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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는 그 출발 당시, 명칭부터 우리나라의 건국시조 단군(檀君)을 내세우는 단군교였음은 물론, 삼일신고(三一神誥)를 위시한 경전이나 교사(敎史)가 모두 단군의 교훈, 단군조 이래의 역사를 서술한 것이니 만큼, 이 나라의 강토를 강점하고, 이 겨레의 전통과 정신을 말살하려고 대드는 저들 침략자에게는 눈의 가시가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융희 4년 8월, 소위 합병조약을 억지로 만들어, 이 나라 강점의 구실을 만든 다음에는 진작부터 대종교에 대한 제거책을
강구하였으며, 즉시 해산을 획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그 교가 자기 나라의 옛 종교임을 주창하고 교도들이 많기는 하지만 모두 손에 촌철(寸鐵)이 없은즉, 설사 법 밖의 행동을 하더라도 박멸(撲滅)하기 어렵지 않으니 염려할 것이 없다. 반드시 지금 강제 해산하여 종교에 간섭한다는 원망과 비난을 초래할 것이 아니라”고 반대하기도 하여, 우선 해산론은 중지되었다. 그러나 저들의 주의와 감시는 심하여 경찰과 밀정이 거의 날마다 교당으로 찾아들고, 특별한 혐의도 없이 붙잡혀 가서 심문을 당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박은식(朴殷植) 지은 ≪한국통사(韓國痛史)≫ 제3편 60장, ‘일인속박각교회(日人束縛各敎會)’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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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鴨綠江)·두만강(豆滿江)의 한줄기 물을 사이에 두고 있는 만주(滿洲)의 넓은 지역, 그곳은 일찌기 아득한 옛날부터 우리 겨레의 생활 근거지가 되고, 활동 무대가 되었던 곳이다. 부여(扶餘)·고구려(高句麗)·발해(渤海) 등의 우리 고대 국가들이 그곳에 건설되었으며, 고려, 근세조선 이후로 강북 지역이 우리나라 경계 밖으로 분리되었지만, 그곳에는 많은 고구려와 발해 유민(遺民)들이 살고 있기도 하는 것이니, 국외에서 우리 겨레와 가장 인연 깊은 곳을 말하라면, 이 만주 지역을 첫 손가락에 꼽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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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대한제국시대, 나라의 풍운이 위급할 무렵에는 많은 동포들이 이 만주 지역으로 건너가서 국가의 중흥(重興) 재건을 계획하게 되었다. 그러한 일은 이미 건양(建 陽) 원년 제1기 의병 때의 유인석(柳麟錫)·민용호(閔龍鎬) 등 의병대장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경술국치’를 전후하여서는 수많은 의병 장병과 애국지사들이 이곳으로 나가 구국 운동을 계획하면서 시기가 오기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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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그동안, 일찌기 국내에서도 항일 의병전에 참가하였던 지사, 의사들은 서로 모여 향약사(鄕約社)·농무계(農務契)·포수단(砲手團)·독립군·의용대 등의 단체를 조직하여 예속(禮俗)을 권장하고, 둔전 영농(屯田營農)과 산야의 사냥으로 생활을 유지하며, 혹은 전술을 훈련하고, 국내 진입 작전(進入作戰)을 펴서 적 일제(日帝)의 군대와 경찰을 도살(屠殺)하기도 하였다. 또 일부 지사들은 자치단체로 중광단(重光團)·부민단(扶民團)·한족회(韓族會) 등을 조직하여 그곳 거류 동포들을 결속, 독립운동의 핵심 세력을 형성하고, 학교를 세워 학문을 전수(傳授)하고, 무술을 훈련하여 장차 있을 독립전쟁의 중추 인물을 양성하는 데에도 주력하였다. 이런 일에 있어서도 대종교의 정신, 사상은 지도 인사들의 지도 이념이 되고, 실천강령이 되었다. 3·1 독립운동을 전후하여서는 대종교인의 활동도 한층 활발해지게 되었으며, 대종교 포교 활동의 중심지가 되던 동만 방면에서는 더욱 두드러진 움직임이 보여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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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포(白圃)서일(徐一)은 함경북도 경원군(慶源郡) 출신인데, 일찌기 국내에서도 구국(救國) 운동의 인재를 양성함이 필요함을 통감하면서, 교육 계몽 사업에 종사하여 왔지만 ‘경술국치’를 당하게 되자 동만 지방으로 건너가서, 구국 복국의 길을 찾아 활동하였다. 혹은 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고, 혹은 대종교의 포교를 통하여 민족의 단합을 도모하며 한편으로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여 독립전쟁의 인재를 결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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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서기 1912년 대종교에 입교한 백포는 국조(國祖)를 교조(敎祖)로 하는 대종교의 포교가 곧 조국의 독립운동이라 생각하며, 자신이 시교사(施敎師)의 책임을 지고 포교에 크게 힘써 비상한 총혜(聰彗)와 감동적인 설교로 하루에 1천여 명의 교인을 얻는 기적을 낳기까지 하였으며, 3년간에 수만명의 교우를 포섭하게 되니, 그의 교내에서의 신망도 중해지게 되었다. 또 일찍부터 학문에 깊은 조예를 가진 그는 입교 후 교리 탐구에도 열의를 경주(傾注)하여, 그후 5,6년간에, 동일도(東一道) 본사(本司) 전리(典理) 총본사(總本司) 전강(典講) 등 중요한 교직에 있으면서 삼일신고(三一神誥) 강의, 오대종지(五大宗旨) 강연, 회삼경(曾三徑)·진리도설(眞理圖說) 등 경전 및 경전과 교리의 해설서를 저술하여 교리 천명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애국동지원호회 엮은 ≪한국독립운동사≫ 제4편 운동자 약전 중 서일(徐一)조. 대종교 총본사 엮은 ≪대종교중광 60년사≫ 제2편 2장 3절 백포종사(白圃宗師)의 저술과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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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광단은 교(大倧敎)의 중광(重光)의 의미와도 같이 조국의 중광을 의미하기도 하였던 것이며, 또 단원들도 대개 대종교인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니, 실은 대종교인의 독립전쟁 준비 단체였다고도 할 수 있는 조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중광단은 남만의 부민단(扶民團)과 함께, 후일 만주지역의 2대 군사기관이었던 북로(北路)·서로군정서(軍政署)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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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치’ 후 근 10년간, 온갖 간난 곤고 중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고, 거기에서 심신을 바쳐 이바지할 것을 맹세하며 분투 노력하던 만주 방면의 항일 독립투사들에게도 기쁜 소식은 전해졌다. 5년간의 제1차 세계대전도 마무리할 단계에 이르고, 서기 1918년초 미국 대통령 윌슨(W. Wilson)에 의하여 민족의 자결(自決)을 포함한 14개조의 평화 의견이 발표되고, 종전(終戰)과 함께 프랑스 파리에서 세계의 새 질서수립을 위한 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기미년 3월에는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이 크게 일어나고 대회적으로도 독립을 위한 운동이 활발하게 움직이게 되니, 10년간이나 이역(異域)땅에서 망국의 한을 안고 와신상담(臥薪嘗膽), 독립의 기회만을 기다리던 애국지사들은 용약 분기할 때가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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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도 중광단을 조직하여 항일 전투를 준비하고, 대종교를 전포하여 민족정신을 앙양하여 오던 백포(白圃) 서일(徐一)과 그 동지들은 새로운 시국에 호응하는 강력한 독립투쟁의 길을 강구하게 되었다. 외교적 활동이나 시위운동도 필요하지만, 병력을 집결하여 강 건너 조국 강산을 수복하는 것이 가장 통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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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서일 등은 종래 대종교인 중심의 중광단에 다시 참가 범위를 넓혀 뜻있는 청년들을 포섭하여 정의단(正義團)을 조직하였다. 정의의 진군으로 적 일제를 때려 부수고 조국을 광복하자는 것이었다. 일민보(一民報)·한국보(韓國報)를 펴내어 항일 전쟁을 강조하였다. 병력을 증강하며 다시 군정회(軍政會)·군정부(軍政府)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제는 1개 군사 단체가 아닌 군사정부로 군, 정 기타 모든 일을 일원화하여 광복을 위한 최대 노력을 경주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군정부의 지도진은 백포 서일을 위시하여, 현천묵(玄天默)·계화(桂和)·조성환(曹成煥)·박성태(朴性泰)·정신(鄭信)·박두희(朴斗熙)·이홍래(李鴻來)·윤창현(尹昌鉉)·나중소(羅仲昭)·김성(金星) 등으로 구성되었는데(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엮은 ≪독립운동사≫ 제5권(독립군전투사상) 제2편 3장 1절 ‘북로군정서의 성립’.)
이러한 간부진과 군사들은 대종교인이었다. 말하자면 나라 사랑, 겨레 사랑의 대종교 정신으로 뭉친 독립군 조직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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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북간도(北間島) 방면에서 대종교인을 중심으로 한 군정부가 조직될 무렵, 남만주 서간도 방면에서는 다시 전의 부민단(扶民團)과 신흥(新興)학교를 중심으로 한 군정부가 조직되어 역시 항일 전투를 준비하였는데, 그 해 즉 서기 1919년 10월에는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권고에 의하여 서간도의 군정부를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북간도의 군정부를 북로군정서로 하여 임시정부의 명령 계통을 따르게 하니, 이것은 해외 독립운동 기구의 일원화를 위한 조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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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인들을 중심으로 성립된 북로군정서는 본영을 길림성(吉林省) 왕청현(旺淸縣) 서대파구(西大陂溝)에 설치하고, 군대 증모(增募), 무기 구입 등 전쟁을 위한 준비를 활발히 진행하였다. 따라서 창설 당시의 무력은,
군대 500명
장총 500정
권총 40정
기관총 3문
이었는데, 널리 국내외를 통하여 많은 장정들을 모집하고, 김규식(金奎植)·홍충희(洪忠喜) 등 유능한 장정을 새로 맞아들이며 총재(總裁) 서일(徐一)이 경리 계화(桂和)를 대동하고 직접 노령으로 가서 백방으로 무기를 주선 구입하기까지 하여 1년 후에는,
군사 1,600명
장총 1,300정
권총 150정
기관총 7문
등의 무력 증강을 보이게 되었으며, 왕청현 십리평(十里坪)에 사관연성소(士官鍊成所)를 설치하고 사관 생도를 모집 훈련하니, 북로군정서를 중심으로 한 독립군의 기세는 날로 높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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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러한 북로군정서와 서로군정서 및 대한 독립군 등 여러 독립군 단체의 병력이 날로 증강되는데 당황한 적 일본측은 많은 병력을 투입하여 소위 토벌작전을 펴고 한편으로는 무력한 동삼성(東三省) 당국을 위협하고 충동하여, 독립군의 자유 활동을 구속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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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도 서기 1920년 9월에는 소위 혼춘(琿春) 사건을 조작, 그것을 구실로 삼아 나남(羅南) 주둔의 병력과 시베리아 방면 출동중의 대병력을 만주 방면으로 돌려 소위 “제국 신민을 보호하고 불령 선인(不逞鮮人)을 소토(勦討)한다”는 명목으로 일대 군사 행동을 감행하니, 남의 영토내에 있어서 이야말로 기만 불법의 만행(蠻行)이었다. 또한 모처럼 항전 세력을 형성하여 가던 우리 독립군에게는 낭패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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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정세하에서 북로군정서의 간부진은 대내적으로는 국민회(國民會), 서로군정서 등 여러 단체들과 원활한 관계, 친밀한 연락을 가지도록 최신의 노력을 다하며, 한편 중국측 현지 당국자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취하면서 어렵고 복잡한 형편에 대처하였다. 그중에도 서로군정서와는 그해 5월에 이미 양측 대표의 합의로 일체의 중요사항을 협모(協謀) 진행하고, 사관 연성(士官鍊成)·무기 구입 등 군사 관계 일에 있어서 상호부조하여 광복 대업의 완성을 기할 것을 약속하는 체약문(締約文)을 작성하여 실천에 옮기며,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과 서로군정서 대표 이상룡(李相龍)은 서신 또는 인편을 통하여 서로 격의 없는 의견을 교환하여 가며 작전의 협조를 도모하였다.( 1920년 8월 9일자 일제 기밀문서 고경(高警) 제23793호 중 북로군정서 대표 김좌진(金佐鎭)과 서로군정서 대표 성준용(成駿用)간의 체약문(締約文) 및 이상룡(李相龍) 지은 ≪석주유고(石洲遺稿)≫ 제3권 중 ‘답 서백포서(答徐白圃書)’. ‘여(與) 서백포서’·‘여 김좌진(企佐鎭)’ 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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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두 군정서의 간부진은 모두 단군 성조(檀君聖祖)를 받들고, 단군 성조의 신우(神佑)를 믿으면서 임전 태세를 갖추었다. 서기 1920년 여름, 서로군정서 독판(督辦) 이상룡(李相龍)이 군사요원 성준용(成駿用)·이범석(李範奭)·강남호(姜南鎬)를 백두산하의 안도현(安圖縣) 내도산(內島山)으로 파견하면서 지어 준 아래와 같은 시도 당시 간부진의 단군 신앙의 일면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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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나이의 군복 차림
그 기운 무지개 뻗힌 듯,
나월 송풍(羅月松風) 사잇길이
저 앞에 보이누나.
이번의 가는 일은
신명의 도움 받으리니,
단군님 높은 곳에서
우리 나라 보살피신다네.
(≪석주유고(石洲遺稿)≫ 제3권. 원시 妙年腰笛氣如虹 蘿月松風入琈中. 此行失穫神明助 壇帝於昭着大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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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대내 대외적인 모든 준비가 진행되는 도중, 경신년 즉 1920년 10월, 북로군정서는 중국측 종용(慫慂)에 의하여 본거지인 왕청현(旺淸縣) 서대파(西大陂)를 떠나 백두산하로 이동하게 되었으며, 도중 화룡현(和龍縣) 삼도구(三道溝) 청산리(靑山里)에서 적 일본군 대부대를 맞이하여 싸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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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적 일본군은 벌써 우리 독립군의 이동 상황을 탐지하고 청산리를 중심으로 보병과 기병·포병·공병부대 약 1만여 명이 청산리 주위의 충신장(忠信場)·송림평(松林坪) 등지로 진출하고 있었는데, 김좌진(金佐鎭)을 총사령관으로 하고, 나중소(羅仲昭)를 참모장, 이범석(李範奭)을 연성대장(硏成隊長), 김규식(金奎植)을 보병대대장으로 하는 북로군정서의 전투부대는 산중 심곡(深谷)인 백운평(白雲坪) 수림 중에 대기하고 있다가 10월 21일 아침에 먼저 적 선봉부대에 대하여 포문을 열어 2백여 명을 완전 섬멸하였다. 뒤따른 적의 대부대가 공격하여 왔지만, 유리한 위치에서 정확한 사격을 퍼부은 독립군의 맹공격으로 시체만이 골짜기에 쌓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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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사면으로 포위하여 들어오는 적의 대병력 공격을 교묘하게 회피하여 가면서 행군하여 22일에는 다시 천수평(泉水坪)과 어랑촌(漁郎村)에 주둔하고 있는 적 대부대를 과감하게 습격하여 적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그 중 천수평 전투에서는 적 중대장 도전(島田) 이하 1백 20명의 기병부대를 거의 다 섬멸하였으며, 어랑촌 전투에서는 10배도 넘는 적 대부대를 맹공격하여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의 격전 끝에, 적 연대장 가납(加納) 이하 1천여 명을 사살하고 철수하였는데, 어랑촌 전투에서는 독립군측에서도 전사 1백여 명, 실종 90명, 부상 2백여 명의 고귀한 희생을 내었다.( 독립군운동사 편찬위원회 엮은 ≪독립군전투사상≫ 제2편 7장 3절 ‘청산리대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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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백문평·천수평·어랑촌에서의 전첩(戰捷)을 총칭하여 ‘청산리 대첩’이라 하는데, 대종교인을 중심으로 한 청산리 대첩은 우리 독립군의 기개를 여실히 보여 주고 적군을 통쾌하게 도살하였던 승전으로서 우리독립군전투사상에 영원히 빛날 업적인 것이다. 이 청산리 대첩에 대하여, 당시의 북로군정서 총재 백포(白圃) 서일(徐一)은 임시정부에 보내는 보고서 중에서 그 전승(全勝)의 이유를 이렇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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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명을 불고하고 분용결투(奮勇決鬪)하는 독립에 대한 군민정신이 먼저 적의 지기(志氣)를 압도함이요,
2. 양호한 진지를 선점(先占)하고 완전한 준비로 사격성능(射擊性能)을 극도 발휘함이요,
3. 임기수변(臨機隨變)의 전술과 예민 신속한 활동이 모두 적의 의표(意表)에 출(出)함이라.
(≪독립신문≫ 1921년 1월 18일자 ‘대한 군정서 보고’)
라고 하였는데, 역시 당시 북로군정서 독립군 장병들의 확고한 독립정신과, 멸적(滅敵) 보국을 위한 최선의 전략 전술 소치임을 말하여 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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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로군정서의 청산리 대첩이 있은 다음, 독립군의 각 전투부대는 북로군정서와 동일한 보조를 취하면서 일로 북쪽으로 행진하였다. 적의 대병력이 만주 지역을 휩쓸고 있는 형편이니, 여간 병력으로는 당해낼 길이 없는지라, 우선 적의 세력이 미치지 않는 험오(險奧)한 지역으로 들어가서 일시 그 예봉(銳鋒)을 피했다가 재기를 도모하는 길 밖에 없는 일이었다. 또 만일의 경우에는 노령(露領) 방면으로 넘어가서 양병 재기할 것도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적군은 산야를 덮어 날뛰고, 때는 바야흐로 엄동설한이며 사기는 저상되고 보니, 여기 저기 흩어진 독립군부대는 산만한 행동을 취하며 질서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세력을 재건하여 광복의 대업을 꼭 이룩하겠다는 희망과 용기조차도 상실한 형편으로서 통한스럽기 이를데 없는 일이었다. 10여년간 독립 투쟁의 성과도, 수많은 애국선열의 고귀한 정신을 계승하는 것도 이제는 그 성패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감이 없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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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10월 20,21 청산리 전투에서 큰 전과를 거둔 북로군정서의 독립군 부대도 부득이 현지에서의 재대결을 피하며 10월 말경에는 눈물을 머금고 안도현(安圖縣) 황구영촌(黃口嶺村)으로 퇴각하였다가, 11월 중순에 다시 연길현(廷吉縣) 지방을 지나 북만의 밀산현(密山縣) 당벽진(當壁鎭)에 유진하게 되었다. 즉 이곳은 중소국경 국경에 위치한 흥개호(興凱湖) 변의 당벽진(當壁鎭)인데 중소국경을 넘나들며 군사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북로군정서의 이러한 행군을 들은 서로군정서의 이청천(李靑天)군, 대한 독립군의 홍범도(洪範圖)군 등 독립군의 유력부대들도 심수(深遂)한 산곡간의 백설을 헤치며 밀산을 중심으로 집결하게 되었다.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엮은 ≪독립군전투사≫ 상권, 제2편 8장 2절 ‘대한독립단의 결성’. 애국동지원호회 엮은 ≪한국독립운동사≫ 제2편 ‘동만주의운동’ 3장 2절 ‘대한독립군단 조직’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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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정세하에서 북로군정서의 총재 서일 등 간부진들은 시국에 대처할 최선의 방책을 생각하였다. 우선 각 군의 세력을 통합 결속하여 군기를 진작하고 재기를 도모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따라서 각 독립군 부대에 일치 단합을 촉구하는 격고문(檄告文)을 보내었다. 그리고 격고문에서는 원수 적의 세력이 산야에 편만(遍滿)하고 수많은 동포 군·민이 참혹한 희생을 당하는 이 시기에 있어서 각 독립군 장병은 서로 공을 계산하고 이익을 도모할 것이 아니라, 대동 단합하여 대세를 만회하고 함몰(陷沒)되는 민족을 건져내어, 광복의 원훈 대업(元勳大業)을 빠른 기일 내에 완성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아래와 같은 8개 조항을 시급히 실천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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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下記)
1. 원수의 적을 꺾어누르고 시국을 수습코저 할진대 여럿의 계책, 여럿의 힘을 집중하여 일심 도모하는 것이 유일의 양책(良策)이니, 우리 독립군 각 단체는 속히 협동 회합할 것.
2. 상금도 외로운 무리를 믿고 여럿의 의논을 반대하여 합군 육력(合群戮力)에 불응하거나 또는 교식 영폐(巧飾侫蔽)하여 전쟁을 회피하려는 자는 공중(公衆)에 포명(佈明)하고 성죄 행토(聲罪行討) 할 것.
3. 군인은 나라의 간성(干城)이요, 장교는 군사의 사명(司命)이라, 만일 그 사람 곧 아니면 존망(存亡)이 달렸나니, 간혹 빈 이름과 뜬 영화를 탐하는 자들이 문자를·좀 알면 곧 참모(參謀)라, 병조(兵操)를 대강 알면 사령이라 함은 참으로 군국(單國) 생명을 중시(重視)치 않음이니, 어찌 한심치 아니한가. 금후로는 관직이 그 사람에게 맞고 장수가 능한 이를 얻어서 군공(軍功)을 완전케 할 일.
4. 모단(某團)을 물론하고, 무기는 모두 우리 인민의 고철(膏血)에서 나온 것이라, 이를 공연히 땅 속에 깊이 묻고 중용(重用)치 않음은 도저히 불가하니, 이를 남김없이 파내어 전용(戰用)에 공(供)할 것.
5. 간혹 단체의 무력을 빙자하고 간핍(艱乏)한 인민에게 무정한 징색(徵索)을 향하여, 그 산업을 안보치 못하게 하는 자 있을 때는 이 역시 성토할 것.
6. 적인에게 아첨하여 동족을 잔해(殘害)하는 자는 물론이거니와, 간혹 양민을 공갈 또는 감언 유도(甘言誘導)하여, 소위 거류민회의 명색에 참가케 하는 자는 그 원악(元惡)을 조사하여 징형(懲刑)할 것.
7. 이번 환란 중의 양민의 피살과 가옥의 피소(被燒)와 재곡(財穀)의 파손된 것을 일일이 조사하여 호상 구휼(救恤)할 것.
8. 격문이 간지 3일 내에 각 단(團)에서 회신하심을 요함. (≪독립신문≫ 1921년 2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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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과연 당시 정세하에서 적절한 사항들이었다. 따라서 홍범도(洪範圖, 대한독립군)·구춘선(具春先, 간도대한국민회)·이명순(李明淳, 동상)·김성배(金聖培, 대한신민회)·최진동(崔振東, 도독부)·이범윤(李範允, 의군부)·김국초(金國礎, 혈성단)·김소래(金笑來, 야(野)단)·이규(李圭, 대한정의군 정사) 등 많은 지도자들이 여기에 호응해 왔으며, 따라서 북로군정서를 위시한 10개 단체의 현존 병력 3천 5백 명으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게 되었다. 이때 대한독립군단의 중요 부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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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재 서일(徐一)
부총재 홍범도·김좌진(金佐鎭)·조성환(曹成煥)
총사령 김규식(金奎植)
참모장 이장영(李章榮)
여단장 이청천(李靑天)
(애국동지원호회의 ≪한국독립운동사≫)
등으로서, 역시 북로군정서의 지도자들이 총재 이하의 중직을 대게 맡았던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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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독립군단의 많은 병력은 이듬해 즉 1921년 2,3월간 전부터 많은 동포들이 가서 거주하고, 또 독립군 병력이 있기도 한 노령 방면으로 이주(移駐)하였다가 6월에, 흑룡주(黑龍州) 자유시(自由市)에서 큰 참변을 당하게 되었다. 이때 독립군의 노령 이동은 당초부터 문제점이 없은 것도 아니지만, 만주방면의 정세가 너무 불리하였기 때문에 대다수의 병력을 이동하게 되었던 것인데, 결국은 잔인한 쏘련군과 그 앞잡이들에 의해 자유시에서 포위 공격을 당하여 그동안 만주 방면에서 독립전쟁에 종사하던 애국 군병 약 6백 명이 전사 또는 행방불명되고, 이청천(李靑天) 등 지휘관을 포함한 9백여명의 장병이 포로되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나, 공산주의자들의 수심만행(獸心 蠻行)은 여기서도 드러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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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처음 뜻을 굽히지 않고, 다시 남은 힘을 집결하여 전투태세를 재정비하였다. 그중에도 청산리 전쟁 당시 북로군정서 전투부대의 보병대대장 이던 김규식(金奎植)은 다시 만주의 연길현(廷吉縣) 명월구(明月溝)로 나와서 이범석(李範奭) 등과 함께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을 편성하였으며, 총사령관이던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은 북만 영안현(寧安縣)에서 혁명 세력을 집결하여 한족연합회(韓族聯合會)를 결성하였다가, 후에 다시 군정(軍政) 기관 신민부(新民府)로 발전시켰는데, 이 신민부에는 군사부 위원장 겸 총사령관 김좌진을 위시하여, 나중소(羅仲昭, 참모부 위원장)·조성환(曹成煥, 외교부 위원장)·윤복영(尹復榮, 외교부 길림성 전임 외교위원)·박성태(朴成泰, 법무부 위원장)·정신(鄭信, 연락부 위원장)·박두희(朴斗熙, 보안사령) 등 많은 전 북로군정서 관계자 및 대종교인들이 참여하였다. (≪한국독립운동사≫ 제2편 ‘만주 운동중 북만주의 운동’ 제1장 3·4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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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북로군정서의 총재 백포(白圃) 서일(徐一)과 백취(白醉) 현천묵(玄天默) 등은 일부의 병력을 거느리고 밀산현(密山縣) 당벽진(當壁鎭)에 유진하면서, 대종교인들과도 합력하여 일면 영농(營農), 일면 훈련으로 병력을 수습 보충하던 중, 그해 즉 1921년 8월 26일에는 의외에도 중국인 비적(匪賊) 수백명의 야간 습격을 받았는데, 무지한 비적들의 자행(恣行)하는 살인·방화·약탈·파괴 행위에 아끼던 청년 사병이 살상되고, 온 마을이 거의 멸문(滅門)의 참화를 입었다. 참으로 통분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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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간 굳은 신앙심으로 대종교 전포와 조국 광복을 위하여 몸을 바쳐오던 지도자로서 그 슬픔, 그 상감(傷感)을 무어라 형언할 수 있으랴? 독립군 장병들의 비명의 죽음, 많은 교인, 동포들의 참담한 피해, 모든 것이 자신의 죄책이라고 생각되었다. 오직 취할 길은 한 목숨을 끊어 만인의 죄를 대속(代贖)하는 일만을 통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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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서백포는, 대종교의 1세 교주 나홍암(羅弘岩)이 구월산(九月山)에서 순국이세(殉國離世)할 때 유서(遺書) 중의,
“귀신이 휘파람불고 도깨비가 날뛰니 천지의 정광(精光)이 캄캄하구나, 뱀이나 먹고 돼지가 충돌하니 인족(人族)의 혈육이 질펀하도다. 날은 저물고 길은 다했으니 인간은 어데로 가야 하나.”
하는 구절을 소리내서 읊으며, 마을 뒷산 밀림 중으로 올라가서, 풀 위에 돌을 베고 누워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온 몸에 아무런 상처도 없이 자정(自精)하였으며, 이튿날 비가 내렸지만 입은 옷에 젖은 흔적이 없고, 여러날 시체 그대로 누어 있었는데도 시신 근처에 잡충(雜蟲)의 범함이 없으니, 모두들 그의 깊은 신앙심이 신의 은총으로 반진조천(返眞朝天)한 것이라고 하였으며, 후에 대종교에서 종사(宗師)로 추수(追崇)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장년 41세였는데 모두들 그의 애국 충정 신앙 보국22)의 생애를 사모하며 조곡(吊哭)하였다. 아래와 같은 조제문(吊祭文) 에서 역시 뜻있는 사람들의 애도의 정을 잘 말하여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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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일(徐一) 선생을 조함
일재(一齋)
아아, 슬픈지고. 선생의 가심이여. 누구를 위하여 오늘의 일거(一擧)가 있었으며, 누구를 위하여 오늘의 일사(一死)가 있었는가? 선생의 일거는 과연 2천만 동포의 유존영(尊榮)을 위해서이며, 선생의 일사는 또한 13의사(義士)와 수백 농민의 무고(無辜) 피해를 위함이시니, 일거도 나라를 위하시었고 일사도 동포를 위함은 곧 선생의 높은 의기가 자신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으로 인정하지 아니하고, 오직 우리의 생명을 곧 자신의 생명으로 삼으시며, 동포의 사생(死生)을 곧 자신의 사생으로 정하였음으로, 그 삶도 여러 사람을 위하여 살으셨고, 그 죽음도 또한 여러 사람을 따라 죽으셨도다.
선생이여, 선생이 만일 나라를 회복하고 보필(輔弼)의 자리에 계셨더면, 나라와 휴척(休戚)을 함께 하는 교목 세신(喬木世臣)의 자격이 선생이시며, 필부(匹夫)의 불검(不檢)으로 체시(體市)와 같이 천하 위임(天下爲任)의 양필(良弼)도 또한 선생이시리. 만리 초보(萬里初步)의 군국 대사를 바로 목전에 두시고, 한번 죽음으로써 인(仁)을 성(成)하시며, 의를 취(取)하심은 비록 선생의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고, 천재의 죽백(竹帛)에 유방(流芳)하실지나, 아직도 살아 있고 거적거리에서 잠자며 창을 베고 백전 고투(苦鬪) 중에 있는 우리들에게 만리 장성이 무너졌으며, 대하 광량(大厦廣樑)이 찌그러짐 같도다. 하물며 청산리(靑山里) 전약에 개가를 부르시던 소리 우리 귀에 잊을 수 없는 착탄(着彈)이 된 일인가?
밀산(密山) 송백이 만고 장청(長靑)함은 우리 선생의 절의(節義)로 씌었었고, 파저강수(波猪江水)의 천추의 오열(嗚咽)함을 우리 선생의 분한(憤恨)을 울어 흐르나니, 오호(嗚呼), 송백아 한이 없이 푸르리. 오호, 강수여 한이 없이 흐르리. 감지 못할 선생의 두 눈이 일월같이 빛나 보시나니라.
(김승학(金承學) 지은 ≪한국독립사부록 의열사 및 독립운동자약전≫중 ‘서일(除一)’조. 대종교 총본사 엮은 ≪대종교중광60년사≫ 제2편 2장 2절 참조. 나홍암(羅弘岩)의 유서 구절 원문.鬼嘯而魅跳 天地之精光晦冥 蛇食而歌突 人族立血肉淋漓 日幕途窮 人間何處.)
각 출처: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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