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윤선2008-08-01조회 : 477
내가 처음 구반포 아파트로 이사갔던 건 초등학교 5학년 한글날이었다. 그러니까 1976년 10월 9일이다. 지금부터 곡 32년 전이다. 결혼을 한 직후 몇 년 다른곳 아파트에 전세를 살았던 2년을 제외하고는, 나는 이제까지 30년 정도 구반포 토박이이다. 친정어머니가 이제까지 32년동안 같은 아파트에 전화번호도 바꾸지 않고 세자리수 599번 국번을 그대로 가지고 계시는 터라 연락이 끊겼던 여고 동창들도 친정에 전화해서 다시 연락되기도 했다.
내가 구반포에 이사갔던 1976년부터 32년동안 한 가게를 하신 분이 있다. "반포 치킨". 그런 집이 있다는 것은 알았는데, 어찌된 일인지 나는 한번도 그집엘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가끔 잡지나 외부사람들로부터 그집이 그렇게 유명한 집이라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처음 반포 치킨을 찾은것은 아마도 한 7년 전이었던 것 같다. 모처럼 일찍 퇴근하는 길에 통닭을 사오라는 애들 명을 받고 문득 생각이 나서 들렀다. 주인은 후덕하게 생긴 여사장님이었다. 마늘치킨이 유명한 메뉴라는 말을 듣고 마늘 치킨을 사서 집으로 가져갔다. 그날 여사장님은 "어머 머리핀이 참 예쁘다~~"라고 말을 시켰다. 아이들은 열광하며 좋아했다. 바싹 구워진 통닭껍질에 한겹 바른 다진 마늘 양념이 정말 일품이었다.
몇 달 후 다시 그집을 찾았을 때에는 여사장님은 내가 그날 했던 머리핀과 같은 머리핀을 하고 계셨다. 너무 반가왔다. 치킨이 나오기를 서서 기다리는데, 여사장님은 "인상이 참 좋네. 결혼했어요? 그냥 겉보기에는 자기 일 하면서 결혼 안하고 사는 사람 같애..."라고 넌지시 말을 거셨다. 결혼 했고, 두 딸도 있고, 그런 얘기를 잠깐 했다.
그렇게 나는 일년에 한두번 정도 그 치킨집에서 치킨을 샀다. 그집에 다른 메뉴, 예를 들면 번데기 뚝배기가 맛있다는 것도 사년이 지나서나 알게 되었다. 하루는 모처럼 일찍 사무실에서 나와 수영도 좀 하고 화장도 다 지운 얼굴로 치킨을 사러 들렀다. 포장이 되는 동안 카운터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으니 사장님이 두런 두런 얘기를 꺼냈다. "여름 휴가 다녀왔어요? 나는 친구들하고 일본 다녀왔어. 여자는 나이들면 남편 말고도 여행 같이갈 친구들이 필요해. 자기는 그런 친구가 있어? 나는 얼마전에 찾았어. 일본 여행을 같이갈 여행친구를 고르려고 일부러 경주에 한번 동창들이랑 갔었잖아. 나는 왜 있잖아. 여행을 가면 내 형편되는 대로 맛있는거, 아름다운거 보면서 같이 즐겁게 얘기하는게 너무 행복하거든. 여행을 가서 비싼 명품을 살 형편은 안되도 미술관 작품보듯이 윈도우에 진열된 예쁜 것들을 그냥 보고 즐길 수 있는 친구가 좋거든. 그런데 그럴 때 마다 불평하고, 돈 없다고 한탄하는 친구들도 있어. 그런 친구들은 여행 파트너로는 정말 아니지. 그런 애들과는 절대 여행 같이 안가. 자기도 그런 여자친구를 꼭 만들어야 돼...."
곧 치킨과 번데기가 나왔고, 나는 자리를 떴다.
며칠이 지나도 그 여사장님의 이야기가 잊혀지지가 않았다.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선배처럼, 또 이모처럼 이유없이 친근하게 느껴지는 그런 분이었다. 인생의 지혜가 솔직하게 느껴지는 그런 분이었다. 나는 그 여사장님과의 얘기를 한 열명에게도 더 했던 것 같다. 우리 친구들은 다들 너무 공감했다. 우리도 오십이 넘어서부터는 일년에 두 번씩은 여행을 같이 가자면서 여행 상상으로 스트레스를 날려보냈다.
그렇게 가끔 퇴근길에 들르면 나는 한 십분 정도 카운터 앞에 서서 기다리고, 여사장님은 바삐 손을 놀리시면서도 이런저런 얘기를 시키곤 했다. 그러는 동안 함께 일하는 분들도 얼굴을 익혀서 짧은 인사말이나 덕담을 건네기도 했다.
얼마전 문득 사무실에 있는데 그 여사장님 생각이 났다. 그 즈음 나는 오페라와 그림에 대한 첫 책을 냈는데, 내 책을 보내드리면 참 좋아하실 듯 했다. 일부러 치킨집을 찾아 이것저것 사면서 함께 일하는 분에게 슬쩍 사장님 성함을 여쭤보았다. 다음날 사무실에 와서 책을 보내드렸다.
대변인이 되고, 총선을 치르면서 정말 바쁜 생활을 했다. 400명 정도 되는 출입기자들로부터 매일 오는 백오십여통의 핸드폰 전화가 부담스러웠었는데, 어느 순간 부터는 걸려오는 전화가 이백통이 훨씬 넘는 데에도 오는 전화가 부쩍 줄었다고 느껴졌다. 적응이 된 모양이다. 모처럼 저녁 약속을 하지 않아 일찍 들어가면서 딸들에게 전화를 했다. 뭘 사갈까 전화했더니 단연코 반포치킨에서 마늘 통닭, 번데기 뚝배기, 골벵이 국수무침을 사오라고 했다. 가게 몇미터 앞에서부터 활짝 열린 문으로 가게 분들이 반갑게 맞아주셨다. 여사장님은 정말 반색을 하면서, 너무너무 반가와 하셨다. TV에서 나올 때마다 정말 반갑다고. 그리고 책을 찬찬히 읽고 계신다고. 책을 읽으면 정감있고 다정다감한 나의 성품이 느껴져서 좋다고. 오늘은 처음으로 카운터 앞에 난 빈 자리에 앉아 치킨을 기다리면서 맥주를 한잔 했다. 넉살 좋게 맥주한잔 혼자 하면서 가게에서 기다린 것도 7년만에 처음이다. 사장님께 한잔 권했더니 가게에서는 절대 한모금도 술을 안한다고 하셨다. 32년을 그 수많은 손님들을 맞으며, 한 이름, 한 종목으로 가게를 꾸려오실 수 있었던 이유를 한 순간 알수 있었다. 철저한 프로페셔널이었다. 나랑 눈을 맞추고 얘기를 하시는 동안에도 종업원들에게는 몇 번 테이블에 가서 뭐가 필요한지 물어보라는 바지런한 주문도 잊지 않았다. 그 와중에 맛이 제대로 들은 탐스러운 딸기도 네 알 씻어 꼭지를 따 주셨다.
참 은근한 만남이다. 우리가 7년동안 나눈 대화를 합하면 모두 이십분이나 될까? 그래도 나는 이 여사장님과 한 이십 여년 알고 지낸 것 같다. 아마도 어디 하소연하고 싶은 기분 딱한 날이 오면, 나는 아마 반포치킨의 여사장님을 찾을 것 같다. 그리고는 이 푸근하고 지혜로운 여사장님앞에서 남들한테 할 수 없었던 푸념이라도 잔뜩 늘어놓을 것만 같다. 오늘도 차안에는 따끈한 마늘치킨의 향기 그득하다.
[월간 에세이 8월호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