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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전유성구리틀야구단 원문보기 글쓴이: 상혁애비
1991년 신일고 시절의 설종진(사진=설종진) |
‘설까치’. 1980년대 이현세 작가의 만화를 즐겨봤을 이라면 능히 기억할 이름이다. 만화주인공 설까치는 불운을 이기고, 마침내 성공을 거두는 야구선수의 대명사였다. 당시 소년들은 설까치의 아픔에 함께 가슴 아파했고, 그의 성공에 덩달아 기뻐했다. 흔하디 흔한 성공담의 주인공이었지만, 설까치는 엄혹하고 가난한 시절의 소년들에겐 대리만족 그 자체였다.
그즈음 현실에서도 설까치가 있었다. 설종진이다. 1991년 신일고의 설종진은 야구계에서 ‘까치’로 불렸다. 이유가 있었다. 설까치와 성(姓)이 비슷한데다 만화주인공처럼 설종진도 갖은 고난을 이겨냈고, 결국 고교 최고의 스타로 우뚝 선 까닭이었다. 1992년 중앙대에 입학할 때만 해도 설종진의 미래는 밝았다. 야구인들은 하나같이 설종진을 가리켜 “타격 정확도, 파워, 수비, 송구, 주루능력을 모두 겸비한 5툴 플레이어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2012년. 설종진은 과연 5툴 플레이어로 성장해 야구계를 호령했을까. 아니면 관심과 기대 속에서 사라져간 수많은 유망주처럼 조용히 야구계에서 사라졌을까.
박찬호의 한화 행으로 ‘92학번 세대’가 새롭게 조명받는 가운데 동 세대에서 가장 주목받았던 설종진은 현재 넥센 히어로즈의 2군 매니저로 활동 중이다.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현실 속의 설까치 이야기다.
한국시리즈 끝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구단들은 새 시즌 준비에 여념이 없어. 요즘 무척 바쁘지?
그렇지 뭐. 전남 강진베이스볼파크에 왔다갔다 하고 있어. 2군 선수들이 거기서 훈련하고 있거든.
한국시리즈도 엊그제 같지만, 우리가 벌써 마흔이라니 도통 믿기지가 않아. 20년 전 대학 새내기일 때가 정말 엊그제 같거든. 손을 뻗으면 그 시절이 손에 잡힐 것만 같다니까.
나이 먹는 게 다 그렇지. 20년이라, 참 세월 빠르긴 빠르네. (자세를 고쳐 앉으며) 그런데 무슨 일이야?
인터뷰하러 왔지.
누구?
너.
누구?
너, 설종진.
뭐, 나? 아니 왜?
왜는. 네가 고교 시절 가장 잘나가던 스타였으니까 찾아왔지. 20·30대 야구팬들과 만나면 92학번 야구선수 가운데 박찬호, 임선동, 박재홍(SK), 차명주, 송지만(넥센), 정민철(한화 코치), 조성민(두산 코치), 염종석(롯데 코치)은 잘 알고 있더라고. 하지만, ‘설종진’하면 잘 모르는 친구들이 많아. 반면 40·50대 야구팬들은 너를 잘 기억하고 있어. 1991년 전국대회에서 두 번이나 MVP에 올랐던 천재 야수였으니까. 한번은 내 또래 야구팬을 만났는데 네 안부를 묻는 거야. “미국으로 이민 간 다음 통 야구를 못 봤는데, 신일고 출신 설종진 선수 지금도 프로에서 뛰느냐”고 말이지.
그래? 요즘 친구들이야 날 모를 만도 하지. 우리 팀 젊은 선수들도 내가 뭐하던 사람인지 잘 몰라. 누가 옆에서 말해주면 네이버로 검색하고서야 “아, 매니저님 예전에 야구 잘하셨네요” 하지. 참, 옛날이야기네…옛날.
천재 야수의 탄생 그리고 폐결핵 고교 시절 설종진은 1번 타자였다. 발 빠르고, 타격 정확성이 뛰어난 설종진은 '당장 프로에 입문해도 통할 선수'로 꼽혔다(사진=설종진)
야구는 어떻게 시작한 거야?
서울 백운국민학교 5학년 때 시작했어. 학교에 야구부가 있었거든. 원래는 애들이랑 공터에서 연식공으로 야구하는 게 다였어. 한번은 야구부 애들이 쓰는 홍키공(경식공)을 손으로 쥐었는데 감이 좋더라고. 그러다 야구부에서 공개테스트를 했는데 내가 곧잘 했나 봐. 야구부 감독님이 “야구 한번 해볼래?”하시는 거야. 야구부 유니폼 보니까 나도 하고 싶어지더라고.
그래서 했어?
아니. 감독님이 집까지 찾아오셨는데 아버지가 “됐다”고 하셨어.
왜?
작은 형이 농구를 했거든. 집에서 운동선수는 한 명이면 족하다고 생각하셨던 거지.
그럼 포기한 거야?
그래도 하려고 했는데, 야구부에서 정식 선수가 아니라고 유니폼을 안 주는 거야. 난 유니폼 입으려고 야구부에 들어온 건데. 매일 추리닝 입고 캐치볼, 러닝만 하니까 재미가 없더라고. 그래 그만두려고 했어. 다행히 어머니가 찬성하시고, 아버지가 묵인하시는 바람에 정식 야구부원이 될 수 있었어.
대개 그 또래 애들은 부모님 앞에서 멋진 플레이를 보여주려고 애쓰잖아. 가뜩이나 아버지가 너 야구하는 거 반대했으면 그런 욕심이 더 크지 않았을까 싶어.
한번은 가락국민학교랑 연습경기를 하는데 그때 마침 아버지가 운동장에 오셨어. 그런데 내가 그만 뛰다가 무릎을 삐끗한 거야. 경기 중에 들것에 실려 나갔지. 집에 갔더니 아버지가 그러시더라고.
뭐라고?
“난 앞으로 네가 야구하는 거 안 본다”고. 막내아들이 안쓰러우셨던 모양이야.
정말 두 번 다시 안 오셨니?
6학년이 되고, 아마 첫 대회였던 걸로 기억해. 그때 우리가 개막전을 치렀는데, 아침 9시에 시작했거든. 난 나중에 알았는데 어머니가 “아버지가 네 경기 보러 야구장에 가셨다”고 하시더라고. 당시 아버지가 직장인이셔서 회사에 출근도장만 찍고, 야구장으로 오셨는데 우리팀 경기가 너무 일찍 하는 바람에 정작 경기는 못 보시고, 결과만 물어보고 가셨다고 하더라고. 그게…마지막이었어.
그때 이후로 야구장에 안 오셨구나.
그랬지. 일주일 있다 돌아가셨으니까.
그래?
폐암이셨어. 난 그전까진 까맣게 몰랐어. 아버지께서 멀쩡한 표정으로 “병원에 다녀오신다”고 했는데, 그날 병원에서 전화가 온 거야. “가족분들 빨리 병원으로 오시라”고. 중환자실에 갔더니 아버지가 호스를 주렁주렁 달고 계시더라고. 의사가 어머니한테 “오늘이 마지막이 될 것 같다”고 하셨어. 집으로 모시고서 4시간인가 있다가 돌아가셨어.
아버지가 네겐 병명을 숨긴 모양이야.
이상하긴 했어. 아버지는 아파트를 사려고 열심히 적금을 붓고 계셨거든. 그런데 내가 5학년일 때 갑자기 “상회(슈퍼마켓)를 하나 차려야겠다”고 하시는 거야. 결국, 그때 적금 깨서 상회를 차리셨어. 지금 생각하면 당신이 돌아가시면 남은 가족이 마땅히 먹고 살 게 없으니까 상회를 차리신 것 같아.
초교 6학년 때면 충격이 컸겠어.
야구고 뭐고 다 포기하려고 했지. 그런데 학교에서 “6학년까지만 야구하라”고 하더라고. 회비도 다른 학부모님들이 십시일반 모아 보태주시고. 문제는 중학교 진학이었어.
신일중으로 진학하지 않았어?
원래는 천안북중으로 가려고 했어. 거기서 회비랑 숙소비 전부 공짜로 해주겠다고 했거든. 그런데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객지로 보낼 수 없다”고 반대하셔서 무산됐어. 그러다 그 이야기를 신일중에서도 들었는지 회비를 면제시켜 주겠다고 하더라고.
중학교 때는 실력이 어땠어?
그땐 외야수랑 투수를 겸했는데, 아직 두각을 나타낼 땐 아니었어. 신일고로 진학하고서 조금씩 실력이 좋아졌지.
투수로서의 설종진도 뛰어났다. 낙차 큰 커브가 돋보였던 그는 조성민과 함께 신일고 전성시대를 열었다(사진=설종진) |
1989년 신일고로 진학했어. 기록을 보니까 1학년 때부터 스타팅 멤버로 뛰었더라고.
그랬지. 처음 대타로 나갔어. 안타 1개씩을 꼭 치니까 감독님이 스타팅 멤버로 출전시켜주시더라고. 한번은 무슨 대회였나 잘 기억이 안 나는데, 감독님이 나보고 “3루를 보라”는 거야. 그러면서 3루 펑고 훈련을 시키시더라고. 난 왼손인데 말이지. 이거 난감하더라고. 그래도 그땐 장난인가 했지. 그런데 그 대회 인천 동산고와의 4강전에서 3루로 선발출전했어.
왼손 3루수?
응. 전국대회 4강 이상에서 왼손 3루수가 나온 건 처음이라고 하더라고. 26년 전에 왼손 유격수는 있었어도, 3루수는 없었다고 했어. 그래도 실책 하나 없이 잘 막았어. 그때부터 좀 주목받기 시작한 것 같아.
하지만, 주목은 오래가지 못했어. 갑자기 폐결핵에 걸렸지?
6월에 열린 청룡기기 끝나고 기침이 나오는 거야. 감기약을 먹었는데도 이상하게 기침이 계속 나오더라고. 그래 병원 가서 X-레이를 찍었더니 폐결핵이라고 하더라고. “당분간 운동하지 말고, 푹 쉬라”고 하는데, 뭐 이건 청천벽력이 따로 없었지.
폐결핵이라면 만만히 볼 병은 아니야. 특히나 운동선수에겐 치명적인 질병이지.
난 원래 몸이 약한 편이야. 그런데도 초교 때부터 고1 때까지 한 번도 쉰 적이 없었어. 매일 경기에 나가거나 훈련했거든. 주변에서 그게 아마 발병 원인인 것 같다고 하더라고.
그래 그때부터 푹 쉬었어?
다음 해 2월까지 푹 쉬었지. 학교에서도 “나오지 마라”고 하대. 폐결핵이란 병이 집에서 쉬면서 잘 먹고 푹 쉬는 길밖엔 방법이 없다고 하더라고.
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일주일만 지나 봐. 몸이 근질근질하잖아.
나도 그랬어. 심심하다 못해 짜증이 나더라고. 그러다 여름방학이 되고 나서 모교인 백운초교로 놀러 갔어. 감독님이 나보고 “운동 삼아서 애들이나 가르치라”라고 하더라고. “알겠습니다”했지. 하루하루 애들 가르치러 나가는 게 낙이 된 거야. 그러다 전국대회를 앞두고 감독님이 부친상을 당했지 뭐야. 감독이 없는 상태에서 대회를 나갈 수도, 안 나가자니 열심히 노력한 게 아깝고. 결국 감독님이 서울시 야구협회에 잘 이야기해서 내가 감독대행을 맡게 됐어.
17살 감독의 탄생이었네.
그 대회에서 2연승하고 4강까지 갔어. 4강부턴 원래 감독님이 벤치에 앉으셨지. 그때 우리팀 주전선수가 누구였는지 아냐?
누구?
지금 롯데에서 뛰는 조성환이었어.
아, 그래? 그때도 지금처럼 진중한 스타일이었어?
사람이 어디 변하냐. 그때도 까불까불 한 거랑은 거리가 멀었어. 묵묵히 자기 일만 하는 스타일이었지. 다른 아이들한테 휩쓸려서 놀다가 덩달아 나한테 혼난 적은 있었지(웃음).
병은 언제 나은 거야?
원래 병원에서 “6, 8개월 재활하면 완치할 수 있다”고 했거든. 2학년 3월에 x-레이를 찍으니까 괜찮았어. 그때부터 다시 (야구를) 시작했어.
그렇게 오래 운동을 쉬면 몸이 예전같지 않을 것 같아.
그랬지. 몸이 ‘영’ 아니더라고. 2학년 땐 그래서 성적이 좋지 않았어. 그래도 살이 찌지 않아서 순발력은 살아있었지. 그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어.
1991년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했던 고교야구 1991년 한미일 고교야구대회에 출전했던 청소년대표팀. 손수레를 끄는 이가 휘문고 임선동, 오른쪽이 차명주, 박재홍이다
1991년 고교야구는 그야말로 춘추전국 시대였다. 서울은 설종진, 조성민 좌우 원투펀치에 강타자 강혁, 재간둥이 유격수 백재호, 캐넌히터 김재현이 버틴 신일고가 가장 돋보였다. 휘문고 역시 에이스 임선동이 버티고 있어 절대 만만한 팀이 아니었다. 임선동은 이해 열린 대통령배대회에서 대전고를 상대로 9이닝동안 삼진 20개를 잡으며 초고교급 투수로 우뚝 섰다. 선린상고 역시 이영우가 있었고, 배명고엔 1학년 4번 타자 김동주와 에이스 김상엽이 있었다.
부산 역시 강호가 많았다. 먼저 염종석, 손민한, 주형광 세 투수가 마운드를 지배하고, 공격과 수비에 모두 능했던 포수 진갑용이 버틴 부산고가 돋보였다. 경남상고는 의외의 복병이었다. 이해 전까지 경남상고는 부산에서 벌어지는 화랑기대회에서만 두 차례 우승했을 뿐 전국대회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우완 곽재성, 좌완 차명주가 마운드를 도맡고, 조준혁과 안명성이 타선을 이끌며 어느새 부산고를 압도하는 전력이 됐다. 특히나 안병환 감독의 이른바 ‘지옥훈련’으로 경남상고의 팀워크는 상상을 초월했다.
광주엔 투타를 겸비한 박재홍이 이끄는 광주일고가 가장 돋보였다. 광주일고엔 고교 내야수 랭킹 상위권이던 김종국(KIA 코치)도 있어 팀 전력이 매우 탄탄했다. 김종국은 이해 대통령배대회 충암전에서 1975년 김윤환 이후 처음으로 고교야구 3연타석 홈런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 밖에도 충남 공주고는 박찬호, 손혁 등 수준급 투수들과 야수 리더 홍원기가 똘똘 뭉쳐 다크호스로 통했다. 야구전문가들이 이해를 가리켜 “마지막 고교야구 황금 세대”라고 부른 것도 무리는 아닌 셈이었다.
폐결핵으로 1, 2학년을 허송세월로 보낸 셈이었어. 신일고 역시 그렇게 주목받지 못했고. 그런데 3학년이던 1991년 너와 신일고는 엄청난 상승세를 기록했어. 변화의 배경이 어디에 있었다고 봐?
3학년으로 올라가려는 시점에 신일중 양승호(현 롯데 감독) 감독님이 신일고 코치로 오셨어. 그때 양 감독님은 신일중에서 ‘전설의 46연승’을 기록하셨던 명장이셨어. 그런 분이 코치로 온 거였지. 감독님도 바뀌었어. 기존 신일고 박천수 감독님이 신일중 감독으로 가시고, 한동화 감독님이 신일고 사령탑으로 오셨지.
한동화, 양승호면 프로 출신 지도자였는데.
한 감독님이 그러시더라고. “앞으로 너흰 현실에 맞는 운동을 하게 될 거”라고 말이지. “내가 너희 모두를 프로와 대학으로 보내주겠다”고 했어.
현실에 맞는 운동?
그래, 한 감독님은 “이기려면 현실에 맞는 운동을 해야 한다”고 하셨어. 기존 감독실을 부수고 거기다 웨이트트레이닝장을 설치하신 것도 그런 이유였던 것같아. 당시 고교야구부 가운데 웨이트트레이닝장 갖춘 학교는 거의 없었거든. 지금 돌아보면 웨이트가 큰 힘이 됐던 것같아. 그리고 투수 인스트럭터로 좋은 분이 온 것도 큰 도움이 됐어.
누구였는데?
장명부 씨.
‘너구리’ 장명부?
내가 봤을 땐 조성민이 성장하는데 장명부 씨의 지도가 큰 도움이 됐어. 나도 (조)성민이랑 같이 배웠거든.
투수로서가 아니라 지도자로서의 장명부 씨는 어땠어?
투수의 개성에 맞게 재밌게 잘 지도해주셨어. 기억나는 게 있는데. 장갑을 그물망에 걸어놓고 “100구를 던져서 몇 개나 장갑을 맞추는지 체크하라”고 했어. 아마도 제구 향상을 위해 시킨 것 같아. 투수 체력훈련도 그전까지 우리는 러닝이나 쪼그려뛰기가 다였거든. 그런데 장명부 씨는 그런 거 안 시키고, 덤벨로 팔근육 만드는 법이나 수영으로 체력기르기 등을 많이 강조했어. 한 2개월 정도 수영하는데 정말 물속에서 땀이 나더라고.
한동화 감독이 팀을 재정비했지만, 정작 그해 시즌을 치른 이는 박천수 감독이었어.
이유가 있었어. 그땐 프로랑 아마추어랑 사이가 안 좋아서 프로 출신 지도자들은 벤치에 들어갈 수 없었어. 한동화 감독, 양승호 코치 모두 프로 출신이니까 두 분 모두 벤치에 못 들어가게 생긴 거야. 그래서 신일중에 계시던 박천수 감독님이 다시 신일고 감독으로 오시고, 한동화 감독님은 그만두셨어.
그해 첫 전국대회가 5월에 열린 대통령배였어. 결승에서 경남상고와 만났는데.
그때 경남상고엔 곽재성, 차명주, 조준혁, 안명성이 있었어. 다들 잘했지. 그래도 투수력만 치면 (조)성민이가 있는 우리가 한 수 위였어. 그런데 아쉽게 성민이가 팔이 좋지 않으면서 마운드에서 내려온 게 뼈아팠어.
6월에 열린 청룡기대회에선 4강전에서 광주일고에 패했어.
그땐 박재홍이 잘 던졌어. 지금도 돌아보면 내가 본 투수 가운데 (박)재홍이가 최고였던 것 같아.
그렇게 공이 좋았어?
재홍이 투구폼이 ‘딱’ 구대성 선배 폼이었어. 몸을 크로스로 꼬아서 던지기 때문에 팔이 안 보였어. 타이밍 맞추기가 정말 힘들었지. 속구도 시속 140km 이상은 나왔고. 몸쪽 공도 잘 던졌고 말이지. 고교 시절 재홍이 상대로 안타 친 기억이 없다니까(웃음).
7월 부산에서 열린 화랑대기에서도 4강에서 미끄러졌어.
그땐 또 부산고한테 졌어. 그때 부산고 투수진이 정말 괜찮았어. 3학년 염종석, 2학년 손민한, 1학년 주형광이 버티고 있었거든. 포수는 진갑용이었고. 그때 우리팀 타선 보면 내가 1번, 2학년생 강혁이 3번, 1학년생 김재현이 7번이었는데, 부산고 조두복 감독님이 우타자 상대할 땐 염종석, 손민한 내보내고, 좌타자가 나올 땐 철저하게 주형광을 쓰면서 우리팀 타선이 완전히 말렸던 게 기억나.
하지만, 8월에 개최된 봉황대기대회에선 달랐어. 신일고가 끝까지 뒷심을 발휘했어.
그때 우리는 봉황대기를 담담하게 준비했어. 이미 전국대회 4강 이상에 들어 대학진학엔 어려움이 없었거든. 속으로 ‘1회전에서 경남상고, 광주일고, 부산고를 만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 팀들한테 당했던 패배를 설욕하려고?
전혀! 그 팀들한테 지면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으니까 져도 강팀들과 붙어서 지자는 논리였지 뭐(웃음).
안병환 청소년대표팀 감독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선수들. 사진 맨 왼쪽에 서 있는 이가 설종진이다 |
8강에서 운명의 상대를 만나지 않았니?
휘문고랑 붙었지. 그때 마침 “봉황대기가 끝나고서 청소년대표를 뽑는다”는 소식이 전해졌거든. 성민이랑 나나 욕심이 생겨서 반드시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했어. 신문에선 ‘전국 고교 최고 에이스 빅뱅, 조성민-임선동 맞대결’이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했지.
당시 조성민과 임선동의 맞대결은 정말 초미의 관심사였어.
그때 성민이는 싱커가 굉장히 좋았어. 지금 생각하면 투심패스트볼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화랑대기에서 그 공으로 재미를 봤거든. 봉황대기에서도 그 공이 꽤 위력을 발휘했어. (임)선동이도 기가 막히게 던졌어. 속구 구속이 빨랐고, 슬라이더가 정말 예술이었어. 특히나 경기운영능력이 무척 뛰어났던 걸로 기억해.
결과는 신일고의 4대 1 승리였어.
휘문보단 신일 방망이가 좋았거든. 사실 그때 우리가 이긴 건 양승호 코치님의 공이 컸어.
어떤?
투수마다 쿠세(투구습관)나 독특한 투구패턴이 있잖아. 그걸 양 코치님이 잡아낸 거야.
어떻게?
그날 선동이가 컨디션이 좋지 않았는지 오른손 타자 상대로 몸쪽 공을 못 던지는 거야. 그걸 알고 양 코치님이 우리한테 “타석에 바싹 붙어서 바깥쪽 직구만 노려치라”고 하셨어. 처음엔 긴가민가했지. 그러다 5회가 지나니까 양 코치님이 “선동이가 잘 던지는 덴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걸 찾아내야 한다”고 하시면서 결국엔 투구패턴을 알아내셨어.
투구패턴을?
선동이 투구패턴은 단순했어. 몸쪽으로 속구 하나, 바깥쪽으로 속구 하나, 마지막으로 슬라이더로 유인하는 거였어. 커브는 보여주는 구종이었고. 특히나 주자 있을 땐 커브를 전혀 던지지 않았어. 그걸 알아차리니까 정말 바깥쪽 속구만 노리게 되더라고. 결국엔 선동이를 쓰러트릴 수 있었지.
4강 상대는 배명고였어.
그때 배명고 4번 타자가 1학년생이던 김동주(현 두산)였어. 에이스는 김상엽이었고. (김)동주는 그때도 공포의 4번 타자였어. 개인적으론 그때 무릎인대가 늘어나서 병원에서 대포주사 맞고 출전할 만큼 컨디션이 좋지 않았어. 지금도 생각나는데. 그때 병원에서 경기 시작 1시간 전에 진통제를 먹으라고 하더라고. 그런데 몸 풀고 뭐하다 보니까 약 먹는 시간을 놓친 거야. 뭐 어떻게. 경기 시작하기 바로 전에 먹었지.
졸리지 않디?
왜 아니겠어. 1회 초 중견수로 나갔는데 계속 잠이 쏟아지는 거야. 결국 외야에서 ‘만세’ 불렀다는 이야기 아니야(웃음). 다행히 1회 초 첫 타자까지 TV에서 광고가 나와 중계화면에 안 잡혔지, 그거 방송에 나왔으면 정말 창피할 뻔했어. 1회 초 노아웃 3루에서 조성민이 구원투수로 나와 잘 막아서 그나마 역적이 되지 않았어(웃음).
그 경기는 이겼지?
성민이의 투심이 그때도 위력을 발휘했어. 타자가 안 치면 스트라이크, 치면 내야땅볼이었거든. (김)동주도 그 공에 맥없이 물러나고 말았지.
결승에서 만난 선린상고엔 12대 1로 크게 이겼어.
그때 선린상고엔 이영우(현 한화 코치)밖에 없었어. 성민이가 또 등판해 이겼지. 그때 성민이 혼자서 6승을 따냈을 거야.
혼자 6승을 따냈지만, 정작 대회 MVP에 뽑힌 건 너였어.
성민이가 우수투수상, 난 미기상을 받기로 돼 있었어. 그때 내가 대회 타율 3위였거든. 그런데 막판에 내가 MVP가 됐어. 지금 돌아보면 아마 감독님이 상을 골고루 나눠주려고 나를 MVP로 추천하고, 다른 선수한테 미기상을 주신 것같아. 미기상 상장을 보니까 급하게 내 이름 지운 자국이 있더라고(웃음).
1991년 봉황대기에 우승한 신일고 야구부원이 기뻐하는 장면. 사진 맨 왼쪽이 설종진, 그 옆이 조성민이다(사진=설종진) |
신일고는 9월에 열린 마지막 전국대회였던 황금사자기대회에서도 우승했어.
그때 3학년은 완전 뒤로 빠져 있었어. 2학년 백재호, 강혁 1학년 김재현, 조인성 이런 애들이 지역예선전을 주도했어. 아, 그런데 황금사자기 앞두고 1, 2학년 투수들이 다 다친 거야. 투수가 없잖아. 감독님이 “종진이랑 성민이가 좀 도와줘야겠다”하시는 거야. 그때 내가 반 던지고, 성민이가 반 던졌던 것 같아.
공교롭게 황금사자기 MVP도 네 차지였어.
그때도 난 타율 3위였어. 투수로도 나섰지만, 성민이가 몸이 안 좋을 때 마운드에 올라가 대충 막은 것 뿐이었어. 그래서 MVP 욕심은 아예 있지도 않았어. 그런데 또 MVP로 내가 되더라고.
이유가 있었을까.
모르겠어. 꼭 한번은 당시 감독님이셨던 박천수 선생님께 물어보고 싶어. ‘왜 날 MVP로 뽑으셨느냐’고 말이지.
내가 조성민이라도 크게 낙담했을 듯싶어.
대회 끝나고서 회식을 하는데 성민이가 끝까지 나타나지 않더라고. 난 충분히 이해해. 나라도 서운했을 것같아.
지금은 신일고 야구부장인 박천수 전 신일고 감독은 설종진의 대회 MVP 2회 수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조성민이 맹활약한 게 맞았다. 그래서 우수투수상을 2회나 거머쥐었다. 투수로서는 최고 영예였다. 하지만, 타자는 우수타자상이라고 따로 없었다. 그렇다면 MVP를 타자가 수상하는 게 맞지 싶었다. 그래서 설종진이 MVP가 되도록 배려했다. 누가 실력이 낫고, 모자라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훗날 (조)성민이가 ‘감독님 그땐 서운했습니다’했다. 그러나 내 뜻을 전해 듣고 ‘껄껄’ 웃었다.”
당시 고교투수 ‘빅3’가 누구였다고 생각해?
임선동, 조성민, 경기고 손경수 같은데. 당시 손경수 공이 정말 좋았어. 약간 스리쿼터 스타일이었는데 바깥쪽 제구가 일품이었어. 무엇보다 공이 다 낮게 형성돼서 치기가 무척 어려웠어. 불행하게도 그때 경기고가 약해서 매번 8강을 통과하지 못했지. 그래서 신일고와 맞대결할 기회가 거의 없었어.
부산고 염종석, 대전고 정민철은 어땠니?
(염)종석이는 다른 건 몰라도 속구 구속이 ‘빅3’보다 좀 떨어졌어. 변화구도 밋밋했고. 정민철이 다니던 대전고는 전국대회에 거의 오르지 못하는 약체라, 전국대회에서 맞붙은 기억이 없어. 당연히 (정)민철이도 실력에 비해 다른 투수들보다 명성이 떨어졌지.
1991년 고교야구 최고 투수들. (사진 왼쪽부터) 휘문고 임선동, 신일고 조성민, 경기고 손경수, 공주고 박찬호, 광주일고 박재홍 |
박찬호는 어땠어?
찬호는 국민학교 때부터 정말 친하게 지낸 친구였어. 어렸을 때부터 정말 공이 빨랐어. 그런데 일부에선 박찬호보다 같은 공주고였던 손혁을 더 높게 평가하곤 했어. 그때 손혁은 여러 변화구를 던질 줄 알았거든. 걔가 던지던 드롭성 커브는 정말 치기 힘들었어.
나중에 대성공을 거둔 92학번 스타는 박찬호였어. 메이저리그에서 100승 투수가 됐으니까.
1991년 청소년 대표로 뽑혔어. 그땐 무슨 영문인지 우리가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에 나가지 않았을 때야. 대신 미국에서 열리는 한·미·일 고교야구대회에 출전했지. 당시 대표팀 투수가 조성민(신일고), 임선동(휘문고), 차명주(경남상), 박재홍(광주일고), 김영복(한서고), 박찬호(공주고)였어. 포수는 김석용(배명고), 김종대(선린상). 내야수는 우승진, 조준혁, 안명성(이상 경남상), 강혁(신일고), 허유신(장충고), 김종국(광주일고). 외야수는 나, 김대익(부산고), 곽재성(경남상), 박찬수(부산상)였고. 내 기억에 굉장히 많은 메이저리그 스카우트가 야구장에 왔던 것같아. 조성민, 박재홍, 곽재송, 임선동이 주요 관찰대상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 공교롭게도 선동이 공이 안 좋았어. 대신 찬호 공이 통했지. 그리고 재미난 게 그때 신일고나 광주일고는 현지 동문 집에서 민박했거든. 하지만, 공주고는 동문선배가 없어서 현지 교포 집에서 묵었다고. 그때 찬호가 민박한 곳이 바로 훗날 찬호 에이전트를 맡은 스티브 김 씨 집이었어.
그렇군. 후배들 가운데 기억나는 선수들은 없어?
있지. 신일고 직속 후배 김재현, 조인성(현 SK)이 생각나지. (김)재현이는 배트 스피드가 정말 빨랐어. 속으로 ‘부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 (조)인성이는 원체 덩치가 커서 2루 송구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어. 그걸 바로 잡아준 사람이 양승호 신일중 감독이었어. 집에 가다가 신일중 연습하는 거 보면 양 감독님이 인성이 보고 항상 그래. “넌 어깨가 좋으니까 일어나지 말고, 앉아서 송구해도 충분히 주자를 잡을 수 있다”고. ‘앉아 쏴’는 그때부터 나온 거야.
‘설까치’ 설종진을 둘러싼 스카우트 전쟁 1991년 <주간야구>에 소개된 설종진
1991년 신일고는 역대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5개 전국대회에서 17승 3패라는 화려한 성적을 거뒀다. 봉황대기와 황금사자기대회에선 우승했고, 대통령배에선 준우승, 청룡기와 화랑대기에선 4강까지 올랐다.
신일고뿐만이 아니었다. 이 팀의 주축투수였던 조성민은 임선동, 손경수와 함께 고교투수 ‘빅3’에 포함되며 국내외 프로 스카우트의 시선을 끌었다. 설종진도 같았다. 봉황대기와 황금사자기대회에서 연거푸 MVP에 오르며 고교야수 랭킹 1위로 꼽혔다. 설종진은 신일고 주장뿐만 아니라 한·미·일 고교야구대회에서 대표팀 주장을 맡으며 ‘준비된 리더십’을 선보였다.
178cm, 74kg의 날렵한 몸에, 밀고 당기고를 자유자재로 하는 왼손타자였던 설종진은 폭넓은 외야수비와 천부적인 야구센스가 돋보였다. 휘문고 임선동이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타자”로 설종진을 꼽을 정도였다. 많은 대학팀과 프로팀이 설종진을 주목한 건 당연한 이치였다. 프로 스카우트 가운덴 투수로서의 설종진의 가능성에 주목한 이도 있었다. 어쨌거나 ‘프로에서 당장 통할 고교 선수’가 바로 설종진이었다.
고교 졸업반 때 꽤 많은 대학팀과 프로팀에서 러브콜을 한 걸로 알아.
고1 때 건국대에서 오라고 했어. 2학년 땐 “도장을 찍자”고 했고. 건국대는 “1, 2학년 때는 무조건 국가대표 상비군까지 시켜주고, 장학금도 주겠다”고 했어. 그런데 (도장을) 찍기 그렇더라고. 3학년도 진학이 결정되지 않았는데, 괜히 잘난 척하는 것도 같고. 그래서 3학년이 될 때까지 미뤘어. 그러다 막상 3학년이 되니까 여러 대학에서 찾아오더라고. 고려대, 연세대부터 시작해서 동국대까지. 모 대학에선 “스카우트비 500만 원에 달마다 얼마씩 용돈을 주겠다”고 했지. 난 그때 솔직히 한양대에 가고 싶었어. 쟁쟁한 선배들이 많이 뛰고 있었으니까.
프로에선 어느 팀이 적극적이었어?
OB(두산의 전신)였어. 그때 OB 운영팀장님이 지금 일구회 사무총장이신 구경백 씨였어. 그분이 어느 날 동네로 찾아오셨어. “뭐가 먹고 싶냐”고 물으시기에 “회요”했지(웃음). 횟집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갑자기 구 팀장님이 "OB로 오라"고 하시는 거야.
OB?
구 팀장님이 그러시더라고. “이번에 삼성이 2차 1번으로 지명한 동봉철이 받은 액수가 5천만 원이다. 그런데 동봉철이 대졸이라면 넌 고졸이다. 하지만, 동봉철 만큼의 대우를 해주겠다. 이걸로 아파트도 살 수 있으니 어머니를 편하게 모셔라.”
그러네. 그때 성남고 박종호가 LG에 입단하면서 계약금으로 1천200만 원을 받았을 거야. 경남상고 투수 곽재성은 롯데 입단하면서 3천만 원을 받았고. 고졸 외야수가 5천만 원이었으면 정말 A급 대우였어.
나도 마음이 흔들리더라고. OB가 나에 대한 가치를 인정해준 거니 얼마나 고마워. 구 팀장님과 함께 집에 갔어. 이제 계약서만 쓰면 되는 상황이었지. 팀장님이 어머니 앞에서 007 가방을 여시더라고. (눈이 동그래지며) 만 원짜리 지폐로 정확히 5천만 원이 들어있는 거야. 그런데 어머니가 “어렵겠다”고 하시는 거야.
계약금이 적어서?
아니. 그때 난 중앙대에 가기로 가계약한 상태였어. 만약 내가 OB와 계약한다면 나와 함께 중앙대에 입학하기로 한 친구들의 진로가 불투명하게 될 처지였어. 어머니가 “중앙대 감독님과 상의를 해봐야겠다”면서 감독님을 부르셨어.
중앙대 최주현 감독님 화가 단단히 나셨겠는데.
누가 아니래. 바로 택시 타고 오셨더라고. 그러면서 구 팀장님한테 “지금 뭐하는 거야!”하고 소릴 지르시더라고. 그때 내가 추리닝을 입고 있었는데, 갑자기 택시를 잡고는 나보고 “타라”는 거야. 그 길로 어디까지 갔는지 알아?
어디까지?
경기도 포천까지 갔어. 택시에서 내리니까 한적한 시골집이더라고. 거기서 일주일인가 지냈어. 그땐 너도 알다시피 프로와 아마추어 간에 스카우트전이 죽기살기로 펼쳐질 때였어. 알고보니까 중앙대에서 프로팀의 접근을 막으려고 날 그 시골로 도피시켜놓은 거였어.
중앙대와 가계약을 맺은 이유는 뭐였어?
고3 때였어. 봉황대기를 치르고 있는데 우연히 최 감독님을 목욕탕에서 만났어. 감독님이 난데없이 “난 너와 야구 한번 같이 했으면 좋겠다”라고 하시는 거야. 깜짝 놀랐지. 다음날 식사를 함께하는데 감독님께서 “앞으로 3년 안에 중앙대 야구부를 최고로 만들 거다. 그 출발점으로 널 데려왔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 그때 왠지 중앙대에 가면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더라고. (한숨을 내쉬며) 누가 그런 일이 터질지 상상이나 했겠어.
불꽃에 타버린 야구 인생 중앙대 시절의 설종진(사진=설종진)
중앙대 입학이 결정됐을 때 꽤 많은 야구전문가가 ‘대학무대에서의 설종진은 과연 어떤 활약을 펼칠까’ 궁금해했어. 그도 그럴 게 92학번 야수 가운덴 네가 가장 빛나는 별이었으니까. 하지만, 스포츠신문에서 네 이름을 찾는 건 극히 어려운 일이었어.
대학 입학하고 바로 무릎수술을 받았어. 무릎이 찢어져 있었거든. 그리고 나서 7월에 열린 천마기대회에 대타로 출전했어. 무리하면 안 되니까 천천히 페이스를 끌어올리려고 했지. 그러다 여름 휴가 끝나고 이틀인가 지나서 그 일이 터졌지.
그 일이라면….
(작은 목소리로) 그래 화상.
듣기론 야구장 잔디를 태우다가 화상을 입은 걸로 아는데.
정확한 내막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어. 당시 내가 3, 4학년이었으면 그런 일이 터지지 않았을 거야.
어떤 일이 있었던 거야?
당시 야구장 잔디를 깎아서 구장 한편에 모아놨어. 그걸 들고 비닐봉지에 담아 버리면 그만인데, 누가 “태워버리자”고 하더라고. 휘발유를 부으면 더 빨리 탈 것같아서 휘발유 통을 가져와서 잔디 위에 조금 뿌렸어. 그런데 잔디가 완전히 마른 상태가 아니었는지 휘발유만 타고 잔디는 잘 안 타더라고. 그래 다시 휘발유를 부으려고 다가갔는데…휘발유가 그렇게 무서운 건지 처음 알았어.
음.
기름을 부으려고 다가섰는데 갑자기 불길이 일어나더니 휘발유 통 안으로 불길이 들어간 거야. 다들 놀라서 어쩔 줄을 몰라했어. 불길은 더 거세지고, 빨리 불을 끄지 않으면 휘발유 통이 폭발할 것 같더라고. 그때 ‘휘발유 통을 쓰러트리면 기름이 흘러내려 폭발을 막을 수 있겠다’싶었어.
그래 발로 휘발유 통을 찬거야?
찼지. 그런데 휘발유 통이 쓰러졌으면 되는데 이게 쓰러지려다가 다시 서버린 거야. “퉁!”하고 휘발유 통이 제자리로 설 때, 통 안에 든 불기름이 내 몸으로 튀었어. 하지만, 난 휘발유 통을 발로 차고 뒤로 돌아선 상태였기 때문에 불기름이 다리에 튄지 전혀 모르고 있었어.
이런.
한창 여름이라 반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두 다리에 불기름이 튀자 갑자기 몸이 뜨거워지더라고. 무슨 고기 타는 냄새도 나고. 그때 알았지. ‘아, 불길이 다리에 튀었구나.’ 순간적으로 넘어져야겠다 싶어서 땅에 굴렀어.
병원엔 바로 갔어?
중앙대 안성캠퍼스 주변 병원으로 갔는데 “여긴 화상전문 치료 병원이 아니니 서울 중앙대 병원으로 가라”고 하더라고. 중앙대 병원으로 갔더니 의사가…(긴 숨을 내쉬며) 휴우-. “살이 타버려서 수술을 몇 번 해야한다”고 하더라고. 그리고선 결정을 내리라고 했어.
어떤 결정?
화상을 입으면 근육이 똑바로 펴지지 않는대. 그걸 펴려면 수술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결국 야구를 못 한다고 하더라고. 만약 수술하지 않고, 치료만 받으면 나중에 장애가 될 수도 있다고 했어.
어떤 걸 선택한 거야?
수술이었지. 그런데 고통이 말도 못했어. 화상을 당했으니 두 다리가 시뻘건 상태일 거 아니야. 그 상태인 피부를 대패로 밀듯이 피부를 밀어내야 화기가 사라지고, 새살이 나온다고 했어. 그리고나서 엉덩잇살을 떼서 다리에 이식해야 한다고 하더라고. 첫 번째 수술을 했는데, 정말 죽는 줄 알았어. 대패로 밀어버린 피부를 알코올로 식히는데, ‘이렇게 고통스러우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란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 창문으로 뛰어내리려는데 남자 간호사가 붙잡아서 실패했어. 엉덩잇살 이식수술까지 받으니까 3개월이 훌쩍 지나가더라고.
화상을 당하고 나면 근육량이 상당히 줄어든다고 하더라.
2차 수술까지 마치고 침대에서 일어나봤어.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더라고. ‘아, 여기서 야구는 끝이구나’ 싶었어.
의사는 뭐래?
“운동은 언제쯤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까” 물었더니 “이야기 못 들었어요. 앞으로 운동은 취미 삼아 하세요”하더라고. 눈앞이 깜깜했지.
퇴원은 언제 한 거야.
2차 수술 끝내고 3개월 지나고서 퇴원했어. 야구부로 돌아오니까 감독님이 “무리하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어. 뭐 할 게 있나. 공이나 주우러 다녔지.
음.
그런데 그건 아닌 것 같더라고. 야구를 안 하면 안 했지, 공이나 줍고 다니는 건 정말 아니란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다시 야구를 하기로 마음먹었어. 그때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이 뭔지 알아?
글쎄.
스타킹을 구해 입었어. 화상 환자들이 입는 여자 스타킹처럼 무척 타이트한 스타킹이 있거든. 원체 타이트하다 보니까 그걸 입는 데만 10분 이상이 걸려. 그래도 그걸 입고 계속 운동했어. 4학년이 됐을 때 병원에 갔더니 “젊어서 그런지 피부가 많이 좋아졌다”면서 “이젠 스타킹을 벗어도 된다”고 하더라고.
그럼 야구를 다시 시작한 거였어?
응. 3학년 때 다시 시작했는데, 4학년이 되고나서 본격적으로 시작했어. 그땐 이미 국가대표 꿈은 포기한 상태였어. 다만.
다만?
프로는 꼭 한번 가보고 싶었어.
실력은 예전처럼 돌아왔어?
그럴 리가 있나. 하도 오래 쉬어선지 잘 안 되더라고. 무엇보다 경기 감각이 둔해져 있었어. 지방 대학팀과 경기할 땐 곧잘 안타도 치고 했는데, 서울지역 에이스들과 맞붙으면 ‘영’ 안 되더라고. 다행히 4학년 시즌 후반 때 홈런도 치고 하면서 컨디션을 끌어올렸지.
화상으로 한동안 쉰 야수를 관심 있게 지켜본 구단이 있었어?
태평양, 해태, 쌍방울, 두산 등 예상보다 많았어. 스카우트 분들은 다른 건 묻지 않고 “다리 괜찮냐”고만 묻더라고. 잘하면 프로에 지명받을 수 있겠구나 싶었어.
결국 1996년 신인드래프트에서 태평양에 2차 2번으로 지명되면서 프로에 입문하게 돼. 고 1때 폐결핵을 딛고 고교야구 최고의 야수가 됐듯이 이번엔 설종진이 화상의 아픔을 딛고 프로 최고의 야수가 되리라 기대한 사람들이 많았어. 언제나 설종진은 고난을 이겨내고 희망의 새벽별을 노래했으니까.
운이 좋았어. 그때 계약금으로 1억 1천만 원을 받았는데, 꽤 많은 편이었어. 언뜻 태평양 멤버를 보니까 ‘해볼 만 하겠다’ 싶더라고. 그런데 막상 팀에 합류하니까 그게 아니었어. 다들 쟁쟁한 선배들이었어. 그즈음 현대로 주인이 바뀌면서 순식간에 현대 유니콘스 창단 멤버가 됐지.
1996년 현대 유니콘스에 입단한 설종진(사진=설종진) |
1996년 프로 첫해 1군에서 9경기를 뛰며 타율 1할4푼3리를 기록했어. 네 이름값에 비하면 다소 실망스런 성적이었어.
마음은 뭐든 할 것 같았어. (얼굴이 어두워지며) 그런데 몸이 안 따라주는 거야. 조금만 빨리 뛰어도 다리에 쥐가 났어. 자꾸 쥐가 나고, 쉬기를 반복하다 보니까 도저히 체력훈련을 진행할 수 없었어. 나중엔 코칭스태프 눈치가 보이더라고.
러닝은 모든 훈련의 어머니인데 말이야.
그렇지. 러닝이 안 되니까 순발력이 떨어졌어. 배트 스피드도 나오지 않고, 수비범위도 ‘확’ 줄어들었어. 그러다 2군에서 손가락을 다쳤지 뭐야.
손가락은 왜?
그때 한창 1, 2군을 오가고 있었어. 내가 2군에 있을 때 김재박 감독님이 2군 감독님한테 “설종진이 1군에서 뛰려면 기습번트도 댈 줄 알아야 하니까 번트훈련을 집중적으로 훈련시키라”고 주문한 모양이야. 그때부터 타석에 들어서면 꼭 두 타석은 좌우로 번트를 댔어. 그날도 마지막 타석에서 번트를 대려고 하는데, 하필 투수 공이 몸쪽으로 들어오더라고. 공에 맞아 손가락이 엉망이 됐지. 그 부상으로 또 6개월을 허송세월로 보내야 했어. 참, 그때가 아쉬워. 한창 감이 정말 좋았는데.
야수에서 투수로 전향한 설까치 설종진은 1997년 투수로 전향했다(사진=설종진)
설종진은 1997년 야수에서 투수로 전향했다. 야수에서 못다 이룬 꿈을 투수를 통해 이루고 싶었다. 팀에 더는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강했다. 고교 야수 랭킹 1위였던 설종진은 어느새 조금씩 잊힌 선수가 되고 있었다.
투수론 왜 전향한 거야?
1997년 스프링캠프에서 외야 송구훈련을 하고 있었어. 그날 따라 외야에서 공을 던지면 홈까지 기가 막히게 들어오는 거야. 그걸 보고 있던 신언호 코치님이 넌지시 “종진아, 너 투수 한번 해봐라”하는 거야. 귀가 솔깃하더라고.
그때 현대엔 좋은 투수가 많지 않았나.
그렇긴 했는데, 왼손 투수가 부족했어. 생각해 보니까 어쩌면 투수로 재기할 확률이 더 높아 보이더라고.
1997년 9월 19일 인천 해태전에서 구원등판했어. 대망의 프로 첫 등판이었어. 3타자를 상대로 볼넷 하나만 내주고 잘 던졌는데. 하지만, 2001년까지 1군 등판경기는 5경기에 지나지 않았어. 투구이닝도 1997년 2이닝을 던졌을 뿐 1999년과 2001년엔 공히 ⅔이닝에 불과했어.
아무리 공을 세게 던져도 속구 구속이 시속 140km 이상을 넘지 못했어. ‘딱’ 거기까지더라고. 그러다 장기영, 노완수 이런 왼손 투수들이 입단하면서 조금씩 설 자리를 잃었지. 당시 구단에 조금 서운하긴 했는데, 막상 매니저가 되니까 입장이 달라지더라.
2001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하게 돼.
원래는 친구랑 사업을 하려고 했어. 그런데 일이 잘못되면서 올스톱했지. 그러다 현대 2군 매니저였던 염경엽(현 넥센 코치) 선배한테 전화가 왔어. 다짜고짜 “종진아, 너 매니저 한번 해볼래?”하는 거야. “경험이 없는데요”했더니 “누군 처음부터 경험 있어서 매니저 하냐”하더라고. 염 선배는 그런 식으로 후배들을 잘 챙겨줬어.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지만, 사실 생각같은 건 할 필요도 없었어. 생계를 위해서라도 일을 해야 했고, 어쨌거나 야구와 관련된 일이니까 내겐 최상의 직업이었어.
보통 프로야구 매니저하면 ‘잡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말이지. 2002년부터 매니저를 시작했으니 이제 ‘딱’ 10년 차 매니저가 됐는데, 너보다 오래 매니저한 분들도 있지?
있지. 삼성 김정수 매니저, 롯데 김태민 매니저 같은 분들은 나보다 훨씬 오래 하셨지. 사실 매니저는 고달픈 직업이야. 시즌 중엔 집에 갈 시간이 거의 없어. 네 말대로 매니저를 선수단 뒷바라지하는 사람들로 아는데, 실제론 구단 대표로 나가서 현장 애로사항을 듣고 구단에 전달하는 역할이거든. 그런 의미에선 책임감만큼이나 자부심도 커.
앞에서 은퇴할 땐 구단에 서운했는데, 막상 매니저가 되니까 생각이 달라졌다고 했어. 무슨 의미야?
코치는 한 선수라도 더 기회를 주려고 해. 다 자기 자식 같으니까. 그런데 매니저는 현실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어. 가령 올해 10명의 신인을 스카우트한다고 치면 10명이 나가야 하는 게 순리거든. 그런 의미에서 2군 매니저는 선수들 정리할 때 냉정하지 않으면 안 돼.
1992년 부푼 꿈을 안고 대학에 입학한 지 이제 20년이 흘렀어. 대선수가 되리라던 ‘설까치’ 설종진은 불행이 겹치면서 우리 곁에서 조용히 사라진 수많은 유망주 가운데 한 명이 됐어.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걸까.
그런 생각은 해. 차라리 프로로 직행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지인들이 그러더라고. “만약 설종진이 프로에서 잘됐다면 정수근은 뛰어넘었을 거”라고. 발 빠르고, 타격 정확성 좋고, 수비범위가 넓은 중견수였다고 생각들 하니까, 그런 말을 했겠지. 그래 만약 프로로 직행했다면 화상을 당하지 않았을 테고, 계약금 5천만 원짜리 고졸 유망주는 더 많은 기회를 제공받았을지 몰라.
그래서 널 가리켜 ‘불운의 스타였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예전엔 그랬어. 나만 보면 ‘비운의 스타’라고 했어. 하지만, 후회는 없어. 대학에 간 것도 후회하지 않고, 잔디를 태우다 다친 것에 대해서도 누굴 원망하지 않아. 난 지금도 야구계에 남아있고, 어찌 보면 2군에서 어려운 시절을 보낸 경험이 2군 선수들을 관리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아. 그래서 생각하는 건데. 세상에 영원한 불행은 없고, 영원히 불행한 사람도 없는 것 같아. 스스로 그렇게 생각할 뿐이지.
2군 선수들한테 주로 어떤 조언을 하니?
“다치지 마라”고 하지. 그리고 자제하라고. 무엇보다 노력의 중요성을 이야기해. 내가 국민학교 때부터 그래도 야구를 잘한 건 순전히 노력 덕분이었어. 정말 하루에 천 번 이상씩 스윙을 했으니까. 지금도 벽에다 공을 던지면서 수비훈련하던 게 기억 나. 선배들이 지나가면서 “어이, 설종진. 그만 하고 들어가라”고 했지만, 난 “들어가도 할 게 없어요”하곤 계속 훈련에 매달렸어. 요즘 보면 2군에서 오후 10시까지 훈련하는 친구들이 거의 없어. 프로가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데 말이야. 다만, 조금 후회하는 게 있다면.
응.
‘다리가 좋지 않았으면 다른 운동을 더해서 체력을 보강할 걸 그랬다’는 후회가 조금 있어. 지금 선수들한테 하고 싶은 말도 그거야. ‘지금 이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최선을 다해 싸우라’고 말이야.
현재 넥센 히어로즈 2군 매니저를 맡고 있는 설종진. 현역 시절처럼 그는 타고난 성실함과 노력으로 선수단의 신망을 받고 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아들 있지? 아들이 야구하면 아빠 닮아서 잘하겠다.
아니야. 되레 아빠 때문에 야구 안 한대.
왜?
아빠가 매일 집에 없으니까. 그게 속상한가 봐. 아이가 유치원, 초교 다니는 동안 제대로 놀아준 적이 거의 없거든. 그 녀석의 유일한 추억은 엄마와 엄마 친구들과 여행간 기억밖에 없어. 언제나 아이와 아내한테 미안한 마음이야.
마흔이다. 그래도 열정만은 20년 전과 다르지 않은 것 같아. 앞으로 뭘 해보고 싶어?
우리팀은 참 좋은 팀이야. 발전 가능성도 무궁무진하고. 기회가 된다면 운영 일을 배워보고 싶어.
지금처럼 성실하다면 최고 프런트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어때 설까치?
설까치, 그거 오랜 만에 듣는 소리네. (수첩을 펼치며) 강진에 가봐. 수많은 까치들이 있어. 아마 그 까치들이 시간이 지나면 프로야구계에 반가운 손님이 될 거야. (환하게 웃으며) 두고 봐. 그 친구들이 반드시 훌륭한 선수가 되도록 도와줄 테니까. 만화는 끝이 있지만, 현실은 계속 진행형이잖아. 난 아직 끝나지 않았어. 안 그래?
이름 : 설종진(薛鍾鎭)
생년월일 : 1973년 6월 16일
체격 : 179cm / 80kg
이력 : 신일고-중앙대-현대
프로입단 : 1996년
아마 경력 : 1991년 대통령배대회 감투상, 봉황대기대회·황금사자기대회 최우수선수, 한·미·일 고교야구대회 한국 대표팀 주장.
프로 성적 : 타자 개인통산 99경기 출전, 타율 1할4푼3리, 1안타 / 투수 개인통산 5경기 등판 3 1/3이닝 평균자책 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