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왕도, 가락고도
갑진년이 가기 싫어서 심술을 부리나보다. 상식을 벗어난 계엄에 경제가 반 토막이 났는데, 무안에서는 비행기가 떨어져 온 나라가 슬픔에 빠졌다. 어른이 어른스럽지 않기에… 다가오는 을사년에는 영웅 출현을 꿈꾼다. 누구는 요즘 세태를 ‘역술인 전승시대’라고도 한다. 길흉을 어찌 알 수 있으리오 하면서도 배운 이들이 먼저 점집을 찾고 부적 하나 두 개쯤은 예사다. 젊은이들도 질세라 유명세 치른 점집을 찾는다.
1987년 부산시와 김해시의 관문 불암동에 자연석 18척의 웅장한 ‘가락고도’라 새겨진 비가 세워졌다. 자연석 비는 가락불교연구원 고 배석현 원장이 김해 가락의 고도를 새롭게 부각하고 김해 시민의 긍지와 가락국 후예들의 자부심과 문화 창달을 위해 사비 2천여만 원을 들여 건립하였다. 그날부터 ‘가락고도’ 비는 김해와 부산을 오가는 수많은 차량과 사람을 말없이 배웅하면서 ‘가락고도’ 김해를 묵묵히 지켜왔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세칭 봉황동 장유가도는 대나무에다 알록달록 깃발을 꼽은 지리산도사에 천황봉 할매를 건너 처녀보살 달궁 동자 등 점집이 수두룩했다. 봉황대 조개 무덤 끝에 가지를 드리운 당산나무(神木)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이 일대가 신령스러운 기운이 서려 있는 곳임은 분명하다. 그러다가 어느새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지금은 한두 군데 자리 잡아 손님을 부르고 있다.
거리에 나서면 여기저기 ‘가야왕도’를 붙인 버스가 지나간다. 김해시에서 ‘가야왕도’라 대대적으로 홍보에 나서자, 왜 ‘가락왕도’라 하지 않고 ‘가야왕도’라 하는지 묻는다. 당연히 김해는 가락인데, 가야라니 여기도 임나=가야를 주장하는 누군가의 발상이 아닌지 참으로 궁금하다. 6가야를 지칭하다 보니, 김해가 수장이기에 가야로 해도 된다는 궁색한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그래도 ‘가락고도’가 맞음을 응수한다.
서울대 홍성욱 교수는 미래를 알고자 영혼의 세계를 과학도 답하지 못함에 이런 불확실성을 파고들어 우리에게 심리적 만족을 주는 것이 무속이라 칭했다. 보통 무당이라 부르는 무속인을 크고 자라면서 보아왔기에 낯설지 않다. 어린 시절 마을을 찾아다니며 밤새도록 부채춤을 추다가 징을 치며 굿을 하는 것을 보았다. 그때는 ‘점받이할매’라 부른 할머니 2명이 짝을 이루어 한 명은 징을 치고 한 명은 대나무를 흔들며 액풀이 소원 성취를 축원했다.
임진왜란을 거치며 수로왕릉이 도굴되었고, 그 유물은 지금 어디에 잠자고 있을까? 분명히 노략질해 간 유물의 소중함을 잘 알기에 일본 천황가 깊숙한 지하서고 어딘가에서, 일본 어느 대학 수장고에서 가락 후손이 찾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왜 그들은 정한론을 설계하여 가야사를 조작하였는지? 조선사편수회 역사학자들이 판치게 한 사람도 따지고 보면 이 못난 후손들이다.
난세가 영웅을 부른다고 한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훗날 역사가 증명할 일이지만 지금의 혼돈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상대 의사를 존중하지 않고 내 생각만 옳다고 하다가 딴죽을 걸면 사생결단이다. 나 아니면 안 된다. 내가 먹지 못하는 밥 너도 먹으면 안 된다. 시간은 내 편이다. 우스개로 국방부 시계는 거꾸로 달아놓아도 간다고 하더니만, 국민 알기를 개돼지 취급이면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는 법이다.
김해시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김해시사’ 14권이 출간되었으나, 제2권 ‘가야’는 빠졌다. 2,000년 가야역사를 부정한다. 수로왕과 허왕후를 신화로 가린다. 임나=가야이다. 가야불교를 부정한다.… 그동안 치열하게 시사편찬위원들의 수정과 보완도 물거품이 되었다. 도매금으로 편찬위원이 바로 잡지 못했다며, 비난의 눈초리에 곤혹스럽다. 새해에는 이런 불신과 오류가 말끔히 해소되어 제2권 ‘가야’ 출간을 기대한다.
김병기 / 가락김해시종친회 사무국장/김해시 시사편위원/구지가문학상 운영위원/가야문화축제 제전위원회 제전위원/김해문화원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