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저 강물에 달 뜨거던...
 
 
 
 

회원 알림

 

회원 알림

다음
 
  • 방문
  • 가입
    1. 붕붕아
    2. 유청산
    3. 별의미소
    4. 무심
    5. 채호준
    1. 보운 김달선
    2. hamlet
    3. 이종식T2UE
    4. 이종율
    5. 달마
 
카페 게시글
사찰의 상징물 스크랩 경주지역에 남아있는 신라 귀부(龜趺)
普願 추천 0 조회 103 16.06.23 20:0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경주지역에 남아있는 신라 귀부(龜趺)

 

 

  태종무열왕비 귀부의 옛모습

 

   

 

귀부(龜趺)란 거북모양을 한 비석받침돌을 말한다.

 

비를 세울 때는 아래에 비석받침을 두고 그 위에 비를 세우며 비 위에는 머릿돌(이수)를 덮는 것이 일반적인 형식이다.

 

신라시대의 비석받침 형상은 거북이 몸체에 거북이머리를 표현하였으나 통일신라에서 고려를 거치면서 귀부는 상당한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8~9세기지나면서 거북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으로 변하고, 조각도 사실적인 형태에서 점차 위엄있고 추상적인 형태로 바뀌었다. 따라서 고려시대에는 몸체는 거북의 형태 그대로이나 머리는 거북머리에서 점점 용의 형태로 변해 구신두용(龜身龍頭)의 형태가 주종을 이루었다.

 

12세기경에는 비석받침이 거북이형태에서 벗어나 대석(臺石) 형태로 바뀌면서 귀부는 차츰 사라진다.

 

조선시대에 와서 귀부가 만들어지는 예는 극소수이며, 만들어졌어도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답습하나 퇴화되고 도식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귀부(龜趺)의 구조와 명칭

  

 

귀부는 거북 모양의 등에 긴 네모모양의 받침(碑座)을 마련하고 그 위에 비신(碑身)을 꽂아 세우는 것은 중국 당()나라 때부터 성행을 했다고 한다 

 

왜 하필이면 거북을 비좌로 삼았을까? 

중국의 설화에 의하면 "용생구자(龍生九子), 즉 용에게는 9명의 자식이 있는데, 첫 번째의 아들을 비희(??)라고 한다. (?)는 '큰 거북'이고, (?)는 '힘쓰는 모양'이라는 뜻이니 힘을 쓰는 큰 거북이라는 뜻이  된다. 비희는 몸통과 등은 거북을 닮고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을 좋아하여 석비의 받침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거북은 수명이 길어 장수와 영원, 길상(吉祥)을 상징하는 신화와 전설상의 신령스러운 동물로 기린, 봉황, 용과 더불어 4(四靈)이라 불린다 

5,000살 먹은 거북은 신귀(神龜)라하고 10,000살 먹은 거북은 영귀(靈龜)라고 하는데, 이렇게 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비석의 받침돌이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시대에 비석을 세울 때에는 일반적으로 땅에 묻거나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였으나. 통일신라 이후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귀부를 비좌로 삼게 되었고, 그뒤 조선시대까지 석비(石碑)의 전형적인 형식이 되었다고 한다.

비석은 비에 적혀 있는 명문을 통해 조성연대를 알 수 있어서 당시의 조각양식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경주지역에는 국보 25호로 지정된 태종무열왕비(太宗武烈王陵碑)를 비롯하여 11기의 귀부(龜趺)가 남아 있다 

태종무열왕릉비, 김인문 묘 앞의 서악리 귀부, 성덕왕릉 귀부, 흥덕왕릉 귀부, 고선사지 서당화상탑비 귀부(현 국립경주박물관내), 사천왕사지 동.서 귀부, 창림사지 귀부, 천룡사지 귀부, 황복사지 귀부, 숭복사지 귀부(현 국립경주박물관), 무장사지 아미타 조상 사적비 이수 및 귀부 등 11개이다. 

 

또한 경주와 인접한 포항 신광면 법광사지에 쌍거북 귀부가 있으며 내남면 이조리 최진립장군 신도비의 귀부는 최근 발표된 연구에 의하면 통일신라때 만들어진 귀부라고 한다. 

 

특이한 귀부는 분황사 당간지주의 간대이다. 당간을 받치는 간대가 귀부로 되어있는데 우리나라 당간지주 중에서 유일한 형태이다.

 

법광사지 귀부와 최진립장군비, 분황사당간지주 귀부를 포함시키면 모두 14기가 된다 

이 중에서 숭복사귀부, 창림사지 귀부, 무장사지 귀부, 법광사지 귀부는 쌍거북으로 된 귀부이다

 

 

 

 

(1) 태종무열왕릉비-국보 25

 

 

이수

 

귀부

 

신라 제 29대 태종무열왕릉(太宗武烈王陵)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아담한 전각이 있고 그 안에 거북 모양의 능비가 있다. 현재는 귀부(龜趺)와 이수(?首)밖에 남아 있지 않다.

거북은 목을 길게 쳐들고 힘차게 뒷발로 땅을 밀어 전진하는 형상으로 늠름하고 힘찬 모습이다. 비석 머리에 뒤엉킨 여섯 마리 용은 여의주를 물고 승천이라도 할 기세로 동양에서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 꼽힌다.

 

능숙한 기법으로 새긴 거북이의 발이나 등, 용틀임의 자태는 사실의 극치이자 진취적인 기운을 한껏 뿜어낸다

문화재청의 안내문에도 "조각된 돌거북은 목을 높이 쳐들고 발을 기운차게 뻗으며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으로 신라인의 기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비는 표현이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있어 우리나라뿐 아니라 동양권에서 가장 뛰어난 걸작이라 일컬어지는 작품이다" 라고 적혀있다.

 

 

 앞발                                                                   뒷발

 

 

흥미 있는 사실은 귀부의 발가락인데 자세히 보면 앞발의 발가락은 다섯이고 뒷발가락은 넷이다 

무엇 때문에 뒷발은 네 발가락으로 했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거북의 등에 무거운 물건을 올려놓으면 뒷발의 발가락 하나를 안으로 집어넣고 버틴다는 견해, 즉 무거운 비석과 이수를 받치기 위해 발가락 하나를 집어넣었다는 설명과 거북이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뒷발의 마지막 발가락을 지렛대처럼 하기 위해 안으로 꺾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수의 체액

 

태종무열왕릉비’(국보 제25)의 이수(용머리) 부분에 남아 있는 전액.

  太宗茂()大王之()’라고 82행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는데

  삼국시대 이전에도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서체와 서풍을 보여주는 현침전 계통의 전서체 글씨이다

  균일한 필획의 굵기에다 좌우 대칭의 글자구조는 같고 송곳처럼 필획의 끝이 뾰족하고 탱탱한 형태는

  국내에서는 이 비석이 처음이다.

 

 

머리돌인 이수의 중앙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 쓴 글씨는 당대의 명필이자 태종무열왕의 아들인 김인문의 글씨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귀부의 길이는 333cm, 86cm, 높이 254cm, 이수 높이 110cm이다.

비신의 파손으로 본문 글씨는 온데간데 없지만 같은 시대에 세워진 문무대왕비’(681)김인문묘비’(7세기 말)의 본문 글씨로 유추해보면 굳세고도 단아한 구양순체의 해서풍임으로 짐작이 된다.

 

당시 고박한 고신라 서풍에서 탈피하여 해서의 규범으로 제시된 당풍을 주체적으로 소화해내면서 한국서예의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 것이라고 한다

 

이 귀부(龜趺)661이라는 확실한 연대가 있어 더욱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근간에 영기문 학설(靈氣紋 學說)을 열심히 주장하는 모 학자는 무열왕귀부에 대해  

'처음에는 얼굴이 언뜻 보면 거북의 얼굴 같지만, 입에서 영기문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므로 용의 얼굴임을 알 수 있다. 몸체 또한 용이며, 실제로 용의 등에 비석을 올려 세우려 하면, 용의 몸이 길어서 세울 수 없다. 그래서 거북이의 등을 빌려와서 넓은 비석 받침을 마련하고 그 위에 안정감 있게 비석을 세운다 

그런데 등은 거북의 등 모양은 틀림없지만, 실은 육각수문(六角水文)으로 이루어져서 '물'을 상징하고 용의 본질이 '물'이므로 서로 상응하여 비석의 받침으로 삼아, 그 영화된 물에서 연꽃이 피어나고 그 연꽃모양 영기꽃에서 비석이 영기화생하는 광경을 나타내려 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다'라고 주장을 하지만 아직 학계에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는 무열왕릉비의 작은 파편 2점을 보관하고 있다. 이 가운데 한 점은 1936년 왕릉 근처에서 발견된 바 있어 비석은 일제강점기 이전에 이미 파손된 것으로 보여진다.

 

 

 

   

(2) 서악리 귀부(김인문묘 귀부)-보물 70

 

 

김인문 묘와 귀부전각

 

김인문 묘의 귀부

정면모습

 

뒷면의 귀갑무늬

 

 

서악리 태종무열왕릉의 남쪽 길 건너편에 남아있는 것으로,삼국사기의 기록이나 서악서원의 영귀루 북쪽 받침에서 찾아낸 비석조각에 새겨진 글로 미루어, 김인문(629694)의 공적을 새겨놓았던 비의 받침돌인 것으로 짐작된다.

 

네 발로 힘있게 디디고 있는 받침돌의 거북은 목을 앞으로 길게 빼고 있다.앞 뒷발의 발가락이 모두 5개인 것이 다를 뿐 기교면에서 태종무열왕비의 귀부와 쌍벽을 이루고 있으며, 목에 새겨진 다섯가닥의 목주름은 사실적이면서도 자연스럽다.

 

거북의 등에 새긴 큼직한 육각무늬 역시 조각솜씨가 뛰어나며, 등 주위에 새긴 구름무늬와 그 바깥쪽에 구슬을 꿰놓은 듯한 무늬를 돌린 것은 독특한 모습이다. 등중앙에는 비를 꽂아 두었던 네모난 홈이 마련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거북받침돌의 양식적인 변천을 볼 때, 9세기 부터는 거북의 머리가 용의 머리로 바뀌게 되는데, 서악리 귀부는 거북머리의 원형을 잘 지니고 있어, 한국 석비 받침돌의 최초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만들어진 연대는 삼국통일 후인 7세기 중반으로 추정하고 있다.

 

 

   

(3) 성덕왕릉 귀부

 

귀부의 정면

(뒤쪽에  성덕왕릉이 보인다)

 

귀부의 귀갑무늬(귀부의 뒷면)

 

 

통일신라 성덕왕(재위 702737)의 능 앞에 세웠던 비석의 받침으로, 성덕왕릉의 남쪽 약 100m 지점 논 가운데 있다. 

성덕왕은 신문왕의 둘째 아들로, 형인 효소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그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비는 원래는 비몸과 그 위에 머릿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모두 없어지고 지금은 이 받침돌만 남아 있다. 받침의 거북은 목이 부러졌으며, ·뒷발에는 날카로운 발톱이 새겨진 발가락이 있다.

앞 발에는 5개의 발가락이, 뒷 발에는 4개의 발가락이 새겨져 있다.

거북의 등에는 6각형의 귀감 무늬를 새겼으며, 가운데 비을 꽂았던 네모난 홈이 파여 있다 

 

거북의 등에 새긴 귀갑무늬나 당초덩굴무늬를 통해 8세기 전반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비록 비몸과 머릿돌이 없어졌으나 왕릉을 만들 때 이용된 거북받침돌의 제작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삼국사기에 "경덕왕 13(754)에 성덕왕릉에 비()를 세웠다."라는 기록이 있어 이 귀부는 신라에서 가장 찬란한 문화의 꽂을 피웠던 경덕왕(신라 제35대 왕)시기에 왕이 아버지 성덕왕(신라 제33대 왕)을 위해 세웠으므로, 그 시대의 예술적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여 조성하였을 것이며 현재 남아있는 귀부의 일부분을 보아도 신라에서 가장 화려한 귀부였음을 알 수 있다.

 

<관련자료 :성덕왕릉  http://blog.daum.net/kinhj4801/15961309>

 

 

  

 

(4) 흥덕왕릉 귀부

 

 

 

신라 귀부?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신라 제42대 왕인 흥덕왕(興德王)은 소성왕(신라 제39대 왕)과 헌덕왕(신라 제41대 왕)의 동생으로 헌덕왕의 뒤를 이어 826년에 왕위에 올라 죽을 때까지 10년간 재위하였다. 그의 왕비 장화부인(章和夫人)은 소성왕의 딸이다

 

경주의 외곽지인 안강에 흥덕왕릉이 있고 귀부는 흥덕왕릉의 앞의 왼쪽 소나무 숲속에 있다.

 

손상이 매우 심하고 비신(碑身)과 그 위에 놓인 이수가 없어졌지만 귀부 자체만으로도 거대하며 경주지역에서는 가장 컸던 귀부로 보인다.

 

19778월에 국립경주박물관과 사적관리사무소의 발굴조사시 상당수의 비편에서 흥덕왕릉임을 입증하는 비편이 발견되어 흥덕왕릉임을 입증하게 되었다. 태종무열왕릉과 더불어 무덤 주인이 정확한 능이다.

 

 

  <관련자료 : 죽어서도 사랑하는 이와 함께-흥덕왕릉  http://blog.daum.net/kinhj4801/15961633>

 

 

 

(5) 황복사지 귀부

 

 귀부 1

 

 

 귀부 1의 등(귀갑)에 쓰여있는 왕(王)자

 

귀부 2

 

복사지 구황동 3층석탑 동남편 30m 떨어진 논 길가에 머리가 잘린 귀부 2좌가 나란히 남아 있다  

2기 모두 머리부분은 사라지고 몸체도 파손이 심하여 일부분만 남아있다

 

앞쪽의 귀부는 등의 귀갑문양에 ()자가 선명하게 나타나 있어, 王師(왕사)의 공덕비, 혹은 탑비나 사적비의 귀부일 가능성이 높으나 비편이 발견되지 않아 확실히 구분하기란 어렵다.

또 다른 1기 역시 비좌 일부만 남아있으며 비좌아래 연화문이 잘 나타나 있다.

 

 

 

(6) 사천왕사지 귀부 (. 西 2)

 

서쪽 귀부의 정면

 

옆면

 

거북 등의 귀갑문과 당초문

 

 

사천왕사지의 당간지주 동쪽 약 25m지점 에는 동,서로 2기의 귀부가 있다. 비신과 이수는 사라지고 없으며 머리바져 잘라지고 몸둥이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거북등의 가운데 있는 비좌(碑座) 둘레는 연화문을 아름답게 장식 하였다. 거북의 등에는 육각형의 귀갑무늬는 정교하고 아름다우며 귀갑문 아래에는 당초문(唐草文)으로 테를 돌렸으며 특히 꼬리조각은 일품이다.

 

서쪽 귀부는 근래에 아래의 부분이 노출되어 전체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데 대체적인 규모는 길이 약 210cm, 160cm에 귀부의 등에는비좌 주변의 연화문과 귀갑문, 당초문이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동쪽 귀부의 정면

 

뒷면

 

석받침대의 연화문양

 

동쪽 귀부는 머리만 결실되었을뿐 대체로 완전한 편이며 크기는 길이 약 210cm, 175cm로 서족 귀부에 비하여 폭이 조금 넓은 편인데 사실적인 표현수법과 등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솜씨는 신라시대의 뛰어난 작품임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로는 동쪽귀부에는 사천왕사사적비가 있었고 서쪽 귀부에는 문무대왕릉비명이 있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 사천왕사지에서 발견된 거북형 귀부머리. 

사천왕사지에 있는 두 기의 귀부 중에서 서쪽에 있는 귀부의 머리로 추정되고 있는데  

초기에는 거북모양의 형태가 주류를 이루나 

신라 후기로 가면서 점차 용의 머리로 변화해나가고 있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문무대왕 비편 

정조대왕 20(1796) 경주 부윤 홍량호에 의해 낭산 선덕여왕릉 아래쪽에서 발견된 

문무왕의 비편으로 잘려진 비의 아랫부분. 

 

  

 

(7) 고선사지 귀부

 

 

면                             비좌                          뒷면

 

 

1977, 암곡동에 덕동댐이 조성되면서 고선사지가 수몰이 될 처지가 되자 삼층석탑과 함께 옮겨져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뒷 뜰에 전시되어 있다.

이 귀부의 머리부분은 결실되어 없고 몸통부분만 남아있는데 귀부의 등에는 구름문양의 귀갑문이 새겨져 있으며 비신받침은 단엽의 연화문을 새기고 홈을 파 비신을 세우게 하였다.

전체 길이는 1.6m이며 비신자리에 난 구멍의 크기는 길이 53cm, 너비는 13cm이다

 

이 귀부는 원효의 후손 설중업이 원효대사를 추모하기 위하여 각간 김원승의 후원을 얻어 건립한 선사탑비로 고선사에 세워졌으며 원효의 치적을 적은 서당화상비로 추정되고 있다

<관련자료 : 고선사지삼층석탑 http://blog.daum.net/kinhj4801/15961356>

  

 

 

 

(8) 무장사지 귀부

 

비신이 사라지고 머리가 잘려나간 귀부의 앞면

 

 

암곡동 골짜기 깊은 숲속에 방치되었던 것을 보물로 지정되어 보호 받고 있으나 최근 훼손이 아주 많이 되었다

이 비는 신라 제 39대 소성왕(재위 799800)의 왕비인 계화부인(桂花夫人)이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아미타불상(阿彌陀佛像)을 만들면서 그 과정을 자세히 기록한 아미타불조상사적비이다.

 

두 마리의 거북이가 나란히 앉은 쌍귀부로서 머리는 둘 다 잘려 나갔으나 발가락 조각이 비교적 정교한 편이다이수는 용이 앞발로 여의주를 잡고 있는 모양으로 살아있는듯한 생생한 모습으로 표현 되었다.

일부 잘려진 이수의 앞 뒤면에는 2마리의 서린 용[蟠龍]이 구름무늬 속에 장식되어 있는데, 앞발로 보주(寶珠)를 서로 빼앗으려는 듯이 머리를 쳐들고 있으며 용머리 사이로는 직사각형의 편액(偏額)이 있다.

편액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는 여섯 글자를 이행으로 새겼다는 견해가 있으나 현재 선명하지 않아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형의 대좌 위에 마련된 귀부의 발은 이미 형식화되었으며 두 귀부의 등위 중앙에 비신을 세우기 위한 장방형의 비좌 를 마련하였고 비좌의 네 면에는 한 면에 3구씩 십이지신상 을 조각하였다 이처럼 귀부에 십이지신상을 조식한 것은 다른 곳에서는 발견된 바 없는 특이한 경우이다

 

 

비석 밭침대의 12지상

 

 

무장사지 아미타조상사적비의 이수는 통일신라초기에 조성된 신라 태종무열왕릉비의 이수와 9세기 후반 최치원이 찬한 숭복사지비(崇福寺址碑)의 이수와는 다른 양식을 보여 주고 있어 통일신라기 이수의 변천을 파악하는데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2008년 11월 20일  귀부영 골짜기에서 귀부의 머리부분 파편이 발견되었다

 

 

<관련자료 : 삼국통일 후 무기를 보관한 무장사지 http://blog.daum.net/kinhj4801/15961359>

 

 

 

 

(9) 숭복사지 귀부

 

 

 

 

 

 

비석받침대의 조각

 

 

이 귀부는 원래는 외동읍 말방리 숭복사지에 있었던 것이나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와 정문에 들어서면 성덕대왕신종 앞 정원에 전시되고 있다

 

진성여왕10(896)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이 귀부는 창림사지 귀부와 포항시 북국 신광면 비학산 법광사지 귀부와 비슷하나 동일한 시대인지는 확실치 않다.

 

두 마리의 거북이를 한 개의 대석 위에 설치하였으며 각 龜甲 등에는 1개의 장방형 碑座를 통해서 조성 하였으며 龜頭는 약간 비스듬히 서로 상대하게 균형을 유지한체 직립한 형태로 표현 하였고 입부분에 약간 파손이 있을 뿐 완전한 형태이다. 앞 오른쪽 발가락은 4기의 발톱으로 조각 하였으나 앞의 왼쪽 발과는 달리 살짝 발가락을 들고 있는 것이 다른 귀부에서 볼 수 없는 또 하나의 특이한 점이다. 조성시기는 대체로 통일신라 9세기말경으로 추정된다.

 

 

  숭복사지 비편

 

숭복사지는 근래까지 그 절터가 어디인지 알지 못하다가 1931년에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19311935년 사이에 발견된 비편(碑片)을 통하여 이곳이 숭복사터임을 알 수 있었다. 이 숭복사 비편은 그 뒤로도 절터와 골동품점 등에서 잇달아 발견되어 현재까지 13편을 헤아리게 되었고, 총 약 100자에 달하는 글씨가 판독되었다

 

 

 

 

 

(10) 창림사지 귀부

 

 

 

 

 

 

 

 

남간사터에서 포석정쪽으로 가는 길에 창림사지가 있다

 

신라의 시조왕인 박혁거세거서간과 왕비인 알영부인이 이곳에서 자라 왕위에 올랐다고 전해지는 창림사 자리는 곧 신라최초의 궁궐터라고 할 수 있다. 서라벌(徐那伐)을 세우고 금성에 궁궐을 지어 옮기기까지 25년 도합 38년 정도를 박혁거세가 이곳에서 생활을 했다. 

 

창림시지삼층석탑 아래쪽 비교적 평평한 자리에 아주 이색적인 쌍귀부가 가장 있다. 옆에는 민묘가 있고 건물터였음을 알게해 주는 여러 개의 초석들이 주변에 흩어져 있다 

 

모죽임한 방형대석 위에 비신도 없어지고 몸체만 남아 있으나 두마리의 귀부가 나란히 붙어있는 쌍거북이다. 거북은 머리를 치켜들고 힘차게 걸어가는 모습으로 생동감이 있으며 조각이 매우 사실적이고 친근감있는 귀부이다등위에는 비석받침이 있다.

 

비신에는 대 서예가로 유명한 김생(金生)의 글씨가 새겨진 비문이 있어 당(唐)나라에까지 알려 졌다고 하나 지금은 없어졌다.

 

머리부분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창림사지 귀부의 머리(국립경주박물관)

 

 

   

(11) 천룡사지 귀부

 

 

 

귀갑의 무늬

 

당간을 꽂기위해 파놓은 홈

 

 

남산 고위산에 위치한 천룡사지에도 특이한 귀부가 있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귀부는 비석을 세우기 위한 대석용으로 제작이 되었으나 천룡사의 귀부는 당간을 받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귀부(龜趺)이다. 즉 거북의 등에 긴 장대모양의 당간을 꽂아 세우고 당을 건 당간지주의 받침돌을 거북모양으로 다듬은 것이다.

 

많이 파손되었으나 형태는 알 수 있는데 등에 새겨져 있는 무늬 역시 다른 귀부에서는 볼 수 없는 형태의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사각의 대석 위에 거북이가 앉았는데 등에는 직육각형의 귀갑문이 새겨져 있고 그 위에 대형의 복련 연꽃잎 4장을 사방으로 덮었다. 그 위에 또다른 4장의 연꽃잎을 아래의 연꽃잎과 어긋나게 새기고 하나의 꽃잎 속에 2송이의 보상문을 도드라지게 새겨놓았다.

 

가운데에는 동그란 형태의 높은 받침석이 있고 그 안에 무언가를 고정시키기 위한 둥근 홈이 파여져 있는 것을 보아 비석을 세웠던 귀부는 분명히 아니며  석당의 간대석으로 학계에서는 추정하고 있다. 분황사 당간지주의 간대석이 거북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홈의 크기가 조금 작지만 석등의 하대석일 경우도 배재할 수는 없다. 석등의 하대석이 거북으로 표현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주위에 흩어져 있는 석조(石槽), 대형맷돌, 원형주초 등의 석조물로 보아 통일신라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12) 분황사 당간지주 귀부

 

 

황사 당간지주

 

 

 

 

황룡사지와 분황사 사이에 있는 분황사당간지주이다. 두 지주 사이의 간대로서 형상이 거북이 형태이며 당간이 놓이기 쉽게 등에는 평면이로 치석이 되어 있다

일부가 파손되어 잘려나가고 없으나 형태를 알아 볼 수가 있다. 당간이 놓이는 네모부분에는 빗물이 잘 빠지도록 홈을 파놓았다 

당간의 ?침돌로 돌거북이가 배치된 것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관련자료 : 분황사 당간지주 http://blog.daum.net/kinhj4801/15960827>

 

 

 

 

 

(13)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최진립장군 신도비의 귀부

 

 

 

 

 

내남면 용산서원 입구 최진립장군 신도비각 안에 있으며, 태종무열왕릉 귀부와 형식이 거의 같다.

심지어 앞발가락과 뒷발가락의 숫자까지 같으며 귀갑 아랫부분의 구름문양도 흡사하다.

 

최근에 신라고고학 전공자들인 이은석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예실장과 조현경 우리문화재연구원 조사원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최진립장군은 조선시대의 명장이지만 그의 신도비 귀부는 7세기 후반 작품으로 간주되는 경주 사천왕사터 신라시대 귀부와 거의 동시기이거나 8세기 중반 성덕왕릉 귀부보다는 이른 시기로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된다고 발표한 바 있다.

 

귀부는 전체 크기가 너비 190, 길이 200, 높이 60이며 거북 머리 길이는 70.

 

 

<관련자료 : 내남 이조리 귀부 http://blog.daum.net/kinhj4801/15960230>

 

 

 

 

 

 

 

 

쌍거북비석받침대를 만든 이유는?

 

 

 

포항 신광면 법광사의 귀부

 

 

숭복사지, 창림사지, 무장사지, 법광사지의 비석 받침대는 쌍거북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쌍거북귀부가 있는 사찰들의 공통된 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모두 신라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찰이라는 점이다.

 

숭복사는 원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절이고, 창림사 일대는 박혁거세(재위 BC 57~AD 4)가 세운 신라 최초의 궁궐터라고 알려져 있으며, 무장사는 태종무열왕(재위 654~661)이 삼국을 통일한 뒤 병기를 숨겼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다. 또한 법광사도 신라 진평왕(재위 579-632) 때 세워진 그의 원당사찰(願堂寺刹)이므로 이 절들은 모두 신라 왕실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로 유추해볼 때 아마 왕실과 관련된 비석이라 좀 더 화려하게 꾸미고 싶은 욕망에 더욱 정성을 들여 쌍거북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