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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
고대 로마는 BC 8 세기 이탈리아의 작은 농촌 마을에서 발전하여 지중해를 아우르는 고대사 상 거대한 제국을 이룬 문명이다.
수백 년 간 확장을 거듭하며 고대 로마 문명은 왕정에서 과두 공화정으로, 또 점차 제정으로 변모했다.
BC 600년 경 로마는 이미 당대 기준으로 부유하고 번영하는 도시로, 왕의 지배를 받았다.
BC 500년 경에는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뒤를 이었으며, 평민과 귀족간의 신분 투쟁이 전개되었다.
알렉산더 대왕 - (BC 356 ~ BC 323, 재위 BC 336 - 323)
BC 272년 경 로마 공화국은 제노바에서 이탈리아 남단까지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포괄하는 거대한 동맹 체제를 이끌었다.
그 뒤 150여 년 동안 여러 전쟁을 치르면서 로마는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뒤를 잇는 지중해 세계의 유일한 강국으로 부상했다.
BC 1 세기에서 AD 1 세기 사이 로마는 팽창을 계속했고,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98년 ~ 117년)에 최대의 영토를 확보하게 된다.
그때의 '끝없이 장엄하게 펼쳐지는 로마의 평화는 스코틀랜드에서 수단까지, 포르투갈의 대서양 연안에서 캅카스 지방까지 미쳤는데,
이 영역은 오늘날 미국 영토 면적의 2/3에 해당하고, 인구는 현 미국의 절반에 약간 못 미칠 정도의 규모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나의 세계를 이룬 이 거대한 제국 안에서,
고대 세계의 여러 문화 - 그리스 문화, 오리엔트 문화, 셈족 문화, 서 유럽 문화 - 가 융화되고 확산되었다.
역사적 배경
BC 10 세기 경을 전후로 하여, 이탈리아 반도 중부에 정착하여 살던 여러 부족은
약 2-300년에 걸쳐 서로 교류하거나 전쟁을 벌였으며 융화와 추방을 반복했다.
고대 로마 문명의 초기 역사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하고 있다.
8세기 경 라티움에는 라티움인들이 정착해 살고 있었다.
이 땅은 티베리스 강 이남 중부 이탈리아 서해안에 자리잡아 물이 넉넉하고 비옥한 평야였다.
이들은 후기 청동기 시대와 초기 철기 시대에 인도-유럽어 족이 이탈리아 전역에 흩어질 때 형성된 인도-유럽어 권 집단이었다.
이들은 농경과 목축으로 먹고 살았을 것이며, 손으로 짠 투박한 옷을 입었고, 손으로 조악한 도자기를 만들어 썼는데,
이들의 집은 화로와 대문 밖에 없는 원형 나무 오두막이었다.
몇몇 보석 장신구와 청동 혹은 철 연장을 제외하면 이들은 해외에서 물건을 수입해서 쓴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고대 로마의 역사가들은 BC 753년에 로마라는 이름의 도시가 로물루스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로마의 기원 전설은 非역사적인 허구이므로, 지리적 혹은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검증이 필요하다.
BC 750년 경에는 팔라티누스 언덕을 비롯한 로마의 여러 언덕에 농촌 촌락들이 들어섰는데,
이들 산지 촌락들은 저마다 독특한 방언과 관습이 있었던 것 같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미개한 상태였는데, 이 곳에 복합 문명이 발달하게끔 깊은 영향을 준 두 집단이 있다.
하나는 라티움에서 테베레 강을 건너 에트루리아에 정착한 에트루리아인들이었고,
다른 한 집단은 BC 8세기 중엽에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마그나 그라이키아)에 정착한 그리스인들이었다.
이들은 이후 이탈리아를 통일하게 될 도시 로마의 발전에 있어 각별히 중요한 민족이었다.
역 사
로마 왕정
왕정 시대는 공화정 이전 시대로 BC 753 년 부터 508 년 까지이다.
로마는 BC 753년 4월 21일에 로물루스가 세운 것으로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이 날짜는 BC 1 세기 말에 로마의 역사가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가 고대 로마에 관한 신화들과 전설들을 연구하여 도출해냈다.
현대 학자들은 로마에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살기 시작한 것은 BC 750년 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확증하고 있다.
BC 7 세기 말에 에트루리아인들은 이 지역에 귀족ㆍ왕족 계급을 이루어 피지배 층을 정치적으로 다스린 것으로 보인다.
에트루리아인들은 BC 6세기 말 경 이곳의 지배권을 잃은 것이 확실하며,
이 시점에 라티움과 사비니 부족이 권력 집중을 억제하는 공화정 체제를 세웠다.
공화정 시대
라티움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며,
게다가 산지 종족들이 라티움을 침공하는 등 몇 차례에 걸친 군사적 패배로
로마에 사회ㆍ정치적 위기가 일어나면서 왕정이 몰락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러 학자들은 연대 목록(fasti)에 기록된 BC 509~507 년을 왕정 몰락의 시점으로 보기도 한다.
로마의 정체는 견제와 균형, 권력 분점으로 구성된다.
가장 중요한 정무관은 두 집정관으로 군사 통솔권인 명령권(imperium)을 통해 집행 권력을 함께 행사했다.
집정관 직은 오랜 기간의 실험과 발전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정착된 것으로 보이며,
BC 5세기 중엽 쯤에는 공화정의 고위 정무관 직을 집정관이라 하였다.
집정관은 원래 귀족들의 자문 회의였던 원로원과 협조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원로원은 양적으로 확대되었다.
공화정의 다른 정무관으로는 법무관, 조영관, 재무관이 있었다.
정무관 직은 원래 귀족 출신으로 제한되었으나 나중에는 평민에게도 개방되었다.
공화정의 민회로는 왕정 시대에 기원을 두며,
전쟁과 화의 여부를 결정하고 요직 관리를 선출하는 켄투리아회(comitia centuriata),
하위직 주요 관리를 선출하는 트리부스회(comitia tributa)가 있었다.
로마는 점차 에트루리아 등 이탈리아 반도의 다른 나라를 정복하게 되었다.
이탈리아 반도 통일을 앞두고 로마의 지배권에 마지막 도전장을 던진 세력은 그리스 식민시 타렌툼이었다.
BC 281 년 타렌툼은 에페이로스의 피로스를 끌어 들여 로마와 싸웠으나 결국 패배했다.
로마는 정복을 통해 전략 요충지에 로마의 식민시를 건설하여 이탈리아에 안정적인 지배권을 확립했다.
BC 3 세기 후반에 로마는 포에니 전쟁 *에서 카르타고와 격돌했다.
로마는 이 전쟁에서 처음으로 해외 영토인 시칠리아나 에스파냐 등지를 정복했으며 이 지역의 패권을 거머쥐었다.
BC 2 세기에는 마케도니아 왕국과 셀레우코스 왕국을 물리쳐 지중해 세계를 재패했다.
해외 팽창은 내분을 불렀다.
원로원 의원은 로마 속주의 부를 통해 부유해졌지만
주로 소농 출신의 병사들은 고향을 오래 떠나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땅을 지키지 못했으며,
임금 노동 대신 외국 노예에 크게 의존하게 되어 대 농장이 발달했다.
전리품 수입 덕분에 새로 확보한 속주에서 상업이 발달하였고,
세금 징수 할당 제도로 신흥 상인 계급인 기사 계급은 경제적 이익을 거머쥘 기회를 얻었다.
클라우디우스 법(lex Claudia)으로 원로원 의원의 상업 행위가 금지되면서
이론상 원로원에 진출할 수 있었던 기사 계급은 정치 권력에 심각한 제약을 받게 된다.
원로원은 끊임없이 정쟁을 일삼아 계속 토지 개혁에 발목을 잡았고, 기사 계급에 정치 발언권 확대를 거부했다.
원로원의 정적들끼리 도시 실업자 출신의 폭력배를 조종하여 완력으로 유권자를 위협했다.
이런 상황은 BC 2 세기 말 평민에게 귀족이 소유한 토지를 재분배하려는 토지 개혁 입법을 시도한 그라쿠스 형제 시대에 극에 달했다.
두 형제는 살해 당했는데, 여기에 원로원은 불만을 품은 평민과 기사 계급을 달래고자
그라쿠스 형제가 추진한 개혁의 일부 입법을 통과시켰다.
이탈리아 동맹국에 로마 시민권 확대를 거부하면서 BC 91 ~ 88년에 동맹국 전쟁이 일어났다.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으로 병사들이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잃고 점차 사병화(私兵化)되었으며,
유력한 장군이 국가와 원로원을 장악하게 된다.
이로써 마리우스와 그의 부하 술라는 내전을 벌였으며, 결국 BC 81년~79년에 술라가 독재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BC 1 세기 중반에 율리우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크라수스 세 사람이 3 두정 - 1 차 3두 정치 -을 이루어 공화국을 농단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복한 뒤(갈리아 전쟁) 원로원과 대립하던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원로원 파 군대와 내전을 일으킨다.
내전에서 승리한 카이사르는 종신 독재관이 되었다.
BC 44년 카이사르는 독재 의혹을 받다가 공화제 헌정을 복원하려는 정적에 암살 당한다.
그 직후 카이사르의 상속자 옥타비아누스, 카이사르의 수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의 2 차 3두 정치가 권력을 잡는다.
이 정치적 동맹은 권력 투쟁으로 기운다.
레피두스는 추방되며, 옥타비아누스는 BC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격퇴하여 로마의 유일 지배자가 되었다.
제정 시대
정상에 오른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받고 거의 절대적인 권력을 잡았지만, 공화정을 가장했다.
후계자 티베리우스는 심각한 반대 없이 권좌에 올라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조를 이루었고,
이 황조는 AD 68년 네로가 죽을 때까지 이어진다.
제정 시대에도 영토 확장은 이어졌으며 안정을 유지했지만, 흔히 저열하고 타락했다고 평가받는 황제도 몇몇 있었다.
- 혹자는 칼리굴라를 정신이상자로 보기도 하며, 네로는 국가 정사보다 개인 관심사에 더 몰두하며 잔인했다는 평판을 받는다. -
플라비우스 황조가 뒤를 잇는다.
5 현제 시대(네르바-안토니누스 황조에서 콤모두스 재위 이전)에 제국은 영토나 경제ㆍ문화 면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국가는 대내.외적으로 안정을 이루었고, 로마의 평화 시대에 제국은 번영했다.
트라야누스 시대에 다키아가 정복되면서, 제국은 최대 영토로, 그 지배 지역이 650만km²에 이르렀다.
193년에서 235년 사이는 세베루스 황조의 치제로 헬리오가발루스같은 무능한 지배자도 나타났다.
게다가 군대가 제위 계승에 영향력을 더욱 행사하게 되면서 오랜 기간 3 세기의 위기 라는 혼란기로 접어들었다.
이 위기는 유능했던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일단락지었으며,
293년에 제국을 동부와 서부로 나누어 각각 두 공동 황제와 부제(副帝)가 지배하는 4두 체제를 도입했다.
여러 공동 황제는 50년 이상 서로 대립하며 권력 투쟁을 벌였다.
330년 5월 11일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비잔티온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명명하고 로마 제국의 새 수도로 삼았다.
제국은 395년 비잔티움 제국과 서 로마 제국으로 영구히 갈라졌다.
서 로마 제국은 끊임없이 이민족의 침략에 시달리면서 점차 쇠퇴 일로로 치달았다.
4 세기에 훈족이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서 고트족이 밀려나 제국 국경 안쪽에 피난처를 구하게 되었다.
401년 알라릭 1 세가 이끄는 서 고트족은 로마 시를 약탈했다.
반달족은 로마 속주인 갈리아, 히스파니아, 북 아프리카를 침략하고 455년에 로마를 약탈했다.
476년 9얼 4일 게르만 장군 오도아케르는 서 로마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켰다.
1200여 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로마의 서부 지역 지배는 막을 내렸다.
비잔티움 제국도 마찬가지 위기를 겪었지만 서쪽보다는 나은 처지였다.
유스티니아누스 1 세는 잠시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를 수복했으나
유스티니아누스가 죽고 몇 년이 채 안 되어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에 미쳤던 비잔티움의 세력 범위는 줄어들었다.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의 치명적인 전염병 등으로 비잔티움은 이슬람의 발흥에 위협받았으며,
이슬람 세력은 시리아와 이집트의 영토를 곧 정복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직접 위협하게 되었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은 8 세기 경 이슬람의 확대를 막아냈으며, 9 세기 초에는 정복 당한 땅의 반환을 다시 요구했다.
AD 1000 년에 비잔티움 제국은 정점에 달했다.
바실레이오스 2 세는 불가리아와 아르메니아를 재정복했으며, 문화와 교역이 번영했다.
그러나 이 정복 이후 제국은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패하면서 팽창에 제동이 걸렸다.
이 사건은 결국 제국의 쇠퇴로 이어진다.
수백년간 내분과 터키의 침략으로 알렉시오스 1 세 콤네노스는 1095년 서방에 도움을 요청할 수 밖에 없었다.
서유럽은 이에 십자군을 조직하였고, 제4차 십자군 당시 이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한다.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점령되자 몇몇 후계 국가들이 들어서다가 결국 니카이아 제국이 최종 승자가 되었다.
제국 군대가 수도를 수복한 뒤 제국은 에게 해 해안에 국한된 그리스 국가로 전락하고 만다.
비잔티움 제국은 1453년 5월 29일에 메메드 2 세에게 수도를 함락 당하면서 멸망하였다.
사 회
수도 로마는 당대 최대의 도시로 인구는 백만 명에 이르렀으며 - 이는 19세기에 당대 세계 최대의 도시였던 런던의 인구와 맞 먹는다 -
최대 추정치는 140만, 최소 추정치는 45만 명이다.
로마의 공공 장소는 발걸음 소리와 마차 바퀴가 덜걱거리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낮에는 도성에 마차가 드나들지 못하도록 금한 바 있다 -
역사가의 추정에 따르면 고대 로마의 인구 20% 정도가 도심지에 살았으며
- 로마가 지배하는 이탈리아 전체로는 기준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25–40%이다 -,
10,000명 이상이 군사 정착촌에 거주하여 전근대 기준으로 매우 높은 도시화率을 보였다.
대부분의 도심지에는 포룸과 신전과 비슷한 양식의 더 작은 건물들이 있었다.
계 급
로마 사회는 대단히 위계적이며 계급을 의식하는 사회였다.
최하층은 노예(servi), 그 위로는 피해방인(해방 노예, liberti), 그리고 위에는 자유 시민(cives)이 있었다.
자유 시민은 또 일정한 계층으로 분류되었다.
로마 역사 초기 계층은 로마 창건을 이끈 100명의 가부장 출신의 귀족과 나머지 평민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나중에 공화정 시대에 이 구분의 중요성은 떨어지게 되는데,
일부 평민 가문이 부유해져 정계에 진출했으며, 귀족 계급이 몰락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귀족이건 평민이건 누구나 자신의 가족에서 집정관에 오르면 신 귀족(nobilis)으로 인정받았다.
가령 가이우스 마리우스나 키케로는 이런 유형의 신인(新人, novus homo)으로 이들의 후손은 귀족이 되었다.
그러나 혈통 귀족인 경우 지속적으로 상당한 명성을 유지했으며,
여러 종교 관직에 임명될 수 있는 자격자는 공화정 말기까지 귀족 출신으로 제한되었다.
계층 구분은 원래 군역 할당에 기반을 두었는데, 감찰관이 정기적으로 재산에 따라 각 시민을 특정 계층으로 분류했다.
가장 부유한 집단은 원로원 계급으로, 정계와 군사를 장악하고 있었다.
다음으로는 기사 계급(equites)으로 원래 이들은 군마(軍馬)를 부담할 수 있는 집단을 일컬었으며,
나중에는 유력한 상인 계급을 형성하게 된다.
하위 계급은 원래 군사 장비 구입 수준에 따라 정해졌으며, 최하로는 재산이 전혀 없는 무산자(proletarii)가 있었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이전에 이들은 군대에 들어갈 수 없었으며,
부나 사회의 인식 면에서 피해방인보다 약간 높은 집단 정도로 기록되기도 했다.
공화정 시대에 투표권의 비중은 계층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시민들은 선거 지역구 격인 "트리부스(tribus)"에 등록되어 있었다.
부유한 계층의 트리부스는 재산 수준이 낮은 트리부스보다 인원 수가 적었으며,
무산자 계층 전체에는 트리부스가 겨우 하나 밖에 할당되지 않았다.
투표는 계급 순서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전체 트리부스의 과반에 이르면 투표가 종결되었으므로,
가난한 계급은 아예 투표를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로마는 일부 동맹국에는 라티움인의 권리를 보장했는데,
이 권리는 완전한 로마 시민권과 외국인(peregrini)의 중간 수준의 신분을 의미했으며
로마법이 이 지위를 성문적으로 보장했고, 이들 나라의 최고 정무관들은 완전한 로마 시민권을 얻었다.
라틴인의 권리에는 여러 층위가 있는데, 주된 구분은
"투표권이 있는 시민권" - cum suffragio, 로마의 트리부스에 등록되어 트리부스 민회에 참여할 수 있었다 - 과
"투표권이 없는 시민권" - sine suffragio, 로마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 - 으로 나눌 수 있다.
일부 로마의 이탈리아 동맹국은 BC 91~88년의 동맹국 전쟁 이후 완전한 로마 시민권을 얻었다.
AD 212년 카라칼라의 칙령으로 제국 내의 모든 자유 시민에게 로마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여성은 남성 배우자와 어느 정도 동등한 기본권이 있었으나,
완전한 시민으로 인정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투표를 하거나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다.
가 족
로마 사회의 기본 단위는 가족(가구)이었다.
가족의 개념에는 가부장(pater familias)과 아내, 자녀, 다른 친척이 포함되었다.
상류 층에서는 노예와 하인도 가족의 일부를 이루었다.
가부장은 다른 가족 구성원에 대해 절대권 - patria potestas, 가부장권 - 을 행사했다.
가부장은 결혼 - 보통 돈 때문에 - 과 이혼을 결정할 수 있었고, 자식을 노예로 팔 수 있었으며,
자손들의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주장할 수 있었고,
생사 여탈권까지 있었다. -그러나 BC 1 세기 이후에는 이 생사 여탈권이 금지된다)
가부장권은 성인 아들과 그 가족에 대해서도 행사할 수 있었는데,
아버지가 살아있는 한 그 아들은 가부장으로 인정받지도, 자신의 재산도 가질 수 없었다
로마 역사 초기에 딸은 결혼하면 남편의 가부장 수권(手權, manus)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공화정 말기에 이르면 이런 관습은 낡은 것이 되어, 여성이 친정을 자신의 진정한 가족으로 계속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남성 계통을 기준으로 혈통을 인정했으므로, 모든 자녀는 남편의 가족에 속했다.
서로 혈연 관계가 있는 여러 가족의 집단을 씨족(gens)이라고 했다.
가족은 혈통이나 양자 입적으로 구성되었으나 정치적ㆍ경제적 연대이기도 했다.
특히 공화정 시대에 일부 유력 가문(gentes maiores)은 정계를 지배했다.
고대 로마에서 결혼은 특히 상류 층 사이에서는 낭만적인 결합이기보다는 경제적ㆍ정치적 결합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가부장은 보통 딸이 12 살에서 14 살 사이 나이일 때 사위를 구했다.
신랑은 대개 신부보다 나이가 많았다.
상류 층에서는 여자가 어린 나이에 결혼한 데 반해, 하류층 여성은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에 결혼했다.
교 육
공화정 초기 로마에는 공립 학교가 없었다.
따라서 소년들은 부모나 노예 교사(paedagogi, 그리스에서 기원)에게서 읽고 쓰는 법을 배웠다.
이 시대 교육의 일차적인 목적은 젋은이에게 농업, 전쟁, 로마의 전통, 공무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어린 소년은 아버지와 함께 종교ㆍ정치 활동을 하면서 사회 생활을 다양하게 익혔다.
귀족 자제는 16세에 유력 정치인 밑에서 정치를 배웠으며, 17세부터 군대에서도 활동했다.
- 이런 관습은 제정 시대에도 일부 귀족 가문 사이에서 계속되었다.
BC 3 세기에 헬레니즘 나라를 정복하면서 그리스 문화가 유입되어 교육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지만
그리스의 교육 방식과는 여전히 달랐다고 한다.
부모가 여력이 있으면 7 살 나이의 소년과 일부 소녀들을 집 밖의 사립 학교(ludus)로 보냈다.
이들이 11 살이 될 때까지 교사(litterator 또는 magister ludi)가 기본적인 읽기, 쓰기, 셈법, 때론 그리스어까지 가르쳤다.
12살부터 학생은 중등 학교에 가서 교사(grammaticus)에게서 그리스어와 로마 문학을 배웠다.
16세 나이가 되면 몇몇 학생은 수사학 학교에 갔다. - 이곳 교사(rhetor)는 대개 그리스인 출신이었다 -
이 정도의 교육 수준은 법조인을 지망하는 학생들이 준비했으며, 이들은 로마의 법을 암기해야 했다.
학생들은 종교 축제나 장날 외에는 매일 학교에 갔으며, 여름 방학도 있었다.
정 치
원래 로마는 각 부족에서 서로 돌아가며 선출한 왕이 다스리는 나라였다.
왕권의 정확한 속성은 확실하지 않다.
초기 로마 국가의 통일과 권력과 권위의 살아있는 상징은 왕이었다.
군사 분야에서 왕은 절대적인 명령권(imperium)을 행사했다.
국가 종교의 수장이기도 하였다.
원로원은 왕을 위한 자문 기구였으며, 쿠리아회는 임금이 입안한 법을 정하고 비준할 수 있는 민회였다.
공화정기의 신분 투쟁으로 로마는 로마 특유의 민주정과 과두정이 혼합되었다.
'영어 : republic' 의 어원이 된 '라틴어 : res publica' 는 '공공의 일'을 뜻하는 말이었다.
로마법은 전통적으로 민회에서만 표결로 투표할 수 있었다.(트리부스회)
마찬가지로 공직 출마자도 인민이 선출했다.
그러나 로마 원로원은 자문 기능을 하는 과두적인 정치 기구였다.
공화정에서 원로원에는 강력한 권위(auctoritas)가 있었으나 기능상 자문 기구이므로 입법권은 없었다.
그러나 원로원 의원들은 매우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원로원의 집단적인 의지에 맞서기는 힘들었다.
원로원 의원은 감찰관이 명문 귀족 중에서 임명했는데, 감찰관은 "부도덕한" 행실을 한 의원을 면직할 수도 있었다.
가령 뇌물을 받는다거나 혹은 소 카토가 감찰관이던 시절에 공공 장소에서 자신의 아내와 포옹하는 행위가 바로 그런 경우에 속한다.
나중에 독재관 술라의 개혁으로 재무관은 자동적으로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
로마 공화정에는 엄격한 관료제가 없었으며, 세금도 징세 청부를 통해 거두었다.
재무관, 조영관, 혹은 장관(praefectus) 등 정무관은 본인 돈으로 공무를 처리했다.
시민 개인에게 너무 많은 권력이 집중되지 않도록 정무관은 1 년 임기로 선출되었으며, 동료 정무관과 권력을 분할하도록 하였다.
가령 평상 시에는 최고 권력은 집정관 두 사람이 함께 보유했다.
비상시에는 임시 독재관을 임명할 수 있었다.
공화정 시대에 행정 체제는 필요할 때마다 수 차례 개정되었다.
결국 로마가 크게 팽창하면서 공화정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제정 성립으로 이어진다.
제정 초기는 정부는 공화정의 형태를 가장하였다.
로마 황제는 그저 제 1 시민(priceps)일 뿐이었으며, 원로원은 과거 민회가 보유하던 입법권과 모든 법적 권한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황제의 권력은 점차 전제 권력으로 발전했으며, 원로원은 황제가 임명하는 자문 기구로 전락하였다.
로마 제국은 공화정 시대의 행정 체제를 물려받지 않았는데, 공화정에는 원로원 외에 영속적인 행정 기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자신을 보조하고 조언할 사람들을 임명했지만, 로마 국가는 중앙의 예산 계획 등 행정 부서가 많지 않았다
법
고대 로마의 법리와 사법은 12 표법 - BC 449년 - 에서 시작하여 유스티니아누스 1 세의 로마법 대전으로 이어진다.
로마법은 비잔티움 제국 시대에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으로 존속했으며, 서 유럽 법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넓은 의미로 볼 때 로마법은 17세기 말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적용되었다.
고대 로마법의 주된 구분은 유스티니아누스와 테오도시우스 법전에 수록된대로
시민법(Ius Civile), 만민법(Ius Gentium), 자연법(Ius Naturale)이다.
시민법은 로마 시민에게 적용되는 주요 보통법이다.
도시 법무관(Praetor Urbanus)은 시민들의 송사에 대해 재판권을 가지고 있었다.
만민법은 외국인들이나 외국인과 로마 시민 사이에 적용되는 주요 보통법이다.
외국 법무관(Praetor Peregrinus)은 외국인과 로마 시민 사이의 송사에 재판권을 가지고 있었다.
자연법(Ius Naturale)은 일반적인 의미의 자연법을 포함하며, 외국인과 로마 시민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법이다.
군 사
초기 로마의 군대는 추첨에 의한 징병제이었다.
그러던 것이 국가 로마의 규모가 점차 커지면서 지원제로 바뀌었고,
마침 고도 성장기의 로마에서 증가하고 있었던 실업자의 구제책으로 환영받았다.
로마가 제정으로 바뀌면서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내전으로 엄청나게 커져 있던 군대의 규모를 줄이고, 그때 그때 필요할 때마다 편성하던 방식을 바꿔 상비군 제도로 개편했다.
이 제정 로마의 상비군은 국경 바깥의 이민족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대부분 국경 부근에 배치되었다.
문 화
일곱 언덕이 자리잡은 로마 시는 고대 로마의 중심지였다.
이 도시에는 콜로세움, 트라야누스 포룸, 판테온 등 장대한 건물이 많았다.
분수에서는 수백 마일 길이의 수도관을 타고 운반되어 온 신선한 식수가 솟았으며,
극장, 체육관, 그리고 도서관과 가게, 시장, 상.하수도를 갖춘 로마식 목욕탕도 있었다.
고대 로마의 지배 영역 널리 전원 별장(villa)과 같은 가옥 구조를 볼 수 있었다.
수도 로마에는 팔라티누스 언덕의 궁궐이 있었으며, 하층 평민이나 중류 기사 계급은 도심지의 아파트(insulae)에 살았다.
이런 곳은 상류 층 지주들이 임대료 수입을 얻기 위해 지은 곳이기도 했는데,
콜레기움(collegium)이나 선술집(taberna)이 생활의 중심이었다.
이 곳에 사는 사람들은 무료 곡물 배급을 받으며, 검투사 경기를 즐겼으며,
상류 귀족의 피호민으로 필요할 때 도와주고 지켜주는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언 어
로마인의 모국어는 라틴어로, 이 언어는 이탈리아어 파에 속하며
문법 상 낱말 배열이 상당히 자유롭고, 어간에 붙는 접사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라틴어 문자는 그리스 문자에 기반을 둔 에트루리아 문자에서 나왔다.
현존하는 라틴 문학은 대부분 BC 1 세기부터 쓰인 매우 정제된 문어인 고전 라틴어로 되어 있으나,
실제 구어는 민중 라틴어로 고전 라틴어와는 문법과 어휘가 다르며 심지어는 발음까지 상당한 차이가 있다.
라틴어는 로마 제국의 주요 언어였지만,
로마인이 공부한 대부분의 문학이 그리스어로 되어 있었으므로 교양있는 상류층은 그리스어도 구사했다.
또 제국의 동부 지역에서는 후대 비잔티움 제국 시대까지 그리스어가 라틴어 대신 제 1 언어였으며,
유스티니아누스 1 세가 죽은 뒤 그리스어는 비잔티움 제국 정부의 공식 언어가 되었다.
로마 제국이 확장되면서 라틴어도 전 유럽으로 퍼졌으며,
세월이 흐르면서 민중 라틴어가 여러 지역에서 방언으로 갈라져, 수많은 로망스어로 발전하였다.
종 교
초기 로마 종교는, 최소한 신에 대해서는 글로 쓰여진 이야기가 없으며,
기본적으로 하나의 신념 체계라기 보다는 숭배 의례이며 의식(儀式)에 가까웠다.
그리고 종교의 목적은 의식을 통해 신을 불러내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구하며 보답을 약속하는 일종의 거래였다.
그리스 신화와 달리 로마의 신은 인격화가 완전히 이루어 지지 않았으며., 문, 경계, 꽃, 곡물 등에 서린 정령(numen)을 숭배하였다.
로마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나 장소, 사물에 신성한 혼(genius)가 있다고 믿었다.
공화정 시대에 로마 종교는 사제 직을 갖춘 엄격한 체제를 갖추게 되었으며, 사제들은 원로원 의원 출신이었다.
국가 사제단(Collegium Pontificum)은 종교 제문을 보관하고 종교 의식을 감독하였으며,
가장 높은 성직자는 최고 제사장(pontifex maximus)으로 국가 종교의 수장이었다.
사제(flamen)는 여러 신의 의식을 치렀으며, 복점관(augur)은 점을 쳤다.
렉스 사크로룸(rex sacrorum)은 왕이 축출된 뒤 왕 대신 종교 권한을 얻았다.
그리스 문화를 점점 접하게 되면서 옛 로마의 신은 점차 그리스의 신과 동일시되었다
그리하여 유피테르는 제우스와, 마르스는 아레스와, 넵투누스는 포세이돈과 같은 신으로 여겨졌다.
또 로마의 신은 각자 동일시된 그리스 신의 신화와 속성도 이어받게 되었다.
제정 시대에 로마 사람들은 정복 당한 민족들의 신화도 흡수하여,
외국 신을 모시는 신전 옆에 전통적인 이탈리아 신전이 있는 경우도 생겼다.
최초의 그리스도교 박해는 AD 64년 네로 시대에
로마 대 화재의 주범으로 그리스도 교도를 수색하면서 잔혹한 고문과 태형을 가한 것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에 그리스도교 박해는 극에 달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1 세 시대에 그리스도교는 로마 정부의 지원을 받았으며,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다.
AD 391 년 테오도시우스 1 세의 칙령으로 그리스도교 외에 모든 종교가 금지되었다.
예 술
로마의 회화는 그리스의 영향이 보이며, 남아있는 작품은 대개 시골 별장의 천장과 벽을 꾸미는 프레스코화이며,
라틴 문학 이야기를 다룬 나무나 상아 등에 그린 그림도 있다.
폼페이에서 로마의 그림 몇 점이 출토되었는데, 이를 통해 예술사가들은 로마의 회화사를 네 시기로 구분한다.
로마 회화의
첫번째 양식은 BC 2 세기 초에서 BC 1 세기 초.중반까지 유행했다.
주로 대리석이나 쌓은 돌을 모방한 것으로,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을 묘사한 것도 있다.
두번째 양식은 BC 1 세기 초로, 건축물이나 풍경을 3차원으로 사실적으로 묘사하려 하였다.
세번째 양식은 아우구스투스 시대(BC 27년 ~ AD 14년)에 있었으며, 이전의 사실주의를 거부하고 단순한 장식을 선호했다.
작은 건물 모습, 풍경, 추상적인 디자인을 단색 배경 가운데에 놓았다.
네번째 양식은 AD 1 세기에 시작했는데, 신화의 장면을 묘사하며, 건축물 모습이나 추상적인 문양도 남아 있다.
젊고 고전적인 비례를 쓰던 시기에 흉상 조각은 나중에 사실주의와 이상주의의 혼합으로 발전했다.
안토니누스 황조와 세베루스 황조 시대에 더욱 화려해진 머리와 수염이 유행하였다.
부조 조각도 발전했는데, 보통 로마의 승리를 묘사하고 있다.
라틴 문학은 그 기원부터 그리스 작가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현존하는 몇몇 초기 작품을 보면 초기 로마의 군사적 승리를 묘사한 서사시의 내용을 담고 있다.
공화정기 로마가 팽창하면서 저자들은 시, 희극, 역사, 비극도 쓰게 되었다.
로마의 음악은 주로 그리스의 음악에서 나왔으며, 로마인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로마 군대에서는 투바(tuba, 긴 트럼펫)나 코르누(cornu, 프렌치 호른과 비슷하다)같은 악기를 써서 여러가지 명령을 전달했으며,
부키나(bucina, 호른이나 트럼펫으로 추정)나 리투스(lituus, 긴 J 모양의 악기로 추정)는 의전 행사에 쓰였다.
음악은 원형 경기장에서 검투 막간에 혹은 극장에서 쓰였으며, 코르누와 히드라울리스(hydraulis, 물 풍금의 일종)를 연주했다고 한다.
종교 의식에도 대부분 음악을 연주했는데,
희생 의식에는 티비아이(tibiae, 더블 파이프)를, 주신(酒神) 바쿠스 제의에는 심벌즈와 탬버린을 썼으며,
여러 의식에서 방울을 쓰거나 성가를 불렀다.
어떤 음악사가는 음악이 거의 모든 공공 행사에 쓰였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음악사가들은 로마의 음악가가 음악 연주나 이론에 중요한 기여를 했는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폼페이와 헤라클라네움에서 찾은 낙서, 유곽, 회화, 조각을 보면 로마 사람들은 대단히 성에 개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락 활동
로마의 젊은이는 뛰기, 레슬링, 권투, 경주 등 여러가지 놀이와 체육을 즐겼다.
시골에서 부유 층은 낚시와 사냥도 즐겼다. 로마에는 핸드볼과 비슷한 구기 종목도 있었다.
주사위 놀이, 보드 게임, 도박도 매우 인기 있는 오락거리였다.
여성들은 이런 활동에 참가하지 않았다.
부자들은 저녁 잔치에서 음악, 춤, 시 낭송과 같은 오락을 즐겼다.
평민들은 클럽이나 모임에서 비슷한 잔치를 열기도 했는데, 보통 오락을 즐기는 저녁 식사란 후원을 받아 선술집에서 여는 모임을 뜻했다.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장난감을 가지고 혹은 목마 넘기를 하며 놀았다.
검투는 인기있는 오락이었다.
검투사는 죽거나 혹은 여러가지 시나리오에 따라 갖가지 무기를 들고 "첫 피"를 볼 때까지 싸웠다.
클라우디우스 시대에 검투의 인기는 절정에 이르렀는데, 황제의 손짓으로 경기의 결과를 마무리지었다.
영화에 나오는 모습과 달리, 여러 전문가들은 검투사를 죽이라는 손 동작은 "엄지 손가락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그 손짓이 어떤 것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어떤 전문가는 승자 쪽으로 주먹을 들어 올렸다가 엄지 손가락을 위로 올려서 패자의 죽음을 명령했으며,
엄지 손가락을 들지 않고 주먹을 들어 올리면 살려주라는 뜻이었다고 보고 있다.
동물을 보여주는 것도 인기 있었는데, 외국의 동물을 데려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거나, 투수사와 싸움을 시키기도 하였다.
죄수나 검투사를 무장하거나 맨몸으로 경기장에 놓고 동물을 풀기도 하였다.
대 경기장(circus maximus)도 로마에서 인기있는 장소였는데,
주로 경마나 전차 경주를 벌이는 곳이며, 경기장에 물을 채워 가상 해전을 벌일 수도 있었다.
이곳에는 그 밖에도 여러가지 행사가 많았다.
이 경기장은 385,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으므로, 로마 시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이곳에 왔을 것이다.
대경기장의 경주로 한 가운데에는 각각 일곱 개의 커다란 달걀과 일곱 개의 돌고래가 있는 신전이 둘 있었는데,
선수가 한 바퀴 돌 때마다 일곱 중 하나 씩 없애서 횟수를 표시했다.
스포츠 말고도 대 경기장은 시장과 도박판이기도 했다.
황제 등 정부 고위 인사도 대 경기장 경기를 관람했는데, 경기장에 참석하지 않는 일은 무례한 일로 여겨졌다.
고위 인사, 기사, 그 밖에 경기와 관련된 사람들은 가장 높은 곳의 예약석에 앉았다.
황제가 특정 팀을 좋아하는 것도 부적절한 일로 여겨졌다.
대 경기장은 BC 600 년에 생겼으며, 천년이 넘도록 이어지다 AD 549 년에 마지막 경마 경기가 치뤄진 후 문을 닫았다.
기 술
고대 로마는 인상적인 기술적 업적을 남겼으나, 그 성과는 중세 시대에 잊혀지고 말았다.
로마의 여러 실용적인 기술 혁신은 이전의 그리스의 것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로마의 공학 기술은 군사 관련 기술과 더불어 로마의 우수한 기술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분야이며,
도로, 교량, 수도관, 목욕탕, 극장, 경기장을 건설하는데 기여했다.
콜로세움, 퐁 뒤 가르, 판테온 등 여러 유적이 아직도 로마의 공학과 문화의 증거로 남아있다.
로마는 특히 건축으로 유명하였다.
로마 건축은 그리스 건축과 더불어 고전 건축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로마 건축은 그리스와 여러 가지 차이가 있는데, 로마는 그리스의 엄밀하고 정격적인 설계와 비례를 차용했다.
그러나 새로운 기둥과 지붕 배열 방식인
복합식(composite order)과 토스카나식(Tuscan order) 그리고 에트루리아의 아치에서 배워온 돔 외에는
공화정 말기까지 별다른 건축적 성과가 없었다.
BC 1 세기 경 로마에서 콘크리트가 널리 쓰이게 되었다.
콘크리트는 BC 3 세기 후반에 발명되었다.
이것은 화산회로 만든 강력한 시멘트로, 대리석을 밀어내고 로마의 주요 건축 자재가 되었으며,
여러 건축 방식을 설계할 수 있게 되었다.
또 BC 1 세기에 비트루비우스가 아마도 역사 상 최초의 완벽한 건축 저작인 건축론을 썼다.
BC 1 세기 말에 로마는 BC 40년 경 시리아(혹은 이집트)에서 발명된 취관(glassblowing)를 이용하게 되었다.
모자이크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그리스 원정 당시 견본을 가져오면서 전래되었다.
콘크리트 덕분에 튼튼한 포장 도로인 로마 도로를 깔 수 있게 되었는데, 상당수 로마 도로는 로마가 멸망한 지 천 년 뒤에도 계속 쓰였다.
광대하고 효율적인 제국 전역의 도로망은 로마의 패권과 영향력을 크게 증대시켰다.
로마 도로는 전체적으로 5만 마일에 달하였고, 변방의 도로는 군사 공병 기술자가 축조하였는데 오늘까지도 건재하다.
비트루비우스 저서 12권 1장에 있는 공법을 보면,
맨 아래 기초로 큰 돌 층과 부스러기 층을 번갈아 깔고, 그 위에 모래 층을 펴고,
맨 위에는 다각형 큰 돌의 상부를 갈아서 평평하게 만들어 덮는 것이라고 한다.
원래 로마 도로는 로마 군단이 신속하게 이동하기 건설한 도로였다.
그러나 이 대로는 로마가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데에도 일익을 담당했으며,
교역의 중심지인 로마의 위상을 굳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나왔다.
로마 정부는 역참 제도를 운영하여, 도로 일정한 간격마다 여행자들이 쉴 곳을 제공했으며
필요한 지역에 다리를 건설하여 24시간에 800km를 이동할 수 있는 파발 체제를 마련했다.
로마는 수많은 수도관을 건설하여 도시와 산업 지역, 농경지에 물을 공급했다.
로마 시에는 총 길이가 350km에 달하는 11개의 수도관이 있었다.
수도관은 대부분 지하에 매설되어 있었으며, 아치 수도교는 매우 적었다.
때로는 50m 높이 차가 있는 수도관이 연결되기도 했는데, 이 경우 사이펀으로 물을 끌어올렸다.
로마인은 위생 분야에서도 큰 발전을 이루었는데, 특히 위생과 사교 목적의 공공 목욕탕(termae)을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로마의 여러 가옥에는 수세식 변기와 상수도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도시에 대하 수도(cloaca maxima)가 있어 늪지를 배수하고 티베리스 강으로 폐수를 처리했다.
어떤 역사가들은 상하수도의 납으로 된 수도관 때문에 납 중독이 퍼져
출산율이 저하되고 로마 사회가 쇠퇴하면서 로마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고 추론하기도 했다.
그러나 납 함유량은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수도관은 폐쇄되지 않아 계속 물이 흘러 각 가정과 공공 시설의 배수구로 빠져나갔으며, 수도 꼭지는 많이 쓰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