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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편-2. 가는 사람 오는 사람 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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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는 사람 오는 사람 ① 선왕(先王)의 장례가 끝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벌어진 옥사의 당사자가 하필이면 자신의 형인 임해군이었던 광해군. 그렇지만 ‘하필’이란 말은 적절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이 사건에 광해군 자신이 상관이 없었다는 가정(심하면 단정!)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변이 나오자마자 임해군이 진도로 유배가는 등 신속히 옥사가 진행되었고, 임해군을 죽인 강화 별장 이정표(李廷彪)가 이 사건 이후에도 멀쩡하다 못해 승승장구하다가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살해도 주도했다는 사실 때문에 광해군이 이 사건을 둘러싼 혐의에서 자유롭기는 어려웠다. 아무튼 이렇게 임해군 옥사를 시작으로 변화가 시작되었다. 그 변화는 무엇보다 사람들의 변화였다. 변화의 연착륙 가능성, 선왕(先王) 관념 권력의 교체는 당연히 사람들의 교체를 의미한다. 그 권력의 향방에 따라 과거의 자리에 새로운 사람이 채워진다. 신정(新政)은 이렇게 장강의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내면서 시작되는 것이 이치다. 비슷하지만 달랐던 원자(元子)와 세자(世子) 선왕 관념과 함께 군주의 교체로 인한 사회 변화가 연착륙될 수 있는 방안이 세자의 책봉이었다. 물론 세자 책봉은 후계자를 정하는 일이다. 조선시대에 세자 책봉에 대한 법령이나 규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대체로 국왕의 대를 이을 후보자에게 특별한 인격의 결함이 없다면 말귀를 알아들을 나이가 되면 세자로 책봉해 후계자로 인정하고, 그에 필요한 예우와 교육을 강화했다. 제도(制度)로서의 세자
왕세자 책봉식 때 세자는 대례복(大禮服)인 면복(冕服)을 입는다. 원래 대례복은 국왕이 천지의 신령을 영접할 때 입는 예복이다. 면복은 면류관과 구장복(九章服)을 국왕이 갖추어 입을 때는 중국 사신을 맞거나 종묘와 사직에 제사를 지낼 때, 즉위식이나 혼인식 때 입는 옷이다. 국왕만 입는 옷을 왕세자가 입게 되는 것이다. 동시에 책봉식이 끝나면 왕세자는 공식적으로 자신의 관청인 세자 시강원(侍講院)과 세자 익위사(翊衛司)를 갖게 된다. 시강원은 말 그대로 교육, 강의를 담당하는 관청이고, 익위사는 세자의 호위를 맡는 관청이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교육은 문신(文臣)이, 익위사는 무신(武臣)이 담당하게 마련인데, 두 관청은 교육과 호위를 목적으로 현재의 국왕에서 세자로 경세(經世)의 자질을 전달함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세자가 나중에 국왕이 되었을 때 함께 활동할 수 있는 인맥을 형성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문치를 지향했던 조선시대에는 세자 시강원이 특히 중요했다. 세자는 책봉된 직후 길일을 잡아 성균관 입학례를 거행했다. 입학례란 세자가 성균관을 방문해 공자를 모신 대성전에 참배하고, 명륜당에서 성균관 박사들에게 제자가 되는 예식을 하고 가르침을 받는 절차다. 물론 입학례 이후 세자가 성균관을 다닌 것은 아니다. 세자는 시강원에서 공부했다. 그렇지만 입학례는 세자 역시 배우는 학생이라는 사실을 널리 알리는 의미가 있었다. 유교(遺敎) 7신(臣) 이렇듯이 조선시대 왕위 계승을 보면 선왕 관념이나 세자 책봉 등을 통해 자칫 급격할 수 있는 관례나 정책, 세력의 변화를 완충하는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단절’은 그리 크지 않았다. 다만, 어떤 변수들이 작용해 상황을 예측하기 어렵게 만드는 경우가 있었는데, 우리는 그 사례 중의 하나를 광해군 즉위 전후의 상황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 실마리는 ‘유교 7신’에 있다. |
12편-2. 가는 사람 오는 사람②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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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는 사람 오는 사람② 선조(宣祖)가 2월 1일(음력. 이하 모두 음력)에 승하한 뒤 이튿날 광해군이 즉위했다. 이튿날이라면? 그렇다. 상중(喪中)이다. 상중에 즉위라….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독자들이 알아두면 좋을 역사 상식을 다소 소홀히 한 듯해 앞으로 조금씩 소개하려고 한다. 얼핏 아는 듯하지만 실제로 잘 모르거나 부정확하게 알기에 사실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편안하게 읽고, 질문도 해주면 좋겠다. 즉위라는 경사스런 흉례(凶禮) 의례의 일상성 = 통과의례 예(禮)가 번쇄해지면 사람들의 삶을 매우 귀찮게 하지만, 실제로 예가 없으면 그 이상으로 불편하다. 사람들의 삶은 대부분 여럿이서 만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 아니던가? 여럿이 모인다는 것은 관계를 이룬다는 것이고, 관계를 이룬다는 것은 그 관계 사이의 질서를 부여하는 일이다. 흔히 우스개 소리로 ‘찬물에도 위 아래가 있다’는 말을 하지만, 이 말에는 관계에 대한 질서의 부여라는 예의 논리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예는 이렇게 어떤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방식이나 태도를 의미하며, 이런 예의 성격을 흔히 ‘천리(天理)의 절문(節文)’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이치나 도리가 상황에 맞게 발현되는 것이 예라는 의미다. 기억해 두면 좋은 흉례의 몇 단계 흉례(凶禮)는 사가로 말하면 상례(喪禮)이다. 보통 사람들의 죽음을 사(死), 종(終)으로 표현하는데, 상(喪)이란 말도 ‘없어진다’는 뜻이다. 이 상례는 임종에서 시작해 시신이 관 속으로 들어갈 때까지, 상주들이 복을 입는 성복(成服)에서 고인을 묻는 안장(安葬)까지, 또 안장한 뒤의 허전함을 달래며 마음을 안정시켜가는 단계인 우제(虞祭)에서부터 죽은 이의 신주를 사당으로 안치하는 길제(吉祭)까지의 몇 단계로 나누어진다. 길제는 용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죽은 이에 대한 예절은 이후 국가에서는 길례로, 사가에서는 제례로 편입된다. 정리하면, 졸곡을 기점으로 국왕이 상복을 벗고 실제 정무 수행에 임했다. 여기서 졸곡을 기억하자고 했던 이유는 졸곡이 바로 실록편찬과 상관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조선시대를 이해하는 데 가장 신세를 지고 있는 것이 실록인데, 대략 성종 무렵에 실록은 졸곡이 끝나면서 편찬을 시작하는 게 관례가 되었다. 즉, 국왕이 시작하는 첫 정사가 바로 실록편찬이었던 것이다. 흥미롭지 않은가? 사실상 상례가 끝나는 지점에서 역사편찬을 시작한다는 것, 죽음과 역사의 경계이자 접점이다. 특히 광해군대의 실록편찬, 그러니까 선왕대인 선조시대의 실록편찬과 관련해 이 사실은 중요하기 때문에 다시 한 번 기억해두길 당부한다. 어떤 즉위식, 그리고 함의 선조가 승하한 뒤 곧바로 사위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고, 대비인 인현왕후의 재가를 얻어 염습을 마친 이튿날 신시(申時. 오후 3시~5시)에 즉위식을 거행했다. 아래에 그 장면을 녹화중계한다. 왕이 큰뜰에서 네 번 절한 뒤에 동계(東階)로 올라가서 유교(遺敎)를 받았다. … 이 막차에서 조금 쉬고 나아와 전상(殿上)에 있는 어좌의 동쪽에 서니, 통례 김권(金權)이 나아와서 아뢰기를, 보다시피 즉위할 때 이렇듯이 사양하는 것이 도리다. 망극한 상중에 즉위하는데, 덜컥 좋다고 어좌에 앉는 것은 보기에도 좋지 않았다. 그래서 거듭 사양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이 대목을 인용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거듭 어좌에 오르기를 권했던 사람, 지난번 언급한 ‘유교(遺敎) 7신(臣)’의 첫머리에 나온 유영경(柳永慶)을 기억했으면 한다. 이 사람 얘기부터 해야겠다. |
13편-2. 가는 사람 오는 사람③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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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서 선조가 승하한 뒤 이튿날 즉위식에서 어서 어좌(御座. 임금의 자리)에 오르라던 신하들의 선조 말의 실력자, 유영경 유영경은 전주(全州)가 본관으로, 자는 선여(善餘), 호는 춘호(春湖)였다. 아버지는 참봉 의(儀)이다. 1572년(선조 5) 문과에 급제해 정언 등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간으로서 초유어사(招諭御史)가 되어 의병을 모집했던 전력도 있다. 동인과 서인으로 정당이 갈렸을 때는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동인에 속했고, 동인이 다시 남인·북인으로 나뉘자 이발(李潑)과 함께 북인에 가담했다. 즉위의 걸림돌 선조 후반에 갈수록 선조는 광해군에게 국왕이 될 자질, 즉 왕재(王才)가 없다고 판단했다는 주장도 있다.(‘연려실기술’ 권18 ‘광해사위(光海嗣位)’) 왜란에서 분조(分朝. 제2의 정부)를 이끌었던 공로로 계속 왕세자의 역할을 수행했지만, 선조가 가까이서 본 광해군은 ‘어리석고 용렬하여’ 나라를 경륜할 수 있는 인재로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 자세한 이유가 무엇이고, 어떤 근거였는지 확인할 수는 없다. 역사가 늘 그런 기록까지 친절하게 남겨주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광해군 시대를 읽어가면서 선조의 판단이 옳았는지 그릇되었는지 확인해야 할 것이다. 원상(院相)과 영의정 사실 여부를 떠나 이런 소문은 유영경이 광해군의 즉위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았는지를 설명해준다. 그리고 선조에서 광해군으로의 시대 전환이 살얼음판 같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울러 광해군에게는 이런 살얼음판을 어떻게 잘 수습하느냐가 즉위 초반 국정운영의 과제가 되었다. 요즘말로 하면 정치력의 시험대였던 것이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광해군이 즉위했다. 그리고 이산해(李山海)를 원상(院相)으로 삼았다. 이 대목부터 심상치 않았다. 원상이란, 국상(國喪) 때 국정을 총괄하는 임무를 맡는다. ‘은대편고(銀臺便攷)’에 보면, 대왕(大王)의 초상 때 수상(首相. 영의정)을 ‘원상’이라고 칭해 승정원에서 대소사를 임금에게 아뢰어 처리하게 하며, 성복한 뒤에 그만둔다고 규정되어 있다. 은대(銀臺)는 국왕 비서실인 승정원의 별칭인데, 은대편고는 곧 승정원의 업무 매뉴얼이다. 그러니까 국왕의 초상이 나면 영의정이 원상을 맡아 승정원에서 숙직하며 국사(國事)를 처리한다는 말이고, 그래서 승정원의 ‘원’ 자와 재상의 ‘상’ 자를 따서 ‘원상’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광해군은 바로 그 원상에 규정대로 영의정 유영경을 임명하지 않고, 대북의 원로 이산해를 임명했던 것이다. 이해가 가기도 한다. 정치에는 입장이 있게 마련이고, 각각의 입장에 따라 정적이 되기도 동지가 되기도 하는 것이라지만, 자신의 세자 자격을 인정하지 않고 부정해왔던 인물이 달갑기는 성인이라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지만 광해군이 곧장 유영경을 제거하려고 했다고 보는 것은 비약이다. 조정과 통합 역시 정치의 몫이기 때문이다. 밀려드는 탄핵 그러므로 광해군은 즉위 다음 날부터 밀려드는 유영경에 대한 탄핵에도 불구하고 그 탄핵을 쉽게 허용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상중인 군주의 덕목이기도 했을 것이다. 2월 7일에 유영경이 사직 상소를 올렸을 때도, ‘지금이 어떤 때인데 사직하겠다는 말을 하는가’라고 되물었다. 완산군(完山君) 이축(李軸)이 탄핵했을 때에도, 예의 광해군은 부왕인 선조의 유신으로 유영경이 7년 동안 영의정으로 신임을 받았던 사실을 상기시켰다. |
14편-2. 가는 사람 오는 사람 ④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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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는 사람 오는 사람 ④ ‘하늘이 내리는 재앙은 피할 수 있지만, 자신이 만든 재앙은 피할 수 없다[天作孼, 猶可違, 自作孼, 不可活]’이란 말이 있다. ‘맹자(孟子)’에 나오는 말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 ‘서경(書經)’에 은(殷)나라 임금이었던 태갑(太甲)이 했던 말이었다. 하늘이 내리는 재앙은 대개 사람이 원치 않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재앙이 있을 때 버틸 수만 있다면 피해가는 게 어렵지 않다. 애당초 바라지 않는 것이었으니까. 게다가 외부의 기습은 내 삶의 리듬과 별개의 것이기 때문에 지나가면 그뿐이다. 그래서 절망적으로 보이는 홍수 피해 지역의 주민들도 그럭저럭 살아가게 마련이다. 물론 피해 주민들의 어려움을 헤아리는 정책이 제때 적절하게 발휘되지 않아 안타까운 경우가 종종 있지만 말이다. 자신이 초래한 재앙 허나 자신이 만든 재앙은 그렇지 않다. 여기에는 자신의 삶의 리듬이 깊숙이 간여되어 있다. 그것은 습(習), 습관(習慣)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습(習)이란 습관처럼 우리의 몸에 새겨진 일상의 버릇이라는 의미에서, 담배를 피우다거나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는 일도 해당되지만, 쉴 새 없이 반복하는 숨쉬기, 말하기도 습이다. 그뿐 아니라, 자신이 가진 삶의 가치와 전망에 따라 이루어지는 생활패턴, 그리고 자신이 어울리는 사람들의 네트워크도 습이다. 자신이 만든 재앙이란 말은, 바로 이렇게 몸에 새겨진 구체적인 물질성의 결과, 습의 결과이기 때문에 피하려야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것이 재앙인 줄 알면서도 사람들은 불나비처럼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걸임금의 개가 요임금을 짖다[桀犬吠堯] 지방에서 시작된 탄핵은 곧 조정으로 옮아갔다. 정언(正言. 사헌부 5품관) 이사경(李士慶) 등은 ‘유영경이 본디 흉악한 사람으로 오래도록 권병(權柄)을 잡고 있으면서 성총(聖聰. 선조의 총기)을 꽉 막았고 권세와 기염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리해서 그의 손톱과 어금니 같은 심복들이 조정에 많이 있게 되었고 인척과 족척(族戚)들이 요직에 포열되어 있으며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을 배척하고 언로를 막았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지적하지 못했다, 벼슬을 잃을까 걱정하는 마음에서 하지 않는 짓이 없었고 헤아릴 수 없는 흉모(凶謀)를 숨기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직 정승의 자리에 버티고 있는가 하면 악역(惡逆)을 토죄하는 법전을 거행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분노가 날로 과격해지고 있다’고 맹공을 퍼부었다. 이 논의는 곧 대사헌 김신원(金信元), 장령 윤양(尹讓), 지평 민덕남(閔德男), 헌납 윤효선(尹孝先), 정언 임장(任章)의 합계(공동탄핵)로 이어졌다. 권간(權奸)에서 원흉(元兇)으로 나아가 홍문관에서도 탄핵이 올라왔다. 부제학 송응순, 전한 최유원(崔有源), 응교 이지완(李志完), 교리 황경중(黃敬中), 부교리 기협(奇協), 부수찬 성시헌(成時憲), 정자 목대흠(睦大欽) 등이 차자를 올렸는데, 사실 홍문관에서 직접 탄핵에 가담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사헌부·사간원에 홍문관을 합쳐 ‘삼사(三司)’라고 부르는 게 통례였지만, 양사(兩司)가 직접 비판과 탄핵의 선봉에 서는 관청이었다면 홍문관은 조정 기능이 강했다. 그러므로 홍문관까지 탄핵에 가세했다는 것은 대세가 이미 결정되었음을 의미했다. 결국 광해군은 양사가 합계를 올렸던 2월 14일의 비답에서, “대신이 논박을 받으면 형편상 공무를 보기 어렵다. 이런 때에 상위(相位)를 오래 비워둘 수도 없다. 영상은 체차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원익(李元翼)을 영의정으로 임명했다. 2월 14일은 임해군이 역적모의의 혐의를 안고 진도로 귀양을 가던 날이기도 했다. 비사(秘史)를 다루는 이의 비판 지난해 10월, 선조의 병세가 위독하던 날 나는 예비 사관으로서 궐내에서 대기했다. 11일에 가서 삼공(三公)을 불러들이라는 하교가 내려 빈청의 원임 대신들이 창황히 나오는데, 내가 그 연유를 알 길이 없어서 입번(入番) 사관에게 물어보았더니, 모른다고만 대답하고 두세 번을 물어보아도 끝까지 초책(草冊. 기록 공책)은 숨겨버렸으므로 며칠이 지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섭정(攝政)을 전달하는 교지였고 보면, 이는 실로 온 나라 신민의 다같은 소원이 이루어진 셈인데도, 유영경의 못된 위세가 그처럼 사관에게도 자행되었다. 이때에 무슨 짓을 하려고 그렇게 한 것이겠는가. 이때에 선조께서 불안하고 갑갑한 회포를 견디다 못하시어 궁관(宮官)을 보내어 유영경을 잘 회유하라고 하명하시므로, 내가 설서(說書. 홍문관 9품 관원)로 있던 중 회유를 하러 그 집에 갔더니, 신하된 자로서 의당 당장 뛰쳐나와서 왕명을 받아야 함에도, 유영경은 나를 문 밖에 세워 둔 채 오랜 뒤에 나왔으며 말투가 하도 나빠서 마치 믿는 데나 있는 듯했다. 심복을 맺어서 흉계를 꾸민 자가 한두 사람이 아니지만, 그 중 김대래(金大來)가 가장 선두이고, 이홍로(李弘老)의 무도한 상소나 꾸몄던 계획은 말로 다할 수 없어서 세상에 그냥 살려둘 수 없다. 등등. 물론 8월에 이 차자가 올라갔을 당시 광해군은 이런 요청을 거부했다. 그러나 실록을 편찬하는 자료인 사초(史草)를 맡고 있는 예문관 봉교(정7품) 사관에게서 이런 말이 나온 것은 홍문관의 탄핵만큼이나 예사롭지 않은 일이었다. 사관은 비서는 아니고 품계도 낮지만 비서인 승지와 함께 근시(近侍.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라는 뜻)라고 부를 정도로 조정에서 신뢰하는 청직(淸職)이었다. 그 사관이 선조가 섭정을 지시했던 전후 상황의 비사(秘史)를 들어 유영경을 비판했던 것이다. 사관은 붓으로 남겼지 가급적 언론으로 역할을 담당하지 않았던 전통에 비추어 이례적이었다. 한편, 이 일은 또 다른 질문, 그러니까 ‘비밀기록을 다루는 직무를 가진 사람이 그 직무를 통해 얻은 경험이나 기록을 가지고 남을 비판하는 일은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가’하는 현재성 있는 질문을 낳는다. |
15편-2. 가는 사람 오는 사람(5) | ||||||||||||||||||
오항녕 전주대 교수/인천사연구소 초빙연구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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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 때 밀린 글을 처리하느라 두 차례 연재를 쉬었다. 원래 더운 여름에는 경연(經筵)도 쉬었다. 조선시대의 경연은 국왕과 신하들이 공부도 하고 국가정책의 기본방향을 논의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그 일도 삼복더위에는 쉬었으니 나의 휴가를 양해해주셨으면 한다.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죽이자고 해야 선조 승하 보름 만에 체직(遞職)된 유영경은 다시 한 달 만인 3월 18일에 함경도 경흥으로 유배를 떠났다. 체직부터 한 달 동안 유영경이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렇지만 많은 경우 이런 상황은 스스로 초래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전에도 말했지만 스스로 초래한 일이기에 더 벗어나기 어렵다. 귀양지 경흥은 유배지 중에서도 극변이었다. 흔히 말하는 산수갑산(三水甲山)보다도 더 먼 곳이었다.
흔히 《맹자》라는 책이 맹자 이후 늘 ‘고전(古典)’이자 ‘경서(經書. 변치 않을 진리를 담은 책)’이었던 것으로 생각하지만, 많은 위정자(爲政者)들에게 《맹자》는 매우 불편한 책이었다. 이 역시 우리가 연재를 하는 동안 자주 인용하게 되겠지만, 《맹자》는 D. 써로우의 시민불복종 사상 이상의 근원적인 민본주의를 설파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자(朱子)를 비롯한 성리학자들이 ‘사서(四書)’라는 이름으로 《맹자》를 경(經)의 반열에 올려놓기 전까지는 오히려 탄압의 대상이었다. 《논어》와 《맹자》의 역사를 놓고 보면 이 점이 가장 큰 차이이기도 했다. 무신년(戊申年) 당적(黨籍) 유영경의 귀양으로 시작된 숙청에 대해, 《연려실기술》에서는 ‘무신년 당적(黨籍)’으로 정리해 놓았다. 요약하면, 사사, 추형(追刑), 그리고 복권 그러나 유영경이 9월 16일 자진(自盡. 스스로 목숨을 끊음)했을 때의 죄목은 ‘사당(私黨)을 심어 권력을 마음대로 한 죄’로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광해군 4년 김직재의 옥사에 그의 세 아들 유제(柳悌)·유항(柳恒)·유열(柳悅)이 연루되었고, 이로 인해 유영경은 추형, 즉 죽은 뒤에 다시 관을 쪼개고 목을 베는 형벌을 받게 된다. 이른바 부관참시(剖棺斬屍)였다. 김직재의 옥사가 갖는 성격은 따로 살펴볼 것이지만, 이 추형으로 인해 유영경은 비로소 ‘역적’이라는 죄목이 걸린다. |
2. 가는 사람 오는 사람 ⑥ | ||||||||||||
오항녕(전주대 교수/인천사연구소초빙연구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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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였던 광해군의 즉위 작두날 위에 서다 명분과 이유 있는 비판 정인홍에 대한 옹색한 비판 지지와 반비판의 실강이
이어 경상도 유생 진사 정온(鄭蘊) 등도 정인홍 지지 상소를 올렸다. 그는 엄폐할 수 없는 상황을 차근차근 지적했다. ‘전섭’하라는 전교가 내려올 당시에, 대사헌 홍식(洪湜)이 주서 차지(注書次知·근무 담당)를 가두고 중전의 내지(內旨)를 숨긴 상황을 힐문한 적이 있었으며, 유간(柳澗)·송석경(宋錫慶)의 계사 중에도 또한 굳이 비밀로 할 것이 아니데 비밀로 하였다는 말이 있고, 한림(翰林·사관) 하번(下番) 이선행(李善行)이 내지(內旨)가 내린 것을 상번(上番)에게 고하지 않았으므로 김성발(金聲發)이 고하지 않은 까닭을 힐문한 일이 있다고 했다. 원임대신이 쫓겨난 일은 원임대신에게 선조가 직접 확인하면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모든 내용은 이미 조보(朝報·조정에서 알리는 신문)에 발표되고 전파되어 원근 사람들이 모두 보고 들은 것이지 정인홍 혼자 듣고 본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정온 등의 상소에는 앞으로 우리가 광해군대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두 가지 핵심적인 사실이랄까, 전제랄까 하는 점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이번 일은 정인홍이 간사한 자취를 드러내어 종사(宗社)에 충성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임을 말하면서, 정인홍의 병통은 마음이 고집스럽고 편벽되어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한 데 있으니, 이것이 바로 미워하는 자가 많고 사랑하는 자가 적은 이유라고 한 점이다. 둘째는,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공부로 뛰어난 사람은 최영경(崔永慶)·정인홍(鄭仁弘) 등인데, 이미 최영경이 기축옥사에서 죽었는데, 정인홍이 귀양 간다면 후세에 반드시 아무 선비를 죽이고 아무 선비를 귀양 보낸 것이 아무 시대에 있었다고 말할 것이니, 이를 어떻게 해명하겠느냐고 선조를 압박한 일이다. 당장 이 두 가지 지적의 함의가 무슨 사단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광해군대를 관통하는 사단은 되었다. |
2. 가는 사람 오는 사람 ⑦ | ||||||||||||||||||
오항녕(전주대 교수/인천사연구소초빙연구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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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우리는 유영경의 유배와 사사(賜死) 논의와 함께 유영경의 전횡을 비판했던 정인홍의 등장을 #혁명 같은 복권
그로부터 15년 뒤, 계해반정(1623)이 일어났다. 홍문관에서는 차자를 올려 정인홍을 잡아 국문할 것을 요청했고, 3월 15일에 정인홍을 잡아다가 4월 3일 백관이 차례로 둘러선 가운데 그의 목을 베었다. 어찌된 일일까. 정인홍을 주벌(誅罰)할 때 내렸던 반교문(頒敎文)을 살펴보자. #반교문의 평가에 얽힌 현안들 마지막 문구인 ‘늙어서 죽지 않은 것은 하늘의 마음이 오늘을 기다린 것’이라는 말은 정인홍(1535~1623)이 89세에 주벌을 당했기 때문에 한 말이다. 반교문에서는 정인홍을 두고 의병(義兵)이니, 산림(山林·재야의 덕망 있는 학자)이니 하는 것은 토호의 도적질한 명성일 뿐이라고 전제했다. 계해반정이 광해군의 폭정을 바로잡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반정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폭정의 주역이자 이데올로그였던 정인홍에 대해 지나치게 잘못을 부각한 점도 있을 것이다. 위의 반교문은 그런 점에서 조심해서 읽어야 한다. #선조수정실록의 기록 이 정도면 광해군 시대의 핵심 현안은 모두 정리된다. 따라서 앞으로 이런 사건을 살펴보면서 정인홍의 행적을 사건 안에서 검토하기로 하고, 정인홍에 대한 서술은 마치려고 한다. 다만, 반정 당시 반교문과는 달리 인조-효종 연간에 편찬한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좀 더 차분한 분위기로 정인홍에 대한 평가를 남겨 두었다. ‘선조수정실록’은 이이첨이 주동하여 편찬한 ‘선조실록’을 바로잡기 위해 편찬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