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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흘(主屹)의 영사(靈祠) (山靈) (神祠)(神祠) | |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 험한 산은 하늘 끝에 닿았고 깎아지른 벼랑은 구름 속에 들어있다 만물을 윤택하게 함에는 비록 그 자취 없으나 구름을 일으킴에는 스스로 공이 있다
孱顔倚天末 絶壁入雲中 潤物雖無跡 興雲自有功 |
별동(別洞) 윤 상(尹 祥) 이곳은 남녘 지방 요새가 되었는데 모든 산 가운데 상서로움 품었어라 봄가을로 신령에게 제사를 드리지만 백성에게 주신 도움 어떻게 보답할꼬
作鎭南州界 儲祥衆嶽中 春秋修祀事 焉報庇民功 |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작은 구름은 하늘 가운데 한줌이요 웅진은 화유 가운데 위치 했다네 송백이 어우러진 저 영궁 안에선 제수 차려놓고 풍년 농사 기도하네.
孤雲天一握 雄鎭火維中 松柏靈宮裏 椒漿賽歲功 |
허백정(虛白亭) 홍귀달(洪貴達) 하늘을 떠받들고 북두성 바라보고 땅을 빼어내 남녘의 진산(鎭山)이 되었네 밭으로 갈아 모두 평탄하게 할 수 있다면 아름답도다, 참으로 큰 공을 이룰 터인데.
擎天尊北斗 拔地鎭南中 耕鑿滿平地 休哉時乃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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곶갑(串岬)의 사다리길(棧道) | |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 구불기는 양의 창자 같은 길이 구불구불 새 나는 것 같이 기이하도다 봉우리 하나하나 모두 빼어났으니 그런 데로 말 가기가 더디구나
屈曲羊腸路 逶迤鳥道奇 峯巒一一勝 遮莫馬行遲 |
별동(別洞) 윤 상(尹 祥) 험한 산길은 양 창자와도 같고 위태로운 봉우리 말귀처럼 기이해 한 뼘 나갔다가 다시 돌아서야 하니 조심해서 더딘 것을 탓하지 마소서.
路險羊腸曲 峯危馬耳奇 寸前還人退 愼走莫嫌遲 |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잔도가 구름 밖에 얽혀 있으니 계곡 산천이 이렇게도 기이 하구나 굼뜬 말은 빠른 걸음 자랑하다가 여기에 와서는 천천히 걸어가네.
閣道縈雲表 谿山乃爾奇 駑駘誇疾步 行到此間遲 |
허백정(虛白亭) 홍귀달(洪貴達) 새 나는 길 실처럼 위태로운데 누가 저 촉나라 길 같다고 했나 잠깐 사이 발을 헛디디게 되리니 말 걸음 더디다고 탓하지 마시게.
鳥道危如線 誰云入蜀奇 須臾便失足 莫遣馬行遲 |
창밖의 오동나무(窓外 梧桐) (軒外 梧桐) (軒外 梧桐) | |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 솔솔 부는 바람이 잎사귀를 흔드는데 이지러진 달이 성긴 가지에 걸렸구나 갑자기 내리는 한밤중 비에 고향 생각을 어이하리
微風吹一葉 缺月掛疎枝 忽此三更雨 那堪萬里思 |
별동(別洞) 윤 상(尹 祥) 밤비에 오동의 새잎은 팔랑거리고 가을바람은 늙은 가지를 흔드네 초롱불 켜고 있는 한 나그네여 고향 생각에 괴로운 밤이로세.
夜雨飜新葉 秋風拂老枝 一燈窓下客 偏動故鄕思 |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빽빽한 것은 일만 홀의 잎이요 늘어진 것은 일천 열매의 가지로다 일찍이 이곳은 봉황이 묵었던 곳이라 밝은 달이 고상한 생각을 불러일으키네.
密密萬圭葉 離離千乳枝 曾經鳳凰宿 明月起遐思 |
허백정(虛白亭) 홍귀달(洪貴達) 오십 가락 거문고 연주할 필요가 없거니 궁(宮) 치(徵) 소리 아련히 울리는 것을 또 가을 밤 맞아 비 오는 소리 들려오니 내 이 느낌 고이 담아 시 지어 보노라.
不須絃五十 宮徵響枝枝 又聽秋宵雨 題詩寄所思 |
뜰 앞의 버드나무(庭前楊柳) (庭中楊柳) (門前楊柳) (門前楊柳) | |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 영남의 그 많은 나그네들 꺾어 주어 이제는 남은 것이 없으련만 의연히 봄바람에 떨치니 긴 가지는 짐짓 여전 하구나
嶺南多少客 折贈已無餘 倚被春風拂 長條故自如 |
별동(別洞) 윤상(尹祥) 가랑비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하늘하늘 가는 바람 불어대누나 만약 오나라 아가씨들이 보았다면 버드나무처럼 허리 가늘면 했겠지.
依依微雨裏 裊裊細風餘 倘使吳姬見 纖腰愧不如 |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실을 늘어뜨림은 동풍이 분 이후요 솜털을 날림은 곡우가 지난 뒤로다 간드러진 허리는 이별의 한 돋우는데 그 잎새가 더구나 미인 눈썹 같음에랴.
弄線條風後 飛綿穀雨餘 腰肢攪離恨 露葉況眉如 |
허백정(虛白亭) 홍귀달(洪貴達) 우수수 우수수 무수히 늘어지고 바람에 나부낌에 참으로 흥겨워라 문 밖의 수많은 저 버드나무들이여 다정함이 모두 너와 같지 못한 것을.
雨垂愁無限 風舞興有餘 萬萬門前樹 多情摠不如 |
푸른 절벽의 단풍(蒼壁 楓丹) (萬壑丹楓) (萬壑丹楓) | |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 붉은 잎이 푸른 절벽을 장식하니 강산이 아주 딴판 이로구나 내가 온 때가 마침 늦가을 이렇듯 좋은 경치 일찍이 본적이 없네
赤葉藏靑壁 江山擅別區 我來適秋晩 佳致見曾無 |
별동(別洞) 윤 상(尹 祥) 가을이 기이한 벼랑에 드니 서리 맞은 나뭇잎 단풍 들었네 열흘 그린 왕공의 그림이라도 여기에 그 오묘함 미치지 못하리.
秋入天成壁 霜餘錦作區 王公十日畵 此妙定應無 |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서리 귀신이 붉은붓을 휘둘러 암곡이 온통 신선 고장 되었네 석양에 까마귀 그림자 번득이니 병풍 없이는 안 되었을 터이지.
靑姨弄丹筆 岩谷盡神區 落日鴉飜影 屛風不可無 |
허백정(虛白亭) 홍귀달(洪貴達) 붉은 벼랑들은 연단술을 끝내고서 남은 색깔로 뿌려 경치 좋게 했지 내 신선 세계를 찾아가려 하니 이곳엔 신선이 없지도 않을 테지.
洪厓鍊丹罷 餘彩散成區 我欲桃源去 神仙未必無 |
그늘진 벼랑에 흰눈(陰崖白雪) (千崖積雪) (千崖積雪) | |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 겨울이 깊어 얼음이 골자기에 가득해도 봄이 오면 물이 시내를 이룬다 자연의 모습은 때를 따라 달라지는데 인정은 늙어가며 어지러워 지련다
冬深氷滿壑 春半水生溪 物態隨時異 人情老欲迷 |
별동(別洞) 윤 상(尹 祥) 벼랑 응달엔 항상 눈 있거니 봄 계곡에 물 흐르지 못하네 사람의 일을 어찌 예서 말하랴 하늘의 이치 참으로 알 수 없어라.
陰崖恒抱雪 春壑不成溪 人事何曾說 天工向此迷 |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밤새도록 구름에 달이 가리더니 일천 산 계곡에 눈이 가득 하여라 행인들은 추위로 손 지적 싫어서 갈림길에 자주 길 헤매기도 할 테지.
一夜雲籠月 千山雪漲溪 行人寒墮指 岐路每多迷 |
허백정(虛白亭) 홍귀달(洪貴達) 하룻밤 동안 온 산에 눈 내려 덮으니 은하수가 맑은 시내 위로 쏟아졌다네 일어나 하늘과 땅이 온통 은빛인걸 보고 다시 발을 걷고 보니 세상이 아득하네.
一夜千山雪 銀河墮玉溪 起看天地白 簾捲意都迷 |
오정사 종루(烏井鐘樓) (烏井霜鐘) (烏井霜鐘) | |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 나그네길 시름으로 잠 못 이루는데 외로운 베갯머리엔 달빛만 비쳐온다 어디가 한산사이냐 드문드문 울리는 종소리 한밤중에 들려온다
旅窓愁不寐 孤枕月低徊 何處寒山寺 疎鍾半夜來 |
별동(別洞) 윤 상(尹 祥) 계곡에는 저녁 아지랑이 드리웠고 바람에 떠는 나무 돌길에 서 있네 절 문루가 저만치 터 잡고 있거니 그 종소리 우중에 가만히 들리네.
溪洞煙霞晩 風杉石逕廻 禪樓知底處 鍾響雨中來 |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보찰에는 연화루가 때를 알리어 아침저녁이 가고 다시 돌아오네 밤 종소리는 절로 조리가 있어서 구름 밖에서 바람 쫓아 들려오누나.
寶刹蓮花漏 晨昏往復回 鯨音自條理 雲外逐風來 |
허백정(虛白亭) 홍귀달(洪貴達) 옛 절에서는 스님이 공양할 때니 가만히 부처에게 빌고 돌아왔으리 종소리로 멀고 가까움을 짐작하노라니 오래 뒤에 구름에 실려 내게로 오네.
古寺僧初飯 遙應禮佛回 鐘聲知近遠 良久透雲來 |
용담폭포(龍潭瀑布) | |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 옥같은 무지개 높다랗게 드리웠는데 흰 눈은 산뜻한 맑음을 뿌려준다 날고 자맥질하는 술법을 묻지 말고 변화의 신통을 알아야 하리
王虹垂蝘蜒 白雪洒淸新 莫問飛潛術 須知變化神 |
별동(別洞) 윤 상(尹 祥) 패옥을 던져 천길 아래로 부서지듯 흰 비단 풀어져 백자나 펼친 듯하네 용이 있다면 우리를 이롭게 하리니 잠겼다 날아오르는 술법 어떠하올지.
捐佩千尋碎 拖紈百尺新 有蛟能濟物 潛躍術何神 |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태초부터 깊은 굴을 이루어서 폭포 한 가닥이 참으로 새롭다네 후미진 곳엔 기괴한 짐승도 있어서 천둥 같은 소리로 위세를 떨친다네.
太始成嵌竇 飛流一派新 幽陰有奇獸 雷電助威神 |
허백정(虛白亭) 홍귀달(洪貴達) 향로는 바로 내려온 오래된 물건인데 오래도록 새로 지은 나쁜 시 씻어냈다네 두 세번 거듭 이태백의 시를 읊조리니 마치 귀신을 감동시켜 울게 하는 듯하네.
香鑪一派古 長洗惡詩新 三復謫仙詠 如聞泣鬼神 |
(3) 문경 8경 창작 문인
문경 8경을 읊은 문인들은 모두 경상도인이다 문경출신의 허백정 예천 출신의 별동, 대구 출신의 사가, 밀양 출신의 점필제 모두 한양을 오가며 새재를 이용하였다
윤상(尹祥)<1373년(공민왕22)~1455년(단종3)>은 조선 초 학자이며 문신으로. 본관은 예천(醴泉). 자는 실부(實夫), 호는 별동(別洞). 초명은 철(哲). 예천(醴泉)의 향리(鄕吏)인 선(善)의 아들이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문인(門人)이다. 1393년(태조2) 생원이 되고, 1396년(태조5) 24세의 나이로 식년 문과에 급제한 뒤 선산, 안동, 상주, 한성 서부의 교수를 지냈다. 이어 예조정랑이 되고,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성균관 사예(司藝)가 되었다. 노부모를 위해 외직을 자청, 금산, 영천(榮川:榮州) 등의 수령을 지내고 대사성에 올랐다. 1448년(세종 30)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으로 후일 단종(端宗)이 될 왕자의 입학례(入學禮)를 거행할 때 특명으로 박사가 되어 선비들이 영예롭게 여겼다. 오랫동안 성균관에서 후진을 양성하여 문하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경학은 물론 문장에도 크게 능하였다. 저서로 별동집(別洞集) 1책이 있다.
서거정(徐居正)<1420년(세종21)~1488년(성종19)>은 조선 초 문신이고 학자로.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강중(剛中), 호는 사가정(四佳亭)이다. 증조부는 호조전서 의(義)이고, 아버지는 목사 미성(彌性)이며, 어머니는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따님이다. 조수(趙須), 유방선(柳方善) 등에게 배웠다. 학문이 매우 넓어서 천문, 지리, 의약, 복서, 성명, 풍수에 이르기까지 관통하였으며, 문장에 일가를 이루었고, 특히 시(詩)에 능하였다. 1438년(세종20)에 생원 진사 양시(兩試)에 합격하였고, 1444년(세종 26) 식년문과에 급제,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을 지냈다. 1451년(문종 1) 사가독서(賜暇讀書) 후 집현전박사(集賢殿博士) 등을 거쳐 1456년(세조 2)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1457년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 공조참의 등을 역임했다. 1460년 이조참의 때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대사헌에 올랐으며, 1464년 조선시대 최초로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이 되었다. 1466년 다시 발영시(拔英試)에 장원한 후 육조(六曹)의 판서를 두루 지내고 1470년(성종 1)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으며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되고 달성군(達城君)에 책봉되었다. 6왕을 섬겨 45년 간 조정에 봉사하였으며 23년간 대제학(大提學)이 되어 문형(文衡)을 관장했다. 또한 23차례에 걸쳐 인재를 선발하는 시관(試官)의 소임을 맡았다. 그의 저술로는 시문집으로 사가집(四佳集),역대연표, 동인시화(東人詩話), 태평한화 골계전, 필원잡기, 동인 시문 등이 있다 공동 찬집으로 삼국사절요, 동국통감 57권, 신찬동국여지승람 50권, 동문선 130권, 경국대전, 연주시격언해(聯珠詩格諺解)가 있다. 대구에 있는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 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김종직(金宗直)<1431년(세종13)~1492년(성종23)>의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계온(季渟), 호는 점필재(佔畢齋),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경남 밀양 출생으로 1453년(단종1) 진사가 되고 1459년(세조5)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정자(正字), 교리(校理), 감찰(監察), 경상도병마평사(慶尙道兵馬評事)를 지냈다. 성종(成宗) 초에 경연관(經筵官)이 되고, 함양군수, 참교(參校), 선산부사(善山府使)를 거쳐 응교(應敎)가 되어 다시 경연에 나갔다. 도승지, 이조참판, 경연동지사(經筵同知事), 한성부윤, 공조참판(工曹參判), 형조판서(刑曹判書),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에까지 이르렀다. 문장(文章)과 경술(經術)에 뛰어나 이른바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종조(宗祖)가 되었고, 문인으로는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 김일손(金馹孫), 유호인(兪好仁), 남효온(南孝溫) 등이 있다. 성종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자기의 문인들을 관직에 많이 등용시켰으므로 훈구파(勳舊派)와의 질시를 받기도 하였다. 사후인 1498년(연산군4) 그가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관(史官)인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적어 넣은 것이 원인이 되어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다. 이미 죽은 그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으며, 그의 문집이 모두 소각되고, 김일손, 권오복(權五福) 등 많은 제자가 죽음을 당하였다. 중종(中宗)이 즉위하자 그 죄가 풀리고 숙종(肅宗) 때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밀양의 예림서원(禮林書院), 구미의 금오서원(金烏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栢淵書院), 금산(金山)의 경렴서원(景濂書院), 개령(開寧)의 덕림서원(德林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점필재집(佔畢齋集)을 비롯해 유두유록(流頭遊錄), 청구풍아(靑丘風雅), 당후일기(堂後日記) 등이 있고, 편저로는 동문수(東文粹), 일선지(一善誌), 이준록(彛尊錄) 등이 있다
홍귀달(洪貴達)<1438년(세종20)~1504년(연산군10)>은 조선 전기의 문신. 문경 지방을 대표하는 학자의 한 사람. 본관은 부계(缶溪). 자는 겸선(兼善), 호는 허백정(虛白亭) 함허정(涵虛亭). 증 판서 효손(孝孫)의 아들이다. 1460년(세조6) 강릉별시(江陵別試)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1464년 겸예문(兼藝文) 예문관 봉교(奉敎), 1466년에 세자시강원 설서 선전관이 되었다. 1467년(세조13)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 공을 세워 이조정랑에 오르고, 1469년(예종1) 장령으로 춘추관 편수관이 되어 세조실록(世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직제학 동부승지를 지내고, 1479년(성종10) 도승지로서 연산군의 생모 윤씨(尹氏)의 폐비(廢妃)에 반대하다가 투옥되었다. 1483년 왕명으로 오례의주(五禮儀註)를 개정했고, 충청도관찰사, 형조와 이조의 참판을 역임하였다. 그 후 경주(慶州)부윤 대사성 중추부지사 겸 대제학 호조판서를 지내고,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좌참찬으로서 왕의 난정(亂政) 10여 조목을 들어 간(諫)하다가 좌천당하였다. 1500년에는 왕명으로 속국조보감(續國朝寶鑑)과 역대명감(歷代明鑑)을 편찬하였고, 경기도관찰사가 되었으나, 1504년 손녀(洪彦國의 딸)를 궁중에 들이라는 왕명을 거역, 장형(杖刑)을 받고 경원(慶源)으로 귀양 가던 도중 단천(端川)에서 승명관(承命官)에게 교살(絞殺)당하였다. 중종반정 후 복관되고 이조판서를 추증 받았으며, 숙종 때 함창(咸昌)의 임호서원(臨湖書院)에 제향 되었다. 시호는 문광(文匡). 저서로 허백정집(虛白亭集) 9권 6책을 남겼다.
4) 문경새재의 시비들
문경새재에는 2004년 문경시에서 21기의 시비를 설치했다 돌덩이 2-3개에 한시 원문 번역문 지은이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그중에서 새재길 주막 부근에서 용추 부근까지의 7기의 시비는 원문 번역문 지은이를 그대로 옮기고 실측치를 적어 둔다 나머지는 시비는 시제와 지은이만 밝힌다
(1) 율곡(栗谷) 시비
宿鳥嶺(숙 조령) 새재에서 묵다
登登涉險政斜暉(등등섭험정사휘) 험한 길 벗어나니 해가 이우는데
小店依山汲路微(소점의산급로미) 산자락 주점은 길조차 가물가물
谷鳥避風尋樾去(곡조피풍심월거) 산새는 바람 피해 산으로 찾아들고
邨童踏雪拾樵歸(촌동답설습초귀) 아이는 눈 밟으며 나무지고 돌아간다.
嬴驂伏櫪啖枯草(영참복력담고초) 야윈 말은 구유에서 마른 풀 씹고
倦僕燃松熨冷衣(권복연송위냉의) 피곤한 몸종은 차가운 옷 다린다
夜久不眠羣籟靜(야구불면군뢰정) 잠 못 드는 긴 밤 적막도 깊은데
漸看霜月透柴屝(점간상월투시비) 사늘한 달빛만 사립짝에 얼비치네
이이(李耳)<1536년(중종31)-1584년(선조17)> 조선 중기 문신 학자, 본관 덕수(德水) 호 율곡(栗谷) 시호 문성(文成), 이조판서 등 역임, 저서 격몽요결(擊夢要訣) 등
이 작품은 율곡전서 권1에 있으며 새재길 주막입구의 시비는 2개의 돌로 구성되어 오른쪽의 자연석(높이 127㎝)에 한시 원문과 번역문 왼쪽 자연석에 지은이를 소개했다
(2) 매월당(梅月堂) 시비
踰鳥嶺 宿村家(유조령 숙촌가)새재를 넘어 시골집에 묵다
嶺分南北與西東(영분남북여서동) 새재는 남북과 동서를 나누는데
路入靑山縹緲中(로입청산표묘중) 그 길은 아득한 청산으로 들어가네
春好嶺南歸不得(춘호영남귀부득) 이 좋은 봄날에도 고향으로 못 가는데
鷓鴣啼盡五更風(자고제진오경풍) 소쩍새만 울며불며 새벽바람 맞는 구나
김시습(金時習)<1435년(세종17)-1493년(성종24)> 조선 전기의 학자, 본관 강릉(江陵) 호 매월당(梅月堂) 시호 청간(淸簡), 생육신의 한사람, 저서 금오신화(金鰲新話) 매월당집(梅月堂集) 등
이 작품은 매월당 시집 권 12에 있으며 새재길 주막입구 시비는 3개의 돌로 구성되어 중앙의 자연석(높이 130㎝)에 번역문을 세기고 오른쪽 자연석)에 지은이를 간략히 소개하고 왼쪽 자연석(높이 43㎝)에 한시 원문을 세겼다
(3) 월사(月沙) 시비
鳥嶺龍湫亭(조령 용추정) 새재 용추의 정자
誰闢荒原辦勝亭(수벽황원판승정) 어느 누가 외진 여기 정자를 지었는지
危欄乍倚更伶俜(위란사의경령빙) 우뚝한 난간에 기댄 가슴 떨리네
天開石壁扶元氣(천개석벽부원기) 하늘은 벼랑 열어 기운을 더해 주고
地劈龍湫賴巨靈(지벽룡추뢰거령) 대지는 몸을 갈라 신령을 안았도다
陰壑深深藏霧雨(음학심심장무우) 깊고 깊은 골짜기엔 물보라 가득하고
晴天隱隱動雷霆(청천은은동뢰정) 맑디맑은 하늘인데 우레 소리 은은하다
洞雲開盡峯增翠(동운개진봉증취) 구름 걷힌 봉우리 푸른빛 새로워
看遍芙蓉萬朶形(간편부용만타형) 온 세상에 활짝 핀 무궁화 같구나.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1564년(명종19)~1635년(인조13)> 조선 중기 한문학의 대가, 본관 연안(延安). 호 월사(月沙), 예조판서 역임, 저서 월사집(月沙集) 등
이 작품은 월사집 권 18에 있으며 새재길 용추시비는 3개의 돌로 구성되어 중앙의 자연석(높이 90㎝)에 한시 원문을 세기고 오른쪽 자연석에 지은이를 간략히 소개하고 왼쪽 자연석(높이 75㎝)에 번역문을 새겼다
(4) 용재(容齋) 시비
交龜院(교귀원) 교귀원
交龜名有自(교귀명유자) 교귀란 이름은 그 유래 있어도
往跡世無傳(왕적세무전) 지난 자취는 전해짐이 없어라
幽鳥眞堪慕(유조진감모) 어여쁜 새는 진정 마음 쏠리지만
殘花只可憐(잔화지가련) 시든 꽃은 다만 가련할 뿐이네
古今須一態(고금수일태) 예와 이제가 한 가지 모습인데
愚智孰相懸(우지숙상현) 지혜와 어리석음 무슨 차이 있으랴
幸免前驅導(행면전구도) 아직은 견마 잡힐 신세 아니어서
溪山爲我姸(계산위아연) 산과 계곡이 반겨주는 것이리라
이행(李荇) <1478년(성종9)-1534년(중종 29)> 조선중기 문인 본관 덕수(德水) 호 용재(容齋) 좌의정 역임. 저서 용재집(容齋集)
이 작품은 용재집 권 7에 있으며 새재길 교귀원 시비는 3개의 돌로 구성되어 중앙의 자연석(높이 125㎝)에 한시 원문을 세기고 오른쪽 자연석(높이 70㎝)에 번역문을 세기고 왼쪽 자연석에 지은이를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
(5) 수헌(수軒) 시비
聞慶龍潭瀑布(문경용담폭포) 문경의 용담폭포
仰看鳥道三千丈(앙간조도삼천장) 처다 보니 새재길 아득히 멀고
下視羊腸十二回(하시양장십이회) 굽어보니 구불구불 열두구비라
是處龍潭天下壯(시처용담천하장) 여기 이곳 용담폭포 참으로 볼만한데
怒雷飛雨一時催(노뇌비우일시최) 폭포소리 물보라 앞 다투어 일어 나네
권오복(權五福) <1467년(세조13)-1498년(연산조 4)> 조선전기 문신 본관 예천(醴泉) 호 수헌(睡軒). 저서 수헌집(睡軒集)
이 작품은 수헌집 권 1에 있으며 새재길 용추의 시비는 2개의 돌로 구성되어 왼쪽의 자연석(높이 135㎝)에 한시 원문과 지은이를 간략히 소개하고 오른쪽 자연석(높이 140㎝)에 번역문을 세겼다
(6) 綿谷(면곡) 시비
主屹靈祠(주흘영사) 주흘산의 영사
削鐵洪鈞外(삭철홍균외) 쇠 갂는 것은 홍균 밖이요
興雲造物中(흥운조물중) 구름 일으킴은 조물의 가운데네
泥封兼玉檢(니봉겸옥검) 니봉은 옥검도 겸했으니
侈爾贊天功(치이찬천공) 아름답고 높은 공을 영원히 기리로다
綿谷(면곡) 魚變甲(어변갑) (1381-1435) 1408(太宗(태종)8년) 文科壯元及第(문과장원급제) 集賢殿 直提學(집현전 직제학) 贈 崇政大夫 議政府 左贊成(증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이 작품은 권1에 있으며 새재길 용추의 시비는 자연석(높이 110㎝))에 한시 원문과 번역문 지은이를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
(7) 우암(寓菴) 시비
過鳥嶺龍潭(과 조령 용담) 새재의 용담을 지나며
雷雨包藏只一泓(뇌우포장지일홍) 우렁찬 폭포소리 물속에 잦아들고
兩邊山木作幽情(양변산목작유정) 에워싼 나무들로 그윽하고 깊어라
問龍夙世脩何行(문용숙세수하행) 용아 너는 예로부터 어떻게 딲았기에
今日深潭臥不驚(금일심담와불경) 지금 여기 누워서도 놀라지 않느냐?
홍언충(洪彦忠) <1473년(성종4)-1508년(중종3)> 조선 전기 문신, 본관 부계(缶溪) 호 우암(寓菴) 문경 출생, 저서 우암집(寓菴集)
이 작품은 우암집 권 2에 있으며 새재길 용추의 시비는 3개의 돌로 구성되어 왼쪽의 자연석(높이 65㎝)에 한시 원문, 오른쪽 자연석(높이 117㎝ )에 번역문, 그 앞의 돌에 지은이를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
(8) 그 외의 시비들
그 외에도 조곡관 조령관 부근 등에 鳥嶺(조령) 김만중(金萬中)<1637년(인조15)-1692년(숙종18), 冬日領內赴京踰鳥嶺作(동일 영내부경 유조령 작)정약용(丁若鏞) <1762년(영조38)-1836년(헌종2)>, 到鳥嶺奇舍弟(도 조령 기 사제)이언적(李彦迪) <1491년(성종22)-1553년(명종8)>, 鳥嶺(조령)소세양(蘇世讓)<1486년(성종17)~1562년(명종17)>, 鳥嶺贈別(조령 증별)임억령(林億齡)<1496년(연산군2)~1568년(선조1)>, 鳥嶺(조령)박승임(朴承任)<1517년(중종12)~1586년(선조19)>, 聞慶途中(문경 도중)김성일(金誠一)<1538년(중종33)~1593년(선조26)>, 鳥嶺二首(조령 2수) 신익전(申翊全)<1605년(선조38)~1660년(현종1)>, 鳥嶺路上偶吟(조령 노상 우음)조임도(趙任道)<1585년(선조18)~1664년(현종5)>, 鳥嶺途中(조령 도중)이황(李滉)<1501년(연산군7)~1570년(선조3)>, 登鳥嶺 (등 조령)정희량(鄭希良)<1469년(예종1)~1502년(연산군8)>, 過鳥嶺(과조령) 김종직(金宗直)<1431년(세종13)~1492년(성종23)>, 將向大丘覲親踰鳥嶺(장향 대구 근친 유조령)서거정(徐居正)<1420년(세종2)-1488년(성종19)>, 鳥嶺(조령)이명덕(李明德) <1373년(공민왕 22)-1444(세종 26년)>시비가 있다
시비에 새길 작품 선정을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15세기 16세기 작품 위주라 8편과 9편으로 많고 문경인은 우암(홍언충) 작품뿐이다. 19세기는 겨울날 조령을 넘는 다산(정약용) 작품이 유일하고 17세기 작품 3편이 시비로 섰다.
<다음 회 계속>
<참고문헌>
관산대관, 박약회 문경시지부, 2005
국편위 문경시 지역사 자료 조사 수집 최종보고서, 신후식, 2008
국편위 문경시 지역사 자료 조사 수집 최종보고서, 신후식, 2009
국편위 문경시 지역사 자료 해제, 신후식, 2008
국편위 문경시 지역사 자료 해제, 신후식, 2009
문경지, 점촌시 문경군, 1994,
문경지 증보판, 문경시, 2002
선현들과 함께 넘는 문경새재, 문경새재 박물관, 2005,
조선 문학사, 권상노, 1947
집주 문경사, 신후식,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