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적 전문가 아름다운 중년의 한사람

[하늘바람]

HOME >> 사회
2003.02.20. 1741호





[백신의 황제] WHO 사무총장 당선자 이종욱 박사
전세계 나병·소아마비 퇴치 ‘공신’… 대학시절 틈만 나면 의료 봉사



▲ 명석한 타입이 아니라 끈기있게 추구하는 스타일. 학생시절 인기 많아 집에 친구들이 득시글거렸다.
“이건 꿈입니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더 이상 이런 감격적 일은 안 올 것입니다.”(권이혁 성균관대 이사장)

“1월 28일 우리는 한국의 역사를 바꿨습니다.”(김성호 보건복지부 장관)

이종욱(李鍾郁·58·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 특별대표 겸 결핵관리국장) 박사가 지난 1월 28일 세계보건기구(WHO) 제6대 사무총장으로 당선된 뒤 나온 말이다. WHO 사무총장이 어떤 자리기에 국내의 쟁쟁한 사람들조차 이처럼 감격할까.

WHO는 유엔 내에서 ‘산하기관과는 다른, 독립적 성격의 전문기구’로 유엔본부와 동격이다. 따라서 국제사회에서 WHO 사무총장은 유엔 사무총장과 동격으로 대우받는다. 192개 회원국, 8000여명의 직원을 가진 가장 큰 유엔 전문기구로, 연(年) 예산은 뉴욕 유엔본부 수준인 11억달러다.

하지만 이종욱 박사가 WHO 사무총장에 당선된 뒤 한국 내에선 “이종욱이 누구냐”는 얘기가 나왔다. 그만큼 그는 ‘미지의 인물’이었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뒤 20여년 간 외국에서만 생활해온 게 그가 알려지지 않은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또 외국 생활을 오래한 때문인지 사생활에 관한 질문을 싫어하는 그의 성격 탓도 있을 것이다.

기자는 그가 지난해 11월 사무총장 출마 선언을 한 뒤 입국했을 때 그를 처음 만났다. 코리아나호텔에 묵고 있던 그에게 전화를 걸어 취재요청을 했더니 바로 조선일보사로 찾아오겠다고 했다. 그러나 와서는 간단한 출마의 변을 들려준 뒤 사진 포즈를 취해주고는 서둘러 떠났다. 말을 많이 하지 않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그가 당선된 뒤 이달 초 입국했을 때 기자회견장, 후원자들과의 만남의 장 등에서 여러 차례 그를 취재하게 됐다. 그는 어린시절 또는 부인에 대한 질문이 나오면 제대로 대답하지 않거나 말을 돌렸다. “외국 기자는 사생활에 관한 것은 묻지 않는다”고 응답하기도 했다. 그에 관한 기존 신문기사가 많지도 않지만, 그 기사들도 WHO에 들어간 이후의 경력만 소개하고 있는 것도 그의 이런 성향 때문일 것이다.


▲ 이종욱 박사가 지난 1월 28일 WHO 사무총장에 당선된 뒤 부룬트란트 현 사무총장으로부터 축하를 받고 있다.
그는 최근 국내 한 라디오와의 인터뷰 도중 사적인 내용을 묻는 질문이 나오자 “개인 사항에 대해선 대답하지 않겠다”며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는 이후 “그 라디오측에 미안하긴 하더라”고 말했다. 자기 방어벽을 치는 정도가 보통 사람보다 조금 더 심한 그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그가 WHO 사무총장에 당선되기 전날, 기자는 그에 대한 정보를 좀 더 모아야 겠다는 생각에서 친동생인 이종오(李鍾旿·55)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국민참여센터 본부장을 만나러 갔다.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그의 고향, 가족, 학창시절 얘기 등을 형제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들어보기 위해서였다. 이종욱 박사라면 절대 얘기하지 않는 이야기들을 좀 들을 수 있었다.

●이종오 국민참여센터 본부장이 친동생

이 본부장은 “서울 마포·용산·서대문·종로 구청장을 지냈던 아버지 이명세(李明世)씨의 4남1녀 중 형은 셋째, 나는 넷째며 막내는 이종구(李鍾久·49) 성공회대 사회학과 교수”라고 했다. 이들은 용산구 청파동에서 나서 자랐으며, 아버지가 고위 공무원이었던 만큼 별 어려움 없는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4·19 직후 아버지가 종로 구청장을 사임했고, 그 다음해에 세상을 떴다. 이종욱 박사가 경복고 1학년 때였다. 그때부터 이들의 삶은 힘들어졌다.

이 본부장은 “큰 교육을 받지 못했던 어머니가 생계를 꾸릴 만한 제대로 된 직업을 갖는 것이 불가능했고, 맏형도 몸이 약해 뚜렷한 직업이 없었다”고 했다. 때문에 이종욱 박사는 이리저리 돈을 융통해 고등학교를 마쳤다. 이 본부장은 “형은 최상위권이 아닌 그냥 상위권 성적의 학생이었으며, 인기가 많아 집에 친구들이 득시글거렸다”고 말했다. 또 “형은 명석한 타입이 아니라 끈기 있게 뭔가를 추구하는 스타일”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 본부장의 성격도 형과 비슷한 면이 있어 개인사·가족사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피했다. 이종욱 박사는 고교 졸업 후 공대에 입학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환자촌서 일본 여성 만나 결혼

그는 당선 후 가진 귀국 기자회견에서 “공대에 좀 다녔다는 얘기가 있는데 맞느냐”는 질문이 나오자 “공대에 다니다 군대 갔다와서 다시 의대에 들어갔다”고만 말한 뒤 어느 공대인지, 어느 부대에서 군생활을 했는지에 대해선 끝내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는 대학 등록금을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며 만들었다.

대학 시절 그는 틈만 나면 경기도 안양의 나환자촌 ‘나자로 마을’에 가서 의료봉사를 했다. 거기서 한국에 봉사활동 하러 온 동갑내기 일본인 여성 카부라키 레이꼬를 만나 사귀었고, 대학 졸업 후 그녀와 결혼했다.

이어 나병을 연구하기 위해 하와이 주립대로 유학 가 공중보건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졸업 뒤 미국령 사모아의 린든 B 존슨 열대의료원에서 나병 환자를 진료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하와이대 지도교수로부터 “학교에 남으라”는 권유를, WHO 남태평양 사무처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그는 WHO를 선택했다. 1983년 그는 WHO 남태평양 사무처(WPRO) 나병 퇴치 팀장으로 발탁됐다. 타히티, 뉴칼레도니아, 솔로몬 군도 등 남태평양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WHO에서 개발한 진단법을 보급했다. 그는 “간섭하는 사람이 없어 좋았고, 이 섬 저 섬으로 출장 가면 일을 마친 후 수영과 스쿠버다이빙을 즐기곤 했다”고 회상했다. 그 후 필리핀에 있는 WHO 서태평양지역 사무처 질병관리국장, WHO본부 백신국장, 결핵관리국장 등을 역임했다.

이 박사는 1995년 WHO 백신국장 재직 당시 세계 인구 1만명 당 1명 이하로 소아마비 유병률을 떨어뜨리는 박멸에 가까운 성과를 거둬 미국의 과학잡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으로부터 ‘백신의 황제(Vaccine Czar)’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97년엔 세계적 테니스 선수 마르티나 힝기스로부터 백신연구 기금으로 7만5000달러 기부를 끌어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2000년 결핵국장 재직 시에는 북한에 6만명분의 결핵약을 공급했으며, 결핵과 말라리아 퇴치를 위해 최근 북한을 두 번이나 다녀와 북한측의 호감도 얻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20여년 간 WHO에서 일하면서 나병과 소아마비를 퇴치하는 데 일조한 점을 큰 보람으로 삼고 있다.

●결핵·말라리아 퇴치… 북한서도 ‘호감’

“1980년대 중·후반 서태평양 지역에서 일하면서 나병 퇴치를 목표로 세웠습니다. 그게 WHO 내에서 전세계 목표로 바뀌어 큰 성과를 이뤘습니다. 1990년부터는 소아마비 근절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중국에서 한해 6000명의 소아마비 환자가 생길 때였습니다. 지금은 서태평양과 동아시아 지역에 소아마비 환자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고마워 하는 사람은 없지만, 중요하고 좋은 일을 했다는 보람은 남았습니다.”

그는 당선후 방한해 가진 기자회견에서 “WHO에 들어가 성실히 생활하다 보니 지금의 자리에까지 왔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의례적인 겸양의 표현일 뿐이다. 김성호(金成豪) 복지부 장관은 최근 “작년 말 이 박사가 사무총장 선거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나에게 왔을 때 ‘WHO에 들어갈 때부터 사무총장을 꿈꿨다’고 말했었다”고 밝혔다. 꿈을 크게 갖고 평생을 노력한 끝에 그 꿈을 이룬 전형적인 사례로 삼을 만한 인물이다.

●임기 5년, 연봉은 21만달러

이 박사가 사무총장이 되면 받는 연봉은 21만달러. 그외 각종 수당과 판공비가 따라붙는다.

이 박사는 현재 스위스 제네바에서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부인 레이꼬 여사와 함께 살고 있다. 부인은 지금도 제네바에서 각종 봉사 활동에 열심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국말이 엄마보다는 서툴다는 외동아들 충호(25)씨는 미국 코넬대에서 전기공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이 박사 부부는 제네바에서 가끔 한가한 시간이 생기면 점심을 싸들고 레만호 주변을 산책한다고 한다.

그는 오는 5월 제56차 WHO 정기총회에서 정식 인준을 받은 뒤 인수위원회를 구성해 업무 인수인계 작업에 들어가며, 7월 21일 취임식을 갖고 5년 임기를 시작한다.

(










============================================
▷◁ 대구지하철 희생자를 추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