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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경삼종회
 
 
 
카페 게시글
우리들 이야기 스크랩 45년전 사진을 보며
光浩 추천 0 조회 35 07.10.10 09:59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아직까지도 최악의 태풍으로 기록되고 있는 사라호가 전국을 강타한 해인 1959년도에 우리는 대구의 삼덕초등학교 6학년 5반에 재학 중이었고, 담임 선생님은 장 병학 선생님이셨다.

 

  선생님께서는 정말로 열정적으로 가르치셨는데 국어 산수 사회 과학은 물론이고, 미술시간에는 원근법의 기본을 가르치려고 한명 한명에게 신경을 쓰셨고, 음악시간에는 “옹달샘”을 책에 나온대로 2부로 나누어 가르치시어 2부합창을 부르게 하셨고, 체육시간에는 다른 반에서는 하지도 않는 무용의 기본인 ‘원 스텝’, ‘투스텝’ 등을 큰 키에도 불구하고 날렵하게 시범을 보이시던 것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이와같이 어느 과목이라도 예사로 넘기는 법이 없이 철저하게 가르치셨다.

 

  그리고 1960년 초에 우리는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게 되었는데, 우리 6학년 5반은 선생님의 열정적인 교육열에 힘입어 그 시절에 대구에서 명문이라고 하는 경북중, 사대부중, 대구중에 16명이나 합격이 되었다. 특히 대구에 있는 각 초등학교들의 한 반에서는 보통 2-5명 정도가 합격하는 경북중학교에 우리 반은 14명이나 합격되었다.

 

   중학교 합격자 발푯날 아침, 나 역시 발표를 보려 학교로 가는 도중에 벌써 경북중 합격자 발표를 보신후 자전거를 끌고 오시던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선생님께서는 자전거를 세우시고 대뜸 “광호야, 너 합격했더라. 축하한다”하시면서 어린 나의 작은 손을 잡으시면서 악수를 해주시던  선생님의 얼굴에 가득찬 기쁜 표정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해의 봄, 각자 자기의 중학교 교복을 맞춰 입고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4.19학생의거가 일어났다. 그즈음에 장선생님께서는 우리들 16명에게 새로 맞춘 교복을 입고 모이라는 전갈을 보내셨고, 모인 우리들을 데리고 사진관에 가서 찍은 사진(아래)에 선생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서로 도와서 부지런하게 씩씩하게 나아가자-을 글귀로 넣어서 우리들에게 한 장씩 주셨다. 그 시절의 물가로 치면  박봉의 선생님께는 사진값이 아주 거금에 해당 되었을 터인데도 아까울게 없을만큼 선생님께서는 우리들이 자랑스러웠던 것 같다.

 


   45년이 지난 지금, 위 사진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지난 45년 동안 우리는 제각기 어려운 가운데서 공부도 열심히 했고, 사회에 나가서는 각자의 본분에 따라 열심히 일했다. 또한 1983년에 동산병원 방사선과 의사로서 미국에 출장가다 소련 전투기의 KAL기 피격 사견 때에 요절한 한 친구 외에는 다들 지금도 건강하게 살고 있다. 우리들 대부분은 전 현직을 통하여 이 나라의 부강을 위해서 미력이나마 도움이 됐다고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만큼 열심히 일했다.

  대기업의 부사장을 역임한 후 첨단 벤쳐사업을 하고 있는 친구, 임상병리학 교수, 건축학 원로교수, 건축가, 콩만을 30여년을 연구해온 농학박사, 외교관, 고속철도차량 정비사장, 세무법인대표, 교육청과장, 수출기업 사장, 서울 지하철 감사, 섬유업체 경영 등으로 우리들이 이 시대에 각계 각층에서 한 몫을 할 수 있었던 것은 46년 전의 기초교육를 중요시하는 장병학 선생님의 열정적인 가르침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20년 전 쯤이었을 것 같다. 섬유수출업체의 간부로 재직하고 있던 L군이 “장 병학선생님께서 어디에 계신지 알아서, 정년 퇴임 때는 조그만 선물이라도 할 수 있도록 미리 모임을 만들자”라는 제안을 하고 있는 중에, 교육청에 재직하고 있던 A군으로 부터 ‘장선생님께서는 시골 초등학교의 교장선생님으로 계시는데 정년퇴임을 1년여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우리는 곧 바로 우선 연락이 닿는 친구들부터 모임을 갖기 시작하여 회비도 적립했다. 그리고 선생님의 정년퇴임연회에는 우리들 뿐만 아니라 많은 제자들이 참석할 수 있도록 홍보도 하고 조그만 선물도 올렸다. 이어서 우리들 중 마당발인 L군의 주도로 삼덕초등학교 17회졸업생중 가장 먼저 6학년 5반 반창회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반창회의 대표 임원은 1년에 한번은 장병학선생님을 찾아 뵙고 인사 드리는 것이 지금까지 불문율로 지켜 왔다.



 

  삼덕초등학교를 졸업한지 45년이 지난 2005년 석가탄신일의 하루 전인 5월14일 토요일 오후에 우리들은 김천역에서 모이기로 했다. 일찍 타계한 1명과 외교관 1명을 제외하면 14명이 되는데 그중에서 대구, 서울,창원 등에 살고 있는 10명이 참석할 수 있었다. 우리는 H상선의 부사장을 역임(이명박씨 다음으로 고속 승진)한 뒤 퇴임하여 김천에서 자동차 부품 중 첨단제품을 생산하는 J군의 無塵 (먼지 없는)설계로 준공된 공장을 견학하고, 직지사에 올라 경내를 관광하면서 지나가는 보살에게 부탁하여 디카로 사진(위) 한 장을 찍었다. 그리고 직지사의 주차장 근방에 있는 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우리는 지난 이야기들을 나누기도 하고, 시국담으로 서로 토론도 하다가, 그래도 흥이 남아있는 몇명의 친구들은 노래방에 몰려 가서 노래도 불렀다. 나는 초등학교에서 배웠던 옹달샘으로 한 곡조 뽑았다.


  우리의 정겨운 친구들을 보면서, 우리의 중학시절처럼 요즈음의 중등학교도 예전과 같이 입시를 통하여 학생들을 뽑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하는 생각을 또 하게 된다. 그 때의 명문중 고등학교의 학생들은 엘리트라는 긍지를 가지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모범생이 되기 위해 착한 일도 많이 했다. 또한 학교에서 수업하는 분위기 자체가 좋았고, 선생님도 학생들의 실력 차가 적어서 경우에 따라서는 심화된 내용으로 가르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과외공부 열풍을 막기 위해 바꾼 중등학교의 추첨식 입학제도가 단점이 많은데도 역대 집권자들은 이 제도를 고칠 생각은 아니하고 고집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추첨식 입학제도로 바뀌었지만 과외열풍은 더욱 심해졌고, 학생들의 학력은 하향 평준화가 되어 전반적으로 학력 수준이 낮아졌으며, 대입 내신제도의 도입으로 인한 급우 간의 과다 경쟁으로 급우 간에 우정을 기대할 수 없어진 것 하며, 무엇보다 각 학급의 급우 간의 학력 차이가 심해 담당 교사들이 교육내용의 수준을 정하기가 어렵고, 그에 따른 학업 분위가 억망이 될 수 밖에 없다. 이제야 그점을 인정하여 2008년도 부터는 영어 수학는 우열반을 편성하겠다는 말이 들리지만 이 또한 궁여지책 밖에 되지 않을 터인데, 왜 근본적으로 고치려 하지 않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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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07.10.12 17:06

    첫댓글 재작년 봄에 친구들을 만난 후 그 감회를 정리하여 제 블로그에 올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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