책상이며 자개함롱 반다지 삼층각게수리 이층들미장에 원앙금침 잣베개 샛별 같은 쌍요강을 발치발치 던져나주랴 내 무엇을 달라고 하느냐 네 소원을 다일러라."와 같은 구절도 있다.
②-12. 달거리
달거리란 월령가를 뜻한다. 정월 이월 삼월하며 각 달에 관계되는 내용들을 엮어 노래하는 것이다. 이 달거리는 처음에는 "정월이라 십오일에 망월하는 소년들아 망월도 하려니와 부모봉양 생각 새라" 하면서 노래하고 그렇게 삼월까지 하고는 "인간이별 만사중에 독수공방이 상사 난이란다 좋구나 매화로다" 하면서 우리가 민요에서 매화타령이라고 하는 그 노래로 넘어가게 된다. 그래서 달거리는 월령가 스타일로된 전반부와 매화타령으로 된 후반부로 되어있는 노래이다.
12잡가는 느리고 밋밋해 보이는 노래여서 현대에 와서는 별로 공연장에서조차 자주 들을 수 없는 노래가 되었다. 그러나 유행가가 레코드로 널리 퍼지기 전에는 오늘날의 유행가처럼 일반에게 널리 보급되었던 민속적인 예술노래였다.
③ 휘모리잡가
휘몰이 잡가는 12잡가와 같이 서울의 소리꾼들에게서 발생한 노래이다. 휘몰이 잡가는 빠른 속도로 몰아간다는 뜻의 잡가이고, 서서 부르는 입창에 속한다. 소리꾼들이 부를 때 흔히 처음에는 긴 잡가를 부르고 다음에 입창을 부르고나서 마지막에 휘모리잡가를 불렀다.
장형시조의 사설내용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며 ㈎는 상황설명, ㈏는 주인공의 물음, ㈐는 답변으로 되어있다. 긴 잡가에 비해 속도가 빠르고 사설이 많으며 내용이 해학적인 것이 특징이다.
현재 남아있는 휘몰이 잡가에는 <곰보타령>, <생매잡아>, <육칠월>, <만학천봉>, <한 잔 부어라>, <병정타령>, <순검타령>, <기생타령>, <바위타령>, <비단타령>, <맹꽁이 타령>등이 있다. 이중 <병정타령>, <순검타령>, <기생타령>, <바위타령>, <비단타령>, <맹꽁이 타령>은 서울의 풀무골의 소리꾼인 이현악이 지어서 부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휘몰이 잡가는 소리꾼들이 모인 자리에서 놀이판이 끝나갈 무렵에 불리워 졌다. 음악적으로는 엮음 시조와 비슷하나 발성법은 시조(時調)와 다른 점이 많다. 또한 선법은 경토리로 되어있으며, 끝부분은 시조와 같은 형태로 끝나는 것이 많다. 따라서 휘몰이 잡가를 시조의 변형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바위타령>같은 것은 <경기민요>의 변형으로 보기도 한다.
④ 잡잡가
산타령·12잡가·휘모리잡가 외의 전문예능인들의 노래를 모두 잡잡가라고 부르는데 장대장타령·범벅타령·국문뒤풀이·금강산타령 등이 전해온다.
▶ 경기 12잡가의 명인들...
12잡가는 조선 말기에 생긴 노래로서 추교신, 조기준, 박춘경에 의해 발달되었다. 이중에서 추교신이 가장 선배이며, 조기준은 애오개에서 살던 대장장이로 추교신으 수제자였다. 그는 시조, 수잡가, 긴 잡가, 휘몰이잡가를 잘 불렸는데, 잡가는 그로 인하여 많은 발전을 보게되었다. 이 세사람 이후에도 최경식, 주수봉, 한인호, 이현익 등이 나왔는데 특히 이현익은 풀무골의 소리꾼으로 <병정타령>, <맹꽁이 타령> 등의 휘몰이잡가를 지어서 부른 것으로 알려져있다. 박춘경의 제자인 박춘재, 주수봉, 조거준의 제자인 한인호, 이경준, 장게춘 등이 한말(韓末)에 협률사, 원각사 등에 출연해서 잡가를 불렀으며, 일제시대에는 권번에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2) 서도잡가(西道雜歌)
황해도와 평안도의 직업예능인에게 전승되어오는 전문가들의 노래를 가리키며, 서도민요 선법으로 되어있다. 사설이 특히 길고, 장단 없이 노래한다는 점등을 특징으로 한다. 서도잡가에는 <공명가>, <초한가>, <관산융마>, <추풍감별곡>, <관동팔경>, <제전>, <사설공명가> 등이 있다. 이것들을 대체로 판소리의 한 대목이나 단가(短歌)와 같이 긴사설을 가지고 있는데 이렇게 긴사설을 간단한 가락에 얹어 촘촘히 엮어 나간다. 선율은 수심가 토리로 된 것이 많고, 경기잡가가 일정한 장단을가지고있는 것에 비해 서도잡가는 일정한 장단이 없이 사설의 자수(字數)에 따라 3박, 4박, 5박, 6박, 등의 불규칙 적인 장단으로 되어 있다는 점과 노래가 끝날 때는 반드시 수심가와 같은 가락으로 끝난다는 점이 특징이다. 적벽부와 관산융마는 글을 읽는 듯한 소리로 노래하기 때문에 시창(詩唱) 또는 송서(頌書)라 하기도 한다. 산타령·서도잡가·시창과 송서로 세분된다.
① 산타령(선소리)
경기 산타령의 영향을 받은 음악으로 놀양-앞산타령-뒷산타령-자진 산타령(경발림)의 네곡을 순서대로 부른다. 음계나 선율형태 등의 음악구조는 경기 산타령과는 다르다.
② 잡가
경기 12잡가처럼 뚜렷한 양식적 특징을 드러내지 않고 서사적인 사설내용을 불규칙 장단으로 부르다가 수심가 선율로 끝맺는다. 초한가·공명가·사설공명가·제전·전장가·초로인생·장한몽가·봉황곡·향산록 등의 노해가 전한다.
③ 시창과 송서
격조높은 한문가사를 고동박이 분명치 않을 정도로 느리게 부르는 형태의 노래가 시창이고, 글읽는 형태로 노래하는 것은 송서 이다. 두 노래모두 조선조 중엽까지 유행했던 것으로 보이는 사대부들 노래 형태의 단편적인 모습으로 집작된다. 관상융마와 적벽부 등이 전한다.
▶ 서도잡가의 명인들...
이조 말 평안도와 황해도 지방에는 다른 지방에 비해 소리꾼들이 많았다. 이중에 고종시대에 활약한 허득선과 김관준이 특히 유명했다. 허득선은 서도잡가의 사설을 다듬어서 이에 적합한 가락을 지어 부른 것으로 알려져있다. 김관준은 허득선의 후배인데 서도잡가는 허득선, 김관준 두 사람에 의해 오늘과 같은 모습으로 발전하였다. 그들의 제자에는 김종조, 최선경, 이인수, 김칠성, 김주호 등이 있었다. 이들은 1920∼1930년에 잡가와 선소리의 명창으로 이름을 떨쳤는데, 이시기는 가히 경서도(京西道)소리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도소리의 명창은 해주와 개성에서도 나왔는데, 이 지역의 명창으로는 서원준, 민형식, 최풍천, 김옥신 등이 유명했다.
서도소리는 잡가, 입창, 민요가 모두 포함되지만 입창은 선소리 타령으로 무형문화재 제 19호로 지정되었는데 나머지 잡가와 민요를 묶어 따로 서도소리로 지정하였다. 처음에는 창학선이 보유자로 지정되었으나 이듬해 작고하여 그후로 김정연(작고), 옥복녀(작고), 김광숙이 명맥을 잊고 있다.
3) 남도잡가(南道雜歌)
남도 지방의 노래에는 서도나 경기도와 같이 잡가라고 구분 지어 부를 만한 것이 별로 없다. 남도지방은 특히, 판소리가 성행하였기 때문에 잡가가 뿌리내릴 자리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남도지방의 잡가는 남사당패들이 많이 불렀는데 그 후 서울의 연흥사, 장안사, 광무대, 협률사등의 공연에서도 경기도와 서도, 그리고 남도의 잡가가 많이 불리워졌다.
남도 지방에서는 소리광대와 잡가광대를 구별지어 갑가광대를 비교적 업신여겼으나 소리광대들도 사석에서는 잡가를 많이 불렀다고 한다. 현재 전하고 있는 노래 가운데 굳이 경서도 잡가와 비슷한 것을 꼽는다면 <새타령>을 들을 수 있다. 이 노래는 새들이 지저귀는 모습을 노래한 것으로 다른 잡가와 같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내용으로 이어지는 통절(痛切)형식으로 되어 있다. 선율은 육자배기 토리이며, 장단은 앞부분은 잦은 중모리로 되어있고, 뒷부분은 느린 중중모리로 무르도록 되어있다.
① 보렴
보시염불(普施念佛)의 줄인 말로 불경과 무속의 기원문을 바탕으로 한 축원 노래이며 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도습(자유장단)의 순서로, 만·중·삭·자유리듬의 장단들을 갖고있으나 선율은 계면길(미음계)을 벗어나지 않는다.
② 화초사거리
남도 음악어법으로 짜여진 산타령이라는 뜻을 담고있으며, 경기 놀양의 영향을 보여준다.
③ 육자배기
여섯 박자로 짜여진 노래라는 뜻인데 여섯 박자란 진양조를 가리킨다. 노래사설은 임을 기다리고 그리워하는 내용으로 원래는 보렴·화초사 거리에 연이어 불렀으나 일제때는 이 노래가 민요처럼 유행했기 때문에 '남도에 육자배기요, 서도에 수심가'라는 말이었을 정도였다. 노래의 구조는 시조와 같이 초장·중장·종장으로 나뉘어 중장과 종장은 선율이 고정되어있고, 초장부분은 자주 바뀌는 환두형태이다. 육자배기 뒤에는 자진육자배기가 이어지는데, 이 노래는 삼장개비(8/9) 장단으로 되어있어서 육자배기와 짝을 이룬다. 이 육자배기 위에 개고기타령을 이러 부르기도 하는데 욱자배기부터는 모두다 계면기(미음계)로 되어있다.
4. 잡가의 전승
잡가는 오늘날 12잡가로 알려진 긴 잡가와 빠른 휘모리 잡가가 주류를 이룬다. 12잡가는 <유산가>, <적벽가>, <평양가>, <달걸리>, <십장가>, <방물가>, <형장가>, <집장가>, <출인가> 등이며 휘모리 잡가는 <만학천봉>, <곰보타령>, <별정타령>, <맹꽁이타령>, <한잔 부어라>, <순검타령> 등이 있다. 이 밖에 서울 지역에는 <놀량>, <앞산타령>, <뒷산타령>, <자진 산타령>으로 이루어진 산타령이 널리 불렸다.
오늘날 추정되기로는 조선말엽 서울의 소리꾼들에 의해 성창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서울에는 잡가를 잘 부르는 '사계(四契)축 소리꾼'과 선소리를 잘 부르는 '오강(五江)의 소리꾼'들이 있어 오늘날까지 전에 이르는 일대를 가리키는 지역이름으로 사계축소리꾼이란 이 지역출신의 이름난 소리명창을 일컬었다. 이 지역에는 상공인(商工人)들이 많이 살고있었는데 여기에서 '추조박(秋曹朴)'이라 지창되는 우명한 소리꾼들이 배춘 되었다. '추조박'은 각각 추교신(秋敎信), 조기준(曺基俊), 박춘경(朴春景)으로서 근대 잡가 전승의 기틀을 이룬 장본인들이다.
이들은 잡가분만 아니라 가곡, 가사, 시조에도 모두 능하여 제자들에게 소리전반을 전수할 수 있었으며 이들에게 소리를 배운 박춘개, 주수봉, 최경식 등은 1920, 1930년대의 공개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었다.
오강의 소리꾼은 서우르이 한강, 용산, 마포, 지호, 서호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선소리명창을 가리킨다. 이들이 언제부터 선소리를 전승시켜 왔는지는 상세하지 않지만 고종 무렵 선소리 명창으로 이름을 날렸다는 의택, 종대의 존재가 그 윤곽을 어렴풋이 전해줄 뿐이다. 이후 선소리는 널리 애호되어 서울주변의 여러 곳에 선소리패가 생겼다. 가장 유명한 선소리 패로 뚝섬패, 한강패, 쇠봉구패, 용산 삼개패, 동막패, 호조다리패, 과천 방아다리패 등이 있었다. 이중에서 1860년대에는 뚝섬패의 이태문(李泰文), 동막패의 권경춘(權景春)이 유명했고, 1920, 1930년대에는 활약했던 잡가꾼 박춘재(朴春載)와 최경식(崔慶植)도 선소리에 능했었다. 그후 박춘재의 문하에서 이명길, 엄태영, 김태운, 최정식 등이 나와 잡가의 전승맥을 이었으며 이들은 잡가와 선소리를 경하여 공연하게 되었다. 이 밖에 방아다리패의 소완준, 왕십리 패의 이명길 문하에서는 잋앙배, 정득만이 나와 오늘날에 선소리 산타령을 전수하게 되었다. 한편 여성 소리꾼에 의한 잡가의 전승도 매우 활발하였는데 이들은 주로 예기학원 출신이었다. 한일합방 이전에 광교조합이라 불리웠던 예기조합은 이후 권번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갖게 되었는데 일제시대에는 한성권번, 조선권번, 종로권번이 대표적이었다. 본래 예기들은 가곡, 가사 등만 학습했을 뿐 잡가는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시하였으나 차츰 잡가를 선호하는 시세에 따라 잡가까지 겸하여 부르게 되었다. 당시 한성권번에는 가곡·가사 선생으로 장계춘(張桂春)이 잡가 선생으로는 유개동(柳開東)이 있었으며 조선권번에는 가곡·가사 담당에 하규일(河圭一), 잡가담당에 최정식(崔貞植)이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홍도(紅桃)와 보패(寶貝) 이외에도 권빈 출신의 예기 이유색, 유운선, 김연연, 김일순, 조국향, 한부용, 장국심, 장채선, 이비봉, 주학선 등이 잡가명창으로 활약이 켰다. 이들은 공연장에서의 활동은 물론 1920, 1930년대의 유성기 음반에 잡가를 취입하였으며 방송활동을 통해서도 잡가를 널리 퍼뜨렸다.
5. 민요와 잡가의 차이
잡가는 우리가 흔히 애기하는 민요와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차이가 있다. 우선 잡가를 향유했던 계층을 살펴보면, 민요가 민중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불리워졌던 것에 반해 잡가는 소리를 좋아하는 도시의 소시민층에 으해서 불리워졌다. 물론 그들은 소리는 업(業)으로 삼아 그것으로 샐계를 유지하는 직업적인 소리꾼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대부분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로서 기본적인 생계문제는 이것으로 해결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노래를 좋아하는 비직업적인 입장에서 잡가를 가르치고 불렀다. 이들이 제자에게 소리를 가르칠 때 소리채(일종의 강습료)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예술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충분히 반영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음악적 개량이나 예술에 대한 열정은 직업인의 그것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비록 생업은 따로 가지고 있지만 소리를 즐기고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는 전문적인 소리꾼이나 다름이없었다. 이들을 전문적인 소리꾼과 구별하는 근거는 소리를 업(業)으로 삼아 생계를 꾸려 나가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잡가는 흔히 마을의 공청(公廳)에서 함께 부르고, 즐기는 민요와는 달리 보다 공연예술쪽에 가까운 노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음악적 내용으로 볼 때에 잡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을 가지고있는 내용의 가사를 절(節)이 바뀔 때마다 음악을 조금씩 변화시켜 나가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