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 물이 눈에 고이네 ~
신우 형님에게 형님이라 호칭 햇다가 형님의 동료교사들로부터 핀잔을받던 기억과함께
21년 전의 아득한 그 시절이 생각난다.
취직한지 꼭 일년 ,
사은회 자리에서 온통 어수선한 시국에 대하여 제각기 말들이 많았다.
창원은 도시기능이 마비된 상태며, 거리에는 온통 체류탄과 화염병이 난무하고,
군중들의 함성소리가 지천을 흔들고 있었다.
평일도 주말도 없이 연일 미친세상이 되어버린 느낌뿐이었다.
그 당시만해도 사실 나는 노동운동이니 군부독재니 하는것에 대해서 너무도 무지한 상태엿다.
창원공단 전체가 총파업상태였고, 날마다 집회와 대모를 하다보니
기숙사마져 문이 잠겨버리고 당장 잠자리 끼니가 걱정되었다.
배가 고파 몇몇 동료와 모여 15a 파이프로 기숙사 창문을 부수고 들어가 식당을 뒤지니
먹을것은 아무것도 없엇다.
우편함을 보니 sn의 반가운 꽃편지 한통이 와 잇었다.
sn이 친구들과 마산에 놀러올 일이 있으니 만나자고 하며 답장을 기다린다는 사연이엇다.
편지를 뒤늦게 받아 보게 되었으니, 만나자는 날자가 당장 내일이었으므로
답장을 보낼 수는 없게되었고 전화로 약속을 정햇다.
마산은 수출자유지역 말고는 간선도로의 교통이 원활했고,도시기능이 어느정도
이루어지고 잇는듯 보였다.
sn의 일행을 합성동 시외터미널에서 만나 인사를 주고받고는 곧장 신마산 버스를 타고
가포유원지로 향햇다.
그때 까지만 해도 우리는 불과 몇분후에 일어날 사태를 전혀 감지하지 못한체
뱃놀이 가자는 이야기로 덜떠있었다.
버스는 석전고개를 넘어서 육호광장에 진입하는 순간 갑자기 도로주변이 어수선 해 지는가
싶더니 길가의 주택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시커먼 연기가 온 하늘을 덮었다.
그기다가 체류탄 발사소리 다다다다 , 군중들의 과움소리 .....거리에는 온통 돌맹이가
날아다니고 화염병을 던졌는지 도로 바닦에는 불이붙고 있었다.
버스는 더이상 움직이지 못한체 서 버렸고 차 안에서는 어린애들 울음소리 하여튼 난리 그것이었다.
체류탄 가스가 버스안에 가득하니 눈물 콧물 , 호홉조차 못할정도로 목구멍이 타는듯 했다.
승객들은 우왕좌왕 하다가 모두 차에서 내려 피신하는데,
난데없이 도망하여 몰려오는 대학생들 틈에 끼어 휩슬리고 ,
나 너 할것없이 머리통이고 등짝이고 모조리 몽둥이가 무차별하게
떨어졌고 나는 순간 정신이 아마득한 느낌을 받고 쓰러졌던 것이다.
`````````````````````
이은상의 가고파의 바다 가포
가포유원지에 뱃놀이 가자던 설레임을 뒤로한체 뜻하지않게 연행되어 창원경찰서로
압송되었다.
내가 왜 창원경찰서로 압송되었는지는 뒤 늦게 알게되었고 , 그 경찰서 안은 그야말로
인간도살장이나 다름없었다.
땀으로 온 몸이 졎고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몇시나 되엇는지 여기는 도대체 어딘지......
도무지 알 수 없엇고 혹시 북한에 껄려 온거나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머리도 들 수 없고 두손은 뒤통수에 깍지를 끼고 업더려 좌로 구르고 우로 구르기를
끝없이 했고 눈을 떠지도 못하게 하였으니 ,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개비릿내 같은 냄새가 나니 섬뜩한 기분과 분노와 공포가 듸썩겼다.
```````````````````````
풀려 나오는데로 나는 대규모 집회가 열리고 있는 창원시청앞 광장으로 기어갔다.
걸음도 걸어지지 않아 길가에 쓰러져 누웠기도했다.
````````````````````````
다음날 전화를 해서 연락을 했다.
어떻게 되어냐고 무사 하냐고........
첫댓글 스무살의 봄은 회색빛이었구나...난 데모와는 거리가 멀었지만..주위의 몇 사람들은 운동권으로 여러모로 고통을 겪었던 사람들이 있단다. 지금은 "민주화가족운동협의회"가 구성되어 약간의 대우를 받긴 하지만...눈물겨운 이야기들을 많이 듣는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