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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3장 4절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그를 눈여겨 보고, 그에게 말하였다. "우리를 보시오!" <사도행전 3장 4절, 새번역>
지난 사도행전 2장을 통하여 이전에 없던, 세상에 없던 공동체가 탄생했습니다. 그 공동체의 이름은 ‘교회’입니다. 말씀에 몰두하고, 실질적인 나눔을 실천하며 함께 더불어 사는 길을 선택하여 ‘마을, 커뮤니티’를 형성하여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는 공동체, 교회는 그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약속, 성령님의 임재를 통하여 이 땅에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사도행전 강해를 통하여 이렇게 탄생한 교회가 가지는 특별한 점에 대해서 많이 나눌 예정입니다. 이 전에는, 세상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교회만의 특징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그 특징 중 가장 중요한 것을 뽑으라면 바로 ‘세상과 다른 시선을 가진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그 다른 시선을 가진 교회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라고 생각됩니다. 그럼 당시 본문의 현장 속으로 함께 떠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날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으로 기도하기 위하여 올라가고 있습니다. 곧 제 구시, 오후 세시 기도시간이 다 되어갑니다. 그런데 성경은 베드로와 요한이 아닌 다른 한 사람을 조명하기 시작합니다. 성경은 역시 우리가 관심 갖지 않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우리의 시선을 향하게 합니다. 그 시선이 닿은 곳에는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을 메고 와서 성전 문 곁에 앉혀 놓았습니다. 거기 앉혀 놓은 이유가 있습니다. 성전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려는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이니 일을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고, 그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최선을 다해 구걸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먹고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것은 ‘사람’이어야 하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사람은 비참해보이고, 성전 문의 이름만 ‘아름다운 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참 쓸쓸하고 가슴 아픈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 장면을 상상해 보고 있자니 더 안타까운 점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가장 오랫동안 성전 가장 가까이에 있었지만 성전에는 들어가 보지 못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저 하루하루 먹고 살아야 하기에 성전으로 들어가려는 많은 사람들에게 구걸만 하느라 성전 안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지금껏 그를 성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간 적이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 사람 곁으로 베드로와 요한이 지나갑니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쳐 갔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 역시 지나다니면서 얼마나 많이 본 사람이었겠습니까? 기도하러 갈 때마다 구걸하는 그 사람, 베드로와 요한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냥 스쳐 지나가던 것이 일상이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발을 붙잡고 구걸을 하며 말을 걸어왔을 때도, 베드로와 요한은 외면하고 지나간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더 이상 어제의 ‘베드로와 요한’이 아닙니다.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그들은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달라졌다는 것은 바로 그들의 시선이 변화된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그를 눈여겨 보고, 그에게 말하였다. "우리를 보시오!" <사도행전 3장 4절, 새번역>
오늘은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성전 앞에 앉아 구걸하던 그 사람을 ‘눈 여겨’ 보았습니다. 그런데 ‘눈 여겨’라는 말로는 도무지 설명이 부족합니다. 평소에는 그냥 스쳐 지나가던 사람이 오늘따라 베드로와 요한의 눈에 완전히 다르게 보인 것입니다. 더 놀라운 점은 서로 그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닌데 베드로 혼자만도 아니고, 요한도 더불어 그를 주목해 본 것입니다.
그들은 순간 같은 마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같은 마음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확신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더불어 한 마음을 먹었던 것은 그들이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꿈을 꾸고, 같은 길을 걸어가던 한 교회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같은 마음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그 사람을 ‘눈 여겨’ 본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그 사람을 향한 시선은 마치 예수님이 자신들을 바라보던 시선과도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베드로도, 요한도 이 순간 예수님이 자신들을 ‘눈 여겨’ 보시고는 제자로 부르셨던 때가 생각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사람, 꿈도 희망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 먹고 살기에 바빴던 ‘어부’에 불과하던 자신들을 불러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겠다고 말씀하신 예수님! 그리고 그 예수님으로 인하여 베드로와 요한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믿음의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고 오늘까지 와 있게 된 것입니다. 그 모든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자신들이 제2의 베드로, 제2의 요한을 향한 시선을 품어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된 순간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베드로와 요한은 그 사람을 ‘눈 여겨’ 본 후 그에게 다가섭니다.
잠시 여기서 이 ‘눈 여겨’라는 단어를 좀 깊이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단어를 통하여 우리는 이 전에는 볼 수 없었고,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시선을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선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이며, 예수님이 제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이며, 성령님이 우리에게 주고 싶은 시선이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이 ‘눈 여겨’라는 단어는 마치 단어 사전에 있는 시선에 대한 특별한 표현을 다 가져다 쓴 것 같은 단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헬라어로 보면 ἀτενίσας(atenisas, 아테니사스)입니다. 이 단어는 사도행전에만 등장하는데 오늘 본문과 사도행전 7장 55절, 10장 4절, 11장 6절, 13장 9절, 14장 9절, 23장 1절 등 총 7번 등장합니다. 그런데 신기한 점은 이 단어가 등장할 때는 대부분 성령의 충만함을 기본으로 하여 바라보거나, 기도하는 중이거나, 환상을 보는 중이거나, 말씀을 듣고 믿음이 생겼을 때라는 조금은 특별한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각 구절마다 사용된 단어를 한글로 번역된 성경 3가지, 개역개정, 새번역, 공동번역으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도행전 7장 55절
개역개정 -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새번역 -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쳐다보니
공동번역 - 이때 스테파노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보니
사도행전 10장 4절
개역개정 - 고넬료가 천사를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새번역 - 고넬료가 천사를 주시하여 보고,
공동번역 - 이때 스테파노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보니
사도행전 11장 6절
개역개정 - (베드로가)이것을 주목하여 보니
새번역 - (베드로가)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공동번역 - (베드로가)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더니
사도행전 13장 9절
개역개정 -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새번역 - 그래서 바울이라고도 하는 사울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마술사를 노려보고 말하였다.
공동번역 - 그러나 바울로라고도 불리는 사울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그 마술사를 쏘아보며
사도행전 14장 9절
개역개정 -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새번역 - 이 사람이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바울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고침을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알고는,
공동번역 - 그가 하루는 바울로의 설교를 듣고 있었는데 바울로가 그를 눈여겨보더니 그에게 몸이 성해질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알고는
사도행전 23장 1절
개역개정 -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새번역 - 바울이 의회원들을 주목하고 말하였다.
공동번역 - 바울로는 의회원들을 똑바로 바라보며
영어로 보면 더욱 더 잘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영어 단어는 정말 다양하게 사용됩니다만 뜻은 거의 하나로 일치됩니다.
New International Version, Contemporary English Version,
Christian Standard Bible, International Standard Version
- looked straight
New Living Translation, New American Standard Bible
- looked intently
English Standard Version - directed one's gaze
English Revised Version, King James Bible, World English Bible
- fastening one's eyes upon
New King James Version - fixing one's eyes
Literal Standard Version, Young's Literal Translation
- having looked stedfastly toward
대부분의 뜻이 ‘목적을 가지고 똑바로 뚫어져라 바라봄’을 이야기합니다.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목적을 가지고 응시하면서 관심을 두는 것으로 이 ‘눈 여겨’라는 단어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각 버전의 영어성경이 다양한 단어를 통하여 다른 해석을 하는 이유는 어떻게든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에게 하고 있는 이 행동 ‘눈 여겨 보다’에 대해서 더욱 자세히 설명하기를 원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만큼 베드로와 요한이 가지게 된 이 시선은 특별했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가보겠습니다.
성령이 충만했던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의 시선을 가지고 그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눈 여겨’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에게 다가섭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를 보시오” 그런데 성경은 여기서 아주 재밌는 단어를 사용하여 이 사람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못 걷는 사람은 무엇을 얻으려니 하고,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사도행전 3장 5절, 새번역>
얼마 만에 이렇게 사람을 본 것이었을까요? 아름다운 문이 왜 아름다운 문인지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쳐다 볼 여유도 없었던 그 사람, 그저 사람들은 자신이 구걸해야 할 대상이었지 ‘시선’을 두어야 할 이유가 없었던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쳐다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드디어 이 못 걷는 사람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자신의 절망이란 삶 속에 갇혀 있던 시선이, 이제 다른 곳으로 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때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렇게 자신을 바라보는 이 사람에게 베드로의 믿음의 선포가 이어집니다.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그 대사가 터져 나온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하고,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사도행전 3장 6~7절A, 새번역>
그저 바라보기만 했을 뿐인데 한 사람이 자신의 손을 잡아 일으킵니다. 그냥 무엇을 얻을 수 있으려나 보다 하고 쳐다본 것뿐인데 자신을 향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황스러웠습니다. ‘이 사람 누구야? 난 태어나면서부터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그냥 먹을 것이나 주던가, 돈을 몇 푼 던져 주고 가던가 하라고! 쓸데없는 행동 하지 말라고!’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아니면 그와 동시에 ‘걸으라’라는 말에 놀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걷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이런 복잡한 상황 속에서 그 사람에게 자신 스스로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오른손을 잡고 일으키는 즉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힘’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허리 밑으로 경험하지 못했던 기운이 자신에게 넘치기 시작했습니다. 다리와 발목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지자, 걸을 수 있다는 확신이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걷는 법을 가르쳐준 적도 없었는데 벌떡 일어났습니다. 혼자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평소에 볼 수 없었던 곳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앉아 있을 때와 전혀 다른 시선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내딛어 보았습니다. 걸어지는 것입니다.
더 빨리 걸어보았습니다. 빨리 걸어지자 이번에는 뛰어보기 시작했습니다. ‘껑충껑충! 우와 내가 뛰다니...!’ 방금 전까지 어떻게든 구걸해서 오늘을 버티고자 생각했던 내 모습, 내 자리가 보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이 보입니다. 그들은 나를 보면서 빙그레 웃고 있습니다. 다가가서 그들과 힘차게 포옹했습니다. 고맙다는 말도 잊어버린 채 먼저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저절로 터져 나왔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지체할 이유도 없이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그토록 궁금했던 성전 안, 이제는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전 밖에만 머물던 시선이 이제는 성전 안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진짜 성전을 보게 됩니다. 찬양 소리가 멈추질 않습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 줍니다. 사람들도 오랜 시간동안 그 구걸하는 사람을 봐왔기에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가 걸어다니는 것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고, 또 그가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 구걸하던 바로 그 사람임을 알고서, 그에게 일어난 일로 몹시 놀랐으며, 이상하게 여겼다. <사도행전 3장 9~10절, 새번역>
왜 아무도 같이 기뻐하거나 감사해하는 사람이 없었을까요? 평생을 걷지 못하던 사람이 이젠 걸으며, 뛰며 하나님 앞에 찬양을 드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면 함께 기뻐하며 감격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이 무뎌졌는지 그들은 몹시 놀라기만 하고 이상하게 여기며 어리둥절하게만 생각합니다. 그들의 고정관념은 벌써 그 나면서부터 앉은 사람은 절대 걸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절대 기적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그것이 바로 세상과 사람의 시선입니다.
그들이 모두 성전 안에 있었던 것이 더 이 상황을 재밌게 만듭니다. 대체 그들은 성전 안에서 누구에게 기도를 했던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일으키실 역사에 대한 기대 없이 무슨 기도를 할 수 있었을까요? 고정화된 시선을 가지고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다른 시선’을 가진 자들만이 이 놀라운 사건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베드로와 요한이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이유를 사람들 앞에서 설명하자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꽤 많은 사람들이 이 ‘다른 시선’을 회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 그는 마흔 살이 넘은 사람이라고 사도행전 4장 22절은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게 오늘 40년이 넘도록 이어져온 똑같은 삶은 한 순간에 완전히 180도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구걸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제 더 이상 원망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소망 없이 이어지는 삶을 살지 않아도 됩니다. 이제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땅만 바라보던 시선이, 자신만 바라보던 시선이 변하자 그의 인생도 변하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빤히 쳐다보았던 그 시선이 그래서 정말 중요한 결정이었던 것입니다. 이 시선에 대해서 베드로와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예수의 이름이, 여러분이 지금 보고 있고 잘 알고 있는 이 사람을 낫게 하였으니, 이것은 그의 이름을 믿는 믿음을 힘입어서 된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은 그 믿음이 이 사람을 여러분 앞에서 이렇게 완전히 성하게 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 16절, 새번역>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았던 그 사람의 시선을 베드로와 요한은 ‘믿음’이라고 표현합니다. 일어나 걸을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와 요한 자신들 때문이 아니라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의 믿음의 결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할 때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성하게 된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실로 시선만 바뀌어도 ‘믿음’이 작동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을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발걸음이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시선을 두는 곳에 이미 우리의 마음이 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 눈에 자주 띄는 것이, 내 시간으로 채워지고, 내 정신이 되며, 내 동선이 되고, 내 삶이 된다’라고 기록한 어느 작가의 이야기처럼 어떤 ‘시선’을 가지느냐에 따라, 어디를 바라보는 ‘시선’이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은 정말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아마 성령님의 임재 전에 베드로와 요한이었다면 오늘도 그냥 지나쳐 성전 안으로 들어갔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된 그들은 이제 다른 시선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그 누구도 주목해 보지 않는 것을 눈 여겨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너무나도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평소에는 생각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일들에 시선을 두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변화’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 ‘변화’를 일으키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전에는 없던, 세상에는 없는 ‘시선’을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시선은 바로 4복음서에 이미 너무도 많이 보여주신 ‘예수님의 시선’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향하셨던 그 시선을 닮아야 합니다. 이 ‘눈 여겨보다’라는 단어를 쓰시며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눈 여겨 보신’ 사람들의 이야기로 차고 넘치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님의 시선에는 3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이 3가지 특징에 대해 배우고 체득하여 이 예수님의 시선이 우리의 시선이 되길 소망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시선은 먼저 ‘하나님’을 향한 시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상황에서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셨습니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 시선을 둔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행동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정확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늘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하셨습니다.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그러니 마땅히 교회도 하나님을 향한 가장 ‘우선의 시선’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열심’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마저 하나님께 돌리신 예수님의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그래서 오늘 베드로와 요한도 자신들을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을 예전처럼 즐겼던 것이 아니라 이젠 하나님께로 돌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하나님’에 대해서 선포하는 시간으로 이어가게 됩니다. 먼저 하나님께 시선을 향하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시선은 ‘사람’을 향하는 시선이었습니다.
제자들로부터 시작해서, 수로보니게 여인에 이르기까지, 빌라도에서 예수님 곁에 몰려들었던 어린 아이들까지 예수님의 시선은 실로 ‘사람’에게 향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물건’을, ‘건물’을, ‘상황’을 눈 여겨 보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시선을 닮아가야 하는 우리 역시 ‘사람’에게 시선을 두어야 합니다. 바로 그 사람이 하나님이 그토록 찾아 헤매시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심코 지나쳤지만, 40년 동안이나 성전 미문 앞에 앉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외면했지만, 예수님은 여전히 그 한 사람을 찾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교회는 ‘사람’에게 시선이 향해야 합니다.
특정한 사람이 아닙니다. 좌로, 우로, 위, 아래로 치우친 시선이 아니라 그 사람의 외적인 것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라 그 사람자체로 ‘속사람’을 향한 시선이어야 합니다. 옳고 그름을 향하지 않으셨고, 편견을 가지지 않으셨고, 고정관념도 선입견도 가지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냥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시고, 있는 그대로 대하셨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로, 강자와 약자로 구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떠한 수식어 없이 예수님은 ‘사람’으로 대하셨습니다. 소위 ‘사람’이라면 진절머리가 나십니까? 사탄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하는 존재가 ‘사람'이라는 시대에 살고 있기에 사람이 제일 무섭고,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싫으십니까? 그렇다면 더더욱 오히려 더욱더 사람에게 시선을 향해야 할 때인 것입니다. 결국 모든 ‘사람’이 우리가 만나야 할 ‘형제, 자매’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 존재가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예수님의 시선은 세상과는 ‘다른’ 곳을 향하십니다.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을 향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머무는 곳이 아니라 외면 받는 곳을 향하셨습니다. 관심이 갈 만한 곳이 아니라 오랫동안 잊혀져 있는 곳을 새롭게 바라보셨습니다. 사람들이 바라보길 원하는 곳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기 싫어하는 곳에 시선을 두십니다. 주연이 아니라 조연에 관심을 두십니다. 영웅이 아니라 ‘Unsung hero'에게 박수를 쳐 주십니다. 세상 풍조를 향한 시선이 아닙니다. 세상 유행을 향하는 시선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당연하다는 듯 생각하며 고정된 시선에 신선한 변화를 요구 하십니다.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바라볼 수 있는 더 많은 것들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것은 좁은 시선이 아니라 넓은 시선이기 때문입니다. 갇혀 있는 시선이 아니라 열린 시선입니다. 현재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을 내다 볼 줄 아는 시선이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님의 ‘다른 시선’ 때문에 가장 많은 혜택을 본 이들이 바로 ‘제자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런 제자들이 세상과는 ‘다른 시선’을 선택한 교회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그 ‘다른 시선’을 베드로와 요한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실로 교회는 예수님이 이미 보여주신 이 3가지 시선을 반드시 가져야 합니다. ‘다른 시선을 가진 교회’가 되기 위하여 먼저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가지고, 어떠한 편견과 선입견과 고정관념 없이 ‘사람’을 ‘속사람’ 그대로 바라보는 시선을 가져야 하며, 세상에는 없는, 세상과는 다른 시선을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순간, ‘사람’이 아니라 ‘물질’에 시선을 두는 순간, 세상과 동일한 시선을 가지는 순간,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교회의 세속화’는 바로 이 틀린 시선을 통해 빠르게 진행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틀린 시선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시선’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와 요한은 이 다른 시선을 가지고 40년이 넘도록 절망과 암흑의 시간을 보내던, 외면 받고 있던, 한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킵니다. 이것이 교회가 된 베드로와 요한이 할 일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처럼 교회가 된 이들은 이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변화는 ‘시선’의 변화에서 시작됩니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것을 보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시선을 가지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그리스도인 여러분, 다시 한 번 간절히 호소하며 권면합니다. 이제 세상을 향하던 눈을 하나님께 돌려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이 바라보는 한 사람에게 시선을 향해야 할 때입니다. 세상과 동일한 시선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는 없었던, 세상과는 다른 시선을 소유하게 되는 진짜 교회가 되시길 간절히 소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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