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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의 효이야기
* 안동읍지 : 권사도(權思度)
안동인, 효자 성범의 아들로서 효행으로 여각 되었으며 각은 부 성법 과 함께 남선면 신석리에 있다.
* 안동읍지 : 김시좌(金時左)
안동인, 고려태사 선평의 후로서 효성이 출천하여 모 장씨를 보양함에 있어 모든 일을 순종하여 어긋남이 없었다. 집이 가난하여 시량(時亮), 시우(時佑) 두 아우와 함게 사냥을 하고 물고기를 잡아 공양하였으며 풍우한서와 괴움을 꺼리지 안니하고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여 대접하였다. 모친이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빗질을 못하고 긁어서 두창이 생겼는데 자기 머리를 모친 모리에 맞대어 이나 벌레가 옮겨 오도록 하였다. 또한 등에 종기가 나서 고통이 심한지라 조석으로 상처와 고름을 빨아서 신통한 효험을 보았다. 천년으로 세상을 뜨니 시묘 3년동안 소금 과실 채소를 먹지 아니하고 죽으로 지냈으며 한번도 집에 내려오지 아니하였다. 어느날 큰 바람이 불어 화재가 일어나 묘사가 타고 분청이 연소되게 되자 모친의 널을 안고 머리를 두드리며 통곡하니 불이 저절로 꺼졌는데 향리에서는 효심의 소치라 하였다. 3년상을 마치고도 조석으로 사당에 배알함이 생시의 문안과 같이 하였고 모소에도 매일 성묘하고 초하루 보름에 제사를 지내기를 종신토록 하였다. 또한 나라의 제삿날에도 부모 제사와 같이 소식을 제계하고 국상에도 심상 3년을 하였으니 그 효제충신과 염근첨험한 덕에 탄복하였다. 연산 5년(1540)에 부사와 감사가 조정에 독문하여 정려각을 세웠으면 풍산읍 상리에 있다.
1. 권성범, 권사도
世孝閣(세효각), 조선 순조 20년(1820년), 안동군 남선면 신석리 1003번지에는 세효각(世孝閣)이라는 효자 비각이 세워졌다. 이는 안동 권씨 문중의 권성범(안동 권씨 29대), 권사도 父子(부자)의 효성을 후세에 기리기 위해 국가에서 건립하였고 권씨 문중에서 관리해 오고 있다.
비문에 적힌 건립 유래는 다음과 같다.
조선 순조 임금 시절 안동부 동문껄(현 동문동)에 권성범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의 효성은 주위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어느 해 그는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평소 효성이 지극했던지라 돌아가신 후에도 시묘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시묘 중 어머니 문안 차 산에서 내려왔다가 다시 묘소로 가던 중 큰 홍수를 만났다. 물이 많은 개독물(현 : 법흥교 부근 낙동강)을 건너지 못하고 남선면 신석리(속칭: 기느리)에 있는 부친의 묘소를 향해 통곡 재배하고 있었다. 그 때 난데없이 큰 호랑이가 나타나 성범을 업고 강을 건너 묘소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권성범의 아들인 권사도에게도 같은 사실이 있었다.
이러한 소식은 구전을 통해 전국 방방곡곡에 알려지게 되었다. 나라에서는 이들 부자를 하늘에서 내린 효자라 하여 생려(生閭)를 내리고 남선면 신석리 그들의 묘소가 있는 산밑에 세효각이라는 비각을 세우고 그 정신을 널리 기리도록 하게 하였다.
* 세효각 비문내용과 사진
2. 권두하
자는 취몽헌 본관은 안동으로 경북 안동시 율세동에서 태어났으며 관직은 참봉, 친왕부 찬위를 역임했다. 효자 권두하는 어린 시절 조부께 천자문을 배우던 중 "효"자의 대의를 묻고 그 큰 뜻을 일찍이 깨달아 항시 조부모, 부모를 모시기에 효성을 다하였다. 부모를 기쁘게 하는 일이라면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이나 힘든 일이거나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몸과 마음을 바쳐 원하는 것을 구하여 봉양하기를 기꺼이 하였다. 아버지가 병상에 눕게 되자 옷을 입은 채로 곁에서 신명을 바쳐 구료하기를 수개월 하였으나 지성의 보람도 없이 점점 병환이 깊어만 갔다.
그는 백약이 무효하므로 사람의 힘으로 구료하기 어려움을 알고 뜰에 단을 쌓아 하늘에 아버지 완쾌를 소원하였다. 살을 에이는 듯한 추운 겨울, 어느 날 밤 효자의 꿈에 신선이 나타나 "자초를 찾으라"는 가르침을 받고 약초를 찾으러 갔다. 이상하지 않은가. 이제껏 보이지 않던 약초인 자초가 뒤뜰 우물곁 눈속에 솟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는 하늘이 베푼 은혜에 감사드린 후 정성껏 다려 드렸더니 아버지의 병이 씻은 듯이 완쾌되었다.
이는 하늘도 그의 효성에 감동하여 선약을 내려보내 주심이라고 주위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조정에서는 그 효행을 높이 받들어 1908년 안동시 옥정동에 효자각을 세워 표창하였다. 그 후 도시의 팽창으로 인하여 효자비는 안동시 성곡동에 옮겼다.
* 효자비 사진과 내용
3. 이현보(李賢輔)
조선 왕조 연산군 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원 사관으로 관직에 발을 디딘 이현보는 자기 직책에 충실한 관리였다. 사관이라면 왕의 정사를 기록하는 직책이라, 이현보는 자기 직책을 더욱 충실히 수행하기 위하여 왕과 가까운 자리 앞으로 옮겨 연산군의 언행과 정사를 상세하게 기록해 나갔다. 그러나 사관의 이러한 태도는 오히려 연산군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연산군은 마침내 금부에 명하여 임금을 업신여겼다는 죄목으로 이현보를 잡아들이도록 하였다. 금부에 잡혀간 이현보는 임금을 불경한 죄로 모진 벌을 받았는데, 그 후 연산군은 이현보를 정 6 품 벼슬인 正言으로 승진시켰다. 고집이 세고 자기 일에 충실한 이현보를 골려 주려는 연산군의 장난기 섞인 짓이었지만, 임금 불경죄로 벌을 받았으니 당연히 삭탈관직당할 줄 알았던 이현보는 어리둥절하기만 하였다.
그 후 연산군의 폭정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는데, 이현보는 왕세자를 가르치는 직책에 올라 귀하 게 대접받고 있었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서연관의 잘못된 행위에 비분하여 논박 하여 나섰고, 그게 연산군의 비위를 건드려 안동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연산군의 폭정이 오래 계속될 수는 없는 것이어서 1506년 성희안, 박원종, 유순정 등을 중심으로 한 중종 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이 폐위되었다. 그후 이현보는 복직되어 밀양부사, 안동부사, 청주 부사를 거쳐 부제학과 참판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이현보는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와 함께 있을 때는 항상 천진한 어린애처럼 어리광을 부려 기쁘 게 해드렸다. 부모가 그걸 좋아하셨던 까닭이다. 그래서 그 부모가 연로하여 병약해졌을 때 이현 보는 고향으로 달려가, 점잖은 부사의 벼슬아치임에도 불구하고 옥관자가 달린 관복을 차려 입고 뽐내며 자랑하기도 하였다.
벼슬이 더욱 올라 부제학으로 올랐을 때 그는 고향으로 내려가, 90세가 된 부모를 위해 고을 안 의 70세 이상 되는 노인들을 모셔와 부모와 함께 지내도록 하였다. 그 노인들 앞에서 이현보는 즐거움과 웃음을 선사하기 위하여 어린애처럼 행동하곤 하였다.
형조참판의 자리에 오른 뒤 그는 90세가 넘은 부모를 모시고 살기 위하여 조정에 사직서를 제출 했다. 그러나 조정에서 사직서를 받아들이지 않자 그는 병을 핑계로 부모가 있는 고향으로 내려 가 부모를 봉양하며 부모를 기쁘게 하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부모가 맑은 공기와 수려한 경치를 즐기며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분천 동쪽 언덕 위에 '愛日堂'이라는 정자를 세웠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집'이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그는 날씨가 좋은 날이면 몸소 업고 이 정자를 오르내렸다. 이와 같은 효도를 받은 이현보의 아버지 이흠은 100세 가까운 천수를 누리다 세상을 떠났다.
* 농암 시비, 종택 사진
4. 유 성룡
조선 왕조 5백 년 중에서 가장 비참한 전쟁이라면, 그건 당연히 선조 25년 (1592)년에 있었던 임진 왜란일 것이다. 이때 임금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면서 나라의 위기를 극복한 장본인이 바로 유 성룡이다. 유 성룡은 조선 제 11대 임금인 중종 37년(1542) 10월 1일, 지금의 경상 북도 의성군 사촌리에 있는 그의 외가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 성룡의 집안은 고려 때부터 이름이 뚜렷하게 내려오던 명문 집안으로서, 할아버지는 강원도 간성군의 군수를 지냈으며, 아버지는 황해도의 관찰사를 지냈다. 그의 집안은 본디 대대로 경상 북도 안동에 살았으나, 6대조 할아버지 때부터 하회촌으로 옮겨 와 살았다. 유 성룡은 어려서부터 여느 아이와는 달랐다. 그는 네 살 때 이미 글을 읽기 시작했으며, 여섯 살 때는 종조부로부터 '대학'이라는 어려운 한문책을 배웠다.
유 성룡은 여덟 살 때 '맹자'라는 대학보다 어려운 책을 배웠는데, 그 중 한 대목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좔좔 외어 그의 아버지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때부터 세상 사람들의 입을 통해 '풍산 유시 집안에 인물났다.'는 말이 나돌게 되었다.
어린 유 성룡은 공부에 열중하는 것 못지 않게 옳은 일에 대한 고집도 대단하여, 한때는 고집불통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유 성룡의 아버지는 의주 등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며 벼슬을 지냈기 때문에 그도 아버지를 따라다녀야 했다. 유 성룡의 나이 열 여섯이 되던 해, 그는 처음으로 지방에서 보는 향시에 응해 당당하게 합격했다. 열 아홉이 된 유 성룡은, 다음 시험 준비를 위해 관악산에 있는 한 외딴 임자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그의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되었다.
유 성룡이 있는 암자 근처에 자그마한 절이 있었는데, 그 절의 중 하나는 유 성룡이 낮이나 밤이나 책에 파묻혀 사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건성으로 그러고 있는 것 같기도 하여 과연 어느 쪽인지 시험해 보기로 마음 먹었다.
그 날 자정이 되자, 그 중은 암자가 있는 계곡으로 숨어 들어갔다. 창호지 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니 희뿌연 호롱불이 깜박깜박 졸고 있었다. 힘이 장사인 그 중은, 끙끙거리며 큰 돌덩이 하나를 집어 들더니 담 안으로 휙 던졌다. '쿵'하는 둔한 소리를 내며 돌덩이는 툇마루 바로 곁에 떨어졌다. 숨을 죽인 채 안을 살폈으나 끝내 아무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흥, 공부하는 게 아니라 애꿎은 호롱 심지만 태우고 있군."
이튿날 아침, 상을 물리고 나서 다시 책상머리에 앉는 유 성룡을 보고 간밤의 중이 실쭉샐쭉 웃으며 말을 걸었다.
"밤새 별일 없었는지요?"
"자정 쯤 되어 앞마당에 웬 바위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던데 하도 재미난 대목을 읽고 있던 참이라 내다보지 못했다네."
예의 중은 아무 소리 못하고 암자를 내려오며 혼자 중얼거렸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더니, 예사 분이 아니군."
관악산에서 학문에 심혈을 기울인 보람이 있어 유 성룡은 그 이듬 해인 그의 나이 20세 되던 해에 생원, 진사 두 가지 시험에 거뜬히 합격하였다. 이어 다음 해에는 그당시 국립 대학교인 성균관에 입학을 하게 되었으며, 그의 나이 25세가 되던 해 10월에는 이윽고 조선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하는 과거에 보라는 듯이 급제하였다.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유 성룡은, 당시 뛰어난 학자로 모든 사람의 존경을받는 퇴계이 황 선생님을 찾아뵌 적이 있었다. 유 성룡에게 몇 달 동안 학문을 가르친 이 퇴계는, 그 총명함에 연신 감탄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젊은이는 하늘이 실수하여 지나친 총기를 주었거나, 아니면 특별히 귀여워하여 여느 사람의 몇 배도 넘는 재주를 주었거나 둘 중의 하나다."
이 말을 들은 퇴계 이 황의 제자 중 한 사람인 김 성일은 벗인 유 성룡에게,
"내가 선생님 밑에서 오랜 해 가르침을 받았지만, 한 번도 칭찬하시는 일을 본 적이 없었다네. 자네가 처음일세."
하고 부러운 듯 말했다. 효성 없는 학문은 눈뜬 장님이다. 나이 스물 다섯에 승무원에 들어간 유 성룡은 선조 2년(1569)에는 명 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 뒤로 유 성룡의 학문과 행동은 날이 갈수록 명성을 얻어, 선조 3년(1570) 가을에는 학문을 하는 신하로서 가장 명예스러운 사가독서(나랏일을 하지 말고 편히 쉬며 하고 싶은 학문을 하라는 휴가)를 받게 된다.
그 뒤 유 성룡은 이조 좌랑, 병조 좌랑 등의 벼슬을 역임하게 되었는데, 그 무렵 평소에 존경하던 퇴계 이 황이 세상을 떠나고 또 종조부마저 돌아가시자, 겹치는 슬픔을 이겨내지 못해 헌신짝 버리듯 벼슬을 내팽개치고 고향인 안동으로 달려갔다. 고향에계신 어머니를 뵙자 유 성룡은 지금까지 자신이 나랏일에 쫓겨 어머니 봉양을 게을리한 게 죄스러워, 다시는 한양 땅에 올라가지 않으리라 결심하였다.
'제아무리 글을 많이 읽어도 어머니께 할 도리를 다하지 못하면 개, 돼지와 무엇이 다를 바 있겠는가. 효성 없는 학문은 눈뜬 장님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선조는 유 성룡을 어머니 곁에 오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에게 정 3품 벼슬인 홍문관 부제학을 내렸으니 곧 상경하라는 전갈이 왔다. 다시 마음에도 없는 벼슬길에 오른 유 성룡은, 서재에 고향의산수도를 걸어 놓고 그곳에 계신 어머니를 생각하곤 했다.
'아버지 나를 낳으시고 어머니 나를 기르시니, 아 애달프다 어버이시여, 그 은혜 갚고자 하나 하늘같이 끝이 없거늘.'
유 성룡은 한번 어머니의 모습을 머리에 떠올리면 그 날 밤은 한 잠도 이루지 못하고하얗게 새우기가 일쑤였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고 날이면 날마다 뜬눈으로 지새다보니, 유 성룡의 낯빛은 이제 누가 봐도 몹시 앓는 사람의 그것이었다.
어느 날 임금이 유 성룡과 더불어 나랏일을 상의하다가 그의 얼굴색이 초라한 것을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경은 혹시 무슨 병을 앓고 있는 게 아니요? 얼굴이 아주 안 되었구려."
"전하,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잠을 좀 설쳤을 뿐입니다."
"잠을 설쳤다구요? 그럼 무슨 마음의 병이라도 있단 말이요?"
"황공하오나 마음의 병이라면 마음의 병을 앓고 있습니다."
"어허, 그거 안 되는 일이지요. 이 몸이 도와 줄 길은 없소?"
유 성룡은 그렇지 않아도 오늘 같은 기회를 기다려 왔으므로 곧장 아뢰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소인은 몸만 한양땅에 있을 뿐이지 마음은 줄곧 고향 어머니 곁에 가 있습니다. 어머니 봉양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떨어져 있으니, 그저밤잠을 설칠 뿐입니다."
임금은 유 성룡의 효성에 눈시울을 적시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참된 신하는 동시에 효도하는 아들이어야 한다는 것을 내가 잠깐 잊고 있었구나.'
선조는 얼마 동안을 생각하더니 이윽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상주라면 경의 고향과 가까운 곳이니, 그곳 목사로 부임하여 소원대로 어머니를 봉양하도록 하시오."
유 성룡이 벼슬길에 오른 지 10년, 그 동안 그는 줄곧 중앙에만 있었지 지방 근무를 하게 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의 나이 39세 때의 일이다. 사내 나이 서른 아홉이라면 한창 벼슬 욕심을 낼 때가 아니던가. 그럴수록 지방보다는 중앙에 있어야 모든 일이 유리하게 돌아가게 마련인데, 유 성룡은 아무 미련 없이 효도의 길을 택했던것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어버이에 대한 효는 나라에 대한 충보다 작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사사로운 것에 대한 애착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유 성룡에게 충과 효 중에서 어느 것이 크냐고 묻는다면 그는 둘 다 크다고 대답했을지 모른다. 훗날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유 성룡이 몸으로 보여준, 그의 나라에 대한 헌신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어머니를 봉양하듯이 나라를 위했으며 나라를 위하듯이 어머니를 받들어 모셨다. 결국 그의 자세를 통해 우리는 불효하는 충신이 있을 수 없으며, 반역하는 효자 볼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 후 유 성룡은 그의 나이 49세 때, 지금의 부총리에 해당하는 우의정이 되었으며, 이듬 해인 선조 23년(1590)에 신하로서 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벼슬인 좌의정에 올랐다.
임진 왜란이 끝나자, 조선 시대의 가장 고질인 당파 싸움이 시작되었다. 반대파의 모함을 받는 유 성룡은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24년간의 오랜, 그러나 결코 악착스럽게 탐하지 않았던 벼슬 생활을 미련 없이 청산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에게는 어머니를 뵙는다는 것보다 더한 즐거움이란 이 세상에 있을 수 없었으므로, 그의 발걸음은 마냥 가벼웠다. 고향으로 가던 중 어머니께서 태백산 밑에 있는 도심촌이란 곳으로 피난을 가셨다는소문을 듣고, 그리고 가 어머니를 하회촌으로모셨다.
유 성룡이 물러난 이후 조정에서는 당시 가장 청렴하고 공이 많은 공신 셋을 뽑았는데, 그 중 유 성룡이 으뜸으로 지목되었다. 선조 34년인 1601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유 성룡은 서미동이라는 곳에 작은 초가집을 지어놓고 혼자 쓸쓸히 지냈는데, 그즈음 그는 끼니를 이어나갈 양식조차 어려웠다.
1607년, 몸이 쇠약해진 유 성룡이 자리에 눕자 선조는 왕과 왕비의 치료를 도맡는 내의를 내려보내 그의 병을 돌보도록 했으나, 그런 임금의 정성도 보람없이 그는 66세인 수명을 다하고 말았다. 임금은 아끼던 유 성룡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닷새 동안이나 나랏일을 쉬며 슬퍼하였다.
"짐은 그의 학식과 충성에 대해서 누누이 감탄하는 바이지만, 그의 효성을 더욱 잊을수 없노라. 짐은 그를 통해 효를 다하는 자는 충도 다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노라. 또 효, 그것은 곧 슬기인 것을 알게 되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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