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 또 다른 존재의 이름

[그래도]

욕망, 존재의 또 다른 이름

2012. 11. 24

산다는 것은 욕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부인하며 살았다. 욕망이라는 단어의 “욕”자만 들어도 어쩐지 부정한, 감히 입에 담기도 뭣한 단어로 다가와 내 곁에서 멀리 두었다. 욕망은 존재를 증명하는, 알리는, 가장 뚜렷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소녀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의 브로마이드를 자기 방 책상 앞에 붙여놓고 매일처럼 안부를 묻고 말을 걸곤 했다. 로버트 레드포드를 사랑하면 그를, 별이 빛나는 밤에 진행자를 좋아하면 그를, 그런데 나는 그게 참 이상하게 생각 되었었다. ‘그 사람이 나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나랑 사귀는 사람도 아닌데 뭐 하러 그러나?’ 싶었다. 그렇게 하는 친구들을 보면 ‘참 되게 할 일도 없나보다. 그런다고 뭐가 될 거라고?

아이들이 밤도 늦은 시간에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듣고, 그 다음날 학교에 와서도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면 ‘나 같으면 그 시간에 잠이나 자겠다’라고 속으로 혼자 비웃었다.

죽으라고 잠이 고픈 시간에 맨날 좋아하는 사람 생각에 밤을 지세우고, 그에게 편지를 쓰고, 그것도 모라라 찔찔 울고 짜는 친구들을 보면 ‘뭐 하러 비싼 밥 먹고 저러나?’ 싶었다.

그러니까 나는 애 늙은이였다. 그 시절의 모든 자연스런 감정을, 욕망을 송두리째 뽑아버리고 살았다. 불필요한 감정 따위는 아예 키우지를 않았다. 박범신은 욕망을 이룰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꿈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애초부터 이루고자 했던 것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는 인간은 사랑과 연민으로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고 말했지만 나는 나만 있으면 됐고, 그런 나도 하룻밤 자고날 때 마다 한 살씩 먹어 얼른 어른이 되고, 눈 깜짝할 새 팍팍 늙어지고 싶었다.

도종환의 시처럼 모든 청춘이 흔들리며 피는데 나는 조금도 흔들려서는 안 되는 줄 알고, 그러면 끝장이라도 나는 줄 알고 억지를 부리며 씩씩한 척, 의연한 척 하고 살았다.

여고 1학년, 생활이 바닥을 쳐 전봇대도 없는 용남면 외딴집으로 이사를 왔다. 또래의 동네 아이들은 같은 마을에서 같이 자라 초등학교도 같이 다녀서인지 서로 친했다. 시내버스 통학을 할 때도 그들은 이발소 앞에 모여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나는 혼자 우체국 앞에 서서 버스를 기다렸다. 누가 내게 말이라도 걸어올까봐 눈 착 내려 깔고 운동화 끝만 내려 보다가 버스가 오면 맨 마지막에 타서 책가방으로 내 몸에 칸막이를 두르고 창밖만 보고 갔다. 그런 나에게 어느 누구도 직접 말을 건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심리학적 용어로 퇴행이라고 하는가? 그 시절 하지 못했던 행동들은 어느 시점이 되면 다시 돌아가 그런 것들을 하게 된다는.

얼마 전인가부터 나는 그걸 하고 있다.

어디에도 말하지 않았던 나에 대한 생각을 학급 홈피 선생님도 글쓰기를 통해 하고 있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과의 모임을 통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모임에서는 나의 의견도 은근히 고집 부리듯이 내세우기도 한다. 퇴근하면 고정 프로그램으로 ‘정은아의 세상의 모든 음악’을 두 시간이나 라디오로 듣는다.

작가는 뒤돌아보라고 한다. 혹시 온갖 핑계로 버리고 왔을지도 모르는 또 다른 내가 거기 있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뒤돌아본다. 그랬더니 정말 ‘이런 나도 있었나? 이렇게 하고 있는 게 정말 내가 맞어?’ 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있든지 우리의 손은 오늘 ‘죄’에 있고, 우리의 눈은 그 너머의 ‘보속’을 갈구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믿는다고 했다. 그러니 우리가 사람이라고. ‘죄’와 ‘보속’ 사이, 현실이라는 ‘손’과 갈망이라는 ‘눈’ 사이, 갈팡질팡 하면서.

아, 언제나 소년이셨던 피천득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나는 혹시 온갖 핑계로 버리고 왔을지도 모르는 또 다른 내가 거기 있을지라도 선생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선한 욕망에 길들여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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