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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놈의 한이 그리도 맺혀 있더냐?
애절하게 이어져 끓어질 듯 하더니, 새색시 사뿐사뿐 앙증맞은 애교에, 젖어 있던 눈시울 금새 미소 머금고, 아리랑 높낮이에 어깨춤이 들썩들썩--- 맺혀 있는 삶의 마디 풀고 또 풀어,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진도나 아리랑 아라리가 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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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아리랑의 유래
남국의 섬 진도 사람들은 노래를 좋아해서 들에서 일을 하다가도 길가는 사람과 노래로 화답(和答)할 정도다. 그 것을 뒷받침 하듯 우리 선인들의 얼이 스며 있는 진도아리랑은 가락이 구성지고 장엄하여 소리에 힘이 있고, 가락에 특징이 있어, 타 아리랑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가락과 멋, 그리고 묘한 흥취가 있으며, “태양이 서산에 지는 것”이나 “님이 이별을 하고 떠나는 것”이란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자기의 운명 탓으로 돌리면서 즉흥적(卽興的)으로 불려지는 진도아리랑에는 무한한 낭만(浪漫)과 사랑, 그리고 해학(諧謔)과 애한(哀歡)이 담겨져 있다.
진도아리랑은 1982년 당시 82세이던 진도읍내 박석주(작고)의 정언(定言)기록에 의하면 1900년 초반까지 곡이나 가사가 정리가 되지 않은 체 진양조, 자진모리, 중모리, 중중모리 등으로 가사와 '후렴'을 두서없이 부르던 것을 채상준, 박진권, 박종기, 허자선, 박경준, 박석주 등이 모여 신청에서 “운기조합”을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할 때, 당시 진도에서 널리 불려지던 아리랑 타령의 함배(박자)와 째(제.곡)를 정리하고 “진도아리랑”이라 칭하였는데, 이때 “호남아리랑” 혹은 “남도아리랑”으로 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박종기 선생께서 “진도에서 부르는 노래니 진도아리랑이라고 하자”고 하여 “진도아리랑”이라 칭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진도아리랑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일제가 우리 민족정신을 말살하려고 서울 남산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건립하여 그 낙성(落成)을 할 때(1925년 10월) 각 지방의 명창과 악공들을 모아 예술잔치를 가졌었는데, 이때 박종기 선생이 출전하여 젓대로 진도 아리랑을 불렸는데 당시 총독이었던 “재등”은 진도 아리랑의 노래가락에 심취하여 춤을 추며 “그 노래는 어느 지방에서 부르는 노래냐”고 물어, 박종기 선생은 “진도 지방의 진도아리랑이요”라고 대답하였으며, 이때부터 진도 출신 명창들이 창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서울방송의 전파를 타고 전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진도아리랑의 기원(紀元)에 대한 설화(說話)
1. 대가집 외동딸의 일화(逸話)
옛날 이 고장에 천인(賤人)출신이었으나 영리하고 이목(耳目)이 수려한데다 노래를 아주 잘하는 총각이 있었는데, 이 총각은 진도보다는 넓은 육지로 가서 자기의 큰 뜻을 이룰 수 있으리라 믿고 울돌목을 건너 육지에 들어가 지금의 경상도 대구 근방 어느 대가집의 머슴살이를 하게 되었다. 이 총각은 미남인데다 영리하고 어찌나 노래를 잘 하였던지 그집 외동딸이 홀딱 반하게 되고 두 처녀 총각은 처녀부모의 눈을 피하여 사랑을 속삭이게 되었는데, 결국은 호랑이 같은 주인 어른이 알게 되어 죽음을 면하는 엄벌을 받고 겨우 도망쳐 나와 고향인 진도로 줄행랑하며 금실 좋은 부부지간이 되어 살게 되었는데, 이런 연유로 아리랑 노래의 시초가 되어 “앞 강에 드는 물은 갈라지면 갈라져도 / 우리 둘이 든 정은 갈라질 수가 없네”, “따라라 따라라 나만 졸졸 따라라 / 뒷동산 좁은 길로 나만 졸졸 따라라”, “문경새재(경상북도이 있는 지명)는 웬 고개인가 / 구부야 굽이 굽이가 눈물이로구나”, “가노라 간다 내가 돌아간다 / 정든 님 따라서 내가 돌아간다”, “산천이 좋아서 내가 여기를 왔냐 / 님사는 곳이라고 내가 여기를 왔재”, “아리살살 춥거든 내 품안에 들고 / 벼개가 높거든 내 팔을 비어라”.
위와 같은 노래의 가사와 같이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어느날 갑자기 총각은 병이 들어 안타깝게도 죽게 되었으며, 여기에서 애환(哀歡)이 서린 마음으로 “왜 왔던고 왜 왔던고 / 울고 갈 길을 왜 왔던고”, “바다에 뜬 배는 날 실어다 놓고 / 환(還) 고향 시킬 줄을 널 그리 모르냐”, “강로(江路)야 강로야 육로(陸路)나 되거나 / 내 발로 걸어서 내 고향 갈란다”.
위와 같은 설화는 지금도 진도에서 구전(口傳)되어 오고있으며, 조선총독부에서 당시 발간된 “민속자료서(조선민속)”에 수록되어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2. 설 낭자의 일화
조선 영조시절 지산면 목장에 설 감목관에게 “이향”이라는 어여쁜 딸이 있었고, 진도골 원님에게는 “소영”이라는 공자가 있었는데, 이들은 우연히 서로 알게 되어 깊은 사랑에 빠져 굽이굽이 이어진 임회면 서낭당 마을 뒷산 굴재에서 날마다 해가 뜨고 지는 줄도 모를 정도로 자주 만나곤 하였는데 이들의 밀회를 멀리서 지켜보던 초군(樵軍)들은 그들의 사랑을 부러워하면서도, 또한 놀려 주는 데서 “아애랑 설이향 아라리가 났네 / 아애랑 설이향 아라리가 났네 / 아애랑인가 설이향인가 용천(湧泉)인가 / 얼마나 좋으면 저 지랄인가”라고 지게목발을 두들기며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소영 공자가 갑자기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자, 설 낭자는 혹시나 부모에게 발각되지나 않았나 근심을 하면서 “청천(晴天) 하늘에 잔별도 많고 / 이내 가슴에 수심(愁心)도 많다”, “오동추야 달 밝은 밤에 / 님의 생각이 절로 난다”, “천길 만길은 떨어지고는 살아도 / 님 잃고 정 잃고는 나는 못살겠네”라는 자탄가(自歎歌)를 부르게 되었다.
그 후로 설낭자는 날마다 서낭당마을 굴재굽이를 돌아오르내리며 지친 나머지 한숨을 몰아 쉬며 “문전(門前) 새재는 웬 고개인가 / 굽이굽이 열두굽이 한숨이 나네. / 문전고개에다 정거장 짓고 / 정든님 오시기만 기다린다”가 되었다.
해가 바뀌어 이른 봄이 되었는데 설 낭자에게 오매불망 그리워 잊지 못하던 소영 공자가 육지에서 다른 처녀에게 장가들어 진도에 내려온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이었다. 뜬 눈으로 밤을 새운 설 낭자는 신표(信標)로 만든 비수(匕首)를 품에 품고 신행(新行) 행차 오는 길목으로 나가 사생결단을 짓기로 결심하고, 부모님이 알지 못하도록 이른 새벽을 틈타 말을 타고 길을 떠나 고군면 오리정 고갯마루에서 기다렸다. 오정(午正)이 지나 신행 행렬이 고개마루에 이르러 길을 가로 막고 비수를 겨누려고 하는 순간 하늘에서 “만사(萬事)는 하늘이 정하는 바이요”하는 소리가 낭자의 귓전을 울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는 순간 신행 행렬은 그대로 지나가 버리고 낭자는 그 때에야 정신을 차려 신표의 비수로 자기의 가슴을 쳤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대로 떠나는 설 낭자의 서글픈 모습은 처량하기 그지없는 마음으로 “왜 왔던고 왜 왔던고 / 울고 갈길을 왜 왔던고”,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이 나리”라고 애탄(哀歎)을 하였다.
그런데 설 낭자가 탄 말은 주인의 심정을 이해나 하는 듯 집으로 가지 않고 진도읍 남산에 있는 왕무덤재를 넘어 쌍계사로 들어가는지라 울분을 달랠 길 없는 설낭자는 비수로 손수 자기의 머리채를 잘라 말 등에 실어 집으로 보내고 세속(世俗)을 떠나 중이 되어 한 평생을 목탁소리로 보냈다 하여 "이팔의 젊은 나이 백발 염주 웬 말이며 / 이생에 못 이룬 사랑 저 생에서 이뤄 볼까 / 가냘픈 종소리 적막을 깨고 / 은은한 풍경소리 이내 맘을 울리네"라는 가사가 있게 되었다.
(3) <<남도의 빛>> 중 진도아리랑에 대한 기록
「전남매일신문사」에서 발간한 “남도의 빛”이라는 책에서 진도아리랑의 유래(由來)에 대한 조사기록이 있어 진도아리랑의 원류(源流)를 찾는데 도움이 되고자 그 일부를 여기에 옮겨 보면, 『아리랑하면 “코리어”의 “심볼”처럼 되어 있다. 마치 영국의 “롱.란킨”이나 미국의 “프랭키와 조니”처럼, 그리고 아리랑엔 숱한 낭만과 사랑, 우리 민족의 짜릿한 감상이 있다. 한국에 오는 외국 사람이면 누구나 어디서든지 아리랑을 들을 수 있고 남도 땅 전남에 오면 구성진 진도아리랑의 가락 속에 짙은 향수를 느끼게 한다.
찌뿌드드한 날씨가 소나기라도 퍼부을 것 같은 데도 빗소식은 까마득하고 냉냉한 바다 바람만 가볍게 얼굴을 스친다. 벽파진에 헌털뱅이 버스에 몸을 싣고 30분쯤, 진도읍에 내려 곧장 정승한씨를 찾았다. 이 고장에선 모두들 그를 가리켜 학자라고 한다. 그는 그만큼 문화재에 큰 관심을 갖고 연구를 계속해 오고 있다. 32도를 오르내리는 찌는 듯한 날씨인데도 정승한씨는 사무실에서 “진도교육사”를 쓰고 있었다. 진도아리랑에 대하여 묻자 자리에서 일어서며 소개해줄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를 따라 방에 들어섰더니 그 곳엔 80객의 촌노들이 대여섯 분 장기를 두고 있었다. "장이야! 멍이야!" 노인네들은 이쪽을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한식경 후에야 정승한씨는 송순화(83)할아버지를 소개해 주었다.
송순화 할아버지는 “글쎄요. 박종기씨의 이야기로는 허감찬. 양현문 두분이 아리랑을 지었다고 하는데.....” 말 끝을 흐린다. 아리랑을 지었다는 허감찬씨나 양현문씨는 송노인보다 30년 쯤 연상으로 당대의 명창이었다고 한다. 당시 영암 출신 김창환씨와 친교가 두터웠던 허감찬씨는 육자배기에 능해 그 근방에선 그의 목소리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 때는 억세게들 진도 아리랑을 불렀다는데 요즘은 뭐 그렇지가 않더라구.....” 송 노인은 또한 요즘 아리랑은 너무 많이 변했다고 한다.
“아리 아리랑 서리 서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의 대목은 변하지 않았지만 가사는 갖가지로 변하고 있단다. 그 예로 “십오야 밝은달 구름 속에 놀고 / 이십안짝 큰애기 내 품안에 논다” 처럼 애틋한 낭만에서 “새네끼 백발은 쓸데가 있어도 / 사람의 백발은 쓸데가 없네”로 타락해 버렸고, “신작로 복판에 하이야가 놀고 / 하이야 복판에 신랑 신부가 논다”와 같은 8.15후 시골에 등장한 하이야(지금의 택시)의 민감한 시대 감각이 뒤따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아리랑의 전체 이미지를 가장 함축성 있게 표현한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 십리도 못가서 발병이 난다”의 슬픈 마음을 노래하는 사랑과 원망의 뉘앙스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고 말한다.
“진도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허감찬, 양현문씨가 지었다고 하지만 이것은 믿을 수가 없고, 재래의 아리랑의 형식을 그 분들이 약간 바꾸었는지도 모르죠” 진도아리랑의 가사는 이 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으니, “저기 가는 저 처녀 엎으러나 져라 / 일어나 준 듯이 보듬어나 보자”, “신랑신부 좋으라고 비단이불 생겼고 / 처녀총각 좋으라고 연애가 생겼다”, “저기 가는 저 처녀 앞가슴을 보아라 / 넝쿨없는 호박이 두통이나 되누나”처럼 저속하고 퇴색해 버린 가사는 얼마든지 많이 있으며 그 원형은 찾아보기조차 어렵다. 사실허·양 두분이 진도아리랑을 지었다는 송순화 할아버지도 “내가 뭐 압니까 작고한 박종기씨 한테서 들었죠.” 박종기씨라면 젓대로 이름있는 분이다. 아리랑은 오래된 노래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한백년쯤 거슬러 오를 수 있을까. 한 세기를 거치는 동안 많이 변한 것도 사실이다. 또 아리랑이라는 뉘앙스도 갖가지가 있다. “'트라라”처럼 아무런 의미가 없는 후렴이라는 설, 아낭이라는 여자의 이름이라는 설, 신라 창시조인 박혁거세의 부인 알영이라는 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전국 각지에서 강제로 끌려 온 일꾼들이 “내 귀는 멀었소”라는 뜻으로 부른 노래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아이롱”이라는 설, 역시 경복궁 중수 때 일꾼들이 “내가 여기서 고생하오”의 뜻으로 “아난리”를 불렀는데 그것이 후일에 “아나리”로 변했다는 설, 경복궁 개수에 끌려 온 일꾼의 한 명이 집에 두고 온, 아내를 그리워해 “내 마음속의 낭자”라는 뜻으로 노래 부른 “아과낭”이라는 설, 악랑의 중국식 발음인 “롤랑”이나 “낭랑”에서 왔다는 설, 한국 피리의 장전 타음을 흉내낸 의성이라는 설, 아리랑은 고개(영)의 이름이라는 설 등 이처럼 아리랑의 의미는 여러 가지로 불러져 왔다. 어쩌면 이 “아리랑 고개”는 우리 민족이 다같이 넘어야 할 수난의 고개인지도 모른다.
이에 반해 진도아리랑에서 “아라리가 났네”의 뉘앙스는 슬픔과 기쁨이 넘치는 율동을 나타내며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는 더욱 그 감정을 강하게 해준다.......(이하 생략).』
◈ 진도아리랑의 곡과 가사 내용
《아리랑》의 별조(別調)로 《밀양아리랑》과 비슷하다. 음계는 전라도 특유의 바탕음 위 완전 4도음과 장 5도의 음으로 이루어졌으며 빠른 자진모리장단으로 부른다. 사설은 "문경 새재는 웬 고개인고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로구나. (후렴)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로 이어지는 2행 1연의 짧은 장절형식(章節形式)으로 장소에 따라 더 빠르거나 느리게 부른다. 전남대학교「정익수」교수는 후렴에 대하여 여음설(餘音說)이라 주장하여 청산별곡에 있는「얄리 얄리 얄라성 얄라리 얄라」라는 여음과 같은 것이 압축변모(壓縮變貌)되었을 것이라 했는데,「얄리 얄리」가「아리 아리」로 변하였고,「얄라성」의「성」은 탈락하고「얄랑」이「야랑→아랑→아리랑」으로 변하여「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낫네」와 비슷한 것을 보아 가장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 가는 님 허리를 아드득 잡고 / 하룻밤만 자고 가라고 사정을 하네.
· 가냘픈 종소리 적막을 깨고 / 은은한 풍경소리 이내 맘을 울린다
· 가지 많은 나무는 바라 갤 날없고 / 자식 많은 우리부모 속편할 날없네
· 간다 못 간다 얼마나 울어서 / 씨엄네 정재가 나무접시가 뜬다
· 갈길이 바빠서 아이노리를 탓더니 / 눈치없는 저 운전수 연애하자 하네
· 갈라믄 가고 말라믄 말제 / 정을 두고 몸만 가니 내 어찌 살거나
· 강로야 강로야 육로나 되거라 / 내 발로 걸어서 내 고향 갈란다
· 구름은 발없어도 천하천리를 가고 / 바람은 손없어도 나뭇가지를 흔드네
· 까마귀 검으면 속조차 검냐 / 겉 몸이 늙었으면 마음조차 늙냐
· 큰애기 중신은 대 낮에 가고 / 홀엄씨 중신은 야밤에 간다
· 꽃이 필 때도 춘하 단절이요 / 당신이 젊을 때도 청춘 한때뿐이라
· 날 다려 갈 때는 사정도 많드니 / 날 다려다 놓고는 잔말도 많네.
· 널보고 나를 보아라 내가 너 따라 살까 / 눈으로 못 보는 정으로 산다.
· 놀다가 가면은 친구가 되고요 / 자다가 가면은 정든 님이 된다네.
· 남의 집 서방님은 가방을 드는데 / 우리 집 서방님은 개똥 망태만 든다.
· 나 눕고 너 눕고 이불을 덮으면 / 등잔에 저 불을 그 누가 끌 꺼나
· 님이 없는 저 방에 불을 쓰면 뭘하고 / 할일 없는 이내몸이 단장하면 뭘할까
·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 십리도 못가서 발병이 나리
· 남의야 서방님은 색안경을 쓰는데 / 우리집 저 물견은 쌍다락끼만 나노라
· 님이 따로있냐 정이들면 임이제 / 고향이 따로있냐 살면은 고향이제
· 남의집 서방님은 자전거를 타는데 / 우리집 낭군임은 논두럭만 탄다
· 님죽고 내가 살아 열녀가 될까 / 한강수 깊은 물에 빠져나 죽자
· 남의 서방님은 북장고를 치는데 / 우리집 저 물견은 지게 통발만 뚜두네
· 높은봉 상상봉 외로선 소나무 / 외롭다 하여도 날보다는 낫네
· 니정 내정은 속에다 만 두고 / 언제나 만나서 내 한을 풀까
· 내딸 죽고 내사오 왔냐 / 울리고 갈길을 왜 왔느냐
· 놀다 가세 놀다 가세 / 저 달이 떳다 지도록 놀다나 가세
· 담 넘어 갈 때는 개가 짓고 / 품안에 든께는 새벽닭이 우네
· 담장을 넘을 때는 먼 맘을 먹고 / 문고리 잡고는 아리발발 떤다
· 따라라 따라라 나만 졸졸 따라라 / 뒷동산 좁은 길로 나만 졸졸 따라라
· 문경새재는 왠 고갠가 / 구부야 구부 구부가 눈물이로구나
· 맹감은 고와도 가시 덤풀에 놀고 / 유자는 얽어도 한량 손에서 논다.
· 만경창파에 두둥실 뜬배야 / 어기여차 어여뒤여라 노를 저어라.
· 말은 가자고 네 굽을 치는데 / 정든 임 날 잡고 몸부림 치네
· 물 속에 잠긴 달은 가까워도 못 잡고 / 이내 맘에 있는 사연 썩어져도 못하네
· 물레야 물레야 왜 뱅뱅 돌아라 / 이웃집 귀공자 밤이슬 맞는다
· 무정한 연락선은 날 실어다 놓고 / 환 고향 시킬 줄을 널 그리 몰라
· 마당 가운데 잼비당은 연기만 나는데 / 요내 가슴이 타는데는 연기짐도 안나네
· 만나니 반가워라 이별을 어이해 / 이별이 될라거든 왜 만났던고
· 임 따라 갈 때는 엄매 생각 나드니 / 친정에 오고봉께 임의 생각이로다
· 모른 바닥에다 니배 내배를 띄고 / 어기어차 어라듸여라 때만 기다린다.
· 미영타로 가세 미영타로 가세 / 씨집갈 때 이부자리 거들어 가세
· 바람은 불수록 물결을 치고 / 님은 볼수록 정이 든다.
· 보고도 못 먹는 것은 그림의 떡이요 / 보고도 못사는 것은 남의 임이로구나
· 뼘가옷 비개 뼘가옷 이불 둘이 덮고 잠자도 / 얼마나 정이 들어서 뼘가옷이 남았네
· 바람은 손없이도 나뭇가지를 흔드는데 / 이 내 몸은 손있어도 가는 임을 못 잡어
· 백년을 살자고 백년초를 심었드니 / 백년초는 어딜 가고 이별초만 남았네
· 빨래 독 좋아서 빨래하러 갔더니 / 못된 놈 만나서 돌비개를 비었네
· 부모형제 이별은 눈물이 뱅뱅 / 정 든임 이별은 하늘이 뱅뱅
· 뽕도 따고 임도나 따고 / 겸사 겸사로 뽕 따로 가세
· 본 서방 마다하고 뒤 담장 넘다 / 강냉이 등컬에 OO구멍을 찧었네
· 바다가 좋으면 배 놓기가 좋고 / 여자가 이쁘면 일통 나기가 쉽네
· 본 남편 죽으라고 고사를 했더니 / 샛 서방 죽었다고 부고장이 왔네
· 석달 열흘 가뭄이 들어도 / 큰애기 궁둥이는 생수가 난다.
·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 지느냐 / 날 버리고 가는 님 가고 싶어 가느냐
· 씨엄씨 잡년아 잠 깊이 들어라 / 밤중에 오는 님이 밤이슬 맞는다
· 씨압씨 술값은 햇 닷냥인데 / 며느리 술값은 열 닷냥 이로고나
· 씨엄씨 잡년아 잠 깊이 들어라 / 느그 아들 렵렵함사 내가 밤모시레를 돌이
· 세월아 네월아 오고가지를 말아 / 아까운 내 청춘이 다 늙어 간다.
· 서방님 오신 줄 알고 깨 벗고 잤더니 / 문풍지 바람에 설사병이 났네.
· 새내끼 백발은 쓸 수가 있어도 / 인생의 백발은 쓸 수가 없네.
· 씨압씨 호령은 갈수록 더하고 / 어린 가장 품에 안고 잠잔둥 만둥
· 십오야 밝은달 구름 속에서 놀고요 / 명기명창 화중선이는 장고바람에 논다.
· 쑤숫대밭 묵밭은 다지내 놓고 / 반반한 잔디밭에서 왜이리 졸라
· 삼당개 바닷물은 썰다가도 드는데 / 한번가신 우리임은 다시 올 줄 모르네
· 산천 초목은 달이 달달이 변해도 / 우리 둘이 먹은 마음 변치를 말자
· 세월이 갈라면 저 혼자 가제 / 남이야 세월을 왜 가지고 가냐
· 씨엄씨 죽으라고 고사를 지낸께 / 친정엄매 죽었다고 기별이 왔네
· 세월이 가기는 바람결 같고 / 청춘이 가는 것은 물결같이 흐르네
· 신고산 봉오리 비온둥 만둥 / 어린 가장 품에 안고 잠잔둥 만둥
· 세월아 네월아 오고가지를 마라 / 아까운 내 청춘이 다 늙어진다
· 서쪽에 지는 해는 동쪽에서 뜨건만 / 임자없는 요내 몸 누굴 찾아 갈거나
· 사람이 살며는 몇 백년이나 사느냐 / 살아생전에 두리 둥실 놀아나 보자
· 이 아래 강물이 내 술이라면 / 팔도야 잡놈이 모두 내 친구로고나.
· 울 넘어 담 넘어 님 숨겨 놓고 / 호박잎만 노을노을 날 속이네.
· 임이 얼마나 임 다움사 / 한 벼게 둘이 베고 등 돌라 눌까.
· 임죽고 내가 살어 열녀가 되느니 / 한강수 깊은 물에 빠져나 죽자.
· 아리랑 아들나서 전장에 보내고 / 서리랑 딸 나서 놈 좋은 일 시킨다.
· 앞집에 처녀는 시집을 가는데 / 뒷집에 노총각 환장병이 났네.
· 우리네 남편은 투전판에를 갔는데 / 공산아 명월아 새칠팔로만 노라라.
· 임 떠난 방에는 사진판만 남고 / 연락선 떠난데 물결만 남네
· 오시라는 정든 임은 왜 아니 오고 / 오지 말라는 궂은비는 줄줄이 오네
· 으름나무연쿨은 응크레등크레 하는데 / 나는언제 임을만나 응크레등크레할거나
· 아침에 우는 새는 배가 곱아서 울고 / 저녁에 우는 새는 임이 그리워 운다
· 오동추야 밝은 달은 구름 속에서 놀고 / 임하고 나하고는 이불 속에서 논다
· 아서라 마러라 내 팔을 놓아라 / 우리님 보면은 정들었다고 할라
· 열두시에 만나자고 금시계를 준께 / 1234 몰라서 새로 한시에 왔네
· 우리딸 젖통은 활량에 유자 / 팔도야 잡놈이 다 다라 본다
· 우리 딸 입술은 청단지 인가 / 팔도야 잡놈이 다 빨아 덴다
· 아잡씨 까잡씨 까발쳐 놓고 / 용천할 산으로 갯마중 가세
· 아리랑 고개는 열두 고개 / 이내 고개는 한 고개로구나
· 임 떠난 선창에 갯내만 나고 / 임 떠난 빈방에 향수내만 나네
· 아리랑인가 지랄인가 용천인가 / 얼마나 좋으면 저 지랄인가
· 아리랑 꼭지를 스리랑 돌려서 / 북장구 장단에 놀아나 보세
· 알그닥 짤그닥 짜는 베는 / 언제나 다 짜고 친정에 갈까
· 윤선은 가자고 쌍 고동을 부는데 / 돈없는 저 건달은 발동을 한다
· 안 넘어 간다고 내가 다짐 했더니 / 정칠 놈 한테서 내가 녹아나네
· 열 일곱살 먹은 것이 무슨 단맛을 알아서 / 저녁밥만 먹으면 잔솔밭을 가느냐
· 아주끼리 동백아 열지를 마라 / 산골에 큰 아기 다 놀아난다
· 윤선아 병선아 오고가지를 마라 / 우리지비 매늘아기 밤 봇짐 싼다
· 우리나라 최남단 보배 섬 진도 / 인심이 좋아서 살기가 좋네
· 요요적적 깊은 밤에 귀뚜라미 스르르 / 추야장 나는 생각은 임뿐이로세
· 우리야 서방님은 명태잡이를 갔는데 / 바람아 불라면 석달 열흘만 불어라
· 왜 왔던고 왜 왔던고 / 울고 갈길을 왜 왔던가
· 원수야 악마구야 이 몹쓸 사람아 / 생사람 죽는 줄을 왜 그리 모르냐
· 우리야 엄매 아배 내 말좀 듣게 / 아리랑 고개 넘어로 날여워 주게
· 이붓 엄매 맷둥에는 할미꽃이 피고 / 우리엄매 맷둥에는 목단꽃이 피었네
· 염병할 놈 시병할 놈 일본에를 가더니 / 보기 싫은 봉투지만 달이 달달이오네
· 열 두살 먹은 것이 무슨 단맛을 알어서 / 밤밥만 먹으며는 잔솔밭으로 가느냐
· 왜 왔던고 왜 왔던고 / 구비구비 열두 구비 한숨이 나네
· 연락 서산에 해 떨어지고 / 월출 동산에 달 떠온다
· 이 몸이 죽어서 열녀가 되느니 / 한강수 깊은 물에 빠져나 죽세
· 열 두살 먹은 것이 기생이라고 / 속 눈만 감고 아리발발 떤다
· 열길 물 속은 알 수가 있어도 / 한길되는 사람마음 알 수가 없네
· 앞 강에 뜬 배야 닻 놓고 가거라 / 해안에 물들면 나도 타고 갈란다
· 열두세 베적삼을 언제 만들어 입고 / 산 넘어 친정을 언제나 갈까
· 저 건너 저 가시나 속곳 밑 보아라 / 대목장 볼라고 홍당목 젓네.
· 저기 가는 저 처녀 엎으러 나져라 / 일써나 주는 듯이 보듬아나 보자.
· 저 건너 저 가시나 시집을 갈랑가 말랑가 / 물래 독 보둠고 기지게 쓰네
· 전봇대가 높다 해도 하날 밑에서 놀고 / 여자가 코가 시여도 남자 밑에서 논다
· 저달 가는데 별 따라가고 / 우리님 가는데는 내가 따라를 간다
· 정들었다고 실 통정마라 / 이별수 들면은 못할 말이 없네
· 장고야 울어라 밤새도록 울어라 / 너도 울고 나도 울고 밤새도록 울어라
· 춥냐 덥냐 내 품안에 들어라 / 베게가 높거든 내 팔을 베어라.
· 청천하늘에 잔별도 많고 / 요네 가슴에 희망도 많다.
· 팔구 월 다래는 곱게도 피는데 / 우리네 부모 속은 밤중 속이로구나
· 홀엄씨 홀애비 정드는데는 / 막걸리 한잔이 정들어 준다
· 호박모 박모도 자리 봐서 심는데 / 백년 살라 심는 자식 좋은데로 심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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