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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동북청년회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햇살한줌
6. 어떻게 찬양 해야 하나?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습니다.
찬양의 방법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시는 성령님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찬양하기를
원하시는지 성경을 찾아봅시다.
손을
드는 것은 찬양의 일반적인 형태로서 성경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느 8:6, 시
28:2, 63:4, 134:2, 141:2, 딤전 2:8 등등)
당신은 왜 성경이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
손을 들라고 하는지 생각해 보았습니까?
그럼 하나님께서 왜 이런 찬양의 모습에 감동받으시는지
보겠습니다.
먼저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던 구약의 성막으로 돌아가
봅시다.
민수기 7:89은 이 성막을 "회막"이라고
불렀습니다. 거기서 모세는 하나님께 말씀
드렸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모세에게
말씀 하시고자 했음을 알려 줍니다. 사무엘상
4:4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룹 사이에
계심"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룹들의
날개는 속죄소와 증거궤 위에 펼쳐졌고 날개의
끝은 서로 맞닿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손을
들 때 우리의 행동은 그룹의 현대적 표형으로서,
우리의 벌린 두 팔은 그들의 날개와 같은 것이라고
마음속에 그려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만나 주겠다고 말씀하신 곳은 바로
그 그룹의 날개 사이, 즉 우리의 올려진 손
사이입니다. "여호와께서 두 그룹 사이에
계시므로 그 이름으로 일컫는 궤라"(대상
13:6). 우리가 하나님께 손을 들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함께 교제하게 됩니다.
손을 드는 두 번째 이유를 나는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의 아들은 아장아장 걸으면서 아빠를 반갑게 맞이합니다. "아빠, 저를 안아 주세요!" 그는 내가 안아 주기를 바랐습니다! 꽉 껴안아 주기를 바랐습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하나님께 손을 들 때는 저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를 안아 주세요! 저를 하나님 가슴까지 꽉 안아 주세요!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싶어요!" 개인 기도 시간에 우리가 손을 드는 세 번째 가치를 발견하였습니다. 손을 들고 기도하면 기도에 보다 집중할 수 있고 마음이 이리저리 분산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찬양 드릴 때 많은 사람들이 산만해지는 것을 걱정하는데 두 손을 올리는 것은 이때 도움이 됩니다.
세
번째, 만약 어떤 사람이 등에 권총을 대고
"야, 꼼짝 마!"라도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아마 당신은 손을 번쩍
들 것입니다! 그것이 총잡이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자세입니다. 손을 올렸을 때가 가장 무방비로
공격당하기 쉬운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싸움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주먹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하여 팔을 내려 가슴을 가릴 것입니다. 우리가
팔을 꼬고 있다는 것은 스스로를 방어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손을 높이 드는 것은
성령님께 우리 마음과 삶을 열기 원한다는
것을 하나님께 보여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하기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
입니다. 만일 우리가 찬양과 경배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길 원한다면 스스로를 방어하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싶은 곳까지 들어오실 수 있도 록 해드려야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회중들이
팔을 모으고 있거나 또는 높이 들거나 하는
겉모습을 통하여 그들이 하나님을 향해 얼마나
열려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손을 올리는 행위에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
가운데 행하신 모든 역사를 받아들인다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축구 선수는 공을 잡기
위해 손을 벌립니다. 공을 잡기 위해서는
아주 좋은 자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손을 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모든 것을 가까이 받아들인다는 표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하나님을 의심하며 하나님과 더불어 싸움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자신보다는
그들의 상황을 잘 알고 계시다는 것과 선을
위하여 그들의 삶 가운데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손을 들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얼마나 큰지를
보이게 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일반화된 찬양의 또
다른 표현은 손뼉을 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오직 한 구절에서 직접적으로 손뼉치며 찬양하는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시
47:1). (나무들이 손뼉을 치는 구절도 있습니다,
시 98:8, 사 55:12 참조) 손뼉을 친다는 인용
구가 많지 않다는 사실은 이것이 찬양 형태로서
비교적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찬양할 때 손뼉을 치는 행동은 분명 올바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손뼉 치는 것을 때때로
너무 과도하게 사용하거나 너무 강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전에 손뼉을 요란하게
치며 탬버린을 치는 찬양 예배 참석한 적이
있는데 모든 요란한 소리들이 멈추자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었습니다. 마치 "소리 나는
구리"나 "울리는 꽹과리"와
같았습니다. 찬양의 깊이가 없습니다. 단지
소음이었습니다. 손뼉을 칠 때는 하나님께
올라가는 우리의 마음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 없이 쳐대는 손뼉은 그야말로
공허한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의 찬양 형태를
연구 해 보면 손뼉 치는 것이 박자를 맞추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손뼉을
치는 행위는 오히려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만드는 또 하나의 형태입니다. 히브리 민족은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표현할 때 매우 시끄러웠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찬양할 때 요란하게 표현하는
것은 아주 좋습니다. 우리 심령이 하나님 찬양
하는 일로 뜨거워져 있다면 자연히 손뼉을
치는 것 같은 크고 즐거운 형태로 찬양을
드리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하기 바랍니다.
찬양은 소음 그 이상으로 구성 되어 있으며
하나님께 반응하는 심령의 깊은 곳까지 도달해야
합니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을 찬양할 때 악기를 연주했다는
구절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많은 소책자나
논문들이 왜 오늘날에는 교회에서 악기를 사용할
수 없는가에 대하여 토론하고 있지만
대부분 이런 글들은 악기사용을 금하는 교회의
전통 속에서 자라난 사람들에 의하여 씌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에서 악기를 사용하여
찬양 드리는 기쁨을 빼앗아 버린 고립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불쌍한 마음이 듭니다.
한편, 악기에 너무 의존한 나머지 음악이 멈추면 찬양과 경배도 즉시 멈추게 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찬양을 돕기 위하여 악기 사용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좋은 음악에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음악적 감각을 갖도록 창조하셨습니다. 또한 음악에 대한 올바른 반응이 찬양의 형태를 갖추도록 보여 주셨습니다. 구약은 악기가 단순히 예배 때 반주하는 것 이상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악기를 연주하는 그 자체가 경배인 것입니다.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 으로... 소고 치며 춤추어... 현악과 퉁소로... 큰소리 나는 제금으로...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시 150:3-5).
찬양의
또 다른 모습은 서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막에서 하나님은 많은 기구들이 지정된 대로
제작되어 장막 안에 배치되도록 자세히 지시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신 기구가
하나 있는데, 바로 의자입니다!
제사장들은
자신들의 일을 완수할 때까지 하나님 앞에
계속 서 있어야 했습니다.
서 있는 자세는
오늘날 신약 시대 제사장들인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매우 적합 한 자세입니다. 성경은
서 있는 자세가 찬양과 경배를 드리기에 좋은
자세임을 많은 구절을 통해 알려 주고 있습니다(대하
5:12, 7:6, 29:26, 시 135:2, 계 4:9 - 11).
일어서서 찬양하는 것은 특별히 두 가지 강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존경을 나타냅니다.
만일 우리가
고위 인사들과 회동한 자리에 대통령이 나온다면
우리 모두는 그 직위에 대한 존경으로 자리에서
일어설 것입니다. 그렇다면 형제들이여, 우리가
만왕의 왕이 신 그분의 임재를 축하하기 위해
모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하늘 나라의 경배 모습을 보면 왕은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은 그
보좌 둘레에 서있습니다. 그분은 앉아
계시고 우리는 서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서 있는 자세는 깨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저는 앉아 있을 때 예배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집니다.
제 마음은 멍해지고 헤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찬양해야 할 시간에 이상한 생각들이
끊임없이 몰려옵니다! 사탄의 운동장은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사탄은 쓸데없는 생각으로
경배 시간이 산만해지는 것을 매우 기뻐합니다.
성경은 경고합니다.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 4:27). 서 있는
자세는 정신적으로 깨어 있어서 사탄의 계략에
넘어가는 것을 막아 줍니다. 찬양이 신바람나고
진지하다면 회중들은 앉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배가 지루해지면 힘없는 파리처럼
떨어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서 있는 것과
찬양드리는 것은 상관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서 있으면 우리의 정신이 자극을 받아 깨어서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무릎
꿇는 것, 허리 굽히는 것,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는 것. 이러한 자세들은 찬양과 경배에
매우 적절한 모습입니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시 95:6).
"또
이십 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계19:4).
요한계시록
전체에 나타난 하늘에서의 분명한 경배 모습은
엎드려 절하는 것입니다.
많은 찬양들이
경배드릴 때 우리가 하나님께 절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찬송을 부르면서
그러한 경배 모습을 보여 주는 교회는 거의
없습니다.
의자에 앉아서 "십자가
군병들아 주 위해 일어나" 하고 노래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매우 좋은
방법입니다.
만약 손 드는 것에 대해
노래한다면 하나님께 손을 드세요. 허리를
굽혀 절하는 것에 대해 노래한다면 그렇게
하세요
어떤
교회들은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경외하는 마음의 차원으로 들어가는
데에는 문제가 있는 것을 봅니다. 성경의 한
구절이 이 두 문제를 특이하게 하나로 묶어
놓고잇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시 2:11).
우리의 기쁨과 즐거움은 높으신 하나님 앞에서
사랑과 두려움이라는 두 가지 태도에서 흘러나온
것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노래한다는 것은
아마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가장 보편적인
찬양형태일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노래하라고 수도 없이 권고하기 때문에 더
이상은 성구를 인용하지 않겠습니다.
특히 시편은 이러한 권고들로 그득한 창고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질문할지도 모릅니다. "그냥
말로만 찬양할 수는 없나요? 왜 노래로 찬양해야
되나요?" 그 대답은 음악의 아름다움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모여서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를 중얼거린다고
합시다. 이것은 우리에게 그다지 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단순한 단어들이 감미로운 곡조와 조화를 이루면
어떤 일이 생길지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
가슴은 하나님을 향해 고조되고 우리 영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감동받을 것입니다.
이것은
일 더하기 일이 셋이 되는 '초이성적 경험'입니다.
가사와 음악이 합해지면 단순히 가사와 음악을
합해 놓은 것 '이상'의 무언가를 경험하게
됩니다.
가사가 매우 의미 있는 것일지라도
그 가사가 근사한 곡조와 조화되었을 때 노래
내용은 더욱 의미심장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우 특별한 은사로서 이 음악이라 는 전달
매체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찬양드릴
때 음악이 우리 마음을 여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까?
말할 것도 없이 귀에 들리도록 해야 합니다.
찬양은 그것이 들려서 귀에 전달되고, 목소리로
나타내지기 전까지는 찬양이 아닙니다.
"주님의 찬양을 크게 선포하오니(proclaiming
aloud your praise)"(시 26:7, 개역 성경은
이것을 "감사의 소리를 들리고"
라고 번역하였다. - 역주). 아들 요엘이 기저귀
떼는 훈련을 할 때 우리 부부는 요엘이 변기를
사용할 때마다 긍정적 강화를 주기 위하여
칭찬을 해주었습니다. 마약 우리가 그저 요엘을
바라
보면서 참 잘했다고 생각만 한다면
요엘은 더 오랫동안 기저귀 신세를 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칭찬의 생각을 찬양의 도구를
사용하여 말했을 때 요엘은 호의적으로 반응하게
되었습니다. 칭찬은 목소리로 내기
전까지는 사실상 칭찬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들 역시 그것이
찬양이 되려면 귀에 들려야만 합니다.
찬양이
찬양 되기 위해서는 표현되어야 합니다(워십댄스). 청각적
찬양의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시각적 찬양입니다.
찬양은 청각적이거나 시각적이어야 합니다.
찬양은 말로 표현되거나 아니면 발랄한 몸
동작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침묵하며 춤추는 행위가 왜 찬양의 적절한
형태인지를 설명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춤추는
것은 찬양의 진정한 표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댄스가 찬양의 합당한 방편인가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지만 언뜻 성경 색인을 뒤져 보아도
댄스는 성경 전체에서 발견되는 단어입니다.
출애굽기 15:20 - 21, 사무엘하 6:14 - 16,
시편 30:11, 149:3, 사도행전 3:8을 참조하십시오.
어떤
목사님은, 성경에는 오직 한 번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춤을 추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것도
법궤를 가져 올 때였다고 말함으로써 댄스에
대한 문제 의식을 제기합니다. 그러므로 댄스는
우리 예배에서 찬양의 표현으로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는게 그의 주장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댄스가 외부 사람들에게 '우습게' 보인다는
이유로 문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찬양 표현들이
그렇듯이 결국 이러한 표현들은 외부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일단 우리가 합리화하기 위하여 성서적인 개념들을
무시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곤란한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춤추는 것이 모든 예배의 한 부분이
돼야 한다
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홍해를
건넌 후에 미리암은 이스라엘 여인들을 춤추도록
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적인 '애굽
군대'들을 방금 전에 익사시키셨다면 우리도
춤을 추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홍해의 경험을 많이 하지는 않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순간이 온다면
적절한 방법으로 기꺼이 반응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만약 한 개인이 자기의 경건 시간에 춤을 춘다면 문제삼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회중 가운데서 춤추는 것이 개인 삶의 방식과 일치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이분이 개인 경건 시간에는 정말 춤추는 것을 허용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이 갑니다. 그는 회중 예배에서 춤추는 것을 거의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의 주장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드럼 치는 사람이 드럼을 자기 경건의 시간에 치지 않으면 예배에 사용할 수 없다는 말입니까? 개인 기도 시간에 손뼉을 치지 않는 사람은 찬양드리면서 손뼉을 칠 수 없단 말입니까? 비록 춤추는 것, 손뼉 치는 것, 악기 연주하는 것들이 개인 경건 시간의 정규적인 부분은 아닐지라도 그것들은 두말할 것도 없이 회중 예배에 있어서 찬양의 매우 적절한 방편들입니다. 개인적인 경건의 삶과 회중 예배의 역동성은 전혀 별개의 것입니다.
어떤
민족에게 춤추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찬양
형태입니다. 그들에게 댄스를 강조 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나는 '춤추는 사람'
이 아니기 때문에 춤추는 것을 강조하지는
않습니다. 때때로 하나님 앞에서 춤밖에는
내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다고 생각할
때 나는 춤을 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추지는 않습니다.
어차피
사람들 앞에 보이기에는 너무 어설픈 춤이니까요.
나는 보이기 위해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하나님께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춤을
춥니다. 그러나 훈련되고 능력 있는 댄서가
춤으로 찬양드리는 것을 볼 때는 매우 즐겁습니다.
어떤
교회는 '무용단' 사역을 합니다. 훈련된 댄서들이
노래에 맞춰 안무한 춤을 춥니다. 만약 예배
때마다 무용단이 사역한다면 회중들은 금방
무용에 식상해질 것입니다. 그런 준비된 무용은
가끔씩 공연되어야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무용단은 매우 효과적으로 사역하지만,
어떤 무용단은 단순히 춤을 좋아하는 젊은이들을
모아 놓음으로써 마치 교회가 그들 욕구의
배출구처럼 여겨지게 만들 때도 있습니다.
춤은 단순히 춤추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활동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춤은 하나님의 사역이
되어야 하며, 춤추는 사람은 신체의 우아한
동작을 통해 경배드리는 다른 사람들의 영감을
고취시킬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지녀야 합니다.
춤은 너무나 현저히 드러나는 것이라서 춤추는
사람들의 기교와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것 이상으로
예수님만을 높여 드리는 진정한 사역이 되기가
힘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귀한 열매의 보상이 있기 때문에 도전해 볼
만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안무된 무용은 예배를 산만하게 한다고
지적합니다.
마음을 하나님께 상달되게
하기보다는 무용단이 회중의 관심을 끌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무용단 사역이
어떤 때는 자신들에게 축복이 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똑같은 무용단의 사역인데도 경배를
산만하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무용단이 뮤지컬이나
특별한 때에만 공연하고 회중 예배에서는 자연적으로
나오는 개인적 표현만을 허용함으로써 균형을
맞추는 교회도 있습니다. 뮤지컬이나 공연은
회중 들이 보고 은혜받을 수 있다는 기대로
무대에 올리게 됩니다. 이때 무용단이 눈에
띄게 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일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만 초점이 맞추어져서 드려져야 합니다.
그런데 몇몇 사람들이 이러한 목적에
어긋나는 무용단을 발견했습니다.
따라서
무용단이 있는 교회들은 다른 방법을 선호하는
교회들에 대하여 우월감을 갖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무용단을 갖고 있는 것이 오늘날 가장
진보적인 교회라고 생각하는 올무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어떤 교회들은 진정 자유롭고 영적이기
위해서는 춤을 추면서 자유함을 얻어야 한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현명한 목사라면 회중들
가운데 관대함의 분위기를 조성해서 춤추는
데 아직은 어색해 하는 사람들이 어떤 위협감
이나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해줄 것입니다.
춤추는 것의 이점은 신체적인 자유함입니다.
춤은 우리의 거부감을 제쳐놓고 온몸으로 행할
것을 요구합니다.사도 바울은 이 진리를 비추는
흥미 있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고전 15:46). 순서는
첫째가 육이요 그 다음이 영입니다. 우리가
뒤이어 따라오는 영적 자유함을 안다면 먼저
육신적 자유함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목적은
영적 자유함이지만 때때로 그것은 육신적
자유함이 없고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손을 드는 것, 허리를 굽히는 것, 춤을 추는
것 등은 매우 가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우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 12:30). 그렇다면
우리 중에 몇명이나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전심으로, 온 힘을 다해 표현하려고
했습니까? 춤추는 것이야말로 그 한 방법이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전심으로 춤을
추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을 충분히
표현할 다른 방법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온 힘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기 원하는 사람이
회중 앞에서 바닥에 엎드려 팔 굽혀펴기를
몇 번 했다면 어떻겠습니까? 그것은 온 힘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서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그러나 춤은 성서적입니다.
우리는 매우
육적인 피조물로서 하나님은 우리가 여, 혼,
육을 모두 사용하여 하나님께 찬양드릴 때
기뻐하십니다.
춤추는
사람들이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뛴
후에는 똑바로 걸으세요"입니다.찬양
댄서들은 좀더 보수적인 방법으로 찬양드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당연히 주의를 많이 받게 됩니다.
때문에 실제 생활에 있어서 영적인 삶이 계속되지
않는다면 즉각적으로 비난을 받습니다. "저
자매는 여전히 담배를 피우면서도 마치 자기가
이지상에서 완전한 성도인 것처럼 춤을 추고
있군 그래." 그러나 성경은 어디에서도
찬양을 드리기 전에 인간이 어떤 영적 수준에
도달해 있어야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우리는
우리가 '영적'이기 때문에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시기 때문에
찬양드리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들은 나중에
뒷감당할 일을 염려해서 교회에서 춤추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전에 얼마나
많은 보수주의가 그들을 사로잡고 있었습니까?
시체를 일으키는 것보다 열광하는 사람을 억제하는
것이 쉬울 것입니다. 너무도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신체인 자유함을 기꺼이 풀어놓지
못한 탓에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는 단계에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저는 춤을 추지 않거나
또는 춤추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사람들에게 엄중히 경고합니다. 춤에 대해
반대하는 말을 조심하십시오! 만약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것을 저주함으로써 누구도
복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궤에
손을 대고 죽은 웃사를 보십시오. 하나님께
속한 것에 손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멈추려고 할 때 우리
속에서 무언가가 영적으로 죽을 것입니다.
춤춘다는
것은 그 자체가 스스로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춤이 가져다 주는 영적
자유함은 매우 귀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육신적으로 주저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영적으로도 하나님 앞에서 주저하는
것이 있다는 표시입니다. 만약 우리 마음 가운데
움츠러드는 것이 있다면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범위를 제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적 제한을 벗어 버리고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춤출 수 있을 만큼
단순해진다면, 우리의 영적 제약은 무너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서 보다
자유롭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외치는
것도 찬양의 한 형태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권하고 있습니다.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시 47:1). 킹 제임스 역(KJV)은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만들라(Make
a joyful noise unto the Lord)" 라고
번역한 시편의 여러 구절들이 NIV에서는 "하나님께
즐겁게 외칠지어다(Shout to God with cries
of joy)라고 더 정확하게 번역되었습니다(시
66:1, 81:1,95:1 - 2, 98:4 - 6, 100:1 참조).
할렐루야"의 어원인 히브리어 "힐렐"은
"크게 외치다 또는 큰소리가 터지다,
특히 기뻐 외치다"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아주 무거운 기운이 흐르고 있는 한 교회의
경배 세미나에 참석했을 때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그분의 임재 속에서
승리의 소리를 크게 외치기 전까지는 성령
안으로 돌진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소리
높여 외치면 찬양할 때 우리는 놀라운 해방감을
맛보았으며 그 해방감은 세미나의 마지막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전쟁 때 소리지르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들이 목소리를 높여 소리지를 때 적들은
무서워 떨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이 외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리고 전쟁에서 이 외침이
이스라엘에게 어떤 승리를 가져다 주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찬양의 외침이었습니다!
형제 자매들이여, 모임에서 찬양의 외침 소리가
멈추었다는 것은 교회에 매우 슬픈 일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것도 하나님께 찬양드리는 아름다운
방법입니다.
방언과 함께 예수님께서 그의
교회에 주신 성령 세례의 귀한 은사들을 우리가
얼마나 소중히 하고 있는지요, 우리가 직접
영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표현할 수 있을 때
얼마나 아름다운 자유함을 맛보게 되는지!
아직 방언의 자유함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 경험을 정말 사모할 것입니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으로 찬양하는 축복을알기
전까지는 찬양에 있어서의 어떤 역동성과 흐름도
상실되어 있을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찬양을 드리든지 우리는 우리의 전존재로
찬양드려야 합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시 103:1).
마가복음
12:30에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가장 귀한
계명에 대하여 강조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찬양의 절정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시편 103:1을 노래할 때 종종 사람들이
확신 없는 태도로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고 찬양하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사랑하는 청년들이여, 이제는
그런 상투적인 빈 말로 찬양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말을 우리의 넘쳐 흐르는
마음을 표현하는 육신적인 표현으로 강조해야
할 때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찬양하느냐 하는
것의 기본입니다. 즉 우리 속에 있는 모든
것으로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