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정/선택/유기의 교리와 관련해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는 것 이상으로 나가거나, 성경이 말씀하는 것 이하로 말해서는 안 된다.
-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은 존재적 추론으로서는 알 수 없으며, 중보의 말씀 안에서 계시되는 관계성 안에서 찾아야 한다.
- 그리스도는 선택과 유기에 있어서 하나님의 최종적이고도 궁극적인 말씀이시다.
- 선택의 확실성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알 수 있다.
- 고든 j. 스파이크만 "개혁주의 신학" 발췌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이란 표현은 우리의 세상을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근본적으로 그리고 포괄적으로 다스리고 계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가 이 교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말해야 하는 가는 매우 중요하다.
신학에서 이 주제는 다소 추상적이고, 학문적이고, 비역사적으로 다루어져 왔다. 그러나 칼빈이 그 자리를 바꾼 후에 이 주제는 구체적이고, 경험적이며 확증적인 영향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칼빈은 성경이 예정/선택/유기의 교리에 대한 신학적인 이해를 지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주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는 것 이상으로 나가서, 우리의 무의미한 사색으로 떨어져서는 안되며 그렇다고 우리가 성경이 말씀하는 것 이하로 말해서도 안 된다고 하였다.
칼빈은 "우리가 주님에 대해 정확히 알게 하는 길을 갈 때에 우리를 인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주님의 말씀이며, 우리가 주께 대하여 보아야 할 모든 것을 보려고 할 때에 우리의 눈을 비추어 주는 빛은 오직 주의 말씀뿐이다" (기독교강요 3권,21,2)
그러므로 '그는 일종의 유식한 무식'을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질문은 "스스로 있는 존재로서의 하나님은 누구인가가 아니라 우리와 교제하시는 분으로서의 그 분은 누구이신가"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모든 지식은 다 관계적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을 언약 관계로 묶어주는 것은 하나님의 중보의 말씀이다.
하지만, 칼빈의 이러한 신선한 복음적 통찰은 그의 추종자들에게서 금방 잊혀지고, 다시 과거의 스콜라주의적인 신학(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으로 회귀하는 경향을 보임으로써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과 같은 끝없는 논쟁의 길로 접어들었다.
칼빈이 "두려운 작정" (Decretum horrible)이라고 부른 이것에서 벗어나 좀 더 신앙적이며, 설교적인 적용이 가능한 길은 없는가?
성경으로 눈을 돌려보자. 복음이 퍼져나가는 상황에 대해서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13:48)고 표현한다. 하지만 이 말씀을 염두에 둔다고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다스림의 신비한 깊이를 꿰뚫어 볼 수 있다고 상정하는 것은 거짓이 될 것이다.
예정/선택/유기는 독립적이고 고립된 교리가 아니다. 그것은 삶을 보는 전체적인 시각이다. 스콜라적인 사고로 야기된 이 문제에 대한 긴장관계는 오직 '삼요소의 세계관'(하나님/그 분의 말씀/세상)이 해결책을 줄 수 있다.
선택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 있으며, 창조에 주어졌으며, 성경과 그리스도 안에서 재확인된 중보의 말씀이 언약의 보존과 언약의 파기에 대한 영원한 기준이 된다.
태초부터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중보의 말씀을 통하여 모든 인류에 대한 선택/유기의 권리를 가지고 계신다. 그 시초의 말씀은 수용과 거부를 표현하는 '예스'와 '노'를 둘 다 포함한다. 그러므로 유기는 타락 이후 첨가된 말씀이 아니다. 그것 또한 본래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의 말씀은 "내게 순종하라"고 하신다. 그러나 동시에 그 분의 유기의 말씀은 "그렇지 않으면 ~ " 의 측면이다.
창세기의 이야기를 상기해 보자. 선택의 말씀은 "모든 나무로부터 자유롭게 먹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것의 다른 측면인 유기의 말씀은 "그 나무로부터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이 또한 실제적이다.
역사의 여명으로부터 하나님 말씀의 이 두 측면은 유효하면서도 결정적이다. 그것은 언약관계를 형성하는 모든 중요한 요소들 곧 약속, 조건, 상급, 처벌을 포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에 따라서 삶(선택)과 죽음(유기)의 갈림길이 결정되는 것이다.
인류 역사가 걸어온 과정을 결과적으로 살펴 볼 때에, 우리는 우리의 대표자인 아담 안에서 모두 유기의 상태로 떨어지게 되었다. 인류를 실제로 유기에 처하시는 이 하나님의 심판은 다른 추가의 작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심판은 시초적인 말씀 안에 이미 담겨져 있던 결과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에 신실하게 자신을 거부한 자들을 거부하신다.
그러나 롬8:1의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의 선언은 대조적으로 우리에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평안과 안식을 준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현실화되는 '선택'은 아담 안에서 받은 우리의 유기보다 더 위대한 실재이다.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말씀의 본래적 의도를 재확증하신다. 그 분은 그를 거부하는 모든 사람을 계속해서 다 거부하시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분의 작정의 말씀의 선택(예스)의 측면을 반복하신다. 또한 성령의 그것을 가능케 하는 사역을 통하여 그 말씀은 우리의 마음과 삶에 뿌리내린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거부의 어두운 그림자 밑에서 계속해서 살고 있는가?
그것이 바로 유기의 수수께끼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어찌하여 그 분의 선택을 받아들이는가? 그것은 바로 선택의 신비이다.
양쪽 반응 모두 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그 말씀을 넘어서 , 하나님 쪽에 놓여 있는 신비를 탐구하려는 충동 없이도,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응답의 면도 충분히 신비에 쌓여 있는 것이다.
우리 주위를 돌아볼 때 오늘 세상 삶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이 현재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역사적인 실재'임을 깨닫는다.
이러한 우리의 인식이 "영원 전부터의 선택"이라는 사고에 의해서 가려질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시간 이전에" 예정하신 역사를 언급하는 성경 본문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성경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마25:34) ,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하심"(엡2:10),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엡1:4)라고 말씀한다.
결국 이 본문들은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영원하신 작정을 말씀하며 우리의 삶의 여정에는 보다 깊은 이면이 존재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 아닌가? 라고 말할 수 있다.(작정론자의 해석)
하지만, 성경적 세계관에서 볼 때 이런 성경 본문이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시초적이며 중보의 말씀에 근거해서 의미있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씀들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이다. 그리고 이 말씀을 넘어서 하나님의 마음 깊은 곳으로 도달하는 것은 필요하지도 않고 가능한 일도 아니다.
이에 대해 니젤은 칼빈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우리의 운명을 보다 분명히 알기 위하여 우리의 사고의 과정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하나님)에 까지 높이려고 하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 그리스도께서 그 분의 말씀으로 우리를 대면하셔서 우리가 그 분의 소유가 되었을 때, 우리의 고민과 의심의 대상이 될 만한 하나님의 불가사의한 계획은 우리에게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 (The Theology of Calvin, 163)
전적으로 명확한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인간에게 결정적이다. 선택은 "내게 오라"는 초대의 메아리이며, 유기는 "내게서 떠나라"는 말씀이다. 동일한 하나의 말씀이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다 드러낸다.
그리고 성육하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는 조화를 이룬다. 이 주권적 은혜의 계시가 언약사의 모든 것을 이룬다. 타락한 아담을 선택하시고 열조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선택된 나라로 이스라엘을 재창조하심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메시아의 오심을 목적으로 하는 그 분의 선택의 사랑을 보여 주셨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선택의 거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하고도 분명하게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과 의지를 반영하신다. 그리스도는 선택과 유기에 있어서 하나님의 최종적이고도 궁극적인 말씀이시다. 우리는 그를 넘어서서 어떤 말씀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가질 필요도 없다. 그리스도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14:6-11)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과 같이 그렇게 우리는 또한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다.
" ~ 선택과 유기의 질문은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고 그 분을 섬기기에 애를 쓰면서도 여전히 머리 속에서 끊임없이 떠오르는 질문 '과연 나는 선택되었나'하는 고통스러운 질문이 아니다. 선택/유기는 다른 것들과 별도의 분리된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는 '당신은 예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한 대답의 과정에서 결정된다. ~ 그 분은 우리의 '반석이시며 대속자'이시거나 아니면 '우리의 거치는 돌'이시다. 그리스도의 머리를 넘어서 아버지 하나님께로 직접 건너가는 것, 마치 중보자를 돌아서 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것과 같은 접근은 불가능하다. ~ 그리스도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유일한 통로이다. " (Gordon Spykman , A New Look at Electionand Reprobation, 181-182)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확실성은 또한 선택의 확실성이며, 그 역도 마찬가지, 즉 선택의 확실성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알 수 있다.(Niesel, The Theology of Calvin, 165)
"하나님의 선택은 정확하게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이기 때문에 자비의 선택이다. ~ 그 선택의 구조는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었다. 선택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며 그것 때문에 우리는 그 분을 바라볼 수 있다. ~ 어떤 신학적인 성찰도 그 자체로 이러한 통찰로 나아가지 못한다. 오직 믿음의 길을 가리키는 복음의 설교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선택의 불가사의가 더 이상 어떤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은 이 믿음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이며 그 메시지의 빛이 분명하게 비추기 때문이다. 이 빛이 비취기 때문에 복음이 설교될 수 있는데 설교는 어떠한 일의 성취된 상태에 관한 선포로서가 아니라 부르심과 요구로서의 선포인 것이다. 믿음의 길을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사람은 이제 그를 넘어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과 오히려 그 분 안에서 그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인 것이다." (벌카우, Divine Election, 149, 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