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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복음의 권위
히2:1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
히2:2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히2:3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히2:4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 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제가 이 네 구절에 다시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은 결정적인 질문들에 대한 참된 대답을 우리 모두 알기 위해서이며, 히브리서 기자가 이 서신을 받는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권하는 바가 바로 그 대답을 알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복음의 사실들에 유념하고 주의하며 전심으로 주목할 것을 호소합니다. 이런 진리들에서 떠내려가지 않도록 극히 주의하라고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고서도 사실상 알지 못하며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무서운 위험을 피하라고 말합니다. 다른 일에 빠져 복음의 사실들을 등한시할 위험, 세상이나 세상일이나 염려나 그 밖의 문제들로 분주하여 어떤 식으로든 그 사실들을 생각지 못한 무서운 위험을 조심하라고 경고합니다. 일부러 거부하며 상관치 않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그저 다른 일에 바쁜 나머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소홀히 하다가. 평생 그를 알지도 못하고 만나지도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합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고한 바로 그 위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와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경고가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하라고 말하며, 오직 여기에 주의를 집중시킵니다. 복음 아닌 것을 복음으로 크게 착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복음 전체가 아닌 일부 측면에 눈을 돌릴 위험, 일부 축복을 그리스도의 복음 전체로 여길 무서운 위험이 있습니다. 앞서 보았듯이, 히브리서 기자는 오직 복음 메시지 자체, 복음 메시지 전체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권면합니다. 이 메시지는 우리 주와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 및 그 안에 있는 '이렇게 큰 구원"에 관한 것으로서, 우리는 이메시지를 반드시 고찰해야 합니다.
"왜 그렇게 오래된 복음을 들어야 합니까?"라고 묻는 이들이 오늘날 많습니다. 그렇게 오래된 메시지 듣는 걸 합당히 여기는 이유가 됩니까?"라고 누군가 찾아와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이미 밝혔듯이. 히브리서 기자는 이 네 구절을 통해 그 질문의 대답 세 가지를 제시하는 동시에 이 서신의 주요 주제 세 가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해야 하는 주된 이유가 세 가지 있는데, 히브리서는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복음 메시지의 원천과 권위에 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메시지를 듣는 모든 사람의 위태롭고 위험한 처지와 상태에 있으며, 세 번째이자 마지막 이유는 이 메시지의 중대성과 놀라운 축복에 있습니다. 이것이 히브리서의 세 가지 주요 주제이자 누구나 복음을 들어야 하는 세가지 주된 이유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들을 뿐 아니라 생각하고 묵상하는 일에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붙잡아야 하며, 복음에서 떠내려가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첫 번째 이유인 복음 메시지의 원천 내지 복음 메시지에 수반되는 권위에 대해 살펴봅시다. '왜 이게 첫 번째입니까?"라고 묻는 이가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질문을 던지고픈 유혹을 느끼는 것은 오직 이 메시지가 유효한지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흔히 말하듯 실용성을 검증하고 싶은 것입니다 세상에는 실용주의 자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온갖가지 형태의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순전히 신체적인 문제나 정신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기도 하고, 마음과 감정의 문제나 영의 문제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실망스러운 일이나 인생의 큰 상실을 겪은 경우도 있습니다. 모두 경험해서 알듯이, 수없이 많은 문제가 사방에서 우리를 덮쳐 옵니다. 다들 이런저런 방식으로 삶이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고 결국 자신의 패배를 깨닫습니다. 그래서 해결책을 찾으려 합니다. 세상은 이렇게 답을 찾는 우리에게 그 나름의 치료책들을 내놓습니다. 책이나 광고나 신문이나 단체들을 보십시오. 우리가 처한 자리에서 우리를 만나 주고 어려운 처지에서 구해 주겠노라 제안하는 곳이 무수히 많음을 알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제안에 대해 다수가 던지는 질문은 오직 한가지. "저 제안은 유효한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유일한 시금석으로서, 그들은 다른 시금석을 고집하는 우리를 현학적이고 까다로운 자들로 여깁니다.
그러나 거듭 말씀드리건대, 무엇보다 먼저 검증해야 할 것은 메시지의 원천과 권위입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순전히 실용성만 따지는 것은 부족할 뿐 아니라 잘못된 시금석이기 때문입니다. 삶에는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진리가 확실히 첫 자리에 와야 합니다. 최신 지식을 아노라 주장하는 사람. 특히 순수하게 과학적인 사고를 하노라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두뇌와 이해력과 추론 능력과 증거 감별력과 분별력과 선별 능력이야말로 인간의 최고 자산이라는 말에 동의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의 가장 큰 고도의 능력이라면 사용해야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정신은 인간의 가장 큰 자산입니다. 결국 인간이 동물과 다른 이유이자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특징입니다. 동물은 본능으로 움직이지만, 인간은 본능보다 고등한 정신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확실히 이 능력을 사용하고 작동시켜야 합니다. 정신과 이성과 분별력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은 삶의 시금석과 기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어떤 평가나 판단도 내릴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오늘날 인간에게 제시되는 여러 가지 무효한 치료책들의 차이가 여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에게 생각할 것을 요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감정적인 것이나 최루제로만 여기는 사람보다 더 무지한 자는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교회가 그런 인상을 줄 때가 있다는 것. 사람들이 그저 앉아서 노래만 하며 그 노래에 취해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저도 분명히 압니다. 감정이 격앙된 나머지 아무 말이나 듣고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나오는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더욱 유념하라고 말하며,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라고 말합니다(사 1:18). 복음은 스스로 진리라고 주장하는데, 진리는 항상 정신에 먼저 찾아와 생각할 것을 요구합니다.
도움을 주겠다는 세상의 제안을 실용적으로 검증하는 것에 반대하는 두 번째 이유는, 증상만 살피고 원인은 무시한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질병과 증상은 엄연히 다른 것입니다. 증상은 질병에서 유발된 현상으로 증상이 곧 질병은 아닙니다. 질병의 발현일 뿐입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아플 때 질병보다 증상에 관심을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숨이 가쁘거나 열이 오르는 등의 증상을 금세 감지합니다. 물론 환자가 늘 바라는 바는 그 증상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증상을 진정시키는 것은 지극히 옳고 좋은 일이지만, 한 가지 조건이 따릅니다. 그 증상을 일으킨 질병을 알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심한 복통만 진정시켜 주길 바라는 환자가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통증 자체는 의사가 주사만 놓으면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의사는 통증의 원인을 찾기도 전에 주사를 놓는 것이 범죄임을 잘 압니다. 혹시라도 환자가 죽으면 책임을 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증상의 원래 목적은 원인이 되는 질병에 주목하게 하는 것입니다. 원인을 찾으면 이를테면 환자가 맹장염이라는 진단이 나오면 - 수술을 해야 목숨을 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질병의 원인을 모른 채 중상만 진정시키는 주사를 놓는 것은 무서운 잘못입니다.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았는데 편안해지는 것보다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명백한 실례를 또 한 가지 들어 보겠습니다. 걱정을 밀치고자 술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걱정에 짓눌린 나머지 그렇게라도 긴장을 풀고 싶기 때문이며, 술을 마시면 잠시나마 걱정을 잊고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술에 취해 잠시 잊는다고 해서 문제나 질병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심히 위험한 일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아차리든 알아차리지 못하든, 이 세상과 삶 속에서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영들이 존재합니다. 성경이 성령을 거룩한 영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영들과 구별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 죄인들만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신"이 존재합니다(고후 4:4). 세상에서 위력을 떨치는 악한 영들이 존재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가장 큰 근거는 하나님의 아들께 있습니다. 그는 마대복음 24:24 에서 악한 세력이 택하신 자들조차 미혹된 만큼 교묘한 역사와 이적과 기사를 행한 날이 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악한 세력도 선한 행실을 위조해 낼 수 있습니다. 병을 고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며 이적을 행하시는 성령의 일을 똑같이 행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이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변하라"라고 권하며 (요일 4:1).
요일4: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고 권하는 것입니다(살전 5:21).
살전5:2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단순히 '이러 이러한 일이 일어났으니 좋은 것임이 틀림없다"라고 속단하면 안 됩니다. 성령이 일하시듯 악한 영들도 일하기 때문에, 시험하고 검증해서 좋은 것만 취해야 합니다.
제가 실용주의적 관점을 거부하는 마지막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분석에서 우리는 자신의 감정이나 행복에만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상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내가 정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일시적 안도감이나 특징 문제의 해결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에 앞서 내가 어떤 상태로 하나님을 대면하게 될지, 특히 죽은 후 어떤 상태로 하나님의 심관대 앞에 서게 될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세상과 이생의 많은 것이 일시적 안도감을 줄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단체가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심리학도 도움을 주고, 많은 사교들도 도움을 줍니다. 기분이 나아지게 해줍니다. 그러나 이런 안도감을 얻었다고 해서 이제는 괜찮다고 생각하며 '난 아무 문제 없다"라고 한다면,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그를 만날 준비를 하지 않은 채 살아간다면, 일시적 안도감을 주는 그것이 곧 지옥의 사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무서운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사람들은 일시적 안도감에 만족한 나머지 영원한 사안들을 무시한 채 오직 이런 것들에서 위로와 위안을 찾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물론 이런 것들을 통해서도 치료받고 행복해질 수 있으며 걱정을 떨칠 수 있습니다. 몸이 건강해졌다고 느낄 수 있으며 인생의 놀라운 인도를 받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과 영원한 운명은 어찌할 생각입니까?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이런 것들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일시적 만족을 주는 그것이 오히려 가장 큰 원수가 될 수 있습니다.
복음이 자신의 말을 들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그 원천과 권위 때문이며, 그것이 주어진 방식 때문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요약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복음을 들어야 할 진정한 이유, 지난 분석에서 살펴본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지적합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다양한]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 1:1-2). 이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2:4에서 하나님이 친히 이 메시지를 증언하셨다고 말합니다. 성경이 시종일관 주장하는 바가 이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이 치유되고 안도감을 얻으며 행복해질 방법을 알려 주는 인간의 사상 및 이론을 고찰하고자 교회에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심리학이나 그 비슷한 분야를 공부하는 것은 전혀 잘못이 아니지만, 이 메시지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출발합니다. 성경은 스스로 인간의 책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신성한 책이라고 주장합니다. 자신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메시지를 주신다고 시종일관 주장합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책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시는 책입니다. 인간이 자기 문제를 풀어 나가는 책이 아니라, 하나님이 해결책을 알려 주시는 책입니다.
복음 메시지는 이처럼 유일무이한 것으로서, 우리가 복음을 들어야 하는 최고의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있고, 그들의 실패를 보고 있으며, 세상이 심한 곤경에 처한 모습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이제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때 아닙니까? 이스라엘 자손의 역사를 보십시오. 그들도 다른 백성들의 말을 듣다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오면 그때마다 다시 말씀해 주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런 일이 얼마나 자주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제가 전하는 메시지가 하나님의 메시지라는 확신이 없다면 이처럼 강단에서 설교하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아는 내용은 전부 하나님의 책에 있는 것입니다. 저도 예전에 인생에 대한 여러 이론과 사상을 가지고 실천해보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와 달리 성경은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이 메시지를 들어야 하는 첫 번째 중대한 이유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복음이 하나님의 메시지일 뿐 아니라 특별한 방식으로 주신 메시지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통해 주신 메시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모여서 고찰하는 것은 한낱 이론과 사상이 아닙니다. 사실과 역사입니다. 인간이 여러분의 문제와 어려움들을 해결한 방법으로 제시하는 것들은 다 이론이요 사상이지만, 복음은 다릅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한낱 이론과 사상이 아닙니다. 세상에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과 그의미에 대한 기록입니다.
복음이 첫째로 권하는 바는 명백한 사실들을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특정 문제는 그만 잊으십시오.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없으며 똑같은 문제 또한 없습니다. 어떤 이는 행복을 구하고 어떤 이는 걱정에서 벗어나길 바랍니다. 어떤 이는 건강이 회복되길 구하고 어떤 이는 인도받길 바랍니다. 죄와 유혹에 빠져 심한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은 깨끗하게 씻음받고 도덕적인 힘을 얻길 바랍니다. 애정을 다해 권하건대, 그런 문제들은 그만 잊고 확실한 사실들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사실들을 직시해야 합니다. 살펴보길 거부하며 무시하면 안 됩니다. 세상에 분명히 일어났던 그 일들을 마치 처음 살펴보듯 함께 살펴봅시다.
우리가 고찰해야 할 복음 메시지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기자가 "주"라고 부르는 분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은 옛적에도 사람들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들을 연달아 세워서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이 하실 일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 같은 사람들을 취하여 그들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와 본질적으로 다른 일이 일어났고, 교회는 그것을 전한 소명을 받았습니다. 제가 '주'라고 부르는 분, 나사렛 예수께서 친히 비유로 이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자기 포도원에 계속 중을 보냈는데 일꾼들이 냉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결국 자기 아들을 보내며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마 21:37). 그 자리에 있던 바리새인과 다른 이들은 이것이 자신들을 가리켜 하신 말씀임을 알았습니다.
신약성경에는 2천 년 전 일어난 한 비상한 사건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오후, 천사가 한 어린 처녀를 찾아와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처녀는 당황해서 물었습니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눅 1:34) 천사는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라고 하면서(눅 1:37), 성령이 처녀에게 임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눅 1:35). 처녀는 그 말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처녀는 다윗 가문과 계보에 속한 약혼자 요셉을 따라 베들레헴으로 호적 신고를 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여관은 만원이었고, 해산한 여인에게 방을 내주는 사람 하나 없었습니다. 인생의 이기심이란 그런 것입니다. 처녀는 짐승들이 사는 마구간을 찾았고 거기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때 또 다른 비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목자 여러 명이 찾아와 말하기를, 밤에 들에서 양떼를 지키는데 천사들이 나타나 구유에 누운 아기가 있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와보니 정말 천사의 말대로 아기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박사들도 동방에서 찾아왔습니다. 하늘에 나타난 특별한 별의 인도를 받고 찾아왔습니다.
주님이 열두 살 때 성전에서 율법 박사들을 당혹케 하신 일도 기억하기 바랍니다. 서른 살 청년으로 세상에 나와 사람들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설교, 헤롯의 군사들이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라고 했던 설교를 시작하신 일과 세상에 없던 놀라운 가르침을 주신 일도 기억하기 바랍니다 (요7:46)
요7:46 하속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그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나병 환자를 고치시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물결에 명하여 광풍도 잠재우셨습니다. 사람들은 실제로 그를 보았고 그와 함께 살았으며, 그가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는 내내 엄청난 주장을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라는 그의 부르심을 받고 곧장 일어나 따른 사람도 있었습니다(마 9:9).
마9: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사복음서를 직접 읽어 보십시오. 결국 그는 체포당하여 누가 보아도 연약한 무방비 상태로 무참히 나무에 못 박히셨습니다. 거기에 달려 무서운 고통을 겪다가 평소 처형에 소요되는 시간에 훨씬 못 미쳐 숨을 거두셨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시신을 내려 무덤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셋째 날 아침에 가 보니 시신이 없었습니다.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는 다시 살아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문을 전부 닫아걸고 숨어 있던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시고 음식을 드셨습니다.
이것은 전부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일차적으로 이런 사실들에 귀 기울일 것을 요청합니다. 이분이 바로 하나님의 외아들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다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통증이나 아픔이나 불행함이나 비참함이나 삶의 인도에 골몰한 것이 아니라 이분을 대면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처럼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와 긴밀히 상관된 일로서, 성경은 이일의 정확한 의미를 알 때까지 쉬거나 마음을 놓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그가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일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 일에 담긴 의미가 무엇입니까?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전부 사실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일을 자세히 설명해 줍니다. 인류에게 계속 말씀해 오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하나님 품속에 계셨던 독생자, 그 본체의형상을 보내 주셨다고 합니다. 세상에 보내신 이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들은 선지자들보다 뛰어나신 분이요 천사들보다 뛰어나신 분입니다. 진에는 친사들을 통해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세상에 메시지를 주셨던 하나님이 가장 높은 천사보다 뛰어나신 독생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이 일의 중요성을 모르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처럼 자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서 말씀하셨다면 마땅히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복음 메시지는 이런 원천에서 나왔고 이런 권위를 가진 것이기에 주목해야 합니다. 외아들을 통해 주신 말씀에도 유념치 않는 자는 제정신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복음 메시지는 이런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메시지를 들었어야 했습니다. 그들에게 이 메시지가 전파되었습니다. 나사렛 예수께서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메시지가 전파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은 그의 출생과 그가 행한 기적과 그의 가르침과 그 자신의 주장으로 입증되었을 뿐 아니라 특히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입증되었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롬 1:4). 이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이 모든 사실이 진실임을 어떻게 알지요?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이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이것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다양한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 사도들이 우리에게 이 사실들을 알려 주었습니다. 첫 전달자들, 우리와 다름없는 사람들, 기독교회를 만들고 세운 사람들 이후 모든 시대에 전할 메시지를 물려준 사람들이 이 사실들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들이 처음부터 설교하고 증언했기에 우리가 이 사실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3년간 주님과 함께 지냈습니다. 그중 많은 이들이 그가 행하신 기적을 목격했습니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장면을 보았고, 부활하신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중인으로서 이 모든 사실을 널리 전파했습니다. 하지만 왜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하지요?"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성품을 조사해 보면 전부 믿을 만한 증인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랑하는 이 사실들을 증언하기 위해 죽음까지 불사했습니다. 잔혹한 독재자들이 원형 경기장 사자에게 내던질 때도 마음대로 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복음 메시지를 위해 고난을 감수한 그들의 태도나 성품만 우리에게 확신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다양한 능력, 즉 사도들의 메시지를 입증하시고 친히 증언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은사들도 확신을 줍니다. 이들이 능력 있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면 기독교회는 생겨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순절 날 3천명이 회심한 이래 교회는 계속 확산되었습니다. 사도들은 기사를 행했고, 아무도 설명할 수 없는 비범한 은사를 받았습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 교회가 세워지고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그들의 메시지를 입증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똑똑한 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보며 "저런 자들이 이런 소란을 일으켰다고?" 하면서 이상히 여겼습니다. 그들은 평범한 어부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도자들이 곧 기억해 낸 사실은 그들이 예수와 함께 있었다는 것입니다(행 4:13).
행4:13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표적과 성령의 나타남이 없었다면 그들은 무시당했을 것이고, 수백 년 전에 벌써 잊혔을 것이며, 우리는 그들의 말을 듣지 못했을 것이고, 기독교회와 기독교 메시지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복음의 사실들에 더욱 유념해야 하는 마지막 이유는 이것이 복되신 삼위일체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 없이 이 이유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복음에 유념해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들을 통해, 성령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주고 계십니다. 그 메시지가 전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요청합니다. 이 사실들을 직시하십시오 이 사실들이 여러분에게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안 때까지 한 순간도 쉬거나 마음을 놓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 궁전을 떠나 세상에 오셨다는 이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가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십자가 죽음의 자리로 나아가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굳이 죽으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주님 자신도 피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천사 열두 군단에 명령을 내려 빠져나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한사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고, 거기에서 죽기를 고집하셨습니다. "이를 내게서 태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 10:18).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과시하시기 위해서였습니까? 부활 사건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성령을 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시 한 번 간청하건대, 여러분이 매달리고 있는 고민거리와 걱정거리, 몸의 건강 인도의 필요성을 비롯한 모든 문제는 그만 잊으십시오. 중요한 문제는 오직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셔서 제가 말한 이런 일들을 하신 것이 여러분과 무관하다고,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가 세상에 와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직 그것만이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용서하실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하나님과 화목케 하실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지옥에서 구해 내 영원한 지복을 누리게 하실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이런 사실들에 더욱 유념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는 방책들, 그의 오심과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는 방책들을 통해 일시적 위안과 만족을 얻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향정신성 약물이나 진통제나 술처럼 이런 방책들도 여러분을 더 행복하게 해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여러분을 분리시키는 죄의 문제이며 여러분의 영혼입니다. 여러분과 하나님의 관계이며 여러분의 영원한 운명입니다. 그리고 그 해결책은 오직 복음뿐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사실들에서 떠내려가지 않도록, 복음의 사실들을 등한시하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각 사람과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며 이 유한한 세상과 영원한 세상에서 오직 자신만 줄 수 있는 축복을 주기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확실히 알 때까지 복음의 사실들에 유념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