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재(困齋) 정개청(鄭介淸) 선생의 생애(生涯)와
역사적 고찰(考察)
선생의 자(字)는 의백(義伯)이요, 휘자(諱字)는 개청(介淸)이고, 호는 곤재(困齋), 시호(諡號)는 문청공(文淸公)으로 조선 11대왕 중종 23년 기축(서기1529년)생으로 한미(寒微)하고 가난했던 부친 세웅(世雄)과 모친 금성 라씨(錦城羅氏 : 고려재상 國英의 13대손) 사이에서 3형제 중 장남으로 나주 금성산하(錦城山下) 대곡동(大谷洞)에서 탄생(誕生)하시었다.
선생의 유년기(幼年期)의 기록은 별로 없지만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졒됐?英特)하였으나 가세(家勢)가 빈곤(貧困)하여 깊은 교육(敎育)을 받지 못 하다가 나이 15세가 넘어 17세에 이르는 사이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1487년_1546년) 선생님의 문하에 들어가 교육을 받아 이문(異聞)을 얻었고 (화담집에 秀弟子로 기록됨), 스스로 젊을 때부터 발분(發憤)하고 독실(篤實)하였으며, 두문독서(杜門讀書)하여 의리(義理)를 강구(講究)하고, 몸과 마음의 실행을 위주(爲主)하니 명리(名利)의 마당에 이르러서는 부귀영화를 잊어버린 채 그 취향과 취미가 세속(世俗)과 같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졗냅슴〈?세상 사람들이 과거(科擧)를 보아 벼슬길에 올라 어버이를 기쁘게 해드리는 것을 보고 과거공부(科擧工夫)에 몰두(沒頭)하여 초시(初試)에 여러 번 합격하기도 하였다. ?BR> 일찍이 사서(四書)를 읽어 정미(精微)한 것을 강구하여 의리 있는 바를 깨닫고 오로지 학문에 힘을 써 영주산(瀛洲山)의 절로 들어가, 절 북쪽의 한적한 곳에 흙담을 쌓아 움막집을 만들어 소학, 대학의 절목(節目)과 중용(中庸) 논어(論語) 맹자(孟子) 등 여러 책을 연구하고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을 습독(習讀)하였으며 천문과 역학(易學)의 오묘(奧妙)한 뜻을 해득함에 이르셨다. 선천(先天) 후천(後天)의 수(數)를 정밀(精密)히 공부하여 깊은 뜻을 강구 아니함이 없었으며 손으로 계산하면서 입으로 분별하여도 서로 부합되지 않음이 없었다. 또한 주자대전(朱子大全)을 섭렵(攝獵)함으로써 선생은
성리학(性理學:新儒學)에 대한 깊고 깊은 새로운 연구와 발명으로 우리나라의 성리학을 정립(挻立) 시킨 대학자로써 명성(名聲)이 높았던 것이다.
곤재(困齋) 선생은 중년(서기1565년경:선생37세)에 무안현(務安縣) 엄담(淹潭) 윤암(輪巖, 현 全南 咸平郡 嚴多面 濟洞)에 정착(定着)하여 부모님과 더불어 대청(大淸), 응청(應淸), 이청(以淸) 형제들과 현재의 제동부락을 이루게 되었으며 집안이 가난한 형편에도 부모님에 대한 공양(供養)이 극진(極盡)하였으며 존비장유(尊卑長幼)의 차례를 엄히 했고, 애경사(哀慶事)에는 주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에 따랐으며 검소(儉素)한 생활을 실천(實踐)하여 모든 행실이 깔끔하고 근엄(謹嚴)하여 선생님의 인품과 학문을 남쪽의 선비들이 흠모(欽慕)하고 추종(追從)하였으며, 오직 학문(學問)과 후학(後學) 양성(養成)에 전심전력(全心全力)하면서 사대부(士大夫)집안으로 규범(規範)을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선생께서 윤암(輪巖)에 정사(精舍)를 짓고 강도(講道)를 하니 많은 선비들이 모여 들어 400여명에 이르렀는데 그 중에서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 현달(顯達)한 제자로는
라덕명(羅德明:나주.의금부 도사), 라덕준(羅德峻:나주.현감), 라덕윤(羅德潤) :나주.감찰), 안중묵(安重默 :보성.직장), 나덕원(羅德元:나주문평.현감), 최홍우(崔弘宇:화순.선비), 오익창(吳益昌:무장.선비), 조수홍(曺守弘:화순,선비), 배명(裵蓂:무안,선비), 유양(柳養:나주.유몽정牧使의 조카), 정식(鄭湜:전북무장.현감), 송제민(宋濟民:광주.호는 해광), 라덕현(羅德顯:나주.선비), 조봉서(曺鳳瑞:나주.선비), 윤제(尹濟:함평엄다), 정인(鄭寅), 김세규(金世奎). 나덕수(羅德修:나주.선비), 정지성(鄭之誠:예조좌랑), 안기현(安基賢:보성), 멀리서는 남이공(南以恭:좌의정), 화천정(花川正) 이수붕(李壽鵬:종실.선조의 조카)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제자(弟子)들이 모여들었는데 각자의 자질과 성품에 따라 귀로
듣고 마음으로 알게 한 후에야 가르침을 그쳤다는 선생의 교육적 지도이념(指導理念)을 높이 평가(平價)하지 아니할 수 없다.
우득록(愚得錄)에 의한 선생의 학문을 대략 살펴보면 겸허설(謙虛設 : 군자의 겸손함을 논한 것으로 겸허하면 덕이 날로 새로워지고 군자는 겸허를 하여 다른 사람의 겸허를 받아야 한다는 설), 선악개천리설(善惡皆天理說 : 선과 악이 모두 천리라는 설), 선소악다설(善小惡多說). 입지론(立志論 : 의지를 세워야 한다는 설), 내외 공부설(內外 工夫設 : 내외공부를 해야 한다는 설 ; 경으로 내심을 정직하게 하고 의리로 외면을 방정(方正)하게 하여 인격을 함양하는 학문에 힘 쓰라 함), 논 인군지학(論仁君之學 : 임금의 학문을 논함). 이기설(理氣說 : 理는 氣가 없이 理가 될 수 없고 氣는 理가 없이 氣가 될 수 없다는 설을 논하여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하나가 된다고 불가분의 形體라 함 : 理氣 一體說), 막론관휘설(莫論官휘說 ; 벼슬을 아름답다 하지 말라는 설), 동한절의 진송청담 소상부동설(東漢節義 晋宋淸淡 所尙不動說 : 동한과 진송이 숭상한 바가 같이 않다는 설), 비례물시설(非禮勿視說 : 예가 아니면 보지 말라는 설), 심신상수설(心身相須說 : 몸과 마음이 서로 의존한다는 설), 논 속상(論俗常 : 풍속을 숭상함을 논함) 등 도학사상(道學思想)을 중심으로 수많은 학설을 남겼으며 역경(易經)에서 괘효(卦爻)와 단상(彖常)의 의의(意義)가 구비(具備)되어 64괘를 이루는 이치(理致)는 물론 수리(數理)를 부연(敷衍)하여 천만가지 일에 적응(適應)함을 밝히고 소씨(邵氏)의 난해(難解)한 황극경세(皇極經世)의 수리(數理)의 원리를 파악하여 일반학자 들이 알기 어려웠던 점을 풀이하기도 하였다. 또한 천문, 지리, 전진법, 형이상학 등 어느 학문에 통달(通達)하지 아니함이 없었으며 말년에 태극무(太極舞)라는 춤을 만들어 제자들에게 가르쳤으며 거문고를 만들어 책을 읽고 난 한가한 틈에 소리가 맑고 장엄(莊嚴)한 거문고를 손수 탔다는
젿綏舅막?보아 인생삼락(人生三樂)을 철저히 지키려는 삶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젊어서는 학문을 위한 준비에 게을리 하지 않고 중년에는 스스로 가치관(價値觀)을 실천(實踐)하여 호남 사림(士林)의 한 산맥(山脈)을 이루었으니 곤재(困齋)의 산은 골이 깊고 봉우리가 높았던 것이다.
조선왕조 실록(선조실록 8권 선조7년 7월 21일)에 의하면 전라감사 박 민헌이 포상(褒賞)인물(人物)을 임금님께 추천함에 있어 "정개청은 사람 됨이 치밀(緻密)하고 독실(篤實)한 뜻으로 학문을 하고 가세(家勢)가 지극히 청빈(淸貧)하지만 일직이 한 걸음도 망령(妄靈)되이 행하지 않고 조금도 누구에게 간청(奸請)한 적이 없었으며 집에서는 어버이를 지극(至極)히 효성(孝誠)스럽게 받들고 門生들과 날마다 도의(道義)를 강론(講論)하여 만인에게 미치는 영향이 너무 많고 항시 예경(禮經) 공부에 공을 들이고 역학에도 발명한 바가 많아 심상한 인물이 아니고 백집사(百集事)에 합당한 인물"로 천거하였으며 선조실록 21권(선조 20년 12월 20일)에 의하면 선조대왕께서 선생의 학문과 인품을 높게 보고 아껴 "함께 강론하지 못함을 유감"으로 여긴다 하였고, 당시 명 재상 영의정 박 순(淳) 호는 사암(思菴 : 1523~1589. 선조 5년 1572년~1586년까지 14년간 영의정 재직)께서는 곤재 정의백은 실지로 몸소 행(行)함이 진실(眞實)하여 "주정자(朱程子) 뒤의 한 사람"으로 나와 같이 높은 벼슬에 천거(薦擧)할 뜻이 있으나 공경중(公卿中)에 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정철을 指稱)이 있어 아쉬움을 남겼으며, 또한 선조 임금께서 동이(東夷 : 일본)를 걱정하며 "만일 왜란이 있다면 누가 원수가 될만한고" 하며 서기1583년 계미 3월 비변사(備邊司 : 나라의 軍事機密과 그 계획 및 작전에 관한 軍務를 총괄하는 관청) 당상(堂相)들에게 인재(人才)를 추천 하라 함에 영의정(領議政) 박순(朴淳)은 "정개청(鄭介淸)은 재주와 학식이 밝고 통달하
였으므로 만약 동이(東夷)가 침략 시 팔도도원수(八道都元帥)로 삼을 것"을 천거(선조수정실록17권 선조16년3월)하였으며, 우의정 유성룡(柳成龍)의 계사(啓辭)에서 개청(介淸)은 평생에 학술(學術)과 행검(行儉)으로 자임(自任) 하신분으로 극찬 하였고, 선생의 억울한 죽음에 신설(伸雪)의 은전(恩典)을 배풀 것을 비변사에서 임금께 아뢰었다.
효종 때 대학자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선조20년,1587~현종12년,1671년) 선생은 인조대왕의 왕자 봉림대군(효종), 인평대군의 두 왕자의 사부(師傅)로 효종9년에 승정원(承政院) 정3품의 동부승지(同副丞旨)로 재직시 곤재(困齋)선생의 학술(學術)과 행검(行儉)을 "우리 동방(東邦)의 진유(眞儒)로써 퇴계(退溪) 이황(李滉)에 버금 간다".(대동야승지18권 기축록속:윤선도의 國是를 論한 疏 참조)라고 하였으며 서기 1657년(효종8년)에 자산서원(紫山書院)을 훼철(毁撤)하려는 송시열(宋時烈)과의 논쟁(論爭)에서 삼사(三司)의 탄핵(彈劾)으로 삭직(削職)을 당하는 수모(受侮)를 겪으면서 까지 곤재선생을 추앙(追仰)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더듬어 볼 때 가히 선생의 생애(生涯)와 학문(學問)을 가름해 볼 수 있는 척도가 될 것이다.
그럼 곤재(困齋)선생께서 과연 당인(黨人)이었던가 하는 관점에서 동서(東西) 양당(兩黨)의 형성(形成) 과정을 살펴보면 서기 1575년(乙亥. 선생 나이47세)을 전후로 학문 활동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는 시기에 척신(戚臣) 세력이 조정(朝廷)에서 살아지고 정권(政權)을 장악(掌握)한 사림 세력의 등장(登場)으로 사림 중에 문명(文明)이 높았던 신진사류(新進士類) 김효원(金孝源)이 조정의 이조(吏曺) 전랑직(인사권장악직)에 취임함으로써 명종비 인순왕후의 동생 심의겸(沈義謙)과의 대립(對立)으로 동인과 서인으로 분당(分黨) 되었는데 심의겸이 김효원이라는 사람은 전랑직에 적임자(適任者)가 아니고 소인배(小人輩)로 지목(指目)하여 결국 김효원은 다른 자리
로 옮겨가고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沈忠謙)이 후임 전랑직에 천거(薦擧) 되면서 김효원과 심의겸의 감정대립(感情對立)으로 분당되었다. 이때 김효원은 도성(都城)의 동쪽 건천동에 삶에 동인(東人), 심의겸이 도성(都城)의 서쪽 정동(貞洞)에 살아 서인(西人)으로 지칭(指稱)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감정대립이었으나 날이 갈수록 복잡한 양상(樣相)을 띠면서 이들의 분파는 학맥(學脈)과 사상(思想)이 달라, 동인은 주리(朱理) 철학적(哲學的) 도학(道學)을 사상적(思想的) 배경으로 형성된 이황(李滉), 조식(趙湜) 문하의 영남학파였고, 서인은 주기철학(朱氣哲學)에 근거를 두고 형성된 율곡(栗谷) 이 이(珥), 성 혼(渾) 문하의 기호학파(幾湖學波)의 사류(士類)들 이였음을 비추어 볼 때, 곤재 학설에서 이기일체설(理氣一體說)을 주창함을 미루어보아, 편향적인 학문과 사상이 아니었으며 어떠한 이념적(理念的) 차이에 의한 동인도 서인도 아니 였음을 알 수 있고 분당(分黨)의 와중(渦中)에서 선생께서는 선조대왕의 부름을 받아 북부참봉, 연은전(延恩殿) 참봉, 동몽교관(童蒙敎官) 등 여러 차례 제수(除授 : 천거의 절차를 밟지않고 임금이 직접임명=제배) 되였으나 숙배(肅拜) 후 귀향하였던바, 정치인도 당인도 아닌 참 선비로써 학문의 정진(精進)과 후학양성(後學養成)에 전심전력(全心全力)하였으며, 김효원과 심의겸과의 교감(交感)이 조금은 있었으나 역사의 어느 한 구절에서도 편당(偏黨)적 성향(性向)을 찾아볼 수 없는 바이다.
또한 선생을 남인(南人)으로 지목(指目)하여 역사를 기술하는 사학자들도 있으나 동인(東人)에서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분당(分黨)되는 과정(過程)을 살펴보면 서기1590년에 정여립 모반사건이 끝이 나고 정권을 잡은 서인들의 정권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정철(鄭澈)이 서기1591년 건저의(建儲議 : 세자 책봉에 대한 의견) 문제로 선조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삭탈관직(削奪官職), 유배(流配)됨에 서인들의 정권이 실각(失脚)되고 조정은 다시 동
인들이 장악(掌握)하여 인조반정(仁祖返政)까지 30여년간 집권(執權)을 하게 된다. 그러나 동인들은 정철의 치죄(治罪) 과정에서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선다. 정철의 사형(死刑)을 주장하는 이산해(李山海 : 한강 북쪽에 삶에 북인)와 유배로 끝내야 한다는 우성전(남산 밑에 삶에 남인)의 의견 대립으로 이산해를 중심으로 강경론을 폈던 파(波)를 북인, 우성전을 중심으로 온건론을 폈던 파를 남인이라 하였다. 남인과 북인의 학맥(學脈)을 살펴보면 같은 주리론(朱理論)을 주창한 영남학파였으나 남인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문하(門下)이면서 우성전, 유성룡, 김성일을 중심으로 당(黨)을 형성하였으며 북인은 조 식 문하이면서 율곡 이이, 성혼(成渾)과 관계를 유지하던 사림들이 중심이 되여 당을 형성하였던 바, 곤재(困齋)선생께서는 이미1590년 경인(庚寅)년에 타계(他界)하셨는데 남인과 북인으로 당이 형성된 해는 1591년 신묘(辛卯)년 임을 상기(想起) 한다면 선생을 남인이라는 당인으로 지칭(指稱) 함은 참 선비의 위상을 깎아 내리려는 발상에서 나온 서인(西人)측 사학자들의 모함(謀陷)으로 이해(理解) 해야 될 것이며, 선생께서 타계(他界)하신 이후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붕당(朋黨)되어 이조 중엽의 정치는 주로 서인과 남인 사이의 당쟁(黨爭)이 치열하였다. 남인들은 곤재(困齋) 문하생들을 포함(包含)하여 선생님의 학문을 추종(追從)하는 선비 및 호남의 사림(士林)들이 주류를 이루어 선생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이 남쪽에서 주로 일었고 서인쪽에서 이를 반대하는 과정에서 당인이 아닌 남인으로 모함(謀陷)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동서(東西)의 양당이 형성되어 당쟁(黨爭)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당시 대사헌(大司憲) 율곡 이이(1536~1584 49세 졸)가 양당의 충돌(衝突)을 극소화(極小化) 시키면서 정쟁의 조정(調整)을 꾀하였으나 율곡의 죽음으로 동서양당은 정치투쟁(政治鬪爭)으로 번져 나가기에 이르렀다. 이 때 중도파(中渡波)격인 부
제학(副提學) 이발(李潑), 참의(參議) 백유양(白惟讓) 등이 동인에 가세하였으며, 서기 1584년 서인의 영수 심의겸(沈義謙)을 예조판서(禮曹判書)에서 동인 정인홍(鄭仁弘)이 심의겸을 탄핵(彈劾)하여 동인이 1585년 정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졓?무렵 본래 서인이였던 정여립(鄭汝立)이 수찬(修撰)이 된 뒤 집권 세력이던 동인으로 입당하게 된다. 동인의 영수격인 이발(李潑)과 성향(性向)이 일치(一致)했던 것이 동인에 동조(同調)하게 된 주 요인 이였지만 서인으로 있을 때 율곡 이이를 공격(攻擊)한 이유로 서인들에게 미움을 사게 되어 중앙관직을 버리고 낙향(落鄕)하여 대동계(大同契)를 만들어 세력(勢力)을 확장(擴張) 시켜나갔다. 서기 1587년 왜선(倭船)이 전라도 죽도를 침입(侵入)하였을 때 대동계(大同契)를 동원해 왜침을 물리치기도 하였으며, 세력이 황해도 안악의 변승복, 박연령, 해주의 지두함, 운봉의 승려 의연 등 모사 세력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졛舊嗤?이들의 세력이 주목 받게 되고 마침내 역모(逆謀)를 꾸미고 있다는 황해도 관찰사(觀察使)의 고변(告辯)이 임금에게 진언되어 조정(朝廷)은 큰 파란에 쌓이게 되었다. 고변 내용 인즉 정여립의 대동계 인물들이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봉기(峰起)하여 입경(入京), 대장(大將) 신립과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살해(殺害)하고 병권(兵權)을 장악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事件)을 진압(鎭壓)하는 과정이 서기 1589년 기축년에 일어난 정여립모반사건(鄭汝立謀返事件) 또는 기축옥사(己丑獄事)라 한다. 젨젨젨젨젨젨젨젨젨젨젨젨젨
졕ㅏ㈇?모반 사건으로 인하여 동인이 몰락(沒落)하고 다시 서인들이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우의정(右議政)으로 제수(除授)된 정철이 위관(委官:사건을 위임 받은 관리)이 되어 감국(監鞫 : 사건조사)하여 처형(處刑)된 동인의 정예(精銳)인사로는 우의정 정언신(鄭彦信 : 유배지 갑산에서 죽음), 참판(參判) 정언지(鄭彦智 :
젾?瓦?귀양), 참의(參議) 백유양(白惟讓 : 옥중 杖殺), 직제학 홍종록(洪鐘錄 : 연길 귀성에 귀양), 구암 한백겸(韓百謙 : 장형후 귀양), 영남의 수우(守愚) 최영경(崔永慶 : 옥중 장살), 조계(潮溪) 유종지(柳宗智 : 남명의 문인,옥중장살), 동강(東岡) 김우옹(金宇? : 남명의문인, 회령에 유배), 호남에서는 부제학(副提學) 이발(李潑 : 호는 東岩,옥중장살), 이길(李佶 : 호는 南溪,옥중장살). 지평(持平)유몽정(柳夢鼎 : 호는 淸溪,옥중장살). 도사(都事)조대중(曺大中 : 호는 정곡(鼎谷),옥중장살), 찰방 이황종(李黃鍾 : 호는 晩翠,옥중장살)등이 화(禍) 당함이 가장 심했고, 호남 사림들의 화(禍)가 1000여명에 달하였던 바, 특히 곤재(困齋) 정개청(鄭介淸) 선생을 사건에 연루(連累)시켜, 역모자 정여립과 친교(親交)를 맺고 여립의 집터를 선생의 문인(門人) 조봉서(曺奉瑞)와 함께 보아주었다 하고, 서신왕래(書信往來) 등의 죄목(罪目)을 엮어, 서기 1590년 경인(庚寅) 4월 곤재 선생과 문생 조봉서(曺奉瑞)를 나주옥(羅州獄)에 가두었다. 투옥(投獄) 되던 날 밤 심하게 서리가 내려 나주 함평등지의 지붕이 희어졌고 이틀 날부터 연 3일간 대추만한 우박이 내리고 4일만에 그치니 하늘도 노(怒) 하시었다는 기록도 대동야승지(大東野承誌)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에 국문(鞫問:사건조사)이 시작되었는데 처음에는 수 십일간을 친국(親鞫)하였고 그 후 정국(廷鞫)하면서 대신들이 아울러 참여, 정여립의 집터를 살펴 보았다 하여 추문(推問)하였으나 정상을 알아본 후 무함(誣陷)한 것이 분명히 드러나 선조 임금께서 "의논하여 처결하라" 하시니 위관 정철이 "집터를 보았다는 일은 한결같이 원통하다 하며, 심지어는 정여릉(정철의 조카)과 한 곳에서 면질하여 처결(處決)해 달라고 당당하니 이는 사실이 아닌 듯 하오며, 일찍이 절의(節義)를 배척(排斥)하는 한 논설(論說)을 지어 후진을 현혹(眩惑) 시켰다 하는데 대하여서는 그 미치는 피해(被害)가 홍수(洪水)나
졇暠?猛獸)보다 심하오니 형추(形推)하기를 청하옵니다."하여 임금님의 마음을 노(怒)하게 하니 임금께서 "법에 따르라" 하였다.
정철(鄭澈)의 무리들이 지목한 배절의론(排節義論)이란 원래 정철이 호남에 있을 때 주색에 미쳐 날뛰며 예법을 멸시하니, 구속을 싫어하고 방자함을 즐기는 정암수(丁岩壽), 홍천경(洪千景) 등 정철의 무리들이 모두 본받으니 세속(世俗)이 무너지고 선비사회에 악 영향을 끼치므로 선생께서는 한숨을 쉬며 탄식하여 말하기를 "사람이 주색처럼 빠지기 쉬운 것이 없는데 정철이 후배를 이것으로 유인하여 습속이 무너져 장차 구하기가 힘들 것이니 어찌 애석하지 않으리요." 하였다. 이와 같이 곤재선생과 정철의 관계가 소원(疏遠)하였던 것이다. 절의논설(節義論說)에 "성문(聖門)에 종사(從事)할 것을 알지 못하고 의리의 마땅한 것을 따르지 않으며 의기가 발동한대로 떠 벌려 나라를 망치는 데에 이르게 하였다."한 것은 진실로 정철의 절의와 청담을 핑계한 폐단을 지적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진정한 절의(節義)와 청담(淸淡)을 일깨우기 위해 지은 [동한절의진송청담소상부동설서(東漢節義晋宋淸淡所尙不動說序):1584년에 지음]라고 하는 즉 절의논(節義論)을 지어 절의에 미치는 폐단을 구원하려 하였던 바, 간사한 정철의 무리들이 선생을 무함(誣陷)하기 위하여 기축옥사를 절호의 기회로 삼아 정철의 무리 정암수 등의 상소(기축년 겨울 광주진사 정암수 등 무함사류 소)에 절의논설위에 배(排)자를 가하여 배절의(排節義) 일설을 저술(著述)하였다고 상소(上疏)하게 하여 정철이 천총(天聰:임금님의 귀)을 속여 유배시켰는데, 국문(鞫問)할 때 입은 상처가 악화되어 유배지(流配地:慶源 阿山堡)에서 62세에 별세(別世) 하시었다.
절의(節義) 위에 배(排)자를 더한다는 것은 아무리 어리석은 자라도 하지 않을 것인데 더군다나 학문을 임무(任務)로 삼으면서 행검(行儉)으로 평생을 살아 가시는 곤재선생에게 배절의논을 저술하였
다는 죄안(罪案)을 만들어 형장(刑杖)과 더불어 유배를 시켰던바, 형장에 대한 상처가 악화 되여 유배지에서 타계하셨으니, 이와 같이 화(禍)를 입었던 것은 기축옥사 때 무함(誣陷)을 당하였던 것이 사실(事實)인 즉, 우리 제족들의 원한과 호남사림의 원한(怨恨)이 천추만대까지 이어지리라 생각하는 바이다. 젨젨젨젨젨젨젨젨젨젨젨젨젨젨젨젨젨젨젨젨젨
젿瀏?기축역변(己丑逆變)때 우의정으로 제수(除授)되어 위관이 된 송강(松江) 정철의 생애를 살펴보면 정철(鄭澈1536~1593)은 곤재(困齋) 선생과 일곱살 연하로 돈녕부(敦寧府) 판관(判官)을 지낸 정유침(鄭惟沈)의 아들로 큰누이는 인종의 후비 귀인 정(鄭)씨이며 둘째 누이는 계성군(성종의 셋째 아들)의 양자인 계림군 유의 부인이었기에, 어릴 적 명종과(경원대군)과 벗으로 지내며 자랐다. 서기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에 계림군이 관계되어 맏형은 장형(杖刑)을 받아 죽었으며 철(澈)도 아버지를 따라 유배 생활 중, 서기 1551년 유배생활에서 풀려 조부의 산소가 있는 전남 담양 창평 당지산 자락에 16세 때 이주(移住)하여 10여년 동안 임억령에게 시(詩)를 배우고 김인후(金仁厚), 송순(宋淳), 기대승(奇大升)에게 학문을 익혔으며 동갑내기 율곡 이이, 성 혼, 송익필 같은 또래의 유생들과도 친교(親交)를 맺었다. 그의 나이 26세 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27세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급제 하니 어린시절 친구였던 명종대왕께서 궁중(宮中)으로 불러 성대(盛大)한 축하연(祝賀宴)을 베풀어 주었다.
그의 첫 벼슬은 지평(持平 : 사헌부소속정5품)이었는데 그 때 명종의 사촌동생의 살인사건(殺人事件)이 있었는데 명종의 관대한 부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사형(死刑)에 처해 버린다. 이에 명종이 노(怒)하여 지방으로 좌천 시켰음을 볼 때 철의 대쪽 같은 강직(剛直)한 성품(性品)의 일면도 읽을 수 있다. 이어서 수찬, 좌랑, 교리, 전라도
졑逑宣姐潁?역임하게 되고 40세가 되던 해(1575년)에 벼슬을 내놓고 낙향(落鄕)하였다. 자신의 주장을 결코 굽힐 줄 모르는 강직한 성격 때문에 가는 곳 마다 당쟁(黨爭)의 불씨가 되었으며, 동인의 영수 김효원(金孝源)을 맹렬히 비난하니, 친하게 지내던 율곡 이이(李珥)로부터 조정(朝廷)을 혼란 시키는 정쟁(政爭)을 삼가 해 달라는 충고를 받고 실망(失望)하여 낙향하여 버린다. 다시 1578년 다시 관직(官職)에 복귀(復歸)하여, 사간(司諫), 집의(執義),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승지(承旨)에 올랐으나 진도 군수 이수(李銖)의 뇌물(賂物)사건(事件)에 연루(連累)되어 동인의 탄핵(彈劾)으로 다시 낙향(落鄕), 1580년 강원도 관찰사(觀察使)로 제수(除授), 이때 관동별곡(關東別曲), 훈민가(訓民歌)를 짓고, 1583년에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승진(昇進), 1584년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나 동인의 탄핵을 받아 4년 동안 향촌(鄕村:담양 창평)에서 은거(隱居)하면서 [사미인곡][성산별곡]등 한시와 한글로 된 가사문학을 창작하였으며 54세 때 1589년(기축년)에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동인들이 몰락, 우의정으로 제수되어 동인을 치죄하고 1591년에 좌의정에 올랐으나, 56세 때 건저의(建儲議:세자책봉의견) 문제로 유배 되었다. 이 때 선조께서는 정철(鄭澈)을 향해 "대신(大臣)으로 주색(酒色)에 빠졌으니 나라일을 그르칠 수 밖에 없다"하여 파직(罷職) 시켰고 졛祇?율곡 이이도 "제발 술을 끊도록 하고, 말을 함부로 하는 버릇을 없애라"고 충고했을 정도였으니 정철의 인품을 상상해 볼만하다.
곤재(困齋) 선생께서는 모든 봉록(俸祿)을 버리고 오직 학문(學問)에만 자임(自任)하시고 검소(儉素)한 성행(性行)을 바탕으로 예법(禮法)을 준수(遵守)하고 후학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던 인생철학은 정철의 기회주의적 인생관 과는 이념적 차이에서 하늘과 땅 사이였으며, 정철은 기회 있을 때마다 중요직책을 맡아 국정(國政)을 당쟁으로 이끌었던 사실이 한두 번이
졑틈耉駭?바, 특히 기축역변(己丑逆變) 때 위관(委官)으로써 자기와 색목(色目)이 다른 수 많은 선비, 정치인들을 무함(誣陷)으로 얽어 뫼어 무차별 살육(殺戮)하고 귀양을 보내는 혹독한 사람으로 세간(世間)의 사람들은 정철을 [獨澈 또는 奸澈]로 별호하기도 하였다. 다른 일면으로는 주색을 좋아하여, 취기(醉氣)를 바탕으로 산문(山門)과 절편(節篇)의 시(詩)를 뽑아낼 수 있었으니 우리나라의 가사문학의 선구자(先驅者) 역할도 하였다.
젾岾?困齋) 선생의 막론관휴설(莫論官休說:벼슬을 아릅답다 하지마라)의 일설(一說)로만 미루어 보아도 정철과는 이념(理念)의 차이가 너무나 현격(顯隔)하게 나타나며 당시 시대적 배경으로 보아 사회는 성리학(性理學:신유학)을 중심으로 정치 풍토와 사회기강이 확립되던 차에 정철이 서기 1589년 기축역변을 절호의 기회로 삼아, 정철의 무리 화순(和順) 동복(同福)의 진사 정암수가 상소를 올려 절의론 위에 억지로 排자를 더하여, 죄안(罪案)을 만들어 기축옥사 때 무함으로 얽어 선생님께서 유배지에서 타계하시게 되었으니 어찌 억울함이 하늘에 닿지 않겠습니까! 이에 무함(誣陷)을 당한 한편의 배절의논(排節義論)이란 어떠한 내용인가를 알아 보기 위하여 대동야승지 기축록에서 [절의논], 즉 "동한절의 진송청담소상부동설서"라는 글과 곤재선생의 옥중공사(獄中供辭), 곤재선생의 증손(曾孫) 국헌(國憲), 경헌(敬憲) 등의 상소문(1658년, 무술년, 효종9년) 및 고산 윤선도 선생의 국시를 논한 상소문(무술년 6월 :1658년)을 상편(上篇)에 게재(揭載)하여 곤재선생의 억울한 죽음을 이해(理解)하는데 도움을 드리고자 한다.
선생의 학문(學問)과 성행(性行)을 추앙하여 1625년(인조3년) 2월에 복관이 되고 서기 1694년(숙종 20년)에 중훈대부 사헌부집의에 추증되었으며,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자산서원(紫山書院)이 당쟁의 제물(祭物)이 되어 250여년 동안 복설(復說)되고 훼철(毁撤) 당하는 영욕(榮辱)을 치르면서서기1896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이후 130여년의 세월속에 묻혀버린 자산서원이 복설되고 우득록이 우리의 한글로 번역(飜譯) 발간(發刊) 됨은 평생 학문만을 위해 봉록을 버린 우리나라의 대학자 정개청(鄭介淸) 선생님에 학문의 재 조명과 함께 우리의 사상(思想)으로 깊이 뿌리 내렸으면 하는 마음,간절히 소망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