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망(迷妄)
김 길수
핸드폰의 모닝콜이 울리자, 나는 여느 때와 달리 잽싸게 일어나 소리를 죽였다. 매일 정해진 시각에 모닝콜이 울리지만, 몇 번씩이나 울린 후에야 겨우 일어나 끄고는 했었는데…, 오늘은 웬 일? 하며 스스로 놀라는 순간, 어제 일이 퍼뜩 생각났다. 한줄기 찬바람이 휙 지나가듯 가슴이 서늘해진다.
‘어쩌다가 이런 일이…?’ 나는 다시 뒤로 벌렁 드러누우며 막연한 불안감으로 푸우! 한숨을 내쉬었다. 날이 새는 시간이라 창밖은 훤해 보여도 아직 방안은 깜깜하다. 새벽 걷기운동을 가기위해 모닝콜을 설정해놓았지만, 오늘은 기동조차하기가 싫다. 하지만 다음순간 심한 갈증을 느꼈다. 엊저녁에 친구들과 마신 술 탓이다. 어쩔 수없이 일어나 더듬거리며 주방으로 나가 냉수 한 잔을 들이킨다.
어둠이 걷혀감에 따라 어제 낮의 상황도 촘촘하게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생각이 점차 명료해지면서 조금 전의 불안감 대신 설마 별일이야 있으려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설령 6개월 후 그동안 결제한 금액을 일시에 몫 돈으로 찾을지라도, 앞으로 반년동안이나 매달 꼬박꼬박 빚 갚듯이 해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휑한 기분은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엊저녁 친구들의 이야기까지 생각나자 스스로도 자제할 수 없는 한숨이 푸우! 하고 터져 나왔다.
그러니까 바로 어제 오전! 컴퓨터 앞에 앉아 옛날 시골학교동기모임 카페에 들어가 이것저것 뒤적이며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저! 민경식 선생님! 여긴 풍성미디어 주식회사입니다. 저는 최영택부장이고요.”
“……뭐라고?”
미처 말도 꺼내기 전 상대의 음성이 이어졌다.
“선생님께 오늘 중요한 말씀을 드리려고 전화 드렸습니다. 고객서비스차원에서 선생님이 제기해왔던 요구사항을 해결해 드리려고…!”
나는 이미 지난 수년간 시달려 온 일이라, 대뜸 목소리를 높였다.
“아! 그 일이라면 더 이상 얘기할 필요도 없어. 전화 끊어요.”
하지만 전화벨이 금방 다시 울렸다. 전에 없던 일이다. 전에는 한 번 전화를 끊고 나면 상당기간이 지난 후, 이전과는 다른 전화번호로 다시 걸려오곤 했었다.
순간 나는 어, 이것 봐라! 싶었지만, 또다시 전화기에다 같은 소리를 내지르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조금 후 세 번째로 또다시 휴대폰이 울렸다. 나는 홧김에 그냥 끊어버리려고 했으나, 얼핏 본 액정속의 번호가 이전과는 달랐기에, 다른 전화로 알고 전화기를 귀로 가져갔다.
“선생님! 귀찮지만 오해마시고 조금만 제 얘기 들어보세요. 우리 회사 이미지도 있고 해서 과거에 잘못된 것을 바르게 고쳐드리려고 전화 드렸습니다.”
받고 보니 상대방은 조금 전 그 사람이다. 기분이 상했지만 기왕에 이렇게 돼버린 것 이야기나 들어보자! 싶어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상대방도 이쪽의 생각을 읽은 듯 40대 정도의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선생님은 우리 회사 영어회화학습교재를 3년간 구입 계약하셨습니다. 그런데 1년분 대금만 납부하시고는 계약해제도 안된 상태에서 그만두셨습니다. 그동안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이는 당초계약위반입니다. 당연히 위약금을 무셔야함에도, 선생님께서는 처음부터 3년 약정이 아니었다는 주장만 하고 계십니다.”
“그게 맞는 얘기라니까!” 듣고 있던 나는 그동안 수십 번 되풀이 해 온 주장이었기에 잔뜩 짜증이 섞인 대답을 내뱉었다.
“선생님! 이 부분은 아무래도 선생님께서 잘못 이해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당시의 녹음내용도 분명히 그렇게 되어있으니까요.”
“그러니까 계약할 때 나와 통화했던 그 여직원을 바꿔! 누굴 치매 걸린 노인쯤으로 생각하나? 내 그 직원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으니까.”
“선생님! 그래서 저희들은 선생님과 우리 직원 간에 그동안 오고간 수십 차례의 통화내용을 일일이 다시 분석해보았습니다. 그 결과 선생님은 설사 3년간 약정을 하셨더라도 해약하실 권리가 있다는 점을 인정해 드리기로 했습니다. 우리직원이 무리하게 강요했다싶은 정황도 없지 않고, 또 나머지 2년 치는 교재도 일부 안 받으신 것이 확인되니까요. 그래서 처음부터 계약해제조치를 해 드리려고 합니다.”
“어떻게 한다고?”
“선생님 요구대로 계약해제 해드리고, 그동안 납부하신 구매대금 전액에다 이자까지 얹어서 환불해드리기로 했다는 말씀입니다.”
순간 나는 상대방의 이전과는 정반대의 이야기에 풋! 하고 헛웃음이 터졌다. ‘하다하다 별 해괴한 소리를 다하는구나! 돈을 독촉하다 안 되니까 오히려 돌려주겠다고?’ 그러자 갑자기 ‘이거 참 재미있구나!’ 싶은 생각이 든 것이다.
“나를 아주 바지저고리로 보는가봐!”
나는 바람 든 사람처럼 허허 웃으며 상대방을 힐난했다. 하지만 상대방은 잘 못 알아들었는지 진지하게 반문했다.
“선생님 바지 뭐라고요? “
“아! 그저 재미있다 그 말이네. 그래 또 이야기 더 해보라고 허허허”
정말 점입가경이다! 싶어 연방 실소가 터져 나왔다.
“선생님! 제 말씀 절대 농담으로 듣지 마세요. 그러니까 선생님께서 계약 첫 해 결제해주셨던 대금을 전액 환불해드리겠다는 말씀입니다.”
상대방은 나의 비꼬는 말투에도 동요하지 않고 신중하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뭐라고? 지난 몇 년 동안이나 온갖 독설로 속을 뒤집어놓고는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한다고?”
내가 웃음을 거두며 진지하게 큰 소리로 대꾸했다. 그러자 상대방은 나의 진지한 대꾸에 오히려 힘을 얻은 듯 빠르게 설명을 이어갔다.
“바로 그 점입니다. 당연히 선생님도 의아하게 생각하시겠지요. 하지만 방법은 간단합니다. 그 방법은 선생님께서 해약한 몫을 다른 사람에게 이전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 선생님이 해약한 몫을 다른 사람이 고스란히 넘겨받는 방식이므로, 회사에서도 손해 볼 일이 없습니다. 거기다가 무엇보다 금년이 우리 회사 창립 60주년입니다. 이를 자축하는 의미에서 그동안 제기돼 온 각종분쟁들을 가급적 고객 편에 서서 깨끗이 해결함으로써 회사 이미지도 개선하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마치 원고를 읽듯 빠르게 설명하는 상대방의 말을 들으며 머리를 굴렸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믿어? “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어? 내가 지금 무슨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하고 있나? 싶어 이를 스스로 부정이라도 하듯 심하게 어깃장을 놓았다.
“당신들이 자축을 하든 말든 내겐 상관없어. 난 이미 해약한 것이니,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마시오. 괜히 시간낭비니까.”
그러자 잠시 뜸을 들이던 상대방은 은근한 협박조로 나왔다.
“선생님! 거듭 말씀드리지만, 금년이 우리 회사 창립 6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우리회사제품을 이용하셨으나 선생님처럼 부득이하게 해약을 원하는 분들을 위해 어렵게 대체희망자를 찾았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에겐 아주 희소식이라 생각해 연락드렸는데, 말씀을 그렇게 하시면 어떡합니까? 정 그러시다면 선생님 뜻대로 하십시오. 대신 우리도 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선생님을 상대로 그동안 미뤄왔던 법적절차를 진행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최대한 성의를 보였으니까…. 이젠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습니다. 그건 충분히 알고 계시겠지요?”
“알았어. 당신들 맘대로 해보라니까.”
그리고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전화는 끊었지만 기분은 찜찜했다. 이게 얼마나 오래되고 끈질긴 승강이인가? 마치 거머리처럼 지긋지긋하게 달라붙는 데 진절머리가 난다. 도대체 해결방법이 뭐란 말인가?
‘그동안 싹 무시해왔던 일인데… 또 이렇게?’ 정말 황당한 마음이 들어 곁에 있다면 한 대 쥐어박아버리고 싶다. 도무지 말도 안 된다 싶은 일이 내 일상에 이렇게 끼어들다니…? 그저 황당하고 씁쓰레한 기분뿐이다. 더욱이 정말 법적분쟁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승패를 떠나서 이건 또 얼마나 복잡하고 귀찮은 일이 될 것인가? 거기다가 자칫 아내나 아이들에게도 알려질 수도 있는 일이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어휴! 날벼락이 따로 없구나! 싶은 생각으로 망연해졌다.
하지만 나는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놈들이 전과 같이 괜히 협박 한 번 해 보는 거겠지! 하며 애써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기로 했다. 추심은 또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 하는 거겠지! 하고.
그럼에도 왠지 제대로 진정이 되지 않았다. 자꾸만 께름칙한 게, 한참동안 이것저것 생각을 더듬던 중, 문득 방금 전의 전화내용이 새삼 궁금해졌다. 그러자 무슨 조화인지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 것인가? 어쩜 거짓말이 아닐지도 몰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사실이라면? 정말 그렇다면? 괜히 나만 또 손해 보는 거 아닌가?’
그러자 조급한 생각이 몰려왔다. 자칫 기회를 놓쳐버리는 건 아닐까? 그래서 곧바로 핸드폰에 찍힌 회사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간다. 전 같으면 ‘수신할 수 없는 번호’라는 멘트가 나왔었는데 신호음이 간다는 건 전적으로 거짓은 아니구나! 싶기도 했다.
“이야기 도중에 전화를 왜 끊어버리십니까?”
전화를 받은 상대방은 분명 조금 전 그 사람이었다. 나는 거두절미하고 다짜고짜 최대한 퉁명스럽고 위압적인 음성으로 물었다.
“갑자기 이렇게 가당찮은 미끼를 던지는 이유가 뭐요?”
“선생님! 미끼라니요. 잘못된 걸 바로잡겠다는 우리 회사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그동안 실적 올리겠다고 계약을 강요했던 전례가 많았던 게 사실입니다. 이런 구태의연한 판매방식으로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요즘 시대에 살아남을 수가 없거든요. 두말할 것 없이 동종업계 1위를 자랑하는 우리 회사의 이미지만 나빠지고 있습니다. 생각 밖으로 계약과 관련된 분쟁이 많이 발생하고 있거든요”
나는 갑자기 참! 기특한 회사도 다 있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머릿속으로는 그동안 새겨왔던 오랜 불신을 넘어, ‘완전한 거짓말이나 사기는 아닐지도 몰라.’ 하는 한 가닥 믿음이 싹을 내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요?”
“선생님께서는 이미 1년분 교재대금을 완납하셨습니다. 그래서 남은 2년분 대금을 납부해주시면, 이 금액에다 이미 결제한 1년분 대금과 그 대금의 이자까지 합쳐 총 3년분 대금전액을 일시금으로 반환해드리겠습니다.”
“아니 정말로 분쟁을 해결하겠다면, 아무 조건 없이 내가 원하는 계약해제에 동의해주면 될 일이지, 또 다시 무슨? 이상한 계산방법이네?”
나는 확인하듯 한 번 더 눙쳐보았다.
“선생님 지금까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선생님과 완전한 계약이 이루어져야 그 계약 상태를 인수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온전히 넘겨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인수 받는 사람으로부터 대금을 수령하여 선생님께 고스란히 돌려드릴 수가 있고요. 기존의 계약사항을 아무 이유도 없이 없애버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나는 빠르게 생각을 해보았다.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꼭지가 꼭 들어맞는 말인지도 쉽게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한다는 말이요?”
결코 낚싯줄에 걸려서는 안 된다. 하지만 미끼에서 단호하게 헤어나지 못하는 스스로가 우려스럽다.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스스로도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선생님께서 일시불이든 6개월 할부든 결제가 완료되면 즉시 환불해드리겠습니다.”
상대방은 망설임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 순간, 나는 할부도 가능하다는 말은, 계약상태가 장기간 지속되어도 좋다는 의미에서 더욱 신뢰도를 높이는 게 아닐까? 싶었다. 만약 사기나 거짓이라면 당연히 단기간에 거래관계를 끝내버리려고 할 게 상식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신용카드로 2년분 결제를 할부로 해주시면 곧바로 해당교재를 3일 내에 탁송해드립니다. 선생님께서는 받은 교재의 포장도 풀지 마시고 그냥 보관하세요. 포장을 풀어버리면, 6개월 후 반품이 곤란할 수도 있으니까요. 동시에 환불 보증서도 보내드리겠습니다. 대금이 완납되면 해약과 동시에 대금전액을 환불해드리겠다는 보증내용입니다. 선생님께서는 6개월 후에 교재를 반품하시고 대금을 수령하시면 됩니다.”
나는 긴가민가하면서 명쾌한 판단이 서지 않았다. 다만, 원만한 해약을 위해 포장지도 풀지 마라. 지불보증서도 보내주겠다는 말에 어딘가 신빙성이 느껴지기도 했다.
“당신의 이름과 직책이 뭐라고 했죠?”
“저는 최영택이라 하고, 풍성미디어주식회사 감사담당부장입니다. 그동안 선생님께 계속 전화를 드렸던 부서는 영업파트였고, 여기는 감사실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문의사항이나 애로사항 있으시면 저의 전화번호를 꼭 기억하셨다가 제게로 연락 주십시오.”
“……?”
나는 쉽게 정리되지 않는 머릿속이 스스로가 생각해도 안타까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이라는 것만 뚜렷이 생각났다.
“선생님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회사의 중견간부를 지낸 선생님께 감히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리고 계약할 때 같은 회사 분들도 함께 계약하시지 않았습니까?”
“그야 그랬지요. 그러나…?”
“아이쿠 선생님! 선생님 같은 분에게 어떻게 되지도 않을 일을 감히 말씀드리겠어요? 필요하시면 다른 옛 동료들에게 연락도 해 보시고요.”
하지만 옛 동료들에게 다시 묻는 일도 왠지 체통이 서지 않는 일이기에, 쑥스럽고 부끄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그럼 결제는 어떻게…?”
마침내 나의 입에서는 내 생각보다 앞선, 스스로 우려했던 말이 튀어나와버렸다.
“신용카드로 하시면 됩니다. 우리 회사에서도 가급적 빨리 정리해드리겠습니다. 선생님 편리한대로. 6개월간 분할 납부도 가능하고요.”
나는 빠르게 계산을 해 보았다. 앞으로 6개월간 월 50만 원 정도를 납부하면 6개월 후 원금에다 이미 납부한 1년분 금액까지 전액을 받을 수 있다. 채무상환이 아니라 괜찮은 투자가 되지 않을까?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 결제를 해보자! 까짓 거! 분명 손해 볼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는 상대방이 묻는 대로 카드번호와 유효기간을 알려주었다. 해묵은 골칫거리 하나를, 그것도 썩 괜찮은 방법으로 해결하는, 자발적인 결제라고 애써 생각했다. 강요받아 한다면 얼마나 창피하고 바보스러운 일일까? 하는 생각까지 하면서.
오후에는 고향친구들과의 저녁모임에 참석차 집을 나섰다. 옆 동네에 살고 있는 해식이와 연락하여 온천천을 함께 걸었다.
“이제 완연한 봄이네.” 해식이가 걸음에 맞춰 앞뒤로 손바닥을 딱딱 치며 말했다.
“그렇지. 벚꽃이 질 때는 아까웠는데, 새순이 나오니 더 싱그러워 보인다. 참말로 멋진 계절이다. 참 세월이 아깝지 뭐!” 나는 묵은 숙제하나를 잘 해결했다는 오전일도 저처럼 싱그럽게 풀렸지! 하는 생각을 하며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는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그나저나 지난주 여행은 잘 다녀왔어? 재미가 어땠나?”
“재미? 물론 재미야 있었지. 오랜만에 덕양산 바람 한번 제대로 쐬고 왔지. 그런데 다녀온 후유증들이 심해” 해식이는 능글능글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왜? 무슨 일이 있었나?”
“무슨 일이 아니라…! 원래 패키지여행이 다 그렇듯이, 가는 곳마다 무슨 특산품이다, 건강기능식품이다 하며 물건 판매하는데 너무 신경 쓰더라고. 우리도, 같이 간 성규랑 민수 셋이 모두가…, 글쎄 하도 약효가 좋다고 선전하는 바람에 모두들 아내 생각한답시고 농원에서 직접 만들었다는 건강효소식품이란 걸 한 박스씩 사왔거든”
“그래서?”
“엉터리 제품을, 시키지도 않은 걸 사왔다며 집집마다 난리가 난 거야. 괜히 마누라들 위한답시고 난생처음 해본 일인데 그게 아니라는 거야?”
“제품이 왜 어땠는데?”
“우리 집사람 말로는 제대로 된 정품일 리가 없다 카네. 원산지도 속이고, 양도 엉터리라며 방송에서도 자주 나왔다는데…, 남자들이 어찌 그리 팔랑개비 귀들이냐? 고 하면서.”
“그래…!”
“경식이 자네도 같이 안 간 게 다행이야. 아마도 갔었다면 틀림없이 샀을 건데. 그 현장에서는 안사고는 도무지 못 배기겠더라고.”
“모른 체 해야지. 낯이 간지러워도”
“자네는 안 당해봤으니까. 괜히 큰소리치지 말게! 그게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 나도 처음엔 ‘나만 안사면 그만이지…’ 했는데. 현장에서는 거의 강매하다시피 하는 것 같았고, 거기다 어찌나 서비스가 많은지? 약도 공짜로 몇 컵씩 주질 않나? 하여튼 도저히 그냥 못 넘길 수가 없더라니까. 게다가 모두에게 선물까지도 쥐어주니…!”
“나만 빼놓고 모두들 얼씨구나 몰려가더니 잘 했다! 잘했어!”
“해약하라고 막 난리던데 그게 되겠나? 몇 달 동안 할부로 갚아 나갈 일도 그렇고 좀 갑갑해지네. 정말 괜히 샀다 싶어…!”
나는 갑자기 오전일이 연상되며 심각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너 금방 해약이라 했나?”
“그래 해약. 영감쟁이들이 이랬다저랬다 한다고 욕이야 먹겠지만…! 그런데 왜 갑자기 그리 심각해지는 데?”
“아니? 그런데 그 해약이 쉽게 되는 건가?”
“모르지. 쉽게 될 리가 있겠어? 집사람이 그래 싸니까 해보는 소리지. 나도 몰라.”
친구들과의 모임에서도 해식이와 성규, 그리고 민수친구의 건강식품구매사건이 오늘의 주화제가 되고 말았다. 술기운이 약간씩 오르며 갑론을박했지만 결론도 정답도 없었다. 다만, 노인복지관에 나가 시간을 보내면서 자원봉사활동도 겸하고 있다는 장호친구는 ‘체면치례 좋아하거나 어설프게 아는 친구들이 주로 많이 당한다.’는 원인분석까지 해가며, 그리고 복지관에서 들은 이런 저런 사례들을 특유의 입담으로 실감나게 들려주었다.
나는 이런 이야기에 팽팽한 긴장감과 근거 없는 반발심 같은 게 돋아남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이런 일과 오늘 오전에 내가 치른 일은, 내용도 형식도 완전히 다른 일이라 생각했다. 그리고는 친구들이 모두 들으라는 듯 큰 소리를 뻥 치고 말았다.
“모두 욕심 버리고 냉정하게 따져보면 당할 리가 있겠나!”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면서도 별로 걱정은 되지 않았다. 문득 혹시라도? 하는 기분이 전혀 없진 않았지만, 설마…!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려고 노력했다.
그 대신 언제나 그랬듯이 애시 당초부터 계약이 잘못됐었다는 후회는 어김없이 되살아났다. 하지만 이미 지난 일이라는 체념에다 약간 마신 술기운 탓인지, 당시의 잘못을 오늘로써 상큼하게 청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으로 기분이 들뜨기도 했다.
당시 근무하던 회사에서는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장기근속직원들에게 복지후생차원에서 자기계발비용이라는 걸 지원했다.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그때 나는 무슨 바람이 불었던지 외국어 공부를 선택했다.
하지만 이미 오십대 중반의 정년을 앞둔 나이였다. 여유시간도 많고 건강상태도 좋긴 했지만, 새삼 외국어공부를 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늦은 나이였다. 그럼에도 학창시절 영어에 관심이 많았다는 오랜 기억에다, 퇴직 후 해외 배낭여행이라도 가봐야지! 하는 생각에서 이걸 선택했던 것이다.
때마침 풍성미디어사의 회화공부교재가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인터넷강의도 받을 수 있고, 수시 지도 강사와 직접 전화를 이용하여 회화중심으로 통신강의도 받을 수 있어 공부시간 내기가 힘든 직장인들에게는 획기적인 방법이라 했고,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그래서 같은 사무실의 직원들 몇몇과 함께 계약을 했었는데, 이 사람들이야 모두 실무에도 외국어가 필요한 2~30대의 젊은이들이었고 나 같은 장년층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비록 나이는 먹었지만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참여를 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남들도 웃을 일이고, 나 자신도 새삼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리고는 대금을 성실하게 납부하며 공부도 하느라 했다. 하지만 작심삼일에 불과했다. 그리고 교재는 1년 치의 대금도 채 완납되기 전에 이미 책장 귀퉁이에 처박혀 먼지를 뒤집어쓰고 말았다. 이윽고 어학공부도 계약사항도 잊어버렸고, 오래지않아 퇴직도 했다.
퇴직을 하고 1년쯤 지났을까? 나로서는 아주 기분 나쁜 전화를 받았다.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와서는 3년 약정한 교재대금을 왜 내지 않느냐? 며 위약금을 내라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소송을 하겠다면서. 너무도 당당하게 나왔기에, 순간 내가 무슨 큰 죄를 지었나? 싶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아닌가. 너무도 황당하고 막돼먹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거칠게 항의도 해봤지만 상대방도 지지 않았다. 계약당시 전화내용이 모두 녹음되어 있으니 증거자료도 충분하다는 데는 할 말이 없었다.
나는 그렇다면 왜 그동안 아무 이의제기도 없었느냐? 고 따졌다. 그러자 상대방은 그동안 수차례 연락을 취했지만, 연결이 안 되었을 뿐이고, 법적으로 시효문제도 없다고 했다. 처음엔 정말 법적인 분쟁이 될 것인가? 를 두고 전전긍긍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찌해 볼 방편이 없어 직접 찾아가 따져보려고 주소를 물어보기도 했다. 그랬더니 서울 어디라며 당당히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지방에서 서울까지 일부러 찾아가는 것도 바보 같은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그냥 내팽개치다시피 해버렸다.
한번은 하도 황당한 기분이 들어 걸려왔던 곳으로 먼저 전화를 해 보았다. 그랬더니 ‘지금 거신 번호는 발신전용이므로 수신자는 전화를 받을 수 없다’ 는 멘트만 흘러나왔다.
시간이 흐르면서 처음의 충격은 차츰 완화되어갔다. 그리고는 당신네들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는 식의 배짱이 생겨났다. 잊을만하면 걸려오는 상대방의 협박성 독촉전화에도 차츰 내성이 생겨 아예 무시해버렸다. 그래서 전화가 걸려오면 애초부터 받지 않거나 받았더라도 큰소리로 되받아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럼에도 전화는 한 달에 한두 번, 아니면 두세 달에 한 번 식으로 번호를 바꿔가며 귀찮게 했다.
한때는 귀찮은 나머지 경찰에 수사의뢰를 해보자는 생각으로 사이버 수사대라는 곳에 상담 전화까지 해보았다. 하지만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난 경찰관도 결국 내가 예상했던 답변 이상의 말은 해주지 못했다.
“좀 더 자세한 사항이 확인되면 경찰서로 신고해주세요. 구체적인 피해가 생긴 것도 아니니 좀 더 지켜보자” 고.
그랬던 전화가 최근 1년여 동안은 오지 않았다. 겉으로야 태연한 척했지만, 항상 뭐가 목에 걸린 듯 께름칙했던 것도 사실이다.
‘지쳐버린 탓 일거야. 그래서 아예 포기하고 만 것이겠지…!’ 그러면서도 나는 상대방이 포기했다기보다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도 내가 말려들지 않으니까 사기나 억지강매 할 생각을 아예 접은 탓 일거라는 아전인수식 생각도 해 보았다.
그랬었는데…! 덜 나은 상처가 덧나듯,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불쑥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오전의 일이 떠오르자 정말 문제가 없을까? 하는 옅은 불안감이 일어났다. 불과 몇 시간 전, 오랜 동안 진드기처럼 애를 먹이던 걱정거리가 예상 밖의 좋은 방향으로 해결이 되는구나! 싶어, 시원했던 기분과는 사뭇 다른 걱정거리 또한 머리 한 곳에 똬리를 트는 것 같았다.
다음날 오후, 약속한대로 교재가 득달같이 날아왔다. 제법 커다란 사과궤짝만한 부피였다. 아내는 무슨 택배가 왔느냐? 고 물으며 이리저리 발신처와 주소를 확인했다. 나는 물품을 서재로 옮기며, 계약이 잘못 된 것이라 반송할거라고 얼버무렸다.
“계약이 잘못되었다고요? 또 책인가 보네! 계약이 잘못 되었는데 왜 보내왔어요?”
“처음 계약했다가 나중에 해약하기로 했거든. 그러니까 포장도 안 뜯고 있다가 그냥 돌려보낼 거야” 스스로도 횡설수설이구나! 싶었지만 물러설 수도 없었다.
“무슨? 해약하기로 하는 게 어디 있어요? 해약이면 해약이고, 아니면 아닌 거지.”
“해약한다니까. 내가 바로 돌려보낼 거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또. 뭘…? 괜히 생활비도 빠듯한데 비싼 돈 들이지 마시고 해약하세요. 그 습관 아직도 못 버리셨나?”
나의 단호한 얘기에도 아내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애써 참는 모습이 역력했다. 젊은 시절부터 온갖 물건들을 할부 구입하여 아내와 티격태격했던 수많은 기억들이 두서없이 되살아났다.
‘해약이라…? 그게 가능할까?’ 나는 교재박스를 책장구석으로 밀어 넣으며 생각했다. 친구들과 약속이나 한 듯 해약이라는 말이 아내에게서도 나오자, 스스로 뭘 착각했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해약하려고 그동안 싸워온 걸 생각하자 안 될 거라는 절망감이 앞섰다. 동시에 아내의 현실적인 상환문제 제기는 나를 새삼 움찔하게 만들었다. 앞으로 대금을 어떻게 납부할 것인가?
두 사람이 겨우 살아갈 만치의 수입이 전부인 상태에서 어떻게 처리하지? 아내에게 사실대로 얘기하고 도움을 청해? 하지만 그건 안 될 말이다. 그러다가 분가한 아이들에게까지 이 사실이 알려질 거라는데 생각이 이르지 어휴! 그건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다.
‘어! 정말…? 어떡하지?’ 최대한 개인용돈을 줄이고, 아르바이트라도 해야지! 하지만 나이 든 은퇴자가, 회사에서도 평생 기술과는 무관한 총무나 회계 일만 해온 사람에게, 단순한 아르바이트도 쉬울 리 없다. 정 안되면 아내 몰래 융자라도 내볼까! 하는 궁리로 머리만 점점 복잡해져왔다.
사람의 마음이 이리도 흔들릴 수 있는가? 어제까지는 제법 굳건하게 버틸 것 같던 생각이 택배를 받고 아내의 핀잔까지 듣게 되자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 일도 과욕 때문에 또 큰 실수를 한 게 아닌가! 싶은 쪽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이틀 뒤에 환불보증서라는 게 날아왔다. 그것도 아내에게 들키지 않는 게 상책이다 싶어 종일 기다리다가 잠시 외출한 사이에 아내가 수령해버렸다. 그리고 내용을 확인하고는 귀가하는 나에게 정말로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내밀었다. 그러나 말투는 의외로 조용했다.
“이 무슨 일이예요? 반품한다더니? 환불보증서는 또 뭔가요?”
나는 환불보증서를 뻔히 바라보았다. 진위야 알 수 없지만, 빨간 인주의 커다란 직인이 찍혀 있었다. 순간 ‘울며 겨자 먹기란 게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싶었고, 이제 별 수없이 체념하고, 아무리 힘이 들어도 6개월간 어떻게든 갚아나가야 하겠구나! 싶었다.
“설명하자면 엄청 복잡해요. 그러니 그냥 모른 체 하고 있어요.”
“모른 체 하라고요? 환불보증선가 뭔가 그걸 믿어요?”
“ ……?”
“참! 어리석기는? 그걸 어찌 믿고…? 또 그 돈 갚아나갈 자신은 있어요?”
아내는 조용했으나 싸늘한 말투로 정곡을 찔렀다. 그리고는 혼자 말처럼 이야기했다.
“다른 친구들은 마누라 줄 거라고 보약을 사왔다던데? 차라리 그런 거라면 엉터리라도 또 모르겠네. 그 나이에 무슨 학습교재를 산다고…?”
나는 순간 아내가 친구들이 건강식품 사온 걸 어떻게 알았지 싶어 멍하게 바라봤다.
“뭘 그리 의아하게 생각해요. 해식씨 부인한테서 전화가 왔었는데. 아저씨도 보약 사왔느냐고? 그리고 해약할 수는 없을까? 하고. 묻더라니까.”
아마도 아내들끼리도 친구사이인지라 해식이의 아내가 집사람에게 나도 보약을 사 왔더냐? 고 물었던 것 같다.
“그것과 이게 같아?”
“다를 게 뭐 있나……? 그러고 보니 그날 당신 여행같이 안 간 게 천만다행이네. 만약 갔더라면 누구보다 앞장섰을 게 뻔한데.”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지. 내가 그리도…?”
“우리친구는 외국에서 사온 물건도 여행사를 통해 계약파기하고 반품을 하던데. 무슨 약점이 잡혀 반품도 못하는지…. 설마 반품 안 할 작정은 아니겠지요. 정 어려우면…! 그래, 정수애비한테라도 얘기해봐야겠다. 젊은 사람들이 이런 일은…!”
“그래 알았어! 반품한다니까. 그리고 정수애비한테 알릴 생각은 아예 말아! 늙은 애비가 또 쓸데없는 짓 했다고 할 테니까!”
나는 가뜩이나 불안감과 자괴심에 차 있던 차라 그랬는지 의외로 큰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리고는 머쓱한 기분을 얼버무리고자, 아내의 곱지 않은 시선을 의식하며. 외출한답시고 서둘러 다시 집을 나왔다. 집을 나오긴 했지만 막상 갈 곳이 없었다.
생각할수록 고약하게 꼬여간다 싶다. 퇴직한 지 벌써 십여 년이 가까워 오는데…! 풍요롭지는 못할지라도 최소한의 여유로운 노년을 기대했었는데…! 그마저 허락되지 않는 현실 앞에서 너무 무력하고 초라하구나! 싶어 울적해졌다.
‘전화해서 해약을 요구해보자! 안되면 체면불구하고 사정이라도 해보자!’ 맥없이 온천천변을 따라 걷던 내가 어느 순간, 걸음을 뚝! 멈췄다. 그리고는 얼른 해식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말이 그렇지 해약이 어디 쉽겠나? 나이든 사람들이 새삼 해약한다고 설치면 나이 값도 못한다고 할 것이고, 또 여행을 주선했던 성규한테도 미안하고 해서 그냥 세상공부 한 번 제대로 한 셈치고 넘어가기로 했네. 아내들도 이해해주겠지.”
해식이는 다급한 나의 속사정은 아랑곳없이 남의 얘기하듯 심드렁하게 이야기했다.
“그렇지! 나이 값도 해야지”
“그런데…! 경식이 자네, 갑자기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아니. 다른 친구얘긴데 상당히 복잡하고 긴 이야기야. 나중에 이야기하지”
“아무래도 그런 문제는 장호가 제일 많이 아는 것 같아. 매일 매일 사례들을 듣고 있으니까.”
“그래! 알았어.”
나는 떨떠름한 기분으로 전화를 끊었다. 지난번 친구들이 모였을 때 ‘괜한 체면이나 얄팍한 지식 믿다가 당하는 사례가 더 많다!’고 하던 장호친구의 말이 생각났다. 여기다가 마치 반론하듯 ‘욕심 안 부리고, 주의하면 절대 당할 리 없지!’라며 큰소리 쳤던 나의 말도 생각났다.
그건 결국 내 이야기가 돼버린 꼴이네? 순간 부끄러움이 전신을 휘감았다. 하지만 이내 부끄러움 보다 절박감이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아무런 잘못도 없는 내가 왜 이런 일에 휘말렸는지 새삼 기가 찼다.
하지만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듯, 혹시 비슷한 사례라도 있을까? 장호에게 한 번 물어보기라도 하자! 싶었다. 망설임 끝에 결국 다른 친구의 사례인양 꾸몄다.
전화상으로 듣고 있던 장호가 허허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간단하게 대답했다.
“허어. 그 친구 실수한 것 같은데. 한국소비자원에 가서 상담해보라고 하게나”
“소비자원? 소비자원이라! …그래, 알았네?”
눈앞에 보이진 않았지만, 왠지 장호가 고소해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한국 소비자원 P시 지사는 시청건물 안에 있었다. 이전에 들어보긴 했지만, 아예 나와는 무관한 곳으로 여겨왔던 곳이다. 이런 일도 과연 상담대상이 될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달리해 볼 방법도 없는지라, 용기를 냈다. 마침 내 나이와 비슷한 연령의 내방객 한 사람이 먼저 와 있었기에, 연유도 모르면서 약간의 편안함이 느껴졌다. 20대로 앳돼 보이는 여자직원이 내게 자리를 권하며 탁자 앞에 마주 앉았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순간 나는 어디부터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나? 하는 고민이 일었다.
“늙은이가 좀 애매한 짓을 했어요. 이 경우도 계약해제가 가능할 지 물어보려고…!”
“무슨 이야기든 말씀해보세요. 혹시 상품사기 같은 겁니까. 신분증을 좀 보여주시고요” 어려보이는 나이답지 않게 여유 있는 태도였다.
“그런 건 아니고, 통신상의 계약문제로…?” 나는 신분증을 보여주며 천천히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여직원은 간간히 메모를 해가며 진지하게 경청했다.
“교재는 언제 수령하셨고, 수령하신 교재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오늘이, 그러니까 8일째가 되네요. 아직 풀지도 않고 그대로 놔뒀어요.”
“잘 하셨습니다. 오늘 잘 오셨고요. 해약요건은 되는 것 같습니다만…!”
그 얘기를 듣자, 나는 갑자기 열패감으로 얼굴이 확 달아오름을 느꼈다. 아울러 그렇게도 어렵게 생각되던 답이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었구나! 하는 생각과 동시에 시원해야 할 상황임에도, 왠지 모를 갑갑함이 들어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이럴 때는 꼭 해약하실 건지, 어르신의 확실한 의사가 제일 중요합니다.”
순간 나는 여직원이 자신을 이랬다저랬다 하는 변덕에다 우유부단하기까지 한 사람으로 보는 것 같아 더욱 부끄러워졌다. 하기야 나이깨나 먹은 사람이 엊그제 계약해놓고 금방 해약운운하고 있으니 스스로도 당연한 이야기라 여겨졌다. 나는 마치 약점을 변명하듯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 그래요. 해약하겠습니다.”
“그러시다면 지금 바로 전화해서 해약하시겠다고 본론만 얘기하세요. 상대방이 거절하면 저에게 전화를 바꿔주시고요.”
나는 핸드폰으로 풍성미디어 계약부서 책임자를 찾았다. 상황설명과 함께 해약하겠다고 했다.
“해약은…? 지금 담당자가 없으니 나중에 다시 전화 주십시오.”
곁에서 통화내용을 듣고 있던 여직원이 잽싸게 전화기를 넘겨받았다.
“여기 P시 소비자원인데요. 고객께서 해약하시겠다고 합니다. 바로 해약해주셔야겠습니다.”
“네? 어디라고요…!!”
상대방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여직원은 다시 내게로 전화를 돌려주었다.
“내일 중으로 교재는 그대로 반품 할 테니 곧바로 해약해주세요.”
상대방은 알았다며 다른 이유를 대지 않았다.
나는 순간 어리둥절해졌다. 수년간을 괴롭혀 온 일의 내막이 이런 것이었나! 제법 세상물정을 안다고 자부해왔던 나로서는 뒤통수를 호되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만일 2~3일 후, 신용카드회사에 조회해보시고 환불조치가 되지 않으면 다시 전화 주세요. 여기 기록해놓았으니 회사에 독촉해드리겠습니다”
여직원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비로소 묵은 체증이 뚫리는 기분을 느끼며,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의문점을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계약당시 3년 약정을 했다고 우겨왔는데, 앞으로 다른 문제는 없겠지요?”
“걱정 마세요. 그건 그 사람들의 거짓말인 것 같습니다. 정말로 3년간 약정이 되어 있었다면 그동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받아갔지, 지금까지 이렇게 미적미적했을 리가 없어요. 진작 법적으로 조치를 취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제법 세상에 알려진 회사에서 어찌 이런 일을 저지를까?”
“아마도 대금결제업무를 담당하는 일은 다른 회사나 별도의 채권추심 전문 업체에서 할 거예요. 풍성미디어에서는 교재공급을 주로 하고요…!”
나는 하마터면 무릎을 탁! 하고 칠 뻔했다. 그동안 이런 구조를 몰랐구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수시로 전화번호가 바뀌고, 또 독촉하는 사람이 바뀐 이유를 비로소 알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동안 참 과똑똑이가 따로 없었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르신 참 대단하시네요? 그 연세에 공부하실 계획을 다 세우시고….”
나는 여직원의 인사말에 새삼 얼굴이 화끈했다. 허영과 과욕 때문이었다는 답변을 입속으로 우물거리며 어설픈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사무실을 걸어 나왔다. 안도감에 갑자기 다리의 힘이 확 풀리는 것 같았다.
“완전히 딴 세상을 살아온 것 같네! 헛된 욕심 때문에 미망(迷妄)에 사로잡혀 사리분별도 제대로 못하고…!”
나는 씁쓰레한 기분으로 지하철 계단을 터벅터벅 걸어 내려갔다. 끝.
첫댓글 3년후의 내모습, 아니 지금의 내 모습을 바로 보는 기분이다. 우리에게 소비자원이란 기구가 있고, 그런 기구를 운영해 주는 국가가 있음이 얼마나 다행인가!그나저나, 이 한 장면을 섬세하게 글로 그려준 온천의 자상함에 또 한번 큰 박수를 보냅니다. 이 글 한편으로, 한달 마음고생할 일 미리 방역한 친구들이 많을 터...
재미도 없는 글을 끝까지 읽어주셨네. 이 고마움을 어찌할꼬? 잘 지내고 계시고? 페이스북을 통해 활발한 활동상을 자주 읽고는 있네만 그때그때 답신도 못 올렸네.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