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본명 태영(泰英). 함남 함주 출생. 중국 1943년 베이징[北京]대학 농학원을 졸업한 후 함남·경기 도청 등에 근무하다가 나병의 재발로 사직하고 고향에서 치료하다가 1948년에 월남, 49년 [신천지]에 <전라도> 등 12편의 시를 발표하고, 이어 제1시집 <한하운 시초(詩抄)>를 간행하여 나병시인으로서 화제를 낳았다. 53년에는 그의 대표시로 일컬어지는 <보리피리>를 [서울 신문]에 발표하고, 이어 제2시집 <보리피리55>를 간행하고, 56년 <한하운시전집>을 출간하였다. 57년 자서전 <나의 슬픈 반생기>, 60년 자작시 해설집 <황토(黃土) 길>을 냈다.
자신의 천형(天刑)의 병고를 구슬프게 읊은 그의 시는 애조 띤 가락으로 하여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한하운 연보>
▲1919 : 함남 함주군(咸州郡) 동촌면(東村面) 쌍봉리(雙峰里)에서 한종규(韓鍾奎)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출생. 가계(家系)는 3대를 과거에 급제한 선비 집안으로 지방 지주였음.
▲1925 : 함흥으로 이사
▲1926 : 함흥 제일공립보통학교 입학. 내내 우등생, 음악과 미술에 뛰어났음.
▲1931 : 봄에 몸이 무겁고 붓기 시작함(나병 발병의 시초)
▲1932 : 보통학교 졸업. 이리 농림학교(裡里農林學校) 입학, 수의축산과(獸醫畜産科) 전공.
▲1934 : 시와 소설을 습작. 순정의 여인(당시 여학생) R을 사귐.
▲1936 : 봄, 경성대부속병원(京城大附屬病-현, 서울대 부속병원)서 나병 확정 진단.
▲1937 : 이리 농림학교 졸업. 일본 동경 성혜(成蹊)고등학교 입학.
▲1939 : 동경 성혜고등학교 2년 수료, 나병이 악화되어 귀국 요양. 10월, 중국 북경으로 감.
▲1941 : 중국 북경대학 농학원 축목학계(畜牧學系) 입학.
▲1943 : 동 농학원 졸업, 귀국.
▲1944 : 함경 남도 도청 축산과 근무. 5월, 도내 장진군으로 의원(依願) 전근. 가을에 경기도 용인군으로 전근.
▲1945 : ㆍ봄, 나병 악화. 관직을 사직, 함흥 중앙동으로 귀가, R의 도움을 받아가며 치료. 이 때부터 본명인 '태영(泰永)'을 버리고 '하운(何雲)'을 씀. 문학 공부에 전념. ㆍ8ㆍ15 광복 후 재산을 몰수당하고, 노점 책장수ㆍ[건국서사](建國書肆) 운영.
▲1946 : 3월 13일, 함흥 학생데모사건에 혐의를 받고 체포되었다 풀려남. 모친 사망.
▲1949 : ㆍ[신천지] 4월호에 <나시인 한하운 시초>(癩詩人 韓何雲詩抄)라 하여 시 <전라도 길 -소록도로 가는 길에>외 12편이 실리게 됨. ㆍ첫시집 <한하운 시초>(정음사) 간행(시 26편 수록) ㆍ8월, 경기도 수원시 세류동 정착촌인 하천 부락(河川部落)에 입주.
▲1950 : 3월, 경기도 부평 소재 나환자 정착촌인「성계원」으로 이주, 자치회장에 선임됨.
▲1952 : 5월, 부평에 [신명보육원](新明保育院) 창설, 원장이 됨.
▲1953 : ㆍ경기도 용인에 [동진원](東震園) 창설. ㆍ6월, 재판 <한하운 시초>에 5편 추가 간행. 8월 이후 4개월간 신문과 국회에서 한하운의 시집과 관련, 그의 정체에 대해 논란이 벌어짐.ㆍ시 <보리피리>를 [서울 신문] 10월 15일자에 발표.
▲1954 : [대한한센총연맹] 결성, 위원장이 됨.
▲1955 : ㆍ3월 제2시집 <보리피리>(인간사) 간행.ㆍ시 <비창(悲愴)>을 [평화 신문] 4월 5일자에 발표.ㆍ자서전 <나의 슬픈 반생기>를 [희망] 5월∼57년 1월호에 걸쳐 연재.
▲1956 : ㆍ6월, <한하운시전집>(인간사) 간행 - 시 48편 수록. 수필 <나의 시작 수업(詩作修業)>을 [현대문학] 12월∼다음해 1월호에 걸쳐 발표.ㆍ시 <은진미륵불> 발표 - [자유문학] 12월호
▲1957 : 10월 자서전 <나의 슬픈 반생기> 간행(인간사)
▲1958 : ㆍ3월 [청운보육원] 설립, 원장. ㆍ수필 <큰 코 다친다>(신문예 7월호), <인간에 대한 반항정신으로>(신문예 9월호), <어느날의 단상(斷想)>(신문예 12월호), <사진에 대한 불연속적 관견(觀見)>(사진 문화 12호) 발표. ㆍ시 <인간 추방>(사진문화 12호) 발표.
▲1959 : ㆍ4월, <한하운 자작 시 해설집>(인간사) 간행. ㆍ시 <어느 velt는 살고 있다>(서울대 수의대학보 2집)ㆍ<벽화에 붙이는 글>(이리농림학교 새싹 6호) 발표. 수필 <영원한 민족의 서정시-소월의 시를 말한다>(신문예 8원호) 발표. ㆍ나병이 음성으로 진단받아 사회 복귀, [한미제역회사] 설립, 회장 취임.
▲1960 : ㆍ7월 서울 명동에 출판사 [무화문화사](無何文化社) 설립. ㆍ8월 자작시 해설집 <황토길>(신흥출판사) 간행. ㆍ수필 <첫사랑의 요오델가(歌)>(여원 3월호)ㆍ<방랑과 향수>(새벽 10월호) 발표.
▲1963 : 시 <세월이여>ㆍ<오마도>(이상 새빛), 수필 <애염전(愛染箋)>(야상) 발표.
▲1964 : 시 <포인세치아 꽃>ㆍ<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수필 <분뇨소> 발표
▲1965 : 수필 <물전쟁>(재무120호) 발표
▲1966 : 시 <회심(回心)>(인천신문)ㆍ<금유월(今六月)>(일요신문) 발표
▲1968 : 시 <올봄에도 꽃은 피는데>(새길 151호)ㆍ<장승>(사상계 5월호), 수필 <나의 소하(銷夏)>(새교실) 발표. 4월 간경화증 발병.
▲1969 : 시 <귀향>(새길 159호) 발표.
▲1970 : 시 <춘일지지>ㆍ<낙엽>ㆍ<춘와>ㆍ<파고다공원>ㆍ<포인세치아 꽃>(이상 시인), 시 <귀로>(교정 129호)ㆍ<어떤 인생>(새길 168호)ㆍ<자유당>(한국문학전집) 발표.
▲1973 : 전남 고흥군 도양면 소록도에 시비(詩碑) 건립.
▲1975 : 3월 2일 인천시 십정동산 39번지에서 간경화증으로 사망. 경기도 김포군 계양산 장릉 공원 묘지 안장.
▲1977 : 유고시 <백목란 꽃>외 19편 [한국문학] 6월호에 발표됨.
▲1989 : 시집 <가도가도 황톳길>을「지문사」에서 간행
- <한하운 시초(韓何雲詩抄)> -
한하운의 제1시집. 1949년 정음사(正音社) 간행.
책머리에 지은이의 필적과 나병으로 손가락이 잘린 수인(手印)이 찍혀 있으며, <전라도 길> <손가락 한 마디> <벌(罰)> <파랑새> <여인> 등 25편의 시와, 그를 시단에 소개한 이병철(李秉哲)의 해설이 수록되었다.
이 시집은 나병 환자라는 자신의 기구한 운명, 처절한 체험이 주요 내용이다. 체험 그 자체가 특이한 것으로 호소력을 가지고 있으나 그는 감상을 자제하고 객관화함으로써 표현효과를 더욱 높였다. 이 시집은 최초의 나환자 시집으로서 특이한 체험을 객관적인 어조로, 또는 민요적 가락으로 노래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 시집 <보리피리> -
한하운(韓何雲)의 제2시집. 1955년 인간사(人間社) 간행. 4·6판. 90면. 1부「보리피리」에 <보리피리> <국토 편력> 등 5편, 2부「리라꽃 던지고」에 <부엉이> <무지개> 등 7편, 3부「인골적(人骨笛)」에 <비창(悲愴)> <추석달> 등 5편, 모두 17편이 수록되었다.
- 시 <보리피리> -
<해설>
시집 <보리피리>의 표제시.
서울 신문사 사회부장으로 있던 오소백에게 신문사 안에서 즉석으로 써 준 즉흥시로 알려져 있다.
자서(自序)에 적힌「천형(天刑)의 문둥이가 되고 보니 지금 내가 바라보는 세계란 오히려
아름답고 한이 많다. 아랑곳없이 다 잊은 듯 산천초목과 인간의 애환이 다시금 아름다워 스스로 나의 통곡이 흐느껴진다」라는 말을 되새기면 이 시가 한층 더 애절하게 와 닿는다.
이 시를 가리켜 평론가 김윤식(金允植)은「성한 사람이 되려는 희원이 성한 사람에의 적의를 동반하지 않고, 그 단계를 넘어서서 멀리 거리를 두고 바라다 보는 상태에 이 시는 도달되어 있다., 또한 이 시는 한국적 서정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을 담고 있다. 이 점에서 보면 한하운의 서정적 가락은 한국시사에 길이 남을 수 있을 것이다」('한하운의 문학과 생애'-새빛 75년 3월호)라고 쓰고 있다.
<형식>
짧은 행 구분, 음악적인 효과를 대단히 중시하고 있다. 각 연 첫 행에 '보리피리 불며'와 끝 행에 '필- ㄹ닐니리'를 규칙적으로 삽입함으로써 반복에 대한 효과를 보고 있다.
<기교>
이 시는 언뜻 보기에 외형이 대단히 중시되어 있다. 하지만, 시의 호흡이 이 외형에만 얽매어 있느냐 하면 그렇지가 않다. 내재율이 대단히 자유롭다. 또 자유로우면서도 민요조의 가락을 지니고 있다. 간결하면서도 이처럼 다양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이 시의 묘미다. 외형과 호흡이 일치되어 잇고, 우리 전래의 가락인 민요조이므로 독자와 쉽게 친할 수 있는 장점도 아울러 지닌다.
결과적으로 이 시는 최대한으로 압축된 시 형식에다 반복과 두ㆍ각운(ㅂ, ㅍ, ㅕ, ㅓ)의 효과를 동시에 노리면서 대중적인 호흡에 시를 접근시키며 성공하고 있다 하겠다.
<감상>
이 시의 작자 한하운은 일찍이 '천형(天刑)'의 병이라고 일컬어진 나환자였다. 그가 젊음과 인생과 미래를 체념하고 정든 고향을 떠나 발길 닿는 대로 방랑했던 시절을 알지 않고는 이 시는 실감되기 어렵다. 그는 이와 같은 숙명을 딛고 넘어 인간적으로 승리를 한 사람이지만, 초기의 그 처절했던 좌절감과 절망의 몸부림을 우리는 이 시를 통해 눈으로 보듯 실감할 수 있다.
3연의 <보리피리 불며/인환의 거리/인간사 그리워./필- ㄹ 닐니리>에서 그의 뼈에 사무치는 고독을 엿볼 수 있다.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평범하게 행복한 그 인간들의 거리를 지나가면서, 그 조그만 행복에서도 외면당하는 한 인간의 슬픔, 가난해도 좋으니 얼마나 건강한 인간으로 살고 싶었으랴.
이 시는 단순한 감상(感傷) 이 아니라 한 인간의 존재를 위한 절규다. 구성진 보리피리는 그저 아이들이 무심코 꺾어 부는 그런 소리가 아니고, 절박하게 살고 싶은 한 인간이, 모든 인간 조건을 박탈항한 한 인간이 오직 보리피리에 기대어 사는 집념과 위안인 것이다. - 권웅: <한국의 명시 해설>(1990) 발췌 -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靑山)
어린 때 그리워
피―ㄹ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人 )의 거리
인간사(人間事) 그리워
피―ㄹ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ㄹ닐리리.』
- <한하운 시초>(정음사.1949) -<육신의 한(恨) 우리 가락 속에 미로 승화>
- 한하운의 문학인생 -
「시가 나에게는 제2의 생명이다. 아니 전생명을 지배하고 있다. 소망을 잃어버린 어두운 나에게 스스로 백광(白光) 같은 빛을 마련해 주고, 용기와 의지의 청조(晴條)길로 나를 인도한다」라고 했듯이 시인 한하운은 시 작업을 그의 모든 것과 일치시킴으로써 절망과 고독을 딛고 나병을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보리피리>와 같은 한스러움이 넘쳐 차라리 아름다운 한국적 가락을 읊어내는 위대함을 보여 주었다. 그는 40년대말 방랑 끝에 문득 문단의 국외자(局外者)로 등장했다. 그러나「유리(遊離)의 가두(街頭)」에서 하루아침에 시인이 되었던 그의 생애는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세상으로부터 자신의 정체에 대한 의심을 받았고 나시인(癩詩人)이라는 선입관 때문에 홀대를 감수하기도 했다.
『원한이 하늘을 찢고 우는 노고지리도
험살이 돋친 쑥대밭이 제 고향인데
인목(人木)도 등 넘으면
알아보는 제 고향 인정이래도
나는 산 넘어 산 넘어 봐도
고향도 인정도 아니더라.
이제부터 준령(峻嶺)을 넘어넘어
고향 없는 마을을 볼 지
마을 없는 인정을 볼 지.』- <고향55> 전문(全文) -
어려서부터 객지를 떠돌았던 한하운에게는 인정만 있다면 어디든지 그의 고향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 인심은 야박했고, 고향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때때로「지금 나는 옛날 성하던 계절에 서 있고 / 지금의 나는 여기 있는 것 같지도 않다」고 절규하면서 육신의 고향으로 상념의 나래를 펼치고는 했던 것이다.
자서전이라 할 <나의 슬픈 반생기>에 따르면 한하운은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태영(泰英)이었다.「부계(父系)의 가문을 살펴 보면 대대로 선비 집안으로 과거를 3대나 계속하여 급제한 집안이며 함흥 지방에서는 떵떵 울리고 권세 좋게 살던 집안」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장남을 공부시키기 위해 그가 여섯 살 나던 25년 함흥으로 이사하여 나갔다. 이듬해 그는 함흥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예능 계통에 뛰어난 재주를 보이며 죽 우등생으로 다녔다. 그러나 그가 5학년이 되던 31년 봄, 몸이 무겁게 부어서 아버지를 따라 한달 남짓 온천과 삼방(三防) 약수터를 다니며 요양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그것이 나병의 시초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는 32년 봄 보통학교를 졸업하자 아버지의 의사를 좇아 이른바「내선공학(內鮮共學)」이라는 이리(裡里)농림학교에 들어가 수의축산(獸醫畜産)을 공부하게 되었다. 이리농림학교는 입학하기가 매우 어려웠던 듯 함남도청 관내 19명의 응시자 중 유독 그만이 합격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 학교에서 1학년 때부터 장거리 육상 선수로 활약했다. 그러나 상급학교 수험 공부를 하라는 꾸지람 때문에 3학년 겨울부터 운동을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발자크, 앙드레 지드, 헤르만 헤세 등의 번역 소설을 탐독하고 시의 습작을 하기 시작한 것이 그 무렵이었다. 그가 나중에 월남할 때까지 그의 병고의 아픔을 같이 나누고 병 간호를 했다는 R이라는 고향의 여학생을 만난 것도 그때였다.
5학년 졸업반이던 36년 봄이었다. 몸 전체의 말초부 양역(陽域)에 콩알 같은 결절(結節)이 생기고 궤양이 끝없이 퍼져 나가자 여기저기 진찰을 받다가 성대(城大)(현 서울대) 부속병원으로 갔다.
「기다무라(北村淸一) 박사는 신경을 만지고 바늘로 피부를 찌르곤 하였다. 진찰이 끝난 뒤
에 조용한 방에 나를 불러놓고 마치 재판장이 죄수에게 말하듯이 문둥병이라 하면서 소록 도(小鹿島)로 가서 치료를 하면 낫는다고 하면서 걱정할 것 없다고 하였다. 나는 뇌성벽력 같은 이 선고에 앞이 캄캄하였다.」 - <나의 슬픈 반생기>에서 -
37년 이리농림학교를 졸업할 때에는 그의 병은 다소 낫는 듯 했다. 그래서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성계고등학교라는 곳에 입학했다. 그러나 2년 남짓 지나면서 다시 병세가 악화하여 학교를 중도에 그만두고 귀국했다. 열심히 치료를 하면 병은 또 나아지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중국 북경으로 가서 북경대학 농학원 축목학계에 입학했고, <조선 축산사(朝鮮畜産史)>라는 논문을 제출하고 졸업했다. 그것이 43년의 일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환부는 겉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귀국하여 일단 고향으로 간 그에게 아버지는 기분 전환을 하라고 함남도청 축산과에 그를
취직시켰으나 집에서 다니기가 싫었던 그는 도내 장진군 개마고원으로 들어갔다. 황무지를 개척한다는 집념에도 불구하고 그의 병은 추위에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는 다시 남쪽 지방을 지원하여 경기도 용인군으로 전근해 갔다.
1945년 봄이었다. 「결절이 콩알 같이 스물스물 몸의 양역에 울뚝불뚝 나타나는 것이었다. 검은 눈썹은 자고 나면 자꾸만 없어진다. 코가 막혀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말은 코먹은 소리다. 거울을 쳐다보니 얼굴은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바로 문둥이 그 화상이었다」
직장의 상사마저 그가 나환자라는 것을 알아채었다. 그는 다시 함흥 중앙동 고향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그때부터 두문불출, 꼭 나가야 할 일이 있을 때는 낯익은 이목을 피해 밤을 이용했다.
전신에 고름이 흐르고 방안에는 악취가 풍겼다. 그 무렵부터 48년 그가 월남할 때까지 4년간이 가장 처절한 투병 기간이었다. 그는 죽음을 통해서 자유를 구가하려고 했다. 이름마저 본명을 버리고 하운(何雲)이라고 고쳤다.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 <파랑새55> 전문 -
'파랑새'가 되고자 하는 것은 동경이요, 이상이었다. 현실은 지옥이었다. 살아가는 것은「한번밖에 없는 자살을 아끼기」위해서였다. 게다가 기뻐해야 할 8ㆍ15 광복은 그에게 이중 삼중의 고통을 안겨 주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가산을 몽땅 빼앗기고 나자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아우의 뒷전을 따라다니며 노점 책장사를 했고, 돈이 조금 모이자「건국서사](建國書肆)라는 책점을 차렸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1946년 3월 13일 함흥 학생 데모를 구경하다가 혐의를 받고 경찰서로 끌려갔다 나오는 곤욕을 치렀던 그는 47년 4월 북괴를 전복하겠다는 의거를 꿈꾸던 아우가 체포되는 바람에 그도 연루되어 원산 형무소까지 끌려 갔었으나 나병이 악화되자 겨우 병보석이라는 명목으로 가석방되었다. 그러나 그를 정성껏 간호해 왔던 R 여인도 아우와 함께 끌려갔고 그 전 해에 어머니는 세상을 따나고 없었다. 그때 그는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왔는데, 아마도 목적은 자신의 약을 구해 보려는 데에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서울을 거쳐 나병 환자들이 살고 있는 대구의 애락원(愛樂園)을, 부산의 나요양소인 상애원(相愛園)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결국 대구 동산병원(東山病院)에서 '다이아송' 60알과 서울의 천우당(天佑堂) 약방에서 '대풍자유(大楓子油)' 3병을 구해 6월 하순에 다시 월북, 고향으로 향했다. 그러나 불심 검문에 걸린 그는 병보석을 어기고 남한에 다녀왔다는 죄목으로 다시금 원산 송도원이 가까운 어느 건물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그는 거기서 보초자를 속이고 탈주를 감행하여 도보로 동두천을 거쳐 재차 월남을 했으니 그것이 그해 8월이었다. 자유를 찾았으나 나환자인 그에게는 몸을 쉴 단칸 초목도 없었다. 그는 유류표박의 집시처럼 남한 각지를 떠돌며 깡통을 들고 구걸을 했다. 그러다가 다시 서울로 와 47년 동지까지는 헌 가마니 한 장으로 쓰레기통 가에서 밤을 지새며 보냈다. 밤사이 옆에서 자던 한 동료 거지가 죽었다. 무서웠다.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야 했다.
명동 거리에서 바, 다방, 음식점, 상점 같은 곳의 출입구를 막아서서 돈을 받아내거나 시를 팔아 연명했다. 어느덧 명동거리에서 시를 파는 사람으로 유명해진 한하운은 몇몇 문인들을 사귀게 된다. 그리하여 1949년 [신천지] 4월호에 <한하운 시초>라 하여 무려 13편의 시가 한꺼번에 실렸다. 선자(選者) 이병철(李秉哲)은 거기 <한하운 시초를 엮으면서>라는 글에서「내가 불우의 시인 천작(天作)의 죄수 하운 형(何雲兄)을 처음 만난 것은 작년 첫여름이었다. 친구 박용주(朴龍周) 형의 간곡한 소개로 정처없는 유리(遊離)의 가두(街頭)에서 방황하고 섰는 걸인 하나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라고 쓰면서 그의 시를 처절한 생명의 노래요, 높은 리얼리티를 살린 문학이라고 소개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막히는 더위 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쑤새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룸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꼬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꼬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 <전라도 길49> 전문 -
<소록도로 가는 길에>란 부제가 붙은 이 시는 커다란 반응을 일으켜「정음사」에서는 무조건 시집을 내겠다고 나서 그는 명동 성당의 방공호에서 원고를 정리했다. 그리하여 그의 첫시집인 <한하운시초>(26편 수록)가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해 8월 경기도 수원 세류동 정착촌인 하천 부락에 입주한 그는 이듬해 경기도 부평 소재의 성계원으로 이주, 회장이 되고 52년에는 그곳 도로 건너에「신명보육원」을 창설하여 세상에서 천대받는 미감아 아동을 10여 명 수용했다.
그런데 53년 여름 그와 그의 시가 구설수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른바「나시인사건」(癩詩人事件)으로, 발단은 아마도 <한하운시초> 재판이 6월에 나오면서부터로 보인다.
「1953년 8월 1일부터 주간지 '신문의 신문'이 <문둥이 시인 한하운의 정체>라는 타이틀로 한하운을 문화 빨치산이라 말한 데서 사건은 일어나고 심지어 한하운이라는 나의 아호마저 국가 멸망의 저주를 상징하는 것이라 하며, 시의 내용마저 적색시라는 것이며.... 또한 혹
독하게도 나 자신마저 허구의 인물이라고 날조하여 떠들어 댔다」
- 한하운: <보리피리에 관하여>에서) -
여기에 사실 확인을 하기 위해 취재를 지시한 사람이 서울신문사 사회부장으로 있던 오소백(吳蘇白)이었다.
「최초의 한하운시초 중에 <데모>라는 시가 실려 있었는데, 거기에 '피빛 기빨이 간다'라는 표현이 있었다. 당시 평론가 이모라는 사람이 정음사(正音社)와 관계가 좋지 않았던 모양 으로 문제를 일으킨 것 같다. 동기는 시시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경찰뿐만 아니라 국회에 서까지 논란이 되었으나 한하운이란 인물이 실존함은 물론, 그의 시도 불온하지 않다는 것 이 밝혀졌다.」 - 오소백 회고담 -
이 사건을 취재토록 하면서 사건을 확대했다 하여 오소백과 사회부 차장이던 문제안(文濟安) 기자가 신문사로부터 파면을 당하는 불행을 겪었다. 그러나 그 취재 과정에서 한하운으로부터 그의 대표작인 <보리피리>를 얻어 내었다. 신문사를 찾아왔다가 그는 편집국 안에서 즉석에 <보리피리>를 썼던 것이다. 이 시는 55년에 간행된 제2시집의 표제시가 되었다.
56년부터 그를 사귀었던 김창직(金昌稷)은「그는 떡대가 크고 씨름대장처럼 생겼지만 보기보다는 내성적이고 깐깐한 편이었다」고 그의 성격을 말하면서도 술도 보통 이상으로 잘 마셨다고 한다.
그의 시에 대한 평가는 <보리피리> 이후의 작품들이 그 전의 작품들에 비해 처진다는 데에 일치한다. 나병이 치유되고 유명해짐으로써 그만큼 치열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직도 문단의 일각에서 추리하고 있는 것처럼 어떤 사람(이병철)의 첨삭이 들어 있었던 까닭일까. 그렇다면 그가 남 앞에서 직접 쓴 <보리피리>의 탁월성은 어떻게 설명이 될 수 있을까.
어쨌든 그는 <보리피리> 이후에도 유수한 문예지에는 그의 시가 거의 실리지 않았다. 그는 73년 여름 수뢰(受賂) 혐의로 당국에 구속되었다가 오소백의 진정으로 풀려 나왔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병인 간경화를 앓다가 75년 십정동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 김용성(金容誠): <문학사 탐방>(한국 일보1982.11.20) -
<사망 관련 신문 기사>
한국시의 전통적이고 서정적인 운율 속에 천형(天刑)의 절망과 슬픔을 담았던 시인 한하운.
1950년대 전쟁 후의 황폐하고 암울한 시대 분위기와 한(恨)이 면면이 응결된 한하운의 시가 문맥의 일치를 보여 그의 시는 1960년대까지 폭넓은 독자층을 형성했다.
1949년의 첫 시집 <한하운시초>, 1955년에 나온 <보리피리> 등에 수록된 그의 시들은 소월시에 근접한 가락을 지니고 있으며, 절제된 고통의 감정이 소박한 민요 형태로 전이되고 있다.
그의 시는 <보리피리>와 같은 한(恨), 그리움 등 원초적인 정서를 일깨웠고, 젊은 시절을 나병과 투병한 시기를 대변하는 작품으로는 '소록도 가는 길'이란 부제가 붙은 시 <전라도 길>이 있다. 그러나 그는,
『가도가도 붉은 황톳길 /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는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 나병을 근치했고 부평의 [성계원](成谿園), 신명보육원(新明保育院) 창설과 함께 대한 [한센]연합위원장직을 맡아 나환자 구제 운동에 앞장서 왔다.(발췌)- [동아 일보] : 1975. 3.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