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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룸
변 재 열
집은 쉼터다
두루마리 화장지 풀려나가듯
일상의 피로 풀려나가는 곳.
닭과 오리
원룸에서 둥지 튼 지
이미 오래다.
아파트 벽과 벽 사이
무너진 공동체
살찐 새들
배만 불러간다.
울림
부름에는
오른쪽과 왼쪽이 있다.
시킴에는
오른팔과 왼팔이 있다.
선택의 방향
서열을 메기려는 증표
등용문은
오른팔이 우선이다.
왼팔에 힘이 실려
어깨 으쓱하는 세상
진정한 불꽃
당신의 울림은
아픔에서의 승리다.
검정 칼새
새는 본능으로 날았다.
보랏빛 저녁노을
이구아수 폭포 하늘을 모자이크한
검정 칼새
파리 떼처럼 날다가
악마 목구멍으로 금세 사라진다.
하얀 폭포 물줄기는
비온 뒤 뭉게구름을 닮아서
변함없는 쌍무지개를 피웠다.
생명을 담보한 위험에도
수직으로 낙하하여
물보라 틈새
아바타 익룡*이
바위에 붙어살 듯
제 집을 찾는 새
오히려 더 안전하단다.
아침 해가 뜨면
어둠 세계 뛰쳐나와
눈부신 하늘에 인사를 한다.
* SF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비행생물. 백악기(1억 2천만 년)전 서식한 펠리칸 턱주머니 구조를 가진 동물.
* 충남 공주 출생, ≪현대문학≫(1981)에 시로 등단, 시집으로 겨울바다, 보이지 않는 강, 멀리서 가까이서,
바람꽃 향기, 빈 잔의 메아리, 만리포 바람소리, 진홍빛 꽃잎, 「가슴 비우기 혹은 채우기」, 충남도문화상,
대전문학상, 한성기문학상 황조근정훈장 수상, 현재 대전시인협회장, 대전지방검찰청형사조정위원, 국제PEN클럽 한국본부남북
교류위원
사랑을 모른다면
이 영 순
사랑을 모른다면
탱글한 껍질에 입술을 대고
능금 한 입 베어 물 수 없다
첫 키스의 야릇한 그 맛
한 낮의 눈길에 애달던 몸 한 조각
흥건히 젖은 옹알이 한 조각
갈증에 파먹던 어둠 한 조각
저마다의 그릇대로
녹이고 지지고 볶다가 태우는 날도
꼭 한 번은 해야 할 이별이 있음으로
사랑의 적자는 피눈물이다
사랑을 해야만 살 수 있어
땅이 루비를 삼키듯
하늘엔 해마다 홍옥이 맺힌다
살아간다는 것
태풍이 지난 후
서 있는 나무들 부르르 떨이를 한다
생으로 넘어져
시뻘건 뿌리 하늘로 뻗친 채
창백한 얼굴로 흙더미 끌어안고
보내오는 싸늘한 침묵
쭉쭉 뻗던 가지들, 오늘은
어깨를 낮춰 고개를 숙이고
누운 나무 위에 후두둑 뿌리는 눈물
마르겠지, 또 내일이면
천지를 흔들던 바람도 잊고
오늘 죽어간 이웃도 잊고
하늘 향해 손을 뻗을 나무다
삶에 신들린 가여운 몸짓이다
* 대전 출생, 월간《문학세계》신인문학상(2001), <꿈과 두레박>, <백지> 동인, 《꿈과 두레박》 회장, ly1103@hanmail.net
가야 되는 길
김 명 동
마음대로 가지 못하는 길을
숫자조차 잊어버리고 싶은
나는 세월에 얹혀 간다
안개 속에 숨은 길을
휘저으며 먼동 트는 새벽
나는 햇살을 불러 간다
초록으로 물든 길을
구름 지우고 천둥소리 들으며
소낙비 불러 물이 되어 간다
세월을 따라
주름 속에 담긴 나이의 숫자를 적으며
보이지 않아도 길이 막혀도
예약되지 않은 종착역을 향해
그래도 나는 간다
사랑 춤
- 화상
뜨거워도
놓을 수 없었던 사랑
시간이
눈 감아도
흘러가는 강물
잎새는
초록옷 벗어 던지고
화려한
외출복으로 갈아입는데
불도 아닌
사랑에 입은 화상 때문에
부풀어 오른 가슴
흉터 남을까
터트리지 못하는 물집
* 경북 상주 출생, 시집 어느 바보의 작은 가슴, 고향은 저만치, 꿈속에 별 달, 그대를 사랑하는 이유, 그리움의 마당에는 당신이 주인입니다, 동구문화상, 예총회장상, 인터넷문학상 등 수상, 현 글빛문학회장, kimydo812@hanmail.net
당당한 겨우살이
권 예 자
겨우겨우 살아서 겨우살인가
겨울 같이 추운 세상 잘도 건너
겨우살이인가
큰 나무에 기생해 살다
나무가 죽으면 따라 죽는 겨우살이
의리 하나는 제법이다
예술작품에 기대 사는 겨우살이
집세도 내지 않고
남의 집에 기생하면서
섣부른 자부심 높고 당당하다
유명인에 붙어사는 겨우살이
부풀리고 뒤틀린 카더라 통신*으로
우아한 겉옷 정숙한 속옷 벗기고 벗겨
속살 만지기 다반사
정신마저 죽이기 수십 번이다
뼛속까지 벗겨진 수치에
허약한 모체가 생을 마감할 때
그 죽음마저 가십거리로 삼는
겨우살이 중 별종 겨우살이
* 직접 확인된 바 없이 단순히 소문만으로 들은 내용을 그대로 보도하는 것을 말함.
셔틀콕
우리는 살기 위해서
맞아야 하는 슬픈 족속 발에 흙을 묻히지 않는
상류사회서 살려면 맞고 또 맞아야해
인사이드 아웃사이드로
수많은 변절은 삶의 궤적
노선을 갈아탈 때마다 느끼는
쾌감은 다음 변절의 디딤돌이지
어떤 이는 가볍게 톡, 톡
승패의 갈림길에선 힘을 다해 휙, 휙
때로는 노선을 잘못 갈아타서
점프스매싱으로 내리꽂혀
땅에 머리를 처박기도 하지
하필이면 아찔한 그 순간에
사람들은 손뼉을 치거나 실망하지만
바닥에 꽂힌 게 내 잘못은 아니지
당신들도 이리저리 길을 바꾸며
상류사회로 가려하잖아
그래도 우리는 후회나 변명은 안 해
어떤 변절도 정당화되는
더 좋은 노선을 탐색할 뿐
※ 대전 출생, 수필《창작수필》, 시《문학저널》등단, 시집『숲이 나를 보고』, 수필집『내안의 피에타』,『봄비, 꽃잠 깨다』,
예술문화상(문학부문), 창작수필 동인문학상, 옥로문학상 수상, bombi42@hanmail.net.
냉동인간
유 문 호
1.
말도 안 되네, 제발, 이런 스트레스를 어쩌면 좋겠나. 생각해보게. 새마을노래가 나온 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나. 그런데 새벽종만 좆나게 울리고 새아침은 전혀 올 생각 없는 비극이 지금, 세상에 우아하게 펼쳐지고 있다는 생각일세. 배는 뒤집혀 산으로 간지 오래고, 억울함을 호소하며 자살한 이는, 세상이 저 때문에 도떼기시장이 되었음에도 말이 없네, 이런 개 같은 세상이 또 어디 있겠나. 이제 희망 같은 건 없네. 창궐하는 역병과 폭력과 거짓말과 좆도 아닌 우리와, 위대한 권력만이 있을 뿐이네. 무엇보다 담뱃값이 백 프로 가까이 올랐다는 건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네. 담배를 가르친 세상이 담뱃값으로 엿 먹인 셈이 아니고 뭐겠나. 젠장. 아무튼 엉망이네, 엉망이야.
자, 진정하고 담배한대 피우시게
고맙네. 어제는 tv를 시청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화살이 날아오지 않겠나, 세상에. 자넨 화살 날리는 tv를 본 적이 있나. 머리와 가슴에 정통으로 두발을 맞았다네. 열 받아서 망치로 tv를 박살내고 있는데, 갑자기 별이 보인다 싶더니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네. 뒤통수를 얻어맞은 게 분명하네. 아내 짓이란 걸 알지만 아무 말도 못했네. 이게 다 그놈의 tv때문일세.
자, 잊어버리고 담배한대 피우시게
고맙네. 아내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네만, 자네 집사람도 밥하다 말고 바가지라던가 밥주걱 같은 걸 날리는가? 아 참, 자네 집사람은 말없이 훌쩍훌쩍 운다고 했지. 미안하네. 내가 깜박했네. 자네도 나처럼 느닷없이 날아오는 바가지라던가 밥주걱 같은 걸로 맞아보게. 가끔 정신이 오락가락 하네. 그런데 말이야 이상하게도 아내가 날리는 바가지라던가 밥주걱 같은 게 이해가 된다 이 말이지. 그리고 이해를 하면 할수록 이 개 같은 세상에 대한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네. 모쪼록 먹고 사는 일에는 누구든지 민감한 법일세.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 열熱 말일세. 이를테면 타는 목마름 같은
알고말고. 자, 담배한대 피우시게.
고맙네. 하루빨리 열을 식힐 줄 아는 지혜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일세. 요즘 들어 걸핏하면 신열이 오른다네. 이대로 가다간 제 명에 못 죽을 게 뻔하네. 암 그렇지 그렇고말고.
2.
그리고
그런 이유로 그는 담배를 끊고 스스로 냉동인간이 되었다.
한 세계에서 다른 한 세계로의 귀환을 꿈꾸며.
바람 부는 날
하루 종일 바람이 불고
이별을 예고하듯
파라락 파르르-르
나뭇잎이 운다
울음, 울음들
그게 한때는 노래였다는 것을
지나간 기억들에 대한
몸부림이란 것을
맥락 잃은 채 바라본다
생각해보면
별일 아닌 별일들이 별일을 만들고
이유 아닌 이유들이 온 우주를 만들며
돌고 돌듯
나도 그렇게 시간을 따라왔다
바람 부는 오늘
저 이별은 짧고
손잡은 기억은 붉다
입술같이 강열하고
붉은 것들이 깔깔거리며
내 앞에서
팔랑팔랑 멀어진다
저렇게 시간을 따라가듯
나를 떠난 사람이 있다
※ 강원 춘천 출생, 시집 『사랑, 지나가다』, 동화 『깃발』등, 현재 ‘빈터’와 ‘a4' 동인으로 활동 중
달팽이 집
송 은 애
그는 가난한 글쟁이였다.
모서리 닳아빠진 원고지에 똥을 싸면
달팽이는 그의 텃밭
시금치에 시금치 닮은 똥을 쌌다.
어미는 두꺼운 갑옷을 던져 버리고
태양 등진 텃밭 그늘로
숨어들고
가난은 자꾸만 햇살 따라
힘든 어깨를 짓누르다
어느 날
훌훌 털어버린 맨 몸으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 어미의 집을 탐닉하다
길을 잃고
물빛 그림자
아침이면 그 길을 간다.
물빛 그림자 흔들거리며
발목 잡는 그곳
저 편 아래
어미는 슬픈 눈으로 두 손 모아 힐끔거리며
안타까운 마음을 전한다.
흔들거리는 물빛 그림자는
어미의 삶 그 자체였기에
그 느낌은 내게 전해져
모습 그대로 전수하고 있다.
흔들림의 본질을 찾아
모태의 양수 속으로 들어가면
그 깊은 속내를 알 수 있을까
대물림의 자연스러움은
늘 물빛 그림자처럼 흔들리지만
거부할 수 없는 존재의 이유다.
새벽의 눈
밤새 뒤척였다.
가로등도 나를 따라 뒤척였다.
어제 떠난 그가 돌아 올 것 같지 않은 예감 때문에
어미는 젖을 물린 채 잠이 들었고 아이는 그를 만나 눈빛을 초롱거렸다
뒤척인 밤이 오늘을 혼돈하며 고개를 흔들고
이유는 알 수 없다. 목적 또한 알 수 없다
다만 거부할 수 없는 현상임을 확인한다.
그 맑은 눈에 던질 수 없는 돌
차라리 껴안고 내가 돌아간다.
뒤척인 거슬림을 안고
내가 내가 돌아간다.
엄마 고무신
그날 밤엔 유난히 더웠다.
어매는 삼베저고리 다듬고 있었고
곁에서 잠든 아이는 더위도 잊었다.
신고 떠날 댓돌 위 고무신은 흔들어대며 울었것만
아이는 잠속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아니, 깨어나지 않았다.
고무신 떠난 그 자리엔 토끼풀도 자리 못하고
밤새 비단결 바람이 스쳤다.
먼 훗날, 기억 속 창고 안에 비집고 들어선
고무신 한 켤레
그나마 위로가 되는 또 하나의 마음이다.
* 茶軒, 시집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 이름 없는 들꽃 이야기, 다래순 먹는 여자, 관저동 연가,
술 예찬 꽃 예찬하면서 茶 한 잔, 인연, sea5610@hanmail.net
풀잎
박 헌 영
괴로웠다
괴롭고 괴로웠다
물도 넘기지 못하고
경전도 다만 글자였다
몇날 며칠을 소리 없이 비명 지르다
화단가에 쓰러졌다
눈을 떠 보니
풀잎이었다
아무렇게나 돋아나
허공을 찌르는 초록,
초월도 해결도 아니었지만
순간
나는 나의 힘이 되었다
괴로움 여전했지만 몇 순간은
견딜 수 있었다
눈물 위
더는 갈 데 없이
웅덩이에 모인 꽃잎.
또 한바탕
모지락스런 빗발에
남은 꽃잎마저
나무에서 쫓겨난다.
먼저 온 꽃잎
나중 온 꽃잎
옹송옹송
구석진 웅덩이에서
얇은 몸 서로 겹쳐
새 꽃밭이다.
눈물에 빠지지 않고
눈물 위에서.
내 하늘의 가을
눈감고 올려다보는 너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눈뜨고 바라보는 너는
얼마나 멀리 있는가
봄날의 첫 눈길을
그대로 간직한 채
단풍나무는 이제
잘 익은 붉은 마음을
가슴 밖으로 내놓는다
가을 맑은 오전에
하늘을 올려다보는 이여
해보얀 구름 한 송이
저 흘러가는 대로
마음 맡겨라
사랑에 닿아도
불타지 않고
막막함에 닿아도 미소 짓는
그 노을빛에 물들 것이니
너를 수놓던 내 하늘에
가을이 왔다
눈감고 올려다보는 너는
얼마나 눈부신가
※ 전북 부안 출생, 시집 나 사는 집, 하늘빛 숨, 아이와 함께 가며, 그대 없이 그대를 사랑합니다,
저 나무 내게 동행하자 한다, 철이네 엄마아빠, 거품의 힘 ,붉은 꽃잎에 쓰다, 한 사람에게만 흐르기에도 강물
은 부족하다, 시 선집 「즐거워라, 죽으러 가는 저 물소리」등, parnee@hanmail.net
가창오리를 보라
백 경 화
금강 철새 도래지
수십만 마리 가창 오리떼
파란 하늘에다 그림을 그린다
고래도 그리고 가오리도 그리고
연필로 점 점 찍으며 그리듯
흑백으로 그려 낸다
낮에는 수면위에서 동동 떠다니며
행군을 하다가
해질녘이면 일제히 일어나
한바탕 비행하며 묘기를 부리다가
순식간에 어디론가 떠나간다
수십만 마리 중에 하나의 불상사 없이
비행하는 질서와 정서
혼을 불어넣은 예술이다
두 세 사람만 모여도 갈 길이 달라
서로 삐걱대는 인간들
여기 가창오리를 보라
은사시 나무
지난여름
반짝반짝 빛나는 너의 자태와
사그락 사그락 거리는 정다운 노래가
내 마음 흔들어 놓더니
오늘은
잔설 속에 서 있는 너의 하얀 속살이
내 마음 몽땅 빼앗아 가는 구나
키나바루 정상에서
이틀을 토악질하고
기진맥진하여 올라간
해발 4101미터 키나바루 정상
표지판 앞에서 푹 쓸어졌다
심한 고소공포증에
가까스로 올라선
정상의 팻말을 끌어안고
엉 엉∼
큰 소리로 울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일행도 따라 울었다
한없이 솟구치는 눈물
오늘 알았다
슬픈 눈물은 두고두고 시린 가슴을 적시고
기쁠 때 나오는 눈물은
한꺼번에 왈칵
뛰는 가슴 시원하게 적셔 준다는 거
독버섯
산길 걷다보면 음습한 곳에
색깔 예쁜 독버섯 즐비하다
아는 사람
본체만체 그냥 지나치지만
모르는 사람
유혹과 호기심에 한번 먹어보다가는
다시 못 올 길 가게 된다
겉모양 아름답고 입맛 돌게 보이지만
속은 독기로 가득하다
이 세상 어디 산에만 독버섯 있는가
전국 방방곡곡 뿌리내리고
날로 번식하는 독버섯
빨리 멸종 되어야 믿고 살 수 있는
평화로운 세상이 될 텐데
※<문학세계>(2001) 시 등단, 저서. 백경화의 산행기『산의 향기를 찾아서』(2003), 대전문인협회 회원, 대전국제펜문학 회원,
꿈과 두레박 회원, (사)한국사진작가협회 회원.
새처럼
조 영 숙
어미 새가 먹이를 줄 때
새끼 새가 입을 크게 벌리듯
나의 소원을 하늘에 아뢸 때
입을 크게 열리라
새끼 새가 날기를 연습하다
떨어지며 마침내 창공을 날 듯
수천 번 넘어지며 걷기를 배우듯
배우고 익히며 도전하는 자유로운 영혼 되리라
공중의 새들이 무얼 먹을까
염려하지 않고 노래하며 살 듯
일용할 양식을 위해
근심 하지 않고 찬송하며 살리라
새끼 새를 태양에서 보호하기 위해
한나절 넘게 제 몸을 세워
그늘을 만드는 백로처럼
위험에서 자녀들을 지켜내리라
추위를 피해 고향으로
돌아가는 철새처럼
그날이 오면 미련 없이
본향으로 돌아가리라
아픈 사랑
당신의 사랑은 그분의
사랑을 닮았습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잘 섬기면
당신은 행복을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먼저 나를 사랑했습니다.
사랑받을 자격을 갖추지 못했지만
당신이 사랑한 것처럼
나도 당신을 사랑해달라고.
많은 사랑을 받았음에도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화를 내고 책망했습니다.
나는 반성하고, 회개하고 당신께
돌아가지 못하고 변명하며
불평했습니다. 잘하는 것도 많다고
당신은 분노했습니다. 당신이
베푼 희생적인 사랑을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보며.
당신의 사랑은 그분의
징계를 닮았습니다.
심판에
뜻이 있지 않습니다. 당신의
뜻을 깨닫고 돌아서라는
사랑의 속삭임입니다. 내게는
천둥처럼 들릴지라도.
힘들었지만 나는 당신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나의
가던 길을 멈추고 당신을 생각함으로.
당신은 쉽게 당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내게
그루터기만을 남겨 다시 시작하라고.
바로가 모세의 제안을
몇 번의 재앙으로
받아들였더라면
열 번의 재앙, 아니 열한 번째
수장까지 멸망당하지 않았을 텐데.
소는 한 번 빠진 웅덩이에
다시는 빠지지 않는다는데
지키기 어려운 일 하라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행하지 못하니 당신의
마음 얼마나 아팠습니까. 해야 할 줄 알면서
행하지 않은 것을 참회합니다.
당신은 끝까지 나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사랑은 그분의
사랑을 닮았습니다.
※ 강원도 강릉 출생, 경희대 신문방송학과 대학원 수료, <글샘회> 동인, 양평문협회원, ysc1951@naver.com
햇귀
강 인 구
먼동을 열며 배시시 웃는 햇귀
풀잎에 맺힌 이슬을 밀어
또르르 또르르 아침을 연다
어둠도 아침에는 천사가 될 수 있다니
시간이 흐르면
아픔도 새가 되어 날아오를 수 있을까?
희미했던 남산이
검은 옷을 벗고
붉은 단장을 하고 파랗게 다가온다
개미다리를 가진 숨찬 사람들
대문이 열리면
거리로 눈부시게 쏟아지겠지
억새꽃
사각 사각
은빛 손들어 환호하는
흰 꽃무리의 군상
사각 사각
하얀 손들어 열광하는
휘황찬란한 군무
사각 사각
은빛 깃 군모를 쓰고 사열하는
질서정연한 군인들의 행진
사각 사각
승리의 깃발아래
영광을 축하하는
환희의 송가
* 충남 서천 출생, (전)초등학교 교장, kik4219@naver.com
돈 샘이 있다면
김 창 유
돈 샘이 있다면
퀄퀄 쏟아지지 않아도
쫄쫄쫄 겨우겨우 흘러도 좋다.
넘치지 않고
메마름으로 생채기 나지 않으며
갈급한 이웃에겐 한 모금씩 나눠 마실 수 있는
그런 돈 샘이면 어떠리
어질고 부지런한 이들에게는 더 많이 샘솟고
어려운 이들에겐 단물이 되었으면 좋겠다.
욕심으로 오염되지 않고
서로 나눔으로 목마르지 않으며
쉼 없이 솟아나는 맑은 돈 샘이었으면 좋겠다.
우편함
행여 좋은 소식 있으려나
까치소리가 아침을 연다.
어린 시절
따스한 계란 생각에 암탉 둥우리를 넘겨보듯
오늘도 아파트 우편함에 손을 넣어 본다.
따뜻한 계란은 잡히지 않고
묻고 물어 찾아온 고지서와 청첩장이 주인을 기다린다.
진 빚 갚는 가벼운 마음이긴 하지만
쫓기고 힘겨운 세월 탓인가
정겨운 손 글씨는 어느 새 사라지고
온통 범람하는 기계 글씨가 각박하기만 하다.
퇴색된 까치 울음도 귀하지만
정겹고 포근한 소식들은 언제 또 오려나.
* 충남 서천 출생, 한국 공무원문학협회 회원, kcy42@hanmir.com
봄처녀 이야기
김 근 수
첫사랑 수줍은 향기
뚝뚝 떨어지는 강가에
맑은 바람을 안고
따스한 봄의 전설 불러본다.
봄 처녀 나물바구니
한 아름 잡아타고
겨우내 참아 온 그리움
은빛 물꽃 그리는 곳.
소풍 나온 소년 소녀
놀다 간 자리
그들의 숨은 이야기
강물 따라 번져온다
이제는 강물에 담아야 한다.
목련 사랑
바람에 꽃잎 하나
수줍은 수채화로흘리는 미소는
눈물인가 향기인가
당신 닮은 목련은내 가슴에
탐하고픈 달콤한 유혹으로
아름답게 피어오지만
지난겨울 바닷가에서
보았던 긴 생머리
은밀한 미소는
아직 사랑이 내리고 있는지.
녹색화원
녹색 화음 차오르는
차분한 정원에
싱그러운 화초들이수줍게 피어 오른다.
풍만한 아름다움에
야들야들 취해 보며
녹색의 정다움을
가슴 깊이 사랑한다.
빛깔의 무한한 힘으로
모든 것을 자유롭게 만든다.
초록의 축복으로
눈과 마음을 치유한다.
* 계간 문학세상 신인상, 금강축제 금강문학상, 한국농촌문학상 대상, <한국문학신문> 대전광역시 본부장,
문화체육관광부 ‘책 읽기 캠페인’ 초청 작가, 시집 유천동 블루스, 오월의 연가, powerg@choi.com
그들은 오늘도 불멸을 꿈꾼다
이 완 형
그들을 찾는 일은 결코 어렵지 않다
늘 그랬던 것처럼, 그들이 방문하는 횟수가 잦아서다
혈육처럼 다가서는 그들의 움직임은
365일 현금자동지급기보다도
푸성귀를 싫어하는 개의 혓바닥보다도
인육, 인과, 인즙에는 별 뜻이 없다
그래서 그들의 일과는 잔인하다 못해 매혹적이다
그들이 요구하는 첫째 조건은 신선한 육신과의 조우다
그 어느 종족도 감당할 수 없었던 수 세기 동안을
선혈 채집으로 이어오고 있다 ‘아이구 이놈의’로,
어김없이 반복되는 살충제의 효력도
최첨단 방어벽도 무용지물
그들은 오늘도 불멸을 꿈꾼다
문명의 이기는 그들에게 최적의 공간,
최상의 삶터
그들에겐 저지선이었던 겨울도
난공불락이었던 기류도
개별난방과 엘리베이터가 새로운 해법이다, 더더군다나
황열병·말라리아·사상충증·뎅그열은
그들의 든든한 후원자
그러니, 숙주가 가득한 아파트와
선혈 채집에 변동이 없는 한,
그들에게 불멸은 없다
터널을 통과하는 법
그곳에선 누구라도 말을 아낀다
바삭 마른 숨소리 때문에
서로 마주 보는 일조차 없다
삼키고 내뱉기를, 씹지도 않고 반복하지만
단 한 번 탈이 난 적도 없다
충혈 된 두서너 개의 눈들만이 추근추근,
뒤를 밟을 뿐이다
세월을 핥아낸 대형 환풍기와
노란 조명들이 집어삼킨 불빛들을 촘촘히 토해내는 그곳,
버스가 울컥, 제 몸을 주체하지 못해 거칠게
그렁그렁 거리면
할딱대던 28인치 TV도
엉겨 붙는 시(時) 공(空) 성(聖) 속(俗)에 묻히고
눈 감은 자가 절반도 넘는다
어머니를 곱게 묻고 올 때도
태반은 눈을 감고 있었는데, 아직은 아닐지라도
환속할 시간이 다가올 것이다
물속 같은 침묵이 계속되면
한 번도 물은 적은 없지만
집에 가는 방법을 곰곰이 뒤집어야 하고
운전기사의 눈과 백미러 속에서 마주쳐야 한다
그럴라치면, 소리 없는 세상이 원망스럽다
잠이 없는 내가
바보스럽다
좋은 날
큰 아제가 웃어죽어요. 혼사 때도 그렇게 웃진 않았어요. 꼬박 1년을 키운 검뎅이 도야지는 벌써부터 자기 몸을 뎁히고, 지짐이 냄새에 동네 사람들이 들떠 있어요. 에고 에고 곡소리도 맑아요. 작은 아제 실소가 곡소리만큼 연방이에요. 연탄불 뒤 화투판에서는 사내들이 웃음꽃을 팔아요. 고모가 그 웃음꽃들을 소쿠리에 고스란히 담아 오면 셋째 아줌니는 통째로 막걸리 속에 퍼 담아요. 엄니는 시집올 때보다 더 부산스러워요. 큰 오라비 장가가는 날 장보는 것 같아요. 할머니는 사진 속에 있어요. 할머니 앞에 그렇게 많은 음식이 차려진 건 처음 봐요. 셋째 아제는 할머니한테 삿대질까지 해요. 손끝에서 웃음이 막 묻어 나와요. 이장 아제 눈에서는 도깨비불이 보여요. 김씨 아제 카메라에선 섬광이 뿜어지고요. 아제들이 정장처럼 차려 입고 이곳저곳을 서성여요. 웃음꽃이 에고 에고를 삼켜버려서 더 이상 어두움은 없어요. 집 전체에선 컵라면과 커피 냄새가 날을 밝혀요. 화투판도 더 늘었어요. 아무도 들지 않던 할머니 방에서는 웃음꽃이 가득한 가족들이 누워있어요. 할머니가 십년이나 누워 있던 방이에요. 할머니 냄새도 안 나요. 코를 쥐던 둘째 아줌니도 이제 웃어요. 재떨이가 재수굿판 같아요. 첫째, 둘째 고모부도 덩달아 웃음꽃이 폈어요. 웃음꽃이 가득한 상여에 만국기처럼 지폐가 날려요. 할머니는 일곱 매듭을 하고는 그렇게 아끼던 집을 비웠어요. 삼일 내내 웃음꽃을 팔던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요. 아제들의 웃음꽃만은 아직도 그대로 예요. 꼭 할머니 사진에 낀 주름만큼만 남았어요.
* 충남 보령 출생, 문학박사, 배재대 국문과 겸임교수, 소설 순수, 노래방 전설 등 다수, lwh825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