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길이는 같다. 그러나 한편에선 이제 막 해가 길어지려 하고, 한편에선 이제 막 해가 짧아지려 한다. 그러니까, 이제 막 짧아지는 해를 보며, 왜 이제 막 길어지는 해를 그리워했던가. 통속적인, 사라진, 분홍빛 한복 같은 봄날에 대한 지극한 그리움은 돌이켜볼 여지도 없이, 그 대극과 매우 정교하게 한 끝 차이를 이루고 있다. 기움과 저묾. 그러니까 해의 길이는 같지만, 정반대를 겨누고 있는 상태. 애틋한 순간 중, 왜 저물음이 시작되는 순간, 기울음이 시작하는 순간에 대한 회상을 시작했던가. 처서의 두번째 다섯 날, 온 천지가 쓸쓸해지는 순간, 왜 허진호는 갑자기 봄날을 떠올렸던가,
옛날, 그러니까, 기울음이 시작되던 순간 썼던 영화 <봄날은 간다>에 관한, 내가 쓸 수 있었던 최고의 비평. 최고란 이야기는 좀체로 반론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 사실 여기서 이야기는 시작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안쓰러운 일. 때로는 끔찍한.
우리는 모두 유지태다.
사랑을 시작한 우리는 고함을 지르며 바다를 달리려다 들켜 쪽팔리고
술먹은 밤 택시를 잡아타고 강릉에 간다.
사랑은 ‘처음’이다. 첫눈빛, 첫손길, 첫키스, 첫날밤 그리고 봄.
두번째는 관습이다.
그녀를 찾아가 홀로 꺽꺽 운다.
나는 사랑이 변하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여름이 와서 그녀는 떠났고
나는 홀로 가을과 겨울을 난다.
다시 봄이 온 뜰은 눈물이 난다.
봄은 계절의 절정, 삶의 절정으로 빛나고
흐드러진 개나리와 꿈같은 벚꽃 속에 할머니와 그녀를 보낸다.
삶과 사랑과 사람은 생사소멸한다.
하지만 나의 망설임은 무한히 깊고 떨리는 망설임이다.
우리는 모두 낭만주의자다.
^‘죽음을 파고드는 삶’은 우주의 모든 순환(circulation, cycle)을 설명한다. 모든 계절은 열매를 맺고 스러지며, 사랑은 권태로 종결되고, 우리는 ‘성기의 끝으로부터 와 칼끝을 향해 간’다. 주어진 시간형식 속에 생명에게 주어진 역할은 궁극적으로 소멸이다. 그런데 바타이유는 왜 이 자명한 생명의 법칙 ‘죽음을 파고드는 삶’을 에로티즘이라 칭했던가. ‘파고드는’ 이라는 동사에 힌트가 있을까. ‘파고드는’은 속도감, 능동성의 느낌을 전해 준다. 봄에서 겨울이라는 순환의 법칙, 또는 발단에서 결말까지의 진부한 드라마의 전개를 용인할 수 없다는 것. 의도적인 죽음의 채택을 통해 자연적인 속도감에 균열을 가져오는 명백한 순리의 거스름. 파국을 감내하는 의도적인 ‘절정’의 채택. 이것이 사랑, 혁명, 알코올을 통해 저 세계로의 진입을 꿈꾸었던 19세기 낭만주의자들의 전략이었다.
^순환은, 다시 말해 싸이클의 반복은 ‘성숙’을 의미하기도 한다.(이것은 두번이면 족하다.) 성숙은 절정과 그 뒤를 경험해 본 자, 즉 ‘어른’의 감성이다. 이미 어른인 그녀는 다시 ‘낭만적 체험’을 할 수 없다. 이미 그 전개를 체험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사물은 처음 만난 사물이 던져 주는 그 폭발하는 의미를 상실한다. 이 어른의 세계는 세속화의 세계이기도 하다. 나는 ‘불’을 가지고 달려가지만 이 끝을 모르는 눈 먼 정신의 미칠듯한 상실감도 계절의 순환과 할머니의 죽음을 배경으로 성숙한다. 사랑의 아름다운 기억에서 ‘정신적 자살’을 택했던 할머니마저 잠시 현실로 돌아와 나의 고통과 성숙을 위로한다. 모든‘성장’의 이야기에는 어떤 도식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핵심은 ‘망설임’이다. 벚꽃이 진다. 벚꽃은 가장 아름다운 순간, 만개한 순간, 천지에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지는 벚꽃엔 ‘죽음을 파고드는 삶’의 장렬함이 있다. 망설임은 눈 먼 사랑에 대한 망설임인가. 아니면 저너머로 사라진 눈 먼 사랑에 대한 망연함인가. 유지태의 5분간의 망설임에는 인간사 60억년의 오래된 망설임이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