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하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저는 광활한 영토를 호령하는 광개토왕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대제국을 건설했던 고구려. 중국과 대등하였으며, 중국이 가장 탐내던, 두려워하던 고구려를 지금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고구려를 건국한 인물로 주몽을 이야기합니다. 주몽의 건국부터 시작해 보죠.
고구려 건국이야기우선 고구려의 건국 설화를 통해 건국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고구려의 건국이야기, 즉 건국설화가 기록된 것은 광개토왕릉비와 장수왕 대 건립된 모두루묘지, 중국의 기록인 <위서> 고구려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백제본기, <삼국유사>, <동명왕편> 등이 있습니다. 이 중 그 기록이 가장 빠른 것이 광개토왕릉비의 서두에 적힌 것입니다. 그다음은 모두루묘지와 <위서> 고구려전인데 모두 5세기경에 기록되었습니다. 기록마다 서술내용의 차이가 있지만 어찌 되었든, 이 모든 기록을 종합해 부여 건국설화와 연결하여 고구려의 건국설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해부루가 죽자 뒤를 이어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금와가 태백산으로 행차하였는데, 우발수라는 곳에서 하백의 딸 유화를 만났다. 금와는 유화를 궁으로 데려왔다. 그런데 유화에게 햇빛이 계속 비쳤고, 유화가 임신하여 알을 낳았다. 금와가 알을 버려 개와 돼지에게 주었으나 먹지 않았다. 다시 길에 버렸더니 소나 말이 피하고, 다시 들판에 버리니 새가 날개로 알을 덮었다. 금와가 알을 깨뜨리려고 했으나 할 수 없어, 다시 유화에게 돌려주었다. 유화가 알을 따뜻한 곳에서 두니 남자아이가 알을 깨고 나왔다. 이 아이는 골격이 크고 영리하였고, 7살 때부터는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 말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하였는데, 이를 아이의 이름으로 삼았다. 금와에게는 7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재주와 능력이 주몽에게 미치지 못하였다.금와의 첫째 아들인 대소가 주몽의 비범함을 경계하여 왕에게 제거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왕은 이를 듣지 않았다. 왕자들과 여러 신하들이 주몽을 죽이려고 모의하였는데, 이를 유화가 알아차리고 주몽에게 알리며 피하라 하였다. 주몽은 부여를 빠져나왔다. 대소는 곧바로 추격대를 편성해 주몽을 쫓았다. 주몽이 큰 강에 이르렀으나 다리가 없어 건너지 못하였다. 주몽이 강물을 향해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추격군이 다가오는데 어찌하면 좋은가'라고 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건너게 하였다. 주몽이 졸본천(졸본부여)에 이르렀다. 비류수 상류에 비류국의 송양과 겨루어 승리하였다.졸본부여의 왕은 주몽의 비범함을 알고 딸을 주어 아내로 삼도록 하였다. 졸본부여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주몽은 나라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고를 성씨로 삼았다. 주몽은 건국한 뒤 과부로 지내고 있던 연타발의 딸 소서노를 왕비로 맞이하였다. 주몽은 건국에 많은 도움을 준 소서노를 총애하고, 그녀의 두 아들 비류와 온조를 아들처럼 대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위서> 고구려전,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구려 건국 과정이 설화를 통해 생각해 볼 것은 주몽이 졸본지역으로 내려오기 전에 이미 졸본부여나 연타발 집단, 비류국 등의 정치집단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고조선이 멸망한 후 한사군이 설치될 때 현도군에 고구려현이 있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주몽이 건국하였습니다. 그런데 기원전 2세기 이전에 이미 맥족에 의해 고구려라는 작은 나라가 건국되어 있었던 것이죠. 맥족의 고구려는 현도군이 설치되자 고구려현으로 편성되었으나 맥족들이 적극적으로 저항하면서, 결국 현도군이 기원전 75년 요동 지역으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이후 고구려는 소노라는 집단을 중심으로 연맹체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삼국사기>에 기록된 기원전 37년에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이제껏 알고 있던 주몽=고구려 건국자는 잘못 알고 있던 것일까요?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졸본지역, 즉 압록강 유역에는 '나(那)'라 불리는 여러 집단이 있었습니다. 비류나(沸流那), 연나(椽那), 환나(桓那), 관나(貫那) 등의 여러 정치 집단들은 군장가들로 각기 독자적인 영역을 다스렸습니다. 이들은 서로 교류하여 연합하거나 전쟁 등을 통해 복속하는 등 복잡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죠. 이 과정 속에서 나집단들은 비류나를 중심으로 연맹을 이루었습니다. 이 비류나는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비류국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나(那)연맹 집단의 중심지로 주몽이 이주해 옵니다. 주몽이 이끈 집단은 계루부를 형성합니다. 그리고 계루부는 활쏘기 능력을 이용하여 여러 나집단을 이끌고 있던 비류나부와 힘겨루기에서 이겨 나집단을 대표하는 집단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위 사료에서 주몽이 비류국 송양과 겨루어 승리하였다는 점이 이를 잘 알려주고 있죠.
주몽이 이끈 집단의 이름을 보세요. 다른 정치집단 모두는 '나(那)를 사용하고 있는 반면 주몽은 '나'가 아닌 계루부라는 다른 이름을 사용합니다. 이는 주몽 집단이 토착집단과는 성격이 다른 집단을 알려주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즉, 주몽이 이주세력임을 보여주는 것이죠.
점진적으로 세력을 키운 주몽은 연맹체의 주도권을 장악한 후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정합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기원전 37년의 일이죠. 그러나 여전히 연맹체 내부의 여러 나라들은 서로 우위권과 주도권을 잡으려고 각축을 벌이며 통폐합이 이루어졌습니다. 마침내 계루부를 포함한 다섯 집단이 남게 되었고, 계루부 왕실에 속하는 5부가 형성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전의 '나(那)'라는 이름이 '노(奴)'로 바뀌었습니다. 비류나부는 소노부로, 연나부는 절노부로, 환나부는 순노부로, 관나부는 관노부로 바뀝니다. 이 노(奴)자가 '종'이라는 뜻이 있음을 생각해 보면 이전의 여러 나집단들이 계루부에 속한 집단으로 변모한 것임을 알 수 있죠.
5부 전체의 주도권을 장악한 계루부는 왕을 배출하고 외교와 전쟁에 관한 권한을 독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에는 각 부는 독자적 정치집단의 성격을 유지하였습니다. 각 부의 군장들은 대가로 칭했으며 이 대가들은 별도의 관리들을 두어 각자의 영역을 독자적으로 다스렸습니다.
고구려의 초기의 관직체계계루부의 왕 아래에는 상가, 대로, 패자, 고추가, 사자, 조의 등 여러 관직이 있었습니다. 이 중 상가는 각 부의 대표, 즉 대가들의 대표였습니다. 한편 국왕 직속 최고 권력자는 대로 또는 패자로 국정을 총괄하는 수상이었습니다. 앞서 살폈듯이 각 대가들은 독자적 영역을 다스리며 사자, 조의, 선인 등의 관리를 두었습니다. 국왕 아래 사자와 대가의 사자 중에는 당연히 국왕의 사자가 더 높은 서열이었습니다.
고구려의 초기의 사회모습고구려에 감옥은 없었으나 중대한 죄를 범하면 대가들이 모여 의논하였습니다. 이 회의를 모든 가들이 모인 회의라 하여 제가 회의라고 하죠. 이 회의에서 논의한 후 사형해 처하고 가족을 노비로 삼았다고 합니다. 또 부여와 마찬가지로 제천행사를 열었는데, 고구려에서는 이를 '동맹'이라 하였습니다. 이 행사에서 고구려 시조인 주몽을 제사하고 기념하고 정복활동이 무사히 잘 되길 기원하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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