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녹색평론 읽는 사람들 홈페이지
(http://ournature.org)에 올라온 글입니다.
나도 글쓴이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이처럼 선뜻 용기내어 말하지 못하고 미루고 있었지요.
지금 같아서는 축구경기 보지 않는 것도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치는 분위기지요..
본디 관심 가지지 않던 사람까지도 막론하고 말이에요.
나중에라도, 아니 지금부터라도 찬찬히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 이 글을 퍼왔습니다..
907번 글의 답장글 : Re: 도마의 월드컵
글쓴이: 채송아 (pothos @ korea.com)
등록: 2002년 6월 15일 1시 12분 조회: 47
#. 글을 시작하기 전에
사람들이 축구를 보기 위해 쌈밥집으로 갔다. 쌈밥과 축구,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고기와 월드컵, 나는 이것을 둘 다 싫어한다. 그래서 늘 피해다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하다. 내가 이런 글을 쓰고 있는 동안 행여 우리나라 축구가 지면 어떻게 하나, 그래서 그나마 아무 즐거움도 만족도 없을 것만 같은 사람들의 삶에 한동안 순진하게 오직 기쁨과 뜨거움으로 달아오르며 감동시켰던 이 열기가 일순간 꺼져버리면 어떻게 하나, 세계 최강의 프랑스가 16강에서 좌절했다 하더라도 프랑스 국민들이 어디 우리 국민들만 하겠는가, 우리에 비하면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다. 만약 우리나라 축구가 질 때는 사람들이 측은해서 어떻게 하나, 사람들의 그 허탈함을 과연 무엇이 채워줄 수 있을까. 물론 설령 진다 하더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성상 그리 오래가지는 않겠지만.
나는 누군가의 말처럼 유별나거나 까다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또 누군가의 농담처럼 매국노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를 놀리거나 비난하는 누구라도 그것을 알면, 그 장면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깨닫지 않을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굳이 이 글을 쓴다.
#. 장면1
월드컵이 개막하기 열흘 전쯤의 주일 낮 오후였다. 성가대 연습을 마치고, 같이 앉아서 얘기라도 나누면 좋을 것 같은 몇몇 사람들을 굳이 못 본 척하고 그날도 산책을 나섰다. 날씨 역시 더 이상 화창할 수 없을 것만큼 맑고 따뜻했고, 삼호아파트 벚나무들은 이전에는 한 번도 그런 빛을 발하지 않은 것처럼 눈부신 초록을 더하고 있었다. 그러다 2동 앞 패밀리 마트 앞을 지나가는데, 분명히 낯이 익은 할아버지 한 사람이 과일 트럭을 세워놓고, 과일을 늘어놓은 돗자리 위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가
너무나 낯이 익어 예전에 뻥튀기를 팔던 할아버지가 아니었나, 분명히 내가 아는 사람인데 싶어서 제일 싼 바나나 2천원어치를 살까말까 잠시 망설이다 그 옆을 스쳐 지나갔다.
2동 앞 벚나무들의 그늘 속으로 들어갈 바로 그때, 갑자기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아우성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들려왔다. 뒤돌아보니 공무수행을 하는 서초구의 노란색 트럭이었다. 거기에 탄 두 사람은 확성기에다 대고, 낯익은 과일 장사 할아버지를 향해 도저히 알아들을 수도 없는 욕설과 고함을 고래고래 치고 있었다.
그때 퍼뜩 드는 생각은 공무원들을 주일에도 나와서 일하게 만들다니, 월드컵이 정말 국가의 엄청난 거사로군 싶어 쓴웃음부터 나왔다. 아저씨는 휴일 낮이라 잠시 쉬고 있었을 따름이라며 변명처럼 한 마디 대꾸를 했으나, 쉬기는 뭘 쉬는 거냐며-차에 탄 사람은 열 마디 스무 마디를 더욱 내질렀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과일들을 차에 주섬주섬 실으며 몇 마디 더 중얼중얼하다가 기어이, 그 한 마디를 하고 말았다.
- OO생선장사는 그그저께부터 사흘씩이나 여기서 팔았다더라, 왜... 누구는 봐 주고, 누구는 안 봐주냐....
물론, 차에 타고 있던 공무원들은 봐 주긴 누굴 봐준단 말이냐, 말도 안되는 소리 말고 빨리 집어치워라, 안 그러면 다 쓸어버릴 거라며 더욱 강도를 높여 고함을 쳤다.
그 윽박지르는 소리가 너무 듣기 싫어서 나는 뒤돌아섰다.
뒤돌아선 내 앞에는 너무나 안온한 오월의 초록이... 너무도 눈부셔 눈이 멀 것 같은 아름다운 일요일 오후의 햇살이 환하게... 환하게 비치고 있었다.
물불 가릴 것 없는 윽박과, 비굴한 변명과, 고단한 삶은 아주 모르는 척, 그렇게 편하고 아름답게, 눈부시고 환하게. 순간, 그저 산책을 하고 있을 따름인 내 모습이 너무나 무기력하여, 그 순간, 도저히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그저 뒤돌아서는 내 모습이 너무나 힘없고 초라하여 그대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 도마의 월드컵
그리고 나서부터 나는 월드컵이 싫어졌다. 물론 나의 이런 태도는 지극히 감성적인 대응이다. 노점상 문제는 행정편의적인 국가 정책의 일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또, 내가 월드컵을 싫어한다고 해 봐야 무슨 대수로운 힘을 미치겠는가, 고작 주변 사람들로부터 엉뚱하다는 시선을 받을 뿐이다. 더욱이, 내가 월드컵에 대해 할 수 있는 저항은 월드컵 경기 보지 않기가 전부이다. 제기차기도 잘 하고 싶었던 어린시절과 달리 호오(好惡)가 분명해진 스무살 이후로 TV로는 스포츠 관전을 거의 하지 않으며 살아온 내게 관전거부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노숙자들을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지방 어딘가에 격리시킨다는, 거리의 미화와 교통질서를 위해 철거당한 노점상들이 생계를 위협받는다는 그리 새로울 것도 없는 야기와, 수공업으로 만들 수밖에 없는 축구공을 바느질하는 제3세계 어린아이들의 지문이 없어지고, 눈이 먼다는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와, 축구에 전혀 관심 없는 사람들이 차를 몰고 교외로 나갈 수 있는 권리를 국가가 침해할 수 있는 것이냐, 홀짝제는 권장사항이지 왜 강제 조항이냐는 자유주의자의 말까지- 내가 눈으로 보지 않고 느끼지 않으면 그것은 삶의 방향타를 수정하는 데에는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할 수가 없다.
목축을 하기 위해 전세계 식량의 60% 이상이 소모된다는, 그럼에도 세계에는 수많은 이들이 기아로 허덕인다는, 한 사람이 채식을 하면 5만평의 숲이 살아난다는, 그런 수치들도 맥도날드 제국이 얼마나 많은 가축들을 대량생산, 대량학살하는지 눈으로 보지 않으면 그 거대한 식량자본의 실체를 체감하지 못하듯이 우리는 눈으로 보지 못하면, 믿지 못하는 예수의 어리석은 제자 도마와 같다.
#. 장면2,3,4
- 위의 글은 평소 한 시간 남짓 하던 금요 성경공부가 30분만에 끝나고, 사람들이 저녁을 먹으며 포르투갈전을 보러 식당에 가 있는 동안 교회에 남아 심야예배를 기다리며 쓴 글이다. 나는 지난 폴란드전과의 경기를 하는 동안에는 시내에서 공연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다, 그 옛날 12시 통행금지 시절과 같은 텅 빈 거리와 문닫은 상점을 보면서 뜻밖의 외로움과 맞닥뜨려야 했다. 남들이 축구를 볼 때 다른 일 하는 것을 내심 뿌듯하게 여기던 내가 왜 이렇게 약해졌을까, 그러나 그것이 남들과 다른 길을 가고자 선택한 나의 몫이라는 것은 며칠이 지나서야 알았다. 그 주일에는 전도사님이 월드컵으로 인해 범죄율이 낮아졌다는 얘기를 전해주었다. 그러는 동안 아버지와 할머니를 죽인 대학생의 이야기는 평소보다 조용히 지나갔다.
- 미국전이 열리던 지난 월요일 낮, 대표님 이하 전 직원이 VIP룸의 대형 스크린 앞에서 맥주와 스낵을 사다 놓고 열띤 응원을 하는 동안 나는 그 역시 텅 빈 사무실에 혼자 앉아 일을 하고 있었다. 남들이 노는 것 같아 나도 뭔가 딴 짓을 하고 싶었으나 현충일 이후로 지방에 다녀오느라 연3일을 쉰 나는 농땡이도 치지 못할 만큼 일이 많았다. 다행히 경기가 무승부로 끝나자, 사람들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돌아와, 내 앞에서 열심히 오노 웨이를 흉내내 주었다. 그리고 얼마간 지나 퇴근시간이 되었다. 나를 포함한 우리 팀 몇 명이 모여 뭔가 업무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평소 우리 팀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던 옆 팀의 남자 선배 하나가 갑자기 우리 팀 쪽으로 고개를 돌려 "수고하세요!”하고 인사를 하며 퇴근을 했다.
...이게 지금, 누가, 누구에게 하는 인사인가. 나는 입사 이래 3년차가 되도록 그가 우리 팀에게 소리 내어 인사를 하고 집에 가는 것을 처음 보았다. 아... 이게 월드컵의 힘이구나, 늘 적대하던 사람에게마저 동지의식과 일체감을 이루게 하는 것, 이것이구나.
- 심야예배가 있는 동안 예배당 안에까지 들려오던 긴 함성소리가 이겼구나 하는 웃음을 머금게 했다. 사람들은 한동안 또 기대와 흥분 속에서 며칠을 살겠구나. 그리고 나와서 본 방배동의 퇴락한 유흥가는 내 생애 듣지 못했던 함성으로 흘러넘쳤다. 아파트 앞을 지나자 할머니도 박자를 맞추며 박수를 쳤고, 아이들은 너나할 것 없이 소리를 지르며 펄쩍 펄쩍 뛰어다녔다. 버스가 방배역 사거리를 지날 때, 나는 사람들이 모두 한결같이 입을 모아 외치는 '필승, 코리아’의 여덟마디 멜로디를 처음 들었다. 나는 그들이 정녕 무엇을 '반드시 이기'고 싶은 것인지 묻고 싶었다.우리 안의 무기력과 우리 안의 패배감과 우리 안의 냉소와 우리 안의 괴로움을, 부끄러움을, 비겁함을, 이겨내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87년 유월, 시청 앞에 모였던 100만 인파를 체험한 선배는 그 양감을 평생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거기에 있던 이들은 모두 그것을 평생 가슴에 품고, 그 마음으로 산다고 했다. 오늘 시청 앞에 모인 40만 인파도 그 감동과 열기가 평생 가슴에 남을까, 그것은 얼마나 오래 가는 마음일까. 나는 그것이 참으로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