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호(이하 유) : 20세기로 들어선 이후 해방 이전까지의 문화 생산물 가운데 가장 넓게 또 가장 깊숙이 우리의 생활 속에 뿌리박은 것이 노래로는 홍난파의 가곡이고, 시로는 김소월의 시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김소월에 관해서 말씀을 나누기로 하겠습니다.
왼쪽에 계신 분이 김종길 선생이신데, 시인이시고 고려대에서 오랫동안 가르치셨다가 지금은 명예교수로 계십니다. 그리고 많은 시론을 남기셨는데, 아마 여러분들께서 잘 아시고 계실 것입니다.(함께 박수)
오른쪽에 계신 분은 남진우 선생인데, 시도 쓰고 젊은 시비평가로서 지금 한창 명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팔봉비평문학상을 받았고, 많은 글을 쓰고 계십니다.(함께 박수)
문단의 전설 가운데 이런 얘기가 하나 있습니다. 옛날에 이광수라는 고명한 작가가 있었습니다. 해방 직전의 친일 이력 때문에 명예가 많이 손상되기는 했지만, 우리나라 20세기 문학의 거인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 분이 한 얘기가, 자기 생각에는 20세기 전반에 한국 문학에서 취할 사람이 세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김소월(시)이고, 또 한 사람은 박태원({천변풍경} 같은 소설), 그리고 세번째는 윤석중(동요)등이라고 했답니다. 이건 상당히 많이 알려져 있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김소월에 대해서 많이 들어보셨겠지만 오늘은, 올해로 김소월 시인의 탄생 백주년도 되고 해서 다시 한 번 소월을 읽어보는 기회를 갖자고 해서 마련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우선 김소월을 어떻게 체험하셨는지에 대해서 두 분 선생님의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김종길(이하 김) : 제가 소월시를 읽게 된 것은 해방 후 제가 20대 때인데, 해방되던 해에 저는 우리 나이로 스무 살이었습니다. 학교 다니며 시를 습작할 무렵, 소월 시를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몇 편은 아주 깔끔하고 좋은 시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고, 여러분들이 소월 시를 아시다시피, 노랫말처럼 되어 있습니다. 정형시를 약간 변형한 듯한 것이 조금 있습니다만, 대충 7.5조니 3.4조니 하는 것처럼 정형시입니다. 이런 것이 당시의 문학청년이었던 저에게는 좀 진부하게 느껴졌고, 이런 작품이 현대시라고 특별히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몇 편 좋은 시는 빼고, 소월 시 전반에 대해서 처음에 저는 별로 훌륭한 시라고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소월 시 가운데 가장 주목한 작품은 [진달래꽃]입니다. 그것이 소월 시 가운데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지만, 소월 시 전체를 두고 볼 때는 매우 특이한 이색적인 작품입니다. 그리고, 그 밖에도 [못잊어]라든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등 보통 잘 알려져 있는 작품들은 깔끔한 정형시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소월 시에 대해서 저 자신과 소월 시와의 관계를 생각해볼 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제가 영문학(영시) 공부를 하기 때문에 [진달래꽃]을 영어로 번역하고 싶은 충동을 느껴서 일찌감치 영어로 번역을 해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히 맨 마지막 줄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라는 이 행을 그대로 직역을 하면 의미가나오지가 않습니다. 사실은 말의 표면상의 뜻으로 보면, 난 죽어도 눈물을 안 흘리겠다, 무슨 일이일어나도 난 절대로 눈물을 안 흘리겠다는 말이지만, 그 진술이 의미하는 시적 의미는 눈물이 나오고 나와서 사실은 죽을 지경이다 라는 것을 거꾸로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번역할 때에도 마지막 줄은 중요한 행인데, 마지막 행이 뭔가 애틋함이랄까 절실함을 가지기 때문에 영어로도 절실함이 나타나야 하는데, '죽어도 눈물 안 흘리겠다'라는 말을 그대로 직역을 해서는 도저히 그런 절실함이 나오지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스꽝스러워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단단히 마음먹고 의역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시는 대체로 의역을 해야 합니다만, 이건 아주 대담한 의역을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I will bite my lip to stop my tears'라고 번역했습니다. 저의 번역을 우리말로 그대로 옮기면, '나는 눈물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 입술을 깨물겠다'입니다. 이렇게 바꾸어 놓으니까 영어식 운율도 생기고 힘이생겨서, 원시의 원형 그대로의 애틋함이 어느 정도는 전달이 됩니다. 영어로 번역한 우리의 현대시 가운데, 제일 많이 여러 사람에 의해 번역된 작품이 아마 소월의 [진달래꽃]일 겁니다. 조사를 해서 통계를 잡아 본 것은 아닙니다만, 아마 20종이 넘었으면 넘었지 그 이하는 아닐 겁니다. 그렇게 많이 번역이 됐는데, 그 마지막 행을 유별나게 그렇게 번역한 사람은 저 혼자 뿐입니다.
저는그렇게라도 해야 마지막 행의 의미가 드러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것이 저와 [진달래꽃]과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제가 대학에서 '시론'을 가르칠 때, 제가 잘 인용하는 말이 프랑스의 현대 후기 상징파 시인인 폴 발레리의 {시와 추상적 사고}(원래 옥스퍼드 대학에서 강연한 강연 원고임)라는 제목의 글에 있습니다. 거기에 나온 한 문장인데, 우리말로 그대로 직역하다시피 하면, '한 편의 시의 가치는 말소리와 말뜻의 불가분리성에 있다'는 것입니다.
소리와 뜻의 분해할 수 없는 성격 가운데 한 편의 시의 가치가 있다는 발레리의 문장입니다. 시에있어서 말소리와 말뜻 사이의 굉장히 견고한 결합 상태, 그것을 발레리는 적어도, 시의 가장 형식적인 핵심으로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말을 소개해도 상당히 추상적이어서 학생들이 못알아듣기 쉽기 때문에, 실례를 들어야 합니다. 예를 들 때에 제가 늘 써먹는 예가 소월의 [왕십리]에 나오는 한 줄입니다. [왕십리]에서 첫 부분을 보면 '비가 온다 / 오누나 / 오는 비는 / 올지라도한 닷새 왔으면 좋지' 거기에 특히 '한 닷새'라는 말은 세 음절로 되어 있는데, 같은 뜻의 우리말 3음절이 적어도 두 가지 정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닷새쯤'이고, 그 다음에 한자어로 '약 오일'도 3음절입니다. 그런데 그 두 표현으로 만약 소월의 그 행의 '한 닷새'를 대치해놓은 경우의 시적 효과를 보면 우스꽝스러워집니다. '닷새쯤'은 그래도 덜 하지만, '약 오일' 이러면 굉장히 우스꽝스러워집니다.
그런데 '올지라도 닷새쯤 왔으면 좋지'의 효과도 '한 닷새'와 비교해 봤을 때, 효과에 있어서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것을 '올지라도 약 오일 왔으면 좋지'라고 하면 전혀 다른 의미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니까 지금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에서 '한 닷새'의 말소리와 말뜻의 불가분리성, 떼어놓을 수 없는 그 성질이 바로 발레리가 말하는 시의 가치라고 할 수 있고, 그래서, 시의 의미와 효과, 말을 좀 바꾸면 시의 비밀이 거기에 숨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좋은 예를 저는 바로 그 작품의 그 말을 가지고 설명합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 제가 특히 들고 싶은 것은, 70년대 이후 몇 차례에 걸쳐서, 특히 소월의 [산유화]에 대한 해석이나 언급을 몇 번 해 왔는데, [산유화]라는 작품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유명하기도 하지만 아주 뭔가 어이없을 정도로 단순한 어휘와 구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몇 마디 되지도 않는데, 그것도 대부분이 되풀이처럼 되어 있어서, 어떻게 보면 굉장히 솜사탕 같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소월의 작품 가운데에도, [진달래꽃]이 일종의 고도로 극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비해서, [산유화]는 하나의 가락, 운율, 운율의 태운, 굉장히 승화된 상념 등에서 매우 주목할만한 중요한 작품입니다. 그 작품은 해석하기도 어렵고,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그 작품에 대해서 제 나름의 해석을 몇 차례 시도했던 것이 저의 소월 시 체험에 있어서 중요한 항목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유 : 지금 이 시간이 만약 대통령 입후보자 같은 사람들의 정견 발표회장이라면 선생님은 이미 시간을 많이 빼앗았다고 해서 경고를 받을 수도 있지만, 문학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런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제 한 세대의 차이가 있는 남진우 선생의 김소월 경험을 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남진우(이하 남) : 저로서는 굉장히 이 자리가 어렵습니다. 원래 제가 말을 잘 못하거든요. 여러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이 저는 성격상 잘 안되는 체질입니다. 더구나 어려운 두 분 선생님께서 옆에 계셔서요.
유 : 김종길 선생이야 어렵지만, 저야 뭐 어려울 거 없잖아요.(함께 웃음)
남 : 제가 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 평론으로 데뷔할 때, 그때 심사위원이 유종호 선생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예전에 대학원 석사과정 밟을 때, 이대까지 가서 강의를 한 학기 정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시국이 어수선해서 한 학기에 수업 시간은 몇 시간 못했던 것 같지만, 레포트를 써서 내라고 하셔서 제가 그때 성의 없게 써서 냈었는데, 일일이밑줄을 긋고, 추상과 같이 제가 틀린 점을 일일이 지적 받은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서 말을 잘못하면, 야단맞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심정입니다.
그리고, 제가 시 평론에 관여를 하고 있고, 제 주변에 평론 쓰는 사람이 많지만, 점차 평론조차도 중심이 소설 쪽으로 가고 있는 추세입니다. 그래서 시 평론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본격적으로 소월론을 쓰거나 그런 적은 없기 때문에, 처음에 제가 이 자리에서소월을 주제로 이야기한다고 했을 때, 왜 제가 선정이 됐는지 의아하기도 했고, 또 그만큼 지금도불안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서점에 가서 소월 시전집 나온 것을 찾아 봤더니, 서울대 출판부에서 나온 게 있더라구요. 이걸 사다 놓고, 공부 좀 하려고 했는데, 이리저리 일에 좀 쫓기다 보니까 제대로 공부도 못하고 나오게 된 것 같습니다.
소월 체험이라고 할 때 저희 세대에서는 다일반적인 것 같은데, 제가 아마 중학교 2,3학년이었을 겁니다. 저희 누님(간호학교 다니던) 책꽂이에 꽂혀 있던 책들이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 류의 책들,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같은 책들이었는데, 그 중에 '한국의 명시'라고 해서 우리나라 현대시 중에 널리 애송되는 시들을 모아 놓은 시선집이 있었습니다. 그걸 몇 페이지씩 읽다 덮다 하다가, 어린 저에게 제일 친근하게 다가온 시인이 역시 소월이었던 것 같습니다.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나 [먼 후일]이나 [진달래꽃] 같은 시들이 왠지 모르게 가슴에 젖어 들고, 흥얼거리게 되는 그런 시절이 있었고, 그러다가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소월이 교과서의 시인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왜 그게 그런 뜻인지를 모른 채 밑줄을 긋고, 가령 님이 무엇을 가리킨다 라든지, 여러분들도 많은 분들이 그런 학창 시절을 보냈을 텐데요, 님이 조국이냐 떠난 애인이냐 하는 따위의, 지금 생각하면 뭐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수업 시간에 배워야 되는 시인으로 다가왔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부터 시 습작을 하면서,
소월 시에 대한 여운이 남아 있어서 한동안은 그런 계통의 시들이 친근하게 다가왔다가, 조금씩 이제 다양한 시들, 이른바 모더니즘 계열의 시들을 접하게 되면서, 이제 점차적으로 소월이 촌스럽게 느껴지던 시절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소월이라는 시인은 너무 친숙하기 때문에 뭐라고 설명하기가 어려운, 우리가 공기 속에서 살고 있지만 공기에 대해서 딱히 논리적으로 설명하기가 어려운 것처럼, 그런 시인으로 제게 오랫동안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제가 직접 학생들 앞에서 강의를 하게 되면서 예컨대 '한국현대시사' 같은 과목을 맞게 될 때, 그때는 제가 소월 시에 대해 그의 어떤 시가 왜 그런가를, 주로 다른 분들이 작업한 소월 시에 대한 연구나 비평들을 보고, 앵무새처럼 따라서 설명해 주는 그러한 기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젊은 시절 한때 굉장히 심취했었지만, 어느 틈엔가 멀리 멀어진 듯한 느낌을 주는 시인, 그러나 언제 생각해봐도 늘 친숙하고 가깝게 느껴지는 한편, 왠지 자기의 못난 고향을 떠올릴 때 느끼는 심정 비슷하게, 좀 측은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한 그러한 면모로, 저만이 아니라 저희 세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상지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유 : 저는 해방 직후 어릴 적에 김소월을 대했는데, 처음 인상에는 이 사람이 남자가 아니라, 무슨 기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옛날에 왜 기생 이름이 명월이, 이월이 이래서 달월(月) 자를 썼잖아요. 그리고 그 사람 시를 보면, 화자가 여자 비슷한 느낌이 들어서, 여성 가운데서 기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대개 짤막한 것을 좋아했습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랫빛 /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처럼 뜻이야 어떻든 울림이 좋고 외기가 쉬워서 저는 지금도 외우기 쉬운 시가 좋은 시다 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짤막한 시 중에 [만리성]이라고 하는 시가 있습니다.
'밤마다 밤마다 온 하룻밤! / 쌓았다 헐었다 긴 만리성!'이라는 구절을 읽어 보면 만리성의 이미지가 드러납니다. 그것도 처음엔 뭔지 모르고 읽었는데, 나중에 읽어 보니까 우리나라 말에 '하룻밤을 자도 만리성을 쌓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과 연결된 시이지 그렇게 단순한 시가 아닙니다. 그리고 [팔베개 노래]라는 역시 기생이 써서 불렀다는 걸 김소월이 옮겨 쓴다는 식으로 해서 쓴 시가 있습니다. '두루두루 살펴도 금강 단발령 / 고갯길도 없는 몸 나는 어찌하라우' 라고 해서 상당히 실감이 납니다.
그러니까 금강 단발령 같은 높은 고개에도 길이 있는데, 내 가는 길에는 길이 없다는 얘깁니다. 그다음에 '집 뒷산 솔밭에 버섯 따던 동무야 / 지금은 어느 가문 시집가서 사느냐' 라는 여자들의 노래인데, 상당히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진달래꽃]은 '나 보기가 역겨워'에서 '역겨워'라는 말이 정말로 싫었습니다. 사전에 찾아 봐도 '역겨워'라는 말이 안 나와요. 그래서 뭔가 기분 나쁘다고 생각해서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그 다음에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라는 것도 아까 김선생님과는 다르게, '네가 죽더라도 절대로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 라는 식으로 제멋대로 읽었습니다.(함께 웃음) 처음에는 '나 보기가 역겨워 / 가실 때에는 /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라는 것을 '넌 날 버리고 갔으니까 너 죽더라도 나는 눈물 흘리지 않겠다' 하는 식으로 생각을 했다가, 그것이 좀 우스운 것 같아서, 나중에야 김선생님처럼 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김소월의 매력은 역시 시를 처음 읽기 시작할 때 느끼게 되는 가락의 멜로디 혹은 가락 자체의 매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도 한동안은 김소월이 싫어졌는데, 아주 촌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저 자신이 촌에 살았기 때문에, 나도 촌사람인데 촌스러운 것을 좋아하는 것이 스스로도 보기 싫어서 좀 모던하고 날씬한 정지용의 시를 좋아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역시 김소월에게는 우리의 깊은 정서에 호소하는 기본적인 국면이 있고, 제일 처음에 시를 좋아하기 시작하면서도 그 다음에 꾸준히 싫어지지가 않는 시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김소월은 솔직한 데가 많습니다. [원앙침]이라고 하는 시에, '바드득 이를 갈고 죽어볼까요'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시라고 하기엔 너무나 직설적입니다. 직설적이라서 싫을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직설적이기 때문에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김소월이 자살했다는 얘기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젊어서 이런 시를 쓴 사람이 오래 살겠습니까. 여하튼 처음에 읽을 적에 쉽게 이해가 되면서, 또 굉장히 숭상을 하지 않으면서도, 계속 좋아하는 시로 남아 있는 시인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광수 같은 사람도 역시 20세기 전반에 시적인 업적 가운데에서는 김소월이 최고라는 말을 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물론 거기에 뭐가 또 있을 겁니다. 그 사람들이 같은 평안도 사람이거든요.
그러니까 평안도의 지역 감정이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지방의 어휘가 있으면 좋아하게 됩니다. 저는 김영랑([모란이 피기까지는])을 굉장히 좋아했는데, 처음에 김영랑의 [오매 단풍 들것네]라는 시를 이해를 못했습니다. 나중에 호남 사람이, 특히 여성이 '오매 단풍 들것네' 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으니까 그게 기가 막힌 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김소월에게도 그런 사투리에서 오는 공감도 있지만, 여하튼 이광수가 높이 평가한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얘기를 하고 보니까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김종길 선생께서 시사적 위치라든가, 시작(詩作)을 하실 적에 김소월에게 영향을 받은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래도 뭔가 반면교사로든 어떤 영향이 있었다면 말씀을 자유롭게 해주시지요.
김 : 제가 아까 소월이 촌스럽다든가 진부하게 느껴졌다고 했는데, 저는 문학 청년 때 맨 처음의 모델이 정지용이었습니다. 지용 시가 마음에 들었는데, 그런 감수성을 가지고는 소월 시가 촌스럽고 진부해서 별로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 뒤에 지금은 생각이 많이 바뀌어졌습니다. 아까 [왕십리] 얘기를 했는데, 역시 소월 시는 소월 나름대로 정형을 약간 변형시킨 변조가 운율적으로 보이지만, 시상은 굉장히 자연발생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절로 그냥 푹 샘물이 솟듯이, 아주 자연스럽게, 우연적으로 전개가 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기막히게 이럴 수밖에 없다 라는 필연성 같은 걸 느끼게 하는 전개를 보입니다.
그런 작품을 [왕십리] 말고도 몇 편을 들 수가 있습니다. 아까 유종호 선생께서 기생 아닌가 생각하셨다고 했는데, 그것은 우선 시의 가락이나 어조가 여성적인 데에서 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진달래꽃]을 '시론' 시간에 학생들에게 [진달래꽃]의 화자(speaker)가 여성이겠나 남성이겠나 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소월이 남성이고 소월 자신이 말한 거니까 남성이라고 흔히들 말하는데, 남성이라고 봐서는 안됩니다. 화자는 여성입니다. 한국인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오리다' 라는 경어체의 말씨를 쓰는 것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 하는 말입니다. 아까 [원앙침] 말씀을 하셨는데, '바드득 이를 갈고 죽어볼까요' '창가에 아롱아롱 달이 비춘다' '눈물은 새우잠의 / 팔굽벼개요'하는 식으로 나가는 화자는 여성으로 봐야지 남성으로 봐서는 안됩니다.
그러니까 여성 화자를 설정해서, 여성 화자로 하여금 그런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하게 만든다는 것이 [진달래꽃]의 하나의 극적(드라마) 구조라고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조상으로 볼 때는 극적인 구조라고 말할 수 있지만, 전반적으로 봐서는 남성 시인으로서 여성의 말로 여성의 심정을 그토록 여실하고 애틋하게 그려낼 수 있다는 것은, 소월 같은 시인은 일종의 남성, 여성 두 가지 성질이 공존하는 시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월은 시인으로서 남성과 여성이 공존하는,혹은 양성을 함께 가지고 있는 시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유선생께서 반면교사로서 본다면 이라고 했는데, 사실 제가 보기에는 우리 현대시는 이상하게 아주 일찍부터 자유시형이라는 시의 형식을 채택했습니다.
사실은 소월 시처럼 정형시 같은 것이 상당히 성(盛)하고 자유시가 조금 있고 그래야 되는데, 다른 나라 시사(詩史)와 비교해볼 때, 거꾸로 된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소월의 정형시가 원래 우리옛날 전통시처럼 정형을 띠고 있는데, 저는 늘그막에 정형시를 몇 편 써 봤습니다. 제가 1997년에{달맞이꽃}이라는 시집을 냈는데, 거기에 7.5조인가 5.7조인가로 쓴 시가 있습니다. '예성강 너머연백들 마른 흙을 이른 봄햇살 오늘도 덮이는가'에서 연백은 황해도에 있는데, 제 고향이 그쪽이래서 고향 생각하는 것 같지만, 저에게는 해방된 다음 해인 1946년 3월에 학교를 같이 다니던 황해도 연백군 출신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3.8선 이남(십리 남쪽)이니까 연백(개성, 토성 등)까지 갈 수가 있었습니다. 화물차나 트럭 짐칸에라도 얻어 타고 가서 예성강 건너 내려서는, 걸어서 연백들에 그 친구와 같이 갔었습니다. 그때 가본 일을 회상해서 정형시로 썼는데, '벼 한 사발과 바꾸던 굴 한 사발 송씨네 헛간 잿더미 그대로 뒷간이던 송씨네 집의 두둑한 초가 지붕 이른 봄 햇살 오늘도 덮이는가'라는 구절로 그 작품이 끝납니다.
실제로 거기에 가서 잔 그 친구 집안이 송씨네였습니다. 연백 평야가 넓어서인지 그 집에 가니까 농촌으로서는 부촌이었습니다. 초가집이었지만 집도 굉장히 규모가 컸고, 특이한 것은 헛간에 재를 비료로 쓰는데, 화장실이 따로 없고, 용변을 재 위에서 보고 그것이 그대로 거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상당히 부농가고 가옥 규모도 큰 데도 불구하고 그랬습니다. 말하자면 그 쪽의 생활 방식, 문화지요. 그리고 거기는 황해가 가까워서 황해에서 굴을 따 가지고 와서 바꾸는 걸 봤습니다. 그러니까 벼 한 사발하고 굴 한 사발하고 맞바꿉니다. 굴이 얼마나 흔한지 그렇게 했습니다. 실제로 바꾸는 걸 봤기 때문에 그런 걸 회상해서 해방 직후의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해서 썼습니다. 그밖에도 정형시를 쓴 것이 몇 편 있는데, 요즘 같은 때 정형시를 써 보는 것도 새롭고 재미있는 시도가 됨직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남 : 저희 세대는 문학 습작 시절에 김소월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이나 압박을 받은 세대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한 두 세대를 걸러서 저희들에게 다가오는 시인이기 때문에 김소월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는 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대신 김소월에 대해서 아까 촌스럽다는 얘기도 나왔습니다만,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부정적인 인상은 시가 조금 청승맞다던가 넋두리와 영탄이 많다던가하는 식의 인상을 보통 가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근대시의 전통이나 혹은 정통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시인이 김소월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김소월과 동세대 시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 스승이었던 김안서, 주요한, 파인 김동환 같은 분들과 비교를 해봐도 역시 김소월은 시적으로 훨씬 우수한 시인이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습니다.
김소월에서 시문학파를 지나 미당으로 이어지는 이 흐름이 한국 서정시의 일종의 주류를 형성했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참여시다 모더니즘시다 해서 주류에 대한 비판은 여러 번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주류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도전도가능하다고 봐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이들 시에서 어떤 보수성을 찾아내게 되는 측면도 없지는 않겠지만, 역시 소월의 등장 이후, 우리 시가 아마추어리즘에서 벗어나서 그야말로 프로페셔널한 세계로 진입할 수 있는 그 결절점에 소월이 위치하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긍정적인 차원에서든 부정적인 차원에서든 다 지금 시를 쓰는 사람들 모두는 소월의 후예이고 소월의 문학적 자식들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소월의 시가 가지는 가장 중요한 매력 중의 하나는 그 분 시가 사랑의 시라는 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사춘기적 정서와 맞아떨어지는 것도 있지만, 언제 읽어도 보편적인 호소력과 공감을 가질 수 있는 원천이기도 합니다. 사실 시에서 가장 쓰기 쉬운 것 같으면서도 쓰기 힘든 것이 연시(戀詩)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 현대 문학 초창기에 상당히 순도 높게 모범적으로 이미 소월이 구현을 해 놓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저에게 시적인 욕심이 있다면, 언젠가 저도 한 번 연시를 쓰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있는데, 아마 그럴 때 제가 다시 한 번 소월로 돌아가서 소월과 한 번 대결해야 될 시점이 저에게도 조만간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듭니다.
유 : 김소월의 시를 읽으면서 제일 먼저 발견하게 되는 사실은, 김소월의 시에 서양 쪽 외래어가 한 마디도 안 나온다는 겁니다. 하다 못해 만해의 [님의 침묵]을 읽어 보더라도, '키스'라는 말도 나오고, 상당히 외래어가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김소월의 경우는 한 마디도 안 나옵니다. 다만 조만식을 노래한 시에 이니셜로 JMS라고 한 것은 있지만, 그것 이외에는 일체 안 나옵니다. 또 한자어라 하더라도 순수한 우리나라식 한자어지 일어식 한자어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김동환의 [국경의 밤]이라고 할 때 '국경'은 일본 사람들이 많이 쓰는 일제 한자어입니다. 하지만 김소월의 경우에는 그런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도 유심히 한번 읽어 보십시오.
다만 [옷과 밥과 자유] 라는 시에서 '자유'라는 말이 예외적으로 나오는데, 이럴 때에도 다른 사람은 '밥'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옷과 빵과 자유'라고 할텐데, 김소월은 끝까지 '옷과 밥과 자유'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사실과 소월이 우리나라의 옛날 민요의 가락에 대해서 어떤 청각적인 충실을 기했다는 것과는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한자어라 하더라도 우리 토박이의 순수한 한자어를 써서, 그것이 국민들의 감정에 호소한 점이 많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소월이 사용한 어휘 가운데에서 가장 빈도가 높은 것이 '님'이라고 하는 것이고, 그 다음이 '집'이고, 그 다음이 '길'입니다. 그래서 제가 예전에, [님과 집과 길]이라고 하는 김소월에 관한 에세이를 쓴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재가 전부 님도 없다는 것이고, 집도 없고, 길도 없다는 것입니다. 임이 없다, 집이 없다, 길이 없다 이런 것이 김소월 시의 중요한 모티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제 시대에 소월이 의식적으로 저항을 했다 이런 것을 넘어서서, 고향 상실의 시대에 그 사람이 우리 민족이 느꼈던 어떤 보편적인 심성을 옛날의 가락에 의탁해서노래했다는 점에서 여전히 호소력을 발휘하는 게 아닌가 합니다.
김 : 지금 두 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소월 시를 보면 우선 어휘, 율격(운율), 정한 등의 정적인 내용이 드러나는데, 이게 가장 한국적인, 그야말로 조선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옛날에 다산정약용 선생은 그 당시에도 조선시(한시)에 대해, 한시도 중국시 같이 흉내만 내서는 안 된다, 조선사람은 조선시를 써야 된다는 시론을 전개한 적이 있었습니다. 소월 시야말로 크게 나누어서, 언어(어휘), 율격, 정서 이런 것이 가장 조선적인, 민족적인 현대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물론 스승인 안서 김억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소월이 정주 오산고보를 다니다가 서울의 배재고보에 와서 졸업을 하고 일본에 상급학교 시험을 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우연적인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영국의 시인 가운데 아서 시몬즈는 프랑스 상징주의를 공부하고 영향도 받고 프랑스 문학에서의 상징주의 운동에 관한, 얄팍한 {상징주의론}이라는 저술을 냈는데, 이것이 현대 영시의 굉장히 중요한 역사적인 기여를 한 조그만 책입니다. T.S 엘리엇 같은 사람도 그렇고, W.B 예이츠 같은 사람은 현대 영시의 양대 거봉인데, 이 두 20세기 영시의 거봉들에게 초기 시작(詩作)에 있어서 아주 지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프랑스 상징주의에 대한 알음을 터주고, 그런 면에서 역사적인 공로가 있는, 또 일종의 비평가이기도 한 아서 시몬즈는 시를 직접 쓰기도 했습니다.
아서 시몬즈의 시는 지금 말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전혀 문제가 안되는 시 업적인데, 일본에서 아서 시몬즈의 시집이 번역이 되었던가 봐요, 이게 또 우리나라 말로 중역을 해서 번역이 되었던가 봅니다. 당시에 우리나라에 서양시가 대개 그런 식으로 소개가 됐었으니까요. 소월이 아서 시몬즈의 시 같은 외래의 영향도 접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소월이 정한을 그렇게 표현하는 데 있어서, 뭔가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이 아니라 영국의 상징주의 시 연구가의 시의 영향(프랑스 상징주의 시의 기법 등)도 받았음직 합니다만, 그래도 한국 서정시로서는 가장 원형적인 시가 소월 시가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아까 남선생이 소월시를 미당과 결부시켰는데, 소월의 한국적인 서정의 흐름이라는 것은 우리 시사에서 소월 그 다음에 김영랑, 그리고는 청록파의 박목월, 그 뒤에 97년 6월에 작고한 박재삼 시인 이런 식으로 전통적으로 순한국적인 서정의 흐름이 있어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우리 현대시에 있어서 이런 한국적이고 민족적인 서정의 흐름을 최초로 현대시에서 재발굴하고 그것을 과거의 전통에다가 접맥을 시켜서 우리의 현대시에서 하나의 중요한 흐름으로 형성을 했다는 점에서 소월의 시사적 위치라고 할까, 중요한 위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 : 요즘 박수근 화백의 전람회가 있는데, 젊은 20대 초반의 미술대 학생이 박수근의 그림을 보고, 자기는 전혀 감동이나 느낌을 받는 것도 없고, 뭐가 좋은지 모르겠다는 얘기를 합니다. 저도 그림을 잘 볼 줄은 모르지만, 그래도 박수근이 그린 그림을 보면, 우리가 못살 때의 모습이라든가,김장을 할 때의 여인들이라든가, 머리에 무언가를 이고 있는 사람들이라든가 하는 모습을 보면 우리가 살던 옛 모습을 보여준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젊은 20대 초반의 미술학도가 전혀 감동을 못 느낀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완전히 세대 차이가 나는구나, 이건 정말 이상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남선생이 아무래도 젊은 분들과의 교유도 있고 하니까 남선생보다 젊은 그 아래의 세대들이 김소월을 어떻게 보는가에 대해서 경험하신 게 있으면 말씀을 해주시지요.
남 : 특별히 김소월을 놓고 저희 세대나 저희 밑의 세대에서 경험으로 소개할만한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제 이야기를 드려야겠는데요. 이번에 김소월과 관련해서 이야기를 해야 되니까 김소월 시를 다시 한 번 읽고, 관련 평론들도 찾아서 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막연히 선입관으로 알고 있던 것처럼, 김소월의 시도 그렇고, 인간도 그렇고 참 단순하지가 않은 시이고 인간이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됐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이런 아름답고 서정적인 시를 쓴 분이, 고리대금업을 했다든가, 신문사 지국을 운영했다든가 하는 전기적 사실들도 그렇구요, 자기의 조부와 불화를 해서 자기의 식솔들을 거느리고 따로 정주에서 살다가, 구성이라는 자기 처가댁에 가서 동아일보 지국을 합니다. 그 정도로 조부와 불화할 정도이면서, 그리고 떨어져 나올 때 어느 정도 돈도 가지고 나왔을 텐데, 적어도 그럴 정도면, 그 당시에 이 사람이 왜 서울로 오지 않았나, 왜 꼭 벽촌에서 생애를 마쳤나 하는 생각이 들고, 이 사람이 만약 서울로 왔다면, 다른 삶의 길을 찾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시도 그렇지만, 결국 김소월의 실제 성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자기 속에 밀폐된어떤 내향적 인간이었던 것 같고, 그래서 김소월의 시가 사랑의 시이자 슬픔의 시이고, 결국은 고독의 시가 아닌가, 그리고 이것이 자기 스스로를 갉아 먹어서 병사든 자살이든 불과 서른 두 살에 요절의 운명을 끝마치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세대에게 교과서나 시선집을 통해서 접한 김소월의 아주 익숙한 몇 편의 시들 말고는, 사실은 의도적으로 김소월을 연구하기 위해서 찾아보지 않는다면, 그렇게 익숙한 시는 아닌 것 같습니다.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공기처럼 익숙해서 새삼 의식이 안되는 시들, 예를 들어 [진달래꽃]이나 [산유화]나 [접동새] 등의 작품들을 제외한다면, 거의 200여 편에 달하는 대다수의 시 중에 200편에 가까운 시들은 오히려 이제 젊은 세대들이 의도적으로 찾아서 읽고 공부해야 되는 시가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정서도 그렇고, 거기 쓰여진 언어, 어휘들도 그렇고, 어떻게 보면, 굉장히 만만치 않은 공부거리로 남아 있는 시인이 김소월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유 : 김소월은 보통 병사(病死)를 했다고 그러는데, 해방 직후에 오장환이라는 시인이 있었는데, 시에서 음악성, 운율성 같은 것을 굉장히 많이 고려한 시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필요성이 있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소월 연구]라고 하는 글을 발표했습니다. 거기에서 처음 '소월 자살설'을 제기했습니다. '집안에서 수치가 되니까 일부러 쉬쉬해서 그렇지 사실은 자살을 했다, 그리고 만년에는 정말 술을 많이 먹고 폐인처럼 되어 있었다' 이렇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일제 말기에 일자리가 별로 없었습니다. 지금은, 가령 시인이 고등학교나 대학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지만, 일제 시대에 한글로 시를 써서 학교에 취직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사실상 별로 할 일이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시골에서 신문사 지국이나 하다가 여러 가지 갈등이 있어서 결국은 자살로 끝을 맺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오장환이 그 자살설을 제기한 이후에는 자살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여하튼 불행한 시인이었고, 또 불행한 자신의 삶을 예고하듯이, 슬픈 정한의 시를 많이 썼습니다. 올해로 탄생 백주년이 되어서 이번 기회에 다 같이 김소월을 다시 읽어보자는 심정에서 이러한 오늘의 테마를 정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너무나 많이 얘기되고, 많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두 분 선생님께서도 새로운 말씀을 하기도 어렵고 또 멋쩍어서, 말씀하시기에 더욱 곤혹스럽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잠깐 쉬고 평소와 같이 여러분들의 질문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질의 응답
유 : 김소월의 [희망]이라는 시를 적어 놓고 이런 질문을 하셨어요. 질문 1, '김소월의 시라는 이유만으로 이 시를 적어왔습니다. 읽고 느낌을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흔히 접했던 소월의 시와는 많이 다른 듯해서입니다.' 질문 2, '요즘 인터넷에 용혜원 님과 이정하 님의 시가 많이 오릅니다. 그만큼 읽는 사람들도 많다는 뜻일텐데, 이 두 분의 시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제가 아는 어떤 시인께서는 평하기를 안 좋은 쪽으로 하셔서요.' 우선 질문 2에 대해서 남선생이 말씀을 해주시지요.
남 : 굉장히 제가 부러워하는 시인들 같습니다. 저는 대중들과 만날 수 있고 같이 호흡할 수 있다는 것이 늘 부럽습니다만 그 분들의 시적 성취에 대해서는 우선 논란이 있고 좋게 평가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저는 두 분의 시를 찬찬히 읽어보지는 않았고 닥치는 대로 읽었는데, 제 취향이나 문학적 판단에 비춰볼 때 좋은 시다 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렇다고해서 대중들한테 사랑받는 시인들을 무조건 한 수 아래로 내려다보는 엘리트주의자는 아닙니다. 그런데도 두 분의 시들이 우리시의 지평을 넓히고 우리시의 숲을 깊게 하는데 이바지하는 시는 아니지 않나, 감정 내지 감상세탁용 정도로 소비되는 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생각이고요, 이 분들 시에서 어떤 깊고 좋은 점을 느낀 분들이 있다면 그 나름대로 발견할 가치가 분명히 그 분들 시에는 있는 것이겠지요. 가령 저의 동세대 시인 중에서 굉장히 대중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는 시인이 있습니다. 방금 거론된 분들만큼 사랑받는다고는 할 수 없어도 굉장히 많은 독자들을 가지고 있는 시인 중의 한 분인데,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라는 시가 있죠. 저는 그렇게 좋다는 생각이 안드는데 저희 식구들(누나, 매형 등)이 그렇게 좋아해요.(함께 웃음)
유 : 부인도 좋아할 것 같은데요.(함께 웃음)
남 : 다 취향도 다르고 보는 눈도 다르니까 다를 수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유 : 저는 인터넷을 보지 않습니다. 흔들리는 화면을 많이 보면 눈이 피곤해지니까 눈도 좀 보호해야 하고 사실 잘 못하기도 하는데, 지금 말씀을 듣고 보니까 그 시가 별로 좋은 시가 아니예요. 그런데 그렇게 말씀하실 수가 없으니까 취향에 안 맞는다, 좋아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뭐가 있지 않겠는가 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고 해서 무조건 좋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얼마 전에 현인이라는 대중가수가 돌아가셨는데, 우리가 어릴 적에 이 분의 [신라의 달밤]이라는 노래가 많이 유행했었습니다. 가사 중에 '지나가는 나그네여'라고 있지요. 저는 그 전에 박목월의 [나그네]라는 시를 굉장히 좋아했는데 현인이 나타나서 지나가는 나그네여 하니까 나그네라는 말이 오염이 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고 정말 노래가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해서 대중가요니까 무시한다는 것은 아니면서도, 그 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현인의 유행가 중에서 그래도 괜찮은 것은 [서울 야곡] 정도가 아닌가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실 현인의 [신라의 달밤]에 관해서는 누가 뭐라고 해도, 암만 현인이 여기에 있다고 해도 난 싫다, 별로 좋은 노래가 아니다 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그런데 남선생만 하더라도 마음이 고우셔서, 자꾸만 중언부언하시는데 결국 정직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함께 웃음)
다음으로, [희망]이라는 작품에 대해서 김종길 선생께서 말씀을 해 주셔야 되는데, 저도 이 시가 김소월의 다른 시와 다르다는 것에는 동감합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김소월의 시보다 훨씬 떨어집니다. 왜냐면 읽기가 힘들고 리드미컬하지 않습니다. '날은 저물고 눈이 나려라 / 낯설은 물가으로 내가 왔을 때 / 산 속의 올빼미 울고 울며 / 떨어진 잎들은 눈 아래로 깔려라 / 아아 숙살스러운 풍경이여 / 지혜의 눈물을 내가 얻을 때 / 이제금 알기는 알았건마는 / 이 세상 모든 것을 / 한갓 아름다운 눈어림의 그림자뿐인 줄을 / 이울어 향기 깊은 가을밤에 / 우무주러진 나무 그림자 / 바람과 비가 우는 낙엽 위에 ' 별로 인상적인 대목이 없고 그래서 말하자면 김소월의 평균수준에서 못 미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듭니다. 선생님 하실 말씀 있으세요.
김 : 저도 동감입니다.(함께 웃음)
유 : 선생님은 뭐 반대하시겠어요.(함께 웃음)
남 : 없습니다.
유 : 그럼 우리 만장일치로(함께 웃음) 수준높은 작품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리겠습니다.(함께 웃음) 사실 예술적인 문제, 이러한 가치의 문제를 놓고 다수결로 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오랫동안 시를 많이 읽으신 김선생과 또 젊은 감수성을 가지신 남선생이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저도 이게 별로 좋은 시가 아니다 라는 확신이 생깁니다.(함께 웃음)
김 : 덧붙여서 하나,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현대시에서 중요하다고 하는 시인들도 그 작품 한 편 한 편을 세밀히 따져서 저울질해볼 때 한 시인에게 정말 좋은 작품은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소월 시의 경우, 대개가 짧고 별로 긴 것이 없지만, 가령 '엄마야 누나야' 같은 소품을 포함해서 짧든 좀더 길든 간에 그 나름대로 그만큼 깔끔한 작품들을 그만한 편수로 남겼다는 것은 확실히 우리 현대시에서는 큰 시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좋은 시인이라고 하더라도 태작이나 졸작은 있게 마련입니다. 방금 소월의 시는 좀 읽기가 어렵긴 하지만 전혀 문제삼을 거리가 되지 않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유 : 김소월이 {진달래꽃}이라고 하는 시집을 낸 후에 많은 작품을 썼습니다. 24살 땐가 이 시집이 나왔으니까 과히 천성적인 시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돌아갈 때까지 많은 시를 썼는데 그 중에서는 별로 좋은 시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진짜 시인이라고 하는 것은 연령과 함께 시도 변화하면서 높낮이의 차이가 없이 자꾸만 상승곡선을 그리거나 혹은 일정한 수준을 유지해야 하는데, 김소월의 경우 {진달래꽃} 이후에 발표된 시에는 별로 좋은 것이 없습니다. 이런 것 같습니다. 젊을 적에는 시에 몰두했는데, 점차 생활도 어렵고, 시인이라고 대접받는 것도 아니고, 이러다보니까 시에 대한 흥미가 점점 없어져서 가끔 청탁이 오면 좀 안일하게 썼거나 심심파적으로 그냥 글을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옷과 밥과 자유]라는 작품은 저는 제목만으로도 아주 걸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에 적유령이라는, 오랑캐 고개라고 하는 고개가 있어 이 고개를 넘어 만주로 이민 가는 사람들에게는 옷도 없고, 밥도 없고, 자유도 없다는 당시 상황을 감지해서 쓴 것인데 이러한 시들은 좋다고 생각하고, 그 외에도 몇 편의 시가 좋은 것이 있습니다. 그런 시들은 운율적인데 지금 이 시의 느낌은 운율적이지 않고 설명적입니다. 그런 면에서 김소월의 작품치고는 떨어지는 작품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데, 이것보다 못한 것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김소월은 자기 결정을 통해 스스로 '이것은 아무리 내가 썼다고 하더라도 시가 아니다' 라고 판단할 수 있는 자기 검열이 부족했던 시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윤동주의 경우 시 가운데 건질만한 것이 스무 편은 되는데, 습작기의 '시 아닌 시'라고 해서 따로 묶어 놓은 것이 서른 여섯 편이 있습니다. 윤동주만 하더라도 이 시들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아 이것은 내가 생각해보아도 좋은 작품이 아니다' 라고 생각해서 내버려둔 것입니다.
그래도 애착이 있어서 원고를 정서는 해 두었지만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실리지 않았습니다. 김소월과 윤동주의 거리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개인적인 거리가 아니라, 시간적으로 아마 후대사람이니까 좀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엄격해졌다 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야기가 안 나온 작품 가운데 [초혼]이라는 시는 상당히 울림도 좋고, 낭송을 하면 가락에 맞는, 기분이 있는 그런 시입니다. 상당히 잘 쓴 시인데 이것만 봐도 김소월이 천성적인 시인인 것은 분명합니다.
다음으로 박진희 씨의 질문인데, 질문 1, '김종길 선생님의, 옛 교과서 속에 있는 [성탄제], 그 시의 착상의 배경과 일화를 듣고 싶습니다. 아쉽게도 외울 수는 없지만 깊게 남아있는 시입니다. 김소월 시 이상으로 좋은 시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김소월의 어떤 시와 비교해서 좋은 시다 라고 해야지 무조건 김소월 시가 좋다고 해서는 분명하지가 않지요. 이 질문에 대해서는 김선생께서 호의적인 답변을 해주셔야 하겠습니다.(함께 웃음)
김 : 저의 시를 높이 평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최근 어떤 잡지에 지금 질문에 대한 답이 될 글을 전개한 적이 있습니다. 시의 제목이 성탄제로 되어 있으니까 잘못하면 깊이 안 읽는 사람은 제가 교회 다니는 사람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시는데 저는 교회에 다니지는 않습니다. 제목은 성탄제로 되어있지만 소위 크리스마스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이 시에는 할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어린 저 자신, 이렇게 가족 세 명이 등장하는 데 주인공은 아버지라고 할 수 있으며 저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 다시 말해서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그려내고자 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시에는 할머니가 나오지만 어머니는 나오지 않는데 이는 저희 집안의 가족사와 관계가 있습니다. 저는 아마 생후 2년 반쯤 되었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계모님이 들어오시기 전, 그러니까 세 살에서 네 살 무렵의 겨울쯤에 제가 폐렴에 걸려서 시골에서 한 달쯤 몹시 앓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희 집에는 증조부, 증조모, 혼자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라고 시에 나오는데, 임신 한 번 못해 본 채 청상 과부였던 할머니 이렇게 세 노인이 계셨어요. 저희 아버지는 저희 할머니의 양자, 즉 증조부모한테는 양손으로 입양되어 오셨습니다. 할머니가 원래 아버지한테는 종숙모(아버지는 오촌 양자이셨습니다)였는데, 저는 그러니까 양자, 양손을 들여서 태어난 첫 손자, 증손이었습니다. 자손을 몹시 중요시하는 전통적인 한국 가정으로서는 제가 굉장히 소중한 자손인데, 게다가 일찍부터 실모(失母)를 했고 몹시 앓곤 했던 저는 온전히 집안의 세 노인(증조부모, 조모)의 가슴에 매달려 그 분들의 정성으로 살아났던 것이지, 아마 보통 경우 같았으면 못 살아났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분명했던 것은 아니지만 기억에 있어요. 실제로 어머니가 없었던 경험에 의해서 이러한 집안의 가족사가 시의 배경으로 되었는데,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니까 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보통의 경우보다는 유난히 더 컸던 것 같습니다.
그 시를 쓴 것이 제가 1953년 크리스마스 가까운, 아마 12월 20일 무렵인데, 당시 대구에서 고등학교 교사를 하면서 경북대학교 강사를 같이 겸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원래 시를 많이 쓰지는 않는데다가 학교 선생이라서 수업이다, 출강이다 해서 바쁜 처지라 도저히 시를 못썼었는데, 12월 20일경이 되면 고등학교도 방학을 하고, 대구만 하더라도 남쪽이라서 크리스마스 때 거의 춥지가않습니다. 뭔가 차분한, 겨울안개 같은 것도 서린 듯한, 가라앉은 분위기가 되면서 수업이나 강의같은 시간 부담이 없어지니까 자유로와지고, 또 크리스마스 기간이 또 교회를 나가든 그렇지 않든 무드가 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가운데에서 시 한 편을 쓰게 된 것입니다. 시의 중간에 보면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마지막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이것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 다음 뒷부분에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로 되어있는데, 말하자면 성탄제라는 것은 곁다리이며, 시간적 배경이 성탄제 무렵이었다는 것뿐입니다.
굳이 관계가 있다면, 제가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죽은 목숨이 새로이 살아난 사실이 마치 아기예수가 태어나는 탄생과 같은, 이러한 비유가 어쩌면 신성모독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저의 느낌으로는 뭔가 하나의 거룩한 생명이 다시 태어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여하튼 그러한 정도의 관계밖에 없으며 사실 성탄절은 부수적인 요소입니다. 시의 주된 내용은 아버지와 나 자신의 관계이며,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에서 보이듯이 어릴 적의 아팠던 기억을 자라서, 그 때의 아버지 만한 나이가 되어(한 서른 살), 성탄제 가까운 거리에서 눈발이 날리는 때에 어릴 적을 회상하는 상황이 표현된 것입니다. 저는 그런 식으로 작품을 썼는데, 시라는 것이, 시에 나오는 모든 것을 시인이 완전히 계산을 하고 면밀한 설계도면을 만들어 공사를 하듯이 또는 건축을 하듯이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미국의 천재적인 시인이자 작가였던 애드가 앨런 포우는 자신이 쓴 [큰 까마귀]라고 하는 100편이 넘는 긴 시를 제작하는 과정에 대해 실토를 한 듯한 에세이를 쓴 적이 있는데, 자신은 교묘하게 계획적으로 썼다고 하지만, 대개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문학이론]이라고 번역이 되어서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읽히는 책의 저자들도 포우가 주장하는 [큰 까마귀]의 제작과정을 믿지 않고, 먼저 작품을 써놓고는 나중에 계획을 세워 쓴 것처럼 꾸민 것으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대개 무의식적으로 글을 씁니다만, {성탄제}를 쓰고 나서 나중에 고 조지훈 선생이, 당시 [현대문학]에 단골로 글을 쓰셨는데 거기에 제 작품을 언급을 하셨기에 보니까 제가 글을 쓸 때는 의식을 못했던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그 내용은 눈의 흰 빛과 산수유의 붉은 빛, 흰 옷자락과 열로 상기한 붉은 볼, 혹은 '눈 속에 따 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의 눈과 피 등 흰 빛과 붉은 빛의 대조나 연관이 전편에 깔려있다는 것을 먼저 지적해 주셨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좀더 깊이 그 작품의 대립구조를 설명한 분이 한양대학교 이승훈 교수(시인입니다만)인데, 그 내용을 보면 그렇게도 보여질 수도 있겠구나 라고 생각해서 저는 뒤에 남들의 지적한 것을 보고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대개 시인과 시인이 쓴 작품과의 관계는 그러한 것이 보통의 경우가 아닌가 라고 생각합니다.
유 : 지금 말씀을 듣고보니, 물론 선생 자신의 시이기 때문에 잘 알고 계시겠지만 그래도 칠십대 후반의 고령이신데 모든 것을 기억하고 계시다는 게 보통 기억력이 아닙니다. 제가 알고 있는 분 가운데 기억력이 아주 출중하신 분 중의 한 분이십니다.
다음 질문으로 김소월의 [가는 길]에 대해서 얘기를 해 달라고 하셨는데, 이 작품은 김소월의 시 중에서도 좋은 시입니다. 그래서 이태준의 {문장강화}라고 하는 책이, 1940년대 전후해서 말하자면 한국에서 글을 쓰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교과서가 된 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도 김소월의 [가는 길]이 예문으로 나오면서 아주 운율이 좋은 시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립다 / 말을 할까 / 하니 그리워'의 부분도 평범하지만, 말의 본성을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립다 말을 할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정말 그리워진다는 얘기입니다. 말에 그런 요소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기를 스스로 격발시키기 위해서는 '나 화가 난다' 이렇게 생각하면 정말 화가 나고, '보기 싫다' 라고 생각하고 얘기를 하면 정말 상대방이 보기 싫어지니까, 언어에는 이렇게 환정적인 기능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을 묘사하는 기능도 있지만 우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기능도 있고, 이것을 잘 활용하는 사람들이 선동가 같은 사람들입니다. 다음 직접 질문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직접 질문자 1 (홍인옥) : 요즈음에 시의 형태나 내용면에서 여러 가지 변형과 실험이 계속되고 있는데, 몇 년 전에 {서른, 잔치는 끝났다} 같은 작품도 많이 얘기가 되어서 읽어봤습니다만, 사실 저는 그런 작품을 좋아하지도 않거니와, 그래서 그런지 잘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시가 궁극적으로 가는 곳은 순수서정, 그러한 영역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데 선생님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남진우 선생님, 선생님을 뵈면 어차피 다른 한 분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데, 작년에 한 번 신경숙 선생님의 강연도 있어서 들어봤지만 두 분이 다 참 눌변이십니다.(함께 웃음)
유 : 우리나라 문단의 전설에 50,60년대에 3대 추남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주 지지리도 얼굴이 못생긴 사람, 그 반열에 오른 사람이 누구냐 하면 천상병, 김관식, 김구용이라고들 합니다. 요즘에는 문단에 3대 미남이 있다고 합니다. 다른 두 사람은 모르는데 여기 남선생이 그 중의 일인자라는 얘기가 있습니다.(함께 웃음) 저는 잘 모르겠는데 여성들이 지목을 한 것 같습니다. 남성들이 볼 때는 아주 핸섬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인자라는 생각은 안 드는데 여성분들이 그렇게 좋아한다고들 합니다.(함께 웃음) 상당히 부러워할 만한 하지만, 저는 나이를 너무 먹어서 부러워하는 것을 중단했습니다.(함께 웃음) 뭐, 답변을 해주시지요.(함께 웃음)
남 : 제가 눌변이라고 하셨는데, 진짜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런 얘기를 하시니까 조금 겸연쩍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신경숙 씨에 관한 얘기는 이 자리에서 말씀드릴 성격의 것이 아닌 것 같구요, 최영미 시인이 한참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었고, 저도 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만, 그 시집에 대해서 얘기를 하다 보면 꼭 취향 문제가 나오고 시적으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얘기가 나오는데, 저는 그 시집 자체에 대하여 일정한 문학적 성취는 있다고 봅니다. 대중적으로 흥행이 되어서 논란이 되니까 논란이 된 만큼 작품의 가치가 있느냐를 따지기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 시점에 나온 그 정도 시집으로서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며, 전혀 가치가 없는데 출판사 상업주의에 의해서 부각되었다든가 하는 식으로 자꾸 몰아가는 시각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최영미의 시가 기존의 시로부터 그렇게 과격하게 일탈이었나 하는 점에 대해서도 저는 의문을 가집니다.
80년대에 황지우나 박남철의 시를 통해서 이미 현격하게 진행된 형식적인 파격은 이미 갈 데까지간 양상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최영미의 시가 오히려 형태적으로는 더 보수적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었던 것은 여성이 그런 발언을 한다, 여성이 '컴퓨터와 ×하고 싶다' 라는 식의 직설적이고 과감한 표현을 했다는 점에서 약간의 센세이션이 일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때 베스트셀러를 놓고 몇 년이 지나서 얘기를 하면 이야기하는 사람이 약간의 허탈감이 느끼게 되는데, 최영미 씨의 경우도 지금에 와서는 그런 느낌이 듭니다. 말하자면 시인 자신이 첫 시집에 이어서 문학적 성숙과 발전을 보여주었어야 하는데 명백히 두 번째 시집은 첫 시집보다 그렇게 볼만한 시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시인이 계속 성숙해 나가고 시도 더 도발적이든지 아니면 반대로 보수적으로 가든지 어떤 변신과 발전이 있었으면 계속 이 시집의 현재성이 살아 있을텐데, 지금에 와서보면 그 때 잠시 반짝였던 베스트셀러만 남은 것 같아서 아쉬움이 있고요, 이 부분은 앞으로 최영미 시인이 어떤 시를 선보이느냐에 따라서 다시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유 : 역시 시라고 하는 것, 문학이라고 하는 것의 궁극적인 판단은 시간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가장 양호한 비평가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간의 풍화작용을 이겨내어 오랫동안 견디는 것이 좋은 작품이라고 얘기할 수 있고, 최영미 씨의 작품같은 것은 상당 부분이 충격 효과로 대중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가령, '내 마음을 받아달라고 / 밑구녁까지 보이며 애원했건만 / 네가 준 것은 / 차와 동정뿐.' 상당히 충격적이면서, 더구나 여성이 그런 표현을 썼다는 점이 더 그렇습니다. [차와 동정]이라고 하는 옛날 영화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데브라카가 나오는데, 연상의 여선생님을 남학생이 따르는 얘기입니다. 결국 차와 동정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데, 이 이야기를 뒤집어서 상당히 충격적인 효과가 나오는 그런 시를 쓴 것을 보면 재주는 비상하지만, 역시 너무나 많은 부분을 충격 효과에 기대고 있다는 것은 그 충격이 사라지면 그만큼 매력이 감소한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하튼 베스트셀러가 되고 한 시대를 풍미한다면 뭔가 사람을 사로잡는 호소력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런 질문이 있는데, '소월의 옛 가락이라면 [가시리]나 [청산별곡] 같은 고려 가요일까요, 아니면 무가나 회심곡에 닿아 있는 것일까요'. 제가 아까 옛 가락이라는 용어를 썼는데, 제가 옛 가락이라고 한 것은 정형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 시다 라는 뜻으로 얘기한 것입니다. 사실상 4.4조 등 정형적인 요소가 굉장히 많이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반드시 [가시리]나 [청산별곡] 같은 것과 연결시킬 필요는 없고, 상대적으로 근대시보다는 옛날의 정형적인 민요같은 것에 가깝다 라는 뜻으로 말씀드린 것입니다.
김 : 조금 전 질문의 최영미 시집에 대해서, 저는 소문으로만 듣고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동네 다방에 들어갔더니 책이 몇 권 창가에 꽂혀있는데 마침 그 책이 있어서 거기서 조금 읽어보고 나서야 왜 그렇게 화제가 되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충격적인 얘기가 나오던데, 성적인 것이 지나치게 직설적으로 이야기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에서 성적인 것을 그런 투로 표현해서는 별로 시적인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1920년대 일본에서 단가니 화가니 하는 31음절로 된, 우리의 시조 비슷한 정형시가 번성했는데 여류 단가 시인에 요사마 아끼꼬가 있었습니다. 당시 아주 신식여성이었는데 그의 성적 경험을 표현한 단가가 있습니다. '젖가슴 누르며 신비의 문을 살짝 열었네, 거기서 피어나는 꽃의 짙은 진홍빛' 이렇게 상당히 암시적인 비유로 표현했습니다. 시란 이렇게 쓰여져야지, 나는 컴퓨터랑 뭘하고 싶다는 식의 표현은 우선 시적인 효과와는 무관한 악취미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또 하나, 이와는 다른 예로 1940년대 영국의 대표적인 신낭만파 시인이라고 하는 딜런 토마스(Dylan Marlais Thomas)의 시에는 어머니가 자기 자신을 잉태한 순간을 노래한 구절이 있습니다.'저 요르단 강물처럼 형체도 없었던 나는'이라고 해서, 아버지의 정자로서 어머니의 난자에 들어간 그 순간을 이야기하면서 그 때의 자기는 형체도 없었다는데, 왜 요르단 강물을 언급했냐 하면 잉태되는 그 순간에 벌써 죽게 마련인 운명도 잉태된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형상화하였습니다.비슷한 표현으로, 영국 17세기의 소위 형이상학파의 아주 기발한 시인인 존 단(원래 성공회 성직자였습니다)의 설교 가운데 '사람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이미 수의를 감고 있다'라며 죽게 마련인 운명이 벌써 잉태와 함께 있음을 얘기했습니다.
비슷한 사고이긴 하지만 '저 요르단 강물처럼 형체도 없었던 나는'의 경우, 특히 '나는'이라는 부분에서는 시인의 대담성이 돋보입니다. 뭔가 그러한 함축된 의미라도 있어야지 그냥 컴퓨터하고 뭘한다는 것은 완전히 우발적이고 필연성도 없는 악취미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성적인 것도 시의 소재가 충분히 될 수 있는 것이지만 뭔가는 다르게 암시와 함축으로 표현되어야 시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런 식으로 까발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유 : 미당의 시에 성관계 얘기가 나옵니다. '사람들은 모두다 남사당派와 같이 / 허리띠에 피가 묻은 고이안에서 / 들키면 큰일나는 숨들을 쉬고' 라고 해서 [멈둘레꽃]이라고 하는 시에 있지요. 성(性)은 성(性)인데, 지금 말씀과 같이 상당히 가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과거의 시인들이 그랬기 때문에 최영미 시인은 나는 감추고 우회하는 그런 것이 싫다, 나는 직격탄을 한번 날리겠다는 뜻에서 직설적인 작품을 쓴 것이 아니겠습니까. 역시 저희만 하더라도 나이가 나이인 만큼 혐오감을 갖지만 반면 젊은 세대들은 상당히 좋아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김 : 그 시를 읽고 만일 젊은 사람들이 쾌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시적인 쾌감은 아니죠. 다른 쾌감이죠.(함께 웃음)
유 : 그런데 어떤 순간적인 해방감, 이러한 것도 역시 시적인 것하고 관계가 있지 않겠습니까.
자, 이제 시간도 많이 지나고 해서, 오늘은 이 정도로 끝마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장시간 경청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것으로 이야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함께 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