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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립 태국군의 개요와 역사
Royal Thai Armed Forces
왕립 태국군
Royal Thai Armed Forces กองทัพไทย |

(사진) 태국 국방부의 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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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직 |
왕립 태국 육군
왕립 태국 해군
왕립 태국 공군 |
Leadership |
군 통수권자 |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 |
국방장관 |
Prawit Wongsuwan 대장 |
군총사령관 |
Songkitti Jaggabatra 대장 |
인적자원 |
군복무 연령 |
21-49 |
징집 |
만 21세 |
이용가능한
인적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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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1,490만 3,855명
(15–49세: 2005년 추정), 여성 1,526만 5,854명
(15–49세: 2005년 추정) |
군복무
적합 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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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1,039만 6,032명
(15–49세: 2005년 추정)
여성 1,148만 7,690명
(15–49세: 2005년 추정) |
매년
징집연령에
도달하는 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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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52만 6,276명
(2005년)
여성 51만 4,396면
(2005년) |
현역 병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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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만 6,600명
(계급: 14단계) |
예비군 병력 |
20만명 |
군사비 |
국방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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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010년도
세계 제31위 규모
51억 800만 달러 |
GDP 대비 |
1.8% (2005년) |
군수산업 |
군수물자
수입국가 |
United States
United Kingdom
Germany
Italy
Israel
France
Russia
Sweden
Ukraine
China
Spain
Canada
Australia
Czechoslovakia
Brazil
Singapore
Switzerland
Belgium
South Africa
Austr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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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립 태국군"(Royal Thai Armed Forces, กองทัพไทย[Kongthap Thai])은 태국의 군대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왕립 태국군"은 다음과 같은 군사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다.
* "왕립 태국 육군"
(Royal Thai Army, กองทัพบกไทย)
* "왕립 태국 해군"
(Royal Thai Navy, กองทัพเรือไทย, ราชนาวีไทย)
- [해군 예하] "왕립 태국 해병대"
(Royal Thai Marine Corps, นาวิกโยธินไทย)
* "왕립 태국 공군"
(Royal Thai Air Force, กองทัพอากาศไทย)
* 여타 민병대들(준 군사조직).
1852년 몽꿋(Mongkut: 라마 4세) 국왕의 지시로 창설된 "왕립 태국군"(Royal Thai Armed Forces)은 상비군 체제로서, 이는 당시의 서구열강들의 위협이나 식민지화 시도에 대항하기 위해 유럽 스타일로 훈련받은 군대를 보유하고자 한 목적을 갖고 있었다. 그 다음 국왕인 쭐라롱꼰(Chulalongkorn: 라마 5세) 왕은 1887년 상시적 군 총사령부인 "국방부"(깔라홈 부, Kalahom Department, กระทรวงกลาโหม)를 설치했다. 원래 "깔라홈 부"라는 조직과 "시암 군대"(military of Siam)는 13세기의 "수코타이 왕국" 시대부터 존재하고 있었다.(주1) 실제로 시암의 왕들에 관한 역사는 수많은 군사적 정복 일화와 군사력에 관한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다.(주2)
1932년 민간인 관료들의 지원을 받은 군부가 절대왕정을 전복시키고 입헌적 제도를 수립했을 때부터, 태국의 군부는 태국 정치에서 지배적 위치로 부상하며 상황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체제는 여러 총리들과 쿠테타들의 역사를 탄생시켰고, 가장 최근에는 "2006년 쿠테타"로 나타나기도 했다.
오늘날의 왕립 태국군은 약 30만 6,600명 정도의 병력을 갖고 있다. "왕립 태국군의 수장"(จอมทัพไทย: Chomthap Thai)은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라마 9세) 국왕이 맡고 있다.(주3) 하지만 푸미폰 국왕의 이러한 직위는 단지 상징적 성격만을 지닌다.
"왕립 태국군"은 국무위원인 국방부장관이 이끄는 "국방부"로부터 관리를 받고(군정권), "왕립 태국군 총사령부"(Royal Thai Armed Forces Headquarters, กองบัญชาการทหารสูงสุด=합참본부)로부터 작전지휘 명령을 받고 있다(군령권). "왕립 태국군 총사령부"의 수장은 "국방총사령관"(=합참의장)이다.(주4)
태국의 헌법은 모든 태국 국민들은 국방의 의무를 갖고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주5) 하지만 실제로는 추첨을 통해 뽑힌 만 21세의 남성들만 군사훈련을 받는다. 추첨에서 뽑힌 장정들은 24개월간 군대에서 의무적으로 복무하거나, 학력 정도에 따라 18개월 간의 공익봉사요원으로 복무해야만 한다.(역주)
"왕립 태국군의 날"(국군의 날)은 1월 18일로서, 이 날은 "아유타야 왕국"의 나레수완(Naresuan) 대왕이 1593년에 버어마의 친왕(우빠랏: 왕세자와 유사함)이 이끄는 군대를 격파한 날을 기념하는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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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왕립 태국군의 임무
"왕립 태국군"의 주된 임무는 태국의 주권 및 영토통합성을 수호하는 것이다. 또한 "왕립 태국군"은 국내외에서 발생하는 군주 및 귀족정치에 대한 위협에 대해서도 보위를 한다.(주6)
이러한 임무와 별도로, "왕립 태국군"은 공공질서를 확립하고, 민간 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사회개발 프로그램들에도 참여한다. 또한 국가적 재해에서 발생한 이재민들을 구호하고, 마약단속 활동의 책임도 지고 있다.
최근들어 "왕립 태국군"은 유엔 평화유지군 파병 및 1999~2002년 사이의 "동티모르 다국적군"(International Force for East Timor: INTERFET)에도 파병을 하여 국제적 위상과 역할을 높여나가고 있다.(주7) 또한 이라크 다국적군에도 파병하여, 2003~2004년 사이에 423명의 병력들이 이라크에서 활동하기도 했다.(주8)
2. 왕립 태국군의 참전 역사
"왕립 태국군"은 국내외의 여러 분쟁들에 참전한 역사를 갖고 있지만, 그 대부분은 동남아시아 지역들에서 발생한 것이다. "왕립 태국군"이 자국 영토 내로 침략을 당한 사건은 1941년 12월 일본군이 침공해들어와 영토를 장악했던 일이 유일하다. "왕립 태국군"이 외국 영토에서 발생한 갈등에 참전한 것은 영토분쟁에 관한 것이거나 아니면 유엔의 깃발 아래에서였다.
2.1. 프랑스-시암 전쟁 : 1893년 (Franco-Siamese War)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프랑스의 세력이 급속도로 팽창하면서, 프랑스와 시암(태국)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다. 라오스를 평화적 수단으로 접수하고자 했던 프랑스는 오귀스트 파비(Auguste Pavie: 1847~1925)를 대표로 하는 외교사절단을 쭐라롱꼰 국왕에게 파견했다. 하지만 이러한 외교적 시도가 수포로 돌아감으로써, 양국 사이의 전쟁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프랑스 군대는 태국 북동부 지방을 넘어들어와 진격하면서, 군함 2척을 방콕으로 보내 "빡남 사건"(Paknam Incident)을 일으켰다. 결국 시암은 프랑스의 최후통첩을 받아들여, 라오스의 종주권을 프랑스에 넘겨주었다.(주9)
2.2. 제1차 세계대전 : 1917-1918
워치라웃(Vajiravudh: 라마 6세) 국왕은 1917년 7월 22일 "동맹국"(Central Powers: 독일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제국, 불가리아 간의 이중 동맹)에 선전포고를 선언하고, "3국 협상"(Entente Powers: "연합국"[Allied Powers]이라고도 부르며 프랑스, 러시아, 영국 동맹을 말함) 측에 서서 "유럽의 서부전선"(Western Front)에 파병을 결정했다.

(사진) 1919년 7월 14일, 파리의 개선문을 통과해 행진하는 시암 원정군의 모습.
육군원수 짜까퐁 푸워낫(Chakrabongse Bhuvanadh, จักรพงษ์ภูวนาถ: 쭐라롱꼰 국왕의 40번째 자녀) 왕자가 지휘하는 "시암 원정군"(Siamese Expeditionary Force)은 현대식 장비로 무장한 1,233명의 병력으로 구성됐다. 이 원정군에는 일부 공군 병력과 의료부대도 포함됐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시암은 아시아에서 유럽에 대해 무력으로 독립을 유지한 유일한 국가였다. 시암의 참전병력은 소수였지만 그 파병 성과는 매우 좋았다. 미국, 프랑스, 영국과 체결한 불평등 조약들이 완전 폐기되거나 개정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주10)
이 원정군은 파리의 개선문(Arc de Triomphe) 아래를 행진하기도 했다.(주11)
2.3. 프랑스-태국 전쟁 : 1940-1941 (Franco-Thai War)
1940년 10월에 시작된 이 전쟁은 태국의 현대사에서 유일하게 침략전쟁으로 기록될 수 있는 사건이다. 쁘렉 피분송캄(Pleak Phibulsonggram, แปลก พิบูลสงคราม) 총리의 극우(파시스트) 정권은 프랑스가 비시정권(Vichy regime: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 위성정권) 하에서 약화된 틈을 타서, 상실했던 영토를 되찾고 갈등중이던 지역들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정리를 하고자 했다. 동시에 이 전쟁은 피분송캄 원수가 주도하던 태국 민족주의 정책을 지지해줄 목적도 갖고 있었다.(주12) 이 전쟁은 흐지부지 끝이 났다. 갈등이 있던 영토들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부터 태국으로 이양되었다.
2.4. 제2차 세계대전 : 1941-1945
일본은 영국령으로 되어 있던 인도와 말라야(Malaya: 현재의 말레이 반도 남부)를 공격하기 위해, 태국을 군사기지로 사용하는 일이 필요해졌다. 영국과 일본이 대립을 하게 되자, 피분송캄 총리는 외형적으로는 중립적 자세를 보였다.
하지만 1941년 12월 8일 이른 아침, 일본이 일방적으로 침공을 해오면서 이러한 정책은 끝이 났다. 일본은 태국 동부와 남부의 9곳에서 동시에 침공을 해왔고, 저항도 미약한 편이었다. 피분송캄 총리는 오전 7시 30분에 적대적 행위를 중지토록 명령한 후, 일본과 재빨리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그리고 일본군이 태국 영토를 통해 이동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후 태국은 추축국(Axis powers: 독일, 일본, 이태리 동맹) 세력의 한 부분이 되었다.
한편 이러한 정책에 반기를 든 지하 대(對)-일본 저항세력인 "자유태국 운동"(Free Thai Movement, ขบวนการเสรีไทย, Khabuankarn Seri Thai)이 발생하여, 외국의 지원을 받아 매우 적극적으로 활성화되었다. 이 운동은 대단히 성공적이었고, 전쟁이 끝난 후 적성국들과도 보다 우호적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하여, 태국 사회의 전후 회복에도 도움을 주었다.(주13)(주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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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국에 주둔했던 일본군 장교와 태국 여성의 못다이룬 사랑이야기를 주제로 한 <쿠캄>은 그 주제가와 함께 아직도 태국인들에게 친숙한 작품으로 남아있다. 짧은 결혼생활을 뒤로 한채 이들 부부는 영원한 이별을 한다. 주제가 역시 일본 엔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
2.5. 한국전쟁 : 1950-1953 (Korean War)
유엔이 한반도에서 발생한 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정하자, 태국은 약 1,294명의 병력을 가진 "보병 제21연대"를 파견했다.또한 4척의 전투용 함정들과 1개 공군 수송대를 유엔군 사령부에 배속시켰다. 당시 파병된 부대는 상당한 고통을 겪었고 129명의 전사자를 남겼다. 태국군 파견대는 1955년 귀국했다.(주15)
2.6. 베트남 전쟁 : 1954-1975
태국과 베트남은 지리적 근접성이 있기 때문에, 방콕 정부는 베트남 전쟁의 진행상황을 예의주시했다. 하지만 1963년 미국이 전면적으로 개입하기 전까지는, 이 전쟁에 대한 태국의 개입은 비공식적으로 진행되었다. 전쟁기간 중, 태국은 자국 영토에서 미군이 비행장 및 군사기지를 사용하는 일을 허락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많은 인적 자원과 자원을 투입하여 지원했다. "왕립 태국군"은 이 전쟁에서 1,351명의 전사자를 배출했다. 하지만 태국은 베트남에서보다도 1964~1972년 사이에 라오스에서 진행된 "비밀전쟁"(Secret War)과 은밀한 공작들에 더 많이 개입했다.
1975년 방콕과 워싱턴 당국 사이의 관계가 냉각되면서 미군은 결국 태국에서 철수했고, 그에 따라 이 전쟁에 대한 태국의 개입도 끝이 났다.
2.7. 공산 반군과의 전투 : 1976년-1980년대
베트남에서 공산당이 승리한 일은 1920년대부터 존재하고 있던 태국의 공산주의 운동 역시 고무시켰다. 1976년 발생한 "탐마삿대학 학살사건" 및 타닌 끄라이위시안(Tanin Kraivixien, ธานินทร์ กรัยวิเชียร) 총리 정부의 극우적이고 억압적인 정책이 이어지면서, 공산주의 운동의 동조자들은 더욱 늘어났다.
1970년대 말 태국 공산반군은 약 12,000명 정도의 병력으로 추정됐다.(주16) 이들은 대부분 라오스 및 캄보디아 접경지역을 따라 태국 북동부 지방에 기지를 두고 있었다. 공산반군들은 1980년대에 대부분 궤멸되었다. 1982년, 쁘렘 띠나술라논(Prem Tinsulanonda) 총리가 공산반군들에 대한 일반사면령을 내렸다.
2.8. 베트남 군대의 태국 국경 위협 : 1979-1988
1978년 베트남 군대가 캄보디아를 침공했다. 라오스와 캄보디아로 진격한 공산 베트남의 군대는 그 총 병력수가 30만명에 달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캄보디아를 완충국가로 여기고 있던 태국 정부는 커다란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결국 태국군은 국경지역에서 베트남 군대와 소규모 접전들과 마찰을 빚게 되었다. 하지만 전면적이고도 공식적인 선전포고는 결코 이뤄지지 않았다.
2.9. 태국-라오스 국경 전쟁 : 1987-1988
이 전쟁은 라오스의 사인야불리(Sainyabuli) 도와 태국의 피사눌록(Phitsanulok) 도 사이에 있는 3개 마을 영유권을 놓고 발생한 소규모 영토분쟁이었다. 이 전쟁은 휴전이라는 불완전한 상태로 남게 되었고, 양측 군대에서 도합 1,000명 가량의 사상자가 발생했다.(주17)
2.10. 동티모르 다국적군 파병 : 1999-2002
동티모르 사태가 끝난 후, "왕립 태국군"은 여타 28개국 군대와 더불어 "동티모르 다국적군"(INTERFET) 소속으로 파병됐다. 태국은 또한 INTERFET 사령관으로 위나이 파티야꾼(Winai Phattiyakul, วินัย ภัททิยกุล) 중장을 파견하기도 했다.(주18) 동티모르의 딜리(Dilli)에 주둔했던 태국군은 1999년 10월 25일부터 2002년 5월 20일까지 활동했다.
2.11. 이라크 전쟁 파병 : 2003-2004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성한 후, 태국은 423명의 병력을 2003년 8월에 이라크로 파병했다. 이들은 건설 및 의료부대였다.(주19) "2003년 카르발라(Karbala) 폭탄테러"가 발생했을 당시 대부분 "왕립 태국군" 병력이 피해를 입어, 2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을 당했다.(주20)

(사진) "코브라 골드 2001"(COBRA Gold 2001) 훈련에서, 미국과 태국군 병력이 합동으로 훈련에 임하고 있다. ☞ 확대사진 바로가기
태국군의 이라크 파견 병력은 상당히 성공적인 활동을 벌인 것으로 평가받고 2004년 8월에 철수했다. 태국의 이라크 파병은 2003년 미국이 태국을 "비(非)-나토 주요 동맹국"(Major non-NATO ally)으로 규정한 데 따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주21)
2.12. 남부 이슬람 반군과의 전투 : 2004–현재
태국 남부의 얄라(Yala) 도, 빳따니(Pattani) 도, 나라티왓(Narathiwat) 도에서는 지난 2004년 이전부터 말레이계 주민들과 이슬람 교도로 구성된 반군들로 인해 소요가 지속되고 있다. 반군들은 지난 2004년부터 테러 공격 등을 감행하면서 공세를 강화했다.(주22)
이러한 상황에 대해 "왕립 태국군"은 강력한 무력진압으로 대응했다.(주23) 현재까지 태국군 병력 155명이 사망했고, 반군들의 경우 1,600명이 사살되고 1,500명 가량이 체포됐다. 그리고 민간인 사망자 역시 2,729명에 달한다.(주24)
태국 정부는 최근 들어 남부 소요사태에 대한 관할권을 민간 기구로 이양했다. 이러한 조치는 군대의 투입이 그다지 좋지 못한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주25)
2.13. 캄보디아-태국 국경 대치 : 2008-현재
지난 2008년 7월 "유네스코"(UNESCO)가 11세기경에 축조된 국경지역의 쁘레아위히어(Preah Vihear) 사원을 캄보디아 소유로 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이래, 캄보디아와 태국의 양측 군대는 민족주의적 긴장이 고조하면서 여러 차례 교전을 벌였다.
또한 작년 11월 캄보디아가 탁신 친나왓(Thaksin Shinawatra, ทักษิณ ชินวัตร) 전 태국총리를 캄보디아 정부 및 총리 개인의 경제자문위원으로 위촉하면서, 양국은 대사를 맞소환하는 등 외교적 교착상태에 빠지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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