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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서론 강의
2006/11/19
사사기
서론
진리를 청자의 가슴과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으로 전달하는 가장 좋은 방법들 중 하나는 이야기를 하는 방식이다. 성경은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으며, 이들은 이 목적을 위하여 고안되었다. 이야기 하는 신학 전체는 대본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그러한 신학을 조직적으로 쓰는 것보다는 설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하나님 자신은 실로 위대한 이야기꾼이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분은 모든 사건들을 자기의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살리도록 하기 위하여 주권적으로 간섭하신다. 하나님의 이야기들은 실제로 일어났다. 그 사건들이 이야기로서 말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실제 역사적인 성격을 조금도 감하지 않는다. 사건들에게 전율할만한 힘을 주는 것은 그 사건들이 어느 해 어떤 장소에서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을 우리가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 때문이다.
왜 좋은 이야기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가? 왜냐하면, 문학도들로서 말한다면 그 이야기들이 우주적인 인물들을 구체화하고 있으며, 우주적인 문제들, 희망들, 두려움들, 상징들 등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확하게 옳다. 그러나 우주적인 진리들은 추상적인 보편성과는 다르다. 이야기들의 가장 우주적인 측면들이 보이는 것은 특수한 사건들에서이다.
사사기에서 하나님의 형상
성경 신학에서 위대한 우주적인 면들이 있다. 그것들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 즉 하나님의 상징이라는 사실로부터 온다. 따라서 전 성경을 통하여 “그 씨”가 진행되고 있다. 그 씨는 여자의 후손으로 나서 뱀의 머리를 부수어버릴 자이다. 우리는 이 씨를 사사기에서 몇 번 보게 될 것이다. 실로 원수의 머리를 부수는 것은 사사기에서 가장 두드러진 주제들이다:
에훗이 정치적인 머리인 에글론을 죽인다.
야엘이 천막 말뚝을 가지고 시세라의 머리를 부순다.
기드온이 세바, 살문나, 오렙, 십을 죽인다. 이들은 정치적인 네 머리들이다.
아비멜렉의 머리는 바위에 의해서 부수어진다. 한 여인에 의해서 부수어진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의 도시들의 우두머리 다섯을 쳐부수는데, 바위로 그들을 쳐 부수었 다.
히브리 이름으로 ‘메시야’로 알려진 기름 부음 받은 자도 있다. 메시야는 머리에 기름을 부어서 하나님의 백성 위에 특별한 제사장이나 왕으로서 세움을 받는 자이다. 또는 기름과는 달리 성령의 특별한 기름부음을 받기도 했다. 메시야는 좋은 일을 위해서든지 나쁜 일을 위해서든지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한다. 우리는 이런 메시야를 물론 사사기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각 사사들은 성령에 의하셔 기름 부음을 받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대단한 어머니'(The Mother)도 있다. 우리는 드보라와 드보라와 같은 위치에 있으면서도 악역으로 나오는 드보라의 쌍둥이 같은 시스라의 어머니, 삼손의 어머니 같은 인물들에게서 대단한 어머니를 만난다.
또한 '신부'도 있다. 이러한 인물을 우리는 기브아 사람들에 의하여 폭행을 당하여 죽은 레위인의 아내에게서 그런 인물을 볼 것이다. 그리고 신부를 본다면 또한 ‘신랑’도 볼 것이다. 우리는 나라 밖에서 구원을 가져다주는 인물을 젊은 삼손이란 사람에게서 보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신실하지 못하게도 신부를 죽는데 내버려 두는 것을 레위인이란 인물에게서 보게 된다. 그리고 어머니와 신부가 있다면 또한 ‘창기’도 있을 것이 틀림 없다. 이러한 상징적인 역할에 충실한 자가 들릴라보다 더 좋은 후보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에게 친근하지는 않지만 ‘젊은이’도 있다. 그는 성숙하기 전에 권력을 잡도록 유혹을 받은 젊은이인데, 그의 죄악은 아담과 함의 죄악이었다. 우리는 기드온이란 사람에게서 그런 사람을 만난다. 창세기에서는 자주 만나지만, 사사기에서는 단 한 번 나오는 인물은 ‘더 어린 형제’ 곧 동생이다. 형이 배교하여 심판을 받을 때에 막내 동생은 형을 대신한다. 우리는 요담이라는 사람에게서 이런 사람을 보게 된다. 그의 형들의 죽음은 이스라엘에게 옛 세계 질서가 심판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조였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인물들의 목록을 다 열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모든 사람들이 단지 상징며, 알레고리적인 인물들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만약 당신이나 내가 이 이야기들을 섰다면, 그리고 모든 것이 그와 같이 나오도록 시도했었다면, 우리는 약간 사려 깊은 허구 속에서 씨름해 온 것이 될 것이다(그리고 예수의 비유들이 보여주듯이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하여 잘 못된 것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하려했던 것은 이런 것이 아니다. 이 사람들은 진짜 육과 피를 가진 사람들이었고, 진짜로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생애들은 모든 것이 그렇게 나오도록 하나님에 의해서 정해졌다. 그리고 그들의 생애들의 역사는 우주적인 의미들을 가져오는 그러한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기록되었다. 하나의 사실도 왜곡될 가능성은 없었다.
해석의 열쇠들
사사기의 저자가 누구인가? 신자들은 하나님이 이 책을 섰다는 것을 고백한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모든 성경을 썼기 때문이다. 나는 인간 저자를 위한 가장 그럴듯한 후보자는 사무엘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볼 것이지만, 사사기의 중요 주제들 중의 하나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는 것이다. 백성들은 여호와를 그들의 왕으로 깨닫도록 되어 있었다. 백성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에 혼돈이 잇따라서 일어난다. 사무엘 8장에서 인간 왕들의 폭정을 크게 경고한 이가 사무엘이며, 그리고 사무엘이 사사들을 준비시키시는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서 그 시대를 위하여 소책자를 썼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사사기는 모든 구약의 소위 “역사서들”과 같이 참으로 하나의 예언이다. 사사들은 “전 선지자들”로 불리우는 사람들 중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 된다. 이 책들은 예언들이라고 불리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기록한 역사들이 전형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 역사들은 하나님의 행동하시는 원리들을 보여주며, 따라서 백성들에게 예언적인 경고들을 형성했다. 만약 우리가 사사기를 단지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의 모음으로 읽는다면, 우리는 이런 사실을 놓치고 만다.
예언적인 의미를 얻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 내러티브 해석의 네 가지 “비밀”을 알아야 한다. 첫째, 우리는 위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우주적인 측면들을 진지하게 취하여야 한다. 사사기에서 이스라엘을 침입한 첫 원수는 이중적인 강을 가진 아람(아람 나하라임의 왕이다)에서 온 배나 악한 구산(Cushan-of-Double-Wickedness,구산 리사다임, 히, 쿠산 리쉬아다임을 의역)이다. 이 곳은 메소포타미아이다(메소포타미아라는 말은 강 사이에 끼인 지역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언이란 무엇인가? 만약 백성이 의롭게 살지 않는다면, 원수가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올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되었다. 먼저는 아수르(first Assyria)가 북쪽 이스라엘을 정복했고, 후에는 바벨론이 남쪽 이스라엘을 정복했다. 그래서 이중적인 파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이러한 맥락을 따라서 우리는 창세기 1:26절과 함께 사람은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을 고백하여야 한다. 이것은 인간의 생명은 피할 수 없고 끊을 수 없이 하나님의 생명을 닮았다는 것을 뜻한다. 옳게든지 또는 옳지 않게든지(죄스럽게든지) 하나님의 생명을 닮았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 생활의 모든 것에서 심오한 상징적인 차원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가지는 상호작용은 하나님의 삼위일체 간의 상호작용을 보여준다. 옳게든지 그릇되게든지 그러하다. 이제 이것은 성경에서 자세히 이야기 되고 있는 이야기들에 대하여 더욱 그러하다. 왜냐하면 성경의 이야기들은 예언으로서 계획된 것이기 때문이다. 정해진 더욱 많은 방식들로서 성경의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닮는 법과 혹은 닮지 않는 법을 보여준다.
성경의 상징주의나 모형론은 다소 ‘모호하다’. 모호함에는 잘 못된 것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언어에서 다소 좀 더 특수한 단어들뿐만 아니라 다소 모호한 단어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에게 방이 “크다”고 말하는 것은 그 방이 12x120x120 자라고 하는 것에 비하면 모호하다. 그러나 “크다”는 말은 특정한 표현들이 하는 것보다는 더욱 정보를 많이 전달하고 있다. 이와 비슷하게, 태양이 오늘은 6시쯤에 떴다는 것은 아주 명백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지구의 지평선이 낮아져서 아덴과 조지아에서 볼 때에 동쪽 날이 밝는 시간으로 오전 5시 58분 45초 정각에 태양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더욱 모호하다.
예수의 어떤 비유들은 아주 특수하다. 너무나 특수해서 실제적인 알레고리 같이 보일 때가 있다(마태 22:1-13의 결혼 잔치 비유 같은 것). 하지만 다른 비유들은 더욱 모호하고 일반적이다. 이것은 구약의 이야기들에서도 역시 그렇다. 어떤 사건들은 분명하고 예리하게도 상징적이고 모형론적이지만, 다른 사건들은 모호하고 일반적일 뿐이다.
우리는 이것을 “해석적인 최소주의”(interpretative minimalism)으로부터 우리를 차별화하기 위하여 설명해야 하겠다. 해석적인 최소주의란 근래에 성경에 대한 복음주의적인 주석들을 규정짓기 위해서 나온 개념이다. 우리는 어떤 주어진 구약 이야기가 상징적인 측면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어떤 특정한 신약의 구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상징적인 측면들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바로 그 사실에 전제 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 내러티브들의 더 넓은 예언적인 의미들에 비추어서 추측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우리가 그것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방식들을 닮고 있는지를 생각할 때에).
이러한 “최대주의적” 접근은 초대 교회 교부들이 사용했던 해석학적인 방법과 궤를 같이 하는 자리에 우리를 세운다. 그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종류의 억제와 균형을 그러한 접근 시에 상용해야 할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떡 다섯 조각과 물고기 두 마리가 모세의 오경과 구약과 신약을 가리키는가? 거의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그러한 해석에 대한 우리의 억제책은 무엇인가? 해석에 대한 억제책과 균형은 성경과 신학의 나머지 부분 전체이다 라고 우리는 말해야 한다. 시간이 감에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해석학이 더욱 더욱 정교해질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지금 뛰어들어서 시도하지 않는다면 해석학이 정교하게 다듬어지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이제 예를 들어보자. 사사기 1:11-15절에 우리는 옷니엘과 악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서 인물들은 원수(거인들), 아버지(갈렙), 아들(옷니엘), 딸(악사), 그리고 두 가지 다른 요소들 즉 물샘들과 나귀가 있다.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신부를 얻기 위하여 원수를 무찌른다. 우리는 여기서 ‘모호한’ 복음의 이미지를 볼 수 있는가? 그렇다. 그것은 분명히 페이지를 뛰어 넘고 있다. 결혼 한 후에 우리는 신부가 아버지께 물 샘들을 요구하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는 여기서 교회가 성령을 요구하고 받는 ‘모호한’ 이미지를 볼 수 있는가? 또한 우리는 신부가 나귀 곧 불결한 짐승을 타고 가는 것을 본다. 불결한 짐승들이 회개하지 않은 나라들을 의미한다는 것을 (행10,11) 고려한다면, 그리고 계시록의 거짓된 신부가 짐승의 등에 타고 있는 것을 생각한다면(계17:3), 우리는 여기서 교회가 이방 세계를 지배하며 또 그 위에 타고 있는 ‘모호한’ 그림을 볼 수 있는가? 그렇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들은 ‘모호한’ 이미지들이며, 말하자면 진리에 대하여 급히 찍은 사진과 같다. 이 이야기를 완전한 의미의 예언적인 모형으로 만드는 것은 펼치는 문제들일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더욱 일반적인 그림이 여기에 제시되어 있을 가능성에 대하여 우리 자신을 소경으로 만들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의심할 것 없이 옷니엘과 악사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그 나라의 승리와 또 그 나라가 승리한 후에 의인들에게 주어지는 축복들을 그려주기 위하여 계획 된 것이다. 일반적인 방식으로 말해, 이것은 그 나라를 얻는데 있어서 그리스도의 사역과 유사하며, 그 후 교회에 주어지는 축복과 유사하다. 이러한 일반적인 진리를 고려한다면, 우리는 그 구절을 더욱 자세하게 살펴서 위에서 한 것처럼 더욱 특정한 상응구절들과 연계지어 볼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이와 같은 해석들을 태워 없애버리지 않고 있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그것에 적어도 어떤 의견을 제시하려고 하지 않는 한 본문에 우리식의 해석을 행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주석에서 나는 본문을 “최대한 크게”(maximally) 해석할 것이다. 독자는 내가 던져버린 아이어들을 생각해야 할 것이며, 그리고 그가 어떤 해석들은 잘 지지를 받지 않으며 또는 믿을만 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면 그것으로도 좋다. 중요한 것은 해석적인 논의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며, 우리 앞에 있는 예언들을 더욱 충분히 이해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비밀”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해석에 주목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 가지 질문을 한다: 1.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의 말씀이 무엇인가?
2. 사람의 반응이 무엇인가(반역인가 혹은 신실함인가)?
3. 하나님의 평가의 말씀은 무엇인가(심판인가 혹은 축복인가)?
모든 성경의 내러티브는 모두 세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아무리 적어도 암시적으로라도 가지고 있다. 이따금 약속/명령의 말씀이 표현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율법 속에 이미 포함 되어 있기 때문이다. 율법은 뒤에 나오는 성경의 모든 책들을 위한 배경이다. 모든 약속이 명령이다. 왜냐하면 신실한 사람은 그 약속 속에 있는 축복을 추구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명령 또한 약속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항상 그의 계명들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우리는 사람의 반응으로 이른다. 사람들은 신실하거나 혹은 반역적이다. 어떤 때는 두 가지가 뒤섞여 있다. 그리고는 우리는 하나님의 평가 또는 판단에 이른다. 이것은 저주나 축복을 수반한다.
이 삼중의 행위는 성경의 모든 내러티브에 강조 된다. 아담은 명령과 약속을 받았다. 그는 반역했다. 하나님이 오셔서 그를 심판하셨다. 인류 전체가 하나님께로부터 명령과 약속을 받았다. 인류 역사는 전체가 인간의 반응이다. 마지막 심판은 하나님에 의하여 만들어진 마지막 평가이다. 아브라함은 명령을 받았다: “가나안으로 가라”. 아브라함은 순종했다. 그가 가나안에 도착한 후에 하나님은 그를 만나시고 축복하셨다. 그리고 그에게 다음의 명령들을 주셨고, 아브람은 순종했고,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람을 축복하셨고, 그리고는 그에게 다음의 명령들을 주셨으며, 아브라함이 순종했고, 등등이다.
셋째 비밀은 성경의 큰 언약사적인 문맥에 주목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의 기본적인 이야기를 반복하고 또 하면서, 다양한 시대에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계획된 것이다. 이것은 창조, 타락, 쇠퇴, 심판, 재창조의 이야기이다. 이 패턴은 옛 언약 기간 동안 세단계의 아주 큰 역사적인 진전 속에서 일어났다. 첫 번째는 세계의 창조, 아담의 타락, 창세기 6장에 기록된 쇠퇴, 홍수 심판, 노아를 통한 재창조이다.
둘째는 홍수 후에 세상의 재창조와 더불어 시작한다. 이 재창조는 큰 스케일로서 첫 창조와 같은 형태를 취한다: 첫째 더 큰 세상이 만들어지고(창1; 창10, 나라들), 그리고 성소가 세워진다(창2,에덴; 창12, 아브라함의 소명). 창조부분은 이스라엘이 그 땅에서 충분히 정착하기까지 계속되는데, 다윗이 마침내 정복을 이루기까지이다. 그리고는 솔로몬의 더불어 타락이 오며, 포로시기까지 전진적인 쇠퇴가 있으니 포로시기에 새로운 아담과 이브들이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성소에서 내던짐을 받는다. 재창조는 다니엘과 에스라와 함께 시작된다.
세 번째 진전은 다니엘 하에서 세계의 재창조와 에스라에 의한 성소의 재건과 더불어 시작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주를 십자가에 못박았을 때에 큰 타락이 온다. 쇠태가 주후 70년까지 계속되고 성소의 파괴가 일어난다. 따라서 마지막의 세 번째 재창조는 교회인데, 그것은 영원하다.
나는 커다란 이 세 진전의 일어남을 성소의 규칙을 사용함으로 밝혀왔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성쇠가 반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파괴하기까지 그 땅에서 쫓겨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아브라함부터 느부갓네살까지 하나의 큰 역사이다. 따라서 역사의 첫 세 “날들”은 그 중심에 성소들을 가지고 있는데, 에덴, 성막과 성전, 에스라의 제 2성전이다. 제 삼 사이클에서(제 3“일”에)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 사이클을 깨어버렸다. 성쇠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역사는 점진적인 재창조와 정점의 하나가 될 것이다.
이제 이 패턴의 둘째 진전의 일어남 내에서(아브라함부터 포로까지) 이 패턴의 반복이 적은 형태로 세 번 일어남이 있다:
기본 패턴 2a: 창조: 아브라함에서 출애굽까지
타락과 쇠퇴: 광야
심판: 그 세대의 죽음
재창조: 대제사장 아론의 죽음-백성을 “도피성” 광야를 떠나서 다시 한 번 그들의 땅들을 소유하도록 함(민20:29과 21:1이하).
기본 패턴 2b: 창조: 여호수아와 그 정복
타락: 사사기 1장
쇠퇴: 사사기
심판: 삼손, 사무엘, 룻 때에 법궤 탈취
재창조: 법궤의 돌아옴
기본 패턴 2c:
창조: 사무엘과 다윗
타락: 솔로몬, 왕을 위한 율법들을 깨뜨림(신17:16이하와 왕상 10:14이 하, 26이하; 11:1이하와 비교요).
쇠퇴: 두 왕국
심판: 예루살렘의 파괴와 포로
재창조: 에스라, 느헤미야
전 성경을 통하여 이 패턴들이 작은 형태로 나타나고 있음은 물론이다. 해석의 세 번째 “비밀”에서 우리의 관심은 구속사의 전체적인 진전에서 사사기의 위치에 주목하는 것이다. 사사기는 이스라엘의 타락, 쇠퇴, 심판과 또한 (삼손과 마지막 장에서) 재창조의 시작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또한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하여 중요한 구조이다.
해석의 넷째 “비밀”은 본문에서 특수한 세목들에 면밀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하나님은 단어들을 허비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건들을 절대적으로 간섭하시며, 본문에 기록된 세목마다 의미 있게 고려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사사기 9:53은 “어떤 이가 돌을 던져 그것이 아비멜렉을 맞혀서 그가 죽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구절은 “어떤 한 여인이 매돌 위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던져서 아비멜렉의 두개골을 깨뜨리니라”라고 말하고 있다. 모든 세목이 중요하다. 우리가 8장에서 이 연구에 대하여 볼 것이지만, 그것이 여인이었다는 것, 그것이 돌이었다는 것, 그것이 맷돌이었다는 것, 그것이 머리를 쳐서 깨뜨렸다는 것 등이 다 중요하다.
이와 유사하게 숫자들은 보통 본문에서 상징들로서 중요하다. 고대 기록자들은 항상 숫자들을 상징적으로 사용하였고,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억지를 강요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숫자들을 상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데, 세계 역사상 현대인은 이 점에서 아주 크게 예외적인 사람이다. 물론 숫자들은 문자적으로 참되지만, 하나님이 모든 사건들을 간섭하심으로 인해 우리는 본문에서 숫자 패턴들의 더 깊은 의미를 고려하도록 초대를 받고 있다.
성경에서 기록들은 주의 깊게 세워진 문학적 걸작들이다. 이 사실을 명심하지 못한다면 천박한 해석으로 빠지게 된다. (의심할 것도 없이 현재 하는 이 주석에서도 천박한 작업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착수하면서 우리는 적어도 할 수 있는 대로 주의 깊게 시도하도록 할 것에 동의하자). 만약 본문에서 어떤 것이 반복된다면, 그것은 이유가 있기 때문에 반복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의 이름이 나오거나 혹은 빠진다면(삼손의 어머니의 경우에서처럼), 그렇게 되는 이유가 있다. 만약 특수한 숫자들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요구된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달리 말하면, “7000명의 군대”는 해석학적으로 “큰 군대”와 같지 않다. 세부적인 것들이 중요하다.
이 네 가지를 마음에 새김으로써 우리는 사사기의 메시지에 하나님 중심의 접근을 할 수 있다. 결국 근본적으로 사사기 기사들은 사람들이 옳게 혹은 그르게 행했다는 것을 말하는 도덕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그 기사들은 심판과 구속 활동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을 다루시는 가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하나님과 사람 간의 상호작용이 역사의 핵심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들을 다시 말하면서, 우리는 그 이야기들의 예언적인 의미에 주목할 것이다. 그 이야기들이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무엇을 의미했던가? 무슨 교훈들을 그 사람들은 본문에서 끌어내려고 했었던가? 그리고 무슨 교훈들을 우리는 또한 끌어내어야 하는가?
사사기 개관
이제 우리는 큰 틀에서 이 책의 개관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보자. 사사기에는 몇 개의 짜여진 구조적 장치가 있다.
우선, 사사기에 열거되고 있는 이야기들은 다섯 짝을 이루고 있다. 내 추측은 이러한 배열은 어떤 문제든지 “두 세 증인들의 입으로써만 확실하게 된다”(신19:15)는 성경의 가르침을 예증하기 위하여 계획된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형태의 짝지우기는 성경에서 아주 일반적이며, 여기서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도 셋이면서 한 분이시고, 그리고 그분은 항상 두세 가지 증거들로 자신을 증거 한다.
다음은 사사기의 개관이다. 짝으로 이루어져 있다.
I. 두 개의 서론:
1. 정복에서 타협까지(1:1-2:5)
2. 징계의 원리들(2:6-3:6)
II. 두 명의 모범적인 사사들:
1. 옷니엘(3:7-11)
2. 에훗(3:12-30)
III. 사사 같지 않은 사사들:
1. 드보라, 여 사사(4:1-5:31)
2. 기드온, 젊은이(6:1-9:57)
ㄱ. 기드온의 승리들(6:1-8:28)
ㄴ. 기드온의 몰락과 왕권을 향한 다툼의 시작(8:29-9:57)
(시편 83:9-12과 이사야 9:1-4은 드보라와 기드온의 이야기들을 한데 묶어 놓았다.)
IV. 두 명의 타협한 사사들:
1. 입다, 반쪽 출생(서출)(10:1-12:15)
ㄱ. 왕관을 원하는 입다의 죄(11:1-40)
ㄴ. 입다의 의로운 행위들(12:1-7)
2. 삼손, 나실인(13:1-16:31)
ㄱ. 삼손의 출생(13)
ㄴ. 삼손의 복음적인 사역(14-15)
ㄷ. 삼손의 몰락(16)
(입다의 이야기는 왕권에 미혹됨을 보여주는 소 사사들(10:1-5;12:8-15)에 대한 주목할 점들과 함께 묶여져 취급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라. 입다와 삼손의 이야기들은 서로 전도 되어 있음도 주목하라. 즉 입다의 의로운 행위들은 그의 몰락 후에 오는데, 삼손의 몰락은 의로운 행위들 다음에 온다. 입다의 이야기에서는 그의 몰락 이야기가 먼저 오고, 삼손의 이야기에서는 의로운 행위 이야기가 먼저 온다)
V. 두 개의 부록들
1. 레위인들이 이스라엘의 예배를 지키는 데 실패하다(17-18)(보라, 3:7-우상숭배).
2. 레위인들이 이스라엘의 도덕을 지키는 데 실패하다(19-21)(3:6을 보라-간음).
이상은 사사기를 개관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다. 사사기를 개관하는 둘째 방법이 있는데, 이것은 두 증인의 국면을 더욱 충분히 밝혀보는 것이다. 에훗과 더불어 시작하여, 적어도, 각 섹션이 다음 섹션에 의하여 취하여지는 주제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에훗과 드보라: 두 이야기들에서 우리는 자객의 손에 의하여 원수로부터 구원하는 것을 보게 된다. 두 이야기들에서 뱀의 머리는 메시야적인 남녀 영웅에 의하여 깨어지며, 하나님의 군대들은 추격하여 소탕작전을 벌린다(3:27과 4:14). 에훗은 “종려나무 도시”를 다시 점령하였으며, 드보라는 사사(재판관)로서 종려나무 아래 앉았다.
드보라와 기드온: 두 이야기들에서 우리는 지도자들이 태만할 때 그 밑에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구원되는 것을 본다. 두 이야기들에서 악한 사람이 패퇴할 때 태양이 떠오른다(5:32;8:13;헤레스 비탈이란 말에서 헤레스라는 지명은 태양이라는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기드온과 입다: 여기서 우리는 거짓된 왕권을 세우려는 욕망을 보여주는 두 이야기들을 대면한다. 아비멜렉과 입다 둘 다 반쪽 출생자들이다. 인본주의적인 왕권이 반쪽 출생자의 신앙에서 자라난다.
입다와 삼손: 두 이야기들에서 성격상의 결함들은 효과적인 리더쉽과 사회적인 진전을 방해한다. 두 이야기들에게 우리는 하나님의 기름 부은 리더에 대한 반역과 그리고 그 리더의 무심한 발설(betrayal)을 본다.
삼손과 부록 1: 이 두 이야기들은 같은 배경을 가지는 것에 의해 연결되어 있으며(역주, 예컨대 단 지파에서 삼손이 나오고,13:2, 단 지파에 의하여 에브라임의 미가 집이 약탈되고 또 라이스 거민들이 죽음을 당하고 신상이 세워진다,18:27이하), 그리고 ((여호와 자신이나 또는 은 1100개를 위한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의 발설에 의하여 연결되어 있다)).
부록1과 2 : 두 경우 다에서 강조되는 문제는 이스라엘의 레위인 수직자들 쪽의 태만이다.
사사기에서 세 번째 개괄적 구조는 본서의 중간 부분에서 보인다. 하나님에 대한 점차적인 반역이 있는데, 하나님이 기름 부은 자를 따르기를 점차로 거부하는 데서 보인다.
에훗: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따르는 문제가 없다.
드보라: 바락은 여호와의 명령을 따르도록 설득되어야 했다.
기드온: 대부분의 지파들이 기드온을 따르지만, 에브라임은 반역을 보인다.
입다: 에브라임이 명백히 반역했고 징벌을 받는다.
삼손: 유다가 에브라임보다 나은 것이 없으며, 그리고 메시야를 원수에게 넘긴다. 사실 왕과 같은 위치에 있는 지파로서 유다는 더 높은 특권들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유다의 죄는 에브라임의 죄보다 더 크다.
넷째, 사사기의 첫 부분과 나머지 부분의 개괄 사이에 일반적인 공통점이 있다. 위에서 본 것처럼, 사사기의 첫 번째 서론은 이스라엘이 처음에는 잘 시작했지만, 점차로 타협하여 하나님이 심판하는 자리에 이르렀고, 그리고는 제사를 통해서 치유를 받는다. 이와 비슷하게 사사기의 나머지 부분은 같은 패턴을 보여준다. 즉 잘 시작하고(옷니엘, 에훗), 점차로 퇴락하며(위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마침내는 심판(두 번째 부록)이 있고, 구속과 새 생활이 따른다(마지막 장). 나중 가서 우리가 볼 것이지만 두 번째 부록이 첫 번째 서론으로부터 온 언어와 주제들을 근거하여서 논의 된다. 그래서 이 두 부분이 사사기를 하나로 묶는다.
사사기의 신학
신학으로 말하면 사사기는 하나님을 거의 절대적으로 두 측면에서 제시한다. 첫째는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에게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는 전능한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내 이름 여호와에 의해서는 그들에게 나 자신을 알리지 않았다”고(출6:3)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것은 족장들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족장들에게 그 이름의 의미를 분명히 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은 족장들에게 전능하신 하나님 즉 언약들을 창조하시고 약속들을 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셨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여호와 즉 자기의 언약들을 계속하시며(확실하게 하시며) 자기의 약속들을 지키시는 분으로 나타나셨다. 출애굽기 6:6-8은 그 이름 여호와의 의미에 대하여 상세한 주석을 하고 있다. 여호와는 자기 백성을 종 된 처지에서 구원하여 내시며(6절), 그들과 결혼하시며(7절), 그들에게 약속하신 땅을 주시는 분(8절)이다.
그런데 여호와라는 이름은 인간의 신실함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신실함과 관계가 있음에 틀림 없다. 그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과 그것의 정복과 관계 지어져야 한다. 그것은 또한 이스라엘과의 결혼과 관계가 있다. 그것은 노예상태와 구원과 관계가 있다. 이 모든 것이 사사기에서 중요한 주제들이며, 그리고 이것이 왜 “여호와”가 여기에서 하나님을 위한 이름으로 사용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이유이다. 이와 같이 사사기 전체는 여호와라는 이름의 의미에 대한 큰 규모의 주석이다.
사사기에서 하나님을 가리키는데 사용된 다른 용어는 “여호와의 사자”이다. 출애굽기 23:20이하에 따르면, 여호와의 사자는 여호와의 군대의 장관으로서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백성 앞에 가시는 분이다. 이리하여 여호와의 사자는 정복의 시작에 여호수아에게 나타나셨다(수5:13이하). 사사기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사자(Angel)로서 나타내신다. 길갈에서 백성들을 신실하지 않다고 판단하실 때에 그렇게 하셨으며(삿2:1-14), 기드온을 불러서 그 땅을 위하여 싸우도록 하실 때(6:11-22),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나 구원자 삼손의 출생을 알리실 때에 그렇게 하셨다(삿13: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